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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는 살아있다
저   자 : 이병욱
출판사 : 학지사
출판일 : 2018년 07월
231

아버지는 살아있다


권력의 정상에 오른 사람들

천하를 두고 대결한 유비와 조조

후한 말 중국 대륙이 황건적의 난으로 민생은 도탄에 빠지고 국운마저 기울었을 무렵, 숱한 영웅들이 나타나 군웅할거하며 저마다 천하를 차지하기 위한 야망을 불태웠는데, 그중에서도 가장 독보적인 존재는 한나라 황실 후손을 자처하며 촉나라를 세운 유비(161-223)와 후한의 대승상으로 천하를 재패하며 호령했던 조조(155-220)라 할 수 있다. 특히 유비는 관우, 장비, 조자룡 등의 맹장뿐 아니라 제갈량이라는 탁월한 지략가를 참모로 두어 압도적인 군사력을 앞세운 조조의 반격을 물리치면서 필생의 대업을 이룩하는 데 성공했다.


원래 유비는 한나라 황실의 후손이었으나 어려서 일찍 아버지를 여의고 홀어머니 밑에서 자라며 짚신과 멍석을 만들어 생계를 유지하던 가난한 촌부에 불과했다. 평소 말수가 적은 데다 항상 겸손하고 공손한 태도로 남을 대하며 좀처럼 자신의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유비지만, 내심으로는 황손이라는 자부심에 가득 차 있었는데, 그의 인품에 감화된 관우, 장비와 도원결의를 맺고 형제처럼 지냈으며, 셋이 함께 황건적 토벌에 나서 공을 세우기도 했다.


하지만 아버지 없이 자란 유비가 대업의 대한 야망을 통해 자신의 초라한 신분과 열등감을 극복하고자 했다면, 조조는 자신이 환관의 손자라는 열등감에서 벗어나고자 그토록 권력에 집착한 것으로 보인다. 그런 점에서는 제갈량(181-234) 역시 그들과 비슷한 동기를 지녔다고 할 수 있다. 어쨌든 유비는 오나라의 손권과 힘을 합쳐 적벽대전에서 조조의 대군을 크게 격했으나 나중에 관우가 손권에 의해 죽임을 당하게 되자 조조뿐 아니라 손권과도 맞서게 되었으며, 조조가 죽은 후 그 아들 조비가 후한을 멸망시키고 스스로 황제가 되자 유비도 제갈량의 권유에 따라 촉한을 건국하고 나이 60세에 비로소 황제의 자리에 올랐다.


그런데 유비와 조조에 대한 평가는 기록에 따라 차이가 난다. 물론 우리가 익히 잘 알고 있는 나관중의 <삼국지연의>에서는 유비를 후덕한 인품의 소유자로 묘사한 반면에 조조는 간악하고 교활한 역적으로 간주하고 있지만, 유비가 항상 긍정적인 모습만을 보여 준 것은 결코 아니며, 소심하고 비겁한 데다 배신을 밥 먹듯 계속한 인물이기도 했다. 또한 후한서에는 유비를 속과 겉이 다르고 잔꾀에 능한 인물로 보고 있으며, 동진의 사학자 습작치는 신의를 저버리고 속임수로 유장의 땅을 습격해 빼앗은 일을 두고 유비를 군자의 도리에서 벗어난 인물로 보기도 했다.


이런 유비에 비한다면, 위나라의 기틀을 마련하고 죽은 조조는 탁월한 지략과 배짱을 겸비한 인물로 숱한 영웅호걸들과 제후들을 연달아 물리치고 중국대륙의 대부분을 통일한 대업의 장본인이기도 했다. 다만 편집증적 성향이 매우 강했던 그는 의심이 많아서 사람을 잘 믿지 못했으며, 제갈량과 쌍벽을 이루던 지략가인 사마의마저 믿지 못해 그를 항상 경계했다. 더욱이 평소 원인을 알 수 없는 지병으로 만성 두통에 시달린 조조는 자신을 치료했던 당대의 명의 화타마저 쥐새끼 같은 존재라고 업신여겨 죽여 없애는 우를 범하기도 했는데, 화타를 죽인 것은 조조가 저지른 실수 중에 가장 큰 과오였다고 할 수 있다.


