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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과 칼
저   자 : 임해성
출판사 : 안타레스
출판일 : 2020년 0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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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과 칼


마키아벨리의 말, 노부나가의 칼

분열된 제국

이탈리아의 르네상스는 유럽 사회를 중세에서 근세로 이끄는 촉매가 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작 이탈리아에 살고 있는 사람들을 하나로 통합할 수 있는 제도, 정치 체제, 사상을 만들어내지는 못했다. 르네상스의 위대성은 표현 방식과 학문적 기량을 드러낸 문학과 철학 그리고 고대 사상의 여러 주제를 회화, 조각, 건축물 등을 통해 대중화했다는 데 머물렀다.


그러나 같은 시기 15세기부터 시작된 대항해 시대는 유럽인들이 갖고 있던 자기인식의 경계가 지중해를 벗어나 더욱 넓은 세계와의 대면을 가능하게 했다. 교황은 로마와 이탈리아를 주무르던 권능으로 그들의 탐험과 정복에 대해 ‘십자군’의 위상을 부여하기까지 했다. 그 결과 이 시기의 유럽은 아무런 죄의식 없이 아프리카 노예 무역을 통해 자본을 쌓고 그 노예들의 강제 이주를 통해 아메리카 식민지를 개척했다.


그렇게 새로운 시대의 출발을 알리는 총성이 울렸지만 지중해 무역을 정점에서 이끌던 이탈리아는 그 흐름에 올라타지 못했다. 주변 나라들이 절대 왕정의 중압집권 체제를 구축하면서 강력한 통합을 이뤄내는 동안에도 이탈리아에서는 작은 도시 국가들끼리 서로 다투거나 주변 왕국들의 각축장이 되는 상황이 16세기 후반까지 계속 됐다.


이탈리아의 이 같은 상황 속에서 살다 간 마키아벨리는 차라리 예외적인 인물이었다. 오늘날 우리에게 그는 유럽사 전체를 관통해온 정치학의 윤리적 근거 『니코마코스 윤리학(Ethika Nikomacheia)』의 틀을 뒤엎고 정치 문제를 보다 냉철하게 직시한 인물로 묘사된다.『니코마코스 윤리학』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은 선(善)을 추구하는 존재이며 그 최고의 선은 행복으로 귀결된다고 여겼다. 그리고 이성을 기반으로 적절히 욕망을 조절하는 중용을 강조하면서, 선을 추구하는 인간상을 가장 바람직한 것으로 봤다.


하지만 마키아벨리는 그와 같은 인간상을 깼다. 틀을 벗어났다는 것은 그만큼 그가 살던 당시의 이탈리아가 정치적으로 분열됐고 경쟁이 치열했음을 방증한다. 한편으로는 어쩌면 지금도 계속되는 분열과 경쟁 속에서 그를 우리가 필요로 하는 이미지로만 바라보고 있는 것일 수도 있다. 우리는 마키아벨리를 제대로 알 필요가 있다. 알려진 마키아벨리가 아닌 그 시대를 살았던 마키아벨리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봐야 한다. 그렇지만 우리는 하다못해 마키아벨리의 진짜 얼굴조차 알지 못한다.


마키아벨리는 살아서가 아니라 죽어서 유명해졌다. 그의 대표적인 작품 『군주론(Il Principe)』이 쓰인 때는 1513년의 일이다. 정식으로 출판된 것은 1532년이었다. 당시 이 책이 얼마나 널리 읽혔는지는 알 수 없지만 불과 한 세대 정도 지난 1569년 출간된 영어 사전에 그의 이름은 파생어 ‘마키아벨리언(machiavellian)’이라는 형용사로 등장한다. ‘마키아벨리 같은’, ‘권모술수에 능한’이라는 뜻이었다. 유럽의 가장 남쪽 이탈리아 반도에서 살다간 이의 이름이 불과 한 세대 만에 바다 건너 영국의 사전에 비열함의 상징으로 등장한다는 사실은 많은 것을 생각하게 만든다.


