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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동물을 헤아릴 것인가
저   자 : 셸리 케이건(역:김후)
출판사 : 안타레스
출판일 : 2020년 06월
215

어떻게 동물을 헤아릴 것인가


사람과 동물은 평등해야 하는가

사람과 동물이 동등하다는 관점-단일주의

일찌감치 밝혔듯이 이 책에서 논의하고자 하는 이 질문에 대한 나의 입장은 ‘계층적’ 관점이다. 즉, 도덕적 지위는 유동적이며 어떤 개체는 다른 개체보다 더 높은 도덕적 지위를 갖고 있다. 그렇지만 신중하게 고려해야 할 다른 입장도 있다. 이 관점은 다름 아닌 '단일주의'로, "도덕적 입장을 취하는 모든 존재는 동일한 도덕적 지위를 갖는다"는 견해다. 높거나 낮은 도덕적 지위에 대해 논하는 것은 혼란만 가중시킬뿐더러 부적절하고 무의미하다는 주장이다. 내가 단일주의자라고 부르는 이들은 오직 단 하나의 도덕적 지위만 있으며, 도덕적 입장을 가진 모든 존재는 철저히 그 지위를 공유한다고 말한다. 이 주장을 단적으로 표현하는 글이 있다.


“도덕적 지위란 정도의 문제가 아니다. 단지 ‘켜거나 끄는(on/off)’ 문제일 뿐이다. 모든 개체는 도덕적 지위를 갖고 있거나 없거나 둘 중 하나다.”


이 말은 여러분이 도덕적 입장을 갖고 있다면 여러분은 특정 도덕적 지위를 가지며, 도덕적 입장을 취하는 모든 존재는 같은 도덕적 지위를 갖기 때문에 고려해야 할 도덕적 지위의 수준이나 정도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반대로 만약 여러분에게 도덕적 입장이 없다면 여러분은 도덕적 지위를 결코 얻지 못한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은 다른 개체와 동일한 도덕적 지위를 갖고 있든지 아니면 도덕적 지위를 전혀 갖고 있지 않은지 둘 중 하나일 뿐이다. 위 인용문의 저자는 이를 ‘켜다(on)’와 ‘끄다(off)’로 표현했다. 갖고 있거나 아니면 없는 것이다.


어쨌든 단일주의는 매우 일반적인 관점이므로 우선은 우리가 이를 받아들일지 말지를 결정하는 것이 중요하다. 내 개인적 견해로는 단일주의 관점은 틀렸고, 동물윤리에 관한 규범 이론은 동물보다 사람 그리고 특정 동물이 다른 동물보다 더 높은 도덕적 지위를 갖는 계층적 관점으로 통합돼야 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러기 전에 잠시 단일주의적 대안을 세심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이 관점은 그 자체만으로 좋은 점을 상당히 많이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선 가볍게 고민해볼 수 있는 사례를 하나 들어보기로 하겠다. 어디서 한 번은 접했을 흔하디흔한 예다. 사람 한 사람과 쥐 한 마리가 물에 빠졌다고 생각해보자. 다행히 둘 중 한쪽은 구할 수 있지만 불행히도 둘 다 구할 수 있는 여건은 안 되기 때문에, 여러분이 한쪽을 구하는 순간 다른 쪽은 익사하게 될 것이다. 여러분은 어느 쪽을 구하겠는가. 사람? 아니면 쥐?


