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짜 자존감 권하는 사회
 
지은이 : 김태형
출판사 : 갈매나무
출판일 : 2018년 01월




  • 심리학을 현실에 적용해 우리 마음을 지키는 방법을 고민하고 설파해온 저자는 이 책에서 가짜 자존감을 조장하는 세태를 가차 없이 비판한다. 또한 가짜 자존감을 향한 맹목적인 질주를 멈추려면 자존감이 무엇인지 정확히 파악하고, 진짜 자존감을 얻기 위한 방법을 모색할 것을 권한다. 그는 무엇보다 진정한 자존감 확립에는 건강한 관계가 필수라는 사실을 강조하며 이렇게 말한다. “나와 타인, 모두의 관계를 마음 뿌리부터 이해하는 노력을 거쳐야 비로소 진정으로 자기를 사랑하고 타인을 사랑하는 심리적 기초 체력을 키울 수 있다”고. 


    가짜 자존감 권하는 사회


    21세기 대한민국에서 산다는 것

    만인이 만인을 혐오하는 사회

    사회적 평가만큼 우리의 자존감에 큰 영향을 미치는 것이 있다. 바로 타인으로부터의 존중이다. 서로에 대한 존중은 인간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이다. 만일 누군가가 나를 존중해주지 않는다면 어떨까? 당연히 그를 싫어하거나 증오하게 될 것이다. 부모와의 관계에서도 마찬가지이다. 나를 존중해주어야 마땅하다고 믿으며 또 그렇게 해주기를 간절히 바라는 부모가 실제로 나를 존중해주지 않는다면? 의식적으로는 애써 부인할지 몰라도, 부모를 싫어하거나 증오하는 마음이 생길 것이다. 그런데 한국에서는 자식을 존중하지 않는 부모가 증가하고 있다. 이에 비례하여 부모에 대한 자녀의 증오심도 수직 상승하고 있다. 이러한 증오는 부모뿐만 아니라 세대, 성별 등의 갈등에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는 사람들이 서로를 사랑하기보다 혐오하는 데 더 익숙해지고 있다. ‘혐오’라는 단어가 신문이나 뉴스에서 심심찮게 등장할 정도다. 특히 젊은 세대는 나이 든 세대에 대한 혐오를 거침없이 입밖으로 표현한다. 그중 한 예가 ‘틀딱’이라는 말이다. 입에 틀니를 낀 노인이 딱딱거리면서 말하는 모습을 폄하하는 신조어다.


    젊은 세대의 노인 혐오는 특히 두 세대 간의 정치적 입장 대립으로 드러난다. 2012년 대통령 선거에서 젊은 세대는 압도적으로 문재인 후보를 지지했던 반면, 나이 많은 세대, 특히 노인 세대는 압도적으로 박근혜 후보를 지지했다. 노인층의 몰표에 힘입어 박근혜가 근소한 차이로 당선되자 일부 젊은이들은 노인들의 지하철 무임승차를 반대하는 서명 운동을 전개하기도 했다.


    이때까지만 해도 젊은이들이 노인을 틀딱이라고 부르지는 않았다. 그러나 지난해 탄핵 정국을 전후하여 박근혜를 지지하는 노인 세대와 탄핵을 요구하는 젊은 세대 간의 갈등이 고조되는 과정에서 노인 세대에 대한 혐오가 확산되었다. 이 시점부터 틀딱은 20~40대와 달리 극우 수구적인 정치 성향을 가진 60대 이상의 노인을 비하하는 목적으로 사용되었다. 최근 이 용어는 노인을 비하하는 의미를 넘어서 나이 많은 노인네, 어른, 꼰대와 비슷한 뜻으로 폭넓게 사용되고 있다.


