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퀀텀리프
 
지은이 : 임춘성
출판사 : 쌤앤파커스
출판일 : 2018년 11월




  • 퀀텀’은 물리학 용어 ‘양자역학’의 ‘양자’이고, ‘리프’는 도약. ‘퀀텀리프’는 양자적 도약, 불연속적이고 비약적인 도약을 뜻한다. 산업의 시대 끝자락과 무언가 새로운 시대의 앞자락에 끼어 “어?!” 하고 있는 우리에게 이 책은 “자네, 왜 거기서 그러고 있는가?” 하며 소매를 잡아끈다. 그리고 지금까지 없던 세상에서, 폭발적으로 성장하는 부, 권력, 지식이 어디로 가고, 누가 그것을 움켜쥐었으며, 그 비결이 무엇인지를 보여준다. 


    당신의 퀀텀리프


    당신은 퀀텀리프 해야 한다

    인생은 직선이 아니다

    시간은 하루하루, 1초 1초 차분히 연속적으로 흐르지만, 우리의 시선과 마음, 몸과 몸무게, 생각과 신념이 꾸준히 연속적이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갑자기 통째로 흔들리는 엄청난 변화의 순간, 그 순간이 지나면 다시는 이전으로는 돌아갈 수 없을 정도로 변화의 골은 넓고 깊습니다. 우리는 끊어져버린 골의 앞과 뒤를 잇는 것을 포기해야 합니다. 인류의 역사도 연속적이라 하기는 어려워 보입니다. 불을 발견하고, 농사를 짓고, 무기ㆍ활자ㆍ컴퓨터ㆍ인터넷을 발명하고…. 이러한 엄청난 대변혁까지는 아니더라도 역사적인 사실들은 기실 이전과는 판이하게 다른 불연속성들을 기록한 것이라 하겠죠.


    그러나 기나긴 역사의 지평선을 한눈에 보지 못하는 우리네의 시선과 마음에는 연속성이 그득합니다. 한 번씩 터지는 엄청난 사건으로 개인의 인생과 사회의 통념이 뒤흔들리는 것을 목격하지만, 대부분의 나날들은 그저 묵묵히 직선처럼 흘러갑니다. 그래서 너무도 당연히 어제 같은 오늘이, 오늘 같은 내일이 될 것이라 판단하고, 세상은 그저 어제, 오늘, 내일, 모레…, 그냥 1, 2, 3, 4와 같이 흘러 갈 거라 예측하는 것입니다.


    최고의 남자

    포드자동차가 세상에 등장할 당시 굴지의 미시간저축은행 회장은 “자동차는 일시적 유행이다.”라 말하며 투자를 거부합니다. 웨스턴 유니온은 전화기를 ‘본질적인 가치가 없는 물건’으로, 20세기 폭스 사는 TV를 ‘사람을 피곤하게 만드는 합판상자’라 평가했습니다. 인공지능의 이름으로 붙여질 정도로 추앙받는 IBM의 왓슨 회장은 1943년에 “컴퓨터는 앞으로 전 세계에 5대 정도만 존재할 것이다.”라고 망언했으며, IBM은 또 1959년에 “복사기와 같은 기계의 전 세계 수요는 최대 5,000대 수준”이라며 제록스 설립자의 제안을 거절합니다.


    1964년 미국에서 ‘최고의 남자’라는 영화가 제작됩니다. 이 영화의 극중 주인공은 대통령. ‘최고의 남자’인 주인공 대통령의 역할을 맡을 영화배우를 찾던 캐스팅 전문가들은, 물망에 올랐던 영화배우 도널드 레어건을 뜯어보고 평합니다. “레이건에게는 단 1인치도 대통령의 풍취를 느낄 수 없다.” 하지만 레이건은 이후 8년간 대통령으로 재임했고, 현대 미국인이 가장 사랑하는 대통령의 전형이 되었습니다.