고민할 것도 없는 문제라고 하겠지만 만약 여러분이 단일주의자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여기에서 단일주의자들은 다음의 순서에 따라 논의를 이어갈 것이다. 사실 일반적으로 우리 대부분은 굳이 누가 그러라고 시키지 않아도 이럴 때는 사람을 구해야 한다는 일종의 도덕적 규범을 내포하고 있다. 사람과 쥐가 물에 빠졌을 때 사람을 구해야 한다는 강력한 도덕적 이유가 생기는 것이다. 물론 경우에 따라 그 이유에 균형이 어긋나면서 다른 강력한 이유로 인해 대안적인 행동을 하기도 한다. 이를테면 물에 빠진 개체가 사람과 쥐가 아니라 ‘둘 다 사람’일 때다. 애석하게도 두 사람 중 한 사람만 구할 수 있다. 이런 경우 둘 중 한 사람을 구해야 하는 강력한 도덕적 이유가 생기는 동시에 다른 사람을 구해야 하는 강력한 도덕적 이유도 생긴다. 이른바 ‘도덕적 동률(moral tie)’ 상황이 발생하는 것이다. 이런 상황이라면 누구를 구할지 동전을 던져서 결정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하지만 위의 사례는 다행스럽게도 사람 두 명이 아니라 쥐와 사람이다. 보통의 경우라면 고민할 까닭이 없는 상황이다. 그러나 단일주의라면 사정이 다르다. 사람이 쥐에 비해 더 높은 도덕적 지위를 갖고 있지 않으므로 물에 빠진 쥐를 구해야 하는 도덕적 이유와 사람을 구해야 하는 이유가 모든 면에서 똑같은 가중치를 갖게 된다. 이를 다른 용어를 사용해 표현하면 쥐의 도덕 청구권과 사람의 도덕 청구권이 동일하게 인지되는 것이다. 결국 여기에서도 도덕적 동률 상황에 빠지게 된다. 둘 다 사람일 때와 마찬가지도 동전을 던져서 누구를 구할지 결정해야 하는 것이다. 만약 동전을 던진 결과 쥐가 나왔다면 사람이 아니라 쥐를 구하는 행위가 도덕적으로 올바른 게 된다.


여러분이 사람을 구하기 위해 즉각적으로 뛰어들고 그 선택이 강력한 도덕적 이유에 의해 지지를 받더라도, 단일주의자들의 입장에서는 그저 편견일 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또한 그런 종류의 편견이 바로 단일주의자들이 우리에게 벗어버리라고 말하는 그것이다. 쥐에 우선해서 사람을 구해야 할 도덕적 이유 따위는 애초에 성립하지 않으며, 반대로 사람에 우선해 쥐를 구해야 할 이유도 없는 것이다.


사람의 삶과 동물의 삶

지금 우리가 살피고 있는 단일주의의 방어 방식은 나와 여러분을 포함한 대다수 사람들의 생각, 다시 말해 사람의 삶은 동물보다 가치 있으며 어떤 동물의 삶은 다른 동물보다 가치 있다는 그 생각을 핵심적으로 활용하고 있다.


그렇다면 그들은 어떤 종류의 가치를 비교하고 있을까? 답은 다름 아닌 ‘복지’다. 풀어 말하면 사람은 동물보다 더 잘살고 있으며 침팬지는 모기보다 더 잘살고 있다는 논리다. 잘사는 삶이란 삶의 질이 높아서 더 큰 혜택을 스스로에게 제공할 수 있는 삶을 말한다. 같은 논점을 조금 다른 용어를 통해 설명하면, 복지와 번영 능력에서의 커다란 격차로 인해 사람은 개나 소에 비해 훨씬 높은 수준의 복지를 누리며, 마찬가지로 개는 뱀이나 물고기에 비해 높은 수준의 복지를 누린다. 이는 생명을 잃었을 때 사람이 입는 위해가 쥐가 입는 위해보다 훨씬 크다는 사실에서 기인한다. 사람이라면 일반적으로 쥐와 비교할 수 없이 훨씬 질이 높은 삶을 살고 있기 때문에, 잃지 않으려고 하는 것 역시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크다는 것이다.


내가 앞서 지적했듯이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런 유형의 주장에 이의를 제기하기 어렵다는 사실을 알 것이다. 분명히 사람의 삶은 쥐보다 낫다. 그런데 나는 일부 사람들은 이런 식의 비교를 못마땅하게 여긴다는 것도 알고 있다. 쥐의 삶을 사는 것이 어떻단 말인가? 사람의 삶이 다른 동물의 삶보다 우월하다는 주장은 단순한 편견일 수도 있지 않을까? 그저 이 책을 읽는 여러분을 포함해 우리는 모두 사람이니까 사람의 삶이 개나 소의 삶보다 가치 있다고 너도나도 받아들이는 된 일종의 ‘우연의 일치’일 수도 있지 않을까? 어쨌든 우리는 다른 동물이 될 수 없고 우리끼리, 오직 사람들에게만 답을 구할 수밖에 없으니 어떻게 다른 답을 기대할 수 있을까? 뱀이나 다람쥐에게 요청해 설득력 있는 비교 결과를 얻지 못하는 이상 결국 사람의 관점에서 넘겨짚을 수밖에 없다는 사실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을 것이다. 이 태생적인 한계는 도무지 어쩔 수가 없다.



