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책 소개
오늘의 독자를 위한 니체 철학의 완벽한 재발견
많은 사람들이 삶의 위기 앞에서 무너진다. 불행은 왜 유독 나를 향하는지, 내 안의 상처는 왜 이렇게 깊은지 물으며 쉽게 좌절하는 것이다. 그러나 니체는 우리 삶의 고통을 적으로 보지 않았다. 오히려 고통이 나를 더 단단하게 만들고 더 큰 가능성으로 이끄는 연료라고 강조했다. 이 책은 바로 그 지점에서 출발한다. 저자는 니체의 도끼 같은 문장을 오늘의 언어로 바꿔, 지금 당장 삶에 적용할 수 있는 실천적 철학으로 풀어낸다. “절망과 상처를 피해야 할 것이 아니라, 삶을 단련하는 스승으로 맞이하라”는 니체의 메시지를 쉽고 친절하게 전달한다. 이러한 메시지는 오늘날의 독자가 느끼는 불안과 혼란을 정면으로 꿰뚫는다. 누구나 겪는 흔들림과 좌절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면서, 그 속에서 길을 찾도록 독려하는 이 책은, 고통을 새로운 출발점으로 삼게 하는 인생 지침서다.
이 책은 단순한 철학 책이 아니다. 저자는 단순히 니체 철학을 설명하는 데 머물지 않고, 독자가 자기 삶의 위기와 마주할 때, 니체의 언어가 곧바로 의지가 되도록 안내한다. 니체 철학에 대한 배경 해설은 물론, 오늘의 삶과 연결한 구체적 사례가 더해져 ‘철학 교양서’이자 ‘실천서’라는 2가지 성격을 동시에 지닌다. 덕분에 독자는 철학을 지적 사치로 무심코 소비하는 대신, 인생의 진정한 동반자로 삼을 수 있다. 철학은 우리 곁에 가까이 있다. 그런 관점에서 이 책은 철학을 아는 것과 사는 것 사이의 거리를 좁혀, 누구나 삶의 현장에서 곧바로 실행할 수 있는 지침을 제공한다. 니체의 언어는 여전히 날카롭지만, 이 책에서는 독자의 삶 속으로 스며드는 따뜻한 안내가 된다.
니체 철학으로 시련을 넘어 진짜 나로 살아가기
이 책은 철학에 낯선 독자도 쉽게 읽을 수 있도록 구성되어 있다. 무겁고 추상적인 개념 대신, 살아 있는 문장과 친절한 해설이 중심을 이룬다. 특히 자기계발서가 던지는 피상적인 위로와 달리, 고통을 정직하게 직면하고 그것을 삶의 자산으로 바꾸라는 니체의 메시지를 그대로 전한다. 저자는 이런 니체의 메시지를 따라, 시련을 회피하지 않고 정면으로 끌어안는 길을 제시한다. 이 과정에서 독자는 자신의 상처를 낯설게 바라보고, 고통을 두려움이 아닌 성장의 토대라고 새롭게 인식하게 된다. “나를 죽이지 못하는 것은 나를 더욱 강하게 만든다”는 니체의 언어가 곧바로 독자의 현실 속에서 울림이 된다. 불안과 두려움 속에서도 자기 자신을 믿고 나아갈 수 있는 힘, 바로 그것이야말로 이 책이 독자에게 선물하는 가장 큰 메시지다. 철학에 거리감을 느끼던 독자도 이 책을 통해 “철학은 곧 삶의 언어”라는 사실을 확인한다. 결국 독자는 철학이 추상적 담론이 아니라 살아가는 방식의 문제임을 깨닫게 된다.
이 책은 총 5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우선 ‘1장 시도를 멈추는 순간 삶도 멈춘다’에서는 도전하지 않는 삶의 공허함을 다룬다. ‘2장 군중을 넘어 주권적 개인으로 서라’에서는 자기 자신을 잃지 않고 독립적으로 서는 용기를 강조한다. ‘3장 무엇을 하든 생명의 편에 서라’에서는 죽음의 충동이 아니라 생명력의 충만을 선택하는 태도를 제시한다. ‘4장 세상을 향해 열린 사람이 되어라’에서는 상호 연결된 세계 속에서 타자와 마주하는 법을 다룬다. 마지막 ‘5장 생존을 넘어 새로운 가치를 잉태하라’에서는 단순한 생존을 넘어 자기만의 창조적 삶을 설계하라는 통찰을 제시한다. 각 장은 추상적 담론이 아니라, 일상에서 누구나 경험하는 고민과 연결되어 있어 독자가 곧바로 자신의 문제와 대입할 수 있다.
