빵과 서커스
 
지은이 : 나카가와 요시타카(역:임해성)
출판사 : 예문아카이브
출판일 : 2018년 04월




  • 이 책을 통해 로마가 번영할 수 있었던 원인을 생각하며, 문서화·표준화와 같은 정보관리, 원천 기술의 개발과 전승 및 네트워크 구축과 같은 기술관리 측면에서 당시 로마가 이뤄낸 위업을 구체적으로 정리해볼 수 있다. 그러고 나면 자연스럽게 “그런데 왜 암흑기라는 중세로 넘어갔을까?”라는 질문이 맴돌게 된다. 찬란한 문화와 과학기술로 1,000년을 군림한 대제국이 멸망하자 ‘암흑의 중세’가 시작된 역사의 아이러니가 호기심을 자극한다면 이 책이 꽤 흥미롭게 읽힐 것이다.


    빵과 서커스


    로마제국이 남긴 유산들

    고대 로마는 다민족 국가로 전승에 따르면 기원전 753년 왕정(王政) 로마가 건국된 뒤 기원전 509년 공화정(共和政), 기원전 27년 제정(帝政)이 시작됐다. 제국 시대만 따져도 500년이 넘게 유지됐으며, 지중해를 ‘내해(內海)’로 만든 기원전 264년 ~ 146년 포에니 전쟁을 포함시키면 622년이나 지속한 장수 국가다.


    신이 만든 시골, 인간이 지은 도시

    2016년 기준으로 세계 유산의 총수는 1.052건인데, 그중 문화 유산은 814건이고 자연 유산은 203건이며 복합 유산은 35건이다. 이탈리아가 가장 많은 51건이고, 다음이 중국(50건), 에스파냐(45건), 프랑스(42건), 독일(41건) 등으로 주로 유럽에 편중돼 있다.


    이 책에서 다루는 고대 로마에 관한 세계 유산은 약 2,000년의 풍상을 견디고 살아남은 구축물과 복구물, 재사용된 것, 건축재로의 활용이나 채석장으로 전락한 인위적 파괴 그리고 자연재해를 면한 것들이다. 고대 로마는 현재의 유럽뿐 아니라 아프리카와 중동도 지배했다. 그래서 고대 로마와 관계가 있는 세계 유산 66건은 수많은 나라에 산재해 있다.


    그런데 로마제국 멸망 이후의 상황에 따라 오히려 번영에서 소외된 터키와 아프리카에 세계 유산에 해당하는 로마의 유산이 많이 남아 있다. 우선 먼저 ‘멸망’이라는 단어가 전혀 어울리지 않던 전성기 로마를 상징하는 세계 유산을 중심으로 로마가 어떻게 이뤄졌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도시는 문명이다. 18세기 영국의 시인 윌리엄 쿠퍼(William Cowper, 1731~1800)는 “신은 시골을 만들었고 인간은 도시를 지었다”고 말했다. 세계 최초로 산업화를 이룩한 영국이 1820년에 100만 명이 넘는 최초의 근래 산업도시를 선보인 이래 인구 100만이 넘는 대도시는 전세계를 통틀어 1900년대에도 11개에 불과했다. 그런데 로마는 2,000년 전에 인구 100만의 대도시를 운영하고 유지했다.



    도시의 완성, 장벽과 상하수도

    고대 4대 문명의 발상지가 보여주는 바와 같이, 물이 풍부하지 않으면 도시는 성립하지 않는다. 고대 로마는 도시의 물 수요를 채우기 위해 많은 수도를 부설했다. 외부의 적으로부터의 방어를 위해 만들어진 성곽 도시는 높은 장벽이 필수였고 인구가 늘어나면 필연적으로 상수도의 정비가 필요해졌다.


    성곽 도시와 장성

    민족과 국가 사이의 전쟁이 끊이지 않았던 고대 유렵에는 성곽 도시가 많았고 이민족의 대규모 침입을 막거나 제국의 영역을 명시하기 위해 장성(長城)이 많이 만들어 졌다. 이때의 장성이란 폐쇄만을 목적으로 한 차벽이 아니어서 도시 간 상거래를 위해 상인들의 통행도 가능했다.


    성곽과 장성을 공격하기 위한 공성탑(攻城塔)은 고대 문명 메소포타미아(Mesopotamia)의 아시리아(Assyria)에서 개발됐다. 공성탑은 경사로를 쌓고 올라가 성벽을 파성추(破城追)로 파괴하는 무기다. 이 공성탑의 모형은 로마 문명 박물관에 전시돼 있다.


