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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대한 플랫폼의 뒤편, 돌봄을 잃은 권력
- 빅테크 시대를 비추는 한 내부자의 기록에서 읽는 것들
‘무심한 사람들’이 만든 세계
플랫폼은 사람과 사람을 연결한다는 약속으로 출발했다. 국경을 넘어 친구와 소통하고, 소수자의 목소리가 확장되고, 시민들이 스스로 정보를 생산하는 새로운 공론장이 열린다는 기대가 있었다. 그러나 지난 10여 년의 역사는 이 약속이 절반만 지켜졌음을 보여준다. 연결의 기술은 현실에서 혐오, 선동, 조작, 감시에 동원되었고, 민주주의와 인권은 알고리즘과 광고 수익 뒤로 밀려났다.
이 과정에서 특히 선명해진 한 장면이 있다. 거대 플랫폼의 내부에서, 수많은 경고와 우려가 반복적으로 제기되지만, 실제 의사결정은 “성장”, “시장”, “분기 목표”라는 두 단어 앞에서 번번이 후순위로 밀려나는 모습이다. 기술과 자본, 정치 권력이 뒤엉킨 이 구조 속에서 개인의 생명과 권리는 숫자와 차트에 눌려 잘 보이지 않게 된다.
사라 윈-윌리엄스의 회고록 『Careless People』은 이러한 풍경을 가장 가까운 거리에서 기록한 목소리 가운데 하나다. 글로벌 공공정책 담당자로 일하며 경험한 사건들을 따라가다 보면, 거대 기술 기업이 어떻게 ‘돌봄(care)’의 감각을 잃어가는지, 그리고 그 과정이 얼마나 일상적이고 조직적인지를 읽게 된다. “무심한 사람들”이라는 표현은 단지 몇몇 나쁜 사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전체 구조와 문화가 만들어내는 상태를 가리키는 이름에 가깝다.
이상주의자가 들어간 자리, 책임이 사라진 구조
국가 외교관 출신으로 글로벌 플랫폼에 합류한 사람들은 대체로 비슷한 기대를 품고 있었다. 정부보다 빨리 움직이는 기술 기업이 인권과 민주주의에 긍정적 활력을 줄 수 있다는 믿음, “연결”이 곧 “개방성과 자유”로 이어질 것이라는 확신 같은 것들이다. 젊고 똑똑한 인재들이 모여, 자유로운 복장과 수평적인 문화를 누리며, 세계 정상과 회의에 동석하는 일상은 분명 매력적인 환경이었다.
하지만 내부에 들어가자 곧 다른 풍경이 눈에 들어온다. 회사 슬로건에는 “세계를 더 가깝게” 같은 문장이 적혀 있지만, 실제 의사결정 구조는 책임을 특정 개인에게 귀속시키지 않도록 고안되어 있다. 잘못된 선택이 어떤 국가의 선거를 흔들고, 특정 공동체의 안전을 위협해도, 회의실에서 돌아오는 말은 “시스템의 한계”, “알고리즘의 결과”, “글로벌 기준상 어쩔 수 없다” 같은 표현이다.
이 장면은 하나의 기업을 넘어 오늘날 기술 권력의 구조를 드러낸다. 이해관계자가 너무 많고 서비스 규모가 너무 크다는 이유로, 책임은 점점 더 추상화된다. 실수의 여파는 점점 커지는데, 책임의 무게는 점점 가벼워지는 기묘한 상태가 형성된다. 이상주의자가 시스템 안으로 들어가 “안에서 바꾸겠다”고 결심해도, 이 구조 앞에서는 어느 순간부터 자신 또한 “무심한 사람들”의 일부로 흡수되어 버린다.
