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련
 
지은이 : 배철현
출판사 : 21세기북스
출판일 : 2018년 04월




  • 저자는 나만의 고유한 삶을 살기 위해 필요한 생각들을 신념, 분노, 비겁, 욕심, 방향 등 28개의 단어와 한 줄의 아포리즘으로 정리하여 소개한다. 특히 잘 알려지지 않은 고대 근동 문헌이나 성서 원전 등에서 단어의 어원을 찾고, 그 속에 숨은 의미를 발견해 고대와 현대, 학문의 경계를 넘나들며 다채롭게 재해석한다. 

    책을 읽다 보면 ‘지금 이 순간’을 살고 있는 ‘나 자신’에게 몰입하는 것이 수련의 궁극적 목적임을 알 수 있다. 저자는 SNS와 미디어의 영향으로 인해 어느새 우리의 일과가 습관적으로 타인의 일상을 엿보고 부러워하는 데에만 초점이 맞춰져 있다고 말한다. 따라서 저자는 타인을 향한 시선을 자기 자신에게로 돌려 스스로 삶의 기준을 만들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한다. 



    수련


    직시, 감추고 싶은 나를 마주하는 시간

    지금, 과거와 미래가 하나 되는 시간

    ‘시작’은 항상 불안하고 폭력적이다. 시작이라는 단어에는 과거와의 매정한 단절, 미래에 대한 비전과 희망 그리고 지금과 여기에 대한 확신과 집착이 혼재해 있다. 익숙한 것들은 그것을 경험하는 사람들에게 편함을 선물한다. 그러나 이 편함은 이중적이다. 시간이 지나면 이내 불평과 지루함으로 변하기 때문이다. 최선을 지향하는 지금 이순간이 내가 희구하는 천국이다. 이 순간을 온전히 내 것으로 만들지 못한다면, 나는 그 시간의 흐름에 이리저리 떠다니는 부초와 다를 바 없다.


    자신이 원하는 운명을 개척하는 예술적인 행위가 시작이다. 시작은 독창적이다. 현재라는 순간을 파괴해 미래라는 영원으로 끊임없이 지배하려는 의지다. 로마 제국의 시인 호라티우스는 이 의지를 담은 유명한 송가 하나를 남겼다.


    지금 내가 말하는 동안에도 남을 부러워하다 모낸 세월이 저만큼 도망갑니다.

    바로 이 순간을 낚아채십시오, 미래에 일어날 일을 신경쓰지 마십시오.


    호라티우스는 “남을 부러워하다 보낸 세월”처럼 선형적이며 흘러가는 시간을 라틴어로 ‘아이타스’라고 표현했다. 아이타스는 양적인 시간으로서 숫자로 표시된다. 아이타스의 속성은 도망과 덧없음이다. 호라티우스는 시를 짓는 그 순간의 심정을 시로 표현했다. 자신이 말하고 있는 그 순간에도 시간은 어김없이 도망친다는 것을. 아이타스를 흔히 ‘세월/세대’로 번역하는 것은, 스스로 인생의 주인으로 살지 않으면 그 시간은 1년, 10년 혹은 100년 단위로 순식간에 사라진다는 아쉬움을 담고 있어서다.


    호라티우스는 남을 부러워하고 시기하다가 흘려보낸 세월을 중지시키고 새롭게 시작하는 순간을, ‘카르페 디엠’이라고 표현했다. 비범한 삶을 위해서는 먼저 카르페 디엠을 실천해야 한다는 충고다. 비범에는 다른 사람에 대한 부러움이나 질투가 없다. 비범은 객관적으로 평가해 정량화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비범은 마음속에서 흘러나오는 침묵의 소리를 들을 때 비로소 만들어지기 시작한다.


