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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적의 길
저   자 : 이정동
출판사 : 지식노마드
출판일 : 2017년 0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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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적의 길


대전환: 착각에서 축적으로

고도 상승을 멈춘 로켓

식어가는 성장엔진

성장률이 떨어지고 있다, 추세적으로

2016년 여름 서울대학교 경제연구소는 한 가지 흥미로운 분석결과를 발표했다. 지난 20년 동안 한국경제의 잠재성장률이 정권이 바뀌어오면서 매 5년마다 1% 포인트씩 하락했다는 분석이다. 이 추세가 반전되지 않는다면, 현재 사실상 2%대의 잠재성장률을 보이고 있으니 머지않아 0% 성장, 즉 경제성장이 멈추게 될 것이라는 걱정스러운 전망이다. 한국경제가 일인당 국민소득 2만달러를 돌파한 시점이 2006년인데, 10년이 넘도록 여전히 2만달러 대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저성장 추세가 계속되면서 '일본의 잃어버린 20년'의 데자뷔가 아닌가 걱정하는 불길한 목소리가 들려온 지 오래다.


미시적인 차원에서 기업들의 수익성도 지난 30년 동안 경기 사이클에 따라 약간의 등락은 있었지만, 전반적으로 하락하고 있다. 60년대의 10%대에서, 2010년 이후 5% 이하로 지속적으로 하락해 왔고, 최근 들어서는 수익률 하락 추세가 경쟁국가들 가운데 가장 빠른 실정이다.


문제는 이러한 경제적 성과의 하락이 최근 수년 안에 갑작스럽게 나빠진 것이 아니라 지난 20-30년간 조금씩 나빠져 온 추세적 하락이라는 데 있다. 건강한 산업생태계는 낡은 제품, 경쟁력이 떨어진 기업이 퇴출되고, 그 자리에 새살이 차오르듯 새로운 기업과 제품이 재빨리 등장하는 활발한 신진대사가 특징이다. 불행하게도 지난 20년 동안 한국산업의 주력 수출상품 순위에서 윗자리는 늘 선박, 자동차, 반도체, 무선통신기기, 석유화학제품이 차지한 채 변화가 없었다. 기업 순위에서도 지난 20년간 거의 같은 기업들이 순위만 조금씩 바꾸어가면서 여전하게 자리하고 있다.


경기가 늘 좋다가 최근 들어 갑자기 나빠졌다면 단기적으로 발생한 문제 때문일 것이므로, 그 원인을 찾아 급히 고치면 된다. 그러나 수십 년간 추세적으로 나빠져 온 것이라면, 접근방법이 완전히 달라져야 한다. 우선 현재의 위기상황을 단기적으로 분석할 것이 아니라 최소 20년간 지속되어온 근본적인 관행과 루틴의 문제에 대해 천착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해야 한다.


터널의 입구에 들어선 한국산업

쉼 없이 성장해온 한국경제의 엔진이 서서히 식어가는 이 어두운 터널이 언제 끝날까? 불행하게도 이제 막 터널입구에 진입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글로벌 경기 침체가 장기화되는 이른바 뉴노멀 시대가 본격화하는 것이 그 첫 번째 이유다. 특히 경제선진국의 보호무역주의 장벽은 날로 높아지고, 신흥시장의 성장세가 둔화하면서 대외경제의존도가 높은 한국산업에 직접적으로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것이다.


4차 산업혁명도 문제다. 이 새로운 패러다임의 등장은 우리 산업이 채 대비하기도 전에 불쑥 우리 곁에 다가와 있다. 아직 3차 산업혁명도 채 소화하지 못한 상태에서 빅데이터, 플랫폼, 공유, 연결, 경계의 소멸 등 낯선 단어들을 익히는 데만도 시간이 바쁠 지경이다. 패러다임 전환을 요구하는 기술혁신의 물결은, 장기적인 문제를 풀기에 고심해야 할 한국산업계의 어깨에 무게를 더할 것이다.


우리 내부의 문제도 작지 않다. 우선 이미 심각한 수준에 이른 저출산 고령화 문제는, 현재의 출산율과 고령화 속도를 감안한다면, 그 부정적인 효과가 전 세계에서 가장 빠른 속도로 확대될 전망이다. 단적으로 2017년부터는 생산가능인구가 줄기 시작하고, 2030년에는 경제활동 가능인구 3명이 1명의 고령인구를 부양하게 될 것이다. 늘어나는 복지 부담으로 내일의 경제기반을 뒷받침할 투자여력이 줄고, 그에 따라 경제의 활력은 가속적으로 떨어질 것이다.


