30개 도시로 읽는 세계사
 
지은이 : 조 지무쇼(역:최미숙)
출판사 : 다산북스
출판일 : 2020년 07월




  • 이 책은 ‘세계 주요 도시의 역사’라는 익숙하고 흥미로운 출발점에서 세계사 공부를 시작한다. 역사 공부는 선사시대부터 시작해서 현대에 이르는 역사를 일률적으로 암기해야 한다는 고정관념에서 벗어나,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공간인 ‘도시’의 역사를 중심으로 세계사의 주요 흐름을 단순 명쾌하게 풀어낸다.

    총 30개 도시를 다룬 30편의 글은 각 도시의 전문가들이 언제든 가볍게 펼쳐, 읽고, 기억하고, 학습할 수 있는 최적의 분량에 맞춰, 세계사의 전체 맥락을 이해하기 위해 꼭 알아야 할 역사 지식을 엄선하고 감수했다. 하루 한 도시 부담 없이 역사 여행을 마쳐나가다 보면, 어느새 어렵고 복잡하게만 느껴졌던 세계사의 전체 흐름이 한눈에 보일 것이다.



    30개 도시로 읽는 세계사


    예루살렘_ 고난의 역사가 새겨진 성지

    기원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분쟁의 기원

    2017년, 미국의 트럼프 대통령은 이스라엘과의 우호관계를 강조하기 위해 텔아비브에 있던 미국대사관을 예루살렘으로 이전한다고 발표해서 파문을 일으켰다. 이스라엘의 헌법상 수도는 예루살렘이지만, 국제사회는 예루살렘에 대한 이스라엘의 통치권을 인정하지 않는 상황이다. 왜냐하면 이스라엘이 1967년 3차 중동전쟁에서 인접국 요르단에 속해 있던 예루살렘의 동부를 점령하여 수도로 선포했고, 국제연합은 이를 ‘부당한 점령’으로 간주했기 때문이다. 이것이 현재 각국 대사관이 대부분 텔아비브에 있는 이유다.


    예루살렘을 둘러싼 수많은 분쟁의 기원은 기원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예루살렘이 있는 팔레스타인 지역은 고대에 ‘가나안’이라고 불렸다. 이곳은 아시아, 아프리카, 유럽 등 세 지역이 접한 요충지로, 지중해 연안의 다양한 민족이 한데 뒤섞여 공존하며 오래전부터 전란의 무대가 되었다. 가나안 땅에서는 기원전 7000년 전후부터 농경생활이 이루어졌고, 이후 오랫동안 이곳은 이집트 왕조의 지배하에 놓였다.


    기원전 13세기경, 이집트의 지배를 받던 히브리인이 가나안으로 이주해왔다. 히브리인은 타민족이 이스라엘 민족을 부를 때의 호칭이고, 그들 스스로는 유대인이라 불렀다. 유대교와 그리스도교의 성전인 『구약성서』에 따르면, 유일신 야훼가 예언자 모세에게 백성을 이끌고 가나안 땅으로 갈 것을 명했다고 한다.


    현존하는 성벽은 오스만제국이 건설

    7세기에 아라비아반도의 무역상이던 예언자 무함마드가 이슬람교를 창시했다. 이슬람교는 그리스도교와 마찬가지로 『구약성서』의 세계관을 계승한다. 무함마드가 큰 바위 위에서 천사의 인도로 앞선 예언자와 신을 만나고 왔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691년 이슬람의 우마이야왕조 시대에 그 큰 바위를 뒤덮은 형태의 ‘바위 돔’을 완공했고, 이후 이곳은 이슬람교의 성지가 되었다.


