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의 흐름으로 보는 세계사
 
지은이 : 미야자키 마사카쓰(역:송은애)
출판사 : 한국경제신문
출판일 : 2019년 08월




  • 은화에서 지폐로, 다시 전자화폐로 변모해온 약 2,500년간의 통화의 역사를 중심으로 세계사를 설명하는 『돈의 흐름으로 보는 세계사』. 4,000년 전부터 세계사 변동의 토대는 바로 돈이었다. 때문에 지금껏 우리가 역사 시간에 배웠던, 민족·국가·권력자·이념을 기준으로 서술된 유럽 중심의 세계사로는 총체적인 역사 과정을 이해하기 어렵다. 

    이 책에서 저자는 국가나 민족, 이념 등의 기준이 아니라 돈의 흐름에 따라 조망해야 세계사의 진상이 보인다고 이야기하며, 파운드와 달러가 세계 기축통화가 된 이유, 닉슨 쇼크가 일어난 배경과 영향 등 돈의 흐름이 보이는 포인트를 30가지로 정리해 누구나 쉽게 세계 경제를 돌아볼 수 있게 도와준다. 



    돈의 흐름으로 보는 세계사


    4,000년 전, 상인이 ‘화폐’를 처음 유통하다

    통화 이전의 ‘화폐’는 어떤 모습이었을까

    통화는 기원전 6세기, 즉 4대 문명이 시작되는 시기(약 5,000년 전)와 현재의 꼭 절반쯤 되는 시기에 출현했다. 이런 까닭에 우선, 통화가 탄생하기 이전의 ‘화폐’의 역사를 간단히 살펴보자.


    물품의 교환은 처음에는 소박한 물물교환으로, 교환이 이루어질 때마다 생활에 필요한 물품 자체가‘교환증(화폐)’의 역할을 했다. 애초에 화폐는 이렇게 시작되었으며, 상황에 따라 보리, 대추야자 열매, 직물 등을 사용했다. 바로 물품화폐다.


    물품의 교환은 처음에 작은 촌락, 부족과 같은 공동체 내부에서 이루어졌지만 머지않아 공동체 외부로 확대되었다. 농민과 목축민 사이에 교환이 시작된 것이다. 세계사의 첫 번째 무대가 된 서아시아에서 황허강 중류지역에 이르는 건조 지대의 곡물을 생산하는 농지 주변 황야나 초원에는 보리를 생산하지 못하는 목축민이 많이 살았다. 이들은 보리를 얻지 못하면 생존할 수가 없었다. 넓은 지역에서 물물교환이 성행하자 농민과 목축민이 원활하게 교환하도록 도와주는 ‘상인’이 출현했다. 이에 등장한 것이 바로 ‘화폐’다. 서아시아에서는 은 조각(은덩이)을, 황허강 중류 지역에서는 별보배고둥 껍데기를 화폐로 사용했다.


    금속을 뜻하는 ‘메탈(metal)’은 그리스어의 ‘메탈론(metallon)’에서 파생된 말이나, 본래 ‘달’을 의미했다고 한다. 상인은 누구나 우러러볼 수 있는 ‘달’과 연관 지어 도시민, 농민, 목축민에게 은덩이를 팔아넘겼을 것이다. 별보배고둥 껍데기는 여성의 생식기와 출산을 떠오르게 하는 까닭에, 대가족이 중심이 되어 조를 재배했던 황허 문명에서는 일족의 번영, 재화 축적, 풍요를 상징하는 행운의 물품으로 귀한 대접을 받았다. 유라시아의 동서를 막론하고 화폐의 역할을 하는 물품에는 다수가 납득하기에 충분한 종교성, 신비성, 주술력이 필요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금’이 이집트에서 ‘화폐’가 될 수 없었던 이유

    문명 탄생기에 ‘금’은 이집트의 특산품이었는데도 정작 이집트에서는 오랜 세월 화폐로 사용되지 않았다. 금이 적게 생산된 탓도 있지만, 가장 큰 이유는 메소포타미아에서처럼 농민과 목축민 사이에 대규모 교환이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집트는 사막과 바다로 둘러싸인 폐쇄적인 농업 사회였기 때문에 단순한 물물교환이 오랜 기간 이어졌다.