뉴노멀과 같은 외부적 요인, 기술혁신과 같은 외생적 요인, 인구 문제와 같은 내부 구조의 문제가 겹쳐서 우리 산업의 전망을 더 어둡게 하고 있지만, 그것보다 훨씬 중요한 문제가 있다. 바로 도전의식, 기업가정신의 쇠퇴이다. 기업들은 창의적인 제품과 서비스에 승부를 걸기보다 각종 제도적 장벽으로 보호받는 독과점적 지대 추구 비즈니스에 사활을 걸고 있다. 모두가 위험을 회피하기 위해 움츠리고 있는 상황에서는 내일을 기대하기 어렵다. 지금 우리는 터널의 입구에 막 들어섰다.


한국산업의 위기: 개념설계 역량이 없다

개념설계: 백지 위에 밑그림 그리기

초고층빌딩의 밑그림은 누가 그릴까?

한국산업이 처한 위기의 본질은 '개념설계 역량이 부족하다'라는 한 문장으로 압축해서 표현할 수 있다. 이 문장의 의미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개념설계'가 무엇인지를 파악해야 하는데 공학을 전공하지 않았거나 산업기술 분야에 종사하지 않는 사람에게 개념설계는 낯선 단어일 수밖에 없다. 다행히 비전문가들이 개념설계를 쉽게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만한 현실적인 사례가 있다.


2015년 3월 여러 일간신문에 국내에서 건설하고 있는 최고 높이의 빌딩 공사과정을 소개하는 기사가 사진과 함께 실린 적이 있다. 2016년 4월에도 동일한 내용이 역시 조금 더 큰 사진과 함께 일간지에 실렸다. 이 초고층빌딩에 세계 최고의 기술이 집약되어 있다는 내용의 신문기사를 잘 살펴보면, 개념설계가 무엇인지 쉽게 알 수 있다. 기사는 이 초고층빌딩에 참여한 글로벌 기업들의 이름과 기술 분야를 상세히 소개하고 있는데, 그 핵심 내용을 간추리면 이렇다.


이 초고층빌딩의 '건축 설계'는 미국의 초고층 전문 건축설계업체인 KPF사가 담당하였고, 완공시 75만톤에 달하는 건물하중을 견딜 수 있도록 하는 '토목설계'는 영국의 ARUP사가 주도했다. '구조설계'부분은 미국의 LERA사가 담당하였고, 초속 80m의 강풍을 견딜 수 있는 '풍동설계'의 컨설팅 및 검증은 캐나다의 REDI사가 맡았다. 이 기사에서 제시된 건축설계, 토목설계, 구조설계, 풍동설계 등은 단어에서 쉽게 짐작할 수 있듯이 초고층빌딩 건설에 필요한 상세 분야의 설계, 즉 분야별로 밑그림을 그리는 것이란 점을 알아차리는 것이 핵심이다.


초고층빌딩 하나를 짓는 과정을 정말 단순하게 이야기하면, 백지 위에 건물의 밑그림을 그리고(설계), 필요한 자재를 산 다음(구매), 설계도대로 터를 파고, 사온 자재를 이용하여 실제로 짓는 것(시공)으로 요약할 수 있다. 이 절차를 한 번 더 단순화해서 두 단계로 표현하면, 설계하는 '밑그림 그리기'와 그 밑그림대로 구매, 시공하는 '실행하기'로 나눌 수 있다.


건물을 짓는 것뿐만이 아니다. 휴대폰이나 자동차를 포함한 모든 제품을 만드는 과정을 가만히 살펴보면 밑그림을 그리는 부분과 그려진 그림에 따라 실행하는 부분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서 제품의 개념을 최초로 정의한다는 의미를 강조하기 위해 앞 단계의 밑그림 그리는 부분을 '개념설계'라고 하고, 밑그림대로 시행한다는 의미에서 뒤의 단계를 '실행'이라고 한다. 모든 제품을 만드는 과정은 개념설계와 실행으로 이루어진다.