사생아로 태어나 영부인이 된 에바 페론

탁월한 미모와 극적인 제스처로 폭발적인 인기를 끌며 남편인 페론대령을 대통령 자리에까지 올리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그녀지만, 사실 영부인의 위치에 오르기까지 그녀의 삶은 실로 파란만장하기 그지없었다. 다른 무엇보다 그녀는 부유한 목장주의 사생아로 태어나 어머니와 함께 생부로부터 버림을 받았는데, 어머니는 삯바느질로 어렵게 생계를 이어 가며 자녀들을 키워야 했다.


영부인이 된 후 그녀는 노동자와 하층민의 복지정책에 관여하고 여성 페론당 대표로 여권운동을 주도했으며, 에바 페론 재단을 설립해 각종 자선사업에 힘을 기울임으로써 그녀에 대한 대중적 인기는 날이 갈수록 높아만 갔다. 가난의 현실을 직접 겪었던 그녀였으니 당연한 결과였다. 다른 무엇보다 1950년 그녀는 자궁암 진단을 받고도 그 사실을 숨긴 채 이듬해에 부동령 지명을 받았다가 군부의 압력으로 철회했으며, 남편의 재선을 위한 유세에도 아픈 몸을 이끌고 참가해 결국에는 재선에 성공시켰으나 그녀 자신은 얼마 가지 않아 33세라는 젊은 나이로 유명을 달리하고 말았다.


어쨌든 지금까지도 에바 페론에 대한 아르헨티나 국민들의 추모 열기와 각별한 애정은 식을 줄 모르고 있지만, 그녀에 대한 부정적인 평가 역시 만만치가 않다. 다른 무엇보다 아르헨티나의 경제파탄과 페론 독재의 방패막이 노릇을 했다는 점에서 특히 그렇다.


미국 최초의 흑인 대통령 버락 오바마

2009년 미국의 44대 대통령에 취임한 버락 오바마(1961-)는 역대 대통령 가운데 가장 특이한 인물이라 할 수 있다. 우선 그는 흑인으로서는 가장 최초로 백악관에 입성한 대통령인 동시에 미 본토가 아닌 하와이 태생으로 대통령에 당선된 가장 최초의 인물이기도 하며, 미국에서 현직 대통령으로는 유일하게 노벨 평화상을 수상한 기록도 남겼다.


하지만 정상에 오르기까지 그의 삶은 결코 순탄치가 않았다. 하와이 호놀룰루 태생인 그는 케냐 출신 흑인 아버지와 백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혼혈아로 그가 태어나자마자 별거에 들어간 부모가 곧바로 이혼함으로써 생부의 얼굴조차 제대로 기억할 수 없었다. 더군다나 4세때 어머니가 인도네시아인과 재혼하면서 그는 자카르타에서 무슬림의 영향을 받고 자라야 했는데, 그런 이유 때문에 후세인이라는 그의 이름이 나중에 정적들에게 시빗거리를 제공하기도 했다.


어쨌든 그렇게 혼란스러운 환경에서 자란 오바마는 하와이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그 후 뉴욕으로 건너가 컬럼비아 대학에서 정치학을 공부했지만, 고교시절에는 자신의 정체성 문제로 고민하며 한동안 마약에 손대기도 했다. 그 후 하버드 대학 로스쿨을 졸업하고 변호사로 일하면서 로스쿨 선배인 미셸 로빈슨을 만나 결혼까지 하게 되었다.


