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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수의 언어를 다시 쓴 남자
- 윌리엄 F. 버클리와 미국의 지적 혁명
이단아의 탄생, 엘리트에서 반(反)엘리트로
윌리엄 프랭크 버클리 주니어(William F. Buckley Jr.)는 1925년 뉴욕에서 태어났다. 그는 부유한 석유 사업가의 아들로 자라, 유럽과 라틴 아메리카를 오가며 다국적 감각을 익혔다. 예일대에 진학했을 때 이미 완벽한 ‘엘리트’의 조건을 갖춘 그는, 이후 그 엘리트 질서에 균열을 낸 ‘지적 반란자’로 거듭난다.
그의 첫 저서 『God and Man at Yale』(1951)은 모교를 정면으로 비판한 폭탄선언이었다. 그는 예일이 “신앙의 자유를 가르치면서 무신론을 전파한다”고 지적했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기독교와 무신론의 싸움은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싸움이며, 개인주의와 집산주의의 투쟁은 그 다른 형태다(The duel between Christianity and atheism is the most important in the world ... and the struggle between individualism and collectivism is the same struggle reproduced on another level)."
이 한 문장은 그의 지적 세계의 핵심을 드러낸다. 그는 신앙과 자유를 결합시켜 좌파적 집단주의에 대항했다. 즉, 자유는 경제적 개념이 아니라 신앙적 책임이며, 신앙은 또한 개인의 도덕적 자유를 보호하는 기둥이었다. 이 이념은 후일 냉전기의 보수주의를 정의하는 사상적 틀로 확장된다.
태넌하우스(Tanenhaus)는 이 시기의 버클리를 "엘리트의 언어로 엘리트를 공격한 반(反)엘리트(The anti-elite born inside the elite world)"로 묘사한다. 그는 지식의 언어를 정복함으로써 지식권력을 다시 배분하려 했다. 이 지점에서 그의 보수주의는 무지의 방어가 아니라, 이성을 통한 전복이었다.
지면과 전파를 장악한 혁명가
1955년, 버클리는 잡지 "National Review"를 창간한다. 표지 머리말은 그의 운동을 상징하는 문장으로 남았다.
“우리는 역사 앞에 서서 멈춰라 외친다(Stand athwart history, yelling Stop)."
그는 당시 미국이 ‘진보’와 ‘역사의 가속’이라는 이념에 매몰되어 있다고 보았다. 그의 보수주의는 과거로의 회귀가 아니라, 속도에 대한 도덕적 저항이었다.
"National Review"는 단순한 잡지가 아니었다. 버클리는 반공주의자, 시장 자유주의자, 종교 보수파를 하나로 묶어 ‘보수 연합’을 만들었다. 그는 “자유의 경제와 도덕의 질서를 따로 놓을 수 없다(Freedom in the market and freedom in the soul cannot be divorced)"고 말하며, 경제와 신앙을 통합하는 사상을 전개했다.
1966년에는 TV 토크쇼 "Firing Line"을 시작했다. 매주 좌파 논객들과 정면으로 맞붙으며, 보수주의의 지성을 대중의 스크린에 올려놓았다. 그는 “상대의 주장을 진심으로 믿는 척하는 건 내 지능을 모욕하는 일이다(I won’t insult your intelligence by pretending you really believe what you just said)"라고 말해 화제가 되었다.
이 발언은 그의 토론 방식을 요약한다. 그는 결코 고함을 지르지 않았다. 대신 우아한 어휘와 날카로운 논리로 상대의 전제를 붕괴시켰다. 그에게 정치란 폭력이 아니라 언어의 전쟁이었고, 진정한 전선은 문화의 심층에 있다고 보았다.
그의 TV 등장은 ‘보수의 대중화’ 이자 ‘보수의 지성화’ 였다. 대중에게는 세련된 보수의 이미지를, 엘리트에게는 논리적 정당성을 부여했다. 그 결과, 20세기 후반의 보수주의는 더 이상 분노의 정치가 아니라, "설득의 언어"를 습득한 운동으로 변모했다.
이념의 세 축, 반공, 시장, 신앙
태넌하우스는 버클리의 사상을 세 개의 축으로 요약한다. "반공주의", "자유시장", "기독교적 도덕질서"다.
냉전의 긴장이 높던 1950~60년대, 그의 반공주의는 이념적 신념이자 문명론적 명제였다. 그는 다음과 같이 경고했다.
