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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것도 못 짓는 나라, 거부권이 권력이 된 시대
- 실행을 막는 것은 무능이 아니라 ‘멈춤이 기본값’인 설계다
만들 수 있음의 기억
미국은 한때 큰일을 하는 나라로 기억된다. 댐과 고속도로, 공공주택과 학교, 공항과 항만 같은 것들은 “결정하면 만들어지는” 물건처럼 여겨졌다. 기술이 앞섰고 돈도 많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실행의 리듬이었다. 공공이 방향을 잡으면 민간이 따라오고, 규칙은 결과를 돕는 장치로 작동하는 순간이 있었다.
하지만 오늘의 풍경은 낯설다. 주택난, 기후위기, 노후 인프라처럼 모두가 필요를 인정하는 과제 앞에서, 사회는 자주 멈춰 선다. 해야 한다는 말은 넘치는데, 만들어진 결과는 부족하다. 그래서 정책 논쟁은 점점 “무엇을 할 것인가”보다 “왜 못 했는가”의 책임 공방으로 바뀐다. 이때 무능은 성격의 문제가 아니라 구조의 문제로 변한다.
거부권의 증식
오늘의 핵심은 ‘거부권이 권력이 되는 방식’이다. 결정을 내리기 전에 통과해야 할 문이 너무 많고, 그 문마다 “안 된다”를 말할 수 있는 주체가 서 있다. 승인 절차는 층층이 쌓이고, 예외 조항과 해석의 여지는 늘어나며, 그 사이를 소송과 로비가 파고든다. 결국 추진은 언제나 잠정이고, 반대는 언제나 확정에 가까워진다.
이 구조는 겉으로는 안전하고 민주적으로 보인다. 누군가의 권리를 침해하지 않기 위해, 환경을 훼손하지 않기 위해, 공공 권력이 폭주하지 않기 위해 ‘브레이크’를 강화해 왔기 때문이다. 문제는 브레이크가 가속 페달까지 함께 묶는 순간이다. 위험을 줄이는 장치가 실험을 불가능하게 만들면, 사회는 “실수하지 않는 대신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상태로 굳는다. 실행이 사라지면, 신뢰는 정책이 아니라 절차를 향해 무너진다.
의도의 정치에서 구조의 정치로
중요한 변화는 “나쁜 사람이 많아져서”가 아니라 “결과가 나오기 어렵게” 되어 있다는 점이다. 누가 집권하든, 어떤 구호를 외치든, 결정을 실행으로 바꾸는 통로가 막혀 있으면 결과는 비슷해진다. 그래서 사회는 점점 의지와 도덕을 검증하려 들고, 서로를 의심하는 감정이 정치를 지배한다. 실패가 반복될수록 상대 진영은 ‘무능’이 아니라 ‘고의’를 의심받는다.
이때 ‘정치의 품질’은 메시지의 아름다움이 아니라 구조의 단단함에서 드러난다. 책임이 분산되면 아무도 책임지지 않는다. 권한이 조각나면 누구도 결단할 수 없다. 반대의 권리가 커질수록, 설계의 책임은 흐릿해진다. 이 모순 속에서 시민은 절차를 더 요구하지만, 절차가 늘어날수록 결과는 더 늦어진다. 늦어진 결과는 다시 불신을 키우고, 불신은 다시 더 많은 통제 장치를 낳는다. 악순환이 제도가 된다.
주택 위기의 압축판
주택은 이 문제를 가장 직관적으로 보여준다. 공급을 늘려야 한다는 데 동의해도, 지역의 반대와 인허가의 중첩, 소송 리스크가 결정을 ‘불가능에 가깝게’ 만든다. 그래서 집은 지어지지 않고, 가격은 오르며, 젊은 세대는 일자리 있는 도시에서 밀려난다. 결과적으로 “열심히 일하면 삶이 나아진다”는 약속이 흔들린다.
여기서 핵심은 도덕이 아니라 게임의 규칙이다. 한 동네의 ‘현재 거주자’는 멈춤을 통해 이익을 얻고, ‘미래 거주자’는 아직 존재하지 않는 이해관계자로 취급된다. 그래서 반대는 조직되지만 찬성은 흩어진다. 시간은 반대 편의 편이 되고, 비용은 추진 편의 부담이 된다. 주택 위기는 단지 시장의 문제가 아니라, “누가 언제 어떤 권리를 갖는가”라는 정치적 설계의 산물로 드러난다.
