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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을 버는 기계에서 신뢰를 만드는 제도로
기업의 목적은 늘 선언으로 시작하지만, 현실에서는 선택의 방식으로 드러난다. 단기 숫자가 모든 것을 설명하는 것처럼 보이는 시대일수록, 신뢰와 책임 같은 보이지 않는 자산이 기업의 생존을 좌우한다. 21세기의 기업을 둘러싼 갈등을 따라가다 보면, 결국 남는 질문은 하나다.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가.
기업의 목적을 다시 묻는 이유
주주의 것이라고 하면 간단해 보이고, 사회의 것이라고 하면 그럴듯해 보인다. 하지만 실제 세계에서 기업이 작동하는 방식은 이 두 문장 중 어느 하나로 깔끔하게 정리되지 않는다. 기업은 누군가의 소유물처럼 보이면서도, 동시에 수많은 이해관계가 얽힌 제도처럼 움직인다.
21세기의 기업은 공장과 기계만으로 설명되지 않는다. 데이터와 네트워크, 브랜드와 규제, 팬덤과 불신, 글로벌 공급망과 지정학이 한 덩어리로 엉켜 있다. 그래서 기업의 목적을 묻는 일은 경영학의 추상적 논쟁이 아니라, 일자리와 가격과 서비스 품질, 그리고 사회적 신뢰의 문제로 곧장 연결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답을 빨리 내리는 것이 아니라, 질문을 잘 고르는 일이다. 기업이 누구의 것인지부터 따지기 시작하면, 어느 순간 논쟁은 권리의 언어로만 굳어지고, 기업이 무엇을 통해 살아남는지에 대한 설명은 뒤로 밀린다. 목적을 묻는 순간, 시선은 소유의 문장보다 운영의 현실로 이동한다.
"주주가 기업의 소유자인지 따지는 일은 필요조건도 충분조건도 아니다(It is neither necessary nor sufficient to determine whether shareholders are owners of the corporation.)."
이 말이 암시하는 것은 단순하다. 소유라는 단어를 어떻게 정의하느냐에 매달리기보다, 기업이 실제로 누구의 기대와 규칙 속에서 움직이는지부터 보자는 제안이다. 기업은 법과 규제를 통과해 존재하고, 소비자와 노동자와 협력사의 신뢰를 먹고 자란다. 그 관계망 속에서 성과가 만들어지고, 그 성과를 둘러싸고 책임의 언어가 생긴다.
이제 질문은 이렇게 바뀐다. 기업을 움직이는 엔진은 무엇이며, 그 엔진이 망가질 때 기업은 어떤 방식으로 흔들리는가. 그 다음 장면에서 자연스럽게 등장하는 것이 단기 숫자의 유혹이다.
주주가치의 단순함이 만드는 손실
목표를 하나로 세우면 성과도 하나의 숫자로 정리할 수 있다. 숫자가 분명하면 책임도 분명해 보인다. 단기 성과로 조직을 관리하면 속도도 빨라지고, 비교도 쉬워지고, 외부 투자자의 언어와도 맞아떨어진다. 이 유혹이 강한 이유는 단순히 탐욕 때문이 아니라, 단순한 목표가 현실의 복잡함을 잠시 잊게 해주기 때문이다.
문제는 그 단순함이 기업의 실제 경쟁력을 자주 놓친다는 데 있다. 기업의 강점은 손익계산서의 한 줄에서 갑자기 솟아오르지 않는다. 숙련된 사람, 오래 쌓인 거래 관행, 품질을 지키는 습관, 실수를 빠르게 바로잡는 문화 같은 것들이 느리게 축적되며 만들어진다. 숫자로는 늦게 잡히는 것들이고, 늦게 잡히는 것들은 대개 늦게 무너진다.
목표가 단기 숫자에 고정되는 순간, 성장처럼 보이는 선택이 자산을 깎아 먹는 선택으로 바뀔 수 있다. 연구개발을 줄이면 당장 이익은 좋아진다. 인력을 무리하게 줄이거나 쥐어짜면 단기 생산성은 올라간다. 그러나 그 다음 해에 남는 것은 피로와 이직, 기술 부채일 수 있다. 조직이 잃는 것은 비용 항목이 아니라, 다시 만들기 어려운 축적의 속도다.
그래서 목적은 단순한 윤리 문장이 아니다. 숫자로 밀어붙일수록 빨라지는 조직도 있지만, 빠른 조직이 항상 오래가는 조직은 아니다. 단기 숫자의 관리가 반복될수록, 기업은 자신이 무엇으로 버티는지를 잊기 쉬워진다. 그 잊힘이 가장 먼저 드러나는 장소가 평판과 신뢰다.