    성곽 도시의 필수 요건

    전투가 시작되기 전에 항복한다면 사정이 달라질 수도 있겠지만, 농성하기로 결심하고 성문을 열지 않았다면 점령당한 뒤 학살을 당하거나 노예가 되는 경우가 허다했다. 따라서 항복도 하기 싫고 점령당하기도 싫다면 반드시 도시를 방어해낼 수 있는 강성한 성벽과 수비병이 필수였다. 일반적으로 수비병은 곧 도시의 주민이었다.


    일반적으로 튼튼한 성곽 도시에서는 높은 성벽으로 둘러싸인 좁은 땅에 많은 사람들이 살았다. 예컨대 수도 로마는 성벽 내 면적이 14제곱킬로미터였고 최대로 번성할 때에는 100만 명이 생활했다. 폐쇄적인 초과밀 도시를 건설하고 운영하자면 여러 가지로 불편한 일이 생기게 마련이다. 따라서 다음과 같은 대비가 필요했다.


    첫째, 전쟁 그리고 인재에 의한 대형 화재의 위험에 대비해 도시를 불연화(不然化)할 필요가 있다. 예를 들면 64년 로마 대화재에서는 로마 시 14개 구 가운데 3분의 2에 해당하는 10개 구가 불에 탔다. 그중 3개 구는 잿더미로 변했고, 7개 구는 무너진 가옥의 잔해만 약간 남았을 뿐이었다. 둘째, 불결한 상ㆍ하수의 의한 전염병을 막고자 깨끗한 물을 대량으로 제공할 수 있어야 했고, 수세식 화장실과 하수도 등이 필요했다. 또한 상ㆍ하수도를 지하화하지 않으면 안 됐는데, 성곽 도시 내 교통 혼잡의 요인이 됐기 때문이다. 셋째, 생활 효율을 위해 고층 주택과 포장도로가 필요했다. 넷째, 폐쇄 공간 내 거주자들의 불평불만을 해소하려면 오락거리를 제공해야 했다. 다섯째, 성곽을 만들려면 고도의 건설 기술이 필수적이었다. 수도 로마의 성벽은 석재나 콘크리트로 만들어졌다. 중국의 만리장성(萬里長城)의 경우 벽돌과 점토를 이용해 쌓은 판축(版築) 구조다.


    로마의 상수도

    고대 문명은 큰 강 유역에서 탄생했다. 나일 강의 이집트 문명과 티그리스ㆍ유프라테스 강의 메소포타미아 문명, 황허(黃河)강의 황허문명, 인더스(Indus) 강의 인더스 문명이 모두 그렇다. 인더스 강과 가까운 모헨조다로(Mohenjo Daro)는 기원전 2500년부터 1800년까지 번영했고 최대 4만 명이 거주했다. 수도, 오수 배수 시설, 개인 욕실, 공공 욕장 등이 존재했으며, 강수량의 계절적 변동을 고려해 저수지를 정비하는 등 수리공학이 발달해 있었다.


    또한 로마 지하 수도의 원형이라고도 불리는‘카나트(qanat)는 오늘날 이란의 건조 지대에 건설됐는데, 수직으로 파내려 간 갱도는 30~50미터 간격이었고 가장 깊은 곳은 약 300미터에 달했다. 카나트의 기원 시기는 분명치는 않지만 기원전 8세기에 이미 카나트에 의한 관개(灌漑)가 이뤄졌다. 고대 페르시아 제국 아케메니드(Achaemenid, 기원전 550 ~ 기원후 330)는 카나트가 없었다면 존재할 수 없었다. 이렇듯 기원전 753년 고대 로마 건국(기원전 753년) 이전에 상ㆍ하수도 시스템의 원형은 이미 있었다.


    편리성과 위생

    로마 시민의 물에 대한 요구는 단순히 안전과 위생만이 아니었다. 충분한 수량을 확실히 그리고 쉽게 확보하기를 원했다. 고대 로마에도 청동으로 만들어진 수도꼭지가 있었지만 가격이 매우 비싸서 실제로 사용된 수는 매우 적었다. 그래서 수돗물을 그대로 방류했다. 그러자니 또 수많은 수도 설비가 필요했다. 쉽게 사용할 수 있도록 한다는 취지에서 도로 곳곳에 저수지가 설치됐다. 폼페이 시가지에는 약 70미터 간격으로 설치됐다.