천황은 어디에

오늘날 천황은 일본의 명목상 지배자이며 상징성을 가진 구심점이지만 한때는 실제로 권력을 가진 시기가 있었다. 나라(奈良) 시대에서부터 가마쿠라(鎌倉) 막부가 설치되기 전 헤이안(平安) 시대 중기인 710~1185년이 그 시기에 해당한다. 이 기간은 황제가 다스렸던 로마 제국과 마찬가지로 정치 권력과 제사장으로서의 권위를 모두 천황이 갖고 있었다.


그러나 무신들에 의해 가마쿠라 막부가 형성되고 나서부터 천황은 제사장의 의미만을 갖는 존재로 전락한다. 그를 대신해 세속적인 권력을 휘두르는 자리는 쇼군(將軍)이 맡게 된다. 쇼군이 권력을 가졌는데도 자신들이 직접 천황이 되지 않은 이유는 천황이 갖고 있던 ‘신의 자손’이라는 상징성 때문이다. 쇼군들이 그런 천황의 위임을 받는 식으로 권력을 휘둘렀다는 것이 일반적인 설명이다. 하지만 그것도 무로마치(室町) 막부까지의 얘기다. 에도(江戸) 막부에 이르면 쇼군이 천황에게 이런저런 규정을 강요하는 등 사실상 하급자 취급을 했다. 즉, 쇼군이 직접 천황이 되지 않은 것은 초기에는 천황의 상징성 때문이었지만, 그 이후에는 직접 천황이 되고 싶어 할 이유도 당위성도 사라졌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메이지 유신(明治維新)을 거치면서 천황은 다시 상징에서 사상이 됐고, 신이 됐다가, 태평양 전쟁에서 패함으로써 다시 상징이 됐다.


유럽과 일본을 겹쳐놓고 그 역사를 들여다보면 고대에서 중세를 거쳐 근세로 나아가는 과정이 매우 비슷하다. 고대 사회에는 수많은 귀족 가문들이 있었다. 그중에서 가장 유력한 가문은 황실에 편입하거나 보좌하면서 권력을 유지했고, 귀족 간의 수많은 암투와 전쟁이 고대 사회를 이끌어갔다. 그렇기에 황제는 중앙집권 체제를 유지하고자 애썼으며, 유력 귀족 가문은 황제를 돕거나 아니면 반기를 들면서 역사를 전개해나갔다.


그런데 어느 순간 역사의 중심이 바뀐다. 중세에 이르자 황실과 귀족의 주도가 아니라 황제를 능가하는 무사 세력이 주도하는 사회가 된다. 지금까지는 황제나 귀족들이 기르는 개 취급을 받고 살던 무사들이 이제는 자신들이 기존 세력보다 강하다는 사실을 깨닫고 권력의 전면에 나선다.


힘이 있으면 권력을 잡을 수 있다는 ‘능력주의’ 풍조가 퍼지면서 가신이 자신들의 영주를 무너뜨리는 하극상은 1493년 호조 소운(北条早雲)이 이즈(伊豆) 지역을 탈취하면서 본격화됐다. 누구의 땅이든 빼앗아 내 것으로 만들면 그만이었다. 그 시초는 오닌의 난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겠지만 어쨌든 전국 시대는 그렇게 시작됐다. 그리고 그 시대는 마침내 한 사내를 낳는다.


