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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의 미래
저   자 : 로렌스 프리드먼(역:조행복)
출판사 : 비즈니스북스
출판일 : 2020년 0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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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의 미래


전쟁의 기술 : 19세기 중반~냉전 종식

잔인함으로 얻은 승리

강국의 정복 전쟁

계획을 세우고 행위규범을 마련해 대비한 가상 전쟁은 최신 무기로 무장한 대규모 군대가 최고의 정치적 이익을 두고 역사의 전환점이 될 전투를 수행하는 강대국 간의 전쟁이었다. 그러나 19세기 후반과 20세기에 걸쳐 많은 강대국이 실제로 관여한 전쟁은 이와 매우 달랐다. 그 전쟁들은 유럽인이 군사적 기술과 조직을 갖추지 못한 민족들을 겨냥한 정복전쟁이었다. 유럽인들은 그들의 땅을 점령하고 주민을 복속시켰으며 자원을 착취했다. 1837년부터 1901년까지 영국은 약 60차례 식민지 전쟁에서 400번 넘는 전투를 치렀다. 토착민은 때로 적응하고 순응했으며, 때로 저항하다 진압되었다. 헤이그 협정의 조약들은 식민지 분쟁에까지 확대해서 적용되지 않았다. 1899년 회의와 1907년 회의 모두 제국의 문제는 의도적으로 배제되었다.


식민주의는 전 주민이 적법한 표적이라는 관념을 확립했다. 지역 주민을 학살하고 촌락을 파괴하며 작물을 망치고 가축을 도살하는 행위는 대체로 전략적인 이유에서 실행되었다. 서구 군대가 ‘기동성이 좋아 교묘히 빠져나가는, 유격전의 달인들을 격파하기 위해’ 써야 하는 최선의 방법이었던 것이다. ‘미개인에 가까운 민족들’을 처리할 때 사정이 그렇다면, 동일한 전략적 논리에 따라 더 ‘문명화’되었다고 추정되는 자들에게도 비슷한 방법을 쓸 수 있을 것이다.


새로운 전쟁 방식

이 전쟁에 참여한 독일군 장교 콜마르 폰데어골츠(Colmar von der Goltz)는 이 전쟁에서 한 국민이 다른 국민을 정복해야 전쟁이 끝나는, 두 국민 전체의 사생결단이라는 미래 전쟁의 방향을 포착했다. 폰데어골츠는 노골적으로 클라우제비츠를 따랐다. 다만 그는 ‘절대적’ 전쟁을 전쟁이 도달할 수 있는 이상이 아니라 새로운 현실로 보았다. 이해관계의 충돌은 전쟁을 촉발할 수 있지만, 결정은 ‘국민의 열정’이 좌우할 것이었다. 폰데어골츠는 과도한 주목을 받았던 장군의 전투 지휘 능력에서 교전국의 국력이 소진되어야 결판나는 미래 전쟁으로 전략을 바꾸고 싶은 마음을 표현했다. 주민들은 일단 패한 뒤에도 매우 완강하게 버틸 수 있었기에 몇 년 동안 그들에게 극도로 가혹한 압박을 가할 필요가 있었다.


이 잔인한 접근법은 유럽 밖의 식민지 전쟁에서 매우 분명하게 드러났다. 주민들이 패배를 인정하지 않으면 전 주민에게 고통을 가했고, 이를 억제하려는 행위는 의도적으로 무시되었다. 필리핀공화국이 미국과 싸워 독립을 쟁취하려던 제2차 필리핀 전쟁(1899~1902) 중에 미국은 비위생적인 수용소에 수많은 민간인을 억류해 죽임으로써 반군의 지지 기반을 흔들었다. 미군은 약 4,000명을 잃고 약 2만 명의 반군을 죽였지만, 그 전쟁은 현지 주민들에게 널리 파괴적인 영향을 미쳤다. 약 20만 명이 질병의 확산으로 사망한 것이다. 같은 시기에 영국은 제2차 보어 전쟁을 치르고 있었다. 아프리카너(보어인)의 남아프리카공화국과 오라녀(Oranje) 자유국이 영국 제국에 병합되기를 거부했기 때문이다. 영국군 총사령관 허버트 키치너(Herbert Kitchener)는 자신의 전술을 이렇게 설명했다.