    도대체 왜 그랬을까요? 명색이 전문가라 하는 사람들이 왜 그랬을까요? 왜 그처럼 바보 같은 판단을 했을까요? 그들은 ‘1, 2, 3, 4’ 했기 때문입니다. 어제 같은 오늘, 오늘 같은 내일이 온다고 생각한 거죠. 그렇지만 세상은 어느 시점부터인가 그리 차분하거나 평탄하지가 않습니다. 처음에는 얼추 비슷합니다. 1, 2, 4… 그러다가 8이 되고 16이 됩니다. 다음은 100, 1000, 1만… 이렇게 되고요. 마치 직선으로 흐르는 듯 보이다가, 어느 순간부터는 미친 듯이 변합니다. 연속적인 흐름이 급작스레 불연속적인 변화가 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은 과거의 흐름과 경험에 필요 이상으로 집착합니다. 일상의 다반사가 늘 변함없을 것이라 생각하지만, 변함없다가도 일순간 엄청난 변곡을 맞이하는 게 인생과 세상의 법칙이건만, 그러하다는 것도 본능적으로 인지하고 있건만, 집착하고 안주하게 됩니다. 변곡점을 맞이하기 전의 평온함과 차분함에 지나치게 익숙해진 것이겠죠.


    당신이 믿고 있는, 믿지 않아야 할 얘기들

    인간은 200만 년이나 수렵과 채취로 연명했습니다. 그러다가 곡물을 재배하기 시작하며 1만 년의 ‘농업의 시대’를 지내왔고, 기계화와 함께 ‘산업의 시대’에서 또 200년을 보냈습니다. 우리 모두는 그 산업의 시대를 살아왔습니다. 산업의 시대에서 태어났고, 자랐고, 배웠고, 일해 왔습니다. 그래서 그렇습니다. 여러분이 아무리 독창적이고 창의적이고 때론 혁신적이라 해도, 다 거기서 거기입니다. 인류가 201만년을 살면서 그리고 200년의 산업시대를 지나오면서, 하필이면 우리는 지금 변곡의 시기에 도착했습니다. 지금까지의 경험으로는 앞으로의 시대를 결코 예측할 수 없는 변곡점에, 우리는 처연히 서 있습니다.


    산업시대에서 우리들의 사고를 세뇌시킨 두 사람이 있습니다. 아담 스미스는 <국부론>에서 ‘개인의 악덕이 공공의 미덕’이라 합니다. 쉽게 말하자면 ‘나만 잘 먹고 잘살면 된다.’입니다. 그래도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 시장과 공공이 발전하다는 뜻이죠. 자기계발서의 원조라 할 수 있는 새뮤얼 스마일스의 <자조론>에서도 강조합니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 이 또한 개인의 이기적 성공노력에 정당성을 부여한 것이죠.


    맞습니다. 내가 열심히 해야죠. 그러나 무조건 맞는 얘기 입니까? 세상이 다 거기서 거기이고, 세상의 변화라고 해봐야 역시 거기서 거기인 시절에는 그랬겠죠. 그러나 이제는 아닙니다. 여러분의 독보적인 실력이 이전과 다른 게 아니라, 달라진 것은 주위와 주변입니다. 모든 것이 연결되는 초연결 시대가 아닙니까. 여러분보다 우월하고 여러분의 기업보다 탁월한 조직은 세상에 많습니다. 그래도 다 자기 하기 나름이라고요? 정녕 요즘 같은 세상에도 통하는 얘기인가요? 도대체 지금이 어떤 세상인데 아직도 이러한 발상에 머물러 있나요?


