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스칼의 팡세

   
블레즈 파스칼 (지은이), 강현규 (엮은이), 이선미 (옮긴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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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이트북스
   
12000
2025�� 07��



■ 책 소개


고전의 형식은 보완하되, 깊이는 그대로 담았다!
『팡세』는 이제 ‘읽히지 않는 고전’이 아니다!

『팡세』는 고전의 위용을 갖추고 있지만, 동시에 진입장벽이 높은 책이다. 단상들이 시간 순서나 논리 흐름도 없이 나열되어 있어 독자는 무엇을 따라가야 할지 알기 어렵고, 종교적 색채가 강하다는 편견 때문에 처음부터 거리를 두는 경우도 많다. 그러나 그 안에 담긴 사유는 지금도 여전히 강력하고 날카롭다. 파스칼은 인간이 이성으로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있다는 계몽의 낙관을 철저히 비판하며, 인간이야말로 가장 모순된 존재임을 통찰했다. “인간은 가장 위대하면서도, 가장 비참한 존재다”라는 그의 관찰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하다. 그는 단지 신을 말한 것이 아니라, 신 없는 인간이 얼마나 자기기만 속에 빠져 있는지를 꿰뚫었다.

이 편역본은 파스칼의 사상을 시대에 맞게 조율하면서도, 원문의 핵심은 충실히 보존한다. 표현은 현대적으로 다듬되 의미는 축소하지 않았고, 설명은 명료하되 교조적이지 않다. 단상을 주제별로 배열하면서 각 장의 주제를 선명하게 살려, 독자가 감정과 사유의 흐름을 놓치지 않도록 안내했다. 또한 불필요한 역주 작업은 배제하고, 오직 개념이나 맥락 이해에 필수적인 최소한의 설명만을 더했다. 『팡세』는 이제 더이상 ‘유명하지만 읽히지 않는 고전’이 아니다. 이 편역서를 통해 현대 독자가 끝까지 읽을 수 있도록 

■ 저자 블레즈 파스칼
1623년 프랑스 오베르뉴 지방 클레르몽페랑에서 태어났다. 짧은 생애 동안 수학과 과학 분야에서 탁월한 업적을 남긴 천재였으며, 인본주의의 거센 물결 속 격변의 시대를 살아낸 사상가이자 신앙인이었다. 인간 존재에 대한 깊은 사유와 초월에 대한 고민 끝에, 1654년 11월 23일 성경 속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삶의 근본적 전환을 경험한다. 이후 종교를 미신적이고 비이성적이라 여긴 동시대 지식인들에게, 오히려 이성의 빛으로 신앙을 사유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주기 위해 『팡세』를 집필하기 시작한다. 그의 메시지는 단순하면서도 강렬하다. 인간은 위대하면서도 비참한 존재이며, 그 모순을 직시할 때 진리에 다가설 수 있다는 것이다. 파스칼은 인간이 단순한 이성적 동물이 아니라, 이성과 감정, 영혼과 욕망이 충돌하는 복합적 존재임을 꿰뚫는다. 병고에 시달리던 그는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집필 작업을 이어갔으며, 1662년 39세의 이른 나이로 생을 마감한다.

열두 살에 유클리드 기하학의 12번 명제를 스스로 증명했고, 청소년기에 수학 논문 『원추곡선론』을 발표하며 두각을 나타냈다. 컴퓨터의 기원이 된 계산기를 발명했고, 근대 확률이론과 유체역학의 기초를 세웠다. ‘파스칼의 원리’는 오늘날 항공과 기계공학의 핵심 원리로 통한다. 철학과 문학, 신학적 변증에서도 깊은 족적을 남겼으며, 합승 마차 제도를 도입해 사회 제도에도 실질적 영향을 주었다. 주요 저작으로는 『팡세』 외에 『원추곡선론』 『기하학 정신 논고』 『유체 평형과 대기압에 관한 논고』 『프로뱅시알』 『은총론』 『죄인의 회심에 관하여』 『병의 선용을 위한 기도』 등이 있다.