    서로마제국은 476년 멸망했다. 그 뒤 유럽의 수도 기술을 쇠퇴했고, 다시 로마의 기술 수준을 따라잡게 된 때는 1765년 제임스 와트(James Watt, 1736~1819)의 증기 기관의 개량을 비롯한 산업 혁명 이후의 일이었다. 고대 로마의 상수도 기술 수준이 얼마나 높았는지 실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성곽 도시 로마의 하수도는 위생적인 관점에서 어땠을까? 고대 로마에서는 그보다 앞선 시기에 에게(Aege) 문명에서처럼 수세식 변기를 사용했다. 풍부한 상수도의 잉여수를 활용한 것이다. 로마 시의 대하수도 ‘클로아카 막시마(Cloaca Maxima)’는 기원전 5세기 조성돼 이미 기원전 2세기에 지하화돼 있었다.


    참고로 로마 시대에 분뇨의 이용이 일절 없었느냐 하면 그것은 아니었다. 소변(암모니아)을 회수해 양털 기름을 제거하는 데 이용했다. 그 소변에 세금을 부과해서 남성용 유료 화장실을 지칭하는 용어에 자신의 이름을 남긴 황제가 바로 콜로세옴을 만든 웨스파시아누스(Vespasianus, 재위 69~79)다. 공공 화장실에 소변을 모으기 위해 항아리 암포라(amphora)를 설치하고 세금을 받았다. 오늘날에도 프랑스에서는 (남성용)공공 화장실을 ‘베스파시엔느(vespasiennes)’라고 부른다.



    빵과 서커스 ①: 식량과 바닷길

    고대 로마는 기원전 123년부터 시민들에게 저가 또는 무상으로 식량(밀)과 오락거리를 제공했다. 이른바 ‘빵과 서커스’다. 일반적으로 식량난이나 폭정이 극에 달하면 내란이 일어난다. 배고픔이 해결되고 오락(공연ㆍ검투사 경기 등)과 휴식(공공 욕장 등)이 제공되면 불평불만을 품는 시민들은 거의 사라진다.


    고대 로마는 영토와 인구를 효율적으로 관리하고자 생산지와 소비지를 분산했다. 주식인 밀 등은 아프리카와 시킬리아(Sicilia, 시칠리아) 섬 등지에서, 사치품인 비단과 향료는 인도 등지에서 조달했다. 거대 소비지인 로마 및 네아폴리스 등과 생산지 사이에 대량 수송을 위한 항로를 마련했으며, 대형 선박을 건조하고 항만 시설도 정비했다. 인도와의 교역은 17세기 초에 설립된 영국의 동인도 회사보다 무려 1,500년 더 빨랐다. 인도 항로의 가이드북이 생길 정도로 활발한 상거래가 이뤄졌다.


    지중해를 중심으로 한 대량 생산, 대량 수송, 대량 소비 그리고 사치품 유통이 로마의 기나긴 번영으로 이어졌다. 그 공급망 유지를 목적에 둔 해적 퇴치를 위해 고위직들(황제와 집정관급)이 식량 공급에 대한 책임을 맡곤 했다.


    빵과 서커스의 시대

    빵을 나눠준 까닭

    시민들에게 밀을 지급한 것은 공화정 로마(기원전 509~27)때인 기원전 2세기 후반 그라쿠스(Gracchus) 형제의 개혁에서 비롯됐다. 당초 목적은 로마 군단의 근간을 이루는 군단병(시민병ㆍ농민병)의 구제 및 생활 지원이었다. 구제가 필요할 만큼 시민병들의 가족은 빈궁했다.


    형인 티베리우스 그라쿠스는 자기 가문의 씨족명을 딴 명칭의 셈프로니우스(Sempronius) 농지법을 제출했다. 귀족의 기득권이었던 국유지 점유를 제한하고 시민들에게 토지를 재분배해서 자작농을 창출하겠다는 목적이었다. 그러나 반대 세력의 그라쿠스 형제 암살 등으로 이 개혁은 좌절됐다.


    고대 로마는 패권국가였으며 로마군은 매우 강했다. 당연한 말이지만 군단병이 건재하지 않으면 로마의 패권은 성립할 수 없었다. 로마는 카르타고와 세 차례에 걸친 포에니 전쟁에서 궁극적으로 승리함으로써 영토를 대폭 확대했고 지중해를 내해로 삼았다. 그런데 그 승리가 군단병의 생활에 큰 문제를 일으켰다.


