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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견만리: 정치, 생애, 직업, 탐구 편
저   자 : KBS 명견만리 제작팀
출판사 : 인플루엔셜
출판일 : 2017년 0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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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견만리: 정치, 생애, 직업, 탐구 편


정치(Politics)

당신은 합의의 기술을 가졌는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는 갈등비용, 우리는 선과 악의 대립에서 벗어날 수 있는가

갈등은 곧 돈이다

민주주의 사회에서 갈등은 자연스러우며 건강한 현상이다. 가정, 학교, 직장에서 우리가 맺는 모든 관계 속에 갈등이 있다. 인간은 숱한 갈등을 동력으로 삼아 사회를 발전시켜왔다. 갈등은 발전의 '성장통'인 셈이다. 물론 갈등을 잘 관리한다는 전제하에 말이다. 만약 갈등이 장기화되거나 빈번하게 발생하도록 내버려 둔다면 막대한 갈등비용이 발생한다. 관리되지 못한 갈등은 성장을 저해하는 핵심 요인이다.


문제는 우리 사회가 갈등이 발생했을 때 토론을 통해 해결하고 관리하기보다는, 억누르고 금기시하고 빨리 결론지으려는 경향이 짙다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오히려 작은 대립도 걷잡을 수 없이 커지곤 한다. 밀양 송전탑 공사, 제주 해군기지 건설, 평택 주한미군 이전 등 나라를 양분시킬 정도로 극심했던 갈등도 처음에는 작은 대립에서 시작했다. 하지만 갈등이 조기에 해소되지 못하면서 갈등이 커지고 장기화되어 갈등비용이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했다.


삼성경제연구소에 따르면, 우리나라는 1인당 GDP의 27퍼센트를 갈등비용으로 지출한다. 이를 계산해보면, 모든 국민이 사회갈등으로 매년 900만 원씩 꼬박꼬박 손해 보는 셈이다. 국가 전체로 따지면 그 비용이 무려 82조 원에서 최대 246조 원에 이른다. 한 해 국가예산의 60퍼센트에 이르는 금액이 갈등비용으로 낭비되는 것이다.


갈등을 성장 에너지로 전환하는 합의의 기술

합의의 필요성은 느끼지만, 아직 우리 사회 전반에 갈등의 골이 깊다. 이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풍경이 바로 가시철조망이 쳐진 아파트 단지다. 2003년 정부는 사회·경제적으로 배경이 다른 주민들이 어울려 살자는 취지에서 아파트 단지 내에 분양·임대주택을 함께 지어 공급하는 이른바 소셜믹스(혼합주택) 정책을 도입했다. 그러나 계층별 갈등을 줄이고자 한 본래 취지가 무색해질 정도로 갈등은 깊어지고만 있다. 심지어 어느 아파트 단지에서는 높이가 1.5미터나 되는 가시철조망이 쳐졌다. 누가, 왜 이런 것을 세워놓았을까? 이 철조망은 아파트 입주민들의 강력한 요구로 세워졌다. 분양동에 사는 주민들이 자신들과 임대동에 사는 세입자들을 구분하기 위해서다.


이렇게 분양동과 임대동 사이에 담장을 쳐 출입구를 분리하고 공공 임대 세입자가 주민 커뮤니티 시설을 이용하지 못하게 하는 등, 갈등이 최악으로 치닫는 경우도 종종 발생한다. 이것이 대한민국 사회의 부끄러운 모습이다.


지금 한국 사회는 저출산, 고령화, 저성장, 양극화, 환경, 교육, 통일 등 사회적 합의를 이루어 해결해야 할 문제가 산더미처럼 쌓여 있다. 앞으로 갈등은 더욱 빈번해지고, 복잡해지며, 격렬해질 것이다. 그렇다고 갈등을 억압하기만 한다면 사회적 비용은 계속 증가하고, 사회는 정체될 것이다.