■ 엮음 강현규
대학에서 국문학을 전공했으며 대학 졸업 후에 줄곧 출판기획자의 길을 걸어왔다. 최근에는 ‘고전 다시 읽기’라는 취지로 고전들을 원전의 가치를 해치지 않는 범위에서 흥미롭게 재구성해 엮어내고 있다. 엮은 책으로 『쇼펜하우어의 인생 수업』 『니체의 인생 수업』 『에픽테토스의 인생을 바라보는 지혜』 『세네카의 화 다스리기』 『키케로의 우정에 대하여』 등이 있다.

■ 번역 이선미
한국외국어대학교 대학원 불어과를 졸업했다. 저작권 에이전시에서 에이전트로 일했으며, 출판사에서 편집자로서 책 만드는 일을 했다. 옮긴 책으로는 『톨스토이의 인생론』 『성인을 위한 이솝우화』 『스타가 될 거야』 『마틸드의 텔레비전 없는 날』 『너는 좋은 친구야』 등이 있다.

■ 차례
1장 인간은 누구보다 비참하고, 그래서 덧없다
감정이 있어야 비참함도 존재한다 / 모두가 차례를 기다리는 형장의 사슬이다 / 인간의 행복과 불행, 모두 비참함을 증언한다 / 결함을 감추면 더 깊은 악이 된다 / 웃음거리가 되고도 혼자만 전혀 모를 수도 있다 / 모두가 솔직하면 친구는 남지 않는다 / 이익이 없어도 거짓말은 할 수 있다 / 사람은 모두 자기 위에 누구도 두지 않는다 / 인간은 자기 자신에게 하나의 전부다 / 인간의 자비는 증오의 가장이다 / 잠시라도 머물면 평판이 신경 쓰이기 시작한다 / 권세를 좇는 건 헛됨을 모르는 일이다 / 명예는 죽음에도 달콤하게 붙는다 / 인간이라는 존재는 모순된 감정의 동물이다 / 인간은 불안, 권태, 그리고 근심 속에 있다 / 하찮음이 위로도 되고 고통도 된다 / 호기심이라는 것은 결국 허영의 또 다른 이름이다 / 생각을 멈춰야 행복할 수 있다 / 세상을 바꾼 건 아주 작은 것들이었다 / 유흥 없는 젊음은 허무와 마주하게 된다 / 우리와 영원 사이엔 연약한 생명 하나뿐이다 / 진짜 두려움은 위험 속이 아니라 밖에 있다 / 인간의 희망조차 허위의 가장일 수 있다 / 인간의 오만은 비참함을 앗아가는 괴물이다 / 인간은 선도, 진리도 소유할 수 없다 / 인간은 세상에서 아무것도 진짜 가질 수 없다 / 스스로 죄인이라 여기는 이가 의로운 사람이다

