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세
 
지은이 : 클라이브 해밀턴(역:정서진)
출판사 : 이상북스
출판일 : 2018년 09월




  • 저자는 우리 모두에게 길게 드리워진 인류세의 그림자를 똑바로 인식하고 나아갈 길을 모색해야 할 절박한 시점이라고 이야기하며 지구와 인류의 이런 힘겨루기에서 단순하게 낙관 또는 비관하기보다 지구와 인간의 힘 모두를 인정할 때 인류가 직면한 새로운 상황을 제대로 파악할 수 있다고 강조한다.


    인류세


    ‘인류세’라는 균열

    지구 역사의 균열<
    /P>지질연대표는 중대한 지질학적 사건이 일어난 순서대로 지구의 역사를 절(節, Age), 세(世, Epoch), 기(紀, Period), 대(代, Era), 누대(累代, Eon)로 나눈다. 국제층서위원회는 지질연대에 새로운 지질시대인 인류세를 공식 도입하는 문제를 검토하고 있다. 산업혁명 초기 대량으로 석탄연료를 사용하기 시작했을 때부터 인간이 기후 시스템을 교란한 것으로 보인다. 현재 다양한 지표들에 따르면,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이후 인간은 지구 시스템에 급격하고 명백한 혼란을 야기했다. 전 세계적인 경제 성장, 자원 이용, 쓰레기 양과 관련한 장기적인 변화 추이를 살펴보면,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모든 수치가 급격하게 상승했다. 따라서 이 시기는 “거대한 가속도의 시대”라 불렸고, 이 같은 추세는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엄밀하게 층서학적 견지(새로운 시대를 공식화하는 결정과 가장 밀접한 관련이 있는 관점)에서 보면, 지금으로부터 100만 년 후 암석기록의 가장 뚜렷한 지표는 1945년 원자폭탄 폭발의 결과로 지표면 전반에 급작스럽게 퇴적된 방사성 핵종일 것이다. 핵 시대가 그 자체로 지구 시스템의 기능을 변화시키지는 않았다. 그러나 1945년에 퇴적된 방사성 핵종을 함유한 지층은 미국이 전 세계적 패권을 장악하게 된 시대와 전후 수십 년 동안 이뤄진 놀랄 만한 물질적 확대, 즉 자본주의가 대대적으로 성공한 시기의 서막을 알리는 전조이다. 이산화탄소는 자연 현상을 통해서도 대기권으로 방출되기 때문에 해양은 이미 인간이 대규모로 화석연료를 이용하기 시작했던 때보다 3분의 1 이상 더 산성화되었다. 수천 년에 걸친 기간 동안 높아진 산성도는 심해 해저에 탄산칼슘이 퇴적되는 자연 과정에 교란을 일으킨다. 이렇게 변화되고 있는 지구 시스템의 구조는 혹 가능하다고 해도 원래대로 복원하는 데 수천 년이 걸릴 수밖에 없다.


    우리는 인류세가 인류의 미래에 어떤 의미를 가지게 될 것인지 생각하는 데 여념이 없지만, 최근의 수십 년은 지구의 생물지리학적 역사가 새로운 단계에 진입한 전환기이기도 하다. 오로지 맹목적인 자연의 힘에 의해서만 지구의 역사가 결정되었던 45억 년, 그리고 의식적인 인간의 힘이 사라지고 오랜 시간이 흘러서도 그 힘에 의해 영향을 받게 될 그 후의 50억 년으로 역사가 갈리게 된 것이다. 만일 인류가 사라진다고 해도 지구 시스템을 주도하는 거대한 힘들은 지속될 것이고, 인류가 자연경관에 남긴 더욱 뚜렷한 영향들도 종국에는 지워질 것이다. 즉 인류의 역사는 100억 년 동안 이어질 수 있는 지구 역사의 중간 어디쯤에서 수십 년 간에 걸쳐 쌓인 기이한 지층으로 뚜렷하게 남을 것이다.