“마치 사냥 모임처럼 조직한 일련의 체계적인 공격으로 유격대를 포착해 사망자와 포로, 부상자를 매주 한 자루씩 성공리에 거두고, 여자와 아이를 포함해 유격대에 생존 수단을 제공할 수 있는 것을 모조리 없애도록 나라를 쓸어버리는 것이다… 그 전쟁의 마지막 국면은 민간인 제거, 즉 전 국민의 절멸이었다.”


이런 사고방식에 담긴 함의가 완전히 인정되지는 않았다. 전쟁을 페어플레이를 보장하는 규칙을 갖춘 운동 경기로 보는 관념은 아직 사라지지 않았다. 보통 사람은 잘못한 것이 없어도 전쟁에 휘말려 큰 고초를 겪을 수 있지만, 그들이 계획적인 전략의 일환으로 표적이 될 수 있다는 관념은 널리, 적어도 문명국이라는 나라 간 전쟁에서는 불쾌하게 여겨졌다. 설록 홈스 이야기로 유명한 아서 코난 도일(Arthur Conan Doyle)이 1914년 전쟁이 일어나기 직전에 독일 잠수함 8척이 영국민을 굶겨 항복을 받아내려고 상선들을 침몰시키는 이야기를 발표했을 때, 장군들은 이를 무시했다. 기술적 결함을 들어 무시한 것이 아니라 민간 선박의 파괴를 포함하는 전쟁 수행 방식을 받아들일 수 없었기 때문이다. “문명국이 방어능력 없는 비무장 상선을 어뢰로 공격하리라고는 생각할 수 없다.” 여하튼 전쟁은 폭넓은 사회 세력으로부터 분리되어야 했다. 그렇지만 이것이 문명국들이 서로 싸울 때 먼저 무슨 짓을 했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변은 되지 않는다.


총력전

히틀러의 전격전

미래의 전투에서 전차가 잠재적으로 떠맡을 역할은 제1차 세계대전에서 그 무기가 첫선을 보인 이후 열띤 논의의 주제였다. 주요 강국은 전부 장갑차를 개발했고 동시에 어떻게 하면 이를 가장 잘 사용할 수 있을지 논의했다. 전차는 단독으로 적의 영토 안으로 빠르게 이동하거나 좀 더 정연한 공세에서 보병을 지원하거나 방어할 때 기동 화력 역할을 할 수 있다. 상비군 사이의 전쟁이라는 고전적 이상으로 돌아가는 힘든 과제와 씨름한 자들은 늘 전차를 좋아했다. 이들은 제1차 세계대전의 무의미한 정면 공격 대신 신속하게 기동해 포위하는 작전을 옹호했다. 이제 이러한 작전이 실현되어 파괴적인 효과를 일으켰다. 전쟁을 승리로 이끄는 ‘전략적인’ 역할로만 비행기를 써야 한다고 확신한 광적인 공군 애호가들과 달리, 독일은 비행기가 지상작전을 지원할 수 있음을 알아보았다.


방법 면에서 히틀러는 1940년에 매우 좋은 효과를 본 전격전에 의지할 작정이었다. 그는 소련군이 기습적인 공격에 적절히 대처할 수 있다고 믿지 않아, 소련군을 빠르게 분쇄할 예정이었다. 히틀러가 보기에 독일 민족은 강철 같은 의지를 갖추어 약한 민족에 맞서 싸우는 강한 민족이었다. 히틀러의 장군들은 그와 같이 확신하지 못했다. 그러나 그들은 프랑스를 침공하기 전에도 확신이 없었고, 결국 그들이 틀렸음이 입증되었다. 그들은 모든 것이 속도에 달렸다고 이해했다. 소련이 그럭저럭 저항에 성공한다면 반드시 모든 계획이 실패로 돌아갈 것이었다. 400만 명에 이르는 막대한 규모의 독일군이 집결했지만, 소련군이 재편해 힘을 회복할 기회를 얻는다면 훨씬 더 많은 병력을 끌어모을 수 있었다. 전쟁이 신속하게 종결되지 않으면 독일군은 러시아의 혹독한 겨울을 견딜 의복과 장비가 부족할 터였다. 이것 역시 중요했다.