    자존감 낮은 부모 세대와 자식 세대의 악순환

    한국의 상당수 젊은이들에게 노인 세대는 애정과 존경의 대상보다 혐오와 공격의 대상으로 간주되고 있다. 젊은이들이 공공장소에서 한마디 하는 노인에게 공격적으로 맞받아치는 모습은 적잖이 관찰할 수 있다. 이런 젊은이들을 예의 없다며 욕하는 이들도 많다. 하지만 나는 그들에게 이렇게 묻고 싶다. “젊은 세대가 어른 세대로부터 존중받으며 자랐다면 노인들을 지금처럼 혐오했을까?”


    한국의 젊은이 절대다수가 극우 사대 세력이 지배하는 병든 세상이 아니라 건강한 세상에서 살고 싶어 한다. 젊은 세대가 이명박 정권과 박근혜 정권 하에서 야당을 압도적으로 지지했던 것은 이 때문이다. 그러나 이들이 “우리는 지금의 병든 세상이 싫어요. 더 좋은 세상에서 살고 싶어요.”라고 호소했을 때 어른 세대는 어떻게 반응했는가? 노인 세대는 “배부른 소리하지 마. 뭐가 병든 사회야. 지금 같은 세상에서 계속 살아.”로 대답했다. 부모 세대라고 할 수 있는 노인 세대가 자식 세대에 속하는 젊은이들의 소원을 악착 같이 짓밟은 것은 그들이 젊은 세대를 존중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젊은이들은 나이 많은 부모님이 자기 말은 아예 들으려고 하지 않는다고, 부모님이 점점 더 고집스러워지고 권위주의적으로 변해간다고 자주 하소연한다. 나는 성인이 된 자식의 정치적 의견을 존중해주지 않는 노인은 나이 들어서 갑자기 그렇게 된 것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들은 분명 자식이 어렸을 때에도 의견을 존중해주지 않는 부모였을 가능성이 높다.


    인간관계의 패턴은 쉽게 변화하지 않는다. 부모가 어렸을 때부터 자식을 존중해주었다면, 그 부모는 노인이 되어서도 일관되게 자식을 존중해줄 가능성이 높다. 부모에게 존중받지 못하며 자라난 자식 세대의 자존감은 높을 수 없다. 존중받지 못한 사람에게 억지로 타인을 존중하라고 배려하라고 강요할 수 있겠는가. 우리는 여기서 젊은이들이 노인 혐오 근저에 자식을 존중할 줄 모르는 자존감 낮은 부모와 그런 부모 밑에서 자라면서 자존감에 상처를 입은 자식 세대 간의 충돌이 숨어 있음에 주목해야 한다. 물론 대부분의 젊은이들이 집에서 자기 부모에게 노골적으로 혐오나 증오심을 드러내지는 않겠지만, 그것은 사회적 차원에서의 노인 혐오를 뒷받침하고 확산시키는 심리적 기초가 되고 있다.


    심리학자의 자존감 노트 - 자존감이란 무엇일까?

    자존감에 대한 정의는 심리학자들에 따라 차이가 있다. 대다수가 자존감이 중요하다는 사실에는 동의하지만, 저마다 자존감을 다른 의미로 정의하고 사용한다. 이것은 자존감 연구 분야에서 제기되는 주요한 걸림돌 가운데 하나이다. 자존감의 개념에 대한 심리학자들의 의견 차이나 논쟁을 모두 다루는 것은 이 책의 범위를 벗어날 것이다. 따라서 여기에서는 내가 정의하는 자존감의 개념을 소개하고 이를 설명하기 위한 목적에서 몇몇 심리학자의 의견만을 소개하기로 한다.