미얀마, 로힝야, 콘텐츠 모더레이션: 방관의 폭력
플랫폼의 부주의가 가장 잔혹하게 드러난 사례 가운데 하나가 미얀마 로힝야족에 대한 폭력이다. 당시 소셜미디어는 혐오와 선동의 확산 채널이 되었고, 실제 학살과 인권 침해와 긴밀하게 연결되었다는 비판을 받았다. 시간이 지난 뒤 외부 조사와 유엔 보고서는, 미얀마에서 플랫폼이 수행한 역할을 “대량 폭력의 촉매”에 가깝게 평가했다.
회고록에 담긴 내부 서술을 따라가 보면, 문제의 뿌리는 단지 “사람이 모자랐다”는 수준을 넘어선다. 버마어를 이해하는 콘텐츠 모더레이터는 극히 적었고, 커뮤니티 가이드라인의 번역조차 오랫동안 우선순위에서 밀려 있었다. 혐오 선동 게시물이 쏟아지는 가운데, 현지 맥락을 이해하는 인력이 부족하고, 인권 관련 경고는 여러 단계의 결재를 거치는 사이 번번이 속도를 잃는다.
그렇다고 해서 내부에 아무런 문제의식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위험 신호를 감지하고 경고를 올리는 직원들은 존재했다. 그러나 이 경고가 “정치적 리스크”, “성장 둔화 우려”, “다른 지역 대비 우선순위 낮음” 같은 이유로 번번이 밀려난다. 인권 리스크는 재무제표와 달리 즉각 눈에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여기서 드러나는 것은, 악의적인 의도보다 훨씬 더 흔하고 강력한 폭력의 형태다. 바로 방관이다. 누군가를 적극적으로 해치고자 하는 욕망이 없어도, 타인의 생명과 권리가 충분히 고려되지 않는 상태 자체가 이미 폭력의 토양이 된다. 플랫폼의 “carelessness”는 바로 이 지점을 겨냥한다. 문제를 인지하면서도 우선순위에서 계속 밀어내는 무심함, 이 무심함이 결국 현실의 죽음과 상처로 이어진다는 사실이, 미얀마 사례에서 비극적으로 검증되었다.
중국과 검열, 시장 진입의 대가
또 하나의 축은 중국을 둘러싼 전략이다. 거대한 인구와 시장을 가진 국가에 진입하는 것은 글로벌 플랫폼에게 거의 숙명처럼 주어진 과제였다. 동시에, 강력한 검열과 국가 통제를 전제로 한 협상이라는 점에서 가장 민감한 딜이기도 했다.
회고록 속 장면들을 종합해 보면, 내부에서는 중국 정부를 만족시키기 위한 여러 옵션들이 진지하게 검토되었다. 예를 들면, 홍콩을 포함한 중국 이용자의 게시물을 특정 파트너에게 맡겨 필터링할 수 있는 시스템, 중국 정부가 자국 이용자의 데이터를 요구할 경우 어느 수준까지 응할 것인지에 대한 내부 시나리오 등이었다.
공적 메시지에서는 늘 “표현의 자유”와 “연결의 가치”를 강조하지만, 실제 협상 테이블에서는 “어디까지 양보할 수 있는가”를 둘러싼 계산이 지배한다. 검열을 수용하지 않으면 시장에서 배제되고, 검열을 수용하면 자사 브랜드의 가치와 이용자의 신뢰를 잃는다. 그 사이에서 기업은 흔히 “기술적인 중립성”이라는 단어에 기대어, 정치적 책임을 흐리는 방식을 택한다.
그러나 표현의 자유와 검열 사이를 오가는 이 줄타기는, 결국 플랫폼의 정체성을 묻는 질문으로 귀결된다. 민주주의의 인프라처럼 행동하면서 동시에 권위주의 국가의 정보 통제 시스템 일부로 작동할 수 있는가? 만약 두 가지를 동시에 추구한다면, 어느 순간부터 공적 신뢰는 돌이키기 어렵게 무너질 수밖에 없다.