■ 작가정보
양대종
고려대학교 철학과를 졸업하고, 독일 레겐스부르크대학교에서 석사학위를, 독일 훔볼트대학교에서 철학박사학위를 받았다. 독일 훔볼트대학교 사회철학연구소 교수자격 논문 집필연구원을 거쳐, 현재 건국대학교 철학과 교수로 재직하며 한국니체학회 회장을 맡고 있다.
저서로는 Die Problematik des Begriffs der Gerechtigkeit in der Philosophie von Friedrich Nietzsche(Duncker& Humblot Verlag), 『니체. 현대성의 위기와 미래철학의 과제』(2022 세종우수학술도서), 『포이어바흐의 기독교의 본질 읽기』 등이 있다. 역서로는 빌헬름 폰 훔볼트의 『인간 교육론 외』가 있으며, 논문으로는 「자주적 의식과 과감한 참여로의 지적인 촉구-자크 랑시에르 정치철학의 가능성과 한계」, 「자기도피의 여러 양태들에 대한 고찰-키에르케고어를 중심으로」, 「철학에 깃들인 종교적·수동적 이성의 전통에 대한 소고」 등 다수가 있다.
■ 목차
들어가며 _ 춤과 삼박자 그리고 여자를 좋아하기
1장 시도를 멈추는 순간 삶도 멈춘다
남과 비교하지 말라고? 경쟁은 객관적 비교다
힘을 기르려면 때론 잔인해져야 한다
모든 위기를 기회로 만들어야 한다
자유정신은 자기극복에서 완성된다
꿈꾸는 위버멘쉬는 스스로 길이 된다
2장 군중을 넘어 주권적 개인으로 서라
배우의 역할을 넘어서야 한다
무리 동물에서 벗어나야 한다
죽은 신을 발판 삼아 새 길을 세워라
내일과 모레의 인간이 되어야 한다
주권적 개인들의 공화국을 세워라
3장 무엇을 하든 생명의 편에 서라
생명을 사랑하는 것이 생명의 본성이다
싸움의 포기는 위대한 삶의 포기다
필연을 짊어진 낙타가 되어라
이해력이야말로 모든 힘의 시작이다
신이 죽어도 생명은 계속된다
4장 세상을 향해 열린 사람이 되어라
니체의 산책은 치유와 기다림을 닮았다
완전한 삶의 주인이 되는 여정
니체에게 음악은 영혼의 호흡이다
제대로 읽고 쓰면 사람이 달라진다
함께한 우정의 길마저 넘어서야 할 산이다
5장 생존을 넘어 새로운 가치를 잉태하라
배움은 삶을 끝까지 키우는 씨앗이다
나는 공산당이 싫어요…. 민주주의도요!
건강한 사랑은 결실을 낳는다
안락만 좇는 삶은 스스로를 소멸시킨다
사유는 인간을 더 큰 세계로 이끈다
내 의지대로 살고 싶을 때 니체
시도를 멈추는 순간 삶도 멈춘다
모든 위기를 기회로 만들어야 한다
현대는 위기의 시대다. 과거에 비해 이상하게 위기가 많다. 위기가 많은 세상은 혼란스럽다. 위기를 감지하는 능력이 진보한 것일까? 아니면 위기를 정밀하게 측정하는 기술이 발달하고 측정기구가 늘어나서 그런 걸까? 너무나 많은 사람이 위기를 진단하고 자신이 그것을 치료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심지어는 없는 위기를 조장하고 만들어내서라도 그 위기를 다룰 수 있는 전문가가 바로 자신이라고 주장하는 것을 직업으로 삼은 사람도 있다. 실로 혹세무민하는 악마적 리바이어던들이 현대를 위기 사회로 만든다.