16세기에 유럽인 가운데 사악, 간사, 교활, 위선, 권모술수 등의 이미지로 구축된 인물이 니콜로 마키아벨리라면, 16세기 일본인 중에서는 오다 노부나가가 그렇다. 물론 두 사람을 둘러싼 악의적인 짜맞추기는 그들의 참모습이 아니라 후대에 필요에 의해서 조작된 것이다. 교황청의 금서였던 『군주론』은 지금 교양인이라면 누구나 읽어야 할 책이 됐고, 시대의 절름발이로 평가받던 마키아벨리는 이제 시대를 연 선구자로 추앙받고 있다. 입헌군주제 국가로서 여전히 천황이 존재하는 일본이기에 전국 시대 당시 황제를 꿈꿨던 노부나가는 오늘날 비록 정부나 학계의 정당한 평가를 받지 못하지만, 일본인이 존경하는 인물 1~2위에 늘 오르면서 마찬가지로 후대의 재평가를 받고 있다.


피비린내 나는 전장에서 펼쳐지는 인간 군상 및 처절한 죽음 속에서 피어나는 삶의 이야기는 사람들의 마음을 흔드는 매력이 있다. 중국 삼국 시대의 이야기 『삼국지연의(三國志演義)』가 그렇듯 말이다. 오다 노부나가는 그런 시대의 한 가운데를 살다 간 인물이다. 계층 이동, 신분 상승, 권력 관계 등의 유동성이 매우 활발하던 전국시대가 한창일 때 그는 태어났다. 1534년이었다.


삶과 죽음의 문명

1571년 9월 12일, 노부나가 군에 돌연 명령이 떨어졌다.


“히에이 산을 불태워라.”


노부나가의 3만 병력이 히에이 산을 공격해 올라갔다. 500여 개의 당탑(堂塔)이 모두 불탔고 승려 및 신도 4,000명을 살육했다. 이에 따라 군사력을 배경으로 전국 시대에 막강한 영향력을 가졌던 사찰 세력 히에이 산 연력사는 소멸됐다.


노부나가가 히에이 산을 불태운 데는 아자이 아사쿠라 연합에 편을 든 것에 대한 단순한 복수가 아니라 전략적인 의미가 있었다. 실제로 한 해 전에 노부나가는 히에이 산에 사신을 보내 경고했다.


“아자이 - 아사쿠라와 손을 끊고 중립을 지키면 접수한 토지는 반환하겠다. 그렇지 않으면 전부 불태워버리겠다.”


노부나가는 히에이 산의 전략적 가치를 이해하고 있었다. 동쪽으로 비와(産) 호수를 바라보며 홋코쿠(北國)가 이어지고, 서쪽으로는 와카사(若決)를 따라 교토가 서남쪽에 위치하고 있다. 또한 500여 개의 당탑이 있어서 그곳에 수만 명의 병력을 배치할 수 있었다. 교토를 공격하는 거점으로도, 동쪽에서 공격해오는 적을 맞아 교토를 수비하는 방위 기지로서도 중요한 장소였다. 노부나가는 히에이 산이 자신에게 대항하는 태도를 바꾸지 않는 상황에서 이곳을 불살라 그 전략적 가치를 아예 없애려고 한 것이었다. 내 것이 아니라면 그 누구의 것도 아니어야 했다.


노부나가가 히에이 산을 철저히 불태운 또 다른 이유는 타락한 중세적 권위에 대한 철퇴를 휘두르기 위해서였다. 수행을 소홀히 하며 부처를 저버리고 무력을 통해 자신들의 세속적 욕구를 관철시키려는 모습에 노부나가는 환멸을 느꼈다. 그는 종교 세력이 가진 위선의 베일을 벗겨내고 타락한 중세적 권위의 상징인 사찰을 불태워 그들이 본연의 자리로 돌아가기를 요구했다. 본래의 모습이란 난세를 헤매는 신자들에게 구원의 손길을 내미는 것이었다. 노부나가는 히에이 산을 불사른 뒤 불교 금지령을 내리지도 않았고 전국에 있는 신자들을 탄압하지도 않았다. 노부나가는 불교 종파의 존속과 포교 활동을 인정했다. 오히려 거기에 충실하길 바랐다.