무엇이 도덕적 지위를 결정하는가

도덕적 지위를 갖게 하는 특성들

대체 무엇이 도덕적 지위와 그 격차를 만드는 요소일까? 사람이 새, 돼지, 물고기 등과 어떻게 다른지 생각해보자. 우리가 사람에게 새나 돼지나 물고기보다 더 높은 도덕적 지위를 부여하려고 할 때 그 근간이 되는 대표적인 특성은 무엇일까? 이미 언급했듯이 다름 아닌 '정신적 능력'이다. 보다 정확히 표현하면 우리는 ‘정신적 능력에서의 차이’에 반응한다. 그래서 동물보다 사람이 우월하다고 판단한다. 물론 더욱 주의 깊게 생각해보면 정신적 능력만으로는 모든 것을 설명하지 못할 수도 있고, 어

떤 개체의 도덕적 지위와 연관된 또 다른 특성들이 존재할지도 모른다.


나는 실제로 언젠가는 이것이 사실로 밝혀질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신적 능력은 도덕적 지위의 핵심 요소다. 사람은 인지적·감성적 측면에서 다양한 정신적 능력을 가진 데 반해 개나 고양이는 적은 정도로만 갖고 있다. 또한 돼지와 물고기, 물고기와 곤충의 관계에서도 마찬가지다. 정신적 능력에서의 차이가 사람이 동물보다 더 높은 도덕적 지위를 갖고 있는 이유, 그리고 동물과 동물 사이에서 도덕적 지위의 격차가 존재하는 이유를 설명할 수 있는 핵심 요소다.


정신적 능력이라고 할 때 이 ‘능력’은 무엇을 의미하는지 좀 더 살펴보기로 하자. 우선 직관적으로 어떤 개체의 도덕적 지위는 그 개체가 현재 하고 있는 생각이나 느끼고 있는 감정이라는 능력과는 큰 상관이 없어 보인다. 오히려 도덕적 지위는 사고와 감정의 전반적인 능력을 높이는 것과 관련이 있는 듯하다. 어떤 생각이나 느낌에 따라 도덕적 지위가 그때그때 오르내리는 것도 아니다. 어떤 사람이 꿈을 꾸지 않고 잠을 잔다고 해서 그 사람의 도덕적 지위가 잠자는 고양이와 같아지는 건 아닐 것이다.


정신적 능력의 핵심은, 이를테면 사람은 여러 가지 생각을 할 수 있고 다양한 감정을 느낄 수 있지만 동물은 그러지 못하거나 적어도 그 정교한 정도에서 사람에 필적하지 못한다는 데 있다. 마찬가지로 늑대가 물고기나 곤충을 훨씬 뛰어넘는 정신적 능력을 갖고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단, 여기에서 어떤 존재가 특정 능력을 가질 수 있다는 의미가 이미 그 능력을 보유하고 있다는 뜻은 아니라는 점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능력을 확보할 수 있는 ‘잠재력’도 도덕적 지위와 관련이 있다.


어쨌든 지금 우리가 가진 그림은 이것이다. 정신적 능력은 도덕적 지위를 갖는 데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 또한 정신적 능력의 복잡성이나 정교한 정도의 측면에서 다양한 차이가 있다는 이유로 인해 각 개체의 도덕적 지위가 달라진다. 다시 말해 동물이라고 해서 모두가 같은 도덕적 지위를 갖는 것은 아니다. 어떤 동물은 다른 동물보다 더 복잡한 생각을 할 수 있고 더 정교한 감정을 느낄 수 있다. 그리고 어떤 한 종류의 높은 능력을 가진 동물은 다른 종류의 능력도 함께 갖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런 것들이 모두 맞다면 우리는 각각의 정신 능력 조합에 따라 동물을 계층적으로 분류해 도덕적 지위를 상대적으로 부여할 수 있다.


물론 이와 같은 발상을 할 수 있는 것은 사람인 우리가 지구상의 모든 생명체 가운데 가장 정신적 능력이 높으며 따라서 도덕적 지위도 가장 높다는 전제조건에서 비롯된다(이를 부정할 사람들은 없다고 생각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이들이 떠오르는 것은 어쩔 수 없다). 그리고 사람이 가장 앞서고 발달된 정신적 능력을 보유하고 있다는 사실을 감안할 때 어떤 동물은 다른 동물보다 정신적 능력이 높고 이는 그대로 더 높은 도덕적 지위와 연결된다. 따라서 사람은 고양이보다 높은 도덕적 지위를 갖고, 고양이는 연어보다. 연어는 나비보다 더 높은 도덕적 지위를 갖는 동물의 도덕적 지위 계층도를 완성해나갈 수 있다.


