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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시민의 글쓰기 특강
저   자 : 유시민
출판사 : 생각의길
출판일 : 2015년 0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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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시민의 글쓰기 특강


논증(論證)의 미학(美學)

취향을 두고 논쟁하지 말라

말을 하거나 몸짓을 쓰지 않고 다른 사람에게 마음과 생각을 전달하는 것을 텔레파시라고 한다. 사람에게 없는 이 초능력은 돌연변이 인간이나 외계 생명체가 등장하는 과학소설과 SF영화에서 볼 수 있다. 하지만 텔레파시만 신기한 능력인 건 아니다. 말이나 글로 다른 사람의 마음과 생각을 움직여 어떤 행동을 하게 만드는 것도 아주 신기한 능력이다. 누구나 다 하는 일이라서 우리가 신기하다고 느끼지 않을 뿐이다.


인간은 존재 그 자체가 기적과도 같은 생명체다. 인간은 의식을 가진 존재이며 의식은 뇌에 기거한다는 사실을 우리는 안다. 하지만 뇌를 아무리 잘게 부수어도 의식이란 것을 찾을 수는 없다. 의식은 물질이 아니기 때문이다. 물질인 우리 몸이 물질이 아닌 의식을 만들고, 물질이 아닌 그 의식이 거꾸로 물질인 몸을 움직인다고 하니 신기하지 않은가? 게다가 내 의식이 내 몸만 움직이는 것도 아니다. 언어로 소통해 타인의 의식에 영향을 줌으로써 타인의 몸까지도 움직인다. 다른 사람도 같은 방식으로 내 의식과 몸을 움직일 수 있다.


언어는 말과 글이 기본이지만 몸짓도 포함한다. 청각장애인의 수화(手話)도 언어다. 우리는 언어로 소통하고 교감해서 자신과 타인의 마음과 생각을 바꿀 수 있다. 말이든 글이든 원리는 같다. 언어로 감정을 건드리거나 이성을 자극하는 것이다. 감정이 아니라 이성적 사유(思惟) 능력에 기대어 소통하려면 논리적으로 말하고 논리적으로 써야 한다. 그러려면 논증하는 방법을 알아야 한다. 효과적으로 논증하면 생각이 달라도 소통할 수 있고 남의 생각을 바꿀 수 있으며 내 생각이 달라지기도 한다.


20년 전 독일 유학생 시절, 나는 '프리드리히에버트재단' 장학금을 받았다. 독일 대학교는 거의 다 국공립이어서 등록금이나 수업료가 없다. 그런데도 장학금을 주는 것은 아르바이트를 하지 말고 공부에 전념하라는 뜻이다. 에버트재단은 장학생들에게 돈만 준 게 아니라 1년 내내 다양한 주제로 여는 재단의 학술세미나에 참가할 권리도 주었다. 세미나 참가자에게 닷새 동안 잘 곳과 먹을 것을 주었고 오가는 여비까지 제공했다. 통일 전 서독 행정수도였던 본에서, 나는 독일을 포함해 세계 각지에서 온 청년들과 어울려 공부도 하도 놀기도 했다.


국제금융 관련 세미나 주간이었다. 점심을 먹은 후에 휴게실에서 뉴스를 보는데 독일 학생 둘이 논쟁을 시작했다. 한 학생은 보수적인 남부 바이에른의 믠헨에서 왔다. 이 학생을 '믠헨'이라고 하자. 다른 학생은 북부 항구도시 함부르크에서 왔다. '함부르크'라고 하자. 논쟁의 발단은 독일 사회민주당 전당대회 전야제 행사였다. 50대 당 지도부 인사들이 20대 청년당원들과 테크노댄스를 추는 장면이 텔레비전 뉴스에 나왔다. 귓바퀴에 피어싱을 여러 개 한 여성당원이 보였다.


"미친 것!"

'믠헨'이 혼잣말로 욕을 했다. 그러자 '함부르크'가 물었다.

"뭐가?"

"저 피어싱 말이야."

"피어싱이 뭐 어쨌다고?"

"저런 금고리를 열 개나 달고 다닐 돈으로 아프리카 어린이들 학교 보내는 데 후원이나 하면 좋잖아!"

그 말을 들은 '함부르크'가 정색을 했다. '믠헨'도 소파에서 등을 뗐다. 분위기가 싸해졌다.

"그럼 그냥 귀걸이 한 쌍은 어때?"