히틀러 전략의 중요한 특징은 그의 군사적 개념과 전술의 독창성에 있지 않았다. 사실 히틀러는 서유럽에서 전개한 전격전의 즉흥적인 성격을, 그리고 앞선 전쟁의 참호전 전선을 따라 방어전에 묶여 있는 프랑스에 대면했을 때 자신이 얼마나 운 좋았는지 완벽하게 이해하지 못했다. 그러나 그 전략이 러시아의 스텝 지역에선 맞지 않았다. 히틀러의 독창성은 다른 국민을 정복하는 것뿐만 아니라 그들을 노예로 삼고 몰살하려는 시도까지 포함한 전쟁의 목적에 있었다. 적의 사회에 피해를 입히는 것은 어떤 목적을 위한 수단이 아니었다. 그것이 바로 그 전쟁의 본질이었다. 유대인 박해는 나치가 점령한 영토에서 그 이데올로기와 실천의 확실한 일부였지만, 무차별적인 학살과 뒤이은 조직적 절멸정책은 독일군이 소련으로 진격해 들어가면서 정식으로 채택되었다. 1942년 1월 베를린 근교의 반제(Wannsee)에서 회의를 가진 후, 나치 최고위 지도부는 유대인 문제의 최종해결은 동유럽 유대인뿐만 아니라 이미 서유럽을 점령하면서 사로잡은 유대인까지 체계적으로 제거하는 것이라고 여겼다. 그것은 동유럽 전쟁에 의미를 부여했지만 그 전쟁의 실패를 확실하게 만든 방침이었다. 소련을 침공하기로 한 결정은 “나치의 DNA에 너무 깊이 박혀 멈출 수가 없었다.” 그러나 절멸이라는 목적에 자원을 유용하고 반(反)소련 진영으로 끌어들일 수도 있었던 민족주의자들을 잔인하게 점령해 멀어지게 만든 것은 히틀러의 승전 기회를 더욱 방해하는 요소였다.


전체주의의 몰락

바르바로사 작전과 진주만 공습은 다른 나라와 전쟁을 하기로 결정한 나라는 최초 공격의 군사적 충격을 극대화하려 한다는 단순한 논리를 반영했다. 침공과 기습은 함께 갔다. 두 사례에서 침공은 불가피성의 인식을 반영했다. 전쟁은 필연적으로 일어나게 되어 있었다. 따라서 최상의 조건으로 시작해야만 했다. 히틀러에게 볼셰비키와의 막판 대결은 역사적 숙명이었고 도조 히데키에게 미국과 일본은 근본적으로 양립할 수 없었다. 이러한 불가피성에 대한 인식이 없었다면 전쟁에 찬성하는 논거가 두 경우 모두 빈약했을 것이다. 막대한 자원을 가진 나라에 싸움을 거는 전쟁이었기 때문이다. 히틀러는 소련을 패퇴시킬 수 있다고 믿었지만 도조 히데키는 미국과의 싸움에서 승리하리라는 확신이 없었다. 또한 두 경우에서 모두 대담한 선제 조치가 신속한 승리를 가져올 수 있다는 관념은, 즉 앞선 전쟁들이 남긴 유산은 근자의 경험과 모순되었다. 독일과 일본은 기존의 적을 무찌르기 전에 추가로 새로운 적을 만들고 있었다.


