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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왜 작은 일에도 상처받을까
저   자 : 다장쥔궈(역:오수현)
출판사 : 비즈니스북스
출판일 : 2017년 0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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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왜 작은 일에도 상처받을까


우리 마음에는 모두 병이 있다

뒤처질 것 같아 항상 불안하다

누구나 평생 걱정거리를 안고 살아간다. 매달, 매일이 걱정의 연속이다. 왜냐면 우리는 걱정의 시대, 조급한 사회를 살고 있기 때문이다. 저마다 나름의 이유로 조급해한다. 마치 걱정이 조금이라도 없으면 자기만 편안히 사는 것 같아 괜히 미안해질 정도다. 늘 무언가 염려하거나 초조해해야만 시대의 리듬에 발맞춰나가는 것 같다. 여기서 말하는 염려 증상은 걱정하지 않아도 될 일을 걱정한다는, 개인적이고 좁은 의미의 염려증과는 다른, 일종의 집단적 무의식의 동요가 불러일으키는 염려다. 이러한 동요는 빠르게 변화할 것을 강요하는 시대의 특징과도 연관되어 있다. 그래서 우리는 이 사회가 팽팽하게 잡아당긴 적자생존의 현에 의해 튕겨나가 빠르게 움직이지 않으면 도태되고 마는 위기의 끝자락으로 내몰리고 만다.


사람들은 편법을 써서라도 무언가 먼저 하고 빠르게 하는 것을 좋아한다. 가령 새치기 같은 행동 말이다. 안전선 따위는 필요 없다. 택시를 낚아채듯 잡아타고 교통신호가 바뀌기 무섭게 속도를 올려 달리며 고작 5분을 아끼기 위해 중앙선을 넘기도 한다. 30분 이상 줄 서는 것이 싫어서 연줄을 동원해 VIP 통로로 들어간다. 공항 데스크에서 큰소리로 소란을 피우며 수화기 너머 서비스센터 직원에게 무턱대고 고함부터 치고 본다. "지금 당장 해결해주라고! 당장!"


급하게 여행을 떠나 후다닥 사진을 찍고 다음 일정을 향해 부랴부랴 길을 나선다. 오늘날 사람들은 너무나 바쁘게 살아간다. 그리고 인내하지 않는다. 흡사 우리가 마시는 공기에 초조함이라는 성분이 포함되어 있기라도 하듯, 그것이 모든 이의 혈액에 녹아들기라도 하듯 하나같이 바쁘고 조급하다. 기업의 슬로건 가운데 '신속'이라는 표어를 내건 곳이 많은 것도 이러한 풍조를 반영한다. '일찍 일어나는 새가 벌레를 잡는다'라는 속담이 '빨리 나는 새가 늦게 나는 새를 잡아먹는다'라고 바뀌기라도 한 것 같다. 가끔 나는 이 시대가 두렵다. 하나같이 '서두르면 빨리 성공을 이룬다'라고 믿으며 조급해하는데 나만 서두르지 않고 있으니 왠지 뒤쳐질 것 같은 두려움이 든다.


그러나 그렇게 했을 때 진짜 원하는 결과를 얻었을까? 아닌 경우가 많다. 오히려 속도를 낼수록 문제가 생기기도 한다. 상대방의 사정을 속속들이 알지도 못하면서 급하게 결혼식을 올리고, 무슨 일을 하는지 알지 못하는 회사로 섣불리 이직한다. 프로모션 마감이 임박했다는 광고에 혹하거나 흔해 빠진 사은품을 얻고자 그다지 필요하지도 않은 물건을 사들인다. 그래서 결국 자기 발전을 위해 노력하지도 않고 가정폭력을 일삼는 남자와 결혼하게 되기도 하고, 이직을 하고 한참 지나서야 좌초 직전 위기의 회사임을 알아차리게 된다. 온갖 불필요한 물건을 사는 바람에 냉장고에는 먹지 않는 음식만 쌓이다가 결국 다 쓰레기통으로 직행한다.


