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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오나르도 다 빈치와 미켈란젤로
저   자 : 김광우
출판사 : 미술문화
출판일 : 201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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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오나르도 다 빈치와 미켈란젤로


레오나르도의 출현 그리고 르네상스

빈치에서 태어난 사생아 레오나르도

레오나르도 다 빈치는 1452년 4월 15일 토요일 오후 10시 30분 토스카나의 마을 빈치에서 태어났다. 빈치는 빈치라는 골풀 이름에서 유래했는데 토스카나 사람들은 빈치오라는 개울가에서 자라는 이 골풀을 엮어 다양하게 사용했다. 레오나르도는 자신의 성을 골풀과 동일시했다.


어머니는 카테리나라는 여인으로 알려졌으며 레오나르도를 출산할 때 스물두살이었다. 그녀는 레오나르도를 낳고 1년 6개월 정도 보살핀 후 도기 굽는 일을 하는 안토니오 부티란 사람과 결혼하여 빈치에서 2km밖에 떨어지지 않은 캄포 제피에 살았다.


아버지가 피렌체에서 주로 생활했기 때문에 레오나르도는 걸어서 반 시간밖에 걸리지 않는 곳에 있는 어머니를 종종 찾아갔으며 레오나르도가 두세 살 때 태어난 의붓여동생 피에라와 어울려 놀았을 것으로 짐작된다.



이성과 훈련을 통한 성장

베로키오의 문하에 들어간 레오나르도

레오나르도가 베로키오의 작업장에서 배우고 조수로 활동한 기간은 13년 남짓이다. 화가이자 작가인 첸니노 첸니니는 13년의 기간이면 도제의 단계에서 수습기간을 마치고 제구실을 하는 장색 단계를 거쳐 숙련공이 될 수 있다고 했다. 도제기간에 견습생은 첫 6년 동안 붓 만들기, 겉칠하기, 참피나무나 버드나무 패널에 캔버스를 잡아당겨 붙이기, 안료를 알아보고 준비하기 등을 배우며 매일 안료를 섞어 원하는 색을 내는 일도 배운다.


베로키오의 작업장에서 수학한 사람은 레오나르도뿐만이 아니었다. 페루지노, 로렌초 디 크레디, 보티첼리를 비롯해서 1450년 전후로 태어난 예술가들이 그에게 수학했으며 기를란다요와 루카 시뇨렐리도 그에게 수학한 것 같다. 레오나르도가 베로키오의 작업장에 들어갔을 때 그곳은 피렌체 젊은 예술가들의 회합 장소와도 같았다.


예술 후원가 로렌초 데 메디치

1480~90년은 피렌체의 정치/문학/예술이 절정을 이룬 시기였다. 로렌초는 자신이 수집한 건축적 유물과 조각품들을 코시모와 피에로가 수집한 작품들과 함께 메디치 궁전과 산 마르코 수도원 사이의 정원에 장식했다. 수많은 예술가/학자/시인들을 후원했으며, 로렌초의 후원 아래 공부한 사람들은 모두 훌륭한 예술가가 되었다고 바사리는 적었다.


레오나르도는 축제를 통해 피렌체 상류사회를 알게 되었다. 이 시기 그는 베로키오 작업장의 반장 정도의 위치에 있었기에 메디치 궁전에 들어갈 수 있었으며 그들이 어떤 생활을 하는지 직접 볼 수 있었다. 로렌초는 베로키오에게 공작을 위해 로마 스타일의 갑옷과 투구를 디자인하라고 했다. 이후 레오나르도가 <전사의 옆모습>을 그렸는데, 아마 이런 갑옷과 투구였던 것 같다. 갑옷은 소용돌이무늬, 사자의 얼굴과 발톱, 이빨, 독수리 날개 등으로 화려하게 장식되었을 것이다.


유화물감의 발명

레오나르도는 알레소 발도비네티의 작업장에도 갔다. 그는 발도비네티의 풍경화에 관심을 보였으며 물감비법에 특히 관심이 있었던 것 같다. 발도비네티의 작업장에는 아궁이가 있어 계란 노른자와 송진을 섞어 유약 효과를 냈는데, 이것을 사용해 프레스코화를 그리면 유화처럼 신선하고 밝은 느낌을 줬다.