2장 인간은 왜 늘 현재의 자기와 어긋나 멀어지는가?
병든 몸은 새로운 욕망을 만든다 / 인간의 욕망은 늘 현재를 불행하게 한다 / 공허한 쾌락이 진짜처럼 느껴진다 / 행복에 대한 환상이 우리를 속인다 / 시간은 상처와 분노를 서서히 치유한다 / 사랑은 서로 달라지며 결국엔 사라진다 / 습관은 천성을 서서히 잠식해간다 / 나이가 든다고 해서 강해지는 것은 아니다 / 불행을 걱정하다가 결국 만족을 잃는다 / 진짜 행복은 숨기려 하지 않는다 / 정말 행복하다면 피할 이유가 없다 / 화가 나야 비로소 이유를 찾게 된다 / 감정과 이지는 대화에서 자란다 / 시간은 마음에 따라 다르게 흐른다 / 인간이라는 존재는 변덕스러운 오르간 같다 / 넓게 조망하며 조금씩 아는 것이 더 유익하다 / 나는 내 안의 욕구에 맞는 사람을 원한다 / 진짜 교양인은 조용히 드러난다 / 평생의 직업조차 이성이 아닌 우연으로 택한다 / 진리를 원한다면 기꺼이 홀로 서야 한다 / 능력 있는 사람일수록 차이를 먼저 알아본다 / 처음은 끝에서야 비로소 보인다 / 말의 배열이 같아도 의미는 전혀 달라진다 / 말의 배열 차이가 전혀 다른 결과를 만든다 / 전형이야말로 모든 아름다움을 결정한다 / 대칭을 위한 가짜는 아무 의미가 없다 / 진실 없는 유쾌함은 결국 공허해진다 / 적절함을 넘는 휴식은 오히려 피로를 부른다 / 인정받고 싶다면‘결정적인’말을 삼가라 / 인간이 쓰는 언어는 말과 말 사이의 수학이다 / 장소와 청중이 글보다 말을 돋우기도 한다 / 반복은 문맥과 흐름 속에서 판단해야 한다 / 진심 없는 사과는 불편함만 더 키울 뿐이다 / 세상의 모든 창조는 원형을 모방한다

3장 소유는 우리를 정말 행복하게 만들까?
행복을 갈망하지만 죽음과 비참함은 회피한다 / 인간은 현재에 거의 머물지 않는다 / 유흥은 즐겁지만 비참하게 만든다 / 안식과 소란 사이에서 인간은 방황한다 / 도박, 오락과 같은 유흥은 우리를 속인다 / 기분전환 없이는 아무도 행복하지 않다 / 완전한 휴식은 인간에겐 고통이다 / 애착을 끊으면 권태가 찾아온다 / 권세를 추구하는 것이 이상하지 않은 사회 / 확신도 기쁨도, 끝내 우리 것이 되지 않는다 / 꿈도 현실처럼 우리를 흔들며 지배한다 / 완전히 똑같은 건 자연엔 존재하지 않는다 / 우리는 실체보다 허영을 가꾼다 / 우리는 죽음 이후에도 우리 이름이 알려지길 원한다 / 칭찬받고 싶은 건 누구나 마찬가지다 / 명예를 위해서라면 죽음도 감수한다 / 인간은 존경받지 않으면 허전함을 느낀다 / 비참함을 드러내며 인간은 오만해진다 / 오만이야말로 방황하는 인간의 본성이다 / 권위 앞의 경배는 결코 진심이 아니다 / 행동의 근원은 결국 욕망과 힘이다 / 인간은 그 어떤 공로도 없이 보상을 원하는 존재다

4장 인간이 만든 질서의 불완전함과 허상에 대하여
법은 관습 위에 세워진 일종의 허상이다 / 다수를 따르는 건 힘의 논리 때문이다 / 우리는 단지 확립된 것을 정의로 여길 뿐이다 / 타인에 대한 존경은 불편을 감수하겠다는 태도다 / 우리는 미덕마다 다른 감정을 요구한다 / 자연을 잃은 시, 장식과 말장난에 빠지다 / 덕을 극단으로 추구하면 오히려 악덕이 스며든다 / 악덕 간의 견제가 덕을 만든다 / 인간과 문명의 흐름은 전진과 후퇴를 반복한다 / 드물고 정교한 악은 선처럼 보이기까지 한다 / 중심에 가까운 자는 덜 흔들리기 마련이다 / 과도한 자유는 억압보다 더 해로울 수 있다