"그거야 뭐, 괜찮지."

"그건 왜 괜찮은데? 그 귀걸이값은 아프리카 어린이를 위해서 기부하면 안 되나?"

"안 될 건 없지만, 귀걸이 하나 하는 거야 이상할 게 없잖아."

"귀걸이 한 개는 정상인데 피어싱 열 개는 비정상이라고? 정상적 장신구와 비정상적 장신구를 나누는 기준이 뭐야?"


논쟁은 그리 오래지 않아 끝났다. '믠헨'의 패배였다. 두 사람은 '정상적인 귀걸이'와 '미친 피어싱'을 나누는 기준이 없다는 데 합의했고 '믠헨'은 처음에 했던 욕설을 취소했다. 왜 그런 결론이 났을까? '믠헨'이 그 욕설에 깔려 있던 가치판단의 정당성을 논증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목걸이나 귀걸이는 미적 감각과 취향을 표현하는 수단이다. 우리는 각자, 타인에게 부당한 피해를 주지 않는 범위에서, 자기 나름의 방식으로 미적 취향을 표현할 권리가 있다. 따라서 타인의 미적 취향을 '미친 짓'이라고 욕하거나 '비정상'이라고 비난할 권리는 누구에게도 없다. 미적 취향을 표현하는 방법과 관련하여 정상과 비정상의 경계를 정하는 객관적 기준이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따라서 서로 다른 취향을 가진 사람들이 서로 의지하며 살아가는 사회에서는 타인의 취향을 존중해야 한다. '함부르크'는 이렇게 주장했고 '믠헨'은 반박하지 못했다. '미친 피어싱! 그 돈으로 기부나 하지.' 이것은 처음부터 주장이 아니라 취향 고백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그렇다면 '믠헨'은 처음에 어떻게 말했어야 할까? 어유, 저 피어싱, 난 저렇게 많이 한 건 싫더라. 그랬더라면 '함부르크'는 심드렁하게 대꾸하였을 것이다. 난 뭐, 괜찮은 거 같은데! 그래? 응, 그래. 그렇게 주고받고 끝났을 것이다. 그냥 싫다는 것을 어쩌겠는가? 그런데 '믠헨'은 '미친 것'이라고 했다. 그리고 피어싱 하는데 쓴 돈을 아프리카 어린이를 위해 기부하는 것이 도덕적으로 올바른 일이라고 주장했다. 단순히 자신의 취향을 표현한 게 아니라 타인의 행위에 대해 도덕적 가치판단을 한 것이다. 그러면 그 판단의 근거를 댈 의무, 자신의 주장을 논증할 책임이 생긴다. 그렇지만 '믠헨'은 논증할 수 없었다. 그래서 처음에 내놓았던 가치판단을 거두어들인 것이다.


'함부르크'는 효과적으로 자신의 견해를 논증함으로써 '믠헨'의 생각과 행동을 바꾸어놓았다. '믠헨'은 취향의 차이를 도덕적 평가의 대상으로 삼는 것이 불합리한 행위이며, 무언가를 주장하려면 단순히 취향을 고백할 때와는 달리 그 주장의 타당성을 논증할 책임이 생긴다는 것을 새삼 깨달았다. 논쟁에서 졌지만 그가 잃거나 빼앗긴 것은 없었다. 단지 생각을 바꾸었을 뿐이다. 오히려 얻은 게 있다고 하는 게 맞을 것이다. '함부르크'는 논쟁에서 이겼다. 하지만 그가 빼앗거나 얻은 것 역시 없었다.


만약 선택할 수 있다면 그대는 어느 쪽이 되고 싶은가? 아마도 십중팔구는 '함부르크'일 것이다. 만약 그렇게 되고 싶으면 말을 하고 글을 쓸 때 단순한 취향 고백과 논증해야 할 주장을 분명하게 구별해야 한다. 이것이 논증의 미학을 구현하는 첫 번째 규칙이다. 블로그, 페이스북, 밴드, 카카오톡, 동호회 게시판, 업무혁신보고회, 학술세미나, 논술 시험, 어떤 매체에 어떤 목적으로 어떤 성격의 글을 쓰든 이 규칙을 지켜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함부르크'처럼 할 수 없다.