각자에게 맞는 삶의 속도가 있다

우리가 초조해하며 불안해하는 원인은 바로 안정감 부족이다. 그 근원을 파고들어가 보면 기대했던 것만큼 목표를 이루지 못했을 때 우리 마음은 점점 조급해지고 이 조급함은 우리 내면에 안정감을 결여시킨다. 그래서 어떻게든 목표를 실현시켜 그 결여된 안정감을 메우려고 하는데 이 과정에서 아래와 같은 심리 변화 과정을 겪는다.


안정감이 필요함 -> 성공하여 인정받기를 갈망함 -> 필사적으로 노력하여 빠른 속도로 임무를 완성하려고 함 -> 조속히 성과를 거둠으로써 내면의 안정감을 얻고자 함


승부욕이 강한 사람이라면 이런 시도를 무수히 해보았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사람일수록 일단 목표를 실현하지 못하면 남에게 피해를 주면서까지 무리하게 이를 추구해 내면의 안정을 얻으려 할 가능성이 높다. 이것이 바로 안정감이 결여되었을 때 발생할 수 있는 문제다. 누구에게나 부족한 점이 있을 수 있다. 부족한 점을 채워 넣으려는 욕구는 때로 개인의 발전과 전진의 동기가 되기도 한다. 따라서 이를 얻기 위해 죽을힘을 다해 속도를 내는 것은 비난할 거리가 아니다. 그러나 로마 제국도 하루아침에 이루어지지 않았듯 무언가를 빠르게 얻기 위해 속도를 내는 것은 현실적으로 좋은 방법이 아니다. 그렇다고 모든 일을 느리게 해야 한다는 말에는 완전히 동의하지 않지만 자기 삶의 리듬과 속도를 '적절하게' 조절하는 의미에서라면 옳은 말이다. 우리가 초조해하고 동요하는 또 다른 이유는 자신의 특성과 상황에 적합한 리듬을 찾지 못한 상태에서 무턱대고 남이 제시한 '빠를수록 좋다'라는 기준만을 따르기 때문이다. CCTV의 유명한 앵커 바이옌쑹은 자신의 리듬을 찾는 것을 축구에 빗대어 설명했는데 무척 공감이 가는 타당한 비유이다.


"이른바 실력이 좋은 축구팀이 경기하는 모습을 보면 어떨 때는 번개처럼 빠르게 움직이다가도 경기 중간 선수끼리 패스를 이어갈 때는 그 속도가 무척 느림을 알 수 있다. 이는 페이스를 조절해 공격의 시기를 기다리기 위한 준비 행동이다. 이처럼 실력 있는 축구팀은 완급의 리듬을 조절함으로써 상대방을 자기 페이스대로 이끌고 이를 통해 상대를 혼란스럽게 한다. 그래서 캐스터들이 '페이스를 찾아야 합니다!'라고 외치는 것도 경기의 페이스를 자기 팀에게 유리하게 전환시켜 주도권을 쥐어야 한다는 말이다."


삶을 살아가는 것도 마찬가지 원리다. 가끔은 삶의 속도를 약간 늦춰야 할 때도 있고 어떨 때는 아예 멈춰서야 할 때도 있다. 이는 자기를 돌아보고 '더욱 빨리 가야 할 때'를 위하여 삶을 정비하는 시기이다. 반면 가끔은 빠르게 달려가 기선을 잡아야 할 때도 있다. 빠르고 느림은 상대적인 것인데 앞을 향해 속도를 내기만 하고 영원히 멈추지 않는다면 이 '빠름'은 진정한 의미의 빠름이라고 할 수 없을 것이다.