오랜 기간 시카고 대학 로스쿨 강사로 근무하던 그는 어머니가 세상을 뜨면서 마침내 정계에 지출하기 시작해 탁월한 연설 솜씨로 상원의원을 거쳐 민주당 대선 후보에까지 오르게 되었는데, 당시 강력한 경쟁 상대였던 힐러리 여사를 누른 여세를 몰아 공화당의 존 매케인을 압도적인 차이로 물리치고 드디어 대망의 대통령 자리에 오른 것이다. 그런 점에서 검은 피부를 지녔다는 열등감뿐 아니라 복잡한 사생활로 불행한 삶을 마친 흑인 아버지와 백인 어머니 사이에서 비롯된 정체성 혼란의 문제를 극복하고 미국의 최고통수권자로 우뚝 선 오바마야말로 진정한 인간승리의 표본이 아닐 수 없다



정의로운 사회를 추구한 사람들

자본가의 아들로 공산주의자가 된 엥겔스

공산주의 역사에서 카를 마르크스와 함께 가장 중추적인 역할을 맡은 프리드리히 엥겔스(1820-1895)는 마르크스주의 창시자인 동시에 1847년에 발표한 그 유명한 <공산당 선언>의 공동 집필자이기도 하다.


중산층 유대인 변호사의 아들로 태어난 마르크스에 비해 방적공장을 운영하는 부유한 독일인 사업가의 아들로 태어난 엥겔스는 공산주의 식으로 말하면 반동적 지주계급의 자식이요, 요즘 식으로 말하면 ‘금수저’라고 할 수 있는데, 비록 남부럽지 않은 환경에서 유복하게 자랐으나 점차 자신의 집안 배경에 반감을 느끼고 무신론에 빠지면서 독실한 기독교신자인 부모와 갈등을 겪기 시작했으며, 한때는 가출해 숨어 다니기도 했다.


결국 고등학교를 중퇴한 후 한동안 베를린에서 청년 헤겔 운동에 가담해 사회개혁 의지를 불태우기도 했던 그는 1842년 아들의 장래를 걱정한 아버지의 권유에 의해 영국 맨체스터에 있는 아버지 소유의 공장에 근무하게 되었지만, 노동자계급의 사회적 위치와 자본주의 사회의 모순에 대한 연구를 계속해 나갔다.


그 후 엥겔스는 독일 혁명에 가담했으나 혁명이 실패로 돌아가자 다시 영국 맨체스터로 돌아갔으며, 그 경험을 토대로 <독일 농민전쟁>과 <독일의 혁명과 반혁명>을 집필하고, 런던에 망명 중인 마르크스의 생계는 물론 그의 <자본론> 완성을 돕는 일에 힘을 쏟았다. 엥겔스는 1895년 후두암으로 생을 마쳤으며, 그의 유언에 따라 화장한 재는 영불해협에 뿌려졌다. 죽어서도 부모의 곁으로 돌아가고픈 마음은 없었나 보다.


인종차별의 벽을 허문 넬슨 만델라

만델라는 원래 템부족 족장의 아들로 움타타의 음베조 마을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각기 다른 마을에 사는 4명의 부인을 거느렸는데, 모두 4남 9녀의 자식들을 두었으며, 만델라는 어머니 노세케니는 세 번째로 얻은 부인이었다. 9세 때 겨우 아버지와 함께 지낼 수 있었지만, 그것도 잠시일 뿐 아버지는 원인을 알 수 없는 병으로 곧 사망하고 말았기 때문에 아버지와의 접촉은 거의 없었다고 할 수 있다. 아버지가 죽은 후 어머니는 어린 아들의 양육을 당시 템부족 족장 부부에게 맡겼는데, 다행히 그들은 만델라를 마치 친자식처럼 아껴 주었으며, 교육에도 정성을 기울였다.


아프리카 민족회의(ANC)에 가담해 청년운동을 벌이기 시작한 그는 변호사로 활동하는 가운데 아파르헤이트 정책에 반대하는 흑인인권운동에 본격적으로 뛰어들어 시민불복종운동을 벌인 결과, 당국에 수차례 체포되기도 했지만, 그 후 대규모 집회현장에서 경찰의 발포로 유혈사태가 벌어지자 평화적 시위에서 무장투쟁 노선으로 선회함으로써 마침내 국가 반역죄 혐의로 종신형을 선고받고 로벤 섬에 수감되었는데, 그렇게 시작한 투옥생활이 무려 26년이나 지속된 것이다.