    첫째, 로마로부터 멀리 떨어진 지역에서 오랫동안 싸워야 했다. 그 결과 농사지을 사람이 없어진 농지가 황폐화됐다. 둘째, 전쟁에서 승리하면서 획득한 시킬리아(시칠리아)와 아프리카 식민지에서 값싼 곡물이 대량으로 유입됐다. 셋째, 정복전에서 얻은 노예를 이용한 귀족들의 대농장이 확대됐다. 이런 이유들 때문에 밀 가격은 폭락했다. 결국 이들은 토지를 버리고 도시, 즉 로마 시로 몰려들었다.


    이는 로마군의 질적 저하를 야기했다. 시킬리아 섬 반란은 목축업자들이 저지른 낙인과 채찍질 등의 학대를 참지 못한 노예들이 일으켰다. 제3차 포에니 전쟁에서 카르타고를 섬멸한 로마 군단이 훈련도 제대로 받은 적 없는 오합지졸의 반란군을 신속하게 제압하지 못하고 진압에 무려 3년이 걸렸다.


    배와 항해

    로마제국의 영토에는 라인, 센, 론, 도나우 등의 큰 강이 있어서 하천 교통이 발달했다. 지중해 서부에서 브리탄니아까지의 교통은 ‘지중해-대서양-도버 해협’ 항로만이 아니라 육상으로도 강과 고갯길을 잇는 교통로가 정비돼 있었다. 하천과 고갯길을 이용한 수송에는 수레와 나룻배가 사용됐다.


    2세기 때 활동한 로마의 작가 루키아누스(Lucianus, 120? ~ 195?)는 이렇게 쓰고 있다. “알렉산드리아에서 오스티아를 향해 출발한 이시스(Isis) 호가 70일 걸려서 그리스 피레우스 항에 도착했다.”고 적고 있다. 이시스 호는 길이 55미터, 폭 14미터, 깊이 13미터의 거대 범선이다. 닻과 크레인까지 갖추고 최대 적재량은 현재 기준으로 1,200톤이었다. 하지만 깊이 13미터라면 모름지기 속도는 무척 느렸을 것이다. 70일이나 걸린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어쨌든 로마 시대 이후 적재량 1,200톤 이상의 교역선이 출현한 때는 한참 뒤인 18세기 말에서 10세기 초 동인도 회사의 선단이었다. 따라서 무려 1,600년 동안이나 인류는 로마의 조선 기술을 능가하지 못했던 것이다. 반대로 말하자면 로마는 그 정도로 높은 조선 기술을 확보하고 있었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로마 남쪽 30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위치한 작은 화산 호스 네미(Nemi) 호에 제4대 황제 칼리굴라가 이용한 두 척의 유람선이다. 길이 70미터에 폭 24미터짜리는 디아나 여신의 신전으로 불렸고, 궁전선으로 불린 그보다 작은 길이 70미터에 폭 20미터의 유람선은 대리석 바닥과 수도 및 욕실 시설까지 갖춘 그야말로 물 위의 궁전이었다.


    두 척 모두 침몰한 것으로 알려졌지만 1929년 로마제국의 부활을 내세운 베니토 무솔리니(Benito Mussolini, 1883~1945)가 발굴 명령을 내려 네미 호수 물을 빼면서 1932년 그 가운데 한 척이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1936년 무솔리니 정권은 호수 인근에 박물관을 세워 유람선 일부와 유물들을 전시했지만 제2차대전 때의 공습으로 불에 타 사라지고 사진만 남아 있다.



    빵과 서커스 ②: 오락과 휴식

    서커스는 오락과 휴식을 상징하는 용어다. 로마는 시민들에게 오락 및 휴식거리를 무료 또는 염가로 제공했다. 그런데 로마 시대의 서커스는 곡예사, 동물, 광대가 등장하는 현대의 서커스와는 다른 뜻이었다. 서커스는 라틴어 발음으로 ‘키르쿠스’인데 본래는 고대 로마의 전차 경주장을 일컫는 말이었다. 영화 <벤허(Ben-Hur)>에서 관중들이 열광하던 키르쿠스 막시무스가 그곳이다. 이후 키르쿠스는 나아가 콜로세움 등에서 열린 검투사 경기, 로마 희극 등의 연극 모의 해전도 포함하는 의미로 확장됐다.