부정적인 단어로 자신의 시대를 표현하는 일은 항상 미래학자들이 해오던 일이지만, 20세기 후반부터 세계는 특히 암울하게 묘사된다. 9?11 참사 후에 우리는 위기가 일상에 상존하는 중요한 요소라는 사실을 체화해냈다. 공항검색대의 세밀한 수색과 무장 경찰의 존재는 이제 그다지 신경 쓰이는 일이 아니다.
나에게 위기는 언제였을까? 탄생, 미지의 가족과의 조우, 감기, 죽음의 예감, 선생님, 친구, 독서, 음주, 사랑, 결혼, 아이, 직장 등 모든 단어 앞에 '첫' 자를 붙여야 할까? 첫 선생님, 첫 독서···, 독서는 지금도 매번 위험하다. 만남도 그렇다. 내가 특별히 소심하거나 겁이 많은 것 같지는 않다. 그렇지만 위기는 내 삶의 모든 순간에 있다. 어떤 사람은 이렇게 물을지도 모른다. 다 좋아 보이는 것들인데 왜 위기라고 하냐고.
위기는 어떤 상황을 나타내는 단어인가? 우리 현대인은 위기를 결정이 유예된 어정쩡한 상태나 혼란한 상황으로 이해하는 경향이 있다. 명확하게 어느 한쪽으로 결정이 나지 않은 상황은 사람을 불안하게 만든다. 이해할 수 없고 불안한 상황으로 인해 향배를 결정하는 것이 방해받고 불가능해지는 때가 바로 위험한 고비나 시기다. 혼란한 상황에 대한 의심과 당황이 우리를 지배하고, 판단과 결정을 불가능하게 만든다.
그러나 위기라는 말의 그리스 어원인 krisis라는 단어는 의외로 판단(判?) 혹은 결정(決定)을 뜻한다. 판단은 한자의 의미처럼 나누고 쪼개고 구별하는 일이다. 결정은 제방이 터져 넘쳐흐르는 물을 갈라 방향을 정하는 일이다. 위기는 흐르던 물이 둘로 갈라지는 때이고, 여러 가능성을 나누고 구별해 결정을 해야만 하는 때다.
판단이 나누고 쪼개는 일이라는 사실은, 그 판단과 함께 판단하는 주체도 둘로 나뉜다는 사실을 암시한다. 문제가 되는 위기의 상황은 행해지는 결정과 함께 내가 겪는 자극과 의지가 필연적으로 달라지는 상황이다. 나뉘고 분리되는 상황이 항상 명확한 판단을 보장하지는 않는다. 상황을 나누고 가능성을 분리해도 그중 어떤 쪽을 택해야 안전한지 모르는 경우도 생긴다. 아마도 이런 이유에서 위기라는 단어에 불안하고 어정쩡하고 혼란하다는, 현대적 의미가 생겨났을 것이다.
파리스가 세 여신의 아름다움을 놓고 내린 저 유명한 판단은 트로이인들과 그리스인들 사이에 위기를 가져왔다. 그 결과 한 민족은 망하고, 다른 민족은 수많은 파국을 경험하게 된다. 위기와 판단은 내밀하게 얽혀 있다. 하지만 현대적 이해에서도 위기가 판단과 결정을 요청한다는 점은 달라지지 않는다. 적절한 판단을 내리고 결정하지 못한다는 것, 그것이 바로 어찌할 바를 모르는 위기다.
그래서 모든 탄생은 위기다. 새로 태어난 자는 생명이 이끄는 힘이 자신에게 이로운 것인지, 해로운 것인지 쉽게 판단할 수 없다. 처음 겪는 모든 상황이 그의 판단력에 제대로 된 알찬 정보와 지식을 제공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보통은 판단을 유보한 채, 생명이 장착해둔 본능이 이끄는 대로 간다. 그리고 탄생에 있어서는 그게 바로 살길이다. 그 후에 오는 첫 경험들에는 안개에 싸였지만 의지할 수 있는 지식과 정보가 있다. 선생이 무엇이며, 학교가 무엇이고, 공부가 무엇이며, 친구란 무엇인지에 대해서 우리는 간접적으로나마 들어본 적이 있고, 어느 정도는 기대에 부풀어 첫 상황을 마주한다. 하지만 모든 상황은 판단과 입장의 결정을 요청한다는 점은 바꿀 수 없는 생명의 법칙이다. 그리고 새로운 상황이 가지고 있는 가능성들 앞에서 판단과 결단을 요구하는 위기가 열린다.