갈등이 없는 사회는 마치 무균실에서 사는 삶과 같다. 결코 행복한 삶도, 사회도 아닐 것이다. 근육세포에 스트레스를 주어야만 근력이 생기듯이, 우리 사회도 갈등이라는 스트레스 요인을 해결하며 성장해 간다. 결국 인간의 역사란 불가피하게 발생하는 갈등을 에너지로 전환하며 발전해온 기록이다. 갈등관리 역량을 키우는 것이 곧 사회발전의 토대가 된다.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갈등은 그 자체로 선도 악도 아니라는 사실이다. 갈등은 분열과 폭력의 도화선일 수도 있고, 발전과 통합의 씨앗일 수도 있다. 때문에 '합의의 기술'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갈등으로 인해 낭비되는 비용을 줄이고, 분열된 사회를 합의의 기술로 잘 봉합해야 우리 경제도 다시 살아날 수 있다. 그렇다고 '합의'라는 결과만 강조하고 그 절차를 무시한다면 또 다른 억압을 동반할 수밖에 없다.


이제 과거에 우리가 머릿속에 갖고 있던 '합의'의 개념을 바꾸어야 한다. 합의의 문화, 갈등의 관리는 모든 이해 당사자들이 공평하게 자기 권리를 주장하는 것에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국가의 성패는 이제 누가 먼저 갈등을 잘 푸느냐에 달려 있다. 갈등 관리에 실패해 그대로 주저앉을 수도 있고, 갈등을 발판 삼아 한 단계 나아갈 수도 있다. 계속 다른 곳만 보고 대립할 것인지, 함께 같은 곳을 보고 이야기할 것인지, 미래를 위한 현명한 선택이 필요하다. 우리나라 아파트 단지에 가시철조망이 완전히 사라지는 날이 올 수 있느냐 없느냐는, 지금 우리의 의지에 달려 있다.



생애(Lifetime)

셀프부양 시대, 우리는 준비할 수 있는가- 한국형 복지국가는 이 문제를 어떻게 풀 것인가

'자식 농사'만 잘 지으면 되던 시대는 끝났다

2013년 서울대학교 노화·고령사회 연구소와 미국 에트라이프 노년사회연구소, 한국 갤럽이 한국 베이비부머를 추적 연구한 결과에 따르면, 베이비붐 세대의 80퍼센트가 성인 자녀와 함께 살고, 68퍼센트가 노부모에게 경제적 도움을 주고 있다. 그들의 경제적 부담은 어느 정도일까. 베이비붐 세대의 월 가계부를 조사한 결과, 한 달 평균 생활비 중 가장 많은 돈이 지출되는 곳은 자녀 양육비고, 그다음이 부모 봉양비용이었다.


사실 한국인의 평균수명이 70세이던 1990년대까지만 해도 별도의 '노후 준비'는 필요 없었다. 장성한 자녀가 부모를 모시는 것이 당연한 시대였기에, '자식 농사'만 잘 지으면 되었다. 하지만 평균수명이 80세를 훌쩍 넘기면서 부모 부양에 대한 시각 또한 변하고 있다.


1998년에는 부모 부양의 책임이 오직 가족에게만 있다고 대답한 비율이 89.9퍼센트로 압도적으로 높았다. 그런데 2014년에는 그 비율이 무려 3분의 1로 뚝 떨어져 31퍼센트 수준밖에 되지 않는다. 반면 가족과 사회 모두에 책임이 있다고 대답한 사람이 2014년에는 47.3퍼센트에 달했다. 이전까지 사회에 대한 책임은 거의 고려되지 않았는데 최근 사회가 제 몫을 떠맡아야 한다는 인식이 커지고 있다. 부모 스스로에게 책임이 있다고 대답하는 사람도 점점 늘어나는 추세다. 부양받을 사람이 스스로 부양하는, 이른바 '셀프부양'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평균수명이 늘어날수록 '자식에게 손 벌리지 않고 노후를 스스로 책임지는' 셀프부양은 필연이 되어가고 있다.


효의 미래 = 셀프부양

스스로 부양할 준비는 되었나?