그렇다고 해서 지금 순위를 매긴다는 것은 아니며 그것이 이 책의 목적도 아니다. 이미 고백했듯이 나는 동물들의 정신적 능력에 관해 아는 바가 별로 없을뿐더러 이미 과학에서 정립한 기존 지식에 대해서도 무지하기 때문에, 내가 여기에서 구체적 순위를 정하는 작업을 하는 것은 신뢰할 수도 없고 가치도 없다고 생각한다. 그 임무는 전문 분야 학자들에게 맡겨져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지금까지 해왔던 것처럼 정신적 능력 차이가 명확해서 논란의 여지가 없는 사례들로 제한해 계속 논의를 진행할 생각이다. 나는 이를테면 조랑말이 얼룩말에 비해 더 높거나 낮은 도덕적 지위를 가졌는지 결정하려고 시도하지 않을 것이며, 그 대신 물고기를 곤충에 비교하는 선에서 안전하게 도덕적 지위와 관련한 논지를 펴나갈 것이다.


모든 돼지가 아닌 ‘이’ 돼지와 ‘저’ 돼지-개체주의

그런데 최소한 한 가지 중요한 방식에서 이 시점까지의 논의가 방향을 잘못 잡은 것인지도 모르겠다. 지금껏 나는 반복적으로 개나 돼지 또는 물고기 등의 도덕적 지위에 대해 논의해왔는데, 그 과정에서 마치 도덕적 지위가 어떤 특정 동물 종이나 생물학적 분류에 의해 전체적으로 부여되는 무엇인 것처럼 이야기했다. 하지만 엄밀히 따지면 정확한 표현이 아니다. 도덕적 지위에 영향을 미치는 정신적 능력은 해당 개체가 ‘스스로의 권리’로 갖게 된 능력이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돼지라는 종이 평균적으로 또는 고정관념적으로 얻게 된 능력이 아니라, 바로 ‘이’ 돼지나 ‘저’ 돼지가 확보한 능력이다. 어떤 특정 개체의 도덕적 지위는 해당 개체가 도덕적 지위와 관련한 규범적 특성을 갖고 있는지 결여하고 있는지에 따라 달라지기 때문에, 우리가 개체의 정신적 능력이라고 말할 때는 해당 특정 개체의 능력을 지칭하는 것이다.


이와 관련한 극단적인 사례를 하나 들어보자. 복용하면 그 순간 사람이 되는 '슈퍼비타민(supervitamin)'이 있는데, 어떤 골든 리트리버(golden retriever) 한 마리가 그 약을 먹었다고 상상해보자. 이제 이 골든 리트리버는 개가 아니라 인간인 존재가 됐다. 일반적인 인간 성인 수준의 정신적 능력을 가진 개다. 이성과 자의식을 갖고 있으며, 추상적 사고를 할 수 있고, 자신이 원하는 미래를 그릴 수 있다. 한마디로 ‘사람’이다. 이와 같은 존재를 그저 개의 도덕적 지위, 전형적인 보통 개들의 도덕적 지위를 가진 개체로 취급한다면 도덕적으로 부적절할 것이다. 사람에 비해 낮은 정신적 능력을 가진 일반적인 개의 도덕적 지위와 이 특별한 개체와는 더 이상 실제적인 관련성이 없기 때문이다. 오히려 이제부터는 이 존재가 정말로 사람과 마찬가지의 도덕적 지위를 가졌는지의 문제가 중요해지는 것이다.


나는 우리가 ‘슈퍼애니멀(superanimal)’이라고 부를 수 있는 그런 사례가 실제로 발생했는지에 대해서는 모르겠다. 하지만 이 정도는 충분히 그 가능성을 상상해볼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한편으로 또 다른 가능성도 생각해볼 수 있는데, 이번에는 반대로 어떤 개체가 그 종보다 훨씬 못한 능력치를 갖고 있는 경우다. 사실 나는 이런 경우는 단순한 가능성이 아니라 광범위한 개체들에서 실제로 일어나는 일이라고 여긴다. 여러분도 알다시피 선천적 또는 후천적으로, 아니면 사고 때문에 뇌에 손상을 입어 심각한 인지적 감성적 장애를 겪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비극적인 일이지만 사람에게도 벌어지는 일이며(그렇기에 인간과 사람을 구분할 필요가 있다), 아마도 다양한 종의 수많은 동물들에서도 일어날 것이다.