공격에 관해 말하자면, 육상공격과 해상공격 둘 다 희생자들이 안심하고 있어 도움이 되었다. 스탈린은 히틀러를 불신했지만 히틀러가 공격을 시작하려 한다는 경고를 더 불신했다. 미국은 조만간 공격해올 가능성이 매우 크다고 판단했지만 필리핀이 표적이 될 것으로 예상했고 일본의 능력을 낮추어 보았다. 미국은 태평양 함대의 위력이 억제 요소가 되리라고 추정했던 것이다. 소련 정부와 미국 정부는 눈앞에 닥친 위험을 제대로 평가하지 못했다. 두 나라 정부는 적이 스스로 감수해야 할 위험을 크게 잘못 평가할 수 있음을 살피지 못했던 것이다. 마지막으로 두 경우에서 동일하게, 확보한 군사적 동력은 전쟁을 신속히 끝내기에 충분하지 않았으며 소련과 미국의 힘이 더 강하다는 것이 확연히 드러났고, 결국 압도적이었음이 입증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은 제1차 세계대전과 마찬가지로 명백한 군사적 승리로 끝났다는 점에서 고전적 모델을 확증했다. 유럽의 전쟁과 태평양 전쟁은 패배한 군대의 공식적 항복으로 종결되었다. 그렇지만 고전적 모델은 한계점에 다다랐다. 차이를 만든 것은 공군과 해군의 연합 전력에서 연합군이 차지한 엄청난 우세였다. 그 덕분에 연합군은 적군의 육상 전투력을 잠식해 전쟁 수행 능력을 고갈시킬 수 있었다. 전쟁에서 군 부문과 민간 부문 사이 경계가 흐려진 것은 고전적 모델의 가치를 훼손한 특별한 요소였다. 독일은 유럽 점령지에서 유격대의 저항에 부딪히면 무자비한 태도를 취했다. 이는 비전투원이 무기를 들거나 직접적으로 군대를 도왔을 때 위험을 감수해야 한다는 점에서 고전적 모델에 포함시킬 수 있다. 그러나 나치가 주민 전체를 적으로 삼기로 결정했을 때는 고전적 모델을 포기했다. 민간인에 대한 공격은 단지 법과 질서를 유지하는 문제나 군대와 관련된 주 표적을 공격하는 과정에서 생긴 유감스러운 손실, 그리고 다른 모든 방안이 실패했을 때 적의 의지를 읽으려는 필사적인 노력일 뿐만 아니라 그 전쟁의 근본적 이유 중 한 부분, 즉 열등한 종족에 대해 우세하다고 주장하거나 그들을 완전히 제거하는 수단이기도 했다.



전쟁의 원인 : 냉전 종식~21세기 초반

민주주의와 전쟁

자본주의적 평화의 문제

민주주의적 평화이론은 본질적으로 1945년 이후 북아메리카와 서유럽의 경험에서 비롯되었다. 자유민주주의와 개방경제를 채택한 나라들 간에 서로 보강하는 일련의 관계가 발전했다. 과거의 습관에서 벗어나려는 이 결의의 가장 놀라운 사례는 프랑스와 독일이 이탈리아와 벨기에, 네덜란드, 룩셈부르크와 함께 유럽석탄철강공동체(ECSC)를 수립한 것이었다. 이 유럽석탄철강공동체는 이후 온전한 관세동맹으로 성장해 마침내 폭넓은 권한을 획득하고 더 많은 회원국을 받아들여 유럽연합(EU)이 되었다. 그 밖에 무엇을 얻었든 유럽연합은 점차 유럽사의 가장 파괴적인 관계의 하나를 진정시켰다.


그러나 자유민주주의 체제들간의 관계가 온화해지고 친밀해졌다면 다른 하나의 관계는 적대적이고 냉랭해졌다. 1945년 소련 체제가 중부 유럽과 동유럽으로 확산되면서 위협을 느낀 미국은 다시 한 번 유럽의 안보에 어느 정도 책임을 느꼈다. 그리고 1949년에 북대서양조약기구(NATO)가 창설되었다. 1954년 소련은 이미 유럽의 위성국가들에 행사하고 있던 통제력을 토대로 동맹 체제를 수립했다. 그러므로 서유럽에서 전개된 긍정적인 평화는 대서양동맹이 부여한 안보에 의존했다고 할 수 있다. 서독이 정치적·경제적 관계에서 서쪽 대신 동쪽을 바라보려는 시도가 무엇이든 철의 장막에 의해, 즉 유럽 대륙을 두 개의 이데올로기적·군사적 진영으로 분리한 선에 의해 끊어졌다. 그렇기에 민주주의는 냉전을 악화시키는 요인이었다. 이 역사는 유럽 대륙을 갈라놓은 분열을 치유할 기회가 생겼을 때, 이전 공산주의 국가들에 민주주의를 전파해 치유하려는 열정을 설명해준다.


