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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는 게 힘드냐고 니체가 물었다
저   자 : 박찬국
출판사 : 21세기북스
출판일 : 2018년 12월
263

사는 게 힘드냐고 니체가 물었다


“내 인생은 왜 이렇게 힘들기만 할까?”

편안함만을 바라는 사람에게 행복은 오지 않는다

인생은 욕망과 권태 사이를 오가는 시계추

사는 것 자체가 고통이라고 설파한 철학자들이 있습니다. 쇼펜하우어가 그 대표적인 사람이겠지만 철학 이전부터 존재해온 대부분의 종교들도 사실은 우리네 인생을 고통이라 여깁니다. 굳이 거창하게 철학이나 종교를 거론하지 않아도 누구나 한 번쯤은 사는 게 고통이라고 생각한 적이 있을 것입니다.


앞서 이야기 했듯이, 사는 게 왜 고통인지에 대해 철저하게 파고들어간 철학자가 바로 쇼펜하우어입니다. 그는 인생의 본질을 다음과 같은 단 한마디의 말로 정리했습니다.


인생은 욕망과 권태 사이를 오가는 시계추와 같다.


우리는 무엇인가를 끊임없이 갈구하는 욕망의 존재입니다. 맛있는 것을 먹고 싶은 욕망, 멋있는 이성을 내 것으로 만들고 싶은 욕망, 좋은 대학에 들어가고 좋은 직장을 얻고 싶은 욕망, 자식이 공부를 잘했으면 하는 욕망…. 이런 욕망들을 충족시키지 못할 때 우리는 결핍감으로 괴로워하지만, 정작 그것이 충족되더라도 만족감과 행복감은 그리 오래가지 않습니다. 만족감이나 행복감은 욕망이 전제되지 않는 한 그 자체로 성립할 수 없습니다.


아이들이 장난감을 가지고 노는 광경을 보고 있노라면 쇼펜하우어의 말을 분명하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매력적인 장난감을 모았을 때 아이는 그것을 갖고 싶은 욕망에 시달리게 됩니다. 그래서 부모님에게 사달라고 떼를 쓰고 경우에 따라서는 꾸중을 듣기도 하겠지요. 그런데 그렇게 눈물겨운 노력 끝에 장난감을 갖게 되었을 때 아이가 느끼는 행복감을 그야말로 순간에 불과합니다. 그러다가 TV에서 자기가 가지고 있는 장난감보다 더 재미있어 보이는 새로운 장난감을 보게 되면 그것에 대한 욕망에 사로잡힙니다.


그런데 이런 현상은 비단 아이들의 삶에서만 보이는 것일까요? 바뀌는 것은 단지 욕망의 대상에 불과할 뿐 어른의 삶도 아이들의 삶과 본질적으로 동일한 것은 아닐까요? 어른들은 아이들처럼 장난감을 탐하는 것이 아니라 보다 풍족한 생활이나 멋있는 이성을 갖고 싶어 합니다. 이러한 사실만 생각해봐도 ‘인생은 욕망과 권태 사이를 오가는 시계추와 같다’는 쇼펜하우어의 말에 수긍하지 않을 수 없지요.


물론 쇼펜하우어의 말을 듣기 이전에도 우리는 쇼펜하우어가 설파하는 인생의 실상을 이미 어느 정도 감지하고 있었습니다. 다만 우리네 대부분은 쇼펜하우어처럼 분명하게 삶의 본질을 통찰하지 못한 채 그저 인생을 살고 있었을 뿐이지요. 하지만 쇼펜하우어의 단 한마디 말을 통해 인생의 본질은 새삼스레 우리 눈앞에 확연하게 드러나게 됩니다.