젠더, 성희롱, ‘린 인’의 그림자
겉으로는 가장 진보적인 이미지를 자랑하는 기업들조차 내부에서는 익숙한 권력 불균형과 젠더 문제에서 자유롭지 않다. 회고록에는 고위 임원의 부적절한 행동, 출장과 회식 자리에서 벌어지는 암묵적 성적 압박, 문제 제기를 하려 할 때 따라붙는 미묘한 불이익과 낙인이 여럿 등장한다.
아이러니한 점은, 이런 장면들이 “여성 리더십”과 “린 인(lean in)”을 상징적으로 내세우던 인물들이 활약하던 시기와겹친다는 사실이다. 겉으로는 여성 임원 비중 확대, 다양성과 포용을 강조하는 슬라이드가 넘쳐나지만, 실제 일터에서 육아와 돌봄, 야근과 출장을 떠안는 사람은 여전히 특정 성별과 계층에 집중된다.
개인의 노력으로 이 구조를 이길 수 있다는 메시지는 매력적이다. 그러나 회의와 장거리 출장이 기본값인 조직 문화, 돌봄 노동을 거의 전적으로 가정에 떠넘기는 사회 구조, 성희롱 문제 제기자를 ‘문제 인물’로 바라보는 시선 속에서, “더 과감히 나서라”는 주문은 한계에 부딪힌다.
회고록이 보여주는 것은, 젠더와 권력의 문제 역시 “부주의함”과 깊이 연결되어 있다는 점이다. 성희롱과 차별을 제기하는 목소리를 조직 전체의 문제로 받아들이지 않고, “개인의 갈등” 혹은 “조용히 처리해야 할 위험”으로만 보는 태도야말로, 돌봄의 부재가 어떻게 사람을 소모시키는지 보여주는 대표적인 장면이다.
정치, 알고리즘, 그리고 구조적 편향
선거와 정치 과정에 대한 플랫폼의 영향력은 이제 상식에 가까운 주제가 되었다. 그러나 내부에서 이 문제가 어떤 수준으로 인식되었고, 어떤 식으로 다루어졌는지를 들여다보면, 표면적인 논쟁을 넘어서는 양상이 드러난다.
알고리즘은 원칙적으로 “사용자가 더 오래 머무는 콘텐츠를 우대하라”는 목표를 따른다. 사람의 심리는 분노, 공포, 혐오 같은 강한 감정 자극에 더 빠르게 반응한다. 이 두 가지가 결합하면, 선동적이고 극단적인 콘텐츠가 구조적으로 유리해진다. 특정 정치세력이 이를 적극적으로 활용할 경우, 플랫폼은 중립을 자처하면서도 실제로는 특정 유형의 정치 행동을 증폭시키는 효과를 낳는다.
내부에서는 이런 구조적 편향이 여러 차례 지적되었다. 분노를 부추기는 콘텐츠의 노출을 줄이고, 사실 확인과 맥락 정보를 강화하며, 알고리즘의 가중치를 조정하자는 제안들이 다양하게 논의되었다. 그러나 이런 제안을 밀어붙일 때마다 따라붙는 질문이 있다. “그렇게 하면 성장 곡선은 어떻게 되는가?”
성장과 안전, 참여도와 건강한 공론장 사이의 균형은 언제나 쉽지 않은 문제다. 하지만 분기별 실적·주가·광고 수익이 일종의 “최고선”으로 설정된 상황에서는, 논쟁의 결론이 어디로 기울지 이미 정해져 있는 것과 다름없다.
이 지점이 바로 구조의 힘이다. 특정 인물이 나빠서라기보다, 인센티브 체계 자체가 책임 있는 선택을 계속해서 어렵게 만든다. 정치적 극단화와 가짜 뉴스의 확대를 단지 이용자 탓, 정치인 탓으로만 돌리기 어려운 이유가 여기에 있다. 플랫폼 설계와 알고리즘 구조 자체가 이미 방향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폭로를 막으려는 시도와 역효과
흥미로운 것은, 내부의 부주의와 무책임을 지적하는 목소리를 통제하려는 시도가 오히려 더 큰 파장을 부르는 장면이다. 회고록이 세상에 나오기 전후로, 비방 금지 조항을 근거로 저자의 발언을 막으려는 움직임이 있었고, 긴급 중재를 통해 책 홍보와 비판 반복을 제한하려는 법적 조치도 취해졌다.