    11세기에 접어들면서 유럽에서는 점차 성지탈환의 여론이 높아졌고, 1099년에 프랑스 제후들을 중심으로 한 1차 십자군이 예루살렘을 점령했다. 이때 유대인이 사는 지역도 철저히 파괴되었다. 십자군은 예루살렘왕국을 건설하고 서쪽 성벽에 있는 유일한 문인 자파 문을 중심으로 성채를 강화했다. 또 현재의 구시가지 북서부에 성요한기사단이 운영하는 큰 병원을 건설했으며, 그 외에도 많은 교회와 수도원을 세웠다.


    1187년에 아이유브왕조의 살라흐 앗딘(살라딘)이 예루살렘을 탈환했다. 그 후 13세기까지 유럽에서 십자군이 일곱 차례나 원정에 나섰지만, 예루살렘을 지속적으로 점령하는 데는 실패했다.


    시간이 흘러 19세기 말이 되자 프랑스와 러시아에서 반유대주의가 확대된 한편, 유럽에 거주하는 유대인들 사이에서는 유대국의 재건을 주창하는 시오니즘 운동이 활발히 일어났다.


    1914년에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영국은 로스차일드가(家) 등 유대계 자산가의 협력을 얻기 위해 팔레스타인에서의 유대 국가 건설 지원을 약속했다. 그와 동시에, 오스만제국을 무너뜨릴 목적으로 아랍인의 자치 또한 보장했다. 이렇듯 유대인의 팔레스타인 귀환은 현지 아랍인과의 합의가 이뤄지지 않은 채 진행되었다.


    구시가지 모두가 세계문화유산

    마침내 1948년에 이스라엘 국가가 탄생했다. 이에 이집트, 시리아 등 주변 아랍국들은 강력하게 반발했고 1차 중동전쟁이 터졌다. 당초 이스라엘에 속한 영역은 예루살렘의 서부뿐이었지만, 1967년 3차 중동전쟁에서 승리한 이스라엘은 동부도 자국령으로 편입하여 ‘불가분의 수도’라는 주장을 내세웠다.


    원래 이스라엘 내에 살던 팔레스타인 이슬람인들은 동예루살렘을 수도로 하는 자치정부 건설을 주장하며 이스라엘 정부와 계속 대립하는 상황이다.


    예루살렘에서는 지금도 양측의 분쟁이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다. 한편 유대교, 그리스도교, 이슬람교의 성지이기도 한 이곳으로 모여드는 순례자의 행렬도 끊이지 않는다. 현재 예루살렘의 동북부는 이슬람인지구, 서북부는 그리스도교인지구, 동남부는 유대인지구, 서남부는 4세기부터 거주하던 아르메니아인(그리스도교인)지구로 나뉘어 있다. 이슬람인지구는 높은 벽으로 격리된 상태로 외부와 출입할 때에는 검문소를 통과해야 한다.



    로마_ 몇 번이고 되살아난 ‘영원의 도시’

    왕정 때 기틀을 쌓은 수도의 원형

    로마의 건국신화에 따르면 테베레강에 버려진 쌍둥이 형제 로물루스와 레무스가 마을에 정착한 후, 로물루스가 레무스를 제거하고 팔라티노 언덕에서 기원전 753년에 로마를 세웠다고 전해진다. 로마는 로물루스에서 유래한 이름이다.


    실제로는 기원전 10~9세기, 팔라티노 언덕에 라틴인이 집락을 형성한 것이 로마의 시초다. 이들은 다른 언덕에 정착한 사비니인을 공격했고, 기원전 3세기 중반에 사비니인은 로마 시민으로 편입되었다. 이때 하늘의 신 유피테르와 전쟁의 신 마르스를 숭배하던 사비니인의 신앙이 로마에 흡수된 것으로 보인다.


    기원전 7세기가 되자 이탈리아 중부지역을 거점으로 삼은 에트루리아인이 세력을 확장하며 로마에 영향을 미쳤다. 기원전 616년에는 에트루리아인 타르퀴니우스가 로마왕의 양자가 되어 왕위를 이어받았다.