얼마간 눈코 뜰 새 없이 바쁘게 살았던 나도 주말을 맞아 나들이에 나섰다. 저물녘의 구로우동 거리에 서 있자니 비 갠 뒤 깨끗해진 거리가 상쾌하기 그지없었다. 노점들은 요란하지 않았고 상인들도 조용히 수다를 떨며 손님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곳을 지날 때마다 매번 함께 놀아주던 강아지도 오가는 사람을 천진난만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그곳은 더 이상 많은 사람들이 몰려드는 수도 베이징이 아니었고 자신의 가치를 증명하지 않으면 도태되고 마는 피비린내 나는 전쟁터도 아니었다. 단지 빌딩숲 사이로 난 숨겨진 골목이자 베이징의 마지막 관용과 평온함이 머무르는 곳이었다. 그 순간 느꼈던 감흥은 바쁘게 돌아가는 삶 속에서 얻었던 자질구레한 성취감과는 비교될 수 없는 색다른 경험이었다.


약한 불로 천천히 졸여야 고루 맛이 배는 장조림 요리처럼 우리의 삶도 그러하다. 빨리 만들려는 욕심 때문에 센 불을 대면 국물이 졸고 타버려 결국 아무것도 맛볼 수 없게 된다.



더 이상 괜찮은 척하지 마라

미래가 보이지 않아 가슴이 답답한 날에는

막막함, 그 목표 없는 희뿌연 상태는 대다수 사람의 삶을 뒤덮고 있다. 며칠 전 상담일지를 정리하다 보니 '막막함'이라는 단어가 유독 많아서 그 수를 세어보았다. 무려 55차례나 되었다. 내 채팅창에 언급된 수는 이보다 더 많았다. 일단 '막막함'이라는 단어를 떠올리면 '목표', '이상', '자유', '근심'처럼 연관된 개념들을 떠올리게 된다. 많은 사람들이 막막하고 목표 없는 삶을 산다. 나 또한 마찬가지였다.


사람들은 목표 없는 막막한 상태를 견디지 못한다. 도대체 무엇을 위해 매일 바쁘게 사는지 모른다는 사실 자체를 용납하지 못한다. 그러나 미래에 대한 모호함과 불확실성은 늘 우리 마음을 맴돈다. 베이징 하늘을 자욱하게 뒤덮은 스모그처럼 불확실성은 무슨 짓을 해도 좀처럼 흩어지지 않는다. 막막함은 형태도 체계도 없다. 사춘기에서 청년기, 심지어 중년기까지 관통하는 인생 전반의 상태일 뿐이다.


막막해도 모호해도 괜찮아

지하철에서 고개를 숙인 채 바쁘게 무언가를 하는 사람들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기곤 한다. '저 사람들은 자기가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지 알고 있을까?', '저들은 삶의 목표가 무엇인지 정확히 알고 있을까?', '어떻게 해야만 목적지에 이를 수 있는지 구체적인 길을 알고 있을까?'


각종 매체에서는 '사람이란 모름지기 확실한 목표를 가지고 있어야 한다'고 외친다. 그렇지 않으면 방향을 잃은 선박처럼 부두에 정박하지 못하고 망망대해를 방황할 것이라는 이유에서다. 틀린 말은 아니다.


그러나 진짜 문제는 따로 있다. 구체적인 삶의 목표나 정해진 이상이 없는 것보다 치명적인 것은 목표를 잃은 자신의 상태를 용납하지 못한다는 점이다. 그들에게 목표가 없다는 것은 벌거벗겨져 길에 내쳐진 것처럼 부끄러운 일이다. 그래서 당장 몸 가릴 천 조각을 구하느라 허둥댄다. 어떤 천 조각이든 관계없다. 일단 가리고 본다.


이 시대의 교육은 자신과 세계를 인식하는 방법과 자신에게 적합한 인생 목표를 찾는 방법을 명확하게 가르치지 않는다. 유치원부터 고등학교까지 오로지 한 가지 목표, 대학 입학만을 위해 정진한다. 심지어 전공조차 부모님과 선생님의 뜻으로 결정된다. 대학에 들어간 뒤 비로소 나만의 인생 목표를 세워보려고 하지만 이마저도 외부 영향에서 자유롭지 않다. 성공을 독려하는 온갖 자기계발 열풍과 환경의 압박에 굴복하여 '전망 있고 성공할 가능성이 높은 길'을 선택한다. 우리 중에는 벌써 성공 대열에 들어선 사람도 있지만 그 역시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 정확히 모른다는 사실은 놀라울 뿐이다.