초고층빌딩을 짓기 위해 동원된 세계 최고의 기술을 소개한 그림으로 다시 돌아가 보자. 그림에 소개된 기술들은 모두 실행이 아니라 각 분야별로 독창적인 밑그림을 그리는 개념설계에 해당하는 것들이다. 그런데 기사 내용에 따르면 흥미롭게도 개념설계는 미국, 일본, 유럽 등 기술 선진국의 기업들에 의해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한국에 세계 최고 수준의 빌딩을 지었다고 자랑하는 기사가 결과적으로 중요한 개념설계는 모두 글로벌 선진기업들에 의해 이루어졌다는 것을 홍보하는 기사가 된 셈이다. 이 이야기를 뒤집어서 해석하면, 우리 기업들은 단지 선진기업들이 그려준 그림을 충실히 실행하는 단계를 책임지고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초고층빌딩 분야로 한정해서 보면, 한국산업의 기술 수준은 개념설계 역량이 부족하고, 실행 역량에 머물러 있는 것이다.


기업을 두 종류로 나누라고 하면 개념설계를 하는 회사와 개념설계를 받아와서 실행하는 회사로 나눌 수 있다. 국가도 마찬가지다. 개념설계를 하는 국가와 개념설계를 도입해서 실행하는 국가로 나눌 수 있다.


글로벌 챔피언 기업의 조건: 개념설계 역량

모든 제품과 서비스는 개념설계에서 시작된다

모든 제품을 만드는 과정은 개념설계와 실행으로 이루어져 있다. 개념설계 없는 제품은 존재할 수 없다. 운동화에서 인공위성까지 제품이 존재하기 위해서는 개념설계가 선행되어야 한다.


손으로 만질 수 있는 제품뿐만 아니라 무형의 서비스도 마찬가지다. 확장해서 생각하면, 비즈니스 모델이나 조직구조 등까지도 포함해서 사람이 만든 모든 것에는 항상 개념설계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예를 들어서 중국의 글로벌 통신장비 기업 화웨이의 독특한 조직구조도 따지고 보면 기업 조직 및 운영방식에서 새로운 개념설계를 보여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개념설계를 '존재하지 않던 그 무언가를 그려낸다'는 것으로 일반화시켜 생각한다면, 설계회사만 개념설계를 하는 것이 아니라 생산, 마케팅 등 하나의 제품을 만들어서 유통하는 모든 단계에서 개념설계를 하는 회사를 만날 수 있다. 1991년 창립된 IDEO라는 미국의 디자인 회사는 물건의 외양을 만들어 준다는 전통적인 디자인의 개념을 뛰어넘어 조직을 설계해주거나, 비즈니스 모델을 만들어 주는 등 사실상 모든 것을 백지 위에 디자인할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었다. 이 바탕에는 디자인 자체에 대한 설계, 즉 '디자인 씽킹'이라는 새로운 사고방식이 있는데, 이것 역시 명백하게 디자인 분야의 새로운 개념설계라고 할 수 있다.


이처럼 개념설계는 설계회사가 하는 일이 아니다. 그 누구라도, 어떤 기능을 하고 있는 기업이라도 새로운 밑그림을 제시할 수 있다면 개념설계를 하는 것이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기술혁신도 따지고 보면 모두 새로운 개념설계라고 할 수 있다. 새로운 초고층빌딩의 설계, 새로운 휴대폰 기능의 고안, 못 보던 비즈니스 모델의 제안이 모두 새로운 개념설계다. 결국 혁신적인 기업은 개념설계를 제시하는 기업이다.


우리 기업과 산업이 어려움을 겪는 핵심적 이유는 아직까지 개념설계 역량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축적의 전략: 축적은 어떻게 이루어지는가?