    수도 로마 시의 경우 오락 시설로 검투사 경기가 열렸던 원형 경기장은 콜로세움을 비롯한 3곳, 원형 극장은 마르켈루스(Marcellus)극장을 비롯한 3곳, 전차 경주장은 키르쿠스 막시무스를 비롯한 6곳, 모의 해전장은 4곳이 있었다. 한편 휴식을 위한 시설은 카라칼라와 같은 대형 공공 욕장이 11곳, 소형 공공 욕장은 약 900곳이나 있었다. 환락의 도시라 부를 만하다.


    이들 시설을 짓는 데만도 막대한 자금과 고도의 건설ㆍ운영 기술이 필요하다. 영토의 변방에 이르기까지 시설을 만들고 운영했다는 것은 건설 및 운영에 관한 매뉴얼이 존재했고 그것이 제국의 구석구석까지 널리 퍼져 있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목욕을 사랑한 로마인들

    알려져 있듯이 고대 로마인들은 유독 목욕을 좋아했다. 대형 욕장이 수도에만 있었느냐 하면 브리탄니아의 공공 숙소와 같은 로마 가도상의 숙박 시설에조차도 80제곱미터 규모의 대형 욕장을 갖추고 있었다. 질이 떨어지지도 않았다. 모두가 수도 로마와 같은 수준이었다.


    수도 로마시의 공공 욕장

    널리 알려진 욕장으로는 아그리파 욕장을 비롯해 네로 욕장, 티투스 욕장, 도미티아누스 욕장, 트라야누스 욕장, 카라칼라 욕장, 데키우스(Decius, 재위 249~251) 욕장, 디오클레티아누스 욕장, 콘스탄티누스 욕장 등이 있다. 권위의 상징이기도 했고 시민들의 선심을 얻기 위한 목적이기도 했다.


    수용 인원을 보면 카라칼라 욕장은 하루에 6,000명 ~ 8,000명, 디오클레티아누스 욕장은 동시에 3,200명을 수용할 수 있다고 기록돼 있는데, 두 곳 모두 로마 최대 규모의 공공 욕장이었다. 공공 욕장의 목욕 요금은 0.25아스(현재 한화 기준 약 250원)로 매우 저렴했다. 황제나 귀족은 물론이고 시민들 나아가 노예들도 목욕을 할 수 있었다. 게다가 남녀 혼욕이었다고 한다. 때때로 혼욕 금지법이 시행되기도 했지만.


    욕장의 영업 개시 시간은 오전 일과가 모두 끝난 오후 2시경이었다. 저녁 7시 또는 8시까지 이용할 수 있었다. 25아스로 공공 욕장의 유지ㆍ관리비를 감당할 수는 없었다. 부족분은 국가가 부담했다. 그렇게 해서라도 시민들의 불평불만을 막을 수 있다면 이득이라고 본 것이다.


    212년 공사를 시작해 216년 완공된 카라칼라 욕장도 규모가 크다. 온탕 욕조만 지름 36미터의 돔 구조다. 하드리아누스 황제가 세운 판테온의 43미터, 1626년 완성된 산 피에트로 대성당의 42미터와 맞먹는 크기다. 더욱이 교회 건축물과 달리 욕장은 대량의 물을 비축하고 가열하고 순환시키고 또 배수까지 해야 한다. 따라서 매우 복잡한 구조가 될 수밖에 없었다. 고도의 기술이 필요했다는 의미다.


    키르쿠스, 전차의 질주

    전차 경주장은 로마 시내외에 6곳, 제국 전체에 77곳이 있었다. 오늘날의 모터 스포츠와 마찬가지로 고대 로마인들도 속도가 주는 짜릿함에 빠져들었다. 황제들도 매우 좋아했다. 전체 77곳 전차 경주장 가운데 터키 지역에 가장 많은 30곳이 있고, 그리스에 17곳 이상, 이탈리아 본토에 6곳(로마 시 근교에 5곳), 이스라엘ㆍ시리아ㆍ레바논 등에 6곳 이상, 튀니지에 4곳이 있었다. 전차 경주는 고대 그리스에서 유래했고 그리스와 그 영향권인 터키 등에서는 성행했지만, 수도 로마를 제외하고 기타 지역에는 한정적으로만 보급됐다.