유일신을 섬기는 그리스도교 및 이슬람교와 “모든 것에 신이 깃들어 있다”는 사상에 기반을 둔 일본인들의 범신론적 종교관은 서로 다르지만 일본에서도 중세에 종교가 정치에 간여하고 있던 것은 사실이다. 오다 노부나가의 철저한 탄압으로 형성된 정교 분리가 계속됐다면, 그래서 일본인들에게 주제넘은 종교나 종파에 대한 면역이 있었다면, 메이지 유신 이후 천황의 신격화에 내몰려 팔굉일우 달성을 위한 세계 정복의 미몽에 빠지는 일도 없었을 것이다.


중세적 권위의 철폐를 통해 노부나가가 천하통일 뒤 어떤 사회를 만들려고 했는지를 알 수 있다. 노부나가가 실행한 경제 정책에 ‘라쿠이치라쿠자(樂樂座)’가 있다. 한자를 우리말로 음독하면 ‘낙시낙좌’인데, 노부나가 시대에는 상공업자에 의한 동업자 조합인 ‘좌(座)’가 유럽의 길드처럼 존재하고 있었다. 이 동업자 조합은 사찰이나 신사(神社) 등에 ‘좌역(座役)’이라는 세금을 내는 조건으로 관할 구역의 영업 및 판매 독점권을 획득했다. 또한 상품의 유통로나 운송 수단을 독점하면서 관할 구역의 영향 아래에서 통행세나 영업세를 면제받기도 했다.

노부나가가 사찰 세력에 대해 몇 차례의 무자비한 학살을 했음에도 불교 금지령을 내리거나 신도들을 탄압하지 않았다고 했는데, 그는 신을 믿고 구원을 바라는 것은 자유이나 모름지기 종교란 경제적 이득이나 속세의 쾌락에 빠지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하물며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정치에 개입하고 무력으로 그 요구를 관철하려는 것은 결코 용납할 수 없었다. 노부나가는 신앙의 자유를 최대한 존중했다. 포르투갈 선교사가 교토에서 가톨릭 선교 활동을 원했을 때에도 흔쾌히 허락했다. 심지어 가톨릭 교육 기관 설립을 승인해주기까지 했다. 하지만 종교인이 수행을 게을리 하고, 사람들을 구원의 길로 인도한다는 본분을 망각하며, 속세의 물이 들어 권력을 휘두르고 무력을 행사하면 이를 철저히 섬멸한다는 것이 노부나가의 종교에 관한 철칙이었다.


노부나가가 자신의 통치 영역에서 보여준 사회는 일부 특권 계급만이 단물을 빼먹는 게 아닌, 누구에게나 평등하게 기회가 제공되고 땀 흘려 노력한 자가 보답 받는 세상이었다. 그리고 사회 질서를 어지럽히거나 불공정 거래로 자신만 이득을 취하는 행위가 아니라면 기본적으로는 자유로운 사회였다. 신앙 및 직업의 자유를 보장받고, 다른 사람이 생각지도 못한 아이디어가 있다면 인정받는 사회이기도 했다.


유럽에서는 종교 개혁의 바람이 불어 ‘말’을 통해 이루고자 한 세상을 일본에서는 노부나가가 ‘칼’ 한 자루로 이루려고 했다. 그런데 역설적이게도 유럽에서는 개혁의 대상이 된 바로 그 종교가 일본에서는 새로운 시대의 담론을 이끌어내고 있었다.


무너진 꿈, 살아난 희망

정국은 아직 안정되지 못하고 있었다. 교황은 소데리니를 쫒아내되 폭군이라는 말을 듣지 싶지는 않아서 꼭두각시로 자기 대신 조반니 데 메디치 추기경을 내세웠다. 그런데 메디치 추기경이 자신의 잇속만을 챙기자 교황의 배신감과 거기에서 나오는 불같은 분노가 피렌체까지 전해졌다. 다시금 빈틈을 노리고 있던 공화주의자들에게 그것은 아직 마지막 기회가 있다고 믿을 만한 혼란과 불안을 야기했다.