그러나 정보 통제를 시도할수록, 사건은 더 넓게 알려졌다. 언론은 “출간을 막으려 한 회고록”이라는 프레임으로 사건을 다루었고, 결과적으로 이 기록은 더 많은 사람의 손에 들어갔다. 의회 청문회와 추가 조사로 이어진 파장까지 고려하면, 조용히 덮으려던 시도가 오히려 거대한 확대경을 불러온 셈이다.
이 일련의 과정은 권력이 정보를 통제할 때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거대한 조직은 흔히 “조용히 처리하는 것”을 선호하지만, 디지털 시대의 정보 생태계는 이런 전략에 점점 더 비협조적으로 변하고 있다. 입을 막으려는 시도가 새로운 뉴스가 되고, 폭로는 개별 사건을 넘어서 구조를 묻는 공적 논쟁으로 번져 나간다.
회고록이 갖는 힘과 위험
내부자의 기록은 강력한 증언이 되는 동시에, 불가피한 한계를 갖는다. 특정 시기, 특정 팀, 특정 역할을 맡았던 사람이 보는 풍경은 전체 조직의 지도를 그대로 대변할 수는 없다. 개인의 경험과 해석, 감정이 섞인 서술이기에, 어느 부분은 과장될 수 있고, 어느 부분은 축소되거나 빠질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기록에 주목할 필요가 있는 이유는, 구조와 문화를 “장면”으로 보여주는 힘 때문이다. 뉴스 기사와 보고서는 숫자와 정책을 정리해주지만, 회의실 공기, 이메일 한 줄에 담긴 망설임, 출장 후 호텔 방에서 느끼는 허무함 같은 것들은 개인의 서사에만 담길 수 있다. 구조는 추상적이지만, 체험은 구체적이다. 이 둘이 결합될 때, 독자는 비로소 “시스템이 사람에게 어떤 감각을 남기는지”를 실감하게 된다.
또 하나 중요한 점은 자기반성의 층위다. 내부자의 기록 가운데 일부는 외부를 향한 고발에만 초점을 맞추지만, 보다 설득력 있는 증언은 자신 또한 그 구조의 일원으로 기능했다는 사실을 숨기지 않는다. 성장 목표를 설명했고, 회의에서 침묵하기도 했으며, 더 일찍 그만두지 못했던 사람으로서의 부끄러움까지 드러낼 때, 서사는 도덕적 우월감이 아니라 공동 책임의 감각을 불러일으킨다.
이 지점에서 독자는 질문을 확장하게 된다. 문제는 “그 회사”만의 것이 아니라, 성장과 효율을 최고 가치로 삼는 오늘날의 자본주의 시스템 전반과 맞닿아 있는 것은 아닐까? 기술 기업이 유난히 극단적으로 보일 뿐, 비슷한 인센티브 구조는 다른 산업과 조직에도 널리 퍼져 있는 것은 아닐까?
한국 사회에 비추어 보는 몇 가지 질문
거대 플랫폼을 둘러싼 서사는 한국에도 직접적인 파장을 던진다. 첫째, 규제와 감시의 방식에 대한 고민이다. 선거, 가짜 뉴스, 혐오 발언이 소셜미디어를 타고 확산되는 경험은 한국도 예외가 아니다. 지금까지의 대응은 대체로 사후 규제, 개별 게시물 삭제, 특정 이용자 제재에 머무르기 쉽다.
그러나 내부 구조와 인센티브에 접근하지 못한 채, 겉으로 드러난 결과만 다루는 방식으로는 근본적인 변화를 만들기 어렵다. 알고리즘의 작동 방식을 외부 전문가가 검증할 수 있는 권한, 국가와 시민사회가 중요한 정책 변경과 실험에 대해 사전에 정보를 얻고 의견을 제시할 수 있는 구조, 플랫폼의 인권 리스크를 지속적으로 평가하고 공표하도록 하는 제도적 틀이 필요하다.