위기 중의 위기, 가장 큰 위기는 위기를 오해하는 것이다. 거칠고 확실한 악은 모두가 알아채고 위험을 감지할 수 있다. 그러나 세련된 악, 진실과 아름다움의 옷을 입고 찾아오는 세련된 악마야말로 진정한 위험이다. 두려움을 느끼고 도망치거나 탈출과 저항의 방법을 모색해야 할 상황에서 사람들은 오히려 사로잡히고 매혹되고 환호한다. 위기를 위기로 파악하지 못하고 오해하기 때문이다.
신의 죽음은 위기 중의 위기다
니체가 말하는 신의 죽음이 그러한 위기 중의 위기의 대표적인 예다. 발생한 사건이 엄청나고 대단할수록 그것이 확실히 감지될 때까지 오래 걸리는 법이다. 아마도 그 사건이 불러일으킨 큰 결과들이 모두 전개되어 드러나기까지 상당한 시간이 필요하기 때문일 것이다.
나는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 장례를 치르고 손님을 맞고 삼우제를 지내는 동안 멍하니 시간을 보냈다. 다시 일상이 시작되고도 상실에 대한 느낌은 들지 않았다. 아버지의 죽음은 거의 일 년이 지나서야 내게 현실로 다가왔다. 평생 내 인생의 중요한 국면마다 푯대가 되셨던 아버지의 부재는 상당한 시간이 걸려서야 구체적인 현실이 되었다. 이처럼 그 의미가 나중에야 드러나는 일상의 사건들이 있는 법이다. 하지만 위기에 대한 진정한 오해는 우리의 상상력을 훨씬 능가해서 비교의 가능성마저 보이지 않는 엄청난 사태에서 발생한다.
신의 죽음은 모든 가치는 근거가 없다는 사실이 밝혀진 상황에서 서구 문명이 봉착한 위기를 진단하는 명제다. 신의 죽음은 새로운 가능성을 인지하지 못하는 인간의 왜소화와 가치 허무주의를 낳는다. 니체는 인류가 의지해온 위대한 가치들과 이상들의 긍정적인 논리적 결론이 바로 허무주의라고 말한다.
왜 허무주의의 도래가 이제 필연적인가? 왜냐하면 우리의 기존 가치들 자체가 그들의 최후의 결론을 허무주의 안에서 도출하는 것들이기 때문이다. 허무주의는 그 끝에 이르기까지 생각된 우리의 중요한 가치들과 이상들의 논리이기 때문이다. (전집 20권, 519쪽)
그래서 니체는 몇 세기 전부터 문화 전체에서 감지되는 긴장과 그에 따라 필연적으로 따라올 수밖에 없는 대혼란으로의 질주에 대해서, 즉 필연적인 허무주의의 도래에 대해서 말하는 것이다. 허무주의 안에서 나올 수밖에 없는 가치들과 이상들이 인류를 지배해왔었다는 통찰은 가치 일반에 대한 의심과 실망을 낳는다. 인간은 아무것도 신뢰하지 못하고 어떠한 새로운 일도 행하지 않는다. 이것을 운명에 대한 사랑과 삶에 대한 긍정으로 바꾸는 일이 니체 철학의 대주제다.
군중을 넘어 주권적 개인으로 서라
배우의 역할을 넘어서야 한다
짧지 않은 인류의 역사에서 현대에 두드러지는 특성은 가면과 속임수와 역할이 일상을 지배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니체는 이러한 사실이 우리 시대의 유약함의 증상이라고 진단한다. 인간의 의식과 자기에 대한 이해, 직업의 수행과 언어의 사용, 종교와 정치를 비롯한 문화 전반에서 이러한 사실이 목도된다. 그리고 세상이 허위로 가득 차 있다는 사실은 일상에서 사용하는 일반적인 단어들에서도 드러난다.
