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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무기고가 된 세계 경제
한때 경제는 교역으로, 전쟁은 군사로 구분되는 듯 보였다. 하지만 오늘의 세계는 그 경계가 빠르게 무너진다. 관세는 협상의 카드가 아니라 압박 장치가 되고, 제재는 예외적 사건이 아니라 반복되는 정책이 된다. 수출통제와 투자 제한은 기술과 자본의 흐름을 멈추게 하고, 결제망과 보험과 운송은 분쟁의 무대가 된다. 경제는 더 이상 전쟁의 바깥이 아니라, 전쟁이 가장 먼저 시작되는 전면이 된다. 기업은 가격과 수요만 보며 움직이기 어렵고, 국가는 군사력만으로 안전을 보장하기 어렵다. 경제 수단이 전쟁 도구가 되는 순간, 승부는 총성이 아니라 규칙과 경로에서 결정된다.
조용한 전쟁의 제도화
경제 전쟁이 무서운 이유는 소음이 작아서가 아니라 제도화되기 때문이다. 한 번 만든 규정은 오래 남고, 예외는 정치적 거래로만 열리며, 기업은 그 규정을 전제로 공급망과 투자 계획을 다시 짠다. 전쟁이 끝나도 제재 체계는 남을 수 있고, 남은 체계는 다음 갈등의 기본값이 된다. 기본값이 바뀌면 경제의 상식도 바뀐다. 거래는 서로 이익이 되는 교환이 아니라 상대의 선택지를 줄이는 압박이 된다. 기술과 자본의 이동은 효율의 결과가 아니라 허가의 결과가 된다. 시장은 자유롭게 움직이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보이지 않는 벽이 늘어난다. 벽이 늘면 기업은 더 많은 우회로를 만들고, 우회로가 늘면 비용은 예외가 아니라 기본값이 된다.
제도화는 감정의 폭발보다 강하다. 감정은 가라앉을 수 있지만 규칙은 남는다. 기업은 분쟁이 끝나기를 기다리지 못하고, 규칙이 지속된다는 가정 아래에서 구조를 바꾼다. 이렇게 바뀐 구조는 다시 이해관계를 만들고, 이해관계는 규칙을 더 오래 살게 만든다. 경제 전쟁이 자기 강화적으로 굳어지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제재와 통제의 세계에서 중요한 것은 “이번 갈등이 언제 끝나나”가 아니라 “이 규칙이 내년에도 남아 있을 가능성이 얼마나 되나”다. 기업과 국가는 사건이 아니라 체질을 상대로 의사결정을 하게 된다.
불확실성의 성격 변화
시장 불확실성은 통계와 헤지로 관리할 여지가 있다. 금리와 환율은 변동하지만 예측의 범위가 있고 위험 관리의 도구도 많다. 반면 규칙 불확실성은 다르다. 내일 갑자기 어떤 부품이 통제 품목이 될 수 있고, 거래 상대가 제재 리스트에 오를 수 있으며, 결제 경로가 막힐 수 있다. 이 가능성 자체가 투자를 늦춘다. 늦어진 투자는 생산성의 속도를 떨어뜨리고, 생산성의 둔화는 다시 경제 불만을 키운다. 불만이 커지면 정치는 더 강한 통제를 요구하고, 통제가 강해지면 규칙 불확실성은 더 커진다. 위기는 한 번의 폭발보다 지연의 누적으로 경제를 망가뜨린다.
여기에 또 하나가 더해진다. 규칙 불확실성은 불평등하게 작동한다. 대기업은 법무와 컴플라이언스를 갖추고 우회로를 만들 수 있지만, 중소기업은 규칙 변화에 대응할 여력이 부족하다. 결과적으로 시장은 더 집중되고, 집중된 시장은 더 정치화된다. 정치화된 시장은 다시 규칙 변화를 더 자주 낳는다. 경제 전쟁은 단지 거래를 막는 것이 아니라 경쟁의 형태를 바꾸며 산업 구조까지 재편한다. 이때 경쟁력은 기술만으로 결정되지 않는다. 규칙을 해석하는 능력, 규칙 변화에 조직이 반응하는 속도, 그리고 리스크를 비용으로 바꾸는 회계 방식이 기업의 생존 조건이 된다.
공급망의 군사화
공급망은 더 이상 비용 최소화의 회로가 아니다. 핵심 품목은 전략 자산이 되고, 특정 국가에 대한 의존은 안보 리스크로 분류된다. 그래서 기업은 생산지를 옮기는 문제만이 아니라 인증과 규제 준수, 데이터와 보안, 제재 노출까지 함께 계산한다. 공급망 재편은 조립 라인을 옮기는 일이 아니라 계약과 법무와 금융을 포함한 구조 전체를 옮기는 일이 된다. 같은 제품을 만들더라도 “어디에서 만들 것인가”는 비용의 문제가 아니라 노출의 문제로 바뀐다. 노출은 단지 관세율이 아니라, 통제 품목 지정 가능성, 제재 리스트 연동, 금융 결제 차단, 운송 보험의 배제 같은 복합 리스크를 포함한다.
