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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병주 교수의 조선 산책
저   자 : 신병주
출판사 : 매경출판
출판일 : 2018년 0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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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병주 교수의 조선 산책


왕, 부흥과 몰락 사이 외줄을 타다

세종의 눈부신 용인술

역사 속 지도자 중에서 인재의 적절한 등용으로 시대적 과제를 달성한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세종대왕이다. 조선이 건국된 후 30여년이 지난 즈음 왕위에 오른 세종, 그의 시대는 왕권과 신권의 갈등과 같은 초기의 정치적 시행착오를 수습하고 왕과 신하가 함께 머리를 짜내며 조선이라는 나라를 안정시켜야 할 과제가 대두된 시대였다. 세종은 조선이 나아갈 국정의 방향을 자주, 민본, 실용으로 삼았고, 가용할 수 있는 인재를 최대한 활용하여 시대적 과제를 해결해나갔다.


우리의 문자인 훈민정음의 창제를 비롯하여 백성들을 위한 《농사직설》, 《향약집성방》 등의 농서와 의서 간행, 장영실의 발탁과 해시계, 자격루, 측우기 등의 각종 과학기구들의 발명, 박연으로 대표되는 궁중 음악의 정리 등 조선 건국 50여 년 만에 이룩한 세종 대의 찬란한 성과들은 나열하기 어려울 정도다.


또한 북방 개척에도 힘을 기울여 4군 6진을 쌓아 압록강, 두만강으로 경계가 이루어진 오늘날 한반도의 영토를 확정하였고, 공법이라는 세법을 확정함에 있어서는 17만 명을 대상으로 하는 국민투표를 실시하였다. 세종의 리더십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자신이 출중한 능력의 소유자였음에도 불구하고 독단적으로 정국을 운영하지 않고, ‘함께하는 정치’를 표방하였다. 지역과 신분을 막론하고 전국의 인재들을 불러 모으고 이들이 마음껏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여건을 만들어 주었다. 집현전을 설치하여 최고의 인재들로 하여금 국가 정책을 만들게 한 것, 천민 출신의 과학자 장영실의 발탁은 세종의 포용적인 리더십을 대표적으로 보여준다.


신하들의 반대가 심했지만 능력 본위로 인재를 등용해야 한다는 세종의 신념은 확고했다. 세종은 장영실로 하여금 국가의 과학 프로젝트를 주도하게 했다. 이것은 간의와 일월정시의, 천평일구, 자격루 등의 발명품으로 이어졌다. 세종과 장영실의 환상적인 호흡은 15세기 천문 과학 분야에서 조선이라는 나라가 세계적 수준의 국가가 되게 했다.


인재를 알아보는 세종의 능력은 과학이 아닌 다른 분야에서도 나타났다. 우리 역사상 최고 재상 중 한 명인 황희 정승은 원래 세종의 즉위를 반대한 인물이었다. 태종이 14년간 세자의 자리에 있던 양녕대군을 폐위하고 충녕대군(후의 세종)을 후계자로 임명하자 황희는 이에 반대했고 결국 유배의 길에 올랐다. 유배지에 있던 황희에게 손길을 내민 인물이 바로 세종이었다.


세종은 왕위에 오른 후 황희를 다시 등용했고, 이후 황희는 세종의 기대에 부응하면서 최고의 재상이 됐다. 반대세력까지 포용하는 리더십이 돋보인다.


세종 리더십의 가장 중요한 요소인 ‘함께하는 정치’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기관이 집현전이다. 세종은 즉위 후 바로 집현전을 학문과 정책의 중심기구로 발전시켰다. 집현전이 위치했던 곳은 현재의 경북궁 수정전 자리고 근정전이나 사정전과 매우 가까운 곳에 위치해 있었다. 그만큼 세종이 집현전에 대한 관심이 컸음을 의미한다. 집현전에는 신숙주, 성삼문, 정인지, 최항 등 세종 시대를 대표하는 학자들이 속속 모여들었다.


세종 스스로도 학문이 뛰어난 군주였지만 홀로 정책을 결정하려고 하지 않았다. 집현전과 같은 기구에서 배출된 학자들의 연구 성과를 충분히 반영하였다. 집현전에서는 주택에 관한 옛 제도를 조사한다거나 중국 사신이 왔을 때의 접대 방안, 염전법에 관한 연구, 외교문서의 작성, 조선의 약초 조사 등 다양한 활동을 수행하였다. 집현전 학자들에게는 왕을 교육하는 경영관, 왕세자를 교육하는 서연관, 역사를 기록하는 사관의 임무도 동시에 부여하여 국가의 기둥으로 키워 나갔다.