중국의 경쟁력 비밀을 이해하고 이용하라

공간의 힘으로 축적의 시간을 압축한다

광대한 공간의 힘

중국이 샌프란시스코의 고속철 사업을 수주했을 때 많은 사람들이 놀랐던 것은 고속철 분야의 선두주자인 프랑스, 독일, 일본이 아니라 후발주자에 불과했던 중국이 독자적인 모델로 도전해서 수주했기 때문이다. 중국은 2000년대에 본격적으로 고속철 사업에 뛰어들면서 캐나다, 프랑스, 독일 등 기술 선진국들의 모델을 도입하기 위해 합작회사를 설립하는 등 기술 학습 노력을 기울였다. 2000년대 후반부터 독자모델 개발을 시작하였으나 기술적 수준은 그리 높지 않은 것으로 평가되었다. 그러나 중국 정부의 도전적 계획에 따라 후발주자임에도 불구하고 전 세계에서 가장 많은 구간을 부설하면서 경험을 쌓기 시작했다. 2016년까지 19,000km 이상의 고속철을 부설하였는데, 전 세계에서 단연 가장 길다. 단순히 부설구간이 긴 것뿐만 아니라 통과 지역이 고속철 역사상 기운이 가장 낮은 곳(영하 50도)과 고도가 가장 높은 곳(해발 4,345m) 포함되어 있을 정도로 특이한 환경이 많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고속철의 설계와 시공에서 전 세계 어느 다른 국가, 다른 기업도 접해 보지 못한 독특한 경험을 할 수 있기 때문에, 더 도전적인 개념설계에 도전해볼 수 있는 기회가 많다는 의미다.


그렇지만 한동안 사고와 고장이 잇따랐다. 그러나 사실 이런 시행착오가 바로 새로운 모델을 만들어내기 위해 꼭 필요한 과정이라는 점을 염두에 둔다면, 사고가 나고 중국 회사들이 이를 극복하기 위해 나섰을 때, 조롱이 아니라 두려움과 걱정이 섞인 반응을 보였어야 했다. 사고 후 신호연계, 브레이크 등 여러 핵심기술 영역에서 드러난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해 중국 기업들은 부심했다. 이밖에도 여러 가지 크고 작은 실패의 경험을 쌓았고, 그 결과가 2015년 샌프란시스코 사업의 수주로 나타났던 것이다.


인천대교와 같은 장대교 설계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최신 기술을 활용한 장대교 분야에서 중국은 분명 후발주자인데도 기술 선진국이 독점적으로 수행해오던 개념설계를 시도하고 있고, 또 국제입찰에서 자체적인 기본설계를 바탕으로 컨소시엄을 구성하는 경우가 많아지고 있다. 이것도 역시 후발주자로서 경험을 축적할 시간을 짧았지만, 반대로 짧은 시간에 그 어떤 나라도 경험해보지 못할 정도로 많은 시행착오의 양을 축적한 덕분이다.


중국발 개념설계의 비밀은 넓은 내수시장, 즉 공간의 힘으로 시행착오를 빠르게 축적하면서 개념설계 역량을 기르는 데 필요한 시간을 압축한다는 데 있다. 공간의 힘은 많은 시행을 해볼 수 있는 기회를 준다는 점에서 절대적으로 중요하지만, 또한 풍부한 니치마켓을 제공해서 다양성을 높인다는 측면에서도 도움이 된다. 중국산업계에서는 휴대폰이나 모터사이클을 만드는 회사가 수백 개가 넘기 때문에 한 기업이 중국시장 전체를 차지한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TV프로그램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지역별, 내용별로 극단적으로 차별화되어 있기 때문에 1%의 시청률을 확보하면 유례없는 성공으로 일컬어질 정도다. 이처럼 시장이 차별화되면, 특이한 개념설계를 시도한 기업이라 하더라도 작은 니치에서 생존에 필요한 최소 임계규모의 시장을 확보해서 살아남을 가능성이 있다. 따라서 시장이 크고 극단적으로 차별화되어 있으면, 다양성이 높아지게 되고, 그 결과 이들을 재료로 해서 예상치 못했던 혁신적 조합이 탄생할 확률도 높아진다. 풍부한 니치마켓이 다양한 조합의 수를 늘리고, 시행착오의 보존 가능성을 늘려, 축적의 시간을 단축하는 데 도움이 되는 선순환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축적에서 길을 찾다

기술 선진국의 비전과 축적의 길

축적의 길로 가는 4개의 열쇠

'모든 행복한 집은 한가지로 행복하다'

톨스토이의 장편소설 '안나 카레리나'는 '행복한 집은 다 엇비슷하지만, 모든 불행한 집은 서로 다른 이유로 불행하다'라는 문장으로 시작한다. 실패하는 것에는 하나의 원인이 아니라 여러 가지 원인들이 있을 수 있다는 뜻으로도 풀이할 수도 있고, 무언가 하나의 성공적인 사례가 만들어지기 위해서는 모든 조건들이 다 갖추어져야 한다는 이야기로 읽을 수도 있다.