“공산주의는 단순한 정치가 아니라, 영혼의 체제다(Communism is not a political system but a system of the soul)."
그에게 자유의 상실은 경제의 문제가 아니라, 인간의 존엄이 붕괴되는 문제였다.
그의 자유시장 사상은 오스트리아학파의 경제철학, 특히 하이에크와 프리드먼에게서 영향을 받았지만, 그는 이를 윤리적 토대로 확장했다.
“시장은 도덕의 시험대이며, 자유는 책임 없이 존재할 수 없다(The market is a moral arena; freedom cannot exist without responsibility)."
이러한 주장은 경제를 넘어 문화적 자유주의와 충돌하면서 보수의 새 정체성을 형성했다.
세 번째 축인 신앙은 그의 정치적 언어의 심장부였다. 버클리에게 기독교는 정치 슬로건이 아니라, ‘자유를 지탱하는 초월적 구조’였다.
“하나님이 없는 자유는 방종이며, 하나님 없는 국가는 의미를 잃는다(Freedom without God is license; a nation without God is lost)."
이 세 요소는 서로 분리되지 않고 결합되어, ‘도덕적 시장경제’, ‘신앙적 개인주의’, ‘문화적 반공주의’ 라는 버클리만의 독특한 보수주의 구조를 형성했다. 그는 정치의 문법을 경제나 이념이 아닌 "문화와 언어의 문제"로 전환시킨 최초의 보수 지식인이었다.
균열과 자성 - 인종, CIA, 그리고 시대의 그림자
하지만 버클리의 보수주의는 완벽하지 않았다. 그는 평생 ‘이성적 보수’를 주장했지만, 그 이념은 종종 시대의 편견과 맞닿았다. 특히 인종 문제는 그에게 가장 큰 도전이었다.
1950년대 남부에서 흑인 분리정책이 여전히 유지되던 시절, 버클리는 "National Review"의 사설을 통해 남부 주의 "질서 있는 사회 유지"를 옹호했다.
“문명은 절대 다수의 감정에 의존해서는 안 된다(Civilization cannot be run at the pace of mass emotion)."
이는 남부 백인의 ‘질서’ 논리를 방어하는 것으로 해석되었다.
그러나 이후 그는 이 입장이 오판이었음을 공개적으로 인정했다.
“우리가 잘못된 방향에서 자유를 변호했다(We defended freedom from the wrong side)."
흑인 인권운동의 정당성을 인정했던 것이다.
태넌하우스는 이를 두고 “그의 사상은 변하지 않았으나, 그가 이해한 인간의 범위는 넓어졌다(His ideas did not change, but his conception of humanity did)."라고 설명한다.
한편, 그의 이름은 종종 CIA와 연결된다. 그는 예일 시절부터 정보기관과 가까웠으며, 냉전기에는 ‘지식인의 정보전’에 적극 참여했다. 버클리는 이를 숨기지 않았다.
“지식은 무기이며, 정보는 자유의 방패다(Knowledge is a weapon; information is the shield of liberty)."
그에게 보수주의는 단순한 정치가 아니라, 문명 수호를 위한 첩보전의 연장이었다.
이런 행보는 그가 지향한 "보수의 순수성""을 흐리게 만들었다. 그러나 태넌하우스는 이런 모순이야말로 버클리를 "도덕적 고뇌를 지닌 보수주의자"로 만든다고 평가한다. 즉, 그는 권력의 실용성과 신념의 이상 사이에서 끊임없이 흔들리며, 결국 그 긴장 자체가 그의 사상의 본질이었다.
레이건의 시대, 버클리 사상의 정치적 결실
1980년대 로널드 레이건의 등장은 버클리가 꿈꾸던 ‘보수의 정치적 혁명’을 현실로 만들었다. 레이건은 버클리가 구축한 언어와 도덕의 틀을 대중정치로 번역했다.
“정부가 문제의 해답이 아니라, 문제 자체다(Government is not the solution to our problem; government is the problem)."
이 수사는 버클리의 철학과 정확히 맞닿아 있었다.
버클리는 레이건을 "이념이 아니라 신념으로 말하는 보수주의자(A conservative who speaks not from ideology but conviction)"라고 평가했다. 그러나 그는 동시에 그 정치가 가져올 단순화의 위험을 경계했다.