아마 이런 것이 철학과 과학의 다른 점이자 과학이 줄 수 없는 철학의 묘미일 것입니다. 과학은 우리가 전혀 알지 못했던 새로운 정보를 알려줍니다. 이에 반해 철학은 우리가 이미 삶 속에서 체험하고 있을 뿐 아니라 이미 어렴풋하게나마 이해하고 있는 것을 확실하게 개념화해서 우리 눈앞에 보여줍니다. 흔히들 제일 어려운 학문이 철학이라고 말하곤 하지만, 이런 사실을 고려해볼 때 철학은 오히려 가장 쉬운 학문이기도 합니다. 철학은 우리가 이미 흐릿하게나마 온몸으로 알고 있는 것을 분명히 보여주는 역할을 하기 때문입니다.



“삶의 의미를 어디서 찾아야 할까?”

의미를 찾지 않을 때 의미 있는 삶이 된다

놀이에 빠진 어린아이처럼 살아라

고등학교 3년을 니힐리즘의 심연에서 허우적대다가 거의 탈진 상태에 이르렀던 저는 대학에 들어간 지 얼마 되지 않아 마르크스주의자가 되어버렸습니다. 저는 무의미의 심연에서 저를 끌어올릴 밧줄을 마르크스주의에서 찾았고 그 밧줄에 의지한 채 근 7년의 시간을 보냈습니다. 그런데 대학을 졸업한 지 3년쯤 되어 마르크시즘에 대한 회의가 저를 사로잡았습니다. 자본주의 체제가 조장하는 인간들 사이의 경쟁을 극복하면서 형제애가 넘치는 사회를 이룩하려 했던 마르크스주의가 또 다른 경쟁을 낳는 것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또 다른 경쟁, 그것은 곧 위대한 혁명가로 인정받기 위한 경쟁이었습니다.


그러나 마르크스주의 조직 내에서 위대한 혁명가로 인정받지 못하는 사람들은 도덕적으로까지 열등한 존재로 매도당합니다. 마르크스주의 조직 내의 이러한 현실은 저로 하여금 마르크스주의라는 이념 자체에 대한 회의감을 촉발시켰고, 마르크스의 이론 자체가 가지고 있는 맹점들에 눈을 뜨게 만들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저는 니체가 영원회귀永遠回歸 사상을 깨달으며 겪었던 황홀경의 체험과 유사한 경험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 순간 저는 고등학교 1학년 때부터 저를 짓눌러왔던 삶의 허무감에서 벗어나게 되었고, 제 가슴을 짓누르던 돌이 치워지는 시원한 느낌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의미를 향한 저의 방황이 끝나는 순간이었지요. 그 후부터 저는 니체가 말했던 것처럼, 아이처럼 인생을 살려 하고 있습니다.


아이처럼 산다는 것을 무엇일까요? 이 말은 곧 인생을 유희처럼 사는 상태를 가리킵니다. 우리가 어떤 재미있는 놀이에 빠져 있을 때 우리는 ‘왜 이 놀이를 해야 하는가’라는 물음을 제기하지 않습니다. 그냥 그 놀이가 재미있어서 놀 뿐이지요.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 순간에 ‘왜 이 놀이를 해야 하지?’라며 놀이의 의미를 묻게 될까요? 그것은 바로 놀이의 재미가 사라졌는데도 계속해서 그 놀이를 해야 할 때입니다.


우리 인생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삶의 의미를 묻게 되는 것은 삶이 더 이상 재미있는 놀이가 아니라 그저 자신의 짊어져야 할 무거운 짐으로 느껴질 때입니다. 그때 우리는 삶을 무거운 짐으로 느끼면서 ‘왜 이 짐을 짊어져야 하지?’라고 묻게 되는 것입니다.


철학교수를 하다 보니 종종 젊은 사람들이나 나이 든 분들에게서 메일이나 전화로 ‘인생의 의미가 무엇이냐’라는 질문을 받곤 합니다. 헤겔 같은 철학자는 인생과 세계에 대해 장대한 이론체계를 제시했지만 정작 그 자신은 자기의 삶에 대해서 허무감을 느꼈을 수도 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니체와 더불어 실존철학의 아버지로 불리는 키르케고르라는 사상가는 다음과 같이 이야기합니다.