집현전에서는 각종 편찬산업이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역사서, 유교경서, 의례, 병서, 법률, 천문학 관련 서적이 그것들로서 국가에 필요한 과제가 부여되면 집현전에서는 모두의 힘을 모아 정리하였다. 이러한 편찬사업은 세종 당대에 완성된 것도 많았지만 《고려사》와 같이 세종 대에 시작하여 문종 대에 완성된 것도 있다. 그만큼 긴 안목을 가지고 과제를 부여하고 이를 완성했던 것이다. 집현전은 세종의 각별한 배려 속에서 수백 종의 연구 보고서와 50여 종의 책을 편찬하였다.


‘인사가 만사의 근원’이라는 말은 세종 시대뿐만 아니라 현재에도 여전히 유효한 명언이다. 세종 시대를 찬란하게 만들었던 인재 등용의 힘이 우리의 시대에도 적극적으로 실현되기를 기대해본다.



시대의 위인을 조명하다

기억해야 할 여성 독립운동가들

1910년 8월 22일 창덕궁 흥복헌에서 합병조약이 체결되고, 8월 29일 대한제국은 일제에 강제병합됐다. 그리고 1945년 8월 15일 우리 민족은 36년 만에 광복을 맞이했다.


광복의 과정에는 국가와 민족의 독립을 위해 활약한 독립운동가의 헌신적인 노력과 희생이 있었다. 김구, 윤봉길, 이봉창, 김상옥, 박열 등 우리는 많은 독립운동가의 이름을 기억하고 있지만, 유관순 의사를 제외하면 여성 독립운동가의 존재와 활동에 대해서는 알고 있지 못한 경우가 많다. 최근 <암살>이나 <밀정>과 같은 영화에서도 일부 언급됐지만, 여성 독립운동가의 활동도 줄기차게 전개됐음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안중근의 어머니 조마리아(1862~1927) 여사는 아들이 순국한 후 안 의사의 아내와 아이들이 있는 러시아로 이주한 후 러시아 동부 각지를 순회하며 동포들의 민족의식과 독립의식 각성에 크게 기여했다. 1922년에는 상하이로 들어와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활동을 적극 지원했다.


남자현(1872~1933) 의사는 <암살> 여주인공의 실제 모습과도 많이 닮았다. 남편이 의병으로 일본군과 싸우다 전사한 후 유복자를 기르며 독립운동에 투신했다. 1919년 3.1운동 후 중국 요녕성으로 이주해 서로군정서에 가입했으며, 10여 개의 여자교육회를 설립해 여권 신장에도 힘을 기울였다. 1925년 일본 총독 사이토를 암살하기 위해 국내에 잠입했다가 실패한 후 만주 지역에서 독립운동 단체의 협력에 힘을 기울였고, 1933년 다시 만주국 일본전권대사 살해 시도 후 체포되어 하얼빈에서 순국했다.


윤희순(1860~1935) 의사는 한말 최초의 여성 의병장으로 꼽히는 인물이다. 1895년 단발령이 계기가 돼 일어난 을미의병, 1907년 군대의 강제 해산으로 일어난 정미의변 때 여성으로 구성된 의병대를 조직해 항전했다. 의병 활동을 독려하기 위해 ‘안사람 의병가’ 등 의병가를 짓기도 했다. 나라를 빼앗긴 후에는 중국으로 망명해 1935년까지 요동 지역을 중심으로 항일운동을 전개하다가 순국했다.


최초의 여성비행사 권기옥(1901~1988)도 비행사가 돼 조국의 독립운동을 도운 인물이다. 3.1운동을 전후한 시기 평양을 중심으로 독립운동을 전개한 권기옥은 중국으로 망명한 후, 1923년 중국의 운남육군항공학교에 입학해 비행사가 됐다. 이후 중국 공군의 비행사로 복무하면서 항일전선에서 활약을 했으며, 1943년 중경 임시정부에서는 한국애국부인회를 조직해 여성의 독립사상을 고취시키는 데 힘을 기울였다.