만델라는 오랜 옥고를 치렀음에도 불구하고 95세까지 장수했으며, 76세에 대통령에 취임해 81세에 퇴임과 동시에 정계를 은퇴할 때까지 실로 놀라운 업적을 남겼는데, 다른 무엇보다 진정한 민주정치의 회복과 인종차별의 철폐, 가해자들에 대한 사면과 용서, 피해자들에 대한 위로와 지원 등을 통해 아프리카 정치사에 새로운 이정표를 세웠으며, 참혹한 내전으로 얼룩진 아프리카 흑인들에 대한 세상의 편견을 불식하는 일에도 크게 공헌했다고 볼 수 있다.


마틴 루터 킹 목사의 비폭력 저항

마틴 루터 킹 목사는 앨라배마주와 더불어 흑인 차별이 극심하기로 악명이 자자했던 미국 남부 조지아주 애틀랜타에서 흑인 침례교 목사의 아들로 태어났는데, 완고한 아버지의 이름 역시 아들과 똑같은 마틴 루터 킹이다. 어려서부터 음악을 매우 좋아하는 어머니의 손에 이끌려 여러 교회를 돌아다니며 성가대의 노래를 자주 들었던 그는 오르간주자이며 합창 지휘자이기도 했던 어머니의 영향으로 교회 성가대에서 노래를 부르며 신앙심을 키우기도 했다. 하지만 자상하고 세심한 성격의 어머니에 비해 완고하고 엄격하기 그지없던 아버지는 그가 15세가 될 때까지도 정기적으로 매질을 가하며 혹독하게 다루었는데 얼마나 호되게 아들을 다그쳤는지 그 소리가 이웃집에까지 다 들릴 정도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흑인 신분으로 기죽지 않고 당당하게 백인경찰과 가게 주인들에 맞서는 아버지의 기백과 자부심만큼은 크게 본받을 만하다고 여겼으며, 비록 자신을 어려서부터 가혹하게 길들였던 인물이긴 했으나 오히려 그런 아버지를 동일시한 결과 마침내는 아버지처럼 신학교를 지원해 목사가 되었으며, 더 나아가 흑인 인권운동가로 나서기에 이른 것이다.


킹 목사가 본격적으로 인권운동에 뛰어들게 된 계기는 흑인여성 로자 파크스가 버스에서 백인남성에게 자리를 양보하지 않아 경찰에 체포된 사건을 통해서였다. 당시 버스 보이콧운동을 벌이기 시작한 킹 목사는 그때부터 인권운동가로 세상의 주목을 받기 시작했으며, 그 운동은 곧바로 전국적인 비폭력 저항운동으로 발전하는 기폭제가 된 역사적인 사건이 되었다.



세상을 상대로 복수한 사람들

피의 메리 여왕

‘피의 메리’라는 별명으로 알려진 메리 1세(1516-1558)는 엘리자베스 1세 여왕의 이복언니로 이들 배다른 자매는 어릴 때부터 궁중 암투에 휘말린 나머지 서로 철천지원수처럼 지내야 했는데, 특히 아들을 얻지 못해 안달이었던 아버지 헨리 8세로 인해 어머니 캐서린이 왕궁에서 쫓겨나고 자신은 계모 앤 불린의 딸 엘리자베스의 시중이나 드는 신세로 전락했으니 부왕에 대한 원한이 가슴에 사무칠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메리 여왕의 통치시대는 영국 역사에서도 가장 어두운 시기로 평가되는데, 스페인 왕가의 혈통을 이어받은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던 그녀는 영국 성공회를 창립한 헨리 8세에 마치 복수라도 하듯이 개신교와 성공회를 잔혹하게 탄압해 온 나라에 악명이 자자했으며, 성공회 기도서 사용을 금지하고 수많은 성직자들과 신도들을 무자비하게 처형함으로써 ‘피의 메리’라 불리게 된 것으로, 칵테일의 일종인 블러디 메리 역시 그녀의 별명에서 따온 명칭이다.


