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해지려는 관성

   
김지영
ǻ
필름(Feelm)
   
14000
2021�� 08��



 

■ 책 소개

행복은 노력을 통해 성취하는 것이 아니라,
연습을 통해 발견하고 단련을 통해 유지하는 일

누구나 살아가며 한 번쯤 행복에 대해 사유한다. 행복이란 무엇일까, 나는 지금 행복한가, 행복하기 위해선 어떻게 해야 할까. 무수히 많은 질문을 통해 고뇌해도 결국 우리가 깨닫는 건, 행복은 그 무엇으로도 한마디로 정의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저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현재 내가 행복할 수 있는 최소한의 가치와 방향을 찾고 그곳을 향해 나아가는 일일 것이다.

저자는 행복은 성취가 아니라, 그저 꾸준히 발견하고 단련을 통해 유지하는 것이라 말하고 있다. 저자가 행복에 이토록이나 진심이게 된 데에는 가까운 가족의 사고를 경험하게 된 근본적인 계기와 칼럼을 연재하게 된 결정적인 계기 때문이었다. 결국 이를 통해 오늘 살아있음에 행복하지 못할 이유가 없었고, 오늘의 행복을 내일로 미룰 이유는 더더욱 없어졌다고 말하며, 더 쉽게 행복해지고 더 적극적으로 행복하기로 마음먹게 되었다고 한다. 즉, 바로 지금 여기서 행복하기 위해 내일이 아닌 오늘을, 나중이 아닌 지금을 살며 순간순간 마음을 다하고 있는 것이다.

■ 저자 김지영
바로 지금 여기서 행복할 것.

매일 조금씩 읽고 쓰고, 자주 뛰고, 종종 마십니다. 마음을 다한 지금들이 삶을 더 나은 곳으로 데려다 주리라는 것을 믿고, 내일이 아닌 오늘, 나중이 아닌 지금을 삽니다.

디지털 콘텐츠 마케터이자 갓 문화콘텐츠 석사를 마친 고학생. 2017년 독립출판을 계기로 2018년 2월부터 현재까지 동아일보 〈2030세상〉 지면에 칼럼을 연재해 오고 있다.

어릴 적부터 좋아하는 것도, 하고 싶은 것도 많아서 한 우물만 파라는 소리를 주야장천 들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우물 파기 자체를 즐기기 때문에 여러 우물을 팔 때 더 큰 성취를 이루기도 하고, 그 성취는 꼭 일반의 기준이 아니어도 된다고 믿는다. 아직도 장래희망은 모르겠지만 오늘의 꿈만큼은 분명하기에, 꿋꿋이 새로운 우물을 파고 수습한다.

쉽게 울지만 쉽게 웃고, 쉽게 불행해하지만 결국 행복해진다. 고작 책 한 권, 고작 밥 한 끼, 고작 문장 하나로도 행복해질 수 있는 일의 멋짐에 대해, 매일 감탄하고 감동한다.

@jigeum.kim

■ 차례
바로 지금 여기서 행복할 것.
추천의 글
작가의 말

Part 1 발견하기 - 별것 아닌 일상일지라도 그래도
엄마의 취향, 하루, 꿈
선택 위임
각자의 계절
벚꽃 네버 엔딩
즉흥예찬
가끔씩 오래 보자
토요 성수: 일상 여행법
일상 속 소소한 서프라이즈
Free Internet 말고, Internet Free
To send, or not to send?
막상 해 보니 별거인 것들
시간에도 여백이 필요하다
시작증후군 환자의 고백
일일 배우 학교에 다녀와서
있는 그대로의 내 얼굴을 사랑하는 법
추억에 안부를 묻는다
타인의 공간
어차피 헤어질 거라면

Part 2 정의하기 - 내 식대로의 행복
다시 쓰는 백문백답
당신을 정의하시오 (*200자 이내)
좋아하는 일, 잘하는 일, 돈 버는 일
그 많던 꿈들은 어디로 갔을까
MBTI 지표 너머 필요한 것은
○○척의 힘
힙하지 않아도 괜찮아
혼밥은 죄가 없다
퇴사하면 행복할까
한 우물만 파야 할까
30대의 하루는 40대의 4.3일
그냥 내일 뛰면 안 되는 걸까
집밥 판타지
여행조차 잘해야 할까
임아, 갠지스를 건너시오
히말라야에서 만난 태초의 행복