서울에 있는 실버타운의 입주 보증금은 최고 약 9억 원에서 최저 금액도 2억 원을 넘는다. 한 달 생활비 또한 최소 94만 원에서 최고 294만 원으로, 경제력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입주가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요양원은 어떨까? 국민건강보험공단에서 운영하는 서울 세곡동의 요양원을 살펴보자. 이 공공 요양원에 입소한 노인들은 신체, 인지 상태에 따라 맞춤형 관리를 받는다. 문제는 입소 경쟁률이 매우 치열하다는 점이다. 이곳만 해도 150명 정원에 720여 명이 대기하고 있다. 지금 접수해도 4~5년 뒤에나 입소할 수 있을 정도다. 그만큼 시설과 서비스의 질이 보장되는 공공 요양시설이 부족한 실정이다. 현재 우리나라의 장기요양시설 약 4000곳 중 A등급 판정을 받는 곳은 15퍼센트 정도로, 믿을 만한 요양원이 턱없이 부족하다.


이처럼 우리나라에서 셀프부양은 상위 1~2퍼센트에게나 가능한 이야기다. 그렇다면 평범하게 살아가는 90퍼센트 이상의 사람들은 노후를 어떻게 감당하고 있을까. 현재 우리나라 65세 이상의 노년층이 받는 공적연금이 한 달에 약 35만 원이다. 그런데 65세 이상의 노인 1인당 월평균 진료비가 약 30만 원이다. 연금 대부분이 병원비로 나가는 셈이다. 만약 큰 병이라도 걸리면 연금만으로는 셀프부양이 턱도 없다. 결국 부족한 부양비는 고스란히 자식의 몫이 된다.


그렇다면 우리나라의 이런 상황이 전 세계적으로 봤을 때 일반적일까? 노인에 대한 복지지출 수준을 다른 나라들과 비교해보자. OECD 평균이 7.7퍼센트인 데 비해 우리는 2.5퍼센트에 불과하다. 독일은 OECD평균보다도 높은 8.6퍼센트로, 우리나라의 세 배가 넘는 수치다. 그 덕분에 독일의 노인들은 스스로 부양하는 셀프부양이 가능하다. 노인 복지비는 공적연금과 의료, 간병 등 노인을 위한 각종 서비스 비용을 모두 합친 것이다. 다시 말해서 노인 복지비가 높다는 것은 자식들의 부양 부담이 그만큼 줄어든다는 이야기다. 유럽에서 가장 먼저 초고령 사회로 진입한 독일은 어떻게 했기에 셀프부양이 가능한 시스템을 만들었을까?


한국형 복지국가, 어떤 나라에 살고 싶은가

한 설문조사에서 응답자의 80퍼센트 이상이 연금으로 노후 생활이 충분하다고 했을 만큼, 독일은 연금을 통한 셀프부양이 가능한 나라다. 독일이 각종 제도를 통해 정부 차원에서 노인 부양을 책임지는 이유는, 결국 그것이 가족을 지켜내는 힘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독일의 연금제도와 우리의 연금제도는 어떻게 다를까? 독일의 경우 월평균 연금 수령액은 159만 원, 우리나라는 약 35만 원이다. 그런데 납입액을 보면 독일은 월 79만 원을 내는 데 반해, 우리는 월 19만 원 수준이다. 독일의 3분의 1 정도다. 독일의 연금 시스템은 우리보다 더 많이 내고, 더 많이 받는 구조다.


그렇다면 우리도 독일처럼 연금에 더 많은 돈을 낸다면 문제가 해결될까? 사실 노후 보장 문제는 연금만으로 이야기할 수는 없다. 국민 부담을 마냥 늘릴 수도 없고, 국가도 한정된 재원을 연금에만 사용할 수 없기 때문이다. 연금과 더불어 필요한 것은 의료, 간병, 요양 등의 사회서비스다. 사회서비스가 잘 갖춰진다면 연금이 좀 적더라도 큰 문제가 아니다. 또한 노인 사회서비스가 늘어나면 그것이 건강한 노인의 일자리도 될 수 있어서 '꿩 먹고 알 먹는' 전략이기도 하다.