그녀는 아이 갖기를 간절히 원했지만 난소암 때문에 뜻을 이루지 못했으며, 결국 5년 남짓 재위한 후 42세를 일기로 세상을 뜨고 말았다. 메리 여왕이 후손을 남기지 못하고 세상을 뜨자 국민들은 비로소 폭압 정치에서 해방되었음을 진심으로 축하했으며 메리 여왕이 일생을 두고 증오했던 엘리자베스의 즉위에 모두들 쌍수를 들어 환호했다.


영국 왕실을 농락한 심슨 부인

제2차 세계대전의 전운이 감돌기 시작할 무렵인 1936년 12월 영국의 에드워드 8세는 미국 출신의 이혼녀 심슨 부인과 결혼하기 위해 왕위를 내놓겠다는 충격적인 성명을 발표해 전 세계를 놀라게 했다.


어쨌든 숱한 비난을 무릅쓰고 에드워드 8세와 결혼함으로써 윈저 공작부인 윌리스라는 공식 호칭의 왕족으로 신분상승을 이루게 된 심슨 부인(1896-1986)은 원래 미국 태생으로 펜실베이니아 주의 한 휴양지 호텔에서 태어났는데, 그녀가 태어난 지 불과 수개월 만에 아버지는 결핵으로 사망하고 말았다. 여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스무 살 이른 나이에 해군조종사 얼 스펜서와 결혼했으나 별거와 재결합을 반복하다 결국 이혼하고 돈 많은 해운업자 어니스트 심슨과 재혼한 그녀는 그런 와중에서도 주로 외국의 고위직 외교관이나 정치인들과 스캔들을 벌였는데, 그중에는 무솔리니의 사위로 외무상을 지낸 갈레아초 치아노, 나치 외교관 요아힘 폰 리벤트로프, 영국 왕세자 에드워드 등도 포함된다.


무분별한 스캔들이야 그렇다 치더라도 파시즘과 나치에 동조하고 아돌프 히틀러를 숭배한 나머지 그를 직접 만나 극진한 대우까지 받는 등 그녀가 보인 기묘한 행적으로 인해 한때는 독일의 간첩이라는 의심까지 받을 정도였는데, 물론 정상적인 가정에서 자라지 못했기 때문에 도덕성 발달에 문제가 있을 수도 있겠지만, 제2차 세계대전 기간 내내 자신의 침대 곁에 한때 연인이었던 나치 외무상 리벤트로프의 사진을 놓아 두고 있었던 점을 보면 그녀의 나치 사랑은 정말 각별했던 것으로 보인다.


어쨌든 제2차 세계대전 기간 동안 카리브해 지역의 바하마 제도에 머물러 있던 윈저 부부는 종전 이후 프랑스에서 조용히 은둔하며 여생을 보냈지만, 영국 왕실과는 좀처럼 화해하지 못했으며, 특히 과거에 보인 나치 동조 혐의 때문에 세상으로부터 따가운 눈총 속에 살아야만 했다.



대중적 인기를 누린 사람들

희극영화의 천재 찰리 채플린

영국 런던의 빈민가에서 떠돌이 유랑극단 배우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세 살이 채 되기도 전에 부모가 헤어지면서 어린 시절부터 가혹한 시련을 겪어야 했다. 처자식을 버리고 다른 여자와 살림을 차린 아버지가 단 한 푼의 돈도 지원하지 않게 되자 어머니는 삯바느질로 힘겹게 생계를 이어 가야 했으며, 이처럼 어려운 형편 때문에 7세 때 구빈원에 들어가 지내기도 했던 채플린은 이듬해에 어머니가 정신 이상 증세를 보여 정신병원에 입원해 있는 동안 이복형 시드니와 함께 아버지에게 보내졌으나, 알코올 중독에 거칠고 난폭하기 그지없던 아버지로 인해 오히려 마음의 상처만 크게 도지고 말았다. 그런 아버지는 결국 2년 뒤에 간경화로 사망하고 말았다.