5장 생각하는 갈대! 비참함과 위대함 사이의 인간
생각하는 갈대, 그래서 인간은 존엄하다 / 생각은 공간을 초월해 세계를 포괄한다 / 자기 자신을 아는 것이 모든 지혜의 시작이다 / 인간 존재에 대한 탐구는 철학의 출발점이다 / 인간은 사유를 통해 존엄을 실현한다 / 사고는 존엄하지만 품고 있는 결함도 크다 / 사유 없는 인간은 짐승이나 돌과 다름없다 / 기억의 망각에서 나 자신의 허무함을 배운다 / 왜 우리는 그보다 그의 특성을 더 사랑할까? / 비참함을 깨닫는 것이 인간의 위대함이다 / 오직 감정이 있는 자만이 비참함을 알 수 있다 / 동물들은 서로 미덕을 칭찬하지 않는다 / 위대함과 야비함 사이에 인간 본성이 존재한다 / 인간은 위대함과 야비함을 함께 드러낸다 / 인간은 자신을 사랑하고 동시에 경멸해야 한다 / 진리를 보려면, 욕망부터 내려놓아야 한다 / 쾌락에 굴복할 때 인간은 자발적 노예가 된다 / 아무리 성장해도 인간의 연약함은 계속된다 / 우리는 천사도, 짐승도 아닌, 단지 인간일 뿐이다 / 인간은 자기 상태조차 잘 모르는 존재다 / 위대한 영혼은 무지를 자각한다 / 모든 것을 다 아는 것보다 조금씩 아는 게 낫다 / 각 미덕에 맞는 의무를 지키는 것이 중요하다

6장 삶의 길을 묻는 인간에게 이성은 도착지가 아니다
늘 반복되는 자연도 때론 스스로를 어긴다 / 스스로 찾은 이유가 더 설득력 있다 / 좋은 정신은 생각을 자라게 한다 / 우연한 자극으로도 생각은 흔들린다 / 같은 자극에도 감정은 달라진다 / 제안의 한마디에도 판단은 쉽게 흔들린다 / 감정과 환상 앞에서 이성은 흔들린다 / 이성과 정념은 끝없는 전쟁중이다 / 자아는 중심이자 모든 갈등의 씨앗이다 / 우스꽝스런 기준도 때론 질서가 되곤 한다 / 양극단을 채울 때에야 위대함이 드러난다 / 나는 왜 지금 여기에 있는가? / 불안한 무지보다 차라리 착각이 낫다 / 진리는 오직 한 지점에서만 제대로 보인다 / 실존적 고통 앞에서는 도덕이 학문보다 낫다 / 인간은 대가엔 민감하고 책임엔 둔감하다

7장 마지막 한 걸음은, 믿음이 대신 디뎌야 한다
진실은 저 너머에 있지만 인간은 보이는 것만 믿는다 / 모든 오류는 시선의 편향에서 비롯된다 / 천사를 꿈꾸다가 짐승이 되는 인간의 비극 / 순수한 진리나 선은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 신은 믿음의 대상이지, 이해의 대상이 아니다 / 왜 우리는 종교에 대해서만 확실함을 요구하는가? / 진정한 두려움은 신을 의심하는 데서 온다 / 이성을 거슬러 강요하는 신앙이면 안 된다 / 단순한 어린아이가 되어야 구원받을 수 있다 / 신을 아는 자는 겸손하거나 통찰력이 있다 / 행복의 근원은 내 안이 아닌 신 안에 있다 / 진정한 위로는 자기 부정 속에서 시작된다 / 신앙을 정착시키려면 습관이 필요하다 / 믿음은 이성이 아닌 감정 속에 있어야 한다 / 절망과 오만 사이, 예수가 길이 된다 / 구원은 자신이 죄인임을 아는 데서 시작된다 / 자기 혐오와 고통을 거쳐 구원에 이른다 / 예수 없이는 신도, 인간도, 삶도, 죽음도 알 수 없다 / 신은 우리 안에 있지만 우리가 곧 신은 아니다 / 비참함의 끝에서 은혜의 문이 열린다 / 쾌락이 아닌 고통이 우리를 구원으로 이끈다 / 빛과 어둠 사이에서 신의 은혜가 드러난다 / 신의 뜻은 단순하지만 세상이 복잡하게 뒤튼다

 