목표가 없는 사람은 정상적인 사람으로 보이지 않고 시대와 주변 사람들에게 절대 받아들여질 수 없는 존재로 인식된다. 이는 이 시대가 사람들에게 성공과 이상을 좇게 하고 그에 맞는 품격과 자질을 갖춰야만 한다는 압력을 넣은 결과다.


목표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완전히 부정할 생각은 없다. 하지만 목표란 반드시 가지고 태어나는 필수적인 요소가 아니다. 목표는 배우고 성장하고 탐색하고 시도하는 과정에서 얻는 것이다. 단번에 결정되는 것도 아니고 타인에 의해 결정되거나 성공한 사회 인사가 밟아온 길을 모방하는 식으로 정할 수도 없는 것이다.


바람직한 목표 설정을 위한 여정에서 반드시 거치는 과정이 있다. 바로 목표가 명확히 수립되기 전, 암흑기라는 단계다. 그리고 이 단계를 담담하고 침착하게 지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어째서 자기 인생에만 암흑기가 있는지 전전긍긍하는 사람도 있다. 암흑기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으면 어둠이 주는 위협에 사로잡히고 말 것이다.


언젠가 본 TED 강연에서 강연자는 고통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우리가 평소 느끼는 고통은 우리가 객관적으로 감당할 수 있는 고통의 지수와 동일한 값이 아니라고 했다. 우리가 최종적으로 감내할 수 있는 고통의 크기는 '객관적인 고통'에 '내면의 저항지수'를 곱한 값이라고 말이다. 마찬가지 원리로 막막함의 크기 또한 당신이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저항하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막막한 느낌을 견디지 못해서 밀어내기만 하면 그 정도는 더욱 심해질 것이고 수긍할수록 줄어들 것이다. 목표가 없는 상태는 피할 수 없지만 막막함의 크기는 마음먹기에 따라 얼마든지 줄일 수 있다.


미국의 심리학자 칼 로저스 역시 이렇게 말했다. '자아'란 모든 체험을 합한 결과이므로 목표 없는 당신도 당신의 일부라고. 그러면서 이렇게 덧붙였다. "당신이 목표 없는 상태를 통제하려 든다면 분열을 초래할 뿐이다. 목표 없는 상태도 당신의 일부인데 그것을 통제하려 하면 이는 자기 자신을 둘로 분리시키는 행위나 다름없다. 목표 없음을 이질적인 것으로 간주해버리는 자체가 질서를 무너뜨리는 시도다. 자신의 일부를 이질적인 것으로 여기고 배척하면 이질적인 그것이 당신에게 저항하기 때문이다. 이것이야말로 더 큰 무질서가 아닐 수 없다. 당신이 제어하면 할수록 이질적인 그것은 더욱 단단하게 성장하여 언젠가는 당신 인생에 큰 걸림돌과 근심거리가 될 것이다."


목표 없는 상태는 심각한 문제가 아니다. 그마저도 자아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목표 없는 상태를 전환시킬 방법이 아예 없는 것도 아니다. '자아'는 유동적이며 발전, 변화하기 때문에 목표 없는 상태 또한 적극적이고 긍정적인 방향으로 바뀔 가능성이 있다. 그러니 목표가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인정한 뒤 해야 할 것은 바로 목표를 찾는 일이다. 빠르고 직접적일 필요는 없다. 목표를 찾기 전에 여러 곳을 돌아보며 서서히 전진해도 좋다.


무엇을 하든 멈추지만 마라

꿈이 실현될 기미가 없고 출구를 찾을 수 없어 삶이 방향을 잃었다고 느꼈을 때 상황을 바꾸려고 무언가 시도해본 적이 있는가? 삶에 목표가 없어서 나를 찾아온 의뢰인이 있었다. 최근 2년간 본인이 살아온 이야기를 편하게 들려달라는 요청에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매일 똑같이 출근하고 퇴근한 것 말고는 딱히 이룬 게 없는 것 같습니다. 실제로도 별다른 성취가 없고요. 지금 하는 일이 제게 맞는 일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저 막막하다는 느낌만 듭니다. 한마디로 삶이 무의미하네요."