    한마디로 정의하자면, 자존감은 ‘자신의 가치에 대한 평가에 기초하여 스스로를 존중하는 마음’이다. 이 개념을 좀 더 자세히 들여다보면 자존감이 무엇인지 정확히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누구의 자존감도 지켜주지 못하는 사회

    한국의 중장년층은 어떻게 자존감이 무너지는가

    인생은 선택의 연속이라는 말이 있다. 한국의 경우 청소년기까지는 자유의지에 의한 선택이 거의 불가능하다. 부모의 지배와 간섭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는 청년기부터 비로소 나의 의지에 의한 선택이 (물론 본인의 결심과 노력이 필요하기는 하지만) 가능해진다. 이것은 청년기 이후부터의 선택은 본질적으로 모두 나의 몫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예를 들어 고등학교 시절, 부모의 강요 때문에 의대에 진학한 것은 나의 선택이 아니라 부모의 선택이다. 그러나 부모의 영향에서 벗어난 이후에도 계속 의대를 다니고 의사가 된 것은 나의 선택이다. 따라서 그 선택에 대한 책임은 내 몫이라 할 수 있다.


    청년기 이후부터 내가 어떤 선택을 하면서 살아왔는지, 그 결과가 무엇이었는지는 자존감에 그대로 반영된다. 이런 점에서 청년기 이후의 자존감은 곧 나의 선택이자 삶이라고 말할 수 있다.


    나는 더 이상 사회적 쓸모가 없는 사람인가

    중년은 자신의 인생을 재평가하는 시기이다. 지금까지 내린 선택 과정을 되돌아보는 시기라 할 수도 있다. 이런 재평가 결과는 자존감에 상당한 영향을 미친다. 중년에 이르면 청년기의 꿈이 옳았는지 아니면 잘못되었는지가 명확하게 드러난다. 예를 들어 청년기에 훌륭한 학자가 되기를 꿈꿨다면 중년기에는 훌륭한 학자가 되었는지 아닌지가 판가름된다. 학자가 되었는데도 전혀 만족스럽지 않다면 청년기의 꿈이 잘못되었음을 깨달을 수 있다. 또한 이 시기에는 지금까지의 인간관계를 되돌아보게 된다. 배우자와의 관계가 좋아지거나 악화되어 있고, 자식 농사를 잘 지었는지 아닌지도 분명해지기 때문이다. 아울러 지금까지 살아온 날보다 앞으로 살아갈 날들이 더 적다는 사실, 자신이 죽음을 향해서 나아가고 있다는 자각 역시 인생 전체를 재평가하도록 이끈다.


    과거의 내 선택들이 잘못되었음을 깨닫게 될 때, 과감하게 새로운 선택을 시도할 수 있는 것은 중년기까지 가능하다. 마지막 기회라고 할 수 있는 중년기에 이르러서도 올바른 선택을 하지 못한다면 노년기의 자존감 파멸은 피할 수 없다. 노년기에는 자신의 삶을 평가하여 그것을 긍정하고 마지막 남은 힘을 쏟으면서 삶을 마무리해야 한다. 그런데 이 시기에 이르러 그동안 자신이 잘못 살아왔다고 판단되면 삶을 긍정할 수가 없고, 죽음을 받아들일 수 없게 되어 절망에 빠진다. 사람의 가치는 탄생이 아니라 죽음을 통해서 가장 명확하게 드러난다. 명문가의 혈통으로 태어났어도 너절하게 죽는 사람과, 개천에서 태어났어도 아름답게 죽는 사람의 가치는 다르게 평가될 수밖에 없다.


    사람의 가치를 돈으로 평가하는 한국 사회에서는 중년기 이후부터 자존감이 빠르게 추락할 수 있다. 한국 사람들은 그나마 직업을 유지하는 동안 자신이 사회적 쓸모, 가치가 있는 존재라고 믿는 경향이 있다. 자신의 경제력을 통해서 스스로 사회가 필요로 하는 존재라는 믿음을 억지스럽게 유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경우, 명예퇴직이나 정년퇴직 혹은 해고나 파산 등으로 인해 직업을 잃게 되면 당연히 자존감이 손상된다. 직업을 잃는 것은 무엇보다 자신이 더 이상 돈을 벌 수 없는 가치 없는 존재, 사회가 더 이상 필요로 하지 않는 쓸모없는 존재로 전락했음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한국의 아버지들이 직장에서 밀려나온 뒤에 갑자기 어깨가 축 늘어지고, 가족들의 얼굴 보기를 부끄러워하며, 심각한 정신적 혼란을 겪는 것도 마찬가지 이유에서다. 그들이 평소 자신의 가치를 직업(한국에서는 돈과 동일시되는)으로 평가해온 결과인 것이다. 사람의 가치를 사회적 쓸모가 아니라 돈이나 직업 등의 잘못된 기준으로 평가하면 진짜 자존감이 아니라 가짜 자존감을 갖게 된다. 가짜 자존감은 말 그대로 가짜이기 때문에 돈이 없어지거나 직업을 잃게 되면 허망하게 무너져 내린다.