파스칼의 팡세


인간은 누구보다 비참하고, 그래서 덧없다

웃음거리가 되고도 혼자만 전혀 모를 수도 있다

어떤 왕이 전 유럽의 웃음거리가 되고도 정작 혼자만 전혀 눈치채지 못할 수도 있다. 나는 이것이 전혀 놀랍지 않다. 진실을 말하는 일은 듣는 사람에게는 유익하지만, 말하는 사람에게는 오히려 불이익이 된다. 왜냐하면 진실을 말하는 사람은 대개 미움을 사기 때문이다. 왕과 함께 사는 사람들은 자신이 모시는 왕의 이익보다 자기 자신의 이익을 더 소중히 여긴다. 따라서 그들은 자신이 손해를 보면서까지 왕에게 진실을 말해 이익을 가져다주려고 하지는 않는다.


이런 비극은 분명 위로 갈수록, 즉 상류사회일수록 더 뚜렷하고 더 보편적이다. 그러나 하류사회라고 해서 예외는 아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의 사랑은 언제나 이해관계에 얽혀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인간의 삶은 끝없는 환상의 연속일 뿐이다. 사람들은 서로를 속이고 아첨하며 살아간다. 우리 면전에서 우리가 없을 때처럼 말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인간관계는 이런 상호 기만을 바탕으로 맺어질 뿐이다. 만약 자기가 없을 때 친구가 자기에 대해 말하는 것을 듣게 된다면, 설령 그것이 악의 없이 한 솔직한 말이었다 해도 그 우정은 깨지고 말 것이다.


결국 인간은 자신에게나 타인에게나 가면을 쓴 존재일 뿐이며, 거짓과 위선이 인간의 본성이다. 그래서 인간은 타인이 자기에게 진실을 말하는 것을 바라지 않고, 또한 남에게 진실을 말하는 것도 피한다. 정의와 이성으로부터 동떨어져 있는 이 모든 성향은 인간 마음속 깊숙이 박혀 있는 천성에서 비롯된 것이다.


세상을 바꾼 건 아주 작은 것들이었다

인간 존재의 덧없음을 온전히 이해하고자 하는 사람은, 사랑이라는 감정의 원인과 결과를 들여다보라. 그 원인은 대개 '무엇인지 알 수 없는 어떤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리고 그 결과는 실로 끔찍하다.


사람들이 알아차릴 수도 없는 미세한 '어떤 것'이 온 땅과 군주들, 군대와 전 세계를 뒤흔들기도 한다. 클레오파트라의 코가 조금만 낮았더라면, 세상의 역사는 완전히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인간의 오만은 비참함을 앗아가는 괴물이다

인간은 어떤 자리에 자신을 두어야 하는지 모른다. 인간은 분명 길을 잃었고, 본래 자리에서 떨어져 그 자리를 되찾을 수 없다. 헤아릴 수 없는 어둠 속에서 불안하게 여기저기를 찾아 헤매지만, 아무 성과도 없다.


인간은 자신이 어디에 있어야 할지도 모른다. 길을 잃었고, 본래 있어야 할 자리에서 벗어나 다시 그 자리를 찾아갈 수도 없다. 결국 인간은 헤아릴 수 없는 어둠 속에서 불안하게 방황하며 이곳저곳을 더듬는다. 하지만 인간은 끝내 아무것도 얻지 못한다.



인간은 왜 늘 현재의 자기와 어긋나 멀어지는가?

병든 몸은 새로운 욕망을 만든다

사람들은 건강할 때는 '아프면 어떡하지' 하고 걱정하지만, 막상 병이 들면 순순히 약을 받아들인다. 병이 그렇게 만든다.


사람들은 건강할 때 누리던 유흥이나 산책에 대한 욕망과 열정을 더 이상 품지 않는다. 그런 욕망은 병든 몸이 요구하는 상태와 공존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때 자연은 새로운 상황에 걸맞은 욕망과 열정을 우리 안에 불러일으킨다.