    지구 시스템 과학

    인류세라는 개념을 창안한 것은 인간의 활동이 지구 시스템 전반에 미친 영향으로 이내 지구 역사에서 일어난 가장 최근의 균열을 포착한 지구 시스템 과학자들이었다. 앞으로 살펴보겠지만, ‘인류세’는 오독, 오해, 이념적 포섭에 빠르게 휩싸여 이 개념을 처음 접하는 대다수가 심각하게 오도되기 쉽다. 인류세는 지구 시스템 전반의 기능에 생긴 균열을 설명하는 용어라는 것과 이 균열로 인해 현재 지구가 새로운 지질학적 시대에 접어들었음을 이해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인류세는 지구 시스템이라는 새로운 연구대상에 적용되는 개념으로, 지구 시스템은 지구 시스템 과학의 출현과 함께 1980년대와 1990년대가 되어서야 등장했다. 1990년대와 2000년대에 완전하게 부상한 지구 시스템에 관한 새로운 가고체계는 지구라는 전체 행성을 단순히 부분들이 합으로 보지 않는다. 이는 지구과학과 생명과학을 융화하는 초학문적이고 전체론적 접근방식일 뿐만 아니라 시스템의 비선형역학에 특별히 초점을 맞춘 시스템적 사고방식 내에서 일어나는 인류의 ‘산업물질대사’다. 이런 생각은 생태적 사고를 대체하는, 지구에 관한 뚜렷하게 다른 새로운 사고방식에 해당된다.


    결정적으로 지구 시스템이라는 새로운 개념은 ‘지형’‘생태계’‘환경’같은 이전의 연구대상들을 망라하여, 초월한다. 이때 지구는 행성의 중심핵에서 대기, 달에 이르기까지 서로 연결된 주기와 힘에 의해, 그리고 태양의 에너지 흐름에 의해 끊임없이 움직이는 상태에 놓인 전체로서 파악된다. 지구 시스템은 하나의 역동적이고 통합적인 시스템이지 생태계를 모아놓은 개념이 아니다.


    토마스 쿤이 1962년 그의 획기적인 저서 <과학혁명의 구조>를 출간한 이후, 분석자들은 다양한 과학 분야에서 ‘패러다임의 전환’을 찾아내기 위해 혈안이 되었다. 뚜렷하게 구분되는 일련의 추정과 사고패턴을 패러다임이라고 규정한다면, 지구 시스템 과학이 이 기준에 부합한다는 데에 의심의 여지가 없을 것이다.



    새로운 인간중심주의

    모든 것을 의심할 것

    인간과 지구의 관계가 재구성되는 인류세로 논의가 옮겨가면, “음, 그런 개념들이 내게는 잘 와 닿지 않는데요”라든가 “내 문화적 배경과는 관련이 없군요”와 같은 반응에 부딪히곤 한다. 기존 사고방식에 근대성이 가져온 균열은 사람들의 심기를 불편하게 했다. 3-4세기 전 근대 사상에 의해 정립된 세계에 대한 이해와 대치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인류세의 어떤 점이 역사적 단절에 버금갈 정도로 중대하게 여겨지며, 우리에게 익숙한 이해체계를 제쳐두고 모든 것을 다시 생각하도록 요구하는 것일까?


    첫째, 금세기 동안 인간이 스스로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분명히 알면서도 우리의 고향 행성에서 생명이 살아갈 수 있는 조건을 돌이킬 수 없을 만큼 저하시킬 것이라는 현실적 가능성에 직면해 있다. 둘째, 인간이 저지른 행위의 결과로 인간이 멸종될 수 있다는 물리적 가능성, 혹은 적어도 문명화된 삶의 방식이 붕괴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인정해야 한다. 셋째, 지구의 지능이 변화해 왔다. 더 이상 맹목적인 힘에 의해서만 지배되는 것이 아니다. 지구의 작용은 현재 존재론적으로 뚜렷하게 다름 힘, 즉 인간의 의지가 표출된 힘이 투입되어 영향을 받고 있다.