이런 경우라면 ‘개체주의(individualism, 個體主義)’ 관점을 취하는 것이 적절해 보인다. 정신적 능력에 현저한 손상을 입은 동물은 자신이 속한 종의 다른 일반적인 개체들이 가진 것보다 낮은 도덕적 지위를 갖는다. 이 장의 제5절과 이후 제6장 제3절에서 자세히 논의하겠지만 우선 개략적으로 말하면, 큰 정신적 장애를 가진 개체는 생물학적 동종이 아니라 자신의 정신적 동류에 해당하는 도덕적 지위를 갖는다고 말할 수 있다.


도덕적 지위에 영향을 미치는 능력들

이 책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우리가 사람과 동물로부터 취한 사례들을 비교해 몇 가지 관련된 능력들에 대해 조금 더 이야기할 수 있는 수준이다. 이미 나는 사람의 삶이 동물의 삶보다 더 큰 가치를 가졌다고 주장했다. 사람이 동물에게는 아예 결여돼 있거나 보다 적은 ‘좋은 것들’을 훨씬 많이 갖고 있어서다. 여기에 더해 사람이 보다 가치 있는 삶을 살 수 있는 까닭은 동물보다 더욱 진보된 형태의 ‘행동 능력’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앞서 제2장 제3절에서 열거한, 사람이 동물보다 더 가질 수 있는 다양한 좋은 것들과의 연장선상에서, 이번에는 사람의 삶을 동물보다 풍요롭게 만드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는 몇 가지 행동 능력을 간략히 소개하고자 한다(이 목록도 더 깊이 들어가면 또 다른 추가 능력들이 지적될 것이고 엄밀히 따져서 목록 안에서도 중복 사항이 있겠지만, 설명 용도이지 이를 이론으로 정립하려는 것은 아니기에 큰 문제는 되지 않을 것이다). 이 내용은 사람의 도덕적 지위가 높은 이유와 동물의 도덕적 지위가 낮은 이유를 설명해주며, 이를 더욱 체계적으로 접근하면 동물과 동물 사이에서 도덕적 지위의 격차를 유발하는 능력들의 기본적인 구성 요소를 분류해내는 역할도 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첫째, 사람은 추상적이고 복잡한 사고와 감정을 위한 상당히 발달된 능력을 가졌다. 이는 숙고와 선택을 통한 자기성찰에서부터 외부 세계에 대한 이해에 이르기까지 사람이라는 존재의 거의 모든 측면에서 나타난다.


둘째, 사람은 보다 발달된 창의력과 상상력을 가졌다. 사람의 생각과 의사결정은 단지 경험에서만 정보를 얻지는 않으며 상상에도 의존하는데, 실제로 상상력은 그 범위가 굉장히 넓다.


셋째, 사람은 먼 과거와 먼 미래까지 생각할 수 있는 능력을 가졌다. 여기에는 과거와 미래에 관련된 생각과 욕구뿐 아니라 모든 사건을 시간적·명시적으로 배제할 수 있는 정교한 능력도 포함된다. 예컨대 내일까지 일어나지 않을 일을 원할 수 있으며, 다음 주든 내년이든 천 년이든 언제라도 일어나기를 바랄 수도 있다. 넷째, 사람은 장기적이고 복잡한 계획을 세우고 실행할 수 있는 능력을 가졌다. 그런 계획 중 상당수는 고도로 정교하고 능숙하며, 즉흥적이지 않다.


다섯째, 사람은 보다 높은 자기인식과 자기지각 능력을 가졌다. 선택과 행동, 정신적·육체적 상태, 환경 등을 자신의 것으로 인식하는 데 뛰어나며, 스스로를 명시적으로 인식하는 데에도 뛰어나다.


여섯째, 사람은 규범적 성찰과 동기부여(도덕적 성찰이나 동기부여까지 포함하지만 꼭 이에 국한되지는 않는) 능력을 가졌다. 사람은 사실에서뿐 아니라 개념을 근거로도 이성에 대응할 수 있는데, 욕망과 선호에서 갈등하고 있을 때조차 이성에 따라 평가하고 비교하고 행동할 수 있다.