    나일강 상류의 누비아 지방(아스완에서 수단에 이르는 지역)에서 대량으로 산출된 ‘금’은 고대 세계의 금 산출량의 90퍼센트에 달했으나 ‘태양신과 마찬가지로 자신의 몸이 금으로 되어 있다’고 주장한 파라오(왕)가 독점했다. 금은 금괴(ingot) 형태로 관리되어 파라오의 몸과 그 주변을 장식하는 도구 및 장식품으로 가공되었다. 이런 이유로 금은 화폐가 되지 못한 채 계속 권위와 종교를 상징하는 재화에 머물렀다.


    젊은 나이에 병으로 세상을 떠난 신왕국 시대(제18~20대 왕조로 기원전 16~11세기-옮긴이)의 파라오, 투탕카멘(기원전 14세기)의 미도굴 무덤에서 약 11킬로그램의 황금 마스크를 비롯해 110킬로그램에 달하는 황금 부장품이 출토되었는데, 이는 고대 이집트에서 ‘금’이 단지 파라오의 체면을 유지하기 위한 사치품이었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번거로운 화폐에서 간편한 화폐로! _‘통화’를 출현시킨 주화 혁명

    주화라는 획기적 발상으로 ‘화폐’가 대량으로 유통되다

    교환할 때마다 무게와 품질을 재야 하는 은덩이를 어떻기 하면 교환하기 쉬운 형태로 만들 수 있을까? 이 문제는 고대 사회가 해결해야 할 큰 숙제였다. 또 이집트의 ‘금’이 드디어 돈으로 유통되기 시작하자, 금덩이와 은덩이를 어떻게 교환해야 할지도 문제가 되었다(일단 1:13.5라는 교환 기준이 만들어졌다).


    이 같은 상황 속에서 기원전 7세기, 금ㆍ은의 산지였던 터키 서부 리디아에서 새로운 움직임이 나타난다. 주화가 탄생한 이유는 분명하지 않지만 그 재료에 주목해보면 일렉트럼으로 금과 은을 통합하려 한 듯하다. 단, 일렉트럼의 산출량이 극히 적고 금과 은을 섞는 방법도 균일하지 않았던 탓에 이 시도는 실패로 끝났다.


    다음 움직임은 기원전 6세기 중반 또다시 리디아에서 나타난다. 크로이소스(Kroisos, 기원전 596~546) 라는 왕이 주화 양식에 착안해 금과 은으로 만든 주화(금화, 은화)가 큰 성공을 거둔 것이다. 주화의 출현으로 화폐는 거래할 때마다 무게와 품질을 확인해야 하는 번거로운 것에서 ‘개수를 세기만 하면 되는’ 간편한 것으로 바뀌어 단숨에 널리 퍼져나갔다.


    주화에 새겨진 문장과 각인이 화폐가 지닌 신용의 근거가 되었으므로 왕은 가치를 측정하고 보증하는 ‘가치의 창조자’로 간주되었고, 화폐의 발행자로서 막대한 부를 손에 넣었다. 상인 대신 왕이 화폐를 발행하고 그 형태가 균일해지면서 화폐의 발행량이 폭발적으로 증가한 사건을 ‘주화 혁명’이라고 한다.


    로마에서 ‘샐러리’와 ‘머니’가 탄생하다

    도시국가 로마의 역사는 상업 민족인 에트루리아인이 티베르강 하구에 소금을 운반하기 위한 중계 도시를 만들면서 시작되었다. 하지만 기원전 640년, 로마는 에트루리아인의 소금에 의존하기를 멈추고 강 건너편 오스티아에 얕은 연못을 만든 후 바닷물을 퍼올려 햇볕에 말리는 제염소를 짓는다. 오스티아의 소금은 티베르강을 통해 이탈리아반도 각지로 운반됨으로써 로마가 자립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 공화정 로마의 경제 기반은 ‘소금(라틴어로 sal)’이었던 셈이다.