    우리는 수천 년 혹은 수만 년 동안 지속될 불안정하고 예측 불가능한 새로운 시대에 접어들었다. 간단히 말해 우리가 살고 있는 자연세계와 인간이 맺는 관계가 전복되었다. 이런 상황은 1세기 전, 아니 30년 전만 해도 전혀 예측할 수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제 우리는 이런 상황, 즉 지구 경로의 돌이킬 수 없는 위험한 변화가 우리의 미래이며, 역사적 균열이 존재하기 이전 시대에서 물려받은 사고방식들은 분명 의심의 여지가 있다는 사실을 직시해야 한다. 


    세계의 구조에 생겨난 인류세라는 균열에 직면해 우리는 기존의 모든 신념을 의심해야 한다. 새로운 체제를 압축한 새로운 개념이 생겨날 때, 그 개념이 ‘내 세계관과 맞지 않다’고 선언하는 것은 옹호받기 어렵다. 근대 사상을 통해 물려받은 자연세계에 대한 개념은 이제 유효하지 않다. 따라서 우리는 새로운 현실을 근간으로 새로운 개념을 구축하기 위해 불안정하더라도 더듬더듬 나아갈지, 아니면 이미 뒤쳐진 세계에 뿌리내린 낡은 개념에 매달릴지, 불편한 선택을 내려야 한다. 


    인류세의 이율배반

    인간은 이제까지 결코 지금처럼 강력했던 적도, 자연에 대해 지배력을 행사했던 적도 없다. 그러나 현재 우리 인간은 거대한 빙상이 마침내 물러나 인구가 번성하는 데 적합한 온대기후의 방대한 대지가 펼쳐진 이후 최소 1만 년 동안 경험해 보지 못한 자연의 힘 앞에 취약하게 놓인 상태다. 기후 시스템은 점점 강력한 힘을 발휘해 더 많은 폭풍과 들불, 가뭄, 폭염을 일으키고 있다. 그 앞에서 우리 인간의 힘은 보잘것없어 보인다.


    인간은 더 강해졌다. 자연도 더욱 강해졌다. 이 둘을 합쳐 생각하면 지구상에는 더 강력해진 힘이 작용하고 있다. 인간과 지구 사이의 힘겨루기가 진행 중인 것이다. 우리가 지구와 인간의 힘 모두를 인정할 때 우리는 인간이 직면한 새로운 상황을 제대로 파악할 수 있다.


    과거 지구는 인간이 터전을 삼는 환경 혹은 인간에 의해 교란되는 생태계들의 인식 가능한 집합으로 이해되었다. 지구 시스템 과학자들은 새로운 개념을 포착하기 위해 거친 은유, 이를테면“깨어난 거인”“성미가 고약한 짐승”“반격하고”“복수”를 노리는 가이아, “성난 여름”의 세계, “죽음의 소용돌이”같은 은유를 활용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지구 시스템 과학은 현재 지구 시스템으로서의 자연은 죽어가고 있기보다는 사실상 활기를 띠게 되었다고 말한다. 혹은 자연은 잠에서 깨어나고 있다.


    인류세에 “우리가 곁에 두기를 바라는 유형의 자연”이 존재할지도 모른다는, 위안이 되는 기대에 매달리는 이들도 있다. 그러나 기대와 달리 새로운 시대에 접어들수록 우리가 원하는 지구와 점점 더 거리가 먼 지구와 직면할 것이다. 자연은 더 이상 침묵 속에서 시름하는 수동적이고 파괴되기 쉬운 대상이 아니다. 우리의 목표는 “자연을 구하는”게 아니라 우리 자신에게서, 그리고 자연으로부터 우리를 구하는 것이 되어야 한다.