Part 3 유지하기 - 바로 지금 여기서 행복할 것
칼럼을 쓴다는 것
에고 서핑
버리기가 주는 위안
당신의 일상을 바로잡는 힘
달리기의 맛
달리기의 맛, 그 후
기록 병 환자의 고백
루틴의 힘
가을 경주, 작은 사치
바로 지금 여기
나의 첫 혼소주
서로에게 귀한 여행자이고 싶다
슬픔의 연대
수다의 힘
오해의 역학

 




행복해지려는 관성


발견하기 - 별것 아닌 일상일지라도 ‘그래도’

각자의 계절

꽃샘추위가 채 가시지 않은 4월 중순. 이맘때 지하철을 타면 아주 흥미로운 광경을 볼 수 있다. 니트에 얇은 패딩까지 덧입은 사람과 반팔 입은 사람이 나란히 앉아 있는 모습. 분명 같은 시공간인데도 두 개의 계절이 나란히 앉아 있는 모습. 그 와중에 나는 꿋꿋이 패딩을 챙겨 입은 이의 용기에 박수를 보낸다.


추위를 많이 타는 편이다. 절기상으로는 분명 봄인데 여전히 한기가 느껴지는 시기, 출근을 준비할 때면 옷장 앞에서 고민에 빠진다. 외투들을 훑어보고 집어드는 짧은 시간 동안, 육체의 안녕과 마음의 평안이라는 두 욕구 간 작은 교전이 벌어진다. 통상 승기를 잡는 것은 후자이다. ‘4월에 패딩이라니. 이상하게 보일 거야.’ ‘점심 먹으러 나갈 때 회사 사람들이 한마디씩 하겠지.’ 따위의 염려들이 추동하고, ‘에이, 오늘은 괜찮겠지 뭐!’ 하는 낙관이 쐐기를 박는다. 패딩으로 향하는 손을 거두고 얇은 재킷을 챙겨 입는다.


하지만 싸늘한 바깥공기를 마주하는 순간 여지없이 후회하고 마는 것이다. 종일 벌벌 떨다가 결국 다음날 몸져누운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몸소 체득한 이 단순한 진리를, 나는 거의 매번 망각한다. 바들바들 떨 때만 해도 두 번 다시는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으리라 다짐하고, 막상 선택의 순간이 되면 ‘그래도 그건 좀’ 하며 남 눈치를 보는 것이다. 고작 외투 하나 고르는 일이 이렇다.


누구에게나 각자의 계절이 있다. 같은 온도, 같은 바람도 저마다 체감이 다르므로, 누군가에게는 이미 온 계절이 누군가에게는 아직일 수 있다. 반판 입은 사람에게는 이미 온 여름이 패딩 입은 사람에게는 한참 아득하듯. 무리해서 타인의 계절에 맞추었다가는 병이 나기 십상이다. 그 대가가 고작 감기 정도라면 차라리 다행일까. 남 눈치를 보느라 생의 크고 작은 관문과 선택에서 내 계절은 아랑고하지 않고 남의 계절에 맞춘, 맞지 않는 옷을 입는다.


오늘도 내게는 바람이 차다. 아무래도 나의 봄은 좀 더 더디게 오려나보다. 내일은 꼭 패딩을 입을 것이다. 그럼 내가 그랬듯, 나의 패딩에 용기를 낸 또 다른 누군가가 자신의 계절을 찾아갈지도 모르는 일이다. 고작 외투 하나로, 각자의 계절을 찾아가는 ‘4월 패딩 연대’가 이루어질지도.