    로마는 국가 발전을 뒷받침했던 중장 보병(로마의 도시민으로 구성)에게 급여의 일부로서 소금 덩어리(salarium)를 현물로 지급했다. 나중에 소금을 사기 위한 돈이 지급되자 이를 샐라리움 아르겐툼(salarium argentum, ‘소금을 위한 은화’라는 뜻)이라 불렀고, 시간이 흐르면서 ‘샐러리(salary)’로 축약되었다. 샐러리는 훗날 여러 가지 생필품을 사기 위한 ‘급여’를 의미하는 말이 되었으며, 일본에 들어와 샐러리맨(salaried man, 급여 생활자)이란 일본식 조어로 재탄생했다.


    돈을 의미하는 영어 단어 ‘머니(money)’도 로마에서부터 유래했다. ‘머니’는 제국이 독점해서 발행하는 통화란 뜻으로, 그 어원은 주노 여신의 별명인 ‘모네타(moneta)’에 있다. 즉, 로마 제국은 모네타, 즉 ‘머니’ 여신의 신전에 주화를 제조할 독점권을 준 것이다.



    이슬람 세계의 ‘어음’이 유럽에서 ‘지폐’가 되다

    경제 팽창에 따른 ‘은 부족’ 사태로 어음ㆍ수표가 발달하다

    인도양이 개발되고 해안 도시를 중심을 상업이 활기를 띠면서 유라시아 경제는 급속히 확대된다. 그러자 이번에는 은 공급량이 경제 팽창 속도를 따라가지 못하는 문제가 발생했다. 10세기에 이슬람 세계가 극심한 은화 부족 사태를 겪게 되면서 아바스 왕조의 상인은 장벽에 부딪힌 경제를 신용 경제(소프트 이코노미)로 보강해야만 하는 상황에 부닥친 것이다. 이로써 ‘어음 혁명’이 조용히 진행되었다.


    어음은 액면에 기입된 만큼의 돈을 약속 기일에 지급할 것을 약속ㆍ위탁하는 유가 증권으로, 960년경에 처음으로 출현했다. 수표를 의미하는 영어 단어 ‘체크(check)’는 아라비아어에 그 뿌리를 두고 있는데(왕을 뜻하는 ‘Shah’에서 유래 – 옮긴이), 이는 환전 상인이 어음과 수표로 신용 거래 시스템을 완성했기 때문이다.


    ‘장기 어음 혁명’을 거쳐 유럽에서 지폐가 탄생하다

    10세기 아바스 왕조에서 발달한 어음 기술이 17세기 말에 국채ㆍ지폐 발행으로 마무리되는 긴 여정은 고대의 ‘주화 혁명’에 필적할 만한 화폐 시스템의 세계적 전환이다.


    ① 10세기, 연이어 일어난 시아파 봉기로 바그다드 주변이 혼란에 빠지자 경제의 중심이 지중해로 옮겨간다. 지중해에서는 이슬람 상인, 유대 상인, 이탈리아 상인 등을 중심으로 국제 상업이 성장하고,  ‘어음’ 기술은 이탈리아의 여러 도시로 퍼져나간다. 13세기에는 금융업자가 외환 어음으로 무역을 결제한다.


    ② ‘대항해 시대’ 이후의 ‘상업 혁명’으로 경제 중심이 북해 주변의 네덜란드, 영국으로 옮겨가 새로운 상업 중심지가 출현한다. 이때 스페인과 포르투갈에서 추방된 유대 상인이 네덜란드ㆍ영국에서 어음 기술을 발달시킨다.