    ‘지금’을 포착하는 능력은 새로운 시작의 총상이다. ‘카르페 디엠’이라는 문구가 우리에게 던지는 물음은 이것이다. 당신은 당신의 심연에서 요동치는 찬란한 빛을 본 적이 있는가? 거기서 흘러나오는 숭고한 선율을 들은 적이 있는가? 당신의 마음 깊은 곳에서 천둥치는 그 울림을 느낀 적이 있는가? 바로 그 순간을 포착해야 한다. 더 늦기 전에. 지금이 아니면, 언제란 말인가?


    방석, 잠을 깨워 새벽을 맞이하는 거룩한 공간

    매일 아침 눈을 뜨면 ‘나’라는 존재가 살아 있음을 인식하며 하루를 시작한다. 누군가 나를 깨운 것일까. 아니면 자연스러운 현상일까. 아침이 되어 거뜬히 일어날 수 있는 이유는 간밤에 취한 수면 덕분이다. 밤은 아침의 어머니이며, 아침은 밤이 선물해 준 소중한 시간이다.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나는 한 장소로 향한다. 그곳은 나의 정신 수련의 장인 공부방의 ‘한가운데’다. 나는 한가운데를 표시하기 위해 그곳에 흰색의 방석을 놓아두었다. 이렇게 방석을 놓아두는 것은 그 공간이 특별하다는 표시다. 무함마드에게는 하늘 끝까지 올라갈 때 탔던 부라크라는 날개 달린 말이 있었고, 선지자 엘리야에게는 하늘로 올라갈 때 탔던 메르카바라는 전차가 있었다면, 나에게는 이 하얀 방석이 있다.


    네부카드네자르 2세는 바빌론에 91미터나 되는 웅장한 제단을 만들었다. 이곳은 다른 곳과 구별된 장소다. 이 제단은 꼭대기가 구름을 뚫고 하늘에 닿을 만큼 높았다. 오늘날 초고층 건물들을 의미하는 단어 ‘스카이스크레이퍼’의 기원이다. 네부카드네자르 2세는 이 제단을 ‘에테멘안키’라고 불렀다. 에테멘안키는 수메르어로 ‘하늘과 땅이 만나 하나가 되는 단이 있는 장소’라는 의미다. 제단을 의미하는 테멘이라는 단어와 개념은 지중해 전역으로 퍼져나갔다. 테멘은 고대 그리스로 넘어가 ‘왕이나 사제를 위해 다른 당과 구별되어 잘라진 땅’ 혹은 ‘신을 위해 구별된 신전/거룩한 숲이나 경내’를 의미하게 된다. 그리스 아테네에 위치한 아크로폴리스는 ‘히에론 테메노스’, 즉 ‘거룩한 테메노스’라고 불렸다. 테메노스는 신탁을 받는 델피 신전의 제단이다. 소크라테스는 테메노스에서 받은 신탁을 통해 자신이 누구인가에 대해 깊이 생각하는 수련을 시작했다. 이로써 서양 철학이 시작됐다.


    내가 좌정한 이 방석은 바빌론의 에테멘안키보다 거룩하고, 델피 신전의 테메노스보다 신비롭다. 나의 방석은 곧 나의 천단이다. 갈 수 없고, 볼 수 없는 저 높은 하늘 위에 있는 장소가 아니라 내가 하루하루 살고 있는 바로 이곳이다. 나는 이 단에 좌정해 나를 바라보며 내가 가고자 하는 위대한 여정 위에 있는지 점검한다. 당신은 그런 방석을 가지고 있는가? 잠을 깨워 새벽을 맞이하게 할 당신의 단은 무엇인가?



    유기, 삶의 군더더기를 버리는 연습

    비겁, 지옥조차 거부한 최악의 죄

    한 번 지나가면 되돌릴 수 없는 유한한 시간 속에 존재하는 인간에게 의미를 부여하는 도구가 있다. 자신의 유일무이한 삶을 위한 전략과 기술이 바로 그것이다. 인간은 모두 이 전략과 기술을 통해 자기 자신에게 감동을 줄 수 있다. 우리는 그런 인간을 영웅이라고 부른다. 문학작품이나 예술작품은 모두 이 영웅들의 은유적 표현이다. 그 작품들은 영웅의 섬세한 묘사를 통해 그것을 감상하는 사람들 속에 존재하는 무언가를 일깨운다. 반면 우리는 최적의 삶을 위한 전략도 없고 기술도 없는 자를 겁쟁이라고 부른다. 겁쟁이는 전쟁터에서 가장 잘 드러난다. 겁쟁이는 만난 적도 없는 적에 대한 공포에 사로잡혀 지레 도망친다. 머릿속에 존재하는 공포가 그를 겁쟁이로 만드는 것이다.