세상은 속임수로 둘러싸여 있다. 그게 반드시 종교적 도그마에 국한되지는 않는다. '진보' '일반교양'이나 '국민적' '현대 국가'니 '문화 투쟁'과 같은 허튼 개념들도 그렇다. 모든 일반적인 말들은 이제 인위적이고 부자연스러운 장식을 몸에 달고 있다. (「반시대적 고찰」, 472쪽)
그것이 학문의 영역이건 일상의 욕망을 부추기는 광고의 영역이건 우리 현대인은 '야만적인 자의성과 표현의 과장' 안에서 살아가는 데 익숙하다. 처음 낯선 개념들을 대하며 느끼던 이질감은 이러한 부추김을 통해 빠르게 변화하는 욕망이 무뎌지는 만큼 일상의 다반사가 되어가고, 결과적으로 더 이상 낯설게 느껴지지 않기에 이른다.
장소와 전통적 가치라는 한계에서 벗어난 현대인은 도덕성과 습속과 문화의 여러 종류와 단계들을 동시에 경험하고 비교할 수 있다. 니체의 말대로 우리 시대는 실로 비교의 시대다. 니체의 희망은 이 비교를 통해서 보다 강하고 고상한 윤리와 문화의 형식들이 승리하게 만드는 것이지만, 역사의 실제적인 진행은 대부분 부정적이고 천박한 형식들의 승리로 끝나고 만다.
철학의 중요한 존재 기반이자 전통 가치 중의 하나인 성찰하는 삶보다는 활발하고 분주한 행동이 이 시대의 특징이 되었다는 사실을 근거로 니체는 문명의 행보에 대해 필연적으로 부정적인 예단을 내리고 있다. 그것은 건강하고 고상한 새로운 문명에 대한 기대에 부합하지 못한 채, 미국에서 시작된 가볍고 피상적인 행보를 통해 유례를 보기 어려운 새로운 야만으로 가는 현대적 격동의 길이다.
성찰하는 삶(vita contemplativa)과 활동적인 삶(vita activa)의 조화는 오랫동안 인류가 추구해온 이상 중의 하나였다. 삶을 바꾸지 못하는 독서의 무의미함을 갈파하는 철학자들의 목소리도 동일한 뉘앙스를 띠고 있다. 동양의 지행합일이나 서양의 자기배려가 의미하는 것 역시 앎의 지평이 넓어지는 만큼 같이 확장되어나가야 하는 실천의 영역에 대한 강조와 다름이 없다.
현대인은 강요된 역할 속에서 배우가 되어간다
현대가 인정하는 가장 활동적인 인간은 그럼 누구인가? 체험과 확신에 기반을 둔 신앙이나 형이상학, 역사의 의미에 대한 믿음을 상실하고 벌처럼 한데 뒤엉켜 날면서, 상황에 따른 배역을 연기할 뿐인 사람이 가장 활동적인 현대의 주역이다. 분주한 그를 통해서는 고상하고 건강한 문명이 가능해지기란 어려운 일이다. 번잡한 일에 골몰한 현대인들은 자신이 걷는 그 길의 중간에서 상당히 오래 지속될지도 모르는 새로운 야만을 통과한다.
모든 인간이 자신의 성격을 상실하고 오직 배우로만 존재하게 된 현대를 진단하는 니체의 화두는 의외로 '예술'이다. 기준과 정향점을 상실하고 모든 것을 다 실험해보기에 이른 현대가 가지는 가능성과 위험을 살피는 『즐거운 학문』의 한 절은 '유럽은 어느 정도까지 점점 더 예술적으로 될 것인가 라는 냉소적인 소제목을 달고 있다. 희극배우와 비극배우에게 나막신과 반장화를 신겨주는 것이 사실은 "교육의 부족과 곤궁과 자유분방함"이라고 일갈한 디드로처럼, 니체 역시 현대인들이 배우가 되는 이유를 강요된 선택으로 보고 있다.