    에트루리아인은 고도의 금속가공기술과 토목기술을 갖고 있었다. 그들은 주변의 일곱 개 언덕을 천연 방어벽으로 삼고 로마를 발전시켰고, 언덕 사이의 평지를 광장으로 만들어 그곳에 신전과 집회소를 세웠다. 하수도를 정비하고 약 10킬로미터에 달하는 ‘세르비우스 성벽’을 쌓아 도시를 에워싸기도 했다. 공화정·제정 로마의 수도다운 도시구조의 원형이 이 무렵에 만들어진 것이다.


    100만 인구를 지탱한 수도

    아우구스투스는 “벽돌로 지어진 로마를 이어받아 대리석의 도시로 남긴다”라고 말했다. 그는 의사당, 신들을 모신 판테온(만신전), 극장과 같은 건축물의 건설사업을 벌이는 한편, 로마를 14구로 나누는 등 도시정비를 추진했다. 로마 대화재 이후 재건된 판테온은 약 2000년이 지난 지금도 건재한데, 건물이 여전히 강도를 유지하고 있다는 점이 과학적으로도 증명되었다. 이로써 당시 로마인의 우수한 토목건축기술을 확인할 수 있다.


    이후의 황제들도 권력을 과시하고 시민들의 지지를 얻기 위해 공공건축물을 건설했다. 약 5만 명(수용 가능한 인원수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음)을 수용할 수 있는 원형경기장 ‘콜로세움’은 베스파시아누스 황제 때 착공되어 기원후 80년에 티투스 황제 때 완성되었다. 이곳에서 로마 시민은 오락거리 삼아 검투사 노예들의 싸움을 관람했다.


    수도 이전과 게르만인에 의한 피해

    로마는 오현제 시대에 ‘팍스로마나(로마의 평화)’라 불리는 최전성기를 맞았다. 트라야누스 황제 때는 서유럽의 대부분을 차지했고, 남쪽으로 북아프리카대륙, 동쪽으로 메소포타미아까지 판도를 확장했다. 하지만 이 시대를 정점으로 로마는 쇠퇴의 길을 걷게 된다.


    오현제 이후 50년간 열여덟 명(공동 통치자를 더하면 스물여섯 명)의 군인 출신 황제가 번갈아 황위에 오르는 군인황제 시대를 거치며 내정이 몹시 불안했다. 이 상황에 종지부를 찍은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는 이대로 광대한 영토를 통치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판단하여, 293년에 로마제국을 동서로 나눠 각각 정·부 황제를 두는 ‘사두정치(테트라키아)’ 체제를 시작했다.


    395년, 테오도시우스 황제는 죽기 전에 두 아들에게 영토를 나누어주었다. 이에 따라 밀라노를 수도로 하는 ‘서로마제국’과 콘스탄티노플을 수도로 하는 ‘동로마제국(비잔티움제국)’이 성립했다. 이제 로마는 서로마제국에 속한 한 도시로 전락했다.


    이 무렵 서로마제국은 게르만인의 대이동으로 인해 혼란이 계속되었고, 로마도 역시 그 영향을 받았다. 410년에는 게르만계 서고트족에게 약탈을 당했고, 455년에는 역시 게르만계인 반달족에게 건축물과 인프라 설비가 파괴되는 심각한 피해를 입었다.


    476년, 결국 서로마제국은 멸망한다. 이후 로마는 게르만인 용병대장 오도아케르의 지배를 거쳐 게르만인의 동고트왕국에게 점령당했다. 그 후 동로마제국이 로마를 지배하에 두게 되었지만, 그들에게 그 도시는 더 이상 중요한 곳이 아니었다. 8세기 중반, 로마가 게르만계 랑고바르드족의 위협에 노출되자 로마교황은 미덥지 않은 동로마제국이 아니라 침략자와 같은 게르만족인 프랑크왕국에 도움을 청했다. 원래 로마교황(4세기 말부터 교황이라는 칭호를 사용)은 각지의 교구를 감독하는 주교들 중 하나였지만, 그리스도교세계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담당하면서 점차 로마 가톨릭교회 최고위 성직자의 지위를 차지하게 되었다.