다시 한번 피렌체를 바꿔놓겠다는 교황의 엄포가 새 정부를 향한 의구심을 일으켰다. 그 의구심이 불만 가득한 일부 시민들과 섞여서 피렌체의 공기를 격하게 만들고 있었다. 정권에 불만을 가진 인물들 가운데는 아고스티노 카포니(Agostino Capponi)와 파올로 보스콜리(Pietro Paolo Boscoli)라는 피렌체 귀족 출신의 청년들이 있었다. 1513년 2월, 그들은 20명의 명단이 적힌 종이를 잃어버렸고, 이로 인해 마키아벨리는 메디치 가문과 화해할 기회를 잃게 된다.


광장에서, 거리에서, 가가호호 집에서 마주치는 모든 사람들이 메디치파가 됐지만, 비록 사면을 받은 몸일지언정 마키아벨리에게는 반 메디치파라는 낙인이 찍혀 있었다. 그래서 그는 피렌체를 떠나 인근 산탄드레아의 농장으로 내려갔다. 공화국의 서기장으로 일한 15년이라는 기간 동안 그가 보여준 날카로운 식견과 전망에도 불구하고 그는 스스로에 대해서만큼은 제대로 예상하지 못했다. 이렇게 모든 것을 잃은 뒤 마키아벨리는 이제 더 이상 정치에 대해 생각하거나 논하지 않기로 작정하고서 농장으로 내려왔다.


그의 몸이 살아낸 시대와 국가, 혈통과 신분 때문에 그의 정신은 언제나 평시민 국가에 기울어져 있었다. 그래서 로마 공화정의 행적을 좇아 오래도록 키워온 그 생각을 구현하고자 공화국 서기장으로서 15년 동안 혼신을 다해 공화정의 성공을 위해 헌신했던 것이었다. 하지만 앞을 내다보는 그의 예지력은 자신의 이런 생각과 실천에도 불구하고 피렌체가 다시 군주제의 시대로 옮아가고 있음을 봤다.


이후 그는 『군주론』을 비롯한 여러 저작에서 “부패한 민족은 설사 자유를 얻는다 해도 그것을 보존하기란 극히 어렵다”면서 공화정 피렌체를 버렸다. 나아가 이제 필요한 것은 “무력이나 군대와 같은 비상 수단”에 호소해 스스로를 군주국으로 변신케 하는 일이었다. 그것을 실행할 수 있는 ‘새로운 군주’만이 썩은 땅을 되살려낼 수 있을 터였다.


10년 전 체사레 보르자는 교황 아버지의 도움으로 그 위업을 거의 달성할 뻔했다. 율리오 2세는 교황과 교회가 어디까지 할 수 있는지를 보여줬다. 그런데 지금의 교회는 교황의 힘과 피렌체의 힘을 모두 쥐고 있는 한 사람의 손 안에 있다. 이런 분석에 이르자 그는 지금까지 자신의 몸이 한 것과는 다른 정신의 『군주론』을 쓸 생각을 품게 된다.


마키아벨리가 내세우는 제1원리는 인간의 본성에 담긴 욕망과 악덕, 약점과 미덕은 시간의 흐름 속에서도 결코 변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마키아벨리는 그 스스로가 한 사람의 인간임을 증명이라도 하듯이 재기하려는 욕망에 바치는 제물로 기꺼이 자신의 악을 깨워 배덕의 길로 나아갔다. ‘딸랑이’ 마키아벨리가 이탈리아 통일을 위한 마지막 권고에서 보여주는 군주론 제26장의 결론은 그의 말이 드러내는 그의 마음을 보여준다.