기후 전환의 병목
기후위기 대응은 더 큰 규모의 ‘지어야 하는 일’이다. 재생에너지를 확대하려면 전력망과 송전선을 연결해야 하고, 저장과 분산, 안정성까지 함께 설계해야 한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필요한 것은 단지 좋은 기술이 아니라, 공공이 빠르게 결정을 내리고 일관되게 추진할 수 있는 능력이다. 병목이 생기면 전환은 지연되고, 지연은 비용을 키우며, 비용은 다시 반대를 부른다.
기후 정책이 자주 말의 정치로 흐르는 이유도 여기서 나온다. 선언은 쉽지만, 선로를 깔고 케이블을 묻고 설비를 올리는 일은 언제나 분쟁을 부른다. 환경을 위해 필요한 설비가 환경 심사의 늪에서 멈추고, 공익을 위한 사업이 사익 갈등의 전장으로 바뀐다. 그 사이 시민은 “왜 이렇게 오래 걸리냐”를 묻지만, 답은 “절차를 지키느라”로 돌아온다. 절차가 목적이 되는 순간, 기후 전환은 계획이 아니라 지연의 목록이 된다.
절차의 정의가 전술이 되는 순간
절차는 본래 약자를 보호하고 권력을 견제하는 장치다. 하지만 절차가 너무 많아지면, 절차 자체가 전술로 변한다. 상대가 하려는 일을 멈추기 위해 절차를 이용하고, 합리적 토론 대신 ‘지연의 기술’이 경쟁력이 된다. 이때 사회는 이상한 윤리적 역전 속에 들어간다. 멈추게 한 사람은 책임을 지지 않지만, 추진하려 한 사람은 모든 결과의 책임을 뒤집어쓴다.
이 구조가 고착되면, 공공의 선택지는 둘로 줄어든다. 하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 다른 하나는 “절차를 무시할 수 있는 강한 손”을 갈망하는 것이다. 그래서 실행력이 사라진 체제는 오히려 더 거친 해결사를 꿈꾸게 될 수 있다. 느리고 답답한 민주주의가 사람들을 지치게 만들면, 사람들은 민주주의를 더 강화하기보다 ‘단번에 끝내는’ 방식에 매력을 느낀다. 실행의 부재는 포퓰리즘의 연료가 된다.
실행력 복원의 설계
돌아가는 길은 단순한 규제 철폐가 아니다. 안전, 환경, 권리 보호는 필요하다. 다만 보호 장치가 무한한 정지 버튼이 되지 않도록, 승인 권한을 정리하고 중복을 줄이며 책임의 주체를 분명히 해야 한다. 결정을 내렸다면 일정한 조건 아래에서 실행되게 하고, 반대가 있다면 반대의 근거와 비용도 투명하게 드러나게 하는 규칙이 필요해진다.
핵심은 권력의 균형을 다시 맞추는 일이다. 분산된 권한을 한곳에 몰아주자는 얘기가 아니라, “누가 무엇을 결정하고, 누가 무엇을 책임지는가”를 명확히 하는 일이다. 책임이 선명해지면 토론도 선명해진다. 신뢰는 ‘말을 잘하는 정부’가 아니라 ‘약속을 지키는 정부’에서 나온다. 집이 지어지고, 전력망이 연결되고, 교통이 개선되는 구체적 결과가 쌓일 때, 시민은 다시 공공을 믿기 시작한다.
신뢰의 재건, 결과의 언어
정부에 대한 신뢰는 연설로 회복되지 않는다. 결과가 필요하다. 결과가 나오려면 구조가 필요하다. “왜 아무것도 안 되나”라는 질문은 결국 “누가 죽였나”라는 감정으로 흐르기 쉽지만, 더 생산적인 질문은 “어떤 구조가 멈춤을 기본값으로 만들었나”로 옮겨가야 한다.
이제 정치는 선언보다 운영의 문제에 더 가깝다. 실행을 가능하게 만드는 설계가 없다면, 어떤 이상도 구호로 끝난다. 반대로 실행의 통로를 회복하면, 사회는 다시 ‘할 수 있음’을 기억한다. 그리고 그 기억이 돌아오는 순간, 불신이 제도가 되는 시대도 끝나기 시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