    돈이나 사회적 지위가 떠받치고 있는 가짜 자존감

    한국의 중년들은 자식 뒷바라지를 위해서, 무너진 자존감을 회복하기 위해서 직장을 그만둔 후에도 계속해서 돈을 벌려고 한다. 퇴직금을 밑천 삼아 주식에 투자하거나 치킨집 같은 자영업에 뛰어드는 것이다. 그러나 준비가 부족한 상태에서 투자나 창업에 성공하는 비율은 대단히 낮기 때문에 돈을 불리기는커녕 평생에 걸쳐 모았던 돈을 날려버리기 일쑤다. 한국의 자영업 비중이 기형적으로 높고, 55세를 기점으로 빈곤율이 갑자기 치솟는 것은 이와 관련이 있다. 이런 경우가 늘어나면서 한국 노인 세대의 빈곤율은 거의 50퍼센트에 이르고 있다. 나이는 들고, 직업은 없고, 경제력도 없다면 심각한 자존감 손상을 피할 수 없다. 한국의 중장년 이후 세대, 특히 노인 세대가 심각한 자존감 문제를 경험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자존감은 어린 시절에 그 기초가 닦이고, 청소년기에 기본적으로 확립되며, 청년기 이후부터 죽을 때까지 계속 변화한다. 자존감에는 상당한 일관성과 공고성이 있어서 그것이 급격하게 변화하는 경우는 흔치 않다. 그러나 자존감은 전 생애에 걸쳐 끊임없이 변화하고 발전하는 역동적인 것이기도 하다.


    은퇴 이후의 중년들이 자존감을 회복하려면, 무엇보다 자신의 인생 목표를 전반적으로 재검토해야 한다. 한국인들의 인생 목표는 죽는 순간에 맞춰져 있지 않다. 대부분의 목표가 길게 잡아야 직장 생활 혹은 경제 활동을 마감하는 50대 정도까지가 유효하다. 따라서 직장에서 은퇴하거나 돈을 벌지 못하게 되면, 그 순간부터 인생 목표를 상실한 상태에 놓인다. 이미 평균 수명이 80세 이상을 돌파한 고령 사회에서 인생 목표가 없는 상태로 수십 년을 살아야 한다는 것은 그 자체로 끔찍한 일일 수밖에 없다. 중장년이라는 나이라도 인생 목표가 중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중년들은 지금이라도 죽는 순간까지 추구해야 하는 건강한 인생 목표를 설정해야 한다. 새로운 목표는 직장이나 돈 같은 과거의 기준을 따라선 안 된다. 은퇴 이후의 중년들이 자존감을 회복하려면 또한 자신의 삶을 수용하고 긍정해야 한다. 중년기 이후의 한국인들은 자신의 삶을 실패한 것으로 간주하는 경향이 있다. 사실 이들 중 절대 다수는 가족들을 위해서 한평생 성실하게 노동을 해왔다. 그럼에도 자신의 가치와 인생을 긍정적으로 평가하지 못한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돈을 많이 벌지 못했기 때문이다!