이처럼 어린 나이에 고아나 다름없는 신세로 혹독한 시련을 겪어야만 했던 채플린은 사생아 출신의 이복형 시드니와 함께 서로 의지하며 무언극 배우로 일하는 가운데 일찌감치 코미디 연기뿐 아니라 음악과 발레 실력도 쌓아 나갔다. 하지만 천재적인 감각과 재능으로 코미디 영화의 황제로 등극한 그는 치솟는 인기에 힘입어 부와 명성을 크게 얻었으나, 그에 반비례해 숱한 여성들과 염문을 일으키며 사회적 질타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어쨌든 숱한 법정 시비에 휘말리면서도 네 번의 결혼을 통해 모두 11명의 자녀를 낳고 14명의 손자를 얻으며 자신의 독자적인 왕국을 건설한 그는 특히 네 번째 부인이 된 우나 오닐과의 사이에서 8명의 자녀를 낳았는데, 여배우 제랄딘 채프린은 그중에서 맏딸이다. 이처럼 죽을 때까지 다복한 대가족의 수장 노릇에 충실했던 채플린은 자신의 불행했던 어린 시절에 대한 보상을 충분히 받고도 남음이 있었으며, 특히 가족을 배신한 자신의 아버지와는 달리 자상한 가장 노릇에 충실함으로써 술주정뱅이 아버지에 대해서도 승리한 셈이 되었다.


할리우드에서 추방된 잉그리드 버그만

할리우드가 낳은 스웨덴 출신의 세기적인 미녀스타 잉그리드 버그만(1915-1982)은 영화 <카사블랑카>와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로 일약 세계적인 스타로 떠오른 후 <가스등>과 <아나스타샤>로 아카데미 최우수 여우주연상을 두 번이나 수상해 연기력까지 인정받았다. 그러나 이처럼 최대의 전성기를 구가하고 있을 무렵에 그녀는 이탈리아의 거장 로베르토 로셀리니 감독과 맺은 불륜사건으로 인해 할리우드 활동에 결정적인 치명타를 입고 말았다.


결국 그녀는 불륜을 저지른 부도덕한 여인으로 매도당하며 할리우드 영화계에서 완전히 추방되고 말았는데, 정식으로 이혼절차를 밟고 부부가 된 그녀와 로셀리니는 함께 힘을 합쳐 영화를 제작했으나 계속 흥행에도 참패함으로써 부부관계마저 삐걱대기 시작해 마침내는 7년 만에 이혼하고 말았다. 그녀는 말년에 유방암에 걸려 고생하면서도 자신의 마지막 출연작이 된 이스라엘 TV 영화 <골다라 불린 여인>에 출연해 골다 메이어 수상 역을 연기했는데, 촬영을 마친 직후 67세를 맞이한 자신의 생일날에 세상을 떴다.


순수하고 청순한 이미지와 해맑은 시선으로 숱한 관객들을 사로잡은 그녀는 다른 할리우드 여배우들과는 달리 예명을 사용하지 않고 자신의 본명을 그대로 썼으며, 평소에도 화장을 하지 않는 자연미로 사람들을 더욱 놀라게 했는데, 비록 불미스러운 스캔들로 자신의 경력에 흠집을 남기기도 했지만, 남달리 애정에 굶주린 상태에서 외롭게 자란 그녀의 성장배경을 이해한다면 충분히 그럴 수도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아버지로 인해 고초를 겪은 한국인들