글쓰기의 철칙

발췌 요약에서 출발하자

글쓰기를 하려면 무엇부터 시작해야 할까? 텍스트 발췌 요약부터 시작하는 게 좋다. 글쓰기에는 비법이나 왕도가 없다. 지름길이나 샛길도 없다. 그래서 다들 비슷비슷한 이야기를 할 수밖에 없다. 무슨 특별한 비법이 있는 것처럼 말한다면 거짓말일 가능성이 높다.


무허가 비닐하우스에서 태어난 사람이든 은수저를 물고 태어난 재벌가 상속자든, 글쓰기를 할 때는 만인이 평등하다. 잘 쓰고 싶다면 누구나, 해야 할 만큼의 수고를 해야 하고 써야 할 만큼의 시간을 써야 한다.


큰돈을 주고 유명한 작가를 불러 스물네 시간 가정교사로 붙여 놓아도 본인이 노력하지 않으면 헛일이다. 하지만 스스로 의지를 가지고 훈련만 한다면 선생님이 없어도 괜찮다. 글쓰기는 머리로 배우는 게 아니라 몸으로 익히는 기능이기 때문이다. 아무리 뛰어난 헬스트레이너의 지도를 받아도 실제 몸을 쓰지 않으면 복근을 만들지 못하는 것처럼, 아무리 훌륭한 작가의 가르침을 받아도 계속 쓰지 않으면 훌륭한 글을 쓸 수 없다. 글쓰기에는 철칙(鐵則)이 있다고 생각한다.


첫째, 많이 읽어야 잘 쓸 수 있다. 책을 많이 읽어도 글을 잘 쓰지 못할 수는 있다. 그러나 많이 읽지 않고도 잘 쓰는 것은 불가능하다.

둘째, 많이 쓸수록 더 잘 쓰게 된다. 축구나 수영이 그런 것처럼 글도 근육이 있어야 쓴다. 글쓰기 근육을 만드는 유일한 방법은 쓰는 것이다. 여기에 예외는 없다. 그래서 '철칙'이다.


사람들은 내가 어려서부터 글을 잘 썼을 거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나는 학창 시절에 문예반 활동을 하지도 않았고 글을 잘 써서 상을 받은 적도 없었다. 친구들이 다 그랬던 것처럼 고등학교를 마치기 전에는 글이라는 것을 써본 일이 거의 없었다. 대입 본고사 국어 과목에 작문 문제가 있어서 혼자 그 연습을 조금 해본 게 전부였다. 그랬던 내가 7년 정도 시간이 흐른 후 제법 글 잘 쓰는 청년으로 인정받았다. 별로 유쾌하지 않은 사건 때문에 '특수폭력'이라는 괴상한 혐의를 쓰고 영등포구치소에 구금되어 있으면서 판사에게 제출했던 '항소이유서'가 세상에 알려져 그렇게 되었다.


다시 3년이 지난 1998년에 《거꾸로 읽는 세계사》라는 책을 냈다. 그 전에도 논픽션을 한 권 내기는 했지만 내가 직업적 글쟁이가 된 계기는 바로 이 책이었다. 아직 386컴퓨터도 시장에 나오기 전이라 400자 원고지에 손으로 썼다. 《거꾸로 읽는 세계사》는 '거의 100퍼센트 발췌 요약'이었다.


'발췌'는 텍스트에서 중요한 부분을 가려 뽑아내는 것이고, '요약'은 텍스트의 핵심을 추리는 작업이다. 발췌는 선택이고 요약은 압축이라 할 수 있다. 발췌가 물리적 작업이라면 요약은 화학적 작업이다. 그런데 어떤 텍스트를 요약하려면 가장 중요한 정보를 담은 부분을 먼저 가려내야 한다. 효과적으로 요약하려면 정확하게 발췌해야 한다는 이야기다. 이렇게 보면 발췌 요약이라는 말은 요약이라고 줄일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요약에 불과한 《거꾸로 읽는 세계사》가 내가 쓴 모든 책 중에 가장 많이 '읽혔다'. 나는 요약을 잘하는 것 하나로 '베스트셀러 작가'가 되었다. 다른 사람도 그렇게 할 수 있다고 믿는다. 그래서 텍스트 요약으로 글쓰기 훈련을 시작하라고 권하는 것이다.


《거꾸로 읽는 세계사》는 단지 많이 팔렸을 뿐이다. 훌륭한 책은 아니다. 문장을 잘 쓴 책도 아니었다. 나는 그 사실을 이오덕 선생의 《우리글 바로쓰기》를 읽고서 뒤늦게 깨달았다. 그게 부끄러워서 크게 잘못 쓴 문장만이라도 손 닿는 만큼 바로잡아 개정판을 냈다.