시간에도 여백이 필요하다

출근길, 신호등이 깜빡이자 모두가 일제히 전력 질주를 시작한다. 아주 지각한 것만 아니라면 나는 되도록 뛰지 않는 편을 선택한다. 신호등을 기다리는 2분 남짓한 ‘허락된 무료함’을 좋아하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버스를 타고 이동하는 것 또한 좋아한다. 이동 시간이 길면 길수록 좋다. 차창 밖으로 흩어지는 풍경을 눈에 담으며 죄책감 없이 ‘낭비’할 수 있는 시간을 즐긴다. 이는 대부분의 시간 동안은 그러지 못한다는 방증이기도 하다.


현대인은 대개 ‘시간 효율 강박’에 시달린다. 새롭지 않은 사실이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강요되어온 시간 절약의 미덕 탓이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보내는 비생산적인 시간, 빈둥거리는 시간은 나태, 무능의 상징으로 여겨졌다. 스티브 잡스를 필두로 창의인재가 각광받는 시대에 이르러서야 뒤늦게 적절한 휴식의 중요성을 설파하는 책이 한동안 서점가를 휩쓸기도 했지만, 쉼조차 ‘투두 리스트(To Do List)’를 작성하는 것이 여전한 현실이다.


특히 요즈음에는 이러한 강박이 콘텐츠 소비문화와 맞물려 새로운 양태로 펼쳐진다. 20대 전문 연구기관인 대학내일에 따르면, 적막에 대한 거부감과 효율적 시간 사용에 대한 강박이 팟캐스트나 브이로그 등 스트리밍 콘텐츠 선호로 이어진다고 한다. 빈 시간을 빈 상태로 남겨 두지 못하고 무언가를 듣거나 보면서 여백을 지운다. 밥을 먹거나 길을 걸으면서도 콘텐츠를 소비하는, 바야흐로 멀티태스킹의 일상화다.


가장 최근 ‘무료함’을 느껴 본 게 언제일까. 대부분이 재미없는 영화를 봤을 때 정도일 것이다. 우리는 항상 무언가를 하고, 채워지지 못한 시간, 이름 붙지 못한 하루에 죄의식을 가진다.


가끔은 용도 없는 시간도 필요하다. 죄책감 없이 낭비할 수 있는 그런 시간 말이다. 멍 때리기를 조금 더 격상시켜 표현하면 명상, 사색이다. 비워야 채울 틈이 생긴다. 효율이라는 명목하에 모든 시간을 여백 없이 빼곡히 채우기만 한다면, 그 어느 틈으로도 내적 대화는 이루어질 수 없을 것이다. 실제로 멍 때리기는 뇌 건강에도 큰 도움을 준다고 하니, 이제 그만 해묵은 죄책감을 거두어도 되지 않을까.



정의하기 - 내 식대로의 행복

좋아하는 일, 잘하는 일, 돈 버는 일

“어릴 때 취미랑 특기 헷갈리지 않았어?” 나만 그런 줄 알았더니 여기저기서 맞장구를 친다. 사물함에 취미, 특기, 장래희망을 써 붙이던 시절, 고작 열 해 가까이를 산 어린이에게 ‘취미’와 ‘특기’를 구분하는 것은 퍽 버거운 일이었다. 취미는 좋아하는 것, 특기는 잘하는 것이라는 선생님의 부연 설명을 듣고 나서도 의아하기는 마찬가지였다. ‘같은 거 아닌가?’


그림 그리기를 좋아했고, 또래 대비 곧잘 하는 편이었다. 좋아해서 잘하게 된 건지, 잘해서 좋아하게 된 건지 선후관계는 분명하지 않았지만 중요하지도 않았다. 자연스럽게 커서도 관련된 일을 하는 사람이 되겠거니 했다. 흥미와 역량을 분리해 생각하기 어려웠던, 그것들이 너무나 매끄럽게 밥벌이로 이어질 거라 오해하던 시절.


그러나 발 디딘 세계가 넓어질수록 ‘좋아하는 것’들의 배신이 줄을 이었다. 숱한 관심과 시도들이 ‘잘 하는 것’이 되지 못한 채, 취미의 경계에서 피고 졌다. 오랜 시행착오를 거쳐 이제 나의 취미란에 탈락 없이 머무는 것들은 주로 ‘잘함’에 대한 기준이 없거나 불필요한 것들 –여행, 독서 등-이다. 혹은 잘하고 싶지만 그러지 못하는 것들, 즉 ‘좋아(만) 하는 것들.’