    중년들이 자신의 가치를 경제력으로 평가하는 자세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면, 자신의 가치를 높게 평가할 수 없고 자기의 인생을 긍정할 수도 없다. 한마디로 자존감의 심각한 손상을 피할 수 없다. 따라서 자신의 가치와 인생을 돈이 아닌 정당한 기준으로 재평가하고, 사람을 정당한 기준으로 평가하는 건강한 사회를 만들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중년들은 또한 힘을 합쳐 한국 사회가 중년기 이후의 인생을 도와주고 지원해주는 사회적 체계를 만들도록 요구해야 한다. 나는 제도적으로 기존소득제를 시행하는 조건에서 중년기 이후의 국민들에게 돈과 상관없이 할 수 있는 다양한 사회적 활동을 제공하는 것이 이상적이라고 생각한다. 아울러, 다소 늦었다고 생각할지도 모르지만, 자존감의 기초에 문제가 있다면 그것을 정상화시키는 작업도 필요할 것이다.



    가짜 자존감 VS. 진짜 자존감

    일시적이고 불안정한 쾌감

    한국처럼 돈을 기준 삼아 사람의 가치를 평가하는 병든 사회에서는 대다수의 사람들이 자존감의 손상을 피할 수 없다. 한국인들은 자존감을 높이려면 돈을 많이 벌어서 남들에게 높은 평가를 받아야 한다고 믿는 경향이 강한데, 평범한 절대다수는 아무리 발버둥을 쳐도 부자가 될 수 없는 곳이 바로 한국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한국에서 돈을 많이 번 사람, 사회적으로 성공한 사람의 자존감은 자연스럽게 높아질까? 그렇지 않다. 일부 심리학자들은 이런 경우에도 자존감이 높아질 수 있다고 주장하는데, 돈을 많이 벌어서 높아지는 자존감은 이른바 가짜 자존감이다.


    가짜 자존감 권하는 사회

    한국인들이 심각한 자존감 손상을 경험한다는 사실은 여러 사회 현상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자기불신과 무력감으로 확인할 수 있다. 그런데 우리 사회는 이들에게 해결책을 주기는커녕 도리어 가짜 자존감을 권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싶다. 개개인의 자존감 문제는 단순한 심리적 위안으로 해결되지 않는다. 피상적으로는 해결책이 될지 몰라도 진정한 대안은 되기 어렵다. 오히려 자기 불신과 무기력, 이로 인한 불안을 더욱 증폭시키기 쉽다. 1980년대는 물론이고 90년대 초중반까지만 해도, 주변 사람들에게 사회 개혁의 필요성을 설득력 있게 이야기하면 대부분이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그러나 2000년대 이후부터는 같은 이야기를 해도 이렇게 반응하는 이들이 부쩍 많아졌다.


    자존감이 낮다는 것은 곧 자기능력을 믿지 못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사람이 자기를 믿지 못하면 불의를 보더라도 저항할 수 없고 희망을 보더라도 잡을 수 없게 된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수많은 한국인들이 성장 과정에서 자기능력에 대한 불신을 키우는 데 익숙해진다.


    어려서는 사교육에, 청소년기에는 입시 공부에 짓눌려 살아왔는데 대학생이 되어서도 여전히 취업문을 통과하기 위해 헐떡거려야 하지 않는가. 더구나 오늘날의 한국에서 대학에 입학하는 것은 더 이상 기쁨도 아니고 고통에서의 해방도 아니다. 이런 삶은 자존감을 계속 저하시키고 낮은 자존감은 무력감과 자기불신을 심화시킨다. 그 결과 가짜 자존감을 부추기는 사회에 대한 저항은 더욱 요원해진다.


    자존감이 심각하게 손상되고 있고 그 주요한 원인이 병든 사회에 있다는 걸 알면서도, 현 상황을 자신의 힘으로 타개할 수 없다고 믿는 것은 너무나도 고통스럽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의 힘을 믿지 못하는 자존감 낮은 사람은 잘못된 현실을 변혁하기보다는 저항 의지를 완전히 상실할 채 묵묵히 현실에 순응하거나 자기를 구원해줄 누군가에게 광적으로 매달린다. 이를테면 힘없는 보통 사람들을 구원해주는 만화 속 영웅들이 등장하는 할리우드 영화들이 계속 인기를 끄는 것, 유명인이나 정치인에 대한 지지자들 중 상당수가 이성적이기 보다 광신적인 지지 성향을 보이는 것 등이 낮은 자존감과 직결되는 무력감, 자기불신과 관련된 현상이다.