그러나 이러한 노력이 전체적으로 성공적이었던 유럽에서도 조심해야 할 이유는 있었다. 예를 들면 발칸반도에서는 독립과 민주주의로의 이행이 민족주의 및 국경 분쟁과 결합하면서 폭력과 불안정을 초래했다. 폐쇄경제에서 개방경제로 이행하면서 자본주의적 평화의 다른 문제가 드러났다. 새로운 개방경제에 법치가 부재해 부패하기 쉬웠던 것이다. 잭 스나이더(Jack Snyder)는 “한 국민 안의 강력한 엘리트들이 전쟁과 경제발전이라는 과제에 대중의 에너지를 끌어모을 필요가 있을 때” 민주화가 어떻게 민족주의를 낳을 수 있는지 주목했다. 미국의 어느 대책반은 아직 민주주의 체제가 아닌 이행기의 국가들이, 특히 정치적 참여가 편협한 이해관계와 엮였을 때 분쟁에 휘말릴 가능성이 크다고 지적했다.


민주주의적 평화 이론이 제시되면서 민주주의 체제로 이행되고 있는 국가들은 갈등과 내부 폭력을 경험했다. 이런 식으로 민주화의 문제는 1990년대 다른 큰 문제, 즉 내전의 확연한 증가와 연결되었다.


새로운 전쟁과 실패한 국가들

새로운 형태의 무력 충돌

많은 신생국이 만성적 불안정과 그로 인한 폭력에 시달렸다. 1990년대 중반이 되자 이 폭력은 유례없이 강렬하고 폭넓게 확산된 듯했으며 세간의 이목을 끌었다. 강대국 간 전쟁 위험은 줄어들었지만, 다른 유형의 전쟁이 뉴스를 지배했다. 좋은 소식은 미국 해군의 퇴역 장군이 1999년 대회에서 말했듯이 “국민국가 간 무장 충돌 시대가 저물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나쁜 소식은 이와 더불어 유별나게 역겹고 사악한 싸움이 급증했다는 것이었다. 한 연구에 따르면 1990년대 확인된 108건의 무력충돌 중 92건에서 조직을 갖춘 공동체 집단이 연루되었고 이들은 서로 싸우거나 정부에 맞서 싸웠다.

1980년대 이후 특정 시점에 15~25개 나라가 내전을 겪고 있었다. 메리 캘도어(Mary Kaldor)는 내전의 목적 및 자금 조달과 관련해 그러한 싸움을 앞서 지나간 옛 전쟁들과 비교한 뒤 단조롭게 ‘새로운 전쟁’이 도래했다고 선언했다. 새로운 전쟁은 “민족이나 씨족, 종교, 언어”의 갈등에서 비롯되었으며, “근대국가 구조의 해체나 침식” 때문에 가능해졌다. 또한 유격전과 폭동으로 싸움이 진행되었다. 다른 사람들도 표현을 달리했을 뿐 변화를 이야기했다. 칼레비 홀스티(Kalevi Holsti)는 “두 개 이상 국가의 조직된 군대”와 대비되는 “느슨하게 결합된 정규군과 비정규군, 세포와 때로는 중앙의 권위는 거의 없거나 전혀 없는 지역 기반의 군벌”이 수행하는 '인민 전쟁'(Peoples’ Wars) 을 언급했다. 북대서양조약기구 전임 사령관 루퍼트 스미스(Rupert Smith)는 “전장에서 벌어지는 인간과 기계의 전투’나 “국제적인 분쟁에서 벌어지는 대규모 결정적 사건”으로서 “전쟁은 더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선언했다. 대신 '인민 간 전쟁'으로 전환되었다. 이 전쟁은 흔히 비(非)국가 행위자를 끌어들였고 끝이 없을 것만 같았다. 마르틴 판 크레트(Martin van Creveld)는 “훨씬 작고 덜 강력한, 여러 면에서 1648년 이전에 존재했던 것과 유사한 더 원시적인 정치적 실체들”이 특징인 “새로운 형태의 무력 충돌이 발전하고 있다”고 썼다.