이외에도 미국으로 건너가 재미한국인의 애국정신을 고취한 김마리아(1891~1944) 선생, 남편인 신채호 선생과 함게 독립운동에 투신하고 간호사 출신의 독립단체인 ‘간우회’를 조직, 헌신한 박자혜(1895~1943) 선생도 있다. 잃어버린 나라의 주권을 찾기 위해 생애를 바친 수많은 여성 독립운동가의 활동과 노력은 독립운동에 큰 힘이 되었고, 광복이라는 열매의 쟁취에 일조를 했다.


조선의 빼어난 기술과 문화재

관동별곡과 함께하는 강원도 기행

산과 바다가 절경을 이루는 강원도 지역은 무더위를 피하는 대표적인 여행지로 손꼽힌다. 강원도에 대한 정취를 더욱 풍부하게 해주는 글이 조선 중기의 학자 정철이 쓴 <관동별곡>이다. 누구나가 학창시절 국어 시간에 학습했던 그 글에는 437년 전 강원도의 풍광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1536년 현재의 서울 청운초등학교 인근에서 태어난 정철은 45세가 되던 1580년 1월 강원도 관찰사로 임명됐다. 당시 상황을 정철은 <관동별곡>에서, “영추문으로 들어와 경회루 남문 바라보며 하직하고 물러나니 옥절(관찰사의 행차를 알리는 표신)이 앞에 섰다”고 표현하고 있다.


정철은 문학가로 널리 알려져 있지만, 동인과 서인의 당쟁이 본격화되던 시기 서인의 강경파로 활약한 대표적인 정치인이기도 하다. 강원도 관찰사로 가게 된 것도 당쟁의 와중에서 동인의 탄핵을 받아 중앙의 관직에 있기는 어려워 지방의 관찰사로 나가게 된 것이다. 정철의 여정은 섬강과 치악을 거쳐 통천의 총석정에서 시작해 고성 삼일포, 간성 청간정, 양양 낙산사, 강릉 경포대 및 삼척 죽서루와 현재는 경상도에 속하는 울진의 망양정, 평해 월송정에 이르는 8경이 중심을 이룬다.


정철은 관찰사 부임을 계기로 관동의 명승지를 찾아 재충전의 시간을 갖는 한편 지역 민심을 제대로 파악해 중앙 정치에 복귀했을 때 어떤 정치를 해야 할 것인가의 구상까지 담았다. <관동별곡> 곳곳에 명승지에 대한 묘사와 더불어 자신의 느낌까지 피력한 것도 이러한 의지가 반영돼 있기 때문이다.


강릉에 대해서는 “강릉 대도호부 풍속이 좋을시고/절효정문이 고을마다 서 있으니”라고 하여 이곳이 효자와 열녀의 고향임을 언급했다.


금강산의 원통골과 화룡소 일대를 답사한 여정에서 “원통골 가는 길로 사자봉을 찾아가니/그 앞에 넓은 바위 화룡소 되었구나/천년 노룡이 굽이굽이 서려있어/주야로 흘러내어 창해에 이어지니/풍운을 언제 얻어 삼일우를 내리려느냐?/음지에 시든 풀을 다 살려 내리라”고 한 표현이나, 마지막 부분에서 “이 술 가져다가 사해에 고루 나눠 억만 창생을 다 취케 만든 후에 그제야 고쳐 만나 또 한잔 하자꾸나”에서도 백성의 삶을 걱정하고 이들을 위해 최선을 다하겠다는 작가의 의지가 잘 나타나 있다.


<관동별곡>에서 정철은 주요 명승지 외에 그 지역의 역사와 문화를 보았고, 왕에 대한 충성과 민생 문제 해결을 늘 다짐했다. “강원도 관찰사 정철이 도내의 병폐를 진달하였는데, 왕이 가상히 여겨 답하고 해당 관사에 내려 의논하여 시행하도록 하였다”는 《선조수정실록》 1580년 7월의 기록에서도 정철의 강원도행은 단순한 여행이 아니라, 백성들의 삶의 현장을 찾아, 그 문제점을 해결하려 한 목적이 컸음을 확인할 수 있다. 휴가철 관동 지역을 찾을 때는 <관동별곡>의 기록과 함께하는 것은 어떨까? 수려한 자연 풍광과 함께 인문학의 향기에 젖어들 수 있는 즐거움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조선왕조실록의 편찬과 보관이 주는 지혜