극장은 선택되는 것이 아니라 삶의 방편으로 강요되는 것이라는 디드로의 엄정한 명제를 니체는 현대인들의 직업 선택과 이로 인한 성격의 상실로 확대한다. 직업을 선택할 때 자신이 속한 신분과 조합과 가업이 지속될 것이라고 믿었던 중세와 달리, 지속에 대한 믿음이 사라지고 영원한 가치에 대한 확신이 없어진 시대에는 실로 우연과 자의성이 직업선택에서 점점 중요한 역할을 차지하게 된다. 그리고 우연히 주어진 직업이 강요하는 역할을 수행하면서 현대인은 이 강요된 역할과 자기 자신을 혼동하게 되었다는 것이 니체의 생각이다.
그런 시대에는 역할이 실제 성격이 되고 인위적인 가상이 자연이 된다. 지속과 영원에 대한 믿음과 인정을 기반으로 사회적인 피라미드를 구축하는 것을 당연시하던 중세와 달리, 이제 'anything goes!'라는 미국적 구호가 지배하는 민주적인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니체에 의하면 이러한 생각은 페리클레스 시대 아테네인들에게서 최초로 나타났고, 니체 시대에는 미국인들의 믿음이었으며, 점차 전 세계적으로 확대일로에 있다. 이 현대적 믿음의 핵심은, 새로운 역할에 대한 부단한 실험을 당연시하는 일이다.
이런 시대의 개인은 자신이 거의 모든 것을 할 수 있고, 거의 모든 역할에 적합하다고 확신한다. 누구나가 자기 자신을 가지고 실험하고, 즉흥적으로 실험하고, 새로이 실험하고, 기꺼이 실험한다. (「즐거운 학문」, 345쪽)
역할에 대한 이러한 뻔뻔한 믿음의 귀결은 이 믿음의 소유자가 정말로 배우가 되어버린다는 것이다. 부단한 즉흥적인 실험은 배우로서의 가능성을 확대하고 그 가능성의 확대만큼 인간은 더 배우가 되어간다.
배우, 거짓을 진실처럼 만드는 자
배우란 누구인가? 그는 진실하지 않은 것을 진실한 것처럼 보이게 만드는 것을 직업으로 삼은 자다. 효과와 영향력의 증대를 최우선적 전략으로 내세우는 바그너 안에서 니체가 발견하는 것이 바로 이 거짓을 진실하게 포장하는, 배우 속에 있는 사기꾼적인 요소다.
니체는 『즐거운 학문」의 한 절에서 배우의 문제가 자신을 오랫동안 번거롭게 만들어왔다고 고백하고 있다. 그가 생각하는 배우의 특성은 다음과 같다.
양심에 거리끼지 않는 허위, 권력으로서의 위장의 기쁨을 분출하는 것, 소위 '성격'을 한쪽으로 밀어버리고 덮어버리고 때로는 소멸시키는 것, 배역과 가면과 가상 안으로 들어가려는 내면의 요구를 지니고 있는 것, 모든 종류의 적응 능력이 넘쳐나지만 가장 가깝고 밀접한 일에도 유용한 봉사를 할 줄 보르는 것. (「즐거운 화문」, 359쪽)
상상할 수 있는 모든 종류의 역할과 성격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낼 수 있는 이러한 탁월한 적응 능력은 니체에 의하면 하층 민중 출신의 집안에서 쉽게 길러진다. 그들의 삶을 구성하는 반복되는 압력과 강제와 뿌리 깊은 종속성이 이러한 출신의 사람들에게 새로운 상황들 안에서 언제나 새롭게 자신을 맞추고 매번 다른 모습을 드러내는 일에 있어서 대가가 되도록 강요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문화의 고양과 상승, 도덕과 덕성의 함양, 장기적 교육 등 인간을 단련하고 강하게 만드는 모든 영역에 있어서 정동을 승화시켜 본능이 되도록 만드는 데 니체적 진화론의 비밀이 있는 것처럼, 이러한 배우적 충동 역시 세대를 따라 내려가 체화되고 육화되어서 다른 모든 본능을 지배하는 주도적 본능이 되기에 이른다. 이렇게 배우, 예술가가 생산되기에 이른다. 니체는 동일한 배우의 본능이 육성해낸 유사한 인간의 유형으로 외교관과 유대민족, 문필가와 여성들을 들고 있다. 이들에게 공통으로 존재하는 특성은 바로 탁월한 적응 능력이다.