    지구 시스템을 교란하는 인간의 힘과 인류세에 발산되는 자연의 통제 불가능한 힘이 서로 맞서며 분출되는 힘들이 내가 ‘새로운 인간중심주의’라고 일컫는 개념을 촉발한다. 기존의 인간중심주의가 인간을 중심으로 돌아가는 세계를 그리고 있다면, 새로운 인간중심주의를 묘사할 만한 쉬운 방법은 없다. 다만 공통 무게중심을 갖는 거의 동일한 크기의 두 행성이 서로를 공전하는, 이중행성이라는 우주적 현상이 연상될 뿐이다. 인간이라는 행성과 지구라는 생성이 궤도를 공유하며 긴밀하게 관련을 맺고 있어 “하나의 운명이 다른 하나의 운명을 결정짓는다.”


    새로운 인간중심주의

    인류세의 새로운 인간중심주의, 즉 신인간중심주의는 지구 시스템과 그 안에서 인류의 역할에 대한 최근 정립된 이해에서 생겨났다. 신인간중심주의는 인간이 그 어느 때보다 큰 힘을 갖게 된 것을 인정하지만, 궁극적으로는 인간이 살고 있는 자연세계의 힘에서 벗어날 수 없음을 분명히 한다. 신인간중심주의적 자아는 근대의 주체처럼 자유로이 부유하지 못하며 항상 자연에 엮인 채 자연의 구조 안에서 매듭을 이룬다.


    인간이 중심이긴 하지만 신인간중심주의는 이전의 인간중심주의에 깊이 뿌리박힌 착취와 통제 같은 태도와는 선을 긋는다. 우리보다 훨씬 큰 무언가에 책임을 돌림으로써 인간 행위자의 책임을 피하거나 축소하는 게 아니라 이제는 책임감을 받아들이고 인정하는 것이 우리의 의무다. 기존의 목적론적 인간중심주의에는 인간만이 도덕적 지위를 가진다는 규범적 주장이 담겨 있다. 신인간중심주의는 우리의 힘과 다른 생물이 처한 위험을 부각시키기 위해 인간의 특별함을 드높이며, 따라서 그와 관련된 의무들이 뒤따른다.


    모든 유형의 인간중심주의를 반대하는 두 가지 주장에 대해서도 간단히 짚고 넘어가는 것이 좋을 듯하다. 인간중심주의를 겨냥한 최근의 비판은 1990년대 유럽의 사회학 비평에서 등장한 유파인‘포스트휴머니스트’들이 주도했다. 이 이론의 본질적인 전략은 인간이 자연에 완전히 침잠할 것을 강조함으로써 자연을 지배하는 인간의 힘에 문제를 제기하는 것이다. 세계를 변화시키는 인간의 고유한 힘이 절정에 치달은 그 순간에 우리의 고유한 특성을 거부하는 움직임인 것이다. 두 번째 주장으로 넘어가 보면, 생태철학과 포스트휴머니즘은 에코모더니즘에 대한 대응으로 근대 이전의 존재론, 즉 인간과 자연 사이의 경계를 허무는 존재론에 기댄다. 이런 주장은 서구의 과학을 저버리는 것을 의미한다. 하지만 이는 실제로 불가능할 뿐 아니라, 주장하건대 인류의 가장 위대한 업적이라고 할 만한 것을 버리겠다고 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신비주의에 가까운 전체론을 받아들이자는 주장은 시대착오적이다. 부분적으로는 위에서 언급한 이유 때문이기도 하고, 또 한편으로는 초점이 지구 시스템으로 옮겨가면서 신비주의에서 벗어나 현실을 일깨우기 때문이다.



    친구와 적

    자연의 이상현상

    인류세의 도래로 인간과 자연의 구분을 없애는 모든 이론이 더 이상 유효하지 않을 것이다. 지구가 이제 인류세에 접어들었고, 우리는 우리가 만들어낸 분개한 야수를 다뤄야 할 의무가 있다. 그러므로 인간이 그저 또 다른 생물에 불과하다는 관점을 실제로 받아들이는 것은 프랑켄슈타인 박사처럼 우리가 만든 괴물로부터 도망가는 것을 의미한다. 인류세가 메시지를 보내고 있다면, 그것은 이제 인간이 자연 전체에서 두드러지는 존재라는 명백한 사실을 받아들일 때라는 것이다.