선조들에게 찾을 수 있는 하나의 특별한 유전자는 기록물을 편찬하고 이를 철저히 보관한 기록문화 전통이다. 2018년 기준 한국은 유네스코 지정 세계기록유산을 총 16건 보유하고 있는데, 이것은 아시아 1위이며 세계 4위의 수준이다. 세계기록유산 대부분은 조선시대에 생산되었다. 《훈민정음》을 비롯해 《조선왕조실록》, 《승정원일기》,《조선왕조의궤》,《동의보감》,《일성록》,《난중일기》,《유교 책판》, 조선통신사 관련 기록물, 왕실의 어보와 어책 등 총 10건이나 된다.


이러한 기록물은 정치에서의 공개성과 투명성을 유도함으로써 왕부터 모범적으로 정치행위를 할 수 있게 유도했다. 조선왕조가 500년 이상 장수할 수 있었던 요인으로 기록문화의 전통을 꼽는 까닭이기도 하다. 《조선왕조실록》과 《승정원일기》와 왕실 행사를 기록과 그림으로 정리한 의궤는 건국 초부터 작성하기 시작해 왕조 멸망 때까지 단절됨이 없이 쓴 기록이라는 점에서 더욱 의미가 있다. 왕조 내내 선대에 마련한 기록문화의 전통을 그대로 계승했음을 잘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조선왕조실록》은 공식적으로는 1대 태조로부터 25대 철종에 이르는 472년(1392~1863)간의 기록을 말한다. 편년체로 서술한 조선왕조의 공식 국가기록으로서, 조선시대의 정치/외교/경제/군사/법률/사상/생활 등 각 방면의 역사적 사실을 망라하고 있다. 《고종실록》과 《순종실록》까지 편찬된 점을 고려하면 조선의 27대 왕의 행적 모두가 실록으로 정리되고 보관되었음을 알 수 있다.


《조선왕조실록》은 왕이 사망하면 임시로 실록청을 설치하고, 실록청에는 영의정 이하 정부의 주요 관리들이 영사/감사/수찬관/편수관/기사관 등의 직책을 맡아 실록 편찬을 공정하게 집행하였다. 조선시대 대부분의 책은 편찬이 완료되면 왕에게 바쳤지만 《조선왕조실록》은 예외였다. 편찬의 완성만을 총재관이 왕에게 보고한 후 춘추관에서 봉안 의식을 가진 후 춘추관과 지방의 사고에 보관하였다. 왕의 열람을 허용하면, 실록 편찬의 임무를 담당한 사관의 독립성이 보장을 받지 못하고 사실이 왜곡될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었다. 실록을 기록하는 임무를 맡은 사람을 사관이라 칭하였는데 사관은 왕이 주재하는 회의에 참여하여 보고들은 내용과 자신의 논평까지를 그대로 기록하였는데 이를 사초라 하였다. 사초는 사관들이 일차로 작성한 초초와 이를 다시 교정하고 정리한 중초, 실록에 최종적으로 수록하는 정초의 세 단계 작업을 거쳐 실록에 실었다.


초초와 중초의 사초는 물에 씻어 그 내용을 모두 없앴으며, 물에 씻은 종이는 재활용되었다. 이러한 작업을 세초라 하였으며, 조선시대에 사초를 주로 세척하던 장소가 세검정 일대의 개천이었다.


편찬이 완료된 실록은 춘추관에서 실록을 봉안하는 의식을 치룬 후에 서울의 춘추관과 지방의 사고에 각 1부씩을 보관하였다. 조선전기에는 춘추관을 비롯하여 지방의 중심지에 보관하였다. 그러나 지방의 중심지는 화재와 약탈 등 분실의 위험이 제기되었으며, 실제 중종 대에는 관리인들이 비둘기를 잡으려다 성주사고가 화재를 당한 적도 있다. 급기야 임진왜란을 겪으면서 전주사고의 실록을 제외한 모든 실록이 소실되면서, 조선후기에는 실록이 모두 산으로 가게 되었다. 서울의 춘추관사고를 비롯하여 강화도의 마니산사고, 평안도 영변의 묘향산사고, 경상도 봉화의 태백산사고, 강원도 평창의 오대산사고가 그것이다.