우리를 불안하게 만드는 건 자연이 아니라 우리 스스로 만들어낸 두려움이다. 두려움이란 현재의 상태에 존재하지도 않는 욕망을 끼워넣는 일이기 때문이다.


인간의 욕망은 늘 현재를 불행하게 한다

자연은 어떤 상태에 있든 우리로 하여금 만족하지 못하게 만든다. 우리의 욕망은 우리에게 '행복할 법한 상태'를 보여줄 뿐이다. 왜냐하면 욕망은 지금 우리가 처한 현실에, 우리가 누리지 못하고 있는 쾌락을 덧붙이는 것이기 때문이다.


설령 우리가 그 쾌락을 실제로 얻게 되더라도, 그것이 곧 행복으로 이어지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우리는 곧 그 새로운 상태에 익숙해지고, 거기에 또 다른 욕망을 더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보편적인 진리를, 구체적인 사례를 통해 확인해보아야 한다.


불행을 걱정하다가 결국 만족을 잃는다

우리는 너무나 불안해서, 지금의 상태가 망가지면 어쩌나 걱정하느라 어떤 것도 온전히 누리지 못한다. 실제로 많은 일들이 그렇게 무너질 수 있고, 과거에도 종종 그렇게 무너져왔다.


그러나 불행을 미리 걱정하지 않고, 지금 주어진 행복을 기꺼이 누릴 줄 아는 사람은 진정한 요점을 깨달은 사람이다. 그 요점이란 바로 '멈추지 않는 흐름'에 몸을 싣는 것이다.


시간은 마음에 따라 다르게 흐른다

기준 없이 사물을 판단하는 사람과 기준이 분명한 사람의 차이는, 마치 시계를 가진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이 시간을 다르게 느끼는 것과 같다. 한 사람은 "두 시간이나 지났네"라고 말하고, 다른 사람은 "고작 45분밖에 안 됐네"라고 말한다. 나는 내 시계를 보며 전자에게 "당신은 꽤 지루하셨나 봅니다"라고 말한다. 그리고 후자에게는 "시간이 짧게 느껴지셨군요"라고 말한다. 실제로는 한 시간 반이 흐른 것이다.


어떤 이들은 내가 상상으로 시간을 판단한다고 말하지만, 나는 개의치 않는다. 그들은 내가 객관적인 시계(여기서 시계는 '객관적 기준'의 은유로 사용됨-옮긴이)를 기준으로 말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다.


적절함을 넘는 휴식은 오히려 피로를 부른다

정신이 정말로 피로할 때가 아니라면, 그저 기분 전환을 이유로 정신을 다른 곳으로 돌려선 안 된다. 휴식은 정확히 필요한 순간에만 주어져야 하며, 그때를 지나쳐 버리면 오히려 피로보다 더 큰 진력이 찾아온다.


적절함을 넘는 휴식은 정신을 무디게 만들고, 도가 지나치면 결국 모든 것으로부터 도망치고 싶어지는 상태에 이른다. 그것은 더 이상 회복이 아닌, 현실에 대한 탈출이 되어버린다.


한편 간교한 욕망은 우리에게 쾌락을 주지도 않으면서 그 대가만을 요구한다. 쾌락은 우리가 원하는 모든 것을 얻기 위해 지불하는 화폐와 같지만, 그 쾌락조차 누리지 못한다면 우리는 값만 치르고 아무것도 얻지 못하는 셈이다.



소유는 우리를 정말 행복하게 만들까?

완전히 똑같은 건 자연엔 존재하지 않는다

세상은 다양성으로 가득하다. 음색, 걸음걸이, 기침, 코 풀기, 재채기까지 모두가 서로 다르다. 사람들은 포도 같은 과일도 구분해낸다. 프랑스 와인의 포도 품종 이름인 뮈스카, 콩드리외, 데자르그, 접목종··· 우리는 그 차이를 알고 구별한다. 하지만 과연 그것이 전부일까? 한 가지에 똑같은 두 알의 포도가 열린 적이 있는가? 한 송이에 정확히 같은 두 알이 존재한 적이 있는가?