    우리는 인간에게서 인간의 고유한 행위성을 박탈한 존재론보다는 연결망 안에서 인간의 고유성에 기반을 둔 존재론을 필요로 한다. 이제 우리에게 남겨진 과제는 주체와 객체의 구분을 거부하는 게 아니다. 주관성이 취하는 특정한 형태와 그것이 무엇이 되어야 하는지 이해하는 것이다. 지난 20-30년 동안 비로소 인간의 행위성이 사실상 두각을 드러냈다. 생명이 있든 없든 인간의 행위성 외에 그 어떤 힘도 지구 시스템의 과정에 영향을 미칠 수 없으며 다른 방향으로 영향을 미칠 만한 역량도 가지고 있지 않다. 이제는 그것이 바로 행위성이다. 그것이 인간을 자연이 되게 하는 것이고 또한 인간을 자연의 이상현상으로 만드는 것이다.


    우주론적 감각 되살리기?

    원주민들이 해안가에서 백인 침입자들을 발견했을 때, 그들은 이를 ‘그저 우연히 일어난’의미 없는 사건으로 치부하지 않았다. 그들은 그 사건이 세계에 대한 이해체계에서 어디에 들어맞는지 그들의 우주론 안에서 답을 찾았다.


    존재론적 다원주의는 우리가 어떻게 다시 자연과 문화를 통합할 수 있을지, 그리고 자연과 문화가 사실은 결코 분리된 적이 없다는 것을 깨닫기 위해 근대 이전의 존재론에 의존함으로써 역사적 불행을 바로잡을 수 있다고 여긴다. 인류세를 이해하는 세계관을 찾기 위해 근대 이전의 존재론으로 되돌아가는 것은 불가능하다. 뒤를 돌아볼 게 아니라 앞을 내다보며 더 큰 질서 안에서 생겨난 힘들과 모순에 의해 추동되는 근대성의 진화과정 그 자체에 대해 성찰해야 한다.


    근대는 환상이 아니다. 근대는 가장 큰 전망과 가장 큰 위험이 공존하는 시대이며, 각각은 엄청난 정치적 ․ 사회적 투쟁을 끝까지 치러낸 진정한 사회적 힘과 움직임으로 나타난다. 우리가 인류의 프로젝트에 깃든 위대함과 그에 따르는 극도의 위험까지 받아들일 때, 비로소 우리는 새로운 시대를 정의하는 질문을 던질 수 있다. 지구를 파괴하기 보다는 지구를 달래고 보호하기 위해 인간은 어떻게 자신의 힘을 사용할 수 있을까?



    행성의 역사

    인간의 중요성

    오늘날 광대한 우주에 떠 있는 작은 태양계의 보잘것없는 행성에서 살아가는 미약한 인류라는 존재에 대해 상기하는 것은 낯선 풍경이 아니다. 우리의 존재가 보잘것없다고 한다면, 우리가 사라지는 것도 별다른 의미를 갖지 않을 것이다. 따라서 ‘행성을 구하자’는 아우성에 대응해 영리한 동물에 대한 니체의 무관심을 상기하는 이들이 있다. 존 그레이는 이런 경향을 다음과 같이 포착했다.


    호모 라피엔스(호모 사피엔스를 ‘약탈하는’이라는 뜻의 ‘rapacious’로 바꿔 패러디한 것으로, ‘약탈하는 인간’이란 뜻) 수많은 생물종들 중 하나일 뿐, 특별히 존속되어야 할 가치는 없다. 조만간 인간은 멸종될 것이다. …인간이 사라지면 지구는 회복될 것이다.…지구는 인류를 잊을 것이다.