그러나 최근 내전과 이전 내전 사이에는 차이가 있다. 이전 내전은 대개 마치 국가 간 전쟁과 같이 정규군처럼 조직된 군대가 수행했다(미국 남북전쟁과 에스파냐 내전이 그러한 경우였다). 매복과 테러에 의존하는 자발적 의용군으로 시작한 군사행동도 특정 시점이 되면 국가의 군대를 물리칠 정도로 충분히 훈련받고 장비를 잘 갖춘 군대로 변모하려고 노력했다. 교전 당사자들은 아주 드문 경우에만 외부인의 중개를 통해 마지못해 평화협정을 체결했다. 정부는 협정을 받아들이는 것에 주저했다. 그것은 당연히 반군과의 타협을 의미했기 때문이다. 정부는 적을 분쇄하기를 선호했다. 반군도 똑같이 정당성 없는 정권을 지지할 생각이 없었다. 어느 계산에 따르면 1940년에서 1989년 사이 겨우 12건의 내전만 평화협정으로 끝났고 82건은 정부나 반군 어느 한편의 군사적 승리로 끝났다. 1990년에서 2005년 사이에는 변화가 급작스럽지는 않지만 27건이 평화협정으로 끝난 반면 군사적 승리로 끝난 것은 20건뿐이었다.


전쟁이 협정으로 끝났다면, 이것은 대개 전쟁 당사자가 갑자기 이성을 찾았다거나 유혈극을 끝내야겠다고 생각했기 때문이 아니라 단순히 지쳤기 때문이었다. 협정 유지 기록은 초라하고 종종 폭력이 재개되었다. 1990년대에 두드러진(그리고 지금까지도 지속되고 있는) 여러 전쟁의 뚜렷한 특징은 긴 기간에 행해졌다는 점, 당사자들이 좀처럼 전쟁을 끝내지 못했다는 점, 국제사회가 전쟁을 끝내려고 애썼다는(성공하기도 했고 실패하기도 했다) 점이다.


내전의 요인들

처음에 대부분의 논평을 이끌어낸 것은 새로운 전쟁의 피상적인 특징, 즉 야만성과 민족적 양극화, 범죄행위와의 연계였다. 그 결과, 국가의 분열을 초래한 요인들에 초점이 맞추어졌다. 1992년 6월 국제연합 사무총장 부트로스 부트로스갈리(Boutros Boutros-Ghali)는 『평화를 위한 과제』(An Agenda for Peace)를 발간했다. 이 책은 여러 문제 중에서 특히 ‘분쟁 종결 후 평화 구축’ 문제들을 다루면서 “분쟁 재발을 피하기 위해 평화를 보강하고 공고히 하는 데 이바지할 구조를 확인하고 뒷받침하는 행동”을 모색했다. 이듬해 제럴드 헬먼(Gerald Helman)과 스티븐 래트너(Steven Ratner)는 분명코 잘 대처할 수 없을 것으로 예상되는 나라들을 지원하기 위한 새로운 형태의 국제연합 신탁통치를 옹호하면서 이렇게 극적인 경고로 글을 시작했다.


“서반구의 아이티에서 유럽의 유고슬라비아의 잔해까지, 아프리카의 소말리아와 수단, 라이베리아에서 동남아시아의 캄보디아까지, 골치 아픈 새로운 현상이 출현하고 있다. 국제 사회의 일원으로서 스스로 부양할 능력이 전혀 없는 실패한 국민국가다… 그러한 나라들이 폭력과 무정부상태에 빠져 자국민을 위험에 빠뜨리고 난민 이동과 정치적 불안정, 마구잡이 전쟁으로 이웃 나라를 위협하고 있으니 무슨 일이든 해야 한다는 것이 분명해지고 있다… 개발도상국 세계의 고통을 경감시키는 것이 오랫동안 중요한 과제였지만 실패한 국가들을 구하는 것은 새로운 도전으로, 그리고 많은 점에서 어려운 도전으로 드러날 것이다.”