    로마교황의 요청에 응한 프랑크왕국의 피핀 3세는 로마를 침략한 랑고바르드족을 격퇴하고, 획득한 영지를 로마 가톨릭교회에 헌납했다(756년). 이리하여 로마는 이탈리아 중부의 독립세력, 즉 로마 교황령의 중심 도시가 되었다.



    베이징_ 지방도시에서 중화의 중심지로 탈바꿈한 역대의 수도

    이민족 통치로 여러 번 바뀌었던 이름

    역사적으로 지방도시에 불과했던 연성(현재 베이징)을 수도로 삼은 나라는 다름 아닌 북방에서 침입해온 이민족이었다. 10세기경 북방에서 세력을 떨친 거란족이 요나라를 건국했다. 이 무렵 연성과 주변 지역(연운십육주)은 요나라가 지배했다.


    이때 요나라는 연경을 남쪽 수도로 삼고 ‘남경’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요나라의 입장에서 보자면 연경이 지배영역의 남쪽에 위치했기 때문에 붙은 이름이다.


    이후 요나라가 쇠약해지자 만주의 여진족이 반란을 일으켜 금나라를 건국했다(1115년). 금나라는 송나라와 연합하여 요나라를 멸망시켰다. 하지만 송나라가 협정을 깬 것을 문제 삼아 1126년 송나라의 수도 변경(현재의 카이펑)을 점령하고 황족을 포로로 잡아갔다(정강의 변). 난을 피한 송나라의 황족과 유민들은 남으로 도망쳐 나라를 재건했고, 이때부터 남송 시대가 열리게 되었다(이전의 송나라를 북송이라 칭함).


    한편 중국대륙의 북쪽을 지배하던 금나라는 남경으로 천도하고 ‘중도’로 개칭했다. 1215년, 몽골군의 침공으로 중도가 함락되었고 금나라는 1234년에 멸망하고 만다. 이어 몽골제국의 5대 황제 쿠빌라이는 1267년 수도를 중도로 옮기고 이름을 ‘대도’라 정했다.


    베이징 천도와 자금성 건설

    14세기에 들어서자, 원나라 각 지방에서 반란이 일어났다. 홍건적의 난에서 두각을 드러낸 주원장은 양쯔강 이남을 제압하고, 응천부(현재의 난징)를 수도로 삼아 1368년에 명나라를 건국했다. 주원장은 황제(홍무제)로 즉위하여 북벌을 개시했고, 원나라는 수도 대도를 버리고 몽골고원으로 달아났다.


    화북일대를 다스리는 연왕으로 봉해진 홍무제의 넷째 아들 주체는 대도에서 이름을 바꾼 ‘북평’을 본거지로 삼아 북방 이민족의 침입을 방어했다.


    그러나 홍무제의 사후에 즉위한 2대 황제 건문제가 황족을 숙청하자, 주체는 간신을 벌하겠다는 명분을 내세워 군사를 일으켰다(정난의 변). 주체는 황제군을 무찌르고 난징을 점령한 뒤 건문제를 폐위시켰다. 그 후 주체는 명의 3대 황제(영락제)로 즉위하고, 수도를 자신의 본거지인 북평으로 옮겨 ‘북경’, 즉 ‘베이징’으로 개칭했다.


    영락제는 몽골과 티베트 지역으로까지 원정에 나서며 명나라의 최대판도를 구축하는 동시에, 베이징에 자금성을 건설했다. 비로소 한족이 세운 통일왕조의 수도 베이징이 탄생하게 된 것이다.