지금은 훌륭한 세계사 교양서가 많다. 《거꾸로 읽는 세계사》는 없어도 괜찮은 책이 되었다고 생각한다. 그런 줄 알면서도 그 책에 대한 이야기를 늘어놓은 것은 텍스트 요약이 논리 글쓰기의 첫걸음이라는 것을 강조하고 싶어서다. 텍스트 요약은 귀 기울여 남의 말을 듣는 것과 비슷하다. 내가 남의 말을 경청하고 바르게 이해해야, 남도 내 말에 귀를 기울이게 된다. 남들이 잘 이해하고 공감하는 글을 쓰고 싶다면, 내가 먼저 남이 쓴 글을 이해하고 공감할 줄 알아야 한다. 말로든 글로든, 타인과 소통하고 싶으면 먼저 손을 내미는 게 바람직하다.



못난 글을 피하는 법

'행복한 가정은 다 비슷하지만 불행한 가정은 저마다 이유가 다르다.'


소설 《안나 카레니나》의 유명한 첫 문장이다. 정말 그런 것 같다. 가정이 행복하려면 여러 조건을 동시에 갖추어야 하는데, 그러면 어느 집이나 비슷해 보일 수밖에 없다. 반면 불행해지는 데에는 많은 게 필요하지 않다. 행복한 가정을 이루는 데 꼭 필요한 여러 조건 가운데 어느 하나라도 크게 어긋나면 불행한 가정이 될 수 있다. 예컨대 부부 금슬이 좋지 않거나, 어느 한쪽이 외도를 하거나, 찢어지게 가난하거나, 난치병에 걸린 환자가 있거나, 가족 구성원 중 누군가 일상적으로 폭력을 휘두르거나, 그렇게 '저마다 다른 이유로' 불행해질 수 있다.


이렇게 본다면 어느 가정이든 행복하기는 어렵고 불행해지기는 쉽다고 할 수 있다. 톨스토이가 무슨 생각을 했든, 이 말은 그렇게 해석해도 괜찮을 것이다. 그렇다면 글쓰기는 어떨까? 다행히도 훌륭한 글을 쓰는 것은 행복한 가정을 만드는 일보다 수월하다. 톨스토이의 말을 흉내 내면 이렇게 된다.


못난 글은 다 비슷하지만 훌륭한 글은 저마다 이유가 다르다.


역설로 들리겠지만, 훌륭한 글을 쓰고 싶다면 훌륭하게 쓰려는 욕심을 버려야 한다. 못난 글을 쓰지 않으려고 노력하기만 하면 된다. 글은 쓴 사람도 다르고, 글도 다르고, 읽는 사람 취향도 달라서 '세상에서 제일 훌륭한 글'을 특정할 수는 없다. 하지만 세상에는 분명히 훌륭한 글과 못난 글이 있으며 그 둘을 가려내는 기준을 세울 수 있다. 그런데 훌륭한 글은 서로 다르게 훌륭한 반면 못난 글은 대부분 비슷한 이유로 못났다.


사람들은 글을 멋지게 쓰고 싶어서 '문장론(文章論)'을 공부한다. 훌륭한 글을 필사하기도 한다. 모두 필요한 일이다. 하지만 문장론을 공부하고 훌륭한 작가의 문장을 모방한다고 해서 반드시 좋은 문장을 쓸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훌륭한 글을 쓰고 싶으면 잘 쓴 글을 따라 쓰는 데 그치지 말고 잘못 쓴 글을 알아보는 감각을 키우려고 노력해야 한다.


못난 글 알아보기

어떻게 하면 잘못 쓴 글을 알아볼 수 있을까? 쉽고 간단한 방법이 있다. 텍스트를 소리 내어 읽어보는 것이다. 만약 입으로 소리 내어 읽기 어렵다면, 못나고 흉한 글이다. 이런 글을 읽기 쉽고 듣기 좋고 뜻이 분명해지도록 고치면 좋은 글이 된다. 별로 어려울 것이 없다.