광기에 찬 현대가 지워버린 인간의 유형
'배우적 본능'이 보편적인 인간 유형이 되어버린 현대, 배우가 주역이 된 역사의 마지막은 흥미롭기는 하지만 광기에 찬 시대다. 그리고 이 유동적이며 말랑말랑한 무정형의 성격을 가진 인간들의 시대에 출현과 생존이 불가능해지는 유형의 인간이 있다. 그들은 바로 장기적인 안목을 가지고 위대한 건설을 하는 자들이다.
이제 건설하는 능력이 마비되고, 먼 곳을 내다보고 건설하는 용기가 꺾이게 되며, 조직의 천재가 부족하게 된다. 도대체 이제 누가 수천 년에 걸쳐 완성될 일에 과감하게 착수할 수 있겠는가? 이로 인해 인간이 계산하고, 약속하고, 미래를 계획 속에 선취하고, 자신의 계획을 위해 희생을 바치는 데 토대가 되는 근본적인 믿음이, 다시 말해 인간은 거대한 건축을 위한 하나의 초석일 경우에만 가치와 의미를 지닌다는 근본적인 믿음이 사라지게 되는 것이다. (「즐거운 학문」,346쪽)
배우는 그 성격과 가치관에 있어 결단코 확고하지 않으며, 그래서 배우가 주역이자 배우가 상상할 수 있는 유일한 성격이 된 시대에는 가치와 의미의 설립을 위해 천년을 계획하는 의지의 인간들이 불이익을 당한다. 이러한 시대에는 성격과 가면의 차이가 철회되기에 이르고, 성격마저도 가면이 된다. 니체의 말처럼 이제 성격이라는 가면을 쓴 인간들은 하등의 부끄러움 없이 그들의 가면들을 보여준다.
과거에는 참으로 자기 자신에게 속한 것들을 가지고 있지 못한 자들은 이러한 사실을 견디지 못하며, 자신의 공허한 실상으로부터 자신과 타인의 눈을 돌리기 위해 사회적 통념이나 정치적 이념 혹은 종교적 이상으로 도망치곤 했다. 고양된 자기 자신에 속할 수 없는 자들은 흔히 의무를 들먹이고 타자에게 복종을 요구하는 형식으로 폭력을 행사한다는 사실을 니체는 충분히 잘 알고 있다.
그런데 배우가 주역이 되고 주목받는 시대에는 이런 자기 방기의 결과가 더 이상 부끄러움과 불안을 불러일으키지 않는다. 가면을 쓰고 역할을 연출하는 일이 이제 일상이 된 것이고, 이 일에서 탁월하면 위대하게 보이게까지 된 것이다.
'배우의 시대가 곧 군중의 시대 라는 사실은 형이상학과 신의 죽음 이후에 가상이 판치게 된 허무주의 시대의 특성이 된다. 진리의 부재는 필연적으로 새로운 시도들과 모색을 부추기며, 한동안 비어 있는 진리의 권좌를 놓고 수많은 배우들의 힘겨루기가 시작되는 것이다.
"니체가 본 현대인은 강요된 역할 속에 갇힌 배우다. 그는 가면과 배역을 진짜 성격으로 착각하며, 끝없는 즉흥적 실험을 삶이라 부른다. 그러나 이런 연극의 시대에는 장기적 비전과 건설의 힘을 지닌 인간은 설 자리를 잃는다."
무엇을 하든 생명의 편에 서라
생명을 사랑하는 것이 생명의 본성이다
우리 중에 아무도 세상에 오고 싶어서 온 사람은 없다. 그러나 세상에 온 생명은 모두 오래 머물고 싶어 한다. 하루하루를 살아내는 일이 아무리 고단하고 버겁더라도 생명체는 살아 있기를 원한다.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좋다!
고관대작이나 금수저의 자식이 아니더라도, 빼어난 재기나 능력을 타고나지 못했더라도, 생명의 흐름 속에 머물며 흐를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인생은 남는 장사이자 놀라운 선물이다. 생명을 가진 존재가 생명을 사랑하는 것, 그것이 생명의 본성이고 세상을 존속하게 만드는 생명의 비밀이다.