    티끌은 티끌, 거름은 거름

    어떤 부자들은 말합니다. 근검절약하라고, 티끌을 모으라고, 한 푼 두 푼 모으는 저축정신을 강조합니다. 하지만 그렇게 모아서 부자가 되는 시절은 끝났습니다. ‘티끌 모아 티끌’이라는 말, 그저 웃고 넘기기에 씁쓸합니다. 안 쓰고 모은 돈으로, 그 돈을 활용하여 정작 부자가 되는 사람은 다른 사람들입니다. 중요한 건, 우리의 티끌이 없다면 그들의 태산도 없다는 것이죠. 그래서 그들은 우리에게 외쳐댑니다. 근검절약과 저축정신을. 앞에서는 외치면서 뒤로는 비웃는 꼴이라고나 할까요.


    앙리 마티스의 간결하지만 강렬한 작품 ‘이카로스’는 하늘을 나타내는 파란색 바탕을 검은색 사람의 형체가 가득 채우고 있습니다. 태양에 가까이 올라가면 밀랍이 녹을 것이라는 경고를 무시해서 결국은 추락해 죽은 신화 속 인물이죠. 마티스의 그림에 떨어지고 흩어진 노란 별무늬로 표현된 날개, ‘이카로스의 날개’라 부릅니다. 지나친 과욕을 경계하라는 상징적 용어로 인용됩니다. <주역>에도 이와 비슷한 문장이 있습니다. 항룡유회亢龍有悔, ‘끝까지 올라간 용은 후회한다.’는 뜻입니다. 적절히 멈출 줄 알고 적당히 만족할 줄 알라는 것이겠죠.


    옳은 말입니다. 그러나 적절히, 적당히…, 도대체 얼마만큼이 적절하고 적당한 거죠? 평안하고 완만했던 시기, 그런 시절에는 적절히 적당히 조절하는 것이 가능했습니다. 그러나 급경사의 내리막길에서는 그럴 여유가 없습니다. 그저 달려야죠. 그런 순간, 조절하고 조정하는 방법은 오직 중심을 잡고 전진하는 것뿐입니다.


    부와 권력이 허망하다지만, 그 실체가 허상이라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마치 바닷물처럼 마시면 마실수록 더 목마른 것, 그것이 부와 권력의 본질이니 끝이 없습니다. 부와 권력에 대한 욕심이 끝이 없다고 일갈하기보다는, 부와 권력 자체가 끝이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어느 정도의 부와 권력이 쌓이면 더 많은 기회가 펼쳐집니다. 그 기회와 상황이 속도를 높여주고 급경사를 만듭니다. 그러면서 기하급수적인 성장을 만들어냅니다. 지금 세상의 변화의 양상은 절대 평안하지도 완만하지도 않습니다. 이카로스와 항룡유회는 우리를 제치고 저만치 달려 나가는, 그리하여 계속계속 하늘 높이 올라가는 부자와 권력자들이 한 번씩 뒤돌아보며 우리에게 외치는 격언이라는 것을요.



    부의 퀀텀리프

    부의 실체-욕망의 자유

    욕망과 자유

    부의 실체와 본질은 인간의 욕망 언저리에 있습니다. 아니, 인간의 욕망 깊숙한 어딘가에 부의 본질이 있다고 표현하는 게 더 적합하겠군요. 부는 돈이 아니며, 돈은 그저 돈일 뿐입니다. 부의 실체를 만지작거리고, 부의 실존인 돈으로 보의 도약을 만들어내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결국 돈이 아닌 인간 스스로에게서 부의 본질을 찾아야 합니다.


    부를 얻고자 하는 욕망, 부를 얻었다고 만족하는 욕망의 기준은 결국 우리 인간의 문제입니다. 더불어 우리와 똑같은 바람으로 똘똘 뭉친 인간들이 모여 있는 사회에서, 상대방과의 관계, 이해관계자와의 상호작용, 상호 간의 욕망…, 이러한 것들을 이해하고 때론 십분 활용하는 것이 중요하지 않겠습니까?