누가 쓴 글이든 이 기준을 적용하면 된다. 유명 인사나 고관대작이 쓴 글이라고 해도 주눅 들 필요가 없다. 다음은 2014년 7월 8일 국무총리가 발표한 담화문의 한 단락이다. 이것이 못난 글인지 아닌지 알아보자. 밑줄 그은 곳을 특별히 의식하지 말고 우선 눈으로 읽어보라. 그다음에는 입으로 소리 내어 다시 읽어보라.


그동안 육상에서의 사회 재난과 자연 재난을 관장하는 부서가 각각 본부조직과 외청으로 이원화되어 있고, 해상에서의 재난은 해수부와 해경으로 분산되어 있어 재난 안전을 통합적으로 기획하고 관리하지 못했습니다. 이제는 육상과 해상의 재난, 사회 재난과 자연 재난을 모두 통합하여 국가안전처로 일원화하여 효율적으로 대처하고 철저히 책임 행정으로 할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국가안전처가 하루라도 빨리 출범해야 국민의 생명과 안전 보호를 위한 획기적 변화가 시작될 수 있을 것입니다.


눈으로 읽어서 무슨 뜻인지 금방 들어오는가? 아마 그렇지 않을 것이다. 소리 내어 읽어보니 어떤가. 눈으로 볼 때보다 나은가? 오히려 더 힘들었을 것이다. 이 글은 뜻을 알기가 무척 어렵다. 소리 내어 읽으면 말이 입안에서 엉키고, 적당히 숨 쉴 곳을 찾기가 어렵다. 읽기만 그런 게 아니라 듣기도 불편하다.


이것은 담화문이다. 담화문은 눈으로 읽으라고 쓴 글이 아니다. 국무총리는 소리 내어 읽고 국민은 귀로 들으라고 쓴 글이다. 그런데도 입에 착 감기지 않고, 귀에 쏙 들어오지 않으며, 뜻을 바로 알기되 어렵다. 잘못 써도 크게 잘못 쓴, 못나도 한참 못난 글이다. 이 글은 살아 있는 우리말이 아니라 국적불명(國籍不明) 죽은 말이다. 국무총리도 수십 대의 카메라 앞에서 담화문을 읽으면서 힘들었을 것이다.


이 담화문을 읽기 편하고 듣기 좋으며 뜻도 쉽게 전하는 문장으로 고쳐보자. 그러려면 흉한 곳을 찾아야 한다. 이제 밑줄 그은 부분을 보라. 읽기가 힘들고, 듣기에 어색하고, 뜻이 분명하지 않은 곳에 밑줄을 그었다. 어려운 중국 글자말, 일본말, 서양말이 즐비하다. 필요 없는 군더더기가 곳곳에 있다.


'육상' '해상' '관장하는' '이원화되어' '통합적으로' '일원화하여' '효율적으로' '획기적 변화'는 모두 한자말이다. 인용문은 겨우 세 문장뿐인데 '적(的)'과 '화(化)'가 붙은 한자말을 다섯 번이나 썼다. '적'도 그렇지만 '육상에서의' '이원화되어' '분산되어' '시작될 수'라는 말도 모두 일본말 조사와 수동태를 따라 쓴 것이다. '적'은 일본말 발음이 '데키'인데, 받침이 없는 일본말에서는 말의 운율을 살리는 장점이 있다. 하지만 우리말로 하면 '쩍'이라고 하는 된소리가 나는 경우가 많다. 입으로 내기에도 귀로 듣기에도 좋은 소리가 아니다. '본부조직'과 '외청'은 시민들이 알아듣지 못하는 '관청말'이다. '각각'은 없어도 되고, '책임 행정으로 할 것'은 앞뒤가 맞지 않는 표현이다.


내가 국무총리실 공보관이라고 생각하면서 담화문을 고쳐보았다. 남의 나라 말을 우리말로 바꾸고 군더더기를 없앴다. 어려운 관청말 대신 쉬운 말을 쓰고 문장 주술 관계를 분명하게 했다. 취향에 따라 다를 수는 있겠지만, 나는 원래 글보다 고친 글이 낫다고 본다. 뜻을 분명하게 전할 수 있고, 읽기도 듣기도 더 편하다. 훌륭하다고 할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흉하거나 못난 글은 아니다. 위에서 본 원래 글과 아래에 있는 고친 글을 비교해 보라.