‘특기’란을 채우는 데는 점점 용기가 필요했다. 스스로 무언가를 ‘잘한다’고 명명하는 것에 대해 면구스러움을 넘어 가소로운 마음마저 일었다. 자기 검열로부터 자유롭기 위해서는 최소한의 증빙이 필요했다. 주로 점수나 타이틀로 대변되는 것들이었다. 오랜 기간 ‘취미’의 칸에 갇혀 있던 ‘글쓰기’는 청탁을 받고 글을 쓴 지 몇 해가 지나서야 슬그머니 눈치를 보며 ‘특기’의 칸으로 넘어올 수 있었다.


그러므로 이제는 안다. 좋아하는 것은 결코 잘하는 것과 같지 않으며, 돈 버는 것과는 더욱이 다를 수밖에 없다는 것을. ‘좋아하는 일 = 잘하는 일 = 돈 버는 일’의 등식이 성립할 확률은 극히 희박하다는 것을.


좋아하기보다는 그럭저럭 잘하는 일로 돈을 벌고, 못하지만 좋아하는 일을 위해 기꺼이 자원과 마음을 할애한다. 몇몇은 잘하는 일의 영역으로 옮겨올 수 있지 않을까 은밀한 욕심을 내보기도 하지만, 돈을 벌 깜냥은 안 될 것이다.


그러나 이제는 또한 안다. 좋아하는 일, 잘하는 일, 돈 버는 일이 반드시 같아야 할 필요도 없다. 순수한 애정에 의무가 깃을 때, 때로는 부담이 설렘을 가로막기도 한다. 각각이 역할을 나누어 분화되어 있는 존재 방식도 사실은 꽤 괜찮다. 어떤 일은 생각만으로 가슴이 뛰고 시도만으로도 삶을 기대하게 한다. 어떤 일은 생계와 무관한 영역에 남도록 지킬 수 있어 다행이다. 그리고 어떤 일은, 이 모든 일이 지속될 수 있도록 일상을 지탱한다.


이런 마음으로, 오늘도 출근을 한다. 출간 원고 작업이 한창이지만 감사히도 생계와는 무관하니 마음에 여유가 있다. 이달부터는 재즈보컬을 배운다. 영 자신은 없지만, 가슴이 뛴다. 그것으로 이미 충분하다.


집밥 판타지

혼자 살던 사회 초년 시절, 어쩌다 마음이 축난 날에는 퇴근 후 요리를 했다. 평소 즐기는 것도 딱히 잘하는 것도 아니지만 기다리는 사람도 없겠다 한 시간이든 두 시간이든 또각또각 칼질을 하고 무엇이든 만들어 상을 차려 놓고 나면 먹지 않아도 배가 불렀다. 오후 11시가 다 되어 먹는 집밥이 오후 9시에 사 먹는 국밥보다 몸에 좋을 리 만무한데 괜히 더 건강해지는 듯한 착각마저 들었다. 후에 알았는데 의사들이 우울증을 극복하는 방법 중 하나로 추천하는 것이 바로 요리라고 한다. 작더라도 무언가를 만들어 성취하는 과정과 스스로를 대접하는 방법.


바빠진 지금은 그마저도 쉽지 않다. 물리적인 시간도 없거니와 그럴 만한 에너지도 남아 있지 않다. 뭣보다 어쩌다 한 번 요리를 하는 2인 가족이 감당하기에는 식재료 값이 만만치 않다. 실제 쓰는 분보다 기한이 지나 버리는 분이 더 많은 것은 물론이고, 때맞춰 음식물쓰레기를 가져다 버리는 일조차 사실은 큰 부담이다. 흰 쌀밥에 찌개, 밑반찬 서너 가지가 올라간 밥상을 차리기 위해 드는 시간적, 금전적 비용에 비해 퇴근길 집 앞에서 사 먹는 국밥 한 그릇은 너무나 간편하다. 그래도 뭔가 집에서 먹는 밥이 그리운 날엔 가정 대체식(HMR, Home Meal Replacement)으로 대리만족을 한다. 즉석밥을 데우고 반조리 찌개를 끓여, 사거나 얻어온 반찬 몇 가지만 꺼내 차리면 여느 집밥 부럽지 않은 한 상 차림이 완성된다.