여기서 재편의 속도가 느릴수록 비용은 커진다. 새 공장을 짓는 비용보다 더 큰 비용은 공급의 불안정이 지속되는 기간이다. 기업은 재고를 늘리고, 중복 공급선을 마련하며, 비상 조달망을 만든다. 회복력을 위해 지불하는 비용이 평시의 기본 비용으로 굳는다. 공급망의 군사화는 기술 선택도 바꾼다. 특정 부품이 통제 대상이 되면 대체 기술을 찾는 것이 혁신이 되지만, 그 혁신은 최적 성능이 아니라 통제 회피를 목표로 삼을 수 있다. 표준이 갈라지면 동일 제품을 여러 버전으로 만들게 되고, 그 중복이 비용을 올린다. 비용이 오르면 소비자 물가가 흔들리고, 물가가 흔들리면 정치가 흔들린다. 공급망은 더 이상 기업 내부 문제가 아니라 국가의 안정과 직결된 문제가 된다.
금융망과 결제의 힘
경제 전쟁의 핵심에는 보이지 않는 인프라가 있다. 결제망과 달러 유동성, 신용평가와 보험, 재보험과 해운 계약 같은 영역은 평소에는 잘 보이지 않지만 균열이 생기면 거래 전체를 멈추게 만든다. 금융 인프라는 중립처럼 보이지만 한 번 무기가 되면 중립을 유지하기 어렵다. 그래서 국가와 기업은 기술과 자원의 확보뿐 아니라 결제와 조달 경로의 안정성까지 전략의 일부로 삼는다. 단일 경로에 의존하면 싸게는 갈 수 있지만 위기에는 멈춘다. 여러 경로를 만들면 안전은 커지지만 속도와 비용은 손해를 본다. 경제 전쟁의 시대는 이 균형을 매일 다시 계산하게 만든다.
금융망은 또한 신뢰의 문제를 드러낸다. 제재는 결국 누가 누구를 신뢰할 수 있는지, 누가 누구와 거래할 수 있는지의 선언이다. 신뢰가 무너지는 순간 결제는 지연되고, 지연은 자금 조달 비용을 키우며, 비용 증가는 다시 실물 경제를 압박한다. 그래서 경제 전쟁은 상품과 기술을 넘어 돈의 시간까지 장악하려 한다. 돈이 흐르는 속도가 느려지면 시장은 가격보다 먼저 ‘가능성’을 잃는다. 거래가 성립하는 조건이 수요와 공급의 만남이 아니라, 결제가 가능한 경로의 존재가 된다.
기업 운영의 새 문법
가격 경쟁만으로는 부족해진다. 규칙을 읽는 능력이 전략이 된다. 제재와 수출통제의 신호를 감지하고, 거래 상대의 노출을 점검하며, 대체 경로를 설계하는 역량이 필요해진다. 공급망을 분산한다고 끝나지 않는다. 분산된 공급망을 평시에 유지하는 비용과 위기 때 전환하는 절차까지 포함해 운영해야 한다. 조직도도 바뀐다. 법무와 컴플라이언스가 단순 지원 부서가 아니라 사업 방향을 정하는 핵심 부서가 된다. 무역팀은 관세만이 아니라 제재 리스크를 관리해야 하고, 재무팀은 환율뿐 아니라 결제 가능성을 관리해야 한다. 인사팀은 특정 국가 인력과 협업할 때의 규정까지 이해해야 하며, 연구팀은 기술 선택이 규제와 연결된다는 사실을 전제로 설계해야 한다.
경제 전쟁은 기업을 정책의 장 안으로 끌어들이고, 그 안에서 살아남는 조직의 형태를 다시 만든다. 결국 승패는 “어디에 공장을 두는가”만으로 갈리지 않는다. 규칙이 바뀌는 속도를 읽고, 비용이 기본값이 된 불확실성을 운영 가능한 절차로 바꾸는 기업이 살아남는다. 동시에 국가는 이 새로운 전장에 맞는 안전의 정의를 다시 세워야 한다. 군사적 억지력만이 아니라, 공급망과 금융망, 기술 통제와 산업 역량을 포함한 총체적 회복력이 국가안보의 중심이 된다. 경제가 무기고가 된 시대에는, 위험을 줄이려는 통제가 곧 비용을 늘릴 수 있고, 비용을 줄이려는 효율이 곧 위험을 키울 수 있다. 그 사이에서 기업과 국가는 매일 다시 균형을 계산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