    인간의 자유란 본인의 선택이고, 선택은 그에 따른 권리와 의무를 포괄합니다. 부를 통해 욕망의 권리를 주장하고, 또 욕망의 의무를 책임집니다. 그리하며 얻어진 욕망의 자유, 욕망을 채우고 책임지는 자유가 바로 부가 아니면 무엇일까요? 욕망과 자유, 인간으로서 절대 포기할 수 없는 것 아닙니까? 욕망의 존재로서 욕망의 사회를 살아가는 이기적인 자유인인 우리의 실체를 받아들이는 순간, 부의 실체와 본질 역시 너무도 당연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것 아닐까요?


    부의 엄청난 도약, 부의 퀀텀리프를 이루기 위해 무엇보다도 먼저 들여다보고 또 다잡아야 할 것은 바로 우리의 마음가짐입니다. 결국 마음먹기 나름이고, 생각하기 나름이라는 말입니다.


    부의 실제-평균의 종말

    지금부터 무한세계

    부는, 지금 세상의 부는, 평균의 관점과 평범한 시각에 머물러서는 결코 살펴보기 어려운 실제입니다. 부가 생성되고 통용되고 축적되는 모든 과정이 지금까지와는 다릅니다. 부의 실제는 무한한 것이 되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돈이 실물이 아니라면 돈의 양은 무한합니다. 그 돈으로 이룰 수 있는 부도 무한하고요. 돈과 부의 속성이 무한함을 알게 된 순간. 알아채야 합니다. 부에 있어서 더 이상 ‘평균으로의 회귀’는 없다는 것을. 아니, 아예 ‘평균’이라는 것 자체가 없다는 것을. 최대치가 없는데 무슨 평균이 존재한답니까?

    부는 욕망의 소산이고, 원하는 것을 얻는 자유라 했습니다. 인간이 원하여 돈으로 구매하는 상품도 무한의 모습으로 치닫고 있습니다. 디지털은 눈에 보이지 않는 것에 가치를 입혔습니다. 한정된 자원으로 한정된 상품을 제조하던 유한세계 너머로, 무한정한 디지털 자원으로 무한정한 디지털 상품을 찍어내는 무한세계를 보여준 것입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무한한 상품이, 눈에 보이는 유한한 상품보다 값어치가 높아지고 있습니다. 디지털 경제와 지식경제를 같은 맥락에서 혼용하고 있는 이유는, 디지털 환경에서는 무형의 지식이 최고의 가치이기 때문입니다.


    무형의 돈이 무한합니다. 그 돈으로 사고자 하는 상품도 무형이고 무한합니다. 지금 세상의 부의 실제는 단연코 무형이자 무한입니다. 새로운 시대와 새로운 부의 법칙 속에서는, 평균을 떠올리는 평범한 이들에게 욕망의 자유란 없습니다. 평범에 안주하고 평균에 의지하는 시대는 끝났습니다. 가히 ‘평균의 종말’입니다. 요즘 같은 시기를 일컫는 용어 중에 ‘뉴노멀 시대’라는 말이 있죠. 기존과는 전혀 다른 양상의 평균의 시대라는 얘기인데, 굳이 ‘뉴’라는 수식어를 붙여 기존의 시각을 연명하려는 시도는 아쉽습니다. ‘뉴노멀은 낫노멀이다’로 받아들이면 어떨까요.



    권력의 퀀텀리프

    권력의 실체-관계의 욕망

    ‘권력’ 하면 대개는 뭔가 좋지 않은 어감입니다. 탐욕스럽기도 하고, 왠지 일반일과는 관련 없는 일부, 특히 정치인의 어휘로 생각되죠. 심지어 폭력을 떠올리는 사람들도 있더군요. 민주주의가 꽃핀 지금에도 역시 권력에 대한 인식은 그리 긍정적이지 않습니다. 아직도 정당하지 않은 권력자들이 적절하지 않은 권력을 행사하는 것을 자주 보니까요.