요즘 밥을 먹을 땐 TV 예능 <스페인 하숙>을 즐겨 본다. 비록 나는 반조리 식품으로 가득한 밥상을 꾸덕꾸덕 씹고 있지만 영상 속에서나마 갓 지은 밥과 보글보글 끓는 찌개를 보며 자위한다. 3분 만에 만든 내 밥상 위의 동그랑땡이 현실이라면 소고기와 돼지고기를 다져 만든 예능 속 동그랑땡은 허구에 가깝다. 어느덧 집밥이라는 것은 산티아고 순례길 못지않은 판타지가 됐다. 그래서일까. ‘쿡방(오리방송)’이 대세인데 요리 인구는 늘지 않고 아이러니하게도 가정대체식 시장 규모만 역대 최고다.


물론 편리하고 어떻게 보면 직접 만든 것보다 맛도 더 낫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채워지지 않는 이 허기는, 단순히 주린 배를 채우는 것과는 별개의 일일 것이다.


바쁜 일상에 치어 간편식으로 끼니를 때우고 공기 청정기에 의지해 잠을 청한다. 좁은 공간에서 돈을 내고 땀을 흘리고, 생각일랑은 정리할 새도 없이 내일의 쳇바퀴로 갈아탄다. 행복의 근원은 단순하지만 그 실천은 어려워서 현대를 사는 우리에게는 일종의 판타지와 다름없어 보인다. 다음 휴가는 (어느 예능에서처럼) 어디 공기 좋은 데 가서 하루 세 끼 밥이나 지어 먹으며 보내고 싶다. 어쩌면 비행기를 타고 해외로 떠나는 일보다 더 어려울지도 모르겠다. 잘 먹고 잘 자는 일, 참 쉽지 않다.



유지하기 - 바로 지금 여기서 행복할 것

당신의 일상을 바로잡는 힘

왜, 가끔 그럴 때가 있지 않은가. 스스로가 뒤틀려 있다는 생각이 들 때, 끝도 없는 바닥으로 침잠하고 있다고 느낄 때, 모든 것이 실패한 것 같고 손쓸 수 없거나 그럴 에너지가 남아 있지 않다고 여겨질 때. 증상이야 끝도 없이 열거할 수 있지만 최대한 객관적 용어를 빌려 정의하자면 무기력증, 더 나아가 가벼운 우울증 정도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럴 때 나는 다이어리 한쪽에 부적처럼 새겨 넣은 매뉴얼을 펼친다. ‘무기력을 극복하는 방법.’ 일종의 ‘비상조치 매뉴얼’인 셈이다. 대단한 것은 없지만 이 모든 증상을 단번에 털어버릴 수 있는 치트키인 ‘여행’의 처방이 불가한 요즘, 혹여 작은 도움이라도 될까 싶어 공유한다.


먼저 준비운동은 출근 전 갖는 ‘모닝 카페 타임’이다. 원래도 힘들고 의욕이 없을 때는 특히 더 힘들지만 평소보다 딱 한 시간만 일찍 일어나자. 그러고는 출근 전 잠시 근처 카페에 들르는 것이다. 집, 사무실로는 안 되고 반드시 ‘제3의 공간’이어야만 한다. 아침 카페 특유의 분주하면서도 차분한 분위기가 있다. 커피 향기, 주문을 주고받고 커피를 내리는 소리, 책을 읽거나 신문을 보며 각자의 방식으로 하루를 준비하는 사람들. 차례로 감각을 깨우고 마침내 따뜻한 커피까지 한 모금 하고 나면 다시 중심을 잡을 용기가 생겨난다.