묘향산사고는 후에 후금(뒤의 청나라)의 침입을 대비하여 적상산성이라는 천연의 요새로 둘러싸인 전라도 무주의 적성산사고로 이전했으며, 강화의 마니산사고의 실록은 다시 정족산사고로 옮겼다. 조선후기 지방의 4사고는 정족산, 적상산, 태백산, 오대산으로 확정되었고 이 체제는 조선이 멸망할 때까지 그대로 지속되었다. 사고에는 정기적으로 사관을 파견하여 포쇄(실록을 햇볕과 바람에 말림)을 하게 하였고, 실록을 점검하거나 포쇄한 경우에는 장서점검기록부에 해당하는 실록형지안을 작성하여 실록의 관리에 만전을 기하였다. 오늘날 우리가 세계기록유산 《조선왕조실록》을 거의 온전한 형태로 접할 수 있는 까닭은 선조들이 기록물 편찬에 만전을 기하고 이를 철저하게 보관해왔기 때문이다.



풍류가 넘치는 일상생활사

선조들의 여름나기 지혜

열대야가 계속되면 무더위를 피하기 위해 에어컨, 선풍기, 냉장고 등 각종 기계를 동원하지만 더위는 쉽게 피해갈 수 없다. 요즘처럼 각종 기기를 활용할 수 없었던 전통시대에 우리 선조들은 어떻게 무더위를 피해 갔을까?


정조 때의 학자인 홍석모가 지은 《동국세시기》에는 가장 덥다는 삼복 풍속이 소개돼 있다. 먼저 오늘날의 보신탕에 해당하는 개장에 관한 내용이 주목을 끈다. “개를 잡아 통째로 삶아 파를 넣고 푹 끓인 것을 개장이라 한다. 닭이나 죽순을 넣으면 더욱 좋다. 개장에 고춧가루를 넣고 밥을 말아서 시절 음식으로 먹는다”고 기록했다. 이어서 “복날에 개장을 먹고 땀을 흘리면 더위를 잊게 하고, 질병을 쫓을 수 있으며 보신이 된다고 한다. 그러므로 시장에서도 개장을 만들어 많이 팔고 있다”고 하여 당시 시장에서도 개장이 널리 판매되었음을 알 수 있다.


삼복에는 “붉은 팥으로 죽을 쑤어 무더운 복중에 먹는다. 이것은 악귀를 쫓으려는 데서 나온 것이다”고 한 기록에서는 악귀를 쫓기 위해 붉은 팥죽을 많이 먹었음을 알 수 있다. 요즘에도 팥빙수가 유행이니 팥은 한여름 더위와 잘 어울리는 음식으로 볼 수 있다. “나무로 만든 패를 각 관청에 미리 주어 그것을 가지고 얼음창고에 가서 받아가도록 했다”는 기록에서는 얼음을 직급에 따라 할당해준 상황을 엿볼 수 있다.


무더위를 날리는 여름철 음식도 소개돼 있다. 밀가루로 국수를 만들어 풋나물과 닭고기를 넣어 어저귀국(아욱국)에다 말아 먹었으며, 또 미역국에 닭고기와 국수를 넣고 물을 약간 넣어 익혀 먹기도 했다. 호박과 돼지고기에다 흰떡을 썰어 넣어 볶기도 하고 혹은 마른 복어 머리를 함께 넣고 볶아서 먹기도 했으며, 밀가루에다 호박을 잘게 썰어 넣고 반죽해 기름을 발라 전을 부쳐서 먹었다. 오늘날에는 비가 오는 날에 주로 먹는 부침개가 한여름의 별식이기도 했던 것이다.


참외와 수박은 조선후기 더위를 잠시나마 잊게 하는 대표적인 과일이었고, 더위를 쫓는 또 하나의 방법은 산과 계곡을 찾는 것이었다. 삼청동과 탕춘대(현재의 세검정 주변), 정릉의 계곡에는 사람이 많이 모여들었다. 남산과 북악산의 맑은 계곡을 찾아서 발을 씻고 목욕을 하며 하루를 유람하는 것도 무더위를 이기는 방법이었다.


지금의 선풍기나 에어컨의 대체품인 부채는 더위를 피하게 하는 일등 공신이었다. 특히 부채에는 여덟 가지 덕이 있다고 하여 ‘팔덕선’이라고 불렀다. 이유원이 쓴 《임하필기》에는 팔덕선의 이야기가 나온다. 팔덕은 바람 맑은 덕, 습기를 제거하는 덕, 깔고 자는 덕, 값이 싼 덕, 짜기 쉬운 덕, 비를 피하는 덕, 햇볕을 가리는 덕, 독을 덮는 덕 등 8가지로 부채의 좋은 점을 지적한 것인데 매우 해학적이다.