    ③ 17세기 말, 육군 대국 프랑스와의 대전으로 재정난에 빠진 영국에서 유대 상인이 재정을 개혁한 결과, 군사비 조달의 수단으로 국채가 정착한다. 군사비가 계속해서 부족해지자, 낮은 이율로 정부가 군사비를 빌려주는 상인들이 잉글랜드은행을 조직해, ‘무기명 어음(은행권, 지폐)을 발행하는 권한을 정부로부터 획득하면서 지폐가 등장한다.


    근대의 화폐 시스템은 군사비 조달 시스템을 구축하는 과정에서 발달했다고도 할 수 있다. 그런데 지폐의 ‘신용’을 보증하고 유지하는 일은 유대 상인처럼 돈 다루기에 숙달된 이들이 아니면 도저히 불가능했다. 이런 까닭에 통화의 관리권은 ‘어음 혁명’ 과정을 거치면서 왕과 영주의 손에서 상인의 손으로 옮겨가게 된다.


    ‘은화’에서 ‘지폐’의 시대로 통화 시스템을 재편성한 영국

    영국은 어떻게 파운드 지폐의 신용도를 높여 통화로 만들었을까

    영국은 1689년 이래 100년 넘게 프랑스와 간헐적으로 전쟁을 벌였다. 이런 까닭에 17세기 말, 1,670만 파운드였던 국채 발행액은 미국 독립 전쟁이 끝난 1783년에는 2억 4,500만 파운드로 14.6배가 되어 지급해야 할 국채 이자가 무려 세입의 40퍼센트에 달했다. 재정이 급속도로 악화한 것이다. 이러한 재정 상황 속에서 1803년부터 나폴레옹 전쟁에 돌입했으므로 영국의 재정은 더욱 악화되었고, 잉글랜드은행이 발행하는 지폐에 대한 신뢰도는 크게 흔들렸다.


    그러자 윌리엄 피트(William Pit, 1759~1806) 총리는 파운드 지폐의 일시적인 태환 정지를 단행했다. 그리고 ‘잉글랜드은행의 지폐와 금의 태환을 재개하기 위한 방책을 검토하는 비밀 위원회(위원장이 필이었기 때문에 필 위원회라고 부른다)’를 설치해 지폐의 태환 재개를 검토하기 시작했다.


    1816년에는 화폐법이 제정되어 신용도가 높은 소브린 금화(순금 7.32 그램을 포함)가 새로이 주조되었다. 소브린 금화라는 확실한 금화의 발행으로 금본위제가 부활하게 되었고, 이와 더불어 금화와 태환되는 파운드 지폐의 신용 또한 단숨에 높아졌다.


    중앙은행인 잉글랜드은행에서 자신들이 발행한 지폐와 같은 금액의 금을 보관함으로써, 금과 지폐의 태환을 보증했다. 그 결과 돈의 중심은 점차 은화에서 간단히 추가 발행할 수 있는 지폐로 옮겨갔다. 영국은 신용이 높은 파운드 지폐를 탁월하게 이용함으로써 세계 경제를 움직이게 된다.


    하지만 파운드 지폐에도 위기가 닥쳤다. 1825년 런던에서 일어난 금융 공황이 잉글랜드은행에까지 영향을 미친 것이다. 이때 네이선 로스차일드는 유럽의 로스차일드 금융망을 이용해 대량의 ‘금’을 조달했다. 그리고 금과의 태환을 보증함으로써 잉글랜드은행을 위기에서 구해내는 데 성공한다.


    1844년 로버트 필(Robert Peel, 1788~1850) 총리는 보유하는 금괴와 은괴 액수에 1,400만 파운드를 더한 금액 안에서 독점적으로 파운드 지폐를 발행할 수 있는 권한을 잉글랜드은행에 주었다. 민간은행이었던 잉글랜드은행이 파운드 지폐를 독점적으로 발행할 권한을 가진 중앙은행으로 승격된 것이다. 이후 잉글랜드은행은 각국 중앙은행의 모델이 되었다.