    정치와 경제·문화가 분리된 이중의 도시체제

    현 베이징시의 중심부는 영락제 시대에 완성되었다고 할 수 있다. 내성의 중심에 황제가 거주하는 자금성이 있고, 황족의 주거지인 황성이 그 주위를 에워싸듯이 배치되어 있다. 황제는 북쪽에 있는 옥좌에 앉아 남쪽을 향해 정무를 보았고, 그 북측에 ‘징산’이라는 인공산을 쌓아 자신의 배후를 보호하게 했다. 이 배치는 풍수사상을 토대로 한 것이다.


    베이징 주변에는 다진 흙과 벽돌로 성벽을 쌓았는데, 1436년에 보수를 하여 네 모퉁이와 아홉 개의 문에 누각을 만들었다. 또 그 유명한 천안문(당시 승천문)을 황성의 입구에 세우고 법령을 공포하는 장소로 사용했다.


    이 무렵 베이징의 인구가 급증하면서 내성이 포화상태가 되자, 사람들은 성 바깥으로 거주영역을 넓혔다. 그래서 영락제는 1553년부터 11년간 내성 밖을 둘러싸는 외성을 만들었다.


    이후 베이징의 중심부는 가로로 긴 직사각형 모양의 외성 위에 작은 사각형 모양의 내성을 얹은 듯한 형태(凸형)가 되었다. 사실 당초 계획은 내성의 주위를 모두 외성으로 둘러싸는 형태(回형)를 만드는 것이었다. 예정대로 완성되었다면 자금성은 황성, 내성, 외성이 차례로 겹겹이 에워싸는 견고한 성채가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예산 문제로 남쪽에만 공사를 하는 데 그쳤다. 후에 내성은 정치적 중심지 역할을, 외성은 경제·문화의 중심지 역할을 하게 되었고, 이러한 이중의 도시체제에 따라 베이징은 크게 번창했다. 내성에서는 많은 외국 사절들이 황제를 알현했고, 식당, 술집, 여관, 사원 등이 들어선 외성의 번화한 거리에는 각국 각지에서 온 관광객이 북적였다.



    파리_ 세계로 전파된 프랑스 문화의 발신지

    센강의 작은 섬에서 발전한 도시

    현재의 파리는 20개의 구역으로 이루어져 있다. 1구는 센강의 시테섬 서부를 포함한 일대로, 이 22만 제곱미터(도쿄돔 다섯 배 이상) 크기의 섬에서 파리의 역사가 시작되었다. 기원전 3세기경, 유럽에 정착한 켈트족의 일파인 파리시족이 시테섬에 집락을 형성했다. 그들의 이름에서 ‘파리’라는 지명이 유래했다.


    고대 로마인은 프랑스를 ‘갈리아’, 시테섬 주변을 ‘루테티아’라고 불렀는데, 기원전 52년에 카이사르가 이끄는 로마군이 이 루테티아를 점령했다.


    루테티아는 분지의 중심에 위치하고, 프랑스 중남부의 부르고뉴에서부터 서부 연안의 르아브르에 이르는 센강이 가로질러 흐른다. 이러한 지리적 환경 덕분에 북쪽의 브리튼섬이나 남쪽의 지중해 방면과 교역활동을 하는 데 적합했다. 로마인은 이 땅에 식민도시를 건설하고 서쪽의 루앙이나 남쪽의 오를레앙으로 통하는 도로를 부설했다. 시테섬을 매개로 센강의 양측을 잇는 다리를 놓고, 바둑판 모양의 도시구획을 정비해서 대규모 극장과 원형 경기장을 건설했다. 지중해 여러 도시에서 생산한 도기, 금속제품, 의류 등은 루테티아를 경유해서 갈리아 북부와 브리튼 섬으로 유통되었다. 파리시인의 대다수는 선원으로 일했다.


    3세기에 로마인들 사이에서는 루테티아가 아니라 ‘파리시인이 사는 마을’이라는 통칭이 널리 퍼져 이내 ‘파리’라는 지명이 자리 잡았다.