소위 철학자들이란 사상적으로는 커다란 궁궐을 지어놓으면서도 실제 인간으로서는 빈약하기 짝이 없는 조그만 집에서 살고 있는 자다.


‘인간의 의미’에 대한 물음은 그런 물음이 제기될 필요가 없을 정도로 삶을 재미있는 유희처럼 살아갈 때에만 해소될 수 있습니다. 인생의 의미에 대한 물음은 어떤 이론적인 답을 통해서도 해결될 수 없고, 그런 물음 자체가 일어나지 않는 상태로 우리의 삶을 변화시키는 것으로만 해결 가능합니다. 다시 말해 그런 물음은 그것 자체가 해소되어서 사라지는 방식으로만 해결될 수 있다는 뜻입니다.



“사람들 사이의 갈등은 어떻게 풀 수 있을까?”

고귀한 인간은 자신의 적을 필요로 한다

이 세상은 모든 것들이 힘을 겨루는 세계

누구나 한 번쯤은 ‘세상은 왜 이 모양일까?’라고 한탄한 적이 있을 것입니다. 왜 사람들은 서로 사랑하지 못하고 증오하며 싸우는 것일까요? 인류 전체를 대상으로 생각해보면 원자탄과 수소폭탄을 비롯한 모든 무기들이 백해무익하다는 것은 누구나 알고 있지만, 지금도 무수한 무기들이 만들어지고 사용되고 있습니다.


인간들 간의 갈등과 투쟁을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는 일찍부터 종교와 철학의 중요한 고민거리였습니다. 그렇다면 니체는 이런 것들에 대해 어떻게 생각했을까요? 잘 알려져 있지만 니체가 가장 존경했던 사상가 중의 하나는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인 헤라클레이토스입니다. 헤라클레이토스는 ‘투쟁은 만물의 아버지다’라는 유명한 말을 남긴 바 있지요. 그렇다고 무분별한 투쟁과 갈등을 마냥 긍정한 것은 아닙니다. 다면 니체는 마르크스 같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인간들이 서로 형제처럼 사랑하는 사회’는 꿈에 불과하다고 보았습니다.


인간의 세계에서뿐 아니라 동물의 세계에도 투쟁은 존재합니다. 니체가 보는 세계에서 살아 있는 것들은 자신의 감각적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힘을 확인하고 증대시키기 위해 싸웁니다. 이 세상은 모든 것들이 서로 힘을 겨로는 세계이고, 니체는 이러한 현실을 냉정하게 인정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합니다.


손을 대는 것마다 금으로 변했다는 전설 속의 미다스왕은 어느 날 디오니소스의 시종인 실레노스에게 인간에게 가장 좋고 훌륭한 것이 무엇인지를 물어보았다고 하지요. 이 질문에 실레노스는 꼼짝도 하지 않고 굳어진 채 침묵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왕이 답변을 강요하자 마침내 껄껄 웃으면서 이렇게 대답했답니다.


하루살이 같은 가련한 족속이요, 우연한 고난의 자식들이여, 그대는 왜 듣지 않는 것이 그대에게 가장 이로운 것을 내게 말하도록 강요하는가? 가장 좋은 것은 그대에게 불가능한 것이다. 그것은 태어나지 않는 것이며 존재하지 않는 것이고 무無로 존재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대에게 차선의 것이 있다면 그것은 일찍 죽는 것이다.


니체는 이 이야기를 근거로 그리스인들은 사람들이 보통 생각한 것과는 달리 명랑하고 낙천적인 사람들이 아니었다고 봅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니체가 그리스 사람들이 염세적이고 우울한 인간들에 머물렀다고 여겼던 것은 아닙니다. 그는 인간들 사이의 투쟁을 생산적인 경쟁으로 승화시킴으로써 이러한 염세주의를 극복한 이들이 바로 그리스인이라고 보았으니까요.



“신념은 꼭 필요한 걸까?”