    그러나 그렇게만 생각할 일이 아닙니다. ‘권력’은 억울합니다. 권력의 실체와 본질은 꼭 나쁘다고만 할 수 없는데요. 누구나 내심 원하면서 누구도 선뜻 원한다고 말하기 어려운 게 권력입니다. 그러니 권력의 입장에서 보면 이러한 이중적인 대접이 억울하고 못마땅할 것 같습니다. 앞 장의 부와 마찬가지로, 권력의 본질을 이해하려면 권력을 다루고 대하는 우리 인간에게서 출발해야 합니다. 애꿎은 권력이 아닌 우리와 우리의 생각이 관건입니다.


    권력은 관계 어디에나

    권력이 저와 여러분, 특별하지 않은 우리 모두의 문제라는 사실을 인정해야 합니다. 사회적 관계에서 자신을 관철시키고 보다 나은 미래를 바라는 것은 인간으로서 자연스런 욕망입니다. 이렇듯 권력이 우리 모두의 ‘관계의 욕망’이라는 사실을 인정하는 순간, 권력에 가까이 다가가는 길이 보입니다.


    여기서 기억해둘 만한 포인트는, 우리가 권력의 실체를 일부 사람들에게만 해당되는 절대적인 무엇으로 제한하면 할수록, 권력에 대한 우리의 인식이 부정적으로 흐른다는 것입니다. 차라리 권력을 ‘영향력’ 이라 해석하면 어떨까요? 다수의 학자들은 권력과 영향력이 다르다고 합니다. 저도 그렇게 생각하고요. 그래도 권력을 영향력이라 불러보자고 한 이유는, 권력에 드리워진 지나치게 어두운 면을 걷어내기 위함입니다.


    권력은 우리 모두의 욕망입니다. 인간이 사회적 동물이고 사회적 관계로 살아가는 존재이니, 인간의 본연적인 욕망은 모든 관계에 번져 있습니다. 그 관계의 욕망, 그것이 권력의 실체이니 더 이상 부정할 것 없습니다.


    권력의 실제-책임의 종말

    관료제가 몰락한 이유

    이렇게 사회적, 정치적, 경제적으로 철갑을 두르고 중무장한 관료제가 흔들리기 시작합니다. 신이나 왕은 원체 범접하기 어려운 존재니까 그들의 권력은 그러다 치더라도, 따지고 보면 우리와 크게 다르지 않은 범인 관료들의 권력이 꼴사나울 때가 적지 않은 것이죠. 국가는 국민을, 기업은 직원을 위한다고는 하지만 불친절한 공무원과 오만한 경영자가 지천입니다. 감정의 문제만은 아닙니다. 조직의 효율성을 외치며 자리 잡은 관료제에 비효율성이 팽배해져갑니다. 일을 위해 존재하는 자리가 아니라 권력 자체를 위해 존재하는 자리입니다. 비대한 조직에는 태만한 관료가 넘칩니다.


    규모 키우기에 급급했던 관료제가 이렇게 저렇게 공격을 받습니다. 강력한 한 방에 휘청휘청하고 있습니다. 그 한 방은 바로 인터넷입니다. 인터넷으로 권력은 우리가 직면한 실제의 모습으로 환골탈태하게 됩니다. 인터넷은 사람과 사람을 무차별하게 연결합니다. 연결한다는 것, 연결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독재자는 국민들이 서로 소통하는 것을 금합니다. 일부에게 권력이 편중된 사회에서 특권층 혹은 중앙집권 조직은 대다수가 끼리끼리 연결되는 것을 두려워합니다. 이런저런 다른 이유도 있겠지만, 인터넷을 통한 소통과 연결 덕분에 관료제, 관료의 사회는 끝났습니다.


