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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Party's Interests Come First: The Life of Xi Zhongxun, Father of Xi Jinping

당의 이익이 우선, 시진핑의 아버지 시중쉰의 삶


The Party's Interests Come First: The Life of Xi Zhongxun, Father of Xi Jinping
    | Joseph Torigian
ǻ | Stanford University Press
    | $57.50
| 2025�� 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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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력의 유전자, 충성의 계보
- 시중쉰과 시진핑이 보여준 중국 정치의 내면

혁명은 끝났지만, 그 언어는 아직 체제의 심장에서 살아 있다. 아버지는 이상을 믿었고, 아들은 질서를 믿었다. 『The Party’s Interests Come First』는 한 부자의 생애를 따라, 중국 권력의 심리적·제도적 연속성을 해부하며 충성이 어떻게 인간의 윤리로 자리 잡았는지를 보여준다.


혁명의 이상에서 체제의 논리로
시중쉰은 혁명의 이상을 품은 세대의 상징이었다. 가난한 농가 출신이었던 그는 인민의 해방을 위해 싸웠으나, 해방의 언어가 곧 통제의 언어로 변모하는 것을 목격했다. 혁명은 그를 영웅으로 세웠다가 이내 반역자로 만들었고, 숙청과 복권의 굴곡 속에서 그는 체제의 냉기를 체득했다.

복권된 뒤에도 그는 자유를 외칠 수 없었다. 개방과 개혁의 선봉에 서면서도, 그가 건넨 말은 언제나 ‘당의 이익’이라는 울타리 안에서만 허락되었다. 자유는 체제가 허용하는 한도에서만 존재했고, 그가 추진한 모든 변화는 결국 체제의 안정으로 귀결되었다.

시중쉰은 끝내 체제 밖으로 나가지 않았다. 이상을 현실로 바꾸려는 의지는 있었으나, 현실은 언제나 이상을 변형시켰다. 그는 믿음의 언어로 출발해 순응의 언어로 귀착한 세대의 초상이었다.

그의 아들 시진핑은 바로 그 모순의 시대를 어린 눈으로 지켜보았다. 숙청의 수모와 복권의 냉소를 경험하며, 그는 아버지가 남긴 이상보다 체제가 작동하는 원리를 배웠다. 생존의 기술이 신념의 자리를 대신했고, 충성이 곧 인간의 품격을 결정하는 새로운 윤리가 되었다.

권력의 기억과 유전되는 충성
토리기안은 권력을 ‘기억의 정치학’으로 읽는다. 권력은 폭력이 아니라 기억의 통제로 유지된다는 것이다. 시중쉰의 고난은 체제의 오점으로 남지 않았고, 오히려 권력의 도덕성을 증명하는 이야기로 재구성되었다.

기억의 통제는 삭제가 아니라 편집의 기술이다. 불편한 진실은 사라지지 않고, 다른 맥락 속으로 옮겨져 의미를 바꾼다. 숙청은 실수가 아닌 교훈으로, 복권은 체제의 관대함으로 변형된다.

이 재구성의 과정에서 부자의 삶은 서사로 엮인다. 아버지의 고난은 국가의 시련으로, 아들의 성공은 국가의 복원으로 치환된다. 가족의 이야기가 국가의 역사로 편입되면서, 권력은 더욱 완결된 형태의 정당성을 획득한다.

시진핑은 이 기억을 표준으로 삼았다. 그는 부친의 실패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 체제의 논리를 자기 언어로 내면화했다. 그에게 충성이란 감정이 아니라 생존의 기술이며, 충성의 기술이 곧 통치의 질서를 유지하는 언어가 되었다.

체제를 재구성한 서사, 시진핑식 혁명
시진핑은 아버지의 혁명에서 교훈을 얻었지만, 그 혁명을 다시 쓰는 방식을 택했다. 그는 단어를 바꾸지 않고 의미를 바꿨다. 마오의 이상주의, 덩의 실용주의, 장·후의 기술관료주의를 하나의 계보로 묶으며, 자신을 ‘혁명의 완성자’로 위치시켰다.