1470년경 레오나르도가 화가로서 첫 발을 디딜 때만 해도 토스카나 화가들은 유화물감을 사용하는 방법을 전혀 알지 못했다. 그러나 일부 화가들이 유화물감의 효과를 실험하면서 작품에 유약을 발라 화면을 매끄럽고 빛나게 만들었다. 베로키오의 작업장에서는 유화물감의 혁명이 일어났고 이로 인해 상업적으로도 크게 성공한 듯 보인다.


레오나르도와 페루지노가 이곳에서 유화물감 사용법을 배웠으며 이후 라파엘로에게 전수된 것 같다. 물 대신 오일을 사용한 것은 회화에 큰 변화를 가져다주었다. 물감이 번지지 않은 상태에서 다른 물감을 덧칠할 수 있어 원하는 색을 섞어 사용할 수 있게 되었고, 마르는데 시간이 걸리므로 색을 정정할 수도 있었다.



밀라노로 간 레오나르도

밀라노로 가다

레오나르도가 처음 밀라노로 간 것은 서른 살이 되던 1481년 초겨울이었다. 그는 밀라노로 떠나면서 밀라노 최고 지도자를 위해 악기를 챙겨 갔다. 바사리는 류트와 유사한 그 악기를 레오나르도가 직접 고안했고 주로 은으로 제작되었다면서 "말의 머리 형상을 한 이 낯선 악기는 강력한 하모니와 완전한 음을 냈다"고 적었다. 레오나르도는 피렌체에서 열린 경연에서 이 악기를 연주하여 모든 음악가들을 물리치고 로렌초의 마음에 들었다.


그는 군사용구를 설계하는 데 많은 시간을 보냈다. 노트북을 보면 이런 용도에 적합한 간단한 기구, 탄도, 화염투석기 등은 물론 가공할 파괴력을 가진 기계와 요새화 등 수많은 드로잉이 남겨져 있다. 당시 피렌체는 로마, 나폴리 등의 나라들에 대한 방어 태세를 갖추고 요새와 무기에 대해 관심이 많았기 때문에 레오나르도는 마치 군부의 공학가처럼 이런 연구에 열중했다.


밀라노 최고 권력자와 가까워지다

레오나르도는 루도비코의 여인 <세실리아(담비를 안고 있는 여인)>의 초상을 그린 후부터 루도비코와 가까워졌다. 담비는 루도비코를 상징하는 여러 상징물 중 하나이다.


레오나르도는 비슷한 시기에 <아름다운 페로니에르>를 그렸는데, 18세기에는 이 그림을 그린 화가의 이름을 'Leonard d'Awincj'라고 표기했다. 따라서 일부 학자들은 레오나르도가 그린 것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모델이 세실리아를 닮았고 갸름한 타원형의 얼굴이 <동굴의 성모>에서의 오른쪽 천사를 연상시키는 것으로 보아 레오나르도의 작품이 맞다고 판단된다. 이 작품 또한 암브로조의 협력으로 완성된 것으로 추정되는데, 전체적인 구도와 모델의 앉은 자세, 표정은 레오나르도가 의도한 것이겠지만 짧은 머리와 부자연스러움은 암브로조의 솜씨로 보인다. 암브로조는 밀라노에서 레오나르도의 첫 경쟁자였지만, 시간이 지난 후에는 레오나르도의 경쟁자가 될 수 없었다. 1485년 레오나르도가 밀라노 궁정의 주목을 받기 시작하면서 밀라노의 유명인사가 되었기 때문이다.


밀라노 대성당 재건축 계획

레오나르도는 석조 건축에 관한 과학적 지식을 충분히 갖추고 있었다. 아직 자신이 디자인한 건축물을 만들어보지 못했지만 그동안 쉬지 않고 건축에 관한 책을 읽고 나름대로의 공부를 해왔다.


레오나르도의 해부학적 드로잉이 이 시기에 시작된 것도 흥미롭다. 물론 일찍부터 해부학에 관심을 기울였지만 현존하는 스케치들은 이 시기에 그려진 것들로 건축물에 대한 연구가 인체에 대한 관심으로 이어진 것 같다. 그는 "인간이 세계의 모델이다"라고 했다. 비트루비우스는 『건축에 관하여』에서 인체가 정사각형과 원형 위에 만들어졌다고 적었는데, 레오나르도는 '비트루비우스적 인체 비례'로 알려진 다양한 포즈를 취한 남자 누드를 원형과 사각형 안에 그렸다.