    진짜 자존감은 나를 어떻게 지켜주는가

    한국에서 오늘날 목격할 수 있는 수많은 사례들이 보여주듯이 개인적인 차원과 사회적인 차원에서 자존감, 즉 자기존중의 욕구는 무엇보다 중요하다. 이는 인간의 기본 욕구이기 때문에 얼마나 충족되는가에 따라 사람의 정신 건강과 삶의 질, 행복 등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다.


    이는 일종의 순환 작용과도 같다. 자기존중의 욕구가 원만히 충족되면 자존감은 높아지지만, 제대로 충족되지 않으면 자존감이 낮아진다. 자존감이 높아지면 권리 주장을 포함하여 자기주장을 하는 것이 어렵지 않게 되고, 마침내 부적절한 외부 환경으로부터 스스로를 보호할 수 있다. 또한 비판을 수용하여 반성하고, 활동적이고 개방적이며, 창의성이 높고 긍정적인 사고를 한다.


    반면 자존감이 낮은 사람은 타인의 시선을 지나치게 의식하고 대인 관계에서 전반적으로 자신이 없어서 사회적 장면에서 위축되며, 매사 수동적이다. 특히 자신의 부적절함을 항상 의식한다. 내가 못난 사람이라서 이 사람, 이 자리에 어울리지 않는다는 일종의 자격지심 혹은 자신이 현재의 사회적 장면에서 정상적인 역할이나 기능을 수행하지 못하여 타인들을 실망시킬 것이라는 대인 관계에서의 불안이 심한 것이다. 또한 열등감이나 자기혐오가 심해서 저항이나 자기주장을 거의 하지 못하며, 방어적이고 폐쇄적인 태도로 외부 세계를 대하고 부정적인 사고를 한다.



    진짜 자존감은 타인을 볼 줄 아는 것이다

    진짜 자존감은 타인을 볼 줄 아는 것이다

    올바른 신념과 가치를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사회적 압력을 견뎌내면서 자신의 것을 고수하기란 매우 어려운 일이다. 이럴 때 소속 집단이 결정적인 도움을 줄 수 있다. 자존감을 계속 지켜내고 높이려면 “더 이상 어두운 문화나 사람에게 매여 있어서는 안 된다”는 말처럼 타인을 잘못된 기준으로 평가하는 사람들이나 문화는 최대한 멀리해야 한다. 동시에 자신의 존엄성을 지킬 수 있을 만한 사회적 상황에 머물러 건전한 신념과 가치관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을 최대한 가까이하고 건강한 집단에 소속되어야 한다.


    내가 어떤 집단에 소속되어 있는가는 무척 중요하다. ‘미스 리틀 선샤인’이라는 영화가 있다. 남보다 통통한 일곱 살 소녀 올리브는 어린이 미인 대화에 나가기로 당차게 결심하고, 가족들은 올리브를 응원하기 위해 다 함께 대회가 열리는 캘리포니아로 떠난다. 그런데 막상 도착해보니 다른 참가자들이 만만치 않다. 어른처럼 화려하게 화장하고 머리를 부풀린 참가자들 사이에서 행여 올리브가 기죽을까 걱정된 아빠는 딸에게 선발 공연에서 빠지라고 설득한다.


    그러나 엄마는 올리브가 있는 모습 그대로 살도록 내버려두라며 반대한다. 마침내 올리브는 무대에 올라가 다소 충격적인(?) 춤을 춘다. 청중과 심사위원들은 올리브의 춤에 격분하며 엄마아빠에게 당장 아이를 끌어내리라고 요구하지만, 가족들은 도리어 무대로 다 같이 올라가 올리브와 함께 신나게 춤춘다. 청중과 심시위원들에게 혹평을 받은 올리브의 자존감은 어떨까? 항상 자신을 지지하고 응원해주는 가족들이 있는 한 이 아이의 자존감은 건강하지 않을까?