더 이상 노인 부양을 개인에게 맡길 수 없는 상황이라면, 하루라도 빨리 사회적 부양을 모색할 필요가 있다. 독일과 같은 유럽 복지국가들이 지금과 같은 제도를 만들기 시작한 것은 국민소득이 겨우 5000불, 1만 불도 안 되던 시절이었다.


그렇게 보면 우리나라의 복지 확충은 소득수준이나 사회 변화에 비해 한참 늦었다. 돈이 많고 적은 게 문제가 아니다. 지속 가능한 성장과 국민행복을 위해서 복지제도가 필요하다는 데 시민들이 동의하느냐가 중요하다. 결국 우리가 어떤 나라에 살고 싶은지, 또 그것을 관철할 의지가 있는지가 관건이다. 더 늦기 전에 한국형 복지국가로 개혁하고, 그 개혁안에 대한 사회적 합의를 이끌어내야 한다.


자기 완성적 존재로서의 노인

잘 알려져 있다시피, 우리나라의 노인 빈곤률과 자살률은 OECD 최고 수준이다. 가난으로 내몰린 노인들의 범죄율 또한 급증하고 있다. 게다가 빠르게 노령화되고 있는 베이비부머들 또한 부모 봉양에 자식 부양으로 노후 준비가 부실한 상황이다. 그런데도 우리나라의 복지체계는 여전히 초가집 수준이다.


이제 120세 시대에 맞는 부양의 방식을 준비할 때다. 셀프부양은 사실 혼자만 잘살자는 이야기도, 혼자 힘으로 살아남으라는 이야기도 아니다. 진정한 셀프부양이란 역설적이게도 혼자의 힘이 아니라 이웃과 사회와 국가의 힘이 보태져야만 가능하다. 개인의 경제적 자립, 우리 사회와 공동체가 맡아야 할 제도적이고 항구적인 뒷받침, 인간적이고 따뜻하며 친밀한 정서적 부양이 함께 어우러져야만 진정한 셀프부양이 완성된다.


《40대가 미리 보는 하류노인 행복노인》이라는 책에서도 언급했듯, 노인이란 기본적으로 "지금까지 수고했으니 이제는 그 자리에 있어주는 것만으로도 좋은 자기 완성적 존재"다. 물론 120세 시대에 맞게 노인의 기준은 재조정되겠지만 말이다. 현대판 '고려장' 논란에서 볼 수 있듯이, 자칫 급증하는 노인인구를 감당하지 못한다면 노인을 어쩔 수 없이 책임져야 할 부담스러운 존재로 치부해버릴 수 있다. 이것은 상당히 불행한 일이다.


한국의 유구한 문화와 전통 속에는 계층과 나이와 빈부의 격차를 뛰어넘어 함께 어울리고 서로를 돌보며 약자를 품어주는 삶이 녹아 있었다. 하지만 세상의 흐름이 빨라지고 자본과 경제의 논리가 전통의 가치를 대체하면서 공동체 의식이 무너지고 노인들은 설 자리를 잃게 됐다.


진정한 복지는 구성원들이 교류하면서 따뜻한 공동체를 이루는 것이다. 꼭 결혼을 하거나 혈연관계가 아니더라도 서로 부족한 부분을 도우면서 삶을 함께 나눌 수 있다. 이러한 공동체 의식의 복원이야말로 타자화된 삶에서 우리를 구원할 것이다.


이제, 내 부모님이 평안하고 안락하게 살아갈 수 있는 공간, 내가 노후에도 이런저런 걱정 없이 남아 있는 삶을 즐길 수 있는 여건을 만들어나가야 한다. 노년이 누구에게도 부담이 되지 않는 사회, 이것이야말로 120세 시대가 두려움이 아닌 살아보고 싶은 미래가 될 핵심 열쇠일 것이다.