‘우리는 이탈리아가 그토록 오랫동안 만나지 못했던 구원자를 보게 될지도 모를 이 기회를 그냥 흘려보내서는 안 됩니다. 외세의 침입으로 고통 받던 모든 나라에서 구원자가 얼마나 많은 사랑으로 환대받게 될지, 그리고 또 얼마나 복수에 갈망하면서 굳건한 믿음과 경건함과 눈물로써 그를 대할지 나는 감히 표현할 수 없습니다.


어떤 문이 그의 앞을 가로막을 수 있겠습니까? 어떤 사람들이 그에게 경배하기를 거부하겠습니까? 어떤 질투의 감정이 그를 방해할 수 있겠습니까? 어떤 이탈리아인이 그의 신하가 되기를 마다하겠습니까? 야만족의 지배가 방방곡곡에 뿌려대는 그 고약한 냄새란!


그러므로 부디 폐하의 고명한 가문이 정의로운 대의를 행하는 데 필요한 기백과 희망을 갖고 이 과업을 앞장서 맡아주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그리하여 그 깃발 아래에서 조국은 고귀해질 것이며, 폐하의 후광 아래에서 일찍이 페트라르카가 읊은 다음과 같은 희망이 실현될 것입니다.’


광포함에 맞선 비르투가

이제 무기를 잡으리니 전투는 곧 끝날 것이다.

고대의 용맹함이

이탈리아 사람들의 가슴속에 아직 살아있기 때문이라.


마키아벨리는 친구 베토리에게 보낸 1513년 12월 10일자 편지에서 만족감과 애정 그리고 기대가 묻어나는 말투로 『군주론』 집필을 알렸다. 그런데 그가 『군주론』을 집필한 이유는 『군주론』의 결론과는 아무 상관이 없었다.


‘나는 메디치 군주들이 나를 써줬으면 하는 바람을 가지고 있다네. 설사 돌 나르는 일부터 시킨다고 해도 상관없네. 어쨌든 내가 그들의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은 다름 아닌 내 탓이기 때문일세. 그들이 이 책을 읽게 된다면 내가 국정술 연구에 바친 15년을 결코 잠과 놀이만으로 헛되이 보내지만은 않았다는 사실을 알게 되겠지. 그들이 나의 진실함을 의심할 필요는 없을 걸세. 나는 지금까지 줄곧 진실된 길을 걸어왔고, 그것을 이제 와서 새삼 깨뜨릴 생각은 없네. 나처럼 43년 동안이나 진실되고 바른 삶을 살아온 사람은 결코 그 본성을 바꿀 수가 없는 법이지. 내가 가난하다는 사실이 바로 내가 진실되고 바르다는 증거가 아니고 뭐겠는가.’


힘으로 품은 천하

나가시노 전투의 대승을 뒤로 하고 기후 성으로 돌아온 오다 노부나가는 오래 전부터의 계획을 실행에 옮겼다. 1575년에 적자인 오다 노부타다(織田信)에게 오다 가문의 가독(督)과 기후 성을 넘겨준 노부나가는 1576년 1월 아즈치 산에 축성을 명했다. 그러고는 불과 한 달 뒤 아예 아즈치 성으로 거처를 옮겼다.


이나바 산성에 올라 천하를 꿈꾸며 성의 이름을 기후라고 이름 붙인 그였다. 그리고 천하포무 인장을 사용했다. 그때가 그의 나이 서른이었다. 병농분리를 실시해 상비군 체제를 구축한 것도 그때의 일이었다. 그로부터 13년이 흘러 그의 나이 마흔 하고도 셋이었다. 단 한 사람의 가신도 그의 뜻을 헤아리지 못했던 세월을 저어 이제는 누구나 노부나가의 천하가 왔음을 알게 됐다. 이제 그 뜻을 보이는 형태로 만들어야 했다. 천하가 노부나가의 손에 있음을 누구나 볼 수 있도록 만들어야 했다. 전쟁이 끝나고 찾아올 평화의 시대, 통일 일본의 지배 이념을 세워야 했다.