    시민이 힘을 기른 중세 후기

    파리의 인구는 13세기에 이미 10만 명에 달했다. 1302년에는 성직자(제1신분), 귀족(제2신분), 평민(제3신분)의 대표들이 모여 세제 등을 논의하는 ‘삼부회’가 처음으로 노트르담대성당에서 열렸다. 평민 대표도 당당히 참여하게 된 것은 상업이 크게 발달했다는 사실을 반영한다. 왕실 및 귀족을 거래 상대로 하는 모직물 상인, 귀금속상, 금융업자 등 정치적으로 유력한 거상이 늘어난 것이다.


    직종별 협동조합(길드)이나 교회에 소속의식을 가지면서, 시민들 사이에서는 혈연이나 지연에 속박되지 않은 개인주의적 기질이 생겨났다. 이를 뒷받침하듯 당시에 여성이 상점 주인이나 의사와 같은 직업을 가지고 세대주가 된 기록도 많이 발견되었다.


    파리에 머물지 않았던 국왕

    16~17세기의 프랑스 국왕은 파리에만 머물지 않고 지방을 순회하면서 생활했다. 각지의 신민에게 왕의 모습을 보여주며 방문지에서 세금을 거두기 위해서다. 1643년에 즉위한 루이 14세는 자주 정변이나 전란에 휩싸이던 파리를 어릴 때부터 기피했다. 그래서 파리에서 서남쪽으로 약 20킬로미터 떨어진 베르사유에 새로운 궁전을 건설했다. 루이 14세는 재위 중반까지 루브르궁전에서 정무를 보다가 1680년경부터 정치의 중심을 베르사유궁전으로 옮겨갔다. 이로 인해 왕실과 파리 시민의 일체감은 점차 사라졌다.


    파리에서는 1670년에 성벽이 헐리고 루브르궁전의 서쪽 끝부터 북서쪽으로 이어지는 ‘샹젤리제 거리’가 완성되었다. 이듬해에는 ‘국립극장(파리오페라좌)’이 문을 열었다. 국왕이 없는 파리에서는 부유한 시민들 사이에 자유로운 사회 분위기가 정착했다. 특히 많은 예술가와 학자가 모여 의견을 나누는 자유로운 토론문화가 형성되었고 왕후, 귀족과 교회의 권위를 부정하는 볼테르와 루소의 계몽사상이 확산되었다.


    18세기 말, 파리의 인구는 약 65만~70만 명에 달했다. 당시 대외 전쟁과 흉작이 계속되던 탓에 시민들의 조세부담이 가중되고 있었다. 그러던 중 결국 1789년에 파리 시민들이 바스티유감옥을 습격한 일을 시작으로 프랑스혁명이 일어났다. 삼부회의 평민대표를 중심으로 한 국민회의가 실권을 잡으며 부르봉 왕조는 무너졌고, 1792년에 공화정이 선포되었다(제1공화정). 의회가 있던 파리는 다시 정치의 중심지가 되었고, 구체제의 산물이 된 교회와 귀족의 저택들은 파괴되었다. 이때 루브르궁전은 박물관으로 바뀌었다.



    싱가포르_ 아시아 부국으로 자리 잡은 도시국가

    자유무역항으로 성장한 도시

    싱가포르는 영국의 식민지가 된 이후 급속히 발전했다. 원래 이 마름모꼴 섬의 남부에는 소수의 주민이 거주하고 있었지만, 북부에는 조호르해협을 지나는 배를 약탈하던 해적들의 거점이 있었다고 한다. 수마트라섬과 말레이반도를 지배하는 역대 왕조의 세력하에 있었지만, 싱가포르는 그저 작은 섬일 뿐이었다. 그런데 16세기 대항해시대를 기점으로 유럽국가들이 동서교역의 중계지로서 동남아시아 섬들을 확보하기 시작했고, 그때 싱가포르가 갑자기 주목받게 되었다.