‘무너진 국가들’, ‘난처한 국가들’, ‘허약한 국가들’, ‘위험에 처한 국가들’, 아니면 그저 ‘약한 국가들’에 관한 글이 쏟아졌다. 각각이 어떤 상태를 말하는지 따지면 미세하게 구분할 수 있겠지만 자기 국가와 이웃 나라에 위험이 되고, 따라서 국제적으로 집중치료에 상당하는 조치가 필요한 나라들이 있다는 기본적인 관념은 동일했다. 2002년 미국 국가안보전략(NSS)에서는 2001년 9월 11일 테러 공격의 여파로 “미국은 정복하는 국가보다 실패한 국가들 때문에 더 큰 위협을 받고 있다”고 했다.


한 나라가 실패하고 있다는 말은 무슨 뜻인가? 독일 사회학자 막스 베버(Max Weber)가 제시한 국가의 정의에 따르면 폭력을 독점하고 일정한 영토에 권위를 행사할 수 있다는 것이 중요하다. 합법적인 폭력의 독점은 군사 쿠데타가 일어나거나 식량 폭동이나 파업 같은 비폭력적 저항을 군대가 진압하기를 거부하면 불가능해질 수 있다. 어느 체제가 대중 소요나 노골적인 반란, 쿠데타 시도, 분리주의 운동 때문에 곤란에 처할 때는 언제나, 군대의 충성이 곧 핵심 문제로 전면에 부상할 수 있다. 정부군의 주된 임무가 국가에 대한 폭력적 도전을 격퇴하는 것이 되는 그 순간에 내전이 발생하는 것이다. 반란은 성공하거나 진압되었다.


대반군 활동에서 대테러 활동으로

9ㆍ11이 바꾼 전쟁 담론

이 시점에서 태도는 극적으로 변했다. 테러는 대체로 아주 가끔 짜증을 불러일으키는 성가신 일쯤으로 여겨졌지만 이 사건을 계기로 국가적 트라우마의 원인이 되었다. 이전에는 생각조차 할 수 없었던 공격이 가장 생생한 상상력을 풀어놓았다. 한때 믿을 수 없는 것으로 치부되었던 것이 이제는 진지하게 받아들여야 할 것처럼 보였다. 지금까지 테러는 팔레스타인 집단의 비행기 납치나 해외 주둔 미군에 대한 공격처럼 테러가 아니라면 무시되었을 불만을 국제적 의제로 올려놓는 방법에 불과했으나 이제는 본국의 안전을 직접 위협하는 수단으로 바뀌었다. 과거의 테러는 폭력적이었고 특정한 목적이 있었지만 전쟁으로 보기 어려웠다. 반면 9ㆍ11은 전쟁 행위로 여겨졌다. 그 사건은 소규모 이슬람주의 극단주의자 집단을 초강대국과 맞붙게 한 이상한 전쟁이었다. 최대한 많이 파괴하기를 원하는 자들이 개방된 사회에서 얼마나 좋은 기회를 찾았는지는 많은 주목을 받았지만 적의 정치적 동기는 그만큼 주목받지 못했다. 이제 에너지 시설부터 식량 공급까지 모든 것이 결정적인 약점으로 보일 수 있었다.


1991년 발표된 톰 클랜시의 소설 『공포의 총합』(The Sum of All Fears)의 줄거리는 팔레스타인 집단이 슈퍼볼 경기장에서 핵무기(이스라엘이 잃어버린 무기)로 미국 행정부의 고위 인사들을 죽임으로써 미국과 소련 간 전쟁을 촉발하려 한다는 것이다. 보급판 발문에서 클랜시는 이렇게 말한다. “무기 기술과 무기 제조에 관련된 이 소설의 모든 자료는 수십 권의 책 중 어느 한 권만 보더라도 쉽게 얻을 수 있다… 돈만 충분하다면 사실상 개인도 5년에서 10년의 시간만 있으면 다국적 열핵폭탄을 만들 수 있을 것이다.” 실제로는 충분한 핵분열 물질과 유능한 기술자를 얻을 수 있다고 해도 기술적 어려움이 결코 적지 않고 조잡한 무기를 제조하려는 자라면 누구나 직면할 분명한 위험이 있었다. 그것이 대부분의 테러 집단이 지닌 전략에 적합한 것 같지도 않았다. 정치적으로 성공하기 위해 대량 살상이 필요한 집단도 거의 없는 것 같았다. 대량 파괴 무기는 테러리스트들이 선택할 수 있는 무기라고 생각되지 않았다. 그들이 과거에 우선했던 것은 “많은 사람이 죽는 것이 아니라 많은 사람이 지켜보는 것”이라고 여겨졌다.