탐구(Research)

4차 산업혁명은 어떤 인재를 원하나 - 1에서 2가 아니라, 0에서 1을 만들어내는 힘

4차 산업혁명의 선두에 선 한 나라를 소개하고자 한다. 세계 최대 인터넷 화상통신 스카이프, 해외 송금 서비스의 혁신 트랜스퍼와이즈. 전 세계를 주름잡는 스타트업 기업들이다. 이들이 탄생한 곳은 남한의 절반 크기의 영토에, 전체 인구가 서울 인구의 8분의 1인 130만 명밖에 되지 않는 아주 작은 나라 에스토니아다. 지정학적 위치 때문에 오랫동안 덴마크, 독일, 스웨덴, 러시아의 식민 지배를 받았던 에스토니아는 1991년 구소련에서 독립할 때까지만 해도 대부분의 집에 전화기조차 없을 정도로 가난했다. 그런데 지금 에스토니아를 부르는 별명이 예사롭지 않다. '발트해의 호랑이', 'IT강국', '북유럽의 실리콘밸리', 최근에는 알파벳 e를 강조하여 '이(e)스토니아'라고 부른다. 디지털 혁신을 통해 지난 20여 년간 연간 1인 GDP를 열다섯 배나 늘리며 4차 산업혁명의 중심에 선 에스토니아의 비결은 무엇일까?


2015년 에스토니아는 새로운 실험을 시작했다. 바로 '디지털 국가' 선언이다. 100유로, 우리 돈 12만 원이면 누구나 에스토니아의 디지털 시민이 될 수 있다. 심사를 거쳐 e-레지던시를 발급받으면 에스토니아의 모든 디지털 서비스를 내국인과 똑같이 이용할 수 있다. 회사를 창업할 수 있고, 은행에서 계좌도 개설할 수 있고, 디지털 서명을 이용한 모든 계약이 가능하다. 참정권을 제외한 모든 권리를 누린다고 봐도 무방하다.


에스토니아는 이러한 파격적인 행보로 전 세계 사람들을 불러 모으고 있다. 그 결과 인구 40만의 수도 탈린은 유럽에서 가장 많은 스타트업이 탄생하는 혁신도시가 되었다. 기술과 경영 환경이 급속히 변화하는 시대에 참신한 아이디어를 가진 소규모 회사들이 국가 경쟁력을 키워줄 것이라는 에스토니아 정부의 전략이 성공을 거두고 있다.


좁은 국토의 한계를 디지털로 확장하겠다는 기발한 발상으로 전 세계 유일의 디지털 국가를 향해 성큼성큼 나아가고 있는 에스토니아. 그런데 에스토니아의 이러한 저력의 밑바탕에는 오랫동안 축적해온 소프트웨어의 힘이 깔려 있다.


에스토니아는 독립 직후부터 IT를 국가 기간산업으로 정해 소프트웨어 인재 양성에 사활을 걸었다. 세계에서 가장 먼저 초등학생 코딩 교육을 실시하고 1998년에 모든 학교에 컴퓨터를 보급하는 등, 전 국민 소프트웨어 교육에 총력을 기울였다.


현재 에스토니아에서는 유치원에서부터 기초 코딩 교육을 하고 있다. 탈린 교회의 한 유치원에서는 장난감 꿀벌이 출발지점에서 도착지점까지 잘 움직일 수 있도록 경로를 설계하는 놀이를 하고 있다. 어린 아이를 위한 기초 코딩 교육이다. 비봇이라는 코딩 교육용 로봇의 방향 버튼을 누르면 꿀벌이 움직인다. 아이들은 처음에는 단순하게 로봇을 직진시키지만, 좀 더 시간이 지나면 로봇의 길을 앞뒤, 좌우로 프로그래밍하는 단계로 나아간다.


초등학생들의 로봇 공학 수업시간에는 아이들이 로봇에 내릴 명령을 짜고 직접 로봇을 만들어본다. 어떤 요소들을 결합해야 하나의 기계가 완성되는지, 또 그 기계가 움직이려면 어떤 명령을 내려야 하는지 스스로 프로그램을 짜고 실행해 보기도 한다. 이 수업 역시 재미있는 놀이처럼 진행된다. 이 과정에서 아이들은 로봇공학뿐 아니라 수학을 배우고, 협동하는 방법과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을 익힌다.