    이 일화를 통해서 짐작할 수 있듯이, 어떤 경우에도 나를 수용해주며 사랑해주고 존중해주는 소속 집단의 존재는 잘못된 사회가 강요하는 스트레스를 치유해주고 올바른 신념과 가치관을 굳건히 고수하도록 돕는다. 즉 선한 이웃들과의 굳건한 연대나 건강한 소속 집단은 자존감의 수호자이자 중요한 원천인 것이다.


    우리는 누구와 어떻게 연대할 수 있는가

    최근에 일부 청소년들은 획일적인 경쟁 교육에 반대하고 사회 개혁을 요구하기 위해서 SNS등을 통해 활발히 소통하고 연대하며, 청소년들의 조직을 만들어 교육 개혁 활동 등을 전개하고 있다. 이들은 지난 촛불 항쟁 시기에 조직적으로 참여해 자기 목소리를 내기도 했다. 또한 이명박, 박근혜 정권을 거치면서 각종 민주 동문회 등이 복구되고 뿔뿔이 흩어져 있던 과거의 대학생들이 다시 뭉치고 있다.


    현재 성인 후기 혹은 중년기의 나이인 이들은 대부분 신자유주의가 한국을 초토화한 이후에는 대학 시절에 품었던 아름다운 꿈을 포기하고 각자도생의 길을 걸어왔다. 그러나 그것이 얼마나 끔찍한 결과를 초래했는지를 세월호 참사 등을 통해 생생하게 체험하면서 다시금 연대의 깃발 아래 결집하고 있다.


    놀이를 박탈당하고 사교육을 강요당하는 아이들을 구원하기 위해 엄마들도 힘을 합치고 있다. 아이들에게 놀 권리와 자유를 보장하기 위해 활동하는 엄마들의 다양한 모임들이 만들어지고, 학교 현장에서도 혁신 교육을 요구하는 학부모들의 연대 활동이 증가하고 있다. 이런 모든 건전한 사회 집단들은 한국인들의 자존감을 떠받쳐주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다.


    자존감을 논하면서 선한 이웃과의 연대나 건강한 소속 집단의 필요성을 언급하는 것에 대해 일부 심리학자들은 거부감을 드러낼지도 모른다. 그들은 자존감은 기본적으로 타인의 도움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자존감은 오직 나에게 달려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런 비현실적이고 비과학적인 주장에 동의할 수 없다. 자존감 확립에는 반드시 타인들이 필요하다. 단지, 무차별적인 다수의 타인들이 아니라 소수일지라도 건강한 타인들이 필요할 뿐이다. 자존감은 타인들과는 전혀 상관없이 나의 내면에서 조작되는 주관적 심리가 아니다. 객관적인 자기개념과 자기가치에 대한 정확한 평가를 위해서 타인의 존재는 필수적이다.


    자존감 확립과 향상을 위해서 반드시 필요한 것은 건강한 타인들 혹은 사회 집단이다. 우리에게는 나를 인간으로서 사랑하고 존중해주며, 건강한 신념과 가치관을 나와 공유하고, 나를 객관적으로 평가해줄 수 있는 동료나 조직이 필요하다. 이런 조건들이 충족되어야 사람은 자신의 사회적 가치를 정확히 측정하고 그것을 더 높이기 위한 목표를 세울 수 있다. 또한 목표 달성에 필요한 능력을 습득하기 위해 노력하고 실천 속에서 성취를 경험함으로써 실질적으로 자존감을 높일 수 있다.


    과거로부터 물려받은 문제들에 대응하기 위해서는 사람들은 자신이 지금 여기서 존중받고 있음을 느낄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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