    엘리 위젤은 가공할 만한 역사적인 사건과 폭력 앞에서 아무런 태도를 취하지 않는 것을 악의 근원이라고 말한다. 그런 비겁한 자들의 머리에는 ‘자기 이익’ 이라는 신만이 가득하기 때문이다. 비겁은 무시무시한 대상 앞에서 도망치는 마음의 상태다. 그러나 더 근본적인 비겁은 자신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비출 거울을 소유하지 못하고, 습관적으로 끊임없이 타인의 이미지에 탐닉하는 것이다. 비겁은 자신이 간절히 바라는 위대한 자신에 대한 상상력의 부재다. 그런 자신을 상상해본 적이 없다 보니 하는 행위라고는 늘 다른 사람을 훔쳐보고 부러워하고 흉내 내는 일뿐이다.


    욕심, 만족을 모른 채 헛것을 갈망하는 괴물

    성공에는 두 가지 방해꾼이 있다. 내가 향하는 길에서 나를 이탈시켜 거짓된 길로 인도하는 유혹들이다. 성공의 첫 번째 방해꾼은 부러움이다. 자신에게 집중하는 수련을 한 적이 없고, 자신을 우주 안에서 가장 소중한 존재로 대접하지 못하는 사람은 대개 남을 부러워한다. 남을 부러워하는 삶, 남이 소유한 것을 나도 갖고자 하는 삶, 남이 말하는 성공을 자신의 성공으로 착각하는 삶, 나는 그런 삶을 무식이라고 말하고 싶다. 무식이란 자신을 위한 최선을 모른 채 어영부영 사는 삶이다.


    두 번째 방해꾼은 흉내다. 흉내는 부러움의 표현이다. 부러움이 정신적인 활동이라면, 흉내는 육체적인 활동이다. 흉내를 내는 사람은 진부하다. 사람은 자신만의 고유한 생각을 표현할 때 독창적이며 매력적이다. 고유함이란 우주 안에서 한 명의 주인을 섬기는 천사와 같은 존재다. 그 고유함은 이동할 수도 재생될 수도 없다. 고유함에는 진정성이 깃들어 있어서 듣는 이의 마음속에 있는 진정성과 공명하면 시간이 지나면서 점차 아름다운 선율로 변화한다. 흉내는 자신의 고유함을 포기하려는 자살행위다.


    나를 위한 최선의 경주는 다른 사람과의 경쟁이 아니라 나 자산과의 경쟁이다. 마치 42.195킬로미터를 달려야 하는 마라토너들이 각 구간마다 최적화된 전략을 짜고, 그대로 실천하는 것이 성공적인 완주의 비밀인 것처럼 말이다. 인생이라는 마라톤에서 가장 먼저 제거해야 할 거추장스러운 것은 우리를 목표점에서 이탈하게 만들고, 우리의 시선을 희미하게 만다는 마음의 유혹이다. 우리는 그것을 욕심이라고 한다. 겉으로 잘 드러나지 않는 이 욕심은 마음속 깊은 곳에 도사리고 있는 무시무시한 괴물이다. 욕심은 끝도 없고 만족도 없다. 그것은 배가 부른데도 더 먹으려 하는 비이성적인 습관이며, 권력을 쥔 자가 더 많은 권력을 휘두르려는 횡포다. 한자 ‘慾心(욕심)’에는 그 의미가 잘 담겨 있다. 배가 불렀음에도 더 많은 곡식〔谷〕을 하품〔欠〕하듯 입을 벌려 넣으려는 마음〔心〕이다.