"별도의 시간을 내거나 휴가 등을 이용해서 본인에게 맞는 일을 찾아보려고 한 적이 있나요?"

"그런 적은 없습니다."

지난 2년간 막막함의 정도가 커진 것을 제외하고 그에게 변화는 없었다. 지금의 그는 2년 전과 똑같았다.


막막함을 받아들이라는 말이 손 놓고 아무 일도 하지 말라는 뜻은 아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현재를 살면서 끊임없이 생각하고 변화하는 것이다. 앉은 채 하늘에서 감이 떨어지기만을 기다려서는 안 된다. 노력하고 행동해야만 목표를 발견할 수 있다. 무엇을 해야 하는지 모르는 상태는 오히려 무엇이든 받아들일 수 있는 개방적인 상태로, 일종의 기회가 될 수도 있다. 이 시기를 이용해서 당신이 흥미를 느낄 만한 다른 영역을 탐색해야 한다. 탐색은 정해진 방향이 따로 없으며 삶에 혼란을 가중시키지도 않는다. 이것은 새로운 세계의 문을 여는 열쇠와도 같다.


목표 없는 상태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인정하는 것 외에 실천해야 하는 일이 바로 이 부분이다. 도전에 인색해지지 말자. 언제 어디서 당신에게 가장 적합한 인생 목표를 발견하게 될지 알 수 없다. 나 또한 수많은 책을 읽고 많은 사람의 사연을 들으며 세계 각지를 여행하는 경험이 내 인생의 목표와 어떤 식으로 이어질지 짐작조차 하지 못했다. 하지만 감성과 지식을 꺼내 문자로 표현하는 과정에서 비로소 깨달았다. 오랜 세월 내 안에 축적된 모든 사건과 지식, 견문은 하나도 헛된 것이 없음을 말이다. 비록 당시에는 정해진 목표가 없어 매 순간 막막한 심정으로 살았지만 그럼에도 멈추지 않고 이것저것 시도해보고 경험해봐서 무척 다행이다. 지금도 명확한 방향과 목표가 보이지는 않지만 나를 둘러싼 자욱한 안개를 거둬내고 앞을 보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중이다. 중국의 유명 심리학자 거쌍저런 교수는 이런 말을 했다. "앞이 막막하면 깨어나서 분명히 볼 줄 알아야 하고, 깨달은 뒤에는 옳은 일을 선택하고 행동해야 한다."


막막하다는 것은 정체한다는 말이 아니다. 과거의 모습에서 조금도 변하지 않는다는 뜻은 더더욱 아니다. 절대 잊지 말기를 바란다. 당신의 발끝은 당신이 선택한 곳으로 향해야 한다는 사실을, 당신의 모든 걸음이 최종 결과를 결정짓는다는 사실을 말이다. 만일 당신이 이렇게 말한다면 나도 할 말은 없다.


"인생의 목표를 정하는 일은 생각만큼 간단하지 않아서 오랫동안 곰곰이 생각해봐야겠어요."

"얼마 전에 읽은 책에서 사람에게는 적절한 때가 있으니 하늘의 뜻을 기다려야지 함부로 행동해서는 안 된다고 했습니다."


이처럼은 아니더라도 당신 마음 한쪽에는 여전히 내키지 않는 부분이 있을 것이다. 아무리 다양한 방법으로 길을 모색해도 갈피를 잡을 수 없고, 두려운 마음을 품고 갖은 노력을 해도 아홉 시에 출근해서 여섯 시에 퇴근하는 다람쥐 쳇바퀴 같은 삶은 변할 기미가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를 변화로 이끄는 요소들은 예상치 못한 순간 우리 앞에 나타난다. 삶의 큰 깨달음은 누군가 지나가는 말로 흘린 하찮은 말 한마디에서 얻을 수도 있고 큰 길을 건너면서 스치듯 눈에 들어온 샛길 풍경에서 얻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현상에 안주하면서 제자리걸음만 한다면 영원히 그 깨달음의 순간은 찾아오지 않을 것이다. 우리의 삶은 무수한 입자가 불규칙하게 움직이는 브라운 운동처럼 다변화하는 현장이다. 예측한 것이 반드시 정확하게 맞아떨어진다고 보장할 수는 없지만, 멈추지 않고 행동하고 변화하면 힘든 삶의 고비마다 이길 수 있는 힘과 저항력이 길러진다. 적어도 '인생무상이지만 그래도 최선을 다했다'고 달관할 수는 있을 것이다.