일곱째, 사람은 자주적이고 자기통제적인 선택을 할 수 있는 능력을 가졌다.


여덟째, 사람은 특이하고 개별적인 선택을 할 수 있는 능력을 가졌다. 사람은 선택의 순간 더 광범위하고 중요하게 고려되는 다양한 대안을 검토하면서도 자신만의 선택을 할 수 있는데, 이런 능력은 개인과 사회 모두에서 엄청난 다양성을 만들어낸다.


이 모든 것과 그 이상의 방식으로 행동 능력의 기반이 되거나 그것을 구성하고 있는 능력들은 훨씬 더 발달해 있고, 우리가 동물에게서 찾을 수 있는 것들보다 훨씬 더 진보해 있다. 동물과 비교해서 그렇다는 것이다. 동물에게는 이와 같은 능력이 없다고(어떤 동물들에게서는 결여돼 있는 게 분명하지만) 주장하는 것은 아니며, 사람이 동물보다 이런 능력들을 보다 정교한 형태로 갖고 있다는 이야기다. 이것이 동물보다 사람이 더 높은 도덕적 지위를 누리고 있는 이유다. 또한 마찬가지로 동물들 사이에서도 이와 같은 능력 중 어떤 것을 갖고 있는지에 따라서, 또는 그들 나름대로 가고 있는 연관된 능력들의 정교한 수준에 따라서 도덕적 지위가 구분되며, 어떤 동물이 다른 동물보다 더 높은 도덕적 지위를 갖고 있는 이유가 되는 것이다.


동물에게는 의무론적 권리가 없는가

동물은 의무론의 대상이 아니라는 입장-제한적 의무론

동물을 도덕적으로 헤아려야 한다는 모든 견해는 이 도덕적 틀에 관심을 갖는다. 물론 일부 의무론자들을 포함해 동물의 도덕적 권리를 전적으로 부정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이것은 내가 이 책에서 마음에 두고 있는 입장은 아니다. 나는 동물들이 도덕적 입장을 취하고 있다는 관점, 예컨대 그들의 이해관계를 무시하는 것은 도덕적으로 정당하지 않다는 견해를 설명하고자 애쓰고 있다. 하지만 나는 동물과 사람은 이해관계를 고려하는 방식에서 달라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를테면 사람은 의무론자들이 주장하고 있는 종류의 권리를 갖고 있지만, 동물은 그런 권리를 갖고 있지 않다. 따라서 동물을 헤아릴 필요가 없다는 생각이 잘못이듯이, 동물을 헤아리기 위해 의무론을 전부 동물로까지 확장시켜야 한다는 생각도 잘못이다. 의무론의 범위는 적절히 제한돼야 한다.


그렇다면 동물에 대해 생각하기에 적절한 도덕적 틀은 무엇일까? 아마도 ‘결과주의’일 것이다. 물론 결과주의적 관점에서도 동물에게 불필요한 위해를 가하는 행위가 금지된다. 설령 동물을 해치는 것이 결과적으로 선을 실현하더라도, 실현된 선의 크기가 가해진 위해보다 작으면 여전히 도덕적으로 잘못된 행위다. 하지만 ‘종합적으로’ 더 나은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면, 동물에게 해를 입히는 행위는 허용될 것이다.


이런 방식으로 결과주의는 사람과 동물에 대해 각각 다른 규범적 기준을 적용한다. 사람이 동물에게는 결여된 도덕적 권리를 갖고 있다고 할 때 결과주의에서는 기본적으로 사람에 대한 위해 행위가 금지되는데, 만약 절대적 의무론을 받아들인 결과주의라면 어떤 상황에서도 금지되며, 온건한 의무론을 수용한 결과주의라면 권리에 대한 임계치에 도달하지 못할 경우 금지된다. 그런데 위해를 가할 대상이 동물인 경우 결과적으로 실현되는 선이 충분히 크다면 간단히 허용된다. 동물은 의무론의 영역에 속하지 않으므로 사람에 대한 금기 사항은 적용되지 않는다. 동물에 대해서는 그저 결과주의면 충분한 것이다.