    자만, 불행의 뿌리

    자기 자신을 장님으로 만들어 비참한 운명으로 추락시키는 마음의 습관이 있다. ‘자만’이다, 자만하는 자는 위험에 빠지는 운명의 순간에 이르러서야 자신의 위치를 분명하게 인식한다. 자신이 스스로 빛을 내는 존재라고 생각한 자칭 ‘영웅’이 있었다. 그의 이름은 고대 그리스어로 ‘빛나는’이라는 의미의 ‘파에톤’이다. 파에톤은 태양신 헬리오스와 인간 클리메네 사이에서 태어난 반신반인이다. 그는 수련에 따라 신이 될 수도 있고 혹은 인간이 될 수도 있는 경계적인 존재다.


    아버지를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아들 파에톤은 친구들에게 태양신이 자신의 아버지라고 말했지만 아무도 그의 말을 믿지 않았다. 파에톤은 어머니 클리메네에게 아버지를 만나게 해달라고 요구했다. 파에톤은 헬리오스를 만나자마자 자신의 친구들로부터 거짓말쟁이라고 놀림받은 수모에 대해 토로했다. 헬리오스는 아들을 만난 기쁨에 그만 그의 단점을 간파하기도 전에 아들이 원하는 것이면 무엇이든 들어주겠다는 약속을 하고 만다. 파에톤은 헬리오스의 임무가 얼마나 정교하고 힘든 일인지 짐작조차 하지 못했다. 헬리오스는 자신에게 주어진 일을 한 번도 소홀히 한 적이 없었다, 매일의 움직임이 수련이며 인내였다. 파에톤은 아버지의 사랑과 관대함을 확인하고 싶었다. 그는 헬리오스에게 자신이 하루만 태양을 실어 나르는 전차를 몰겠다고 졸라댔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인간의 생각은 말로 표현되고, 말은 다시 행동을 낳는다고 믿었다. 말을 통해 우주가 창조되었으니 약속을 지키는 일이 가장 중요한 가치였다. 헬리오스는 자신의 약속을 지킬 수밖에 없었다. 자만에 가득 찬 파에톤은 결국 전차에 올라 말의 고삐를 잡았다. 태양 전차는 정해진 길에서 벗어나 위험한 길로 들어서고 말았다. 파에톤은 자신이 당나귀조차 조절할 수 없는 나약한 존재라는 사실을 태양 전차 위에서 깨닫는다. 


    자만의 가장 큰 증상은 자신을 객관적으로 볼 수 없다는 점이다. 또한 자신이 저지른 실수로 남들에게 크나큰 해를 끼친다. 태양 전차는 중심을 잃고 지상 가까이 내려오더니 이내 추락했다. 제우스 신은 우주의 질서를 파괴한 파에톤에게 번개를 던져 그를 죽음에 이르게 했다. 당신은 자신이 밑은 임무에 걸맞은 연습과 수련을 거쳤다가 자신할 수 있는가? 아무런 준비도 없이 태양 전차를 몰 수 있다고 자만에 빠져 있지는 않은가? 이제라도 숙고해볼 일이다. 전차가 추락하기 전에.



    추상, 본질을 찾아가는 훈련

    추상, 나만의 개성을 찾는 연습

    ‘창조하다’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바라’다. 성서에 등장하는 첫 번째 동사 바라의 구체적인 의미는 ‘더 이상 덜어 낼 게 없는 가장 경제적이며 단순한 모습으로 만들다’이다. 다시 말해 ‘조각하다’이다. 히브리어 바라는 현대인이 보기에 서로 다른 의미를 지닌다. 바라의 첫 번째 의미를 ‘창조하다’이다. 창조하다의 의미로 사용될 때 주어는 항상 신이다. 이 의미의 특징은 이른바 ‘무에서의 창조’다. 바라의 두 번째 의미는 ‘자르다/덜어내다’이다. 학자들은 이 둘이 서로 다른 어원이라고 주장하기도 하지만 창조와 덜어내다는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사람들이 미켈란젤로에게 다윗의 조각상을 어떻게 만들었는지 묻자 “다윗을 재현하기 위해 다윗의 몸에 붙어 있지 않을 것 같은 돌들을 쪼아냈지”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창조는 삶에서 본질적이지 않은 것들, 도덕이나 종교가 우리의 동의도 없이 돌에 새겨 넣은 것들을 과감히 잘라내고 단절하는 용기에서 시작한다.