있는 그대로의 나로 더 행복해지기 위해

더 이상 악의에 반응하지 않는다

출판사에서 일하는 기획자라고 자신을 밝힌 한 팔로워에게 메일 한 통을 받았다. 그가 다니는 출판사는 급여가 그리 높은 편이 아니었다. 그는 문학을 좋아했고 경제적으로 넉넉했기 때문에 급여는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그래서 큰 불만 없이 출판사를 다녔다. 그런데 자기만 빼놓고 다른 동료 몇 명이 단체 채팅방을 개설하여 자기 험담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얼마 전에 알게 되었다. 집안 배경이 좋은 그가 연줄을 동원해서 출판사에 입사한 뒤 사장님의 사랑을 독차지한다는 내용이었다. 어떤 동료는 매우 분개하여 이런 메시지를 올리기도 했다. '그 사람은 집안도 좋다면서 뭐가 아쉬워 여기 들어왔답니까? 집에 가만히 앉아만 있어도 평생 돈 걱정 없이 지낼 수 있을 텐데 말이에요. 그냥 재벌 2세 놀이나 할 것이지 왜 여기 와서 우리 실적을 빼앗는 거냐고요!'


채팅 내용을 다 훑어봤지만 동료들에게는 그 일을 모른 체했다. 하지만 속으로는 화가 치밀어 올랐다. 내게 하소연한 메일에도 당시 심경이 잘 드러나 있었다. '만일 제가 가족에게 일자리를 부탁했다면 이렇게 작은 출판사에 왔을까요? 저는 책을 좋아해서 많은 시간과 열정을 쏟아가며 기획자가 되려고 했던 거예요. 사장님도 저의 착실함을 칭찬하셨지만 그것도 한두 번뿐이에요. 동료들 말처럼 집안의 연줄을 이용했다는 말은 완전히 잘못되었어요.'


그는 평소 겸손하고 온화한 자세로 동료와 상사를 존중하며 지냈다고 자부해왔기 때문에 이 정도로 동료들에게 미움을 받으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집안 자랑을 한 적도 없는데 어째서 악의적인 추측과 뒷담화의 대상이 되었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이 세상에는 선의만큼 악의도 많다

나는 그에게 이렇게 말해주고 싶었다. 살다 보면 선의의 도움 못지않게 악의적인 공격을 받고 무수한 방해와 견제를 당할 수도 있으며 이는 지극히 정상적인 현상이라고 말이다. 어떨 때는 악의적 공격이 당신의 언행이나 인품과 직접적인 인과관계가 없을 수도 있다. 다시 말해 당신이 아무리 자기 단속을 잘하고 조심히 행동해도 남들이 이러쿵저러쿵 헐뜯는 것을 막을 수 없다는 뜻이다. 헐뜯는 사람의 입장에서 보면 이 같은 악의는 어쩌면 단순한 연상이나 나름대로 합리적인 추론의 결과일 수도 있다. 그런 맥락에서 가끔은 소문을 만들고 악의적으로 공격하는 사람이 당신이 될 수도 있다.


어떤 사건이 발생했을 때 그 배경이 될 만한 원인은 매우 많다. 그러나 사람들은 많은 원인 가운데 오직 한두 가지만 골라서 단정 지으려 한다. 왜 그럴까?