    로마의 전차 경주

    로마인들에게 전차 경주를 알려준 이들은 그리스인들을 통해 경주를 알게 된 에트루리아인들이었다. 경주 순서는 이랬다. 경주에 참가한 전차들의 대열이 갖춰지면 황제 등이 마파(mappa)라고 불리는 천을 떨어뜨려 레이스의 시작을 알렸다. 일단 레이스가 시작되면 전차들은 서로 달리다가 상대 전차를 중앙 분리대인 스피나(spina)에 충돌시키려고 시도했다. 스피나의 양끝에는 반환점을 나타내는 푯대가 있었다.


    레이스 자체는 그리스 시대와 거의 변함이 없었지만 로마 시대에는 매일 수십 번, 때로는 1년에 수백일 동안이나 진행됐다. 한 번 레이스 할 때마다 12대의 사두마차가 출전한다고 가정하면 기수가 12명이고 말이 48마리가 된다. 레이스의 횟수도 하루 평균 12경기다. 거리에 따라 달라지겠지만 대개는 30분 간격으로 출발했다. 그렇게 하루에 100회 레이스가 펼쳐진다. 경주에 참여하는 말의 수만 해도 4,800마리다.


    당연한 일이겠지만 내기도 있었다. 팀 플레이와 개인 플레이의 혼합 방식으로 운영되는 경기방식도 흥미를 가중시켰을 것이다. 팀 플레이, 즉 전차 경주 당파의 분화와 발전은 네로 황제 때 시작됐다고 전해진다. 


    관중을 열광시키기 위해 전차를 모는 마부의 기술이 중요했다. 우선 마부 자신이 그리스 시대와 마찬가지로 대부분 노예임에도 불구하고 경주 승자가 되면 많은 영예를 누릴 수 있었다. 그들은 월계관과 상금을 획득하고 충분한 횟수의 승리를 얻으면 자유민의 신분을 살 수도 있었다. 요컨대 마부에게는 승리에 대한 인센티브가 주어졌다. 유능한 사람은 출신과 관계없이 우대한다. 고대 로마인들 특유의 기질이었다.


    두 번째로 마부들은 그리스 때와는 달리 위험한 플레이로부터 자신의 몸을 지키기 위한 투구나 머리 보호대를 착용했다. 위험한 플레이라고 표현한 이유는 그리스 전차 경주에서 마부는 고삐를 두 손으로 잡고 있던 반면 로마 때는 허리에 고삐를 감아 둘렀던 것이다. 그러나 전차가 사고를 당했을 때 고삐에 묶인 채 끌려가다가 죽거나 크게 다치는 경우도 많았다. 이런 상황에 대비해 마부는 스스로 고삐를 자르기 위한 칼을 지니고 있었다.


    이렇게 마부에게 인센티브와 장비를 주면 박력 있는 레이스가 펼쳐질 것은 분명했다. 로마인들은 놀이의 천재들이 아니었나 싶다. 그리스의 것을 모방하면서도 크게 발전시켰다. 모방을 통한 창조였다.


    빵과 서커스 그 이후

    ‘빵과 서커스’의 로마는 식량 지원과 도시 거주민의 오락과 휴식을 무료 또는 염가로 제공함으로써 실현된 것이었다. 재원, 건설 기술, 유지ㆍ관리 및 운영 기술이 있기에 가능한 일이었지만, 다른 시각으로 보면 로마제국 시민들에 대한 궁극의 아부라고 할 수 있다. 그 결과로 저율의 세금과 고율의 군사비 비율을 실현했다. 이것이 로마 문화가 무르익은 요인이 되기도 했지만 유웨날리스가 말한 나태한 시민들을 만들기도 했다. 이른바 포퓰리즘이다.


    그렇다면 로마제국 멸망 후에는 이러한 곳들이 어떻게 됐을까? 잘 유지됐을까? 그렇지 않다. 우선 공공 욕장의 경우 로마제국 말기 기독교가 널리 퍼지게 되면서 향락 시설이자 알몸이 될 수밖에 없는 공공 욕장은 기독교 이데올로기에 부합되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수많은 인력들, 급수, 연료 등을 조달하기 위한 비용을 감당하지 못해서 기존에 있던 공공 욕장들도 하나둘씩 폐쇄됐다.


    원형 극장과 원형 경기장, 전차 경주장, 모의해전장도 사정은 마찬가지였다. 기독교 사상에 부합하지 않아 점점 쇠퇴했다. 전차 경주장은 막센티우스 황제 때 로마 교외에 건설한 것이 마지막이다. 그리고 전차 경주에 열광하던 시민들도 줄어들었다. 당연한 말이지만 빵과 서커스는 천하가 태평하고 돈이 많지 않으면 못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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