자율성은 사람만의 특성인가

나는 제한적 의무론이 진지하게 고려할 만한 가치가 있는 관점이긴 하지만 동물윤리와 관련한 대안적 이론은 될 수 없다고 생각한다. 의무론과 동물의 권리를 연결시키지 못하면 우리의 논의는 더 이상 진행되지 않는다. 사람에게 제공되는 의무론적 보호 장치들에서 동물들을 쉽게 배제해 버리면 사실상 그것으로 끝이다. 더 숙고할 여지가 생기지 않는다.


동물을 도덕적으로 헤아려야 할 대상이라고 여긴다면, 사람에 대해서 그렇듯이 동물 또한 의무론적으로 바라봐야 한다. 물론 그렇다고 동물이 사람과 동일한 의무론적 보호를 받아야 한다거나 그런 이론적 토대를 만들어야 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우리는 이미 제7장에서 의무론에 대한 단일주의적인 접근방식을 살폈으며, 결국 의무론은 단일주의를 받아들일 수 없다는 결론을 이끌어냈다. 의무론과 단일주의와의 결합은 분명히 잘못된 만남이 된다. 그러나 나는 우리가 도덕적 사고방식에서 의무론적 요소들을 거부하지 않는 이상 의무론의 대상에서 동물을 완전히 배제하면 곤란하다고 생각한다. 사람보다는 약한 의무론적 권리를 갖는다는 게 올바른 관점일 것이다. 제한적 의무론에 입각한 사람과 동물의 구분은 우리의 고민을 확실히 덜어주지만, 동시에 아무런 사고방식의 변화도 이끌어내지 못한다. 그저 ‘사람은 사람’이고 ‘동물은 동물’일 뿐이다.


여러분이 이와 같은 내 생각에 동의한다면, 사람에 대해 의무론적 권리를 제공할 수 있게 해주는 근거가 무엇인지부터 따져볼 필요가 있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해 어떤 특성이 사람에게는 있고 동물에게는 없어서, 사람은 의무론적 권리를 갖고 동물은 갖지 못하는지 살펴봐야 한다. 우리가 어쨌건 제한적 의무론에 별다른 거부감을 갖지 않는 까닭은 사람에게 그런 권리를 갖게 하거나 생성하게 해주는 특성을 동물은 결여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다면 그 문제의 특성은 무엇일까? 의무론적 입장(이렇게 부를 수 있다면)을 취하기 위해서는 어떤 것들이 필요할까?


자, 그렇다면 의무론자들이 거론할 것 같은 특성에는 어떤 것들이 있을까? 의무론자들의 주장에 따르면 어떤 특성들을 기반으로 사람이 의무론적 권리를 가질까? 여러 가지 의견이 제시될 수 있지만 내가 보기에 가장 보편적인 생각(가장 일반적인 의견)은 다름 아닌 ‘자율성(autonomy)’이다. 사람은 자율적인 존재이며, 이 자율성 덕분에 현재의 의무론적 권리를 갖고 있다.


물론 자율성은 그 자체로 복잡하고 논쟁의 여지가 많은 개념일 뿐 아니라 지금도 정확한 윤곽을 드러내지 못한 채 토론이 계속되고 있는 주제다. 그래도 내가 생각할 때 기본 개념은 합리적으로 명확한데, 자율적 존재는 스스로의 삶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선호를 갖고 있으며, 외부의 힘이나 상황에 휘둘리거나 단순한 본능이 아닌 스스로의 의지에 따라 행동하며, 따라서 (최소한 어느 정도까지는) 스스로 선택한 삶을 산다. 여기에서 중요한 사실은 자율성이 삶의 목표를 추구하는 데 방해가 되는 요소들을 제거해주는 것도 아니며, 목표 달성에 필요한 자원이나 능력을 지원하는 것도 아니라는 점이다. 하지만 자율성은 스스로의 선호를 유지하면서 상황과 환경을 고려한 선택을 하고, 그 선택을 행동으로 옮기게 해주는 능력을 포함한다.


이런 맥락에서 사람은 자율성을 가진 존재이며 이를 근거로 사람은 의무론적 권리를 갖는다. 의무론적 권리는 설령 전반적으로 더 나은 결과를 가져오더라도, 우리의 의지에 반한 위해를 당하지 않도록 해주는 도덕적 보호를 제공한다. 그러나 자율적 존재는 스스로 어떤 삶을 살 것인가에 대한 통제력을 갖지만, 만약 보다 큰 선의 실현을 위해 개인의 비자발적 희생이 정당화되는 상황에서라면 이 같은 통제력은 감소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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