이 시기에 그는 온갖 종류의 건물들을 바닥 평면의 반지름 주변으로 모든 부분들이 집중되는 디자인을 고안했으며 모두 "원형 인간"을 상기시키는 것들이다. 그는 인체의 기하를 우주의 일체와 완전함에 적용하며 점차 대지 자체가 인간의 이미지를 닮았다고 생각했다.



미켈란젤로의 재능

기를란다요의 문하에 들어간 미켈란젤로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는 1475년 3월 6일 월요일, 토스카나의 아레조 근처의 작은 도시 카프레세에서 태어났다. 아레조에서 북쪽으로 48km가량 떨어진 이 마을의 현재 명칭은 미켈란젤로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그의 이름을 붙인 카프레세 미켈란젤로이다.


미켈란젤로는 어려서부터 돌 깎는 것을 좋아했지만 아버지는 아들이 조각가가 되는 것을 반대하고 피렌체의 은행가이면서 상인이 되기를 원했다. 그때만 해도 예술가란 직업은 미천하게 인식되었지만 아들이 조각에 집념을 갖고 있음을 안 아버지는 그의 장래를 위해 피렌체의 유명한 프레스코 화가 도메니코 기를란다요의 문하에서 수학하게 해주었다. 기를란다요는 크고 훌륭한 작업장을 갖고 있었고 미켈란젤로는 그에게 드로잉과 템페라, 프레스코 기법을 배웠다.


훗날 미켈란젤로는 아는 체 하기 좋아하는 기를란다요로부터 배운 것이 별로 없다고 투덜거렸지만 그의 <도니 톤도>나 시스티나 예배당 천장화를 보면 기를란다요의 영향을 받았음을 알 수 있다.

천부적 재능의 예고 <계단의 성모> <켄타우로스의 전투>

미켈란젤로의 최초 작품으로 알려진<계단의 성모>는 도나텔로의 영향을 보여준다. 일명 '밀어넣는 릴리프'로 불리는 이 작품은 그가 열여섯 살 혹은 그 이전에 제작한 것으로 경이롭다 할 수 있으며 그의 천부적 재능을 시위하기에 충분하다. 이것은 조각 훈련을 받지 않은 사람의 솜씨라고 하기에는 믿기지 않아 추후 보완했거나 아니면 그가 열다섯 살 이전에 이미 돌 깎는 기술을 익혔을 것으로 짐작된다. 마치 돌판에 그림을 새긴 듯한, 두께가 얇고 '회화적' 원근법으로 표현된 이 작품은 실험적이지만 완숙미를 보여주고 있다.



피렌체에서 만난 두 거장

레오나르도와 미켈란젤로의 회화적 대결

레오나르도는 10월 피렌체 화가 길드에 다시 등록한 후 시뇨리아의 주문을 받아 전투 장면을 그리기 시작했다. 베키오 궁전에 있는 대회의실 벽에 애국심을 고취시키기 위한 벽화를 의뢰받은 것이다.


레오나르도는 이때 <안기아리 전투>를 그렸고 미켈란젤로는 그 맞은편 벽에 <카시나 전투>를 그렸다. 시의회가 두 사람에게 작품을 의뢰한 것은 그리스도의 보호를 표방하고 피렌체가 과거에 거둔 군사적 승리를 표현함으로써 국가에 대한 희생을 미덕으로 삼으려는 데 목적이 있었다. 이 의도는 두 대가로 하여금 미학적 경쟁심을 유발시켰다.


레오나르도가 처음 미켈란젤로를 만난 건 1504년 2월이었던 것 같다. 당시 레오나르도는 52살, 미켈란젤로는 29살이었다. 미켈란젤로는 레오나르도의 <안기아리 전투>의 일부를 모사했고 레오나르도는 미켈란젤로의 <다윗>을 모사함으로써 서로의 재능에 존경을 표했다. 하지만 일화에 의하면 미켈란젤로는 자기보다 명성이 높고 사교성도 좋은 레오나르도를 상당히 싫어했다고 한다.

세상에서 가장 인기 있는 그림 <모나리자>

<모나리자>는 서양미술사에서 가장 유명한 작품으로 파리의 루브르 박물관을 찾는 사람들이 가장 보고 싶어하는 작품이다.