나는 같은 일을 겪고도 똑같은 판단을 내린 적이 없다. 상황은 늘 조금씩 다르고, 내 감각도 언제나 달라진다. 그래서 나는 화가처럼 거리를 두고 사물을 바라보려 한다. 하지만 너무 멀어져서는 안 된다. 그런데 적당한 거리란 어느 정도일까? 그건, 당신의 감각으로 가늠해보라.


인간은 존경받지 않으면 허전함을 느낀다

인간의 가장 비루한 본성은 '영예'를 좇는 데 있다. 그 영예는 곧 자신이 남들보다 우월하다는 증표이기 때문이다. 아무리 많은 것을 소유하고, 건강하고, 편안하게 살아간다 해도, 사람들의 존경을 받지 못하면 인간은 결코 만족하지 못한다. 그는 자신의 이성이 고귀하다고 믿기 때문에, 아무리 지상의 특권을 누려도 '이성의 질서' 안에서 우위를 차지하지 못하면 허전함을 느낀다.


존경받고자 하는 욕망은 인간에게 가장 유혹적인 지위이며, 어떤 유익이나 쾌락도 이 갈망을 대신할 수 없다. 이것은 인간의 마음속에서 가장 지워지기 어려운 욕망이다.


심지어 인간을 가장 멸시하고, 인간을 짐승처럼 취급하는 이들조차도 결국은 인정받고 싶어 하고, 신뢰받기를 원한다. 그들은 자신의 깊은 본능 때문에 자기모순에 빠진다. 이성으로는 인간의 천박함을 비웃지만, 그들 안의 더 강력한 본성은 여전히 인간의 위대함을 갈망하게 만든다.



인간이 만든 질서의 불완전함과 허상에 대하여

타인에 대한 존경은 불편을 감수하겠다는 태도다

진정한 존경이란 "당신을 위해 불편해지겠습니다"라는 태도다. 겉으로는 과장되거나 허황된 말처럼 들릴 수 있지만, 사실 이는 매우 현실적인 정의다. 존경이란 이렇게 말하는 것과 같다. "나는 당신이 원한다면 언제든지 불편을 감수할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비록 그 불편이 당신에게 직접적인 도움이 되지 않는다 해도, 나는 기꺼이 그것을 감내하겠습니다. 게다가 이런 태도야말로, 어른과 상층을 구별하는 데 필요한 장치이기도 하니까요."


만약 존경이 아무 불편함도 없는 편안한 행위였다면, 누구나 모두를 존경하게 되었을 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어른'과 '고위층'을 더 이상 구별할 수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존경은 본질적으로 불편한 일이기 때문에, 그것이 사회적 위계를 드러내는 기준이 된다.


덕을 극단으로 추구하면 오히려 악덕이 스며든다

우리가 덕을 어느 한쪽 방향으로 극단적으로 밀어붙이려 할 때, 그 지점에서 악덕이 모습을 드러낸다. 악덕은 때로는 '작은 무한'의 미세한 균열을 따라 조용히 덕 속으로 스며들고, 때로는 '큰 무한'에서 거대한 무리로 한꺼번에 나타난다.


그리하여 인간은 덕의 이름으로 길을 나섰지만, 어느새 악덕의 안개 속에서 방향을 잃으며, 더 이상 참된 덕을 알아보지 못하게 된다. 그리고 우리는 결국 완전함 그 자체마저 비난하게 된다.



생각하는 갈대! 비참함과 위대함 사이의 인간

생각하는 갈대, 그래서 인간은 존엄하다

인간은 자연 속에서 가장 연약한 존재, 하나의 갈대에 불과하다. 그러나 그는 '생각하는 갈대(인간의 육체적 나약함과 정신적 위대함을 동시에 드러내는 「광세」의 핵심 개념임-옮긴이)'다.