신념은 삶을 짓누르는 짐이다

성장을 두려워하는 자가 신념을 만든다

허무주의에 사로잡혀 인생에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생각했던 고등학생 시절에도 저는 제 삶에 의미를 부여해줄 절대적 진리를 구하고 있었습니다. 그러한 절대적 진리는 정교한 이론의 형태로 나타날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다양한 종교적, 철학적 교설敎說을 기웃거렸지요. 그러면서 저는 니체와 키르케고르, 하이데거와 야스퍼스와 같은 사상가들을 중심으로 한 실존철학이 삶의 의미를 마련해줄 것이라 기대하게 되었고, 대학에 들어가면 꼭 실존철학에 천착하겠노라 마음먹었습니다. 실존철학이 저를 허무주의의 늪에서 구해줄 것이라는 기대가 그 시기를 버티게 해준 유일한 힘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렇게 허무주의의 늪에서 벗어났지만 저는 사실 어떤 특정한 이론 체계에 사로잡혀 그것의 시각으로 모든 것을 보고 재단하는 독선적이고 편협한 인간이 되어버렸습니다. 저는 그 후부터는 교수님들의 강의를 우습게 여기기 시작했습니다. 나는 이미 절대적인 진리를 발견했으니 교수님들에게서 배울 것은 없다고 생각했을 뿐 아니라 교수님들은 부르주아 반동이데올로기를 학생들에게 주입하고 있다고 생각하게 된 것이지요.


독서 또한 극히 편향된 방식으로만 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마르크스주의를 정당화하는 입장에서 쓰인 책들만 읽으면서 마르크스주의를 변화하는 제 논리를 강화하는 데만 급급했고, 마르크스주의를 비판하는 책들은 부르주아 이데올로기에 사로잡힌 것으로 단정하면서 무시해버렸습니다. 동기들이나 후배들과 토론할 때도 마르크스주의를 상대방에게 심어주겠다는 의도가 앞서서, 말만 토론이지 사실은 선전과 선동으로 일관했습니다. 그런 정신 상태였으니 아무리 많은 독서와 토론을 하더라도 세계를 보는 시야는 넓어질 수 없었고 항상 편협한 상태로만 남아 있었지요.


이렇게 하나의 이데올로기에 온통 사로잡힌 채 거의 7년여를 보내던 저는 점점 마르크스주의에 회의를 갖게 되었고 종국에는 그것을 포기하기에 이르렀습니다. 마르크스주의를 버린 후 허무주의가 다시 저를 엄습해왔지만 그래도 저는 어떤 특정한 이론 체계에 구속되지 않은 자유로운 시각을 확보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토론에서는 아무런 기쁨을 느낄 수 없었습니다. 마르크스주의를 버린 후 참된 사상을 찾고 싶어서 입학하게 된 서울대 철학과 대학원에서도 대부분의 학생들을 지배하고 있었던 것은 마르크스주의였습니다.


그러다가 저는 독일에 유학을 가게 되었고 그곳에서 어떠한 이론체계에도 사로잡히지 않은 선배들을 만나 교류하면서 토론의 즐거움도 느낄 수 있었습니다. 마르크스주의에 사로잡혀 있었을 때 저는 상대방을 논리적으로 압도하여 상대방이 그 이념을 받아들이게끔 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습니다. 그러나 유학생활을 하면서 토론의 기쁨과 의의는 상대방을 이기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에게서 무언가를 배우고 제가 옳다고 믿었던 견해의 문제점을 발견하는 데 있다는 사실을 실감하게 되었습니다.



“왜 인생이 자꾸만 허무하게 느껴질까?”

예술은 삶의 위대한 자극제다

예술을 통해 삶은 충만해진다

니체는 근대 과학이 제시하는 것은 세계 자체의 모습이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니체에 따르면 근대 과학이 인간에게 제공하는 것은 세계의 실상에 대한 진정한 인식이 아니라 인간의 생존에 필요한 정보입니다.