이 작품은 레오나르도가 1503~6년에 그린 것으로 1512년 시뇨리의 일원이 된 프란체스코 델 조콘도의 아내 성모 엘리사베타의 초상이다. 조콘도는 실크 교역으로 부자가 된 사람으로, 1495년 몬나 리자라는 과부 리자 디 게라르디니를 아내로 맞았다. 그녀는 아이를 하나 낳고 1499년에 죽었는데 이것이 그녀의 미소 이면에 담겨진 의미가 된 것 같다.


레오나르도는 1503~6년 동안 여러 차례 몬나 리자를 자신의 작업장으로 불러 포즈를 취하게 했는데, 자신의 예술의 비밀과 뉘앙스를 여인의 초상화를 통해 표현한 것 같다.


레오나르도는 몬나 리자를 부드러운 명암으로 조명하면서 배경에 나무, 물, 산, 바다를 그려넣었다. 그녀는 새틴을 단 벨벳 의상을 입었고, 레오나르도는 특유의 기교로 의상의 우미한 주름을 세밀하게 묘사했다. 그녀의 눈빛은 성숙해보이지 않고 입술 가장자리는 잔잔한 바람처럼 스치는 미소로 인해 약간 위로 올라갔는데, 무엇 때문에 미소를 짓고 있는지 관람자들을 궁금하게 만든다.



시스티나 예배당 천장화

놀라운 창조

성기 르네상스를 출범시킨 인물로 평가받는 율리우스는 도나토 브라만테로 하여금 성 베드로 대성당을 재건축하게 했고 라파엘로를 기용하여 바티칸의 집무실을 장식하게 했으며, 1508년에는 미켈란젤로에게 시스티나 예배당의 천장화를 의뢰했다. 미켈란젤로에게 주어진 임무는 예배당 천장 전체를 프레스코화로 장식하는 것으로 매우 큰 작업이었다. 그는 아직까지 그렇게 큰 그림을 그려본 적이 없었을뿐더러 벽이 아니라 높이가 20m도 넘는 높은 천장에 그리는 일이라서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다. 게다가 천장의 형태가 고르지 않아 인물들의 형태를 잡기가 쉽지 않았기 때문에 그는 인물들을 튀어나온 것처럼 그리거나 공간에 따라 간격을 조절해가면서 그려야 했다. 당시 미켈란젤로는 조각이 아니라 그림을 의뢰받은 일을 탐탁치 않게 여겼다. 천장 벽화는 총 세 단계를 거쳐 완성되었다. 첫 번째는 곰팡이가 피어 실패했고, 두 번째는 그가 천장의 절반을 채웠을 때 자금 부족으로 더 이상 진척되지 못했다. 1511년 여름부터 시작된 세 번째 제작 단계에서 완성되면서 그가 이 작업을 완성하는 데는 꼬박 4년이 걸렸다.


미켈란젤로는 부수적 공간에는 어두운 색을 칠해 리듬감을 부여했다. 각각의 공간은 각각의 화면으로 전개되어 동시에 바라볼 수 없기 때문에 긴장하면서 하나씩 바라보게 되지만, 다양한 인물들이 한데 어우러져 통일된 효과를 창출하는 미켈란젤로의 창조 능력에는 놀랄 수밖에 없다. 이는 건축적 구획의 단순함이 강력하게 나타났기 때문에 가능해진 일이다.


그는 하나님의 얼굴을 묘사했고 창세기로부터 창조의 에피소드를 묘사한 후 구약성서를 근거로 인간의 죄악과 예언자들의 활약을 천장 전체에 펼쳐보였다. 그리고 그는 제단쪽 벽면에 <최후의 심판>을 그렸다.



생의 종착지 프랑스로 간 레오나르도

인체의 신비를 밝혀내다

그는 단순히 기계적인 관심에서 벗어나 생의 본질에 관한 유기적 구조에 집중했다. 정기적으로 뼈와 해골 또는 가죽을 벗겨낸 인체를 통해 근육과 신경조직에 관해 연구했다. 피렌체에서 <안기아리 전투>를 위한 습작을 할 때 그의 작업장은 산타 마리아 노벨라 병원 내에 있었다. 그는 이곳에서 인체를 해부하는 것을 직접 볼 수 있었다.