    모두에게 ‘권력’이라 불리고 다뤄지는 권력은 이미 노쇠한 권력입니다. 진실로 강력한 권력을 우리는 권력이라 부르지 않습니다. 그저 당연하게 받아들이기 때문이죠. 굳이 그 권력이 이렇다 저렇다 왈가왈부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당연했던, 너무도 자연스러웠던 권력은 신에게서 왕으로, 왕에게서 관료로 오다가 이제 우리 개인에게로 왔습니다. 민주주의가 그러한 사상을 가져다주었다면, 인터넷이 그러한 실상을 가져다주었다고 할 수 있겠네요.



    지식의 퀀텀리프

    지식의 실체-자유의 관계

    상대적이고 관계적인

    사람은 누구나 처한 상황과 주어진 여건에 따라 다른 입장을 취합니다. 우리는 지식인을 대단한 사람으로 여기는 경향이 있지만 대단한 사람이기 전에 먼저 사람입니다. 사르트르는 <지식인을 위한 변명>에서 ‘지식인은 항상 진리의 편에 서야 하나 사회적ㆍ경제적 독립성을 확보하지 못해 권력과 부에 의지해야 하는 존재’라 단언합니다.


    지식은 시대의 대세와 추세를 지지하고, 지식인은 후원세력의 입장을 지원합니다. 세상의 옳고 그름과 맞고 틀림을 정하는 것이 지식과 지식인의 역할이라지만, 지식은 시대에 따라 재구성되고, 지식인은 후원세력에 따라 지식을 재고합니다. 지식인의 책무는 ‘중대한 의미를 갖는 문제에 대한 진실을 대중에게 알리는 것’이라 합니다.


    지식은 자유라 했지요. 절대적인 진리를 추구하는 인간에게 지식은 자유를 의미합니다. 인식과 이해를 하게 하고, 판단과 선택을 하게 합니다. 그것이 곧 자유죠. 그런데 그 지식이 상대적입니다. 사회속의 관계에 따라, 인간 간의 관계에 따라 다르고 달라지는 것이 지식의 실체입니다. 이러한 지식이 상대성, 관계성을 수긍하는 것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춘원 이광수. 한국 최초의 근대 장편소설 <무정>을 썼으며, 한때는 독립운동가로서 근대 한국의 지식인을 대표했던 그가 친일파였다니…. 어린 나이에도 수차례 아끼며 읽었던 <흙>의 저자인 그가 변절자였다니…. 그 사실을 알고 믿기지가 않았습니다. 반전이었습니다. 그러나 또 다른 반전은 이만큼 살아온 후에 찾아옵니다. 과연 내가 그를 욕할 수 있을까? 정녕 그와는 다르게 진정한 지식인이 될 수 있었을까? 지식의 실체, 지식인의 실체, 그리고 명색이 지식인으로 살아온 저 개인의 실체에 대한 되물음만 남습니다.


    지식의 실제-정답의 종말

    산더미처럼 쌓인 정답

    신과 철학자의 질문은 우리를 사고하게 합니다. 사고해서 스스로가 질문하게 만듭니다. 질문이 부족한 사고에 창의성은 깃들지 않고, 질문이 사라진 학교에 창의적 교육은 싹트지 않으며, 질문이 억제된 회사에 창의적 신사업은 엿보이지 않습니다. 자유를 추구하는 지식입니다. 자유의 관계를 펼쳐보는 지식의 실체입니다. 정답을 강요받고 절대적이지 않은 지식인의 절대적이지 않은 지식을 강요받는 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무한한 디지털 세상이자 무한한 지식의 시계입니다. 너무 많은 지식이 너무 많은 융합으로 확장됩니다. 너무 많은 경우가 너무 많은 경우의 수로 확산됩니다. 인류가 하나둘 발견하고 발명해, 하나둘 정답을 알아가던 시대가 이제는 아닙니다. 발견하고 발명한 것들이 통합하고 융합해 이럴 수도 있고 저럴 수도 있어졌습니다. 지금은 그러한 시대입니다. 정답이 없는 시대. 지식의 실제는 정담의 종말입니다.