그동안 육지의 사회 재난과 자연 재난을 책임지는 부서가 안전행정부와 소방방재청으로 나뉘어 있고 바다의 재난 대처는 해수부와 해경으로 갈라져 있어서 정부가 재난 안전을 제대로 기획 관리하지 못했습니다. 이제는 책임과 권한을 모두 국가안전처 한 곳에 모아 육지와 바다의 재난, 사회 재난과 자연 재난 모두에 더 잘 대처하고 철저하게 책임지는 행정을 하겠습니다. 국가안전처를 하루라도 빨리 출범시켜 획기적 변화를 시작함으로써 정부는 국민의 생명과 안전을 더 확실하게 보호하겠습니다.


소리내어 읽어봄으로써 못난 글을 알아보는 방법은 지극히 단순한 원리에 바탕을 두고 있다. 언어(言語)는 말과 글이다. 생각과 감정을 소리로 표현하면 말(입말)이 되고 문자로 표현하면 글(글말)이 된다. 말과 글 중에는 말이 먼저다. 말로 해서 좋아야 잘 쓴 글이다. 글을 쓸 때는 이 원리를 잊지 말아야 한다.



글쓰기는 축복이다

글쟁이의 정신승리법

'정신승리법'이 필요할 때가 있다. 글쓰기가 힘이 들 때, 어려움을 참고 견디면서 글을 써야 할 때 그런 것이 있으면 좋다. 이렇게 가정하자. 누구도 생각을 솔직하게 밝히는 글을 쓸 자유가 없다. 그렇게 하려면 목숨을 걸어야 한다. 자칫 권력자의 심기를 거스르면 자기 자신만이 아니라 가족과 일가친척까지 몰살당할 수 있다. 그래서 자기가 쓴 글을 세상에 내보내려면 큰 위험을 감수해야 하고 신분을 철저하게 감추어야 한다.


나아가 그런 세상에서 나 혼자 특권을 누린다고 가정하자. 나는 생각하는 대로 글을 써도 되고, 원하면 언제든 세상 사람들에게 글을 보여줄 수 있다. 이런 특권 때문에 힘들어하거나 세상을 원망할 사람이 있을까? 이미 별로 없을 것이다. 나는 글쓰기가 힘들 때 그렇게 상상하면서 행운에 감사한다. 우리 세대는 국가, 정부, 사회, 정의, 평등, 민주주의 같은 주제에 대해 글을 쓰는 것이 중대 범죄가 되는 세상에서 인생의 절반을 살았다. 나는 스물아홉 살이 되어서야 말할 자유, 글 쓸 자유를 얻었다. 이 자유가 얼마나 귀한 것인지 잘 안다.


어떤 사람들은 엄청나게 큰 행운을 손에 넣고도 그게 행운인 줄 모른다. 이미 가지고 있는 것만으로 행복해질 수 있는데도 꼭 필요하지도 않은 다른 것을 찾으려고 몸부림친다. 그렇게 살면서 자신과 타인을 괴롭힌다. 행운을 행운으로 알고 자기가 가진 것을 소중하게 여기면 삶이 훨씬 즐겁고 행복해진다는 것을 모른다. 글을 쓸 자유도 바로 그런 행운 가운데 하나라고 나는 생각한다.


이 책을 쓰는 나도, 책을 읽는 독자도 모두 운이 좋다. 무엇보다 먼저 생명을 얻은 것 자체가 행운이다. 다른 동물이 아니라 의식과 자아 정체성을 가진 인간으로 태어난 것은 더 큰 행운이다. 사람이 아니라 지렁이나 달팽이로 태어났다고 생각해보라. 대한민국에서 태어난 것도 무시해서는 안 될 행운이다. 한글과 보통교육제도 덕분에 우리는 아주 쉽게 글을 배웠다. 만약 글쓰기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고 있다면, 문자라는 것이 아주 오랜 세월 동안 오직 극소수만이 누린 특권이었다는 사실을 떠올려 보라. 지금 우리 모두는 그런 특권을 누리며 산다.


글을 읽고 쓸 수 있다는 것은 문명이 선사한 축복이다. 마음만 먹으면 누구나 한껏 누릴 수 있는 특권이다. 이 축복과 특권이 좌절감과 열등감의 원인이 된다면 그만큼 불행한 일도 없을 것이다. 우리는 시대의 축복을 받아들이고 특권을 즐겨야 한다. 그렇게 생각하면 글쓰기 훈련이 덜 고되게 느껴진다. 이것이 내가 직업적 글쟁이로서 자주 쓰는 정신승리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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