무더위의 공세와 그 대처법은 전통시대부터 지금까지 일관되는 내용이 많다. 전통시대 선조들의 피서법을 따라가면서 무더위를 식혀 보기를 바란다.


조선의 정책을 엿보다

책 읽는 유급휴가, 조선의 사가독서

바쁜 일상을 모두 제쳐두고 맑고 청아한 바람이 부는 한적한 곳에서 책을 읽는 모습, 생각만 해도 즐거운 기분이 든다. 조선시대에는 관리들에게 휴가를 주고 마음껏 책을 읽게 하는 제도가 있었다. 사가독서 제도가 그것이다. ‘사’는 하사할 사, ‘가’는 휴가 가이니 왕이 하사하는 휴가기간에 마음껏 독서를 하라는 뜻이다. 사가독서는 세종이 집현전 학자들을 격려하기 위한 아이디어에서 비롯됐다. 집현전은 세종의 지대한 관심 속에서 국가의 중요 정책을 연구하게 했던 기관이었다. 세종은 수시로 이곳을 방문해 학자들을 격려했으며, 최고의 특산물이었던 귤을 하사하는 등 최고의 대우를 해주었다.


그러나 집현전의 학자들에게도 불만은 있었다. 연구기관 특성상 장기 근무를 하면서 승진이 늦어지는 것이었다. 실제 정창손 22년, 최만리 18년, 박팽년 15년, 신숙주 10년 등 장기 근무하는 학자가 많았다. 이러한 상황을 파악한 세종은 집현전 학자들을 위해 유급휴가제도인 사가독서제를 실시했다. 심신이 지친 학자들에게 독서를 하며 재충전을 하라는 뜻이었다.


사가독서는 1426년(세종 8) 12월 권채, 신석견, 남수문 등을 집에 보내 3개월간 독서를 하면서 재충전을 할 수 있는 시간을 준 것에서 비롯됐다. 처음에는 집으로 보냈다가, 이후에는 북한산의 진관사를 사가독서를 하는 장소로 활용했다. 1456년 세조 때 집현전이라는 기관은 없어졌지만 사가독서의 전통은 그대로 이어졌다.


성종 대에 이르면 아예 현재의 용산 지역에 독서당을 만들어 사가독서제를 정착시켰다. 1492년(성종 23) 성종은 용산 한강변에 있던 폐사를 수리해 독서당을 만들었는데, 남쪽에 있는 독서당이라 하여 남호독서당이라 했다. 독서당의 다른 명칭이 ‘호당’이었기 때문이다. 중종 때인 1517년(중종 12)에는 두모포의 정자를 고쳐 지어 동호독서당이라 했다.


동호독서당은 현재의 옥수동과 금호동의 산자락 일대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는데, 임진왜란이 일어나서 소각될 때까지 75년 동안 연수원과 도서관의 기능을 수행했다.


한강의 다리 중 ‘동호대교’라는 명칭은 동호독서당에서 유래한 것이며, 율곡 이이의 저술 《동호문답》은 독서당 시절에 쓴 책이다. 신숙주, 이황, 이산해, 이이, 정청, 유성룡 등 조선을 대표하는 학자 대부분이 독서당을 거쳐 갔다. 당시 함꼐 수학한 학자들은 계 모임을 만들기도 했는데 이들이 1부씩 나누어 가진 《독서당계회도》는 참여자들의 명단과 함께 독서당에서 압구정 쪽으로 뱃놀이하는 장면이 그림으로 남아 있다.


조선시대 관리들에게 심신의 휴양을 위한 휴가지의 기능과 함께 학문과 독서에 몰두할 수 있는 공간이었던 독서당, 지금은 도서관이 그 기능을 일부 수행하고 있다. 특히 많은 도서관들은 ‘길 위의 인문학’ 프로그램을 운영하면서 인문학 특강과 현장답사를 진행하고 있다. 바쁜 일상, 짬을 내 도서관을 찾아 사가독서의 기분을 느끼며 독서의 열기 속으로 빠져 보는 것도 좋을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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