우연히 태어난 이 지구에서 자신에게 허락된 시간이 얼마나 될지 미리 아는 사람은 없다. 그러나 할 수만 있다면 우리는 오래오래 생명의 샘에서 물을 싣고 싶은 것이다. 하루를 살다 가는 하루살이부터 이십여 일을 살자고 수년간을 땅속에서 고치로 지내며 탈피를 거듭하는 매미나 이제 백여 년을 살게 된 현대인에 이르기까지 자신의 생명을 사랑하고 아끼는 마음에는 예외가 없다.
고대 철학자들을 놀라게 만들었던 질문이 바로 생명에 관한 것이었다. 어째서 무(無)가 아니라 존재란 말인가? 산천초목과 그것을 채우는 잡다한 생명체, 그리고 인간이 여기 있어야 할 어떠한 이유도 명확하지 않은데, 어째서 세상에는 아무것도 없는 것이 아니라 이렇게 삼라만상이 있는 것인가?
이 세계에 드러나기 전에 자신이 무엇이었을지를 떠올리는 일은 막막하고 두려운 일이다. 비존재와 존재를 나누는 저 경계와 그것을 넘어서는 순간을 생각하는 일은 아득하고 막막한 일이다. 영원과 영원 사이에 순식간에 지나가는 개체의 생명, 하지만 또 계속되는 이 변화와 유전의 도저함! 급작스레 도래한 설명할 수 없는 생명의 범람과 그 도도한 흐름이야말로 자연을 바라보며 그에 대해 이성적 설명을 시도했던 그리스의 첫 철학자들에게는 경이로 다가왔다.
진리를 생명보다 귀하게 본 철학의 오류
하지만 지혜의 학문이라는 철학은 세상을 설명하는 과정에서 머지않아 진리를 생명보다 더 귀하게 여기기 시작했다. 이런 경향은 곧 철학의 주류를 형성하는 흐름이 되었다. 생명이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흔한 것이라 그랬을까? 그럴 수도 있다. 거저 받은 것, 아무데서나 부딪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애써 찾아 헤매고 교육을 통해 갈고닦아야만 겨우 내것이 되는 것이 고대인들에게 더 중요하게 보였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진리는 숨은 보석처럼 여겨졌고, 사라지거나 변하지 않는 보편적이고 영원하며 인간적 성취의 끝에 발견되거나 신의 은총에 의해서야 주어지는 고귀한 것으로 평가되었다. 진리는 그렇게 인간이 생각할 수 있는 최상의 가치로 자리매김했다. 서양 고대철학에서 진리는 선과 아름다움과 동일시되었고, 모든 철학적이고 종교적인 수련의 마지막에 가야 다다를 수 있는 빼어난 성취이자 인간 이성이 도달해야 할 목표가 되었다. 인식과 윤리와 예술 모든 영역에서 진리가 무소불위의 권좌에 오른 것이다. 서양은 이렇게 단순히 사는 것을 넘어서 어떤 것을 제대로 아는 것이야말로 인간적 탁월성과 우월함의 증거가 되는 세상을 만들어온 것이다.
사실 진리가 무엇인지를 아는 사람은 별로 없다. 물리적인 인과와 역학적 설명을 넘어서서 소위 인간 행위의 의미를 밝히는 형이상학적 진리에 대해서 확신을 가지고 단언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는 말이다. 그래서 니체는 철학자들이 끊임없이 진리가 무엇인지를 밝히려고 애썼던 사실을 진리의 실제 증거로 보지 않는다. 진리가 실제로 있어서 그것을 찾으려는 노력이 계속되었던 것이 아니라는 얘기다. 니체는 오히려 앞선 철학자들의 학문적 재기발랄함을 넘어서 더 섬세하고 광활하고 우아한 진리 개념을 만들어낼 수 있는 힘과 역량이 자신에게 있음을 증명하기 위해 수많은 철학자가 진리를 밝히는 데 골몰했을 것으로 생각한다. 어릴 적 아버지가 사다준 트리나 폴러스의 그림책 『 꽃들에게 희망을(Hope for the Flowers)』의 마지막 부분에서, 애벌레 기둥의 꼭대기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를 알고 난 후에 느꼈던 이유를 알 수 없는 실망과 두려움이 진리를 두고 벌이는 철학자들의 경주에 깃들어 있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