많은 고위급 보고서가 보호받지 못하는 미국 도시들에 대량 파괴 무기가 쓰일 수 있는 위협에 주목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두 가지 가정이 있었다. 그러한 무기는 인구 밀집지역을 공포에 떨게 만드는 최고의 방법이었다. 그리고 그러한 무기는 그럴 능력이 있는 국가가 제작해서 사용할 가능성이 높았다. 그래서 하트루드먼 위원회(Hurt-Rudman Commission)는 “미국 도시들을 겨냥한 선전포고 없는 공격”을 가장 중대한 위협으로 인식하고 다음과 같이 암시했다.


“테러는 다수의 약소국이 강대국의 영향력을 봉쇄할 만한 매력적인 대응책으로 보일 것이다. 그러므로 국가가 후원하는 테러 공격은 아무 데도 연계되지 않은 독립적인 테러 집단들의 공격보다 더는 아니라고 해도 적어도 그만큼은 가능성이 있을 것이다.”


아무리 그럴듯해도 전문가와 유명인사로 구성된 위원단이 잠재적 위협에 관해 추측한 것과 불시에 아무런 의심도 없는 자들을 타격하는 무서운 현실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었다. 9ㆍ11에서 곧바로 진주만을 떠올리는 것은 피할 수가 없다. 진주만 피습 사건은 미국의 영토가 외부의 공격을 받은 마지막 순간이자 미국이 기습당할 때마다 머리에 떠오르는 순간이기 때문이다. 9ㆍ11 공격의 경우에는 강한 심리적 충격과 추가 공격의 우려가 있었다. 실질적인 의미에서 패배할 위험은 없었지만, 새로운 유형의 약점을 예리하게 인식하게 되었다. 대통령을 포함한 모든 사람이 이것이 “모든 것을 바꿔놓았다”는 것을 알았다. 미국이 그런 식으로 다시 당하는 일이 없도록 모든 안보 문제를 새로운 시각으로 다루어야 한다는 메시지를 받은 것이다. 미래 전쟁은 이전의 전쟁과 완전히 다르다는 인식이 널리 퍼졌다.


미래의 가장 강력한 적

이제 ‘약한’ 국가와 ‘실패한’ 국가에 대한 모든 문제가 더 선명하게 드러났다. 미국의 행동을 자극한 것은 1990년대 초 인도주의적 관심사보다 훨씬 더 근본적이었다. 9ㆍ11 공격에 숨은 오사마 빈라덴의 의도는 미국에 중동 일에 관여하지 말라는 충고였을지도 모른다. 베이루트와 모가디슈에 대한 반응을 보건대 이것이 완전히 비현실적인 기대만은 아니었다. 앞서 대량 사상자를 낸 테러가 약간 추상적인 공포였을 때, 이미 중동 정치에서 성가신 존재가 된 분노한 집단을 더 자극하지 않는 것이 현명하다는 인식이 주목받았다. 그러나 3,000명 이상 사망한(초기 추정치는 더 많았다) 9ㆍ11 공격 이후 대응은 미국의 군사적 능력을 중단 없이 보여주는 양상을 띠었다. 자신들을 거스르는 정권은 무너뜨렸다. 먼저 아프가니스탄에서 무너뜨렸고 뒤이어 2003년 사담 후세인 정권을 뒤엎을 기회를 잡은 뒤로는 이라크에서 그렇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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