    추상이란 자신에게 몰입해 나만의 개성을 찾는 훈련이며, 그 개성이 바로 고유다. 이 단어는 예부터 전해져온 것이 굳어져 자기만의 전통이 됐음을 의미한다. 이러한 고유야말로 나를 온전하게 만들고, 나를 만족시킨다. 고유함은 세상에 둘도 없는 나만의 선율이다. 그 선율에 몰입해 연주할 때 나의 고유함은 매일 새롭게 변화하는 보석같이 빛난다.


    건축, 내가 만들어갈 인생이라는 작품

    인생은 건축이다. 우리 모두는 자신이 원하는 인생이라는 집을 설계하고 짓는 건축가다. 그런데 우리는 저마다 스스로 감동할 만한 집의 설계도를 가지고 있을까? 어쩌면 다른 사람이 그려놓은 설계도를 훔쳐보며 허둥지둥 집짓기를 흉내 내고 있을지도 모른다. 미래에 내가 거주할 집은 이 순간 내가 의도한 상상을 설계를 통해 물질로 옮겨놓은 것이다. 우리는 그것을 건축이라고 한다.


    기원전 21세기, 우르-남무는 오늘날 이라크 남부 지역 우르에 새로운 왕조인 우르3왕조를 건립했다. 그는 신전 건축을 통해 수메르의 르네상스를 일으켰다. 그는 춘분이면 신전에 모든 수메르인을 모아놓고 신년 의례를 행하며 우르의 주신인 달의 신 난나에게 제를 올렸다. 이 건축물이 ‘지구라트’다. 지구라트는 바빌로니아인이 만든 용어로 ‘쌓아올린 건축물’이라는 뜻이다. 1930년대, 영국의 고고학자 레나드 울리는 이곳에서 우르-남무가 남긴 지구라트 건축에 관한 수메르어 비문을 발견했다. 우르-남무는 마지막 문장에서 건축이라는 의미를 부연 설명했다. “그는 신전을 마땅히 있어야 할 자리로 되돌려놓았다.” 우르-남무에게 건축이란 ‘마땅히 있어야 할 자리를 찾아 그 원형을 회복하는 작업’이었다.


    우리는 인생이라는 각자의 멋진 집을 건축하는 건축가다. 내가 지어야 할 집은 나의 삶을 위한 철학이다. 그 철학은 지금의 나에게도 감동적이며, 10년 후의 나에게도 여전히 감동적이어야 한다. 그 원칙이 없다면 나의 집은 곧 흉물스러워져 철거라는 위기를 맞닥뜨릴 것이다.


    방향, 당신은 어떤 나침반을 가지고 있습니까

    하루가 ‘영원한 지금’으로 변한다. 하루는 높은 산에 도달하기 위해 매일 걸어야 하는 일정과 같다. 에베레스트 산처럼 험준한 산을 정복하기 위해서는 오랜 훈련이 필요하다. 육체와 정신을 위한 훈련 과정 없이 도전했다가는 사고의 위험에 노출될 수밖에 없다. 하루 동안 내가 등반해야 하는 산은 누구나 볼 수 있는 그런 산이 아니다. 그 산은 마음속에 뿌리 내려 눈으로는 볼 수 없는 산이다. 나의 열망을 담은 나만의 산으로, 마음속 심연으로 내려가야 비로소 나타나는 산이다. 지구상에 존재하는 모든 산의 모양이 서로 다르듯이, 내가 정복해야 할 산도 유일하고 숭고하다. 내가 오늘 등반해야 할 하루라는 산은 아무도 발을 들여놓은 적이 없는 장소이기에 낯설고 두렵다.