    금본위제 보급으로 지폐의 시대가 열리다

    19세기 후반 각지에서 은 광산이 개발됨에 따라 정련법(광석에서 순도 높은 금이나 은을 뽑아내는 방법-옮긴이)도 덩달아 발전한다. 그 결과 은값이 계속해서 폭락하자 은화를 보조 화폐로 쓰려는 움직임이 강해졌다.


    당시 유럽 최대의 은 시장을 파리에 보유한 프랑스의 나폴레옹 3세 Napoleon Ⅲ, 재위 1852~1870 는 1867년 파리에서 유럽 주요국 대표가 모이는 세계 최초의 국제 통화 회의를 개최했다. 회의의 주요 내용은 금값과 은값을 1:15.5로 고정하고, 은을 통화로 부활시키며, 각국 통화의 교환 비율을 고정하자는 것이었다.


    북아메리카에서는 1889년에 개최된 범아메리카 회의에서 미국의 달러와 멕시코의 페소를 기축통화로 하는 아메리카 은 달러를 창설하고 은화를 아메리카 대륙 국가들의 공통 통화로 하자는 안건이 가결되었다. 또 같은 해 미국에서는 공화당이 연방 정부가 국내에서 생산된 모든 은을 매입해 은화를 주조하는 것을 의무화하는 ‘셔먼 은 구매법 Sherman Silver Purchase Act’이 제정되었다. 이는 런던의 금ㆍ파운드 경제에 대항해 뉴욕을 중심으로 은화 경제권을 만들려는 공화당의 속셈이었다.


    하지만 1893년 미국이 심각한 불황에 빠지자, 민주당 출신의 스티븐 클리블랜드(Stephen Grover Cleveland, 1837~1908) 대통령은 은화가 금융 혼란을 초대한다는 이유로 ‘셔먼 은 구매법’을 폐지해버린다. 그 결과 은 가격이 크게 폭락해 ‘아메리카 은 달러’ 구상은 일시적으로 중단된다. 공화당의 윌리엄 매킨리(William McKinley, 1843~1901 후보는 금본위제의 존속을 주장했고, 민주당과 인민당의 지명을 받은 상대 후보는 자동으로 디플레이션을 막을 수 있다는 이유로 금ㆍ은복본위제를 주장했다.


    한편 영국은 19세기에 해군력과 정보 수집 능력, 금융의 힘으로 전 세계 패권을 장악했다. 섬나라인데도 세계의 4분의 1에 해당하는 사람과 땅을 지배한 것이다. 19세기 후반에는 영국이 대량으로 인쇄할 수 있는 파운드 지폐를 교묘하게 사용해 금융 제국으로서 세계 경제를 움직였다. 은에 비해 금은 산출량이 절대적으로 부족하므로 금본위제하에서는 필연적으로 지폐를 널리 사용하게 된다. 금본위제가 보급됨에 따라 지폐의 시대가 열린 셈이다.


    민간 은행이 난립했던 신흥국 미국에서 중앙은행이 설립되기까지

    7,000종의 지폐와 713개의 은행

    미국에서는 독립 후 연방 정부의 권한을 강화하는 정책 중 하나로 통화 문제가 거론되었다. 초대 대통령 조지 워싱턴(George Washington, 1732~1799) 밑에서 재무장관을 맡은 알렉산더 해밀턴(Alexander Hamilton, 1755~1804) 은 미국이 농업 식민지 상태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반드시 산업을 일으켜 세워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렇기 때문에 1789년에 관세법을 제정해 80개 품목이 넘는 수입품에 관세를 부과했고, 이듬해에는 위스키에 소비세를 매겼다. 위스키에 부과한 세금 문제는 미국의 제2의 ‘홍차 분쟁’이 되었다. 결국 1800년에 정권이 교체되면서 위스키 소비세는 폐지된다.