그를 쓰러뜨리는 데 온 우주의 무기가 필요한 것은 아니다. 증기 한 줄기, 물방울 하나면 충분하다. 그러나 우주가 인간을 짓누른다 해도, 인간은 여전히 우주보다 고귀하다. 왜냐하면 인간은 자기의 죽음을 알고, 우주가 자기보다 강하다는 것도 인식하지만, 우주는 아무것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인간의 모든 존엄은 바로 '사유'에 있다. 우리는 이 사유를 통해 자신을 높여야 한다. 공간이나 시간처럼 우리가 결코 채울 수 없는 것들이 아니라, 바로 '생각하는 능력' 안에서 말이다. 그러니 제대로 생각하자. 그것이 바로 도덕의 출발점이다.


왜 우리는 그보다 그의 특성을 더 사랑할까?

어떤 사람이 창가에 서서 길을 바라보는 중에 내가 지나간다고 하자. 그가 나를 보기 위해 그 자리에 있었다고 말할 수 있을까? 아니다. 그는 특별히 나를 의식하지 않았다.


누군가를 그 사람의 미모 때문에 사랑한다면, 그는 과연 그 사람 자체를 사랑하는 것일까? 아니다. 만약 천연두가 그 사람의 아름다움만 앗아간다면, 그는 더 이상 그 사람을 사랑하지 않을 것이다.


사람들이 나를 판단력이나 기억력 때문에 사랑한다면, 그것이 진정 '나'를 향한 사랑일까? 그럴 리 없다. 나는 그런 자질을 잃고도 여전히 나 자신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나'는 도대체 어디에 있는가? 육체 안에도, 정신 안에도 '나'의 본질은 없다. 우리는 소멸되기 쉬운 특성 때문에 사람을 사랑하지만, 정작 그 특성이 아니라면 육체나 영혼 자체를 사랑하는 것이 가능하겠는가? 사람의 영혼을, 그 어떤 특징 없이도 추상적으로 사랑할 수 있을까? 그것은 불가능하고, 어쩌면 부당하기까지 하다.


결국 우리는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그가 지닌 특성만을 사랑하는 것이다. 그러니 지위나 직책 같은 '빌려온 특성' 으로 존경받는 사람을 함부로 경멸해서는 안 된다. 우리가 사랑하는 것도 결국 그러한 특성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천사도, 짐승도 아닌, 단지 인간일 뿐이다

아내와 외아들의 죽음에 깊은 슬픔을 느끼고, 커다란 분쟁에 고통스러워하던 사람이 있었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더 이상 슬퍼하지도 않고 고통이나 불안에서 완전히 벗어난 듯 보인다. 왜일까?


놀랄 필요는 없다. 지금 막 상대가 공을 넘겼고, 그는 그 공을 받아 다시 던져야 하기 때문이다. 그는 득점을 위해 공이 떨어지는 순간을 놓치지 않으려 온 정신을 거기에 집중하고 있다. 해야 할 일이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그는 자신을 생각할 겨를도 없다. 지금 그의 영혼은 오직 이 게임에만 점령되어 있다. 다른 모든 생각은 머릿속에서 지워졌다.


우주를 알고, 모든 것을 판단하며, 한 나라를 다스리기 위해 태어난 이 인간이, 지금은 단지 토끼 한 마리를 쫓는 데 몰두해 있다. 그러나 만약 그가 늘 자신을 높이려 하고, 한순간도 긴장을 놓지 않으려 한다면 그는 오히려 더 어리석어질 것이다. 그는 인간성 위에 존재하려고 애쓰겠지만, 결국 그는 인간일 뿐이기 때문이다.


그는 적은 일도, 많은 일도 할 수 있다. 모든 것을 할 수도 있고, 아무것도 하지 못할 수도 있다. 그는 천사도 짐승도 아닌, 단지 인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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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정보는 도서의 일부 내용으로만 구성되어 있으며, 보다 많은 정보와 지식은 반드시 책을 참조하셔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