첫째 원인은, 사람들이 어떤 정보를 접하면 이를 단순하게 인식하려는 특성이 있기 때문이다. 바쁘고 혼란스러운 세상을 살아가면서 사람들은 '어떻게 하면 일을 잘할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돈을 좀 더 많이 벌 수 있지?', '어떻게 하면 우리 가정이 화목해질 수 있을까?' 등 수없이 많은 고민을 한다. 내 문제만 생각해도 머리가 복잡한데 누가 타인의 인생을 생각하느라 신중을 기하겠는가? 하물며 자신에게 중요한 타인이 아니라면 두말할 것도 없다. 그래서 우리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사람과 일을 판단할 때는 가장 단순하고 거친 방식을 쓴다. 그럴 때 나를 향한 타인의 억측과 판단은 그리 객관적이거나 정확하지 않고 상대에게는 단순히 스쳐 지나가는 생각에 불과하다. 그러니 굳이 그 오해에 우리가 참견할 가치가 없다.


둘째 원인은, 사람이 무언가를 인지하거나 원인을 추론할 때는 대부분 자기를 위안하는 동기에서 시작하기 때문이다. 즉, 어떤 일에 대해서 판단하거나 결론지을 때 자신에게 유리한 해석만 선택하고, 또 그것이 진짜라고 굳게 믿는다는 말이다. 위에서 언급한 출판 기획자의 동료들은 어쩌면 오래전부터 회사에 불만을 품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급여는 턱없이 낮고 사장에게 인정도 받지 못했기 때문이다.


때마침 나타난 집안 좋은 동료는 그들의 불만을 투영시키기 좋은 먹잇감이 되었다. 동료들은 그가 집안 배경을 이용해서 입사한 뒤 사장의 사랑을 독차지한다고 믿고 싶었고 그를 집중적으로 비난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내면의 불만과 자기 무능에 대한 분노가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이처럼 모든 일의 원인을 자기에게 유리한 방향, 마음 편한 방향으로 돌리면 내면의 유약함도 드러나지 않고 자기 비하에도 빠지지 않을 수 있다. 이를 심리적 방어 기제라고 한다.


모든 문제의 원인을 자신의 무능으로 돌리면 행복감이 줄어든다. 하지만 자기보다 우월한 타인에게 전가시키면 상황은 달라진다. 타인을 폄하하며 자기를 높이는 방식으로 자책과 무력감으로부터 해방될 수 있는 것이다. 누군가 악의적으로 당신을 헐뜯을 때 진짜 숨은 동기를 살펴보면 최종 목적은 다른 데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는 당신을 헐뜯는 행위로 자신의 장점을 부각시키려는 것이다.


우리의 인식이나 보편적인 추론 방식에 맞지 않는 일들도 많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자기가 보고 싶은 것만 보고 자기 생각과 일치하는 것만 믿음으로써 번거로움을 피하려 한다. 자기를 합리화할 나름의 논리까지 갖추고서 말이다. '최소한 내가 본 바로는 그랬단 말이에요', '적어도 난 사람들에게 직접 상처를 주지는 않았잖아요', '어차피 내 인생도 아닌 걸요' 하는 식이다. 그렇게 보면 그들의 악의는 사실 아무 의미가 없다.


스스로 존엄성을 부여하라

악의적인 행동에 어떻게 대응하느냐고 물으면 '아무것도 하지 마라'고 조언하고 싶다. 그 외에도 원래 어떻게 했었어야만 했는지, 지금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관한 고민도 하지 말기 바란다. 악의적인 유언비어는 아무 대꾸 없이 방치하는 것이 좋다.


이 세상에 선의는 악의만큼 많다. 악의에 대응할 때마다 선의에 관한 행복한 기억마저 잊힐까 걱정되어 나는 악의에 대응하지 않기로 했다. 어떤 사람들은 악의에만 집중해서 절망의 구렁텅이로 빠져들기도 한다. 그렇게 되면 당신의 눈과 귀, 마음은 악의로 가득차서 당신에게서도 악의만 흘러나온다. 악의를 악의로 대하는 악순환은 바꾸기가 무척 어렵다. 히가시노 게이고는 그의 소설 《악의》에서 이렇게 말했다. "사람의 악의는 잡풀이 무성한 토양과도 같다. 그래서 언제 하늘을 치받고 선 나무를 키워낼지 모른다."