    최초로 싱가포르에 주목한 사람은 영국 동인도회사의 토마스 래플스다. 인도를 식민지화한 영국에 싱가포르는 지리적으로 인도와 동아시아를 잇는 교역거점으로 상당히 적합한 곳이었다. 그래서 래플스는 1819년에 당시 말레이반도 남단을 지배하던 조호르왕국과 교섭하여 상업활동을 위한 기지 설립 허가를 얻어냈다.


    조호르 왕국에 영향력을 행사하던 네덜란드는 이에 반대했지만, 1824년에 영국이 조호르왕국에 연간 1만 8천 달러를 지불하는 조건으로 지배권을 확정받았다.


    그 후 래플스는 싱가포르를 자유무역항으로 개방하고 관세를 받지 않았다. 이때부터 싱가포르는 동남아시아 무역의 중심지로 급부상했다. 불과 5년 만에 인구가 1만 명을 넘었고 20세기에 접어들 무렵에는 23만 명에 달했다.


    중국계 화인정권의 탄생

    중국에서 온 이주민들은 싱가포르 발전의 원동력이 되었다. 2018년 기준으로 싱가포르의 인구 비율은 중화계 76퍼센트, 말레이계 14퍼센트, 인도계 9퍼센트, 기타 1퍼센트다. 원래 말레이계가 많은 섬이었지만 중화계가 많아진 까닭은 영국 식민지 시대에 중국에서 일자리를 찾아 나선 노동자들이 대거 유입되었기 때문이다.


    중국계 노동자는 항만에서 짐을 나르거나 중노동을 하는 일을 담당했다. 그중에는 말레이시아산 고무를 수출하는 등의 무역사업에 진출해서 막대한 이익을 올리는 사람도 있었다. 성공을 꿈꾸는 중국인에게 싱가포르는 기회의 땅이었다. 이곳에 이주해서 정착한 중화계 사람들은 ‘화인’이라 불렀다.


    종전 후 싱가포르는 다시 영국령이 되었고, 1959년에는 자치권을 얻어 싱가포르 자치주가 되었다. 하지만 의회가 설립되고 점차 싱가포르의 독립을 요구하는 움직임이 활발해졌다. 이때 독립운동의 주역 또한 화인들이었다.


    당시 화인 엘리트들은 크게 두 그룹, 즉 중국어로 교육받은 ‘화어파’와 영어로 교육받은 ‘영어파’로 나뉘었다. 1954년, 영국에서 공부한 변호사인 영어파 리콴유가 중심이 되어 화어파의 지지를 얻은 인민행동당(PAP)을 결성했다. 그리고 인민행동당은 1965년에 싱가포르가 말레이시아로부터 분리 독립한 이후 지금까지 줄곧 정권을 잡고 있다.


    환상의 싱가포르시와 독재정권

    1965년에 마흔한 살의 나이로 리콴유는 싱가포르공화국을 건국하고 초대 총리가 되어 독재적 체제를 강화해 나갔다. 인민행동당은 공산주의의 화인정당과 공동투쟁으로 정권을 획득했지만, 독립 후 리콴유는 비판세력뿐 아니라 공산주의세력까지 모두 배척했다. 제도상으로는 복수 정당이 인정되는 민주국가였지만, 리콴유는 인민행동당에 유리하도록 법률을 개정하여 야당 의석은 몇 석밖에 없는 실질적인 일당독재체제를 만들었다.


    리콴유는 정치적 이데올로기보다 경제발전을 최우선으로 삼고 부국을 만드는 것만을 목표로 세웠다. 좁은 국토의 싱가포르의 경제적 안정과 독립을 유지하는 방법은 그것밖에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리콴유는 싱가포르에 사는 민족 모두가 싱가포르인으로서 하나로 뭉칠 것을 요구하며, 모든 민족을 평등하게 대하는 방침을 찾고자 했다. 공용어도 말레이어, 중국어, 타밀어, 영어, 이렇게 네 가지로 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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