니체는 살아 있는 것들의 모든 활동은 단순히 물리화학적인 작용, 또는 생존이나 종족보존에의 욕망에 의해서가 아니라 자신을 강화하고 고양시키려는 욕망에 따라 규정된다고 보았습니다. 인간이 목표하는 것이 단순히 생존이나 종족보존이라면 그렇게 생존하기 위해 그리고 종족을 보존하기 위해 발버둥치다가 죽어가는 인생 앞에서 허무를 느낄 일은 없을 것입니다.


인간이 궁극적으로 원하는 것은 오래 연명하는 것이 아니라 짧게 살더라도 충만하게 사는 것입니다. 니체는 인간의 삶에 이렇게 충만함을 부여하는 것은 과학이 아니라 예술이라고 봅니다. 예술은 세계를 단순히 물리화학적인 작용이나 생존, 그리고 종족보존을 위해서 모든 것들이 발버둥치는 삭막한 곳이 아닌, 아름답고 충만한 곳으로 보여줍니다. 이에 대해 니체는 ‘오직 예술을 통해서만 삶은 정당화된다’라고 말합니다.


니체는 예술가가 건강한 힘으로 충일해 있는 상태를 ‘도취’라고 일컫습니다. 니체는 그의 처녀작인 <비극의 탄생>에서 예술을 낳을 수 있는 충동을 가상에의 충동과 도취에의 충동으로 나누고 있습니다. 가상에의 충동이란 아름다운 가상을 만들어내고 싶어 하는 충동으로, 건축, 미술, 조각과 같은 조형예술을 가능하게 하는 충동입니다. 이에 반해 도취에의 충동이란 도취에 빠져 개체의식을 상실하고 모든 것들과 하나가 되고 싶어 하는 충동인데, 이러한 충동은 춤과 음악 같은 비조형 예술을 가능하게 합니다.


그런데 후기에 들어서 쓴 <우상의 황혼>에서 니체는 도취가 모든 예술을 가능하게 하는 충동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이때 니체는 우리의 모든 신체기관의 흥분이 고조되어 있는 상태를 도취라는 말로 가리켰습니다. 가장 오래되었고 근원적인 형태의 도취라고 니체가 여기는 것은 성적 흥분과 같은 도취입니다.


니체는 이러한 도취에서 본질적인 것은 힘 내지 생명력의 상승과 충만의 느낌이라고 보았습니다. 예술은 이러한 느낌에서 비롯되는 한편, 예술을 경험하는 자들을 그러한 느낌 속으로 끌어들입니다. 이런 느낌에 빠질 때 우리는 사물들을 아름답게 보게 됩니다. 다시 말해 생명력이 넘치게 될 때 우리는 사물들을 아름답게 보는 식으로 그것들에게 아름다움을 부여한다는 것입니다.


예술가가 사물에게 아름다움을 부여하는 방식은 흔히 이상화理想化라고 불립니다. 이러한 이상화는 사물에서 사소하거나 부차적인 것을 빼내거나 제거하는 것으로 간주되지만, 니체는 이상화의 본질이 주요한 특징들을 크게 드러내어 강조하고, 그럼으로써 다른 특징들은 사라져버리게 하는 것이라고 보고 있습니다.


우리는 사물의 훌륭하고 멋있는 측면을 두드러지게 하면서 그것을 풍요롭게 만듭니다. 예를 들어 히말라야 산에는 자그마한 돌멩이들이 무수히 많지만, 화가가 그 산을 그릴 때는 그러한 돌멩이들을 모두 사상捨象하면서 히말라야 산의 숭고한 모습을 드러내는 것처럼 말이지요.



“나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할까?”