평생에 걸쳐 잎이 무성한 거목 한 그루를 키워낼 수 있고 지금 그 나무의 씨앗을 선택할 기회가 주어진다면 어떻게 하겠는가? 선의로 충만하고 언젠가 풍성한 열매를 맺게 될 종자를 선택하지 않을 이유가 있을까? 대부분은 악의적인 대우를 받을 때 거기에 반박하여 해명하고 만회하려는 충동을 느낀다. 그렇게 한들 무슨 소용이 있을까?


나는 초등학교 2학년 때까지만 해도 수학에 자신이 없었다. 수학 성적도 그리 좋지 않았다. 그래도 오기가 발동해서 한동안 수학 공부에 열을 올렸던 적이 있었다. 얼마 뒤 치른 수학 시험에서 반에서 2등이라는 높은 성적을 거둘 수 있었다. 그런데 그때 짝꿍이 무심코 던진 말 한마디가 찬물을 끼얹듯 내 마음을 서늘하게 했다. "네가 이렇게 높은 성적을 거둘 줄 몰랐어. 어리바리한 게 시험은 잘 보네."


나는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지만 그 말 때문에 울적하고 의기소침해졌다. 집에 돌아와 상처받은 자존심을 어머니께 하소연하며 짝꿍에게 복수할 수 있는 방법이 뭐가 있을지 물었다. 그때 어머니께서 해주신 말씀은 아직도 기억에 남아 있다. "짝꿍에게 그 문제로 따지고 다투면 너의 기분이 나아질까?"


초등학교 2학년 때 확실히 알게 된 이 이치는 어른이 된 지금도 내 삶에 적용되고 있다. 화가 치밀어 한바탕 따져 물어서 기분을 풀고 무너진 자존감을 회복하고 싶지만 그것은 지나치게 일방적인 방법이다. 정작 당신에게 상처를 준 사람은 아마도 진즉에 그 일을 잊어버렸을 것이다. 그러니 상대에게는 당신의 반박이 오히려 자신의 추측이 옳았음을 증명하는 행위로밖에 여겨지지 않을 것이다.


당신의 무력한 반박은 증거가 될 수 없을 뿐 아니라 자존감 회복에도 도움이 안 된다. 그러나 당신의 행동만은 최고의 증명이 될 수 있다. 당신은 해야 할 일을 묵묵하고 성실하게 하면 된다. 즉, 결과로써 반격하라는 말이다. 타인으로부터 존중과 신뢰를 얻기 위해서 모든 일에 노력을 기울이란 뜻이 아니다. 일을 시작할 때 당신이 품은 소망을 버리지 말고 스스로 존엄성을 부여하란 뜻이다. 다른 사람이 당신에게 욕을 하든 아첨을 하든 관계없이 말이다.


당신이 자신을 존중하지 않고 남과 비교하면서 타인의 악의적인 행동에 동요하면 막대한 시간과 에너지, 감정의 대가를 치르게 된다. 심지어 잘못하면 당신 인생도 실패의 길로 들어서고 말 것이다. 또한 악의를 가지고 당신을 억측했던 사람들에게 계속해서 당신을 공격할 빌미를 제공해줄 뿐이다.


진정으로 존엄성을 갖춘 강자가 되는 것만이 악의에 대응하는 최선의 길이다. 그렇게만 된다면 그 누구도, 그 어떤 것도 당신을 자극하지 못한다. 그때 당신은 어떤 악의적 비방에도 침묵으로 일관하며 웃어넘길 수 있는 여유를 가지게 될 것이다.


자주 자신을 돌아보고 일깨우자. 살면서 아무리 악의적인 말을 많이 듣는다 해도 그와 비슷하게 선의와 사랑의 보살핌도 받을 수 있다. 우리는 악함을 위해 살기보다 선함과 사랑을 위해 사는 존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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