    하루라는 산을 삶을 위한 소중한 마디로 삼기 위해 꼭 필요한 생존 키트가 있다. 나침반이다. 나침반은 여러 가지 핑계를 앞세워 정상으로 향하는 길에서 이탈하려는 나를 일깨워줄 멘토다. 자신만의 나침반을 준비하지 않은 사람은 자신이 가야 할 방향을 알지 못해 다른 사람의 나침반을 흘낏거리며 산을 오른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 여정이 자신이 원하던 길이 아님을 깨달은 그들은 이내 지친다. 자신에게 유일한 여정이라야만 열정적으로 몰입할 수 있다. 위대한 개인이란 자신만의 나침반으로 가장 아름다운 산을 오르는 사람이다. 그는 하루라는 소중한 순간을 가다듬어 독자적인 영구 자석을 끊임없이 수련한다. 당신은 어떤 나침반을 가지고 있는가?



    패기, 나를 지탱해주는 삶의 문법

    감각, 과거라는 마취에서 깨어나기

    어떻게 해야 흘러가는 세월을 결정적인 순간으로 만들 수 있을까. 몸과 정신에서 요동치는 다양한 욕망과 생각들을 인식하고, 무차별적으로 다가오는 주변의 사건들을 관조하는 기술이 있다. 바로 감각이다. 감각은 수련을 통해 자신과 주변을 오랫동안 관찰해 그 모든 것을 감지하는 능력이다. 우리가 어떤 사람을 ‘감각이 있는 사람’이라고 부른다면 그는 자신의 분야에서 일가를 이룬 자다. 우리는 대부분 습관에 마취되어 있다. 습관은 새롭게 다가오는 지금을 볼 수 없게 만드는 눈가리개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날마다 새로운 감각을 키울 수 있을까.


    우리 몸에는 뼈를 감싼 골격근과 최적화된 운동을 기억해 마치 작은 스프링처럼 근육을 잡아당기고 늘이는 근방추라는 근육이 있다. 몸을 움직이는 행위는 뇌가 이 근방추로부터 신호를 받아 힘줄과 관절을 움직이는 것이다. 이때 오감 이외에 또 다른 감각이 작동한다. 우리가 눈을 감거나 코를 만지거나 손을 흔들거나 혹은 공을 발로 차는 행위 시에 이 감각이 등장한다. 바로 ‘고유수용감각’이다. 고유수용감각은 사람마다 다르다. 수련을 통해 자신의 근육을 훈련시키면, 그 근육은 점점 더 강인해지고 유연해진다. 누구나 수련 정도에 따라 고유한 근육감각을 가질 수 있다.


    근육은 운동을 통해 훈련하지 않으면 시간이 지나면서 점차 감각이 무뎌지고 급기야는 무감각해진다. 환각은 자신을 훈련하지 않은 사람들의 특징이다. 불의의 사고로 사지가 절단된 사람 혹은 몸의 일부가 절단된 사람이 수술 후에도 절단된 신체가 아직도 멀쩡하다고 착각하는 현상을 환각지라고 한다. 신체와 마찬가지로 정신적인 환각지도 있다. 자신에게 주어진 고유한 임무를 수련하지 않는 사람은 생각이라는 근육을 사용하지 않는다. 그는 점차 더 이상 자신에게 존재하지 않는 ‘헛것’을 추구하는 환각에 빠진다. 감각은 나 스스로 세상을 보려는 시선이다. 그 시선은 매일 매일 나에게 주어지는 하루를 어떻게 보낼 것인가를 생각하는 정신 근육 운동에서 시작한다. 배움이란 오늘을 어떻게 살 것인가를 생각하는 훈련이다. 생각은 당연하거나 하찮게 여기는 것들을 다시 찬찬히 바라보는 정신 훈련이다.