    또 해밀턴은 지폐를 발행하는 중앙은행이 필요하다며 1791년 미합중국 제1은행(First Bank of United States)을 창설했다. 20퍼센트는 정부가 출자하고 나머지는 뉴욕과 외국의 금융 자본이 출자했으며 공인 기간은 20년으로 정했다. 오늘날로 치면 유럽연합이 통일 화폐인 유로를 채택한 것과 비슷하다.


    서부 출신의 포퓰리즘 정치인 앤드루 잭슨(Andrew Jackson, 1767~1845)은 제7대 대통령에 당선되자 북부의 금융 자본과 정부가 주 경제의 자주권을 침해한다고 물고 늘어졌고, 이에 은행은 자본금 대출 정지로 대항했다. 그러자 잭슨은 1836년 미합중국 제2은행의 폐지를 단행했다. 그 후 77년간 미국에서는 중앙은행의 부재 상태가 계속되었다.


    그렇다면 중앙은행의 부재로 미국에서는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 우선 주 정부가 은행 설립을 담당하게 되면서 1830년에 330개였던 은행이 1836년에는 713개로 증가했다. 결국 1,600개가 넘는 소규모 은행이 난립하게 되면서 발행된 지폐는 7,000종, 위조지폐는 5,000종에 달했다. 이처럼 어처구니없을 만큼 돈이 엉터리로 발행된 탓에 통화는 신용을 잃었다. 물론 이런 달러는 국제 사회에서 신용을 얻지 못했으므로 무역 결제 시에는 파운드가 사용되었다.



    ‘파운드’에서 ‘달러’의 시대로

    유럽의 쇠락과 미국의 부상

    제1차 세계대전은 일반 시민을 끌어들인 ‘총력전’이 되었고, 막대한 전쟁 비용이 부담으로 작용해 ‘유럽의 시대’는 급격히 붕괴했다. 제1차 세계대전 중 공장을 풀가동해 군수 물자를 유럽에 수출함으로써 운 좋게 세계 최대 채권국으로 급부상한 나라가 바로 신흥국 미국이다.


    제1차 세계대전 당시 유럽에서는 영국이 약 900만 명, 프랑스가 약 850만 명, 러시아가 약 1,200만 명, 독일이 약 1,100만 명이나 되는 대규모 병력을 동원했고, 4년간 계속된 전쟁으로 전투원과 비전투원을 합쳐 2,000만 명에 가까운 희생자가 발생했다. 영국은 전쟁 기간에 국가 예산의 70퍼센트를 군사비로 지출했다.


    전 세계 통화의 세력도 완전히 바뀌었다. 미국은 1921년에는 영국의 세 배, 1932년에는 여섯 배의 금을 보유하기에 이른다. 미국은 전쟁 전에 30억 달러에 달했던 채무를 완전히 상환했을 뿐 아니라 세계 최대의 채권국으로 올라선다. 하지만 미국이 1870년대 이후 이민자들이 급증해 갑작스럽게 만들어진 신흥국이었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았다. 국내 체제가 정비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여전히 지역 간이 분열이 심각해, 세계 정치를 선도하기에는 힘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세계대전 이후를 내다본 미국의 놀라운 경제 전략

    중일전쟁이 진흙탕 싸움으로 변하면서 경제 기반이 약한 일본은 곤경에 빠졌다. 이 와중에 미ㆍ일 통상협상이 결렬되고, 일본 해군이 진주만을 기습적으로 공격하면서 태평양 전쟁이 시작된다. 일본이 미국과 영국에 선전포고하자 삼국 군사 동맹에 의해 독일, 이탈리아도 선전포고를 했다. 이를 통해 미국의 의도대로 유럽과 아시아 전선이 연결된다. 미국은 일본, 중국, 독일, 소련이 피폐해진 유리한 시점에 전쟁의 주도권을 움켜쥔 셈이다.