고등학교는 어떨까? 고학년의 필수 과목은 수학 분야의 통계다. 학생들은 컴퓨터로 수많은 데이터를 조직, 정렬하고 분석하는 방법을 배운다. 다양한 표본 값을 입력하면 달라지는 결과들을 바로 확인할 수 있기 때문에 원리를 쉽게 이해하고 오류를 빨리 깨달을 수 있다.


학생들은 수학 시간에 종이와 연필을 거의 사용하지 않는다. 계산할 일이 생기면 컴퓨터나 계산기를 두드린다. 학생들은 문제 풀이 대신 수학적인 사고, 즉 컴퓨터적 사고 훈련을 한다.


에스토이아의 교육정책 전문가 윌레 키카스 씨는 4차 산업혁명을 대비하는 에스토니아 교육 개혁의 핵심은 코딩과 수학을 통해 컴퓨터적 사고를 익히는 것이라고 말한다.


"컴퓨터에게 일을 시키려면 컴퓨터와 대화가 되어야 하지요. 그러려면 당연히 컴퓨터가 알아들을 수 있는 언어를 배우고, 컴퓨터처럼 논리적인 사고를 해야 합니다. 단순 계산이 아니라, 문제의 핵심과 이면을 알도록 가르치는 겁니다. 학생들이 수학을 이런 방식으로 배우면 어떻게 현실에서 문제를 스스로 해결할지 알게 됩니다. 오늘날 컴퓨터 없이 통계나 데이터를 다루는 건 상상할 수도 없죠. 말하자면 에스토니아의 수학 교육은 근본적이면서도 실용적이고 전방위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또한 학생들은 수학적 개념을 배우고 수학적 수단과 활용법을 배우면서 생각, 지식, 지혜를 얻습니다."


컴퓨터적 사고 훈련이란, 컴퓨터가 훨씬 잘하는 계산이나 문제풀이를 하는 대신 컴퓨터를 활용하여 수학적인 개념을 탐구하고, 문제를 구성하는 요소를 깊이 이해하면서 창조적 사고와 분석 능력, 문제해결 능력을 기르는 것이다. 그 과정에서 데이터를 분석하고 활용하는 능력이 키워지는 것은 물론이다. 이러한 교육을 토대로 에스토니아의 수학 과목 점수는 매년 꾸준히 오르고 있다. 2012년 평가에서는 교육 강국 핀란드를 앞질렀다.


대치동이 범접할 수 없는 시골 초등학교의 멋진 교육

미래학자 앨빈 토플러는 2007년 한국을 방문했을 때 "한국 학생들은 미래에 필요하지 않은 지식과 존재하지 않을 직업을 위해 매일 열다섯 시간씩이나 낭비하고 있다"고 일침을 가한 바 있다. 그로부터 10여 년이 흘렀지만 우리의 교육 현실은 그다지 바뀌지 않았다.


미국 미시간 주에서는 초등학교 5학년까지 구구단을 외우는 것을 권장하지 않는다고 한다. 그 이유는 기계적으로 문제를 푸는 것보다 구구단을 못 외운 상태에서 곱하기를 할 때 다양한 방법을 스스로 찾는 과정을 통해 논리적인 사고력이 커질 수 있기 때문이다.


오직 점수로 줄을 세우기 위해 학생을 문제 풀이 기계로 키우는 교육, 암기 위주의 주입식 교육에 여전히 묶여 있는 우리의 교육은 이에 비하면 희망이 없어 보인다.


그런데 놀랍게도 우리나라 시골의 아주 작은 학교에서 희망의 빛줄기를 발견할 수 있었다. 전교생이 80여 명밖에 안 되는 충북 진천의 초평초등학교가 그곳이다. 학생들이 수업하는 모습을 한 번 들여다보자.