기술 선진국들의 모습은 모두 한가지로 엇비슷하다. 도전적인 시행착오가 끊임없이 계속되고, 그 경험이 꾸준히 축적되면서 더 혁신적인 시도의 재료로서 재조합된다. 한마디로 살아있는 혁신 생태계의 모습을 가지고 있다. 개념설계 역량을 가진 글로벌 챔피언 기업들이 가득하고 또 이런 혁신 기업들의 도전을 뒷받침하는 사회시스템을 가진 국가가 기술 선진국이다. 이런 기술 선진국이 '안나 카레리나'의 행복한 집이다.


그렇다면, 그 기술 선진국의 공통점을 찾아낼 수 있을까? 지금까지 살펴본 개념설계 역량의 특징들만 모아보면, 기술 선진국이라는 모호한 그림의 퍼즐들을 맞출 수 있는데, 다음의 다섯 가지 문장으로 요약할 수 있다.


첫째, 다양한 분야에서 시행착오를 축적한 고수들이 많다.

둘째, 다양하고 탐색적인 도전을 많이 하면서, 꾸준히 아이디어를 키워나가는 스케일업 전략이 몸에 배어 있다.

셋째, 도전적 시도를 실험해 볼 수 있는 경쟁력 있는 현장이 있다.

넷째, 사회 곳곳에 축적된 시행착오의 경험이 존재하고, 이들이 활발하게 조합될 수 있는 개방적 네트워크가 잘 발달되어 있다.

다섯째, 시행착오의 위험을 공유하기 위한 사회적 시스템과 시행착오를 장려하는 문화가 뒷받침되어 있다.


한국산업도 이런 특성을 갖춤으로써 개념설계를 할 수 있는 명실상부한 기술 선진국이 되어야 하고, 될 수 있다. 그런데 안나 카레리나의 법칙이 가르쳐주는 교훈을 되새겨보면, 기술 선진국이라는 행복한 집이 되기 위해 '이것만 고치면 된다'는 원 포이트 레슨은 있을 수 없다. 한국산업이 진정 재도약하기 위해서는 우리 산업의 현재 관행을 기술 선진국이라는 행복한 집의 조건에 골고루 비추어 솔직하게 진단하고, 그 해결책을 모색해나가야 한다.

미시감의 시대, 익숙한 것들을 의심하자

영화 '매트릭스'에서 주인공 네오가 동료들과 계단을 올라갈 때 검은 고양이 한 마리가 지나간다. 네오가 흠칫 놀라는데, 조금 전에 보았던 장면이 그대로 반복되는 데자뷔, 즉 기시감(旣視感)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영화에서 이 장면의 기시감은 역설적으로 주변 환경이 극적으로 변했다는 것을 알려주는 신호다. 곧이어 적들이 들이닥치고 결국 네오가 쫓기는 이야기로 전개된다.


기시감의 반대감은 미시감이다. 늘 익숙하게 반복되던 일이었는데, 갑자기 처음 접하는 일처럼 생경하고 낯설게 느껴질 때 자메뷔, 즉 미시감(未視感,)이라는 말을 쓴다. 기존에 늘 접하던 상황이라 똑같이 하던 대로 했는데, 예상치 못했던 결과가 나올 때 갑자기 느끼는 선연한 깨달음, 느닷없는 소외의 느낌, 이것이 미시감이다.


지금 한국의 산업계는 전례 없는 미시감의 시대를 경험하고 있다. 기존에 하던 대로, 기민하게 선진국와 선진기업, 선진시장의 동향을 예의주시하며 벤치마킹하고 있다. 저성장 시대니 야근을 밥 먹듯이 하면서 더 열심히 대책을 마련하고, 성장 정체 현상의 돌파를 외치고 있는데, 두 다리는 점점 더 흐르는 모래 속으로 빠져들고 있다. 전에는 위기를 맞아서 조금 더 빨리 발을 움직이면 확실히 더 빨리 빠져나올 수 있었는데, 지금은 이상하게 더 열심히 달릴수록 더 깊이 가라앉는, 논리적으로 앞뒤가 맞지 않는 상황 전개에 당황하고 있다.