    자국이 전쟁터가 되지 않았을 뿐 아니라 대량의 무기와 탄약을 추가 생산할 수 있었던 미국은 일본 전 국토에 대규모 공습을 퍼부어 일본 경제가 완전히 붕괴할 정도로 큰 타격을 주었다. 그리고 전쟁이 끝날 무렵에는 오키나와를 점령해 중국에 진출하는 발판까지 마련했다.



    불환지폐에 익숙한 세계가 전자화폐로 더욱 팽창하다

    ‘글로벌 경제’가 시작된 까닭

    1973년에 제4차 중동 전쟁이 발발하자 이를 기회라 여긴 석유수출기구는 석유 전략을 발동해 지금까지 1배럴에 2~3달러였던 원유 가격을 메이저와 사전 협의도 하지 않고 네 배로 인상했다.(제1차 석유 파동). 이후 석유수출국기구는 석유, 파이프라인, 제유 시설의 국유화를 추진해 원유 가격의 결정권을 메이저로부터 조금씩 빼앗아오는 데 성공한다. 석유 가격의 폭등은 선진 공업국에 엄청난 충격을 주었다.


    이후 실업률이 올라가면서 물가도 같이 상승하는, 지금까지 경험해본 적 없는 형태의 불황, 스태그플레이션(stagflation)이 전 세계로 퍼졌다. 기업 간의 경쟁이 사상 초유의 규모로 격화되면서 선진 공업국은 신속하게 인건비가 낮은 개발도상국으로 공장을 옮겼다. 이 현상을 글로벌 경제로의 전환이라고 한다.


    1967년부터 1987년까지의 20년간 글로벌 경제의 버팀목인 다국적 기업의 해외 투자 잔액은 아홉 배로 증가했다. 다국적 기업의 자금과 기술력을 이용해 한국, 대만, 홍콩, 싱가포르와 같은 아시아의 신흥공업경제지역(NIES)이 급성장을 이루었으며, 더욱 인건비가 싼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중국, 베트남 등이 그 뒤를 따라갔다.


    제2차 세계대전 후의 일본 경제를 아시아 경제 성장의 첫 번째 물결이라고 한다면, 아시아 경제는 일본의 부동산 버블이 꺼진 후의 ‘잃어버린 20년’때 한국, 대만, 싱가포르 등의 급성장이 두 번째 물결, 중국의 대약진이 세 번째 물결로 성장해온 것이다.


    ‘비트코인’이 ‘통화’가 될 수 없는 세계사적 이유

    사적으로 만들어지므로 공공성을 바랄 수 없다

    비트코인은 암호 통화의 총칭으로, ‘암호 통화’는 비트코인과 나중에 발행된, 현재 1,000종류 이상의 알트코인(altcoin)으로 나뉜다. 통화의 정의는 ‘국가가 가치를 보증하고 강제로 유통한 화폐’다. 따라서 당연한 말이지만 전 세계 대부분 국가에서는 비트코인을 통화로 간주하지 않는다. 통화는 공공성을 가진다는 것이 전 세계 공통 인식이다.


    특히 닉슨 쇼크로 통화가 불환지폐로 변한 후에는 전 세계 통화 제도가 중앙은행, 정부에 의한 관리통화제로 겨우 유지되는 중이다. 단, 세계 경제를 선도하는 미국에서만 그간의 이런저런 사정 탓에 민간 은행이 계속 통화 발행권을 보유하고 있다.


    이와 같은 돈의 현재 상황에 비추어보았을 때, ‘국가가 관리하지 않는 통화’를 표방하는 비트코인은 실제로는 다음과 같은 역할만 수행하게 된다.


    ① 통화에 대한 규제가 엄격한 나라의 돈을 외국으로 송금하기 위한 수단

    ② 자금 세탁의 도구

    ③ 급변하는 경제 상황에 대비하기 위한 금융 자산

    ④ 일확천금을 노리는 투기의 도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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