“우리가 이겼을 때, 가장 큰 적은 우리 자신이다(When we win, our greatest enemy will be ourselves)."
그의 말은 예언처럼 맞아떨어졌다. 1990년대 이후, 보수주의는 대중 포퓰리즘과 종교적 근본주의로 기울었고, 버클리가 중시한 ‘지성의 품격’은 점차 희미해졌다.
태넌하우스는 그를 "보수의 르네상스 이후 몰락을 미리 본 인간(The man who foresaw the decline of conservatism after its renaissance)"이라고 부른다.
버클리 이후의 보수, 트럼프 시대의 그림자
21세기 들어, 도널드 트럼프의 등장으로 미국의 우파는 완전히 다른 얼굴을 가지게 되었다. 버클리가 구축한 지적 보수주의는 대중 분노의 정치로 대체되었다. 그는 생전에 이미 이를 감지하고 있었다.
“분노는 정치가 될 수 없다. 분노는 문명을 파괴한다(Anger cannot be politics. Anger destroys civilization)."
버클리는 대중을 경멸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감정이 이성을 대체하는 순간, 보수주의는 자멸한다’는 점을 명확히 경고했다.
태넌하우스는 “트럼프 이후의 보수주의는 버클리의 반대편에 있다(Post-Trump conservatism stands opposite to Buckley’s vision)고 말한다. 버클리가 추구한 것은 품격 있는 논쟁, 언어의 질서, 그리고 지성의 품위였다. 오늘날 그 자리를 대신한 것은 분노, 선동, 그리고 알고리즘이다.
그의 시대의 언론은 펜과 토론이었지만, 지금의 시대는 해시태그와 유튜브다. 버클리의 문장은 지면을 통해 설득을 추구했지만, 현대의 정치 언어는 클릭을 추구한다. 이러한 변화 속에서, 버클리의 보수주의는 마치 고전음악처럼 잊혀졌으나, 동시에 ‘잃어버린 품격의 표준"으로 남아 있다.
유산과 현재적 의미, 보수의 윤리를 다시 묻다
버클리가 남긴 가장 큰 유산은 ‘보수주의는 품격을 잃지 않아야 한다’는 신념이었다.
“지식은 인간을 분열시키지만, 교양은 인간을 화해시킨다(Knowledge divides men, but culture reconciles them)."
이 말은 오늘날의 정치에도 울림을 준다.
그는 보수를 단순히 진보의 반대편으로 두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보수는 문명의 자기방어이며, 진보는 문명의 실험’이라 정의했다.
“우리가 방어하지 않으면 문명은 무너지고, 우리가 실험하지 않으면 문명은 정지한다(Without defense, civilization collapses; without experiment, it stagnates)."
그의 이러한 균형 감각은 오늘날 한국 사회에도 깊은 통찰을 준다. 한국의 정치 지형 역시 이념의 진영화, 언어의 적대화 속에서 점점 설득의 언어를 잃어가고 있다. 버클리의 사례는 ‘보수’가 단지 체제의 수호가 아니라, "지성의 윤리적 책무"임을 일깨운다.
그는 마지막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문명은 신념으로 유지되지 않는다. 문명은 품격으로 유지된다(Civilization is not maintained by belief. It is maintained by civility)."
이 말이야 말로 그의 일생을 가장 정확히 요약한다.
진보와 보수를 넘어선 품격의 정치
이 책은 한 개인의 전기가 아니라, ‘이념의 문명사’를 탐구한 책이다. 버클리는 보수를 단순한 정치적 태도가 아니라, 문화적 양식으로 만들었다.
“지식인과 시민이 서로를 이해할 때, 자유는 지속된다(Freedom endures when the intellectual and the citizen understand each other)."
그의 사상은 오늘날의 대립적 정치에서 잊혀진 덕목을 복원한다. "보수란 무엇인가?" 그는 답했다.
“보수는 변화를 거부하지 않는다. 다만, 변화를 인간의 존엄으로 통제하려 한다(Conservatism does not reject change; it seeks to govern it with dignity)."
그가 떠난 지 오래지만, 그의 언어는 여전히 미국 보수주의의 양심으로 남아 있다. 그리고 그가 던진 질문은 오늘날의 우리에게도 유효하다.
‘우리는 품격을 잃은 문명을 지킬 수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