    나는 오늘 무엇을 생각할 것인가? 나는 오늘을 위한 새로운 초기 설정을 할 것인가, 아니면 어제의 초기 설정을 그대로 수용할 것인가? 오늘을 위한 나의 초기 설정에 대한 노력이 생각이고, 그 생각의 훈련이 고유한 유연한 나만의 감각이다. 당신은 오늘을 감각하고 있는가, 아니면 환각하고 있는가?


    일치, 행동은 곧 생각이다

    하루는 한 장의 사진이다. 우리는 이 하루를 삶의 결정적인 순간으로 만들어야 한다. 사진가들은 카메라의 작은 렌즈를 통해 세상을 본다. 그리고 흘러가는 순간을 포착해 예술로 승화시킨다. 그들은 그 찰나를 포착하기 위해 몰입한다. 그리고 무아의 상태에서 셔터를 누른다. 그들의 몰입과 통찰은 사진 한 장으로 가감 없이 표현된다. 인류는 하루를 삶의 결정적인 순간으로 만들고, 자신의 고귀한 생각을 말과 행동으로 옮긴 성인들에 의해 진보해왔다.


    말은 행동으로 옮겨질 때 완성된다. 그러나 말이 말로 그치고 행동으로 구체화되지 못하면 거짓이 된다. 고대 히브리어로 ‘말하다’라는 의미를 지니 동사 ‘아마르’의 원래 의미는 ‘보이지 않던 것을 보이게 하다’이다. 유대인들은 자신이 말한 것을 지키지 않는 사람을 거짓말쟁이라고 부른다. 서양에서 위증이 가장 중한 범죄 중 하나인 것도 그런 이유에서다. 수련은 자신의 고귀한 생각을 행동으로 옮기려는 노력이다.

    당신은 오늘 하루를 어떤 사진에 담아낼 것인가? 오늘 당신은 응시할 만한 대상을 찾았는가? 그 대상은 남들이 제시한 나와는 상관없는 물건인가, 아니면 온전한 나를 발견하기 위한 대상인가? 그 대상을 찾았다면 자신의 눈과 마음 그리고 머리를 정렬해 그 대상에 초점을 맞추었는가? 그리고 순간을 포착하기 위해 인내했는가? 오늘 하루를 위한 간절하고 감동적인 순간을 담은 사진은, 무아의 상태에서 카메라 셔터를 누르는 검지의 힘에서 나온다. 당신의 고귀한 생각을 실천할 지금이 바로 당신의 결정적 순간이다.


    패기, 꿈의 실현을 가능하게 하는 내공

    ‘오늘’은 인생이라는 긴 여정의 필수불가결한 과정이다. 오늘이라는 시간을 대하는 두 가지 삶의 태도가 있다. 하나는 시간이 장소를 통해 만들어내는 사건에 무의식적이며 습관적으로 반응하는 방식이다. 이럴 경우 시간과 공간에 매몰되어 그것들의 노예가 된다. 또 하나는 내가 완주하고 싶은 목표를 향해 전략을 짜고 묵묵히 실천하는 방식이다.


    스토아 철학을 수련하던 고대 로마 사람들은 인생의 욕망을 부추기는 다양한 유혹들, 예를 들어 명성 같은 것에 관심이 없었다. 다른 사람들의 기대에 자신을 맞추기보다는 자신이 원하는 모습으로 스스로를 조금씩 만들어갔다. 나는 이런 마음가짐을 패기라고 정의하고 싶다. 패기는 밤하늘에 떠 있는 달과 같다. 달은 현재의 자신에 안주하는 법이 없다. 시간에 따라 다른 모습으로 변신하며 자신이 가야 할 길을 묵묵히 걸어간다.


    성공적인 혁신은 자신에게 익숙하고 편한 자리를 떠날 뿐만 아니라 진부한 과거로 회귀하려는 모든 잔재를 완벽하고 섬세하게 제거할 때 가능하다. 패기를 지닌 자는 스스로를 드러내지 않으며, 자신이 취해야 할 모습으로 적절하게 변신한다. 그리고 자신이 도달해야 할 목표를 향해 묵묵히 걸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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