이렇게 그린 인체 묘사가 2백여 점이나 된다. 과학적 가치가 높은 인체의 아름다움을 이렇게 많이 그린 예가 과거에 없었고 이것들은 18세기 말까지 유일하게 가치 있는 자료로 인정받았다. 드로잉에 오류가 있기는 하지만 그는 골상학, 근학, 심장학, 신경학을 발견했다. 인체 내부를 그대로 그린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 줄 안다면 그가 이룬 성과가 매우 값지다는 것을 인정하게 된다.

모두 나누어주고 떠나다 레오나르도의 죽음

레오나르도는 유산 배분을 마지막 글로 남기고 1519년 5월 2일 세상을 떠났다. 바사리에 의하면 레오나르도는 사망하기 전 몇 달 동안 앓았다고 한다. 프랑수아가 그를 방문했고 레오나르도는 겨우 몸을 추슬러서 침대에서 일어나 왕에게 자신의 병과 증세에 관해 설명했다. 그러다가 침묵과 함께 갑작스러운 경련을 일으키자 왕이 그에게 다가가 부드러운 말로 위로하면서 고통을 덜어주려고 했다. 바사리는 그가 왕의 품에 안긴 채 영예로운 임종을 마쳤다고 적었다.



물질로 정신을 창조하다

미완성의 미학

미켈란젤로는 <반항하는 노예>와 <죽어가는 노예>를 제작한 후 네 점의 노예를 더 제작하다가 미완성으로 남겼다. 이들은 1520년에서 1530년 사이에 제작된 것들로 현재 피렌체의 아카데미아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으므로 "아카데미아 노예"라고 부른다.


그는 네 점의 노예를 공들여 제작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1534년 피렌체를 떠나게 되면서 작업을 중단했고 이후 다시 손을 대지 못했다. 이 작품들은 그가 사망할 때까지도 그의 피렌체 작업장에 남아 있었다.


<잠에서 깨어나는 노예>를 보면 균형이 잡히지 않았음을 볼 수 있다. 오른쪽 다리는 들려져 접힌 채 왼쪽 무릎 위에 올려져 있다. 몸무게의 중심을 왼쪽 다리로 잡아야 할 텐데 오른팔과 몸이 오른쪽으로 기울어져 있어 왼쪽 다리로서는 그 무게를 지탱할 수 없어 보인다. 조각을 완성시켜 세우기보다는 릴리프처럼 현재의 상태로 남겨두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흥미로운 점은 다른 부분들은 거친 상태로 남겨두었으면서 몸통은 매끈하게 연마한 점이다. 어쩌면 그는 다듬지 않은 부분과 다듬은 부분의 심한 대조를 보여주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건축가 미켈란젤로

로렌티안 도서관

미켈란젤로는 메디치 예배당을 건립하는 동시에 클레멘스 7세의 의뢰로 로렌티안 도서관을 디자인했다. 이 도서관은 메디치 가가 산 로렌초에 기증한 도서들을 보관 열람하기 위해 1524년경부터 건립하여 1534년에 완공되기 시작했다. 이 건축물은 메디치 예배당의 수도원 건물 위쪽에 세워졌고 전체 작업은 미켈란젤로가 피렌체를 떠난 뒤 책임을 맡은 바르톨로메오 암마나티에 의해 1559년 완성되었는데 창문과 바닥을 제외하고는 모두 미켈란젤로의 의도대로 완성되었다.


미켈란젤로는 건물 내의 가구들을 디자인 전반의 필수적인 요소들로 보았다. 독서용 책상들은 방의 단순한 기하를 반복하면서 정열되어 있고 벽에 필수적인 조화의 요소가 된다. 가지런한 벽은 책상들의 정열과 아우러져 기하적 반복의 미를 지니게 되며 벽면 장식 기둥들은 책상들과 평행을 이루며 달린다. 책상은 두 사람이 함께 사용할 수 있게 디자인되었고 커다란 돌로 틀을 짠 창문에서 들어오는 빛이 독서하는 사람의 어깨 위로부터 내려와 펼친 책을 비추게 된다. 이 도서관은 정사각형/직사각형/삼각형으로 기하적으로 디자인되었는데, 세 가지 형상은 인간의 배움과 지혜를 상징한다.