신뢰와 평판은 어떻게 무너지는가
평판이 흔들린다는 것은 기업의 기술이나 자본이 갑자기 사라진다는 뜻이 아니다. 사회가 기업을 바라보는 렌즈가 달라졌다는 뜻에 가깝다. 이익을 내는 능력만으로는 존중이 따라오지 않고, 잘못을 저질렀을 때의 태도와 위기에서 보여주는 언어와 행동이 기업의 생존에 직접 영향을 준다.
"기업 평판은 지난 20년 동안 여러 차례 큰 타격을 입었다(Business reputation has suffered many blows in the last two decades.)."
평판의 변화는 종종 한 번의 사고로 시작하지만, 실제로는 반복되는 경험의 축적에서 커진다. 고객이 약속을 지키지 않는다고 느낄 때, 노동자가 존중받지 못한다고 느낄 때, 협력사가 공정하지 않다고 느낄 때, 작은 균열은 빠르게 공유된다. 온라인에서는 그 균열이 더 빨리 퍼지고, 더 오래 남는다.
여기서 평판은 감정의 문제가 아니라 비용 구조의 문제가 된다. 신뢰가 사라지면 거래 비용이 올라가고, 감시와 규정과 계약서가 두꺼워진다. 내부에서도 통제 비용이 늘어난다. 결국 기업은 같은 일을 하면서 더 많은 힘을 써야 하고, 그 힘은 혁신에 쓰이지 못한다.
신뢰를 장치로서 바라보면, 기업은 계약의 묶음이 아니라 신뢰를 생산하는 시스템에 가깝다. 납기가 꼬였을 때 서로의 사정을 감안하며 버텨주는 거래 관계, 품질 문제가 생겼을 때 최소 법적 책임이 아니라 약속의 수준에서 대응하는 태도, 내부에서 문제가 터졌을 때 은폐보다 수정이 먼저 나오는 문화가 기업을 살린다. 신뢰는 언제나 선택의 결과이고, 선택은 언제나 목적의 그림자를 가진다.
그렇다면 다음 질문이 생긴다. 신뢰가 흔들리는 시대에 기업이 돈을 버는 방식은 무엇으로 바뀌었는가. 여기서 이익이라는 단어가 단순하지 않게 된다.
이익에서 지대로, 경쟁의 규칙을 다시 보다
기업이 돈을 번다는 말은 늘 같아 보이지만, 돈이 만들어지는 방식은 많이 바뀌었다. 공장 설비를 많이 가진 기업이 강하던 시대도 있었고, 조직의 조정 능력과 브랜드와 네트워크가 핵심이던 시대도 있었다. 21세기에 가까워질수록 가치의 원천은 점점 눈에 잘 보이지 않는 쪽으로 이동해 왔다.
"오늘날 이익이라 부르는 것은 더 이상 주로 자본수익이 아니라 경제적 지대다(what we call ‘profit’ is no longer primarily a return on capital but is ‘economic rent’)."
경제적 지대라는 개념은 흔히 나쁜 이미지로만 소비되지만, 그것이 언제나 착취를 뜻하는 것은 아니다. 남들이 흉내 내기 어려운 조합을 만들고, 그 조합으로 고객이 원하는 것을 더 잘 제공하면 그 차이에서 수익이 생긴다. 브랜드가 신뢰를 쌓아 가격 경쟁에서 벗어나거나, 네트워크가 커질수록 서비스가 더 좋아지는 구조를 만들면, 그 구조는 지대를 만들어낸다.
문제는 지대가 어디에서 왔는지 구분되지 않을 때다. 혁신과 품질에서 나온 지대와, 규제의 틈과 로비와 독점적 지위에서 나온 지대는 같은 얼굴을 하고 나타날 수 있다. 소비자는 구별하기 어렵고, 정치도 쉽게 단정하기 어렵다. 그래서 기업의 목적 논쟁은 곧 경쟁의 규칙을 어떻게 설계할 것인가라는 문제로 넘어간다.
"경제적 지대는 예외가 아니라 활기찬 경제의 중심이자 가치 있는 특징이다(Economic rent is not an anomaly but a central and valuable feature of a vibrant economy.)."
이 말이 중요한 이유는, 기업의 목적 논쟁을 도덕 논쟁에서 구조 논쟁으로 옮기기 때문이다. 혁신에서 나온 지대는 격려하되, 정치적 특혜에서 나온 지대는 줄여야 한다는 방향이 자연스럽게 따라온다. 목적은 구호가 아니라 제도의 설계로 번역된다. 그리고 그 번역은 결국, 어떤 선택을 기업에게 요구할지로 이어진다.