게다가 4차 산업혁명처럼 경계를 허무는 융합적 기술혁신이 뿔 끝에 횃불을 매단 소처럼 미친 듯이 달려들고, 굼뜨고 낡은 화물차인줄 알았던 중국이라는 거대한 트레일러가 최신 엔진으로 무장한 채 바로 뒤에서 길을 비키라고 빵빵거리고 있다. 그간 너무 익숙해져서 편안하기 그지없는 자세로 즐기고 있던 운전자가 갑자기 낯선 길과 처음 보는 풍경을 만나 화들짝 놀라 갈팡질팡하는 초보운전자처럼 땀을 흘리는 중이다. 뒷골이 서늘한 미시감은 어쩌면 우리를 일깨우는 신호일지 모른다. 이제까지 편안하게 느껴졌던 관행이 이제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는 점을 인정하고, 새로운 관행으로 바꾸어야 한다는 신호로 받아들여야 한다. 축적의 길을 나서는 우리의 첫걸음은 우리를 눈부신 성공으로 이끈 바로 그 관행과 결별하는 쉽지 않은 일에서 시작된다.


'진리는 상상의 문제다'

인터넷에서 유명한 영상 중에 '벼룩 길들이기'라는 제목을 단 4분 안쪽의 짧은 동영상이 있다. 높이뛰기 선수로 유명한 벼룩이라 하더라도 뚜껑을 덮은 유리병 속에 한동안 가두어 놓으면, 뚜껑을 제거하고 난 다음에도 병의 높이 이상을 뛰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는 실험영상이다. 뛰다가 유리병에 머리를 부딪치는 아픔을 여러 번 느끼다보면, 자기도 모르게 내면화된 한계가 생겨 부딪치지 않을 만큼만 뛰게 된다는 이야기다. 더 높이 뛸 수 있고, 더 높이 뛰어도 되고, 심지어 이제는 뛰어야 한다는 것을 아는데도, 습관이 한번 자리를 잡으면 행동을 바꾸기가 얼마나 어려운지를 보여 주는 유명한 과학계의 에피소드다. 심지어 벼룩도 조건화가 가능한데, 훨씬 예민하고 똑똑한 사람은 오죽할까?


우리 산업계도 시행착오를 장려하고, 그 경험을 축적할 필요가 있다고 이야기하면, 한국사회의 문화가 전통적으로 축적지향적이 아니라서, 쉽게 말해 빨리 빨리 문화이기 때문에 어려울 것이라는 자조적인 이야기를 많이 한다. 뛸 수 없을 것이란 이야기다. 그러나 이것은 전혀 사실이 아니다. 우리 문화가 원래부터 실행 중심이었을 것이라는 근거 없는 확증편향일 따름이다. 산업사회의 특징을 규정짓는 문화는 필연적으로 변한다. 멀리 볼 것도 없다. 산업혁명 이전의 독일은 약속을 잘 지키지 않고, 신뢰가 부족하기로 유명한 나라였다. 그러나 산업혁명과 함께 새로운 문화를 의도적으로 '형성'한 결과 현재는 신뢰와 정확성의 상징이 되었다.


한국산업이 발전을 시작하던 때는 행동의 관행 측면에서 보면 아무것도 씌어 있지 않은 완전한 타블라 라사, 즉 하얀 서판이었다. 그러나 지난 50년간 특이한 역사적 조건에서 놀라운 발전을 이룩했고, 그 과정에서 하나의 특정한 루틴을 빈 서판 위에 새기게 되었다. 빨리 빨리, 벤치마킹하면서 실수없이 실행하는 마음의 프레임이 그것이다. 그동안 아주 효과적이었으나 너무 깊이 습관으로 각인되어서, 전혀 사실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우리 DNA에 오래도록 새겨진 고유한 문화적 특성인 것처럼 착각할 정도가 되었다. 지금 우리 사회는 실행의 루틴이 너무 빽빽하게 씌어 있어 도전과 축적의 새로운 루틴을 쓸 빈칸 한 줄을 찾기 어려울 정도다.


'진리는 상상의 문제다' 어디로, 얼마나, 어떻게 가야할지 막막할 때 가끔 되뇌는 소설 속의 한 구절이다. 지금 한국의 산업이야말로 독창적인 개념설계를 할 수 있는 진정한 기술 선진국이 될 수 있다는 상상과 희망을 간절히 필요로 한다. 그리고 실행 시대의 유산으로서 우리 스스로 설정한 마음의 유리뚜껑을 걷어내고, 서로 뒷받침하면서 부딪치기로 작정하고 뛰어오를 수 있도록 우리 사회의 틀을 축적지향으로 바꾸어야 한다. 한마디로 기술 선진국의 마인드로 바꿀 때다.


'메이드 인 코리아'의 진정한 도약을 위한 축적의 길 앞에 서 있다. 도전은 지금부터 시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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