조각가 미켈란젤로

헤라클레스

1528년 혼란한 피렌체를 떠났다가 설득에 의해 다시 돌아온 미켈란젤로는 피렌체의 시의회로부터 베키오 궁전 앞에 있는 <다윗>과 한 쌍을 이룰 만한 작품으로 거인 카쿠스를 무찌른 헤라클레스 제작을 의뢰받았다. 하지만 미켈란젤로는 율리우스 2세의 무덤 장식을 비롯해 메디치 가의 산 로렌초 성당의 작업을 미뤄둔 상황이었기 때문에 제작을 기피했다. 그러다 1528년 그는 <헤라클레스와 카쿠스>를 테라코타로 만들었지만 대리석으로는 제작하지 않았다. 이것은 나중에 바치오 반디넬리에 의해서 제작되었는데, 그는 자신의 방법으로 제작하지 않고 미켈란젤로의 방법으로 제작했다.


웅크린 소년

<웅크린 소년>은 미켈란젤로가 1530년경부터 제작하기 시작해서 미완성으로 남긴 작품이다. 메디치 예배당의 무덤을 장식할 목적으로 제작했다가 완성시키지 못한 것 같다. 대리석으로는 아예 깎지도 못했지만, <강의 신>과 이것을 보면 그의 창조력이 매우 풍부했음을 알 수 있다. 이 조각은 무덤 한쪽 기둥 위의 수평부를 장식하기 위해 제작한 것으로 추측되는데 현재 모스크바의 에르미타주에 소장되어 있다.


종교와 미술

드로잉의 새로운 역사_예술의 한 장르가 된 드로잉

토마소 데 카발리에리와 비토리아 콜로나는 미켈란젤로의 가장 가까운 친구들이다. 콜로나는 페스카라의 후작 부인이며 카발리에리 역시 로마의 귀족 출신이었다. 미켈란젤로는 1538년 이후 그녀의 친구가 되었고 콜로나가 중심이 된 모임을 통해 열성적인 가톨릭 개혁파들과 만나기도 했다.


미켈란젤로는 카발리에리와 콜로나를 위해 드로잉하여 하나의 작품으로 완성시켰으므로 드로잉 역사에 새로운 국면을 맞게 했다. 그의 드로잉은 매우 정교해서 완성도를 인정한 수집가들은 다투어 수집하려고 했다.


비토리아 콜로나는 시인이었다. 미켈란젤로는 그녀의 작품에서 영감을 받아 열렬한 종교적 시를 지어 몇 점의 드로잉과 함께 그녀에게 선물했다. 미켈란젤로가 그녀를 위해 드로잉한 것들 중에는 단테에게 고마움을 표시하면서 그린 <피에타>도 포함된다. 그의 드로잉은 사람들에게 매우 호감을 주었고 프린트물, 그림 등으로 만들어져 널리 보급되었다.


스스로 존재한 예술가_미켈란젤로의 타계

1564년 2월 14일 미켈란젤로는 뇌졸중을 일으켰다. 18일 늦은 오후, 그는 89세 생일을 보름 앞두고 세상을 떠났다. 추기경 살비아티가 임종식을 거행했으며 친구 몇 명이 그의 마지막 모습을 보았다.


미켈란젤로는 여느 예술가들과 달리 자신의 작업장을 갖고 미술사업에 뛰어들지 않았다. 그렇지만 그는 한시도 작업에서 손을 뗀 적이 없었다. 레오나르도와는 달리 그는 정치에 깊이 관여하지 않고 오로지 창작에만 몰두했다. 이런 점이 예술가로서 그를 서양미술의 최고 규범이 되게 했다. 피렌체 예술가들의 존경을 한 몸에 받았던 그는 어떤 문화적인 전통에도 속하지 않고 자연의 힘처럼 스스로 존재했다.


예술론이나 비평이 거의 부재한 중세는 예술적 자의식과 기술의 성취 사이에 거리가 있었다. 하지만 미켈란젤로의 확고한 직업 예술가적 자의식이 성기 르네상스의 주요 특징 중 하나로 나타나게 했다. 그는 예술가이면서 이론가였다. 그가 즐겨 사용한 말은 "나는 확고한 의견을 갖고 있다", "나는 나 자신에 모순되지 않는다", "나는 내 본래의 의견을 유지할 것이다" 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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