목적은 선언이 아니라 선택의 비용이다
많은 조직이 미션과 비전을 말한다. 그러나 목적이 실제로 힘을 가지려면 포스터가 아니라 선택의 기준이 되어야 한다. 불리한 결정을 내려야 할 때 무엇을 포기하고 무엇을 지킬지 정하는 기준, 이익을 위해 사람을 희생시키는 길과 사람을 지키기 위해 이익을 늦추는 길 사이에서 방향을 정하는 기준이 필요하다.
목적은 대개 말로는 비슷하지만, 비용을 치르는 방식에서 다르게 드러난다. 단기 이익을 포기하는 비용이 있고, 불편한 규정을 지키는 비용이 있고, 투명성을 위해 속도를 늦추는 비용이 있다. 목적을 갖는다는 것은 가장 쉬운 길을 자동으로 선택하지 않는 훈련에 가깝다. 그리고 그 훈련은 조직의 문화를 만들고, 문화는 다시 장기 경쟁력을 만든다.
이때 목적은 종종 왜곡된다. 목적의 언어가 고객에게는 배려처럼 보이지만, 내부에서는 숫자 목표로만 번역될 때가 있다. 서비스의 진정성이 목표 관리로 분해되면, 현장은 금방 불신을 배운다. 사람들은 전문직과 서비스에서 동기를 읽어내려 하고, 동기가 바뀌었다고 느끼는 순간 신뢰는 빠르게 줄어든다.
"보이는 손은 반려동물을 안고, 보이지 않는 손은 주인의 주머니를 뒤진다(You can see the ‘visible hand’ cuddling the pet, in the meantime, the ‘invisible hand’ is rifling the pockets of the pet owner.)."
이 비유가 찌르는 곳은 명확하다. 친절한 얼굴과 실제 인센티브가 어긋날 때, 목적은 마케팅 문장으로 전락한다. 매출 목표와 치료 목표가 같은 문장에 놓이면, 고객은 동기가 바뀌었다고 느낀다. 그러면 목적은 윤리의 문제가 아니라, 신뢰를 유지할 수 있는 운영 방식의 문제로 바뀐다. 그 운영 방식은 결국 제도와 규제로 이어진다.
기업과 제도, 그리고 한국의 풍경
기업은 시장에서 경쟁하지만, 동시에 제도 속에서 산다. 노동, 환경, 개인정보, 공정거래, 국제 통상 규범은 기업 활동의 바깥이 아니라 내부 조건이다. 규모가 커질수록 기업은 공공 인프라처럼 보이기 시작한다. 플랫폼이 멈추면 일상이 멈추고, 금융기관이 흔들리면 사회가 흔들린다. 기업의 목적은 더 이상 기업 내부의 슬로건으로만 남을 수 없게 된다.
"제도는 인간의 행동이 낳지만 인간이 설계한 것은 아닐 수 있다(institutions might be the product of human action, but not of human design.)."
이 문장은 제도가 왜 종종 의도와 다른 결과를 만들고, 왜 쉽게 고쳐지지 않는지 설명한다. 규제는 시장을 억누르는 장치로만 존재하지 않는다. 어떤 규제는 신뢰를 만들고 거래 비용을 낮춘다. 어떤 규제는 오히려 혁신을 막고, 특혜를 고착화한다. 그래서 기업의 목적을 말할 때는, 목적을 가능하게 하거나 왜곡하는 제도의 설계까지 함께 보게 된다.
한국에서 기업의 목적은 특히 민감하게 반응한다. 대기업이 경제의 핵심 동력이면서 동시에 불평등과 특권의 상징으로 소비되는 장면이 반복되기 때문이다. 기업이 일자리를 만든다는 말과, 기업이 기회를 독점한다는 말이 같은 화면에서 충돌한다. 그래서 목적 논쟁은 도덕의 문제이기보다 설계의 문제로 바뀐다. 지배구조가 신뢰를 만들어내는지, 내부 통제가 위험을 줄이는지, 단기 성과 압박이 현장을 어떻게 왜곡하는지 같은 질문이 중심이 된다.
마지막으로 남는 것은 다시 처음의 질문이지만, 질문의 무게는 달라진다. 기업은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가라는 질문은 선의를 요구하는 문장이 아니라, 신뢰를 유지할 수 있는 구조를 만들라는 요구가 된다. 기업은 혼자서 존재하지 못한다. 사회의 신뢰, 제도의 허가, 사람들의 협력, 공급망의 안정, 소비자의 인내가 함께 있어야 기업이 기업으로 남는다.
목적이란 거창한 구호가 아니라, 그 당연함을 잊지 않기 위해 매일의 선택을 다시 세우는 일이다. 그 선택이 축적될 때 기업은 단지 돈을 버는 기계가 아니라, 사회가 스스로를 유지하는 방식의 일부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