애꾸눈 궁예의 출생에 얽힌 비밀

후삼국 시대에 강원도 철원을 중심으로 후고구려를 건국하고 스스로 왕을 자처했던 궁예(869-918)는 원래 신라 왕가의 서족 출신 승려로 신라 경문왕과 후궁 장씨 사이에 서자로 태어났는데, 어머니 장씨는 장보고의 딸이라는 설도 있다. 그가 외가에서 태어날 때 무지개를 닮은 흰 빛이 지붕 위에 나타나고, 기이하게도 날 때부터 이가 있었다고 하는데, 이를 불길한 징조로 여긴 일관이 왕에게 그를 죽일 것을 청했다. 유모는 궁예를 데리고 멀리 도망가 숨어 지내며 남몰래 궁예를 길렀는데, 궁예가 10세 무렵이 되어 말썽만 일으키고 다니자 마침내 그녀는 궁예에게 그동안에 숨어 지낸 사연과 그에 관한 출생의 비밀을 알리며 그의 무분별한 행동을 타일렀다. 자신의 과거에 대한 자초지종을 알게 된 궁예는 울면서 유모에게 사과하고, 곧바로 집을 나와 세달사에 몸을 기탁한 후 머리를 삭발하고 승려가 되었다.


하지만 말이 승려지 자신을 죽이려 했던 아버지에 대한 원한에 사로잡힌 그는 마치 아버지에 대해 복수라도 하듯이 신라 말기 극도의 혼란기를 틈타 사병을 모으고 호족이 된 후 스스로 왕을 칭하고 후고구려를 건국했는데, 자신이 신라 왕족 출신이면서도 신라에서 귀순해 오는 자들은 모조리 죽여 버릴 정도로 신라에 대해 깊은 원한을 갖고 있었다. 더욱이 편집증적 의심으로 가득 한 그는 자신이 관심법에 통달해 사람의 마음을 읽을 수 있다고 떠벌리며 여러 장수와 신하들을 역모죄로 몰아 죽이기도 했으며, 이를 보다 못한 왕후 강씨가 바른말로 진언하자 오히려 그녀가 간통을 저질렀다며 쇠꼬챙이로 왕후의 음부를 지져 죽이고 자신의 두 아들마저 죽이는 만행을 저질렀다. 결국 참다못한 신하들이 왕건을 추대하고 정변을 일으켜 궁예를 축출했으며, 궁에서 탈출한 궁예는 여기저기를 전전하다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고 말았다.


아버지의 축첩에 반발한 화가 나혜석

우리나라 최초의 여류화가로 알려진 나혜석(1896-1948)은 일제 강점기에 김일엽과 함께 자유연애를 외치며 남성들이 지배하는 가부장적 사회를 상대로 격렬한 투쟁을 벌인 여성운동가이기도 했다. 부유한 집안 배경으로 일찌감치 일본유학을 떠날 수 있었던 그녀는 동경여자미술전문학교에서 서양화를 배우며 화가의 꿈을 키웠는데, 당시 유학시절에 만난 최승구와 열애에 빠지면서 그녀의 삶은 점차 어려운 길로 접어들기 시작했다. 나혜석과 최승구는 양가 부모의 반대를 무릅쓰고 약혼을 강행했지만, 당시 유부남에다가 결핵까지 앓고 있던 최승구는 얼마 가지 않아 사망하고 말았다. 그 후 아버지의 일방적인 결혼강요에 끝까지 저항하던 그녀는 오빠가 소개한 법학도 출신의 김우영과 마지못해 결혼하기에 이르지만, 그때까지도 최승구를 잊지 못한 입장에서 치러진 그 결혼은 당연히 진정한 사랑에 의한 것이 아니었다.


비록 그녀는 일제강점기의 참담한 상황 속에서도 외교관이었던 남편 덕에 유럽 여행을 다닐 정도로 특권을 누리고 살았지만, 이미 자유연애에 대한 신념이 매우 강했던 그녀는 파리에서 만난 최린과 불륜을 일으켜 결국에는 남편으로부터 일방적인 이혼을 당하게 되었다. 극도의 신경쇠약과 우울증에 빠진 그녀는 결국 자신과 비슷한 처지를 겪고 불가에 귀의한 친구 김일엽을 찾아가 승려가 될 뜻을 비쳤으나 일엽은 자식들에 대한 집착에서 자유롭지 못한 나혜석의 모습을 보고 일언지하에 거절하고 말았다.


그렇게 비참한 신세로 전락한 그녀는 광복 후에도 계속 부랑자 신세로 떠돌다가 마침내 행려병자로 숨을 거두고 말았는데, 그녀의 무덤조차 제대로 알려져 있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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