뒤이어 핵심은 운동과 독서다. 역시 평소 습관이 되어 있지 않다면 쉽지 않은 일이겠지만, 시늉(?)만으로도 충분하다. 헬스장을 찾아 땀을 뻘뻘 흘리는 그런 운동 말고 단 10분이라도 짬을 내 이동을 위한 수간으로의 걷기가 아닌 목적으로서의 걷기. ‘산책’을 하는 것. 첫 페이지부터 끝 페이지까지 한 글자 한 글자 공부하듯 읽어 나가는 그런 독서 말고, 단 한 페이지만이라도 손으로는 종이의 질감을 느끼고 입으로는 문장의 리듬을 느끼는 것. 별것 아닌 것 같지만 매일 조금씩이라도 걷고 읽는 것만으로도 일상은 그 정렬을 바로잡는다.


여유가 된다면 화룡점정으로 퇴근 후 요리를 추천한다. 귀갓길에 사서 들어가는 포장음식, 배달음식, 그도 아니면 가정대체식으로 해결하던 ‘끼니’ 대신 재료를 썰고 만지며 스스로를 위한 한 끼 ‘식사’를 대접하는 것이다. TV를 켜도, 휴대폰만 검색해도 각종 레시피가 넘쳐나는 요즘이니 크게 어려울 것은 없겠지만, 영 자신이 없는 ‘요알못’이라고 걱정하지 마시라. 우리에게는 김치볶음밥이 있다. 산출물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작더라도 무언가를 만들어 성취하는 과정과 스스로를 대접하는 의식 그 자체에 의미가 있다.


거리 곳곳에 ‘코로나 심리 상담 지원’ 현수막이 눈에 띈다. 감염에 대한 공포와 ‘사회적 거리 두기’의 장기화로 ‘코로나 블루’가 사회적 문제로 대두되는 요즈음, 그 어느 때보다도 일상을 지키는 힘이 간절하다. 별것 아닌 줄 알았던 매일의 위대함을 날로 느끼는 시기이지만, 그 오늘들을 바로잡는 힘은 의외로 사소한 것들로부터 비롯될 수 있다. 당신의 ‘일상을 바로잡는 힘’은 무엇인가. 그 이야기들도 자못 궁금하다.


가을 경주, 작은 사치

높아진 하늘에서 제법 가을 냄새가 난다. 엊그제가 절기상 추분(秋分)이었다. 가을의 본격적인 시작인 백로(白露)와 찬 이슬이 맺히기 시작하는 한로(寒露) 사이, 비로소 낮과 밤의 길이가 같아지는 날. 땅거미가 내려앉은 퇴근길 풍경 앞에서 새삼 선조들의 지혜에 탄복한다.


가을이 왔다. 경주에 갈 때가 된 것이다. 매년 가을이면 경주를 찾는다. 함께도 좋지만 대체로 홀로 가는 편을 선호하는 이유는, 동행보다는 여행에 온전히 마음을 쏟고 싶기 때문이다. 울긋불긋 단풍이 진 토함산 자락을 따라 불국사를 찾는다. 점심은 하산 길 청국장에 막걸리면 더할 나위 없다. 여유가 된다면 문무대왕릉에 들러 부서지는 파도소리에 모난 마음을 깎아낸다. 그리고 이튿날, 상쾌한 가을 아침의 공기를 맡으며 커피 한 잔을 들고 왕릉 가를 걷다 보면 마음이 한결 차분해진다.


아마 방법은 다를지라도 누구에게나 자신만의 이런 ‘비법’이 있으리라. 다친 마음을 치유하고 다시금 앞으로 나아갈 용기를 내기 위한 일종의 의식. 혹자에게는 늘어지게 자는 낮잠일 수도, 가벼운 산책일 수도, 친구들과의 거나한 술자리일 수도 있겠다. 무엇이든 좋겠지만 행여 아직 그 방법을 찾아 헤매는 경우라면 단연코 여행은 그 지름길이다. 그리고 청명한 하늘과 산뜻한 공기가 발걸음을 재촉하는 가을은, 두말할 것도 없는 여행의 적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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