5학년 학생들의 반에서는 교육용 로봇인 햄스터를 이용하는 수업이 한창이다. 학생들은 능숙하게 프로그램을 짜기 시작한다. 명령어를 프로그래밍해서 햄스터 로봇이 구석구석 청소하게 하는 것이 이날의 과제다. 학생들 스스로 회전 시간, 이동 방법, 방향 바꾸기 등 로봇이 움직일 수 있는 모든 범위를 논리적으로 설계했다. 프로그래밍을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결과는 천양지차다.


학생들은 이러한 과정을 반복하면서 로봇 청소기의 작동 원리를 이해하고, 알고리즘, 논리적 사고, 컴퓨터적인 사고를 끊임없이 향상시킨다.


"아이들이 처음에는 프로그램 설치도 잘 못했어요. 컴퓨터를 굉장히 낯설어했지요. 이제는 과제를 주면 제가 가르치지 않은 부분까지도 잘 수행해요. 컴퓨터 언어를 이용해 창의적으로 과제를 풀어 나가면서 아읻르의 컴퓨터적 사고력이 굉장히 많이 늘었어요."


초평초등학교 교사의 말처럼 미래 세대를 위한 교육은 작은 시골 학교에 활력을 불어넣고 있다. 심지어 이곳에는 교육비 걱정을 할 필요가 없다. 초등학교 교육비뿐 아니라 중고등학교, 대학교, 나아가 대학원과 유학까지 모든 교육비를 지역사회가 지원해주고 있기 때문이다.


이 학교는 2008년에 학생 수가 50명까지 줄면서 폐교라는 최후 통지를 받은 아픈 과거가 있었다. 그런데 2009년 이 마을 주변에 쓰레기 매립장이 들어서면서 주민들이 받은 보상금을 모아 장학재단을 만들었다. 모든 주민이 적게는 몇백만 원, 많게는 몇천만 원의 보상금을 선뜻 내놓은 결과, 초평초등학교 학생들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앞선 소프트웨어 교육을 받을 수 있게 되었다.


초평초등학교의 사례에서 알 수 있듯, 4차 산업혁명의 시대에 맞는 교육을 하기 위해서는 모든 사회가 함께 노력해야 한다. 우리나라에서도 2018년부터 초중등학교에 소프트웨어 교육이 의무화된다. 그러나 구태의연한 수학 교육은 그대로 하면서 소프트웨어 교육만 더하는 식은 곤란하다. 교육에 대한 근본적인 고민이 필요하다.


문과, 이과를 나누면서 수학 공부의 범위를 미리 정해버리는 방식에 대해서도 과연 옳은지 심사숙고해야 한다. 한국은 세계에서 문과와 이과를 나누는 거의 유일한 나라다. 소위 문과에 속하는 과목은 상상력을 키워주는 학문인데, 그것이 수학, 데이터 등과 만나 융합할 때 큰 폭발력을 만들어낼 수 있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두 개의 지구에서 살고 있다. 하나는 우리가 발로 딛고 있는 지구이고, 또 다른 지구는 눈에 보이지도 않고, 만질 수도 없는 디지털 지구이다. 첫 번째 지구에서 우리가 차지하고 있는 면적은 축구 경기장에 놓인 침대 하나에 불과하지만, 국경이 없는 디지털 지구는 무한하다.


물리적 지구가 무대였던 1,2,3차 산업혁명은 좁디좁은 지구에서 물건을 만드는 하드파워 경제를 발전시켜왔다. 하지만 어느덧 우리 앞에 쓰나미처럼 닥친 4차 산업혁명에서 거대한 파도를 헤쳐 나갈 힘은 물리적인 힘이 아니라 상상이라는 총알에, 도전이라는 방아쇠를 당겨, 혁신이라는 거대한 폭발을 일으키는 소프트파워일 것이다.


4차 산업혁명의 주역은 과거를 고집하는 자가 아닌 미래를 상상하는 자다. 상상의 힘으로 거대한 혁신을 만드는 사람. 0을 1로, 낫씽(Noth-ing)에서 썸씽(Something)을 만들어내는 사람. 이를 위한 교육은 더 넓고 평등하게, 더 새롭고 자유롭게 진행되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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