그러다가 오랜 연구와 고고학적 발굴로 서서히 아즈치 성의 본모습이 드러났다. 3층 이상의 건물이 드물었던 시기에 무려 7층에 달하는 천주각이 세워졌다. 무로마치 막부의 제3대 쇼군 아시카가 요시미츠(足利義滿)가 1층은 귀족을 상징하고, 2층은 무사를 상징하며, 3층은 자신을 상징하도록 지은 금각사를 참조했단다. 천황을 능가하는 권력을 구가했던 무로마치 막부, 그 아시카가 가문을 쓰러뜨린 오다 노부나가는 이제 새로운 세상을 열고 있었다. 그에 걸맞은 새로운 상징이 필요했다. 그것이 바로 아즈치 성의 천주각이었다.


노부나가 사후에는 천주각 대신 ‘천수각(天)’이라는 말이 주로 쓰였다. 일본어 발음으로는 둘 다 '덴슈카쿠'다. 역사학자들은 이 누각의 명칭으로 천주각과 천수각이 혼용되다가 차츰 천수각으로 통일됐다고 설명한다.


또한 천주각이라는 이름의 연원에 대해서는 이런 설명도 있다. 서구 문화에 관심이 많던 노부나가가 예수회 선교사 루이스 프로이스로부터 유럽풍 고층 건물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라틴어로 신을 뜻하는 ‘데우스(Deus)’를 ‘천주(天主)’라는 한자로 옮겨 누각의 이름으로 삼았다는 설명이다.


그런데 천주각과 천수각은 음이 같다고 해서 쉽게 치환할 수 있는 단어가 아니다. 우선 뜻이 정반대다. 천주각은 ‘천하의 주인(主)이 머무는 누각’이지만 천수각은 ‘천하를 지키는 이(守)가 머무는 누각’이다. 노부나가는 스스로 황제가 되려고 했다. 일본 내의 천황이 아니라 중국까지 점령해 황제가 되고자 했다.


그것을 입증이라도 하듯 기후 성 때부터 천하포무 인장을 사용한 노부나가는 아즈치 성으로 옮겨오면서부터는 천하포무라는 글자를 두 마리의 용(龍)이 감싼 모양으로 인장을 다시 제작해 사용했다. 또한 천주각을 중국풍으로 만들라고 명령했다. ‘중국’ 그리고 ‘용’이라는 단어를 들으면 머릿속에서 어떤 단어가 떠오르는가. 다름 아닌 ‘황제’다.


앞서 살폈듯이 아즈치 성 본환어전의 구조가 천황이 생활하는 청량전과 같다는 사실을 두고 이곳이 노부나가의 공간이 아니라 천황을 위한 공간이라고 애써 해석하는 후대 일본 역사학자들이 애잔하다. 천황을 향한 그 충정만큼은 이해하고 싶다.


그건 그렇다 치고, 왜 노부나가는 히데요시나 이에야스처럼 통일 일본을 이끌어갈 상징으로서의 성을 평지를 둘러싸는 평성(平城)이 아니라 산을 따라 쌓는 산성(山城)의 형태를 취한 것일까? 전쟁이 한창일 때는 수비 효율성을 극대화하기 위해 산성을 선호했다. 산성은 불안감과 공포심을 위치 에너지로 극복하고자 한 살아있는 존재들의 방어기재였다. 그런데 통일 이후의 통치 거점으로서도 왜 산성을 택한 것일까?


아마도 불안과 공포라는 전시의 감정을 경외와 신앙으로 대체하고 싶었던 것이 아니었을까? 태평성대가 됐을 때 이전에 자신에게 가졌던 불안과 공포를 절대자 노부나가에 대한 경외와 신앙으로 바꾸고자 높은 ‘산’이 갖는 위치 에너지를 살리려고 했던 것은 아니었을까? 권력자로서 중세적 통치권의 극한을 암중모색한 물리적·심리적 설계가 바로 아즈치 성이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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