둘째, 성장 중심 조직 문화에 대한 질문이다. 장시간 노동과 상시 대기, 끊임없는 성과 압박, “회사에 헌신하라”는 묵시적 요구가 얽힌 구조는 한국의 대기업과 스타트업에도 익숙한 풍경이다.
누구의 시간과 돌봄이 희생되고 있는가?
육아와 돌봄을 곁눈질하며 커리어를 이어가는 사람에게 조직은 어떤 선택지를 제시하고 있는가?
젠더·세대·계층별로 어떤 목소리가 회의실에서 누락되고 있는가?
이 질문들은 단지 해외 빅테크의 이야기가 아니라, 한국 사회 전체의 노동·돌봄 구조를 돌아보게 만든다.
셋째, 개인의 삶의 전략에 대한 고민도 따라온다. 시스템을 바꾸기 위해 내부에서 싸우는 것과, 더 이상 버티기 어렵다고 느낄 때 밖으로 나와 말하는 것 사이의 경계는 어디쯤일까. 회고록 속 서사는, 이상주의자가 현실의 권력 구조와 부딪히며 겪는 갈등과 소진을 보여준다. 이 갈등은 한국의 공공기관, 기업, 정치 조직에서도 여러 형태로 반복되고 있다.
너무 커져서 돌볼 수 없게 된 것들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는 결국 ‘돌봄’의 언어로 귀결된다. 상대의 안전과 존엄을 얼마나 진지하게 고려하는가, 내 행동이 가져올 결과를 얼마나 책임 있게 바라보는가가 관계의 질을 결정한다. 플랫폼과 이용자의 관계도 다르지 않다.
지금의 거대 플랫폼은 너무 커져서, 개별 이용자의 삶을 충분히 돌본다는 것이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규모가 되어버렸다. 문제는 규모 그 자체가 아니라, 규모를 이유로 돌봄의 책임을 포기하는 태도이다. “이용자가 너무 많아서 모두를 보살필 수 없다”는 말은, “그래서 기본적인 안전과 인권마저 고려하지 않겠다”는 선언으로 변질되기 쉽다.
사라 윈-윌리엄스가 남긴 기록은, 거대 기술 기업의 한 시기를 통과한 사람이 뒤늦게 꺼내놓은 자기 고백이자 구조에 대한 증언이다. 이 기록을 통해 보게 되는 것은, 특정 회사의 흥망성쇠만이 아니다.
성장과 효율이 최고의 가치가 되었을 때, 책임과 돌봄은 어떻게 사라지는가
무책임과 부주의가 개인의 선택이 아니라 구조의 결과가 될 때, 어떤 비극이 일어나는가
내부에서 문제를 인지한 사람들이 어떤 딜레마와 소진을 겪으며, 결국 어떤 방식으로 말을 하게 되는가
이러한 질문은 특정 회사의 역사로만 끝나지 않는다. 앞으로의 10년 동안 등장할 새로운 플랫폼과 기술들?생성형 AI, 메타버스, 초대규모 데이터 인프라?에도 그대로 적용될 질문이기 때문이다.
기술을 없앨 수는 없다. 대신, 기술을 둘러싼 구조와 인센티브, 책임의 구조를 다시 설계할 수는 있다. “무심한 사람들”이 만든 세계를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지 않을 때, 비로소 다른 선택지가 보이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 선택지는, 거대 기업의 회의실 안에서만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이용자·시민·규제기관·노동자 모두가 함께 참여하는 공론장의 산물이어야 한다.
돌봄을 잃어버린 권력의 초상은 이미 충분히 많이 보았다. 이제 필요한 것은, 돌봄을 회복한 기술·정치·경제 구조가 어떤 모습일지 상상하고, 그 방향으로 조금씩 밀어붙이는 상상력과 실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