    이런 진술에 함축된 잔인함은 차치하고라도 - 기근, 재난, 전쟁을 통한 인간의 소멸에 수반되는 고통에는 명백히 무관심해 보인다 - 정말로 인간이 지구에서 사라진다면, 이 행성은 어떤 중요한 의미도 가지지 못한 채 더 이상 존속하지 못할 것이다. 지구에 의미를 부여하고 지구를 우주에서 고유한 행성으로 두드러지게 만드는 것이 바로 우리이기 때문이다. 클로드 레비스트로스가 말했듯이, 사실상 세상은 인간 없이 시작해 인간 없이 끝날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 세계를 정의하는 것이 인간이라는 사실을 부인할 수는 없다. 만약 1억 년 후 외계 문명이 우주의 역사를 쓴다면, 지구는 인간의 행성으로 알려질 것이다.


    온난화가 진행되고 있는 세계에 직면해 새로운 유형의 실존적 패배주의가 나타나 종종 목소리를 높인다. 한두 세기 후에 인간이 사라진다면, 100억 년으로 예측되는 지구 역사에서 호모사피엔스의 역사는 극히 짧은 순간에 지나지 않고, 인간의 흔적은 자연 과정에 의해 곧 지워지며, 자연은 그저 계속 제 할 일을 할 거라는 목소리다.


    만약 인간이 지구의 심원한 시간 중 불과 20만 년을 살다가 종말을 맞이한다고 해도 강한 의미에서 인간 없이 지구는 존재 할 수 없다. 이것은 분명한 사실로 남아 있다. 인간이 없다면, 지구의 존재는 생각조차 할 수 없다. 물론 인간이 없는 지구를 상상할 수는 있지만, 오직 지적인 존재만이 머릿속에 상상할 수 있다. 인간만이 지구상에서 세상을 만들며, 지구가 하찮은 우주적 존재로 전락하는 것을 막을 수 있다. 오직 인간만이 지구를 우주적 이해의 중심지로 거듭나게 할 것이다. 지구에서 인간의 소멸은 우주적 의미를 갖는 비극이 될 것이다.


    역사에는 의미가 있을까?

    근대철학이 그 이전의 모든 철학 이론들을 폐기하는 동안, 사실상 고차원적인 기술과 물질적 발전을 의미하는 진보에 대한 신념은 근대의 실질적 역사철학으로 자리 잡았다. 진보는 이제 당대의 사고체계에 매우 깊숙이 스며들어 하나의 신념이라고만 표현하기에는 더 이상 적절하지 않다. 이제 진보는 현 세계에서 눈에 띄지 않는 배경이 되었다. 인류세의 도래로 인해 우리는 은밀하게 남아 있던 역사철학과도 단절되었다. 이러한 철학이 사라진 상황에서 우리는 끈 떨어진 연처럼 표류하게 될 것으로 보인다.


    물론 인류세의 도래를 우연한 사건으로 이해하는 사람들도 있을 수 있다. 하지만 인류세를 인간과 지구의 역사라는 더 넓은 개념에서 이해할 수 있는지 살펴볼 가치는 있다. 특히 필연적으로 자연을 지배하는 세력으로 등장한 인간에 대해 과거의 영향력 있는 사상가들이 언급한 이야기들을 재검토하기 위해서라도 시도해 볼 필요가 있다. 결국 우리는 인류의 의지가 자연의 힘에 기술 산업적 공격을 가해 종말을 자초할 수 있다는 가능성에 직면했다. 인류세의 위험한 조건들은 우리를 새로운 서사로 이끌 것이다.


    새로운 인류이 이야기는 더 넓은 개념의 역사를 가리키며 지구상에 살아가는 인간들이 총합이라는 의미를 넘어 안트로포스, 즉 인류에 대한 역사철학으로 자리매김할 것이다. 그런데 이 이야기는 그 어떤 이야기와도 같지 않은 새로운 서사여야 한다. 새로운 지질시대로 이행하는 과정에서 새로운 서사는 인간의 역사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그것은 행성의 역사여야 한다. 인간의 역사와 지구의 역사를 아우르는 서사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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