자신의 성격에 스타일을 부여하라

약점조차 눈부신 것으로 만들어라

니체는 ‘그대 자신이 되어라’라고 말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자기를 극복하라’라고 이야기합니다. 언뜻 보기에는 ‘그대 자신이 되어라’라는 말과 ‘자기를 극복하라’라는 말에서의 ‘그대 자신’, 그리고 ‘자기를 극복하라’라는 말이 서로 모순처럼 여겨질 수 있습니다. 전자의 ‘그대 자신’은 사회가 요구하는 인간형이 아니라 ‘자신의 성격과 소질 등을 승화시킨 참된 자기’를 가리키는 것이라 볼 수 있습니다. 이에 반해 ‘자기를 극복하라’라는 말에서의 ‘자기’는 사회가 요구하는 인간형에 영합하려는 거짓된 자신을 가리킵니다. 즉, 진정한 의미의 자기 자신이 되려면 거짓된 자기를 극복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니체는 우리에게 각자의 개성을 살리라고 말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초인 내지 고귀한 인간이 되라고 말합니다. 초인 내지 고귀한 인간은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추구해야 할 이상적이고 보편적인 인간상에 해당하는 반면 개성을 살린다는 것은 그러한 보편적인 인간상과는 대립되는 각자의 독특한 삶을 추구하는 것으로 여겨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니체는 ‘자기 자신이 된다는 것’은 각자가 자신의 타고난 성질대로 사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삶에 하나의 스타일을 부여하는 것이라고 보고 있습니다. 그는 심지어 자신의 성격에 ‘스타일을 부여하는 것’이야말로 위대하고 희귀한 예술이라고도 이야기 합니다. 이렇게 자기의 성격에 스타일을 부여하는 사람은 자신의 본성이 지닌 강점과 약점의 모든 것을 조망하면서 그것들을 하나의 예술적 계획에 따라 변용하는 사람입니다. 이런 이들은 또한 자신을 끊임없이 단련하면서 제2의 본성을 덧붙이고 제1의 본성 중 일부분을 변용하면서 자신의 성격을 하나의 작품으로 완성합니다.


니체는 이렇게 자신을 통제하고 지배할 줄 아는 사람을 초인 내지 고귀한 자라고 일컫습니다. 니체는 이러한 인간만이 진정한 의미에서 다른 사람들에게 명령할 수 있고 다른 사람들을 지배할 수 있다고 봅니다. 이때의 ‘다른 사람들에게 명령하고 다른 사람들을 지배한다’라는 것은 단순히 자기 멋대로 다른 이들을 다룬다는 것이 아니라, 그들로 하여금 자기 자신을 실현할 수 있도록 도울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흔히 니체는 기존의 모든 관습과 도덕을 파괴하고 본능과 욕망의 자유로운 발산을 요구한 사상가로 오해되곤 하지만, 정작 그는 ‘모든 위대한 것과 충일한 힘은 끊임없는 자기극복을 통해서 형성된다’라고 말합니다. 또한 니체는 이렇게 자신을 극복한 인간이야말로 아름다운 인간이지만 이러한 아름다움은 타고나는 것이 아니라 획득된 것이라고도 말합니다.


아름다움은 우연이 아니다. - 어떤 종족이나 어떤 가족이 갖는 아름다움, 그들의 모든 품행에서의 우아함과 자애로움 역시 습득된 것이다. 천재와 마찬가지로 아름다움은 여러 세대에 걸쳐서 축적된 작업의 최종 산물이다. 훌륭한 취미를 위해서 사람들은 큰 희생을 치렀음에 틀림없고, 그것을 위해 많은 것을 행하고 많은 것을 포기했음에 틀림이 없다. 최고의 지침은 혼자 있을 때에도 ‘자신을 멋대로 두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니체가 말하는 아름다움은 힘이 넘치는 우아함과 같은 것을 의미한다고 해야겠습니다. 이러한 아름다움은 꼿꼿한 자세로 앉아 있는 단아한 선비의 모습에서 느껴지는 아름다움과 같을 것입니다.


니체는 또한 여기에서 공교롭게도 동양의 신독愼獨사상과 유사한 사상을 말하고 있습니다. 신독이란 단순히 홀로 있는 것을 삼가는 것이 아니라 ‘홀로 있을 때에도 생각과 행동을 바르게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보는 사람 한 명 없이 혼자 있을 때에는 아무래도 생각과 행동이 흐트러지기 쉬운 법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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