그가 말하는 혁명은 더 이상 변화를 뜻하지 않는다. 그것은 체제를 보존하고 안정시키는 정교한 순환이다. 변화는 관리되고, 관리된 변화는 질서의 이름으로 불린다.

토리기안은 이 과정을 ‘정치적 신화의 자기복제’로 정의한다. 혁명은 더 이상 권력에 도전하지 않고, 권력을 미화하는 언어로 기능한다. 체제는 과거의 실패를 미래의 사명으로 바꾸며, 권력의 역사에 일관성을 부여한다.

시진핑식 혁명은 이 일관성 위에 세워졌다. 그는 속도가 아닌 연속성을, 대립이 아닌 조화를 택했다. 그의 체제는 충성의 감정이 아닌 충성의 구조로 움직이며, 혁명은 이제 순응의 다른 이름이 되었다.

가족, 국가, 그리고 충성의 윤리
중국 정치의 뿌리에는 가족의 은유가 있다. 국가는 아버지이고, 국민은 자식이다. 복종은 도덕으로, 통제는 보호로 번역된다.

시중쉰과 시진핑의 관계는 이 은유를 체현한다. 아버지의 충성은 신념의 행위였고, 아들의 충성은 제도의 언어가 되었다. 부자의 유대는 곧 국가와 국민의 관계를 정당화하는 상징이 되었다.

토리기안은 이를 ‘유교적 권위주의의 정치적 재현’이라 말한다. 국가가 가족의 형태를 띠는 순간, 불복은 무질서로 간주되고, 복종은 윤리의 일부로 포장된다. 지도자는 가장의 위치에서 도덕적 보호자를 자처하고, 국민은 보호받는 대가로 침묵을 선택한다.

이 구조 속에서 권력은 억압이 아니라 질서로, 감시는 불신이 아니라 관리로 보인다. 중국식 권위주의의 지속성은 바로 이 감각의 전환에서 비롯된다. 강제보다 감정이 오래가고, 감정보다 관계가 더 단단하기 때문이다.

충성의 시대, 자유의 그림자
『The Party’s Interests Come First』는 단지 중국의 권력을 다룬 책이 아니다. 그것은 효율과 질서의 시대에 인간이 어떤 선택을 해야 하는가를 묻는다. 시중쉰의 이상은 무너졌지만, 그가 남긴 질문은 여전히 유효하다.

시진핑의 체제는 그 질문에 냉정한 답을 내놓았다. 자유는 불편하고, 효율은 안락하다. 인간은 안락함을 택하고, 그 선택이 반복될수록 체제는 더 완전해진다. 완전함의 이면에는 감시와 자기검열이 자리하지만, 사람들은 그 불편함을 일상의 일부로 받아들인다.

토리기안은 여기서 ‘현대 권위주의의 세련됨’을 본다. 그것은 폭력이 아니라 신뢰의 언어로 다가오며, 시민은 스스로 복종을 계약한다. 감시의 장치는 기술이고, 통제의 매개는 편의다.

이 책은 묻는다. “당의 이익이 먼저인 세상에서 인간의 존엄은 어디에 서 있는가?” 자유는 언제나 비효율적이고, 민주주의는 늘 피로하다. 그러나 그 느림과 피로 속에만 인간의 품격이 존재한다.

시중쉰은 체제 속에서 인간으로 남으려 했고, 시진핑은 인간의 이름으로 체제를 강화했다. 한쪽은 이상으로, 한쪽은 질서로 역사를 썼다. 그러나 둘의 궤적을 잇는 선 위에서 여전히 남는 것은 인간의 기억이다.

기억은 권력의 거울이다. 그것이 왜곡되지 않는 한, 체제는 완전할 수 없다. 토리기안이 말하고자 한 진실은 단순하다. 권력은 유전되지만, 인간의 존엄 또한 유전된다. 그 기억이 살아 있는 한, ‘당의 이익’보다 먼저 오는 것은 언제나 인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