    지식의 퀀텀리프는 바로 ‘정답의 종말’을 인정하는 것으로 시작됩니다. 지식이 산재하듯이 답도 산재합니다. 답이 산재한다면 그 답들은 이미 우리가 기대한 정답이 아니겠지요. 지식과 지식인이 절대적인 존재가 아니라는 사실에서, 지식의 상대성과 관계성을 알았습니다. 산재하고도 상대적인 지식을 확보하고 습득하는 방법은, 정답에 목매지 않고 집착하지 않는 데서부터 출발합니다.



    부, 권력, 지식, 그 영원한 트로이카

    서로 의지하고, 서로 정당화해주는

    욕망의 자유, 관계의 욕망, 자유의 관계

    부와 권력부터 살펴보죠. 그동안 권력이 부를 앞질러 있었으나 지금은 부에 따라잡히고 있습니다. 신흥부자는 권력자를 존경하지도, 무서워하지도 않습니다. 지나친 정경유착이나 불법탈세로 부를 거머쥔 일부 구시대의 부자들이나 권력자를 두려워하지, 신흥부자들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들은 제도의 후원을 업은 벤처나 대중의 지원을 얻은 스타입니다. 그들은 권력자를 가까이하려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권력자들이 그들에게 가까이 다가가려 합니다.


    반면 요새 부자는 지식을 무척 중시합니다. 부의 모든 근원은 세상 돌아가는 지식이라는 것을 너무도 잘 알고 있어서죠. 지식의 가치를 가장 잘 알고, 지자 혹은 지식인을 제일 환대하는 사람들이 부자입니다. 그렇습니다. 결국 권력보다는 부, 부보다는 지식 순이라는 거죠.


    권력과 지식의 판세가 남았군요. 예측할 수 있다시피 이 승부에서는 권력이 우세합니다. 지식을 가진 자는 자신의 지식을, 자신의 가치를 입증하고 퍼뜨려줄 제도와 시스템이 필요합니다. 물론 제도와 시스템을 만들고 쥐락펴락하는 자는 권력자입니다.


    과거에는 부는 권력에 의지하고, 권력은 지식에, 지식은 부에 의지했었습니다. 이제는 반대방향으로 바퀴가 돌아갑니다. 부는 지식에 의존하고, 지식은 권력에, 권력은 부에 의존합니다. 이렇듯 3마리의 말은 그들의 상호작용을 달리하며 힘차게 앞서거니 뒤서거니 달려가고 있습니다.


    평균의 종말, 책임의 종말, 정답의 종말

    거세게 달리던 부, 권력, 지식의 삼두마차가 일견 멈춘 듯 격변의 혼란을 보여주더니, 이제는 반대방향으로 바퀴가 굴러갑니다. 모든 것이 불확실한, 지금까지 없던 세상으로요. 그렇게 된 계기에는 종말이 있어서입니다.


    부의 세계에는 평균의 종말이, 권력의 세계에는 책임의 종말이, 그리고 지식의 세계에서는 정답의 종말이었습니다. 종말을 맞이한 이것들에게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이들은 확실합니다. 평균은 가운데로 모이니 확실히 보이고, 책임은 소재가 뚜렷하니 확실히 보이고, 정답은 모두가 인정하니 확실히 보입니다. 확실하다는 것은 우리의 인식에 확실하다는 것입니다.


    불확실성의 시대라 하잖아요. 그간에 확실했던 것들이 더 이상 확실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불확실합니다. 불안합니다. 그러나 확실, 불확실도 결국 우리의 인식의 문제이고, 익숙해지느냐 여부의 문제입니다. 우리의 통념과 고정관념의 문제입니다. 변해야 할 때 변해야 합니다. 익숙하고 확실한 것들에게 작별을 고하고, 문을 박차고, 큰 걸음으로 뛰쳐나가야 합니다. 점프, 퀀텀점프, 퀀텀리프, 엄청난 도약을 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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