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 한 송이 하실래요

저   자
홍사라
출판사
책이있는풍경
가   격
14,800원(232쪽)
출판일
2020년 07월





꽃 한 송이 하실래요


언제까지나 당신의

고혹적인 그녀를 닮은 꽃 - 마릴린먼로

“제가 꽃을 좀 알거든요. 냉장고 보고 직접 골라도 되나요?"


한참을 넓은 냉장고 구석구석을 쳐다보더니 제일 왼쪽 구석에 있던 하얀 꽃을 가리키며 묻는다.


"이거 작약이에요?"


"아닌데요, 장미예요.”


꽃을 좀 안다던 손님의 얼굴에 살짝 당황한 기색이 보였다.


"에이, 무슨 장미가 저렇게 커요? 처음 보는 건데, 장미 맞아요? 아닌 것 같은데?"


"마릴린먼로라는 화이트 장미예요. 처음 나왔을 때 한 송이에 4만 원을 호가하던 장미였는데, 이제는 그래도 좀 보편화돼서 그렇게까지 비싸지는 않아요. 꽃도 매우 크게 피고 다 좋은데 연약한 편이라 오래가지는 않아요. 한 4~5일 보실 수 있을 거예요. 장미 중에서도 향이 엄청난데 한번 맡아 보시겠어요?"


손님이 고른 장미 마릴린먼로는 다른 장미들보다 크고 풍성한 꽃 얼굴을 자랑한다. 꽃잎 한 장 한 장의 자태가 곱고 우아해서 웨딩부케로도 많이 사용된다. 이 꽃은 황금색 금발, 풍만한 몸매와 매혹적인 미소로 전 세계인을 사로잡은 배우 마릴린먼로와 꼭 닮았다. 그래서 이름도 이렇게 지어진 것 같다.


마릴린먼로의 인생은 사랑을 빼고 이야기할 수 없다. 그녀의 마음을 뒤흔든 남자는 여러 명이었지만, 그중 야구선수 조 디마지오와의 이야기가 특히 기억에 남는다. 디마지오와 먼로는 결혼한 지 9개월 만에 헤어졌지만, 이후에도 서로를 잊지 못했다. 디마지오는 세 번째 결혼에 실패한 먼로가 음주와 약물중독에 빠졌을 때 재결합하려고 했다가, 갑작스러운 그녀의 죽음으로 좌절하고 만다. 그는 20여 년 동안 매주 그녀의 무덤에 장미꽃을 바치며 그리움을 달랬다고 한다. 디마지오가 바쳤던 장미가 마릴린먼로였는지 알 수 없지만, 이 꽃만 보면 결코 잊을 수 없는 사랑의 안타까움이 느껴진다.


마릴린먼로는 크기뿐 아니라 향이 실로 대단해서, 어떤 장미에서도 그와 같은 향을 맡아 보기는 힘들다. 매우 차별화된 향이며, 장미 향을 좋아하지 않는 나도 꽃송이에 코를 파묻고 있고 싶을 만큼 매혹적이다. 향수로 나오면 참 좋겠다 싶은데 아직까지 그런 제품을 만나 보진 못했다. 아, 절대 흉내 낼 수 없는 자연의 향.


"와! 진짜 좋네요. 이걸로 주세요."


고객은 마릴린먼로 한 송이를 포장해 달라고 했다. 꽃송이가 워낙 커서 한 송이만으로도 분위기를 내기에 충분하다. 예쁘게 포장하여 건네니 고객이 품에 안으며 기분 좋게 인사했다.


"고마워요, 정말 예쁘네. 한 송이만 해도 충분하겠어요."


그가 안고 간 마릴린먼로는 오늘 누구의 마음을 설레게 할까?


세상 최고의 행복함 - 조팝나

예식이 열리는 연회장 전체를 조팝나무로 장식했다. 버들가지처럼 얇고 긴 가지들에 작은 꽃이 수백, 수천 송이씩 달려 하늘거리는 나무. 조팝나무들로 장식한 홀은 너무나 아름답다. 유연하고 우아한 가지들 위로 흐드러지게 피어 있는 알알이 작은 꽃들이 바라보기만 해도 황홀하다. 바람이 없어도 바람에 나부끼는 것 같은 착각이 들 정도로 자연스러운 아름다움을 뽐낸다. 조팝나무와 함께 은은하게 반짝이는 양초까지 넉넉하게 배치하면 여기는 더 이상 한국이 아닌, 봄날 어디 화보에 나올 법한 외국의 도시에 와 있는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하객들이 자아내는 탄성을 보니 역시 조팝이다 싶다.


공기에 봄 내음이 실리면 아래쪽 지방에서는 산이나 길에 있는 조팝나무에 꽃망울이 몽글몽글 달린다. 알알이 조그만 꽃들이 모여 풍성하고 따뜻한 자태를 자아낸다. 조팝나무로 웨딩홀을 장식하는 건 봄에 결혼하는 사람들이 누릴 수 있는 특권이다. 3~5월 사이에만 나오기 때문에, 어떤 신부들은 조팝나무 아래서 결혼하고 싶어 봄의 신부가 되려고 할 만큼 인기가 있다.


조팝나무로 장식을 하다 보면 온 천지가 2mm도 안 되는 꽃잎으로 뒤덮인다. 아무리 조심을 하면서 작업한다고 해도, 바람이 스치기만 해도 흩날리는 이 꽃잎을 막을 방법이 없다. 사다리를 타고 작업하다 아래를 보면 마치 눈이 한가득 내린 것 같은 모양새다.


그래서 조팝 웨딩을 하는 날이면 청소를 담당하는 이모님들의 눈빛이 곱지 않다. 이 꽃을 들고 연회장 안으로 들어오면 고개부터 절레절레 흔드신다. 사방팔방 꽃잎 천지에 컵이랑 접시에도 떨어져 청소할 때 애먹는다고 싫어하시는 눈치다. 연신 “힘드시죠, 죄송해요.”라고 말씀드리며 몰래 조팝나무 가지 하나를 안겨 드린다. 예쁘긴 정말 예쁘니까 이거 보시고 잘 부탁드린다는 의미다. 청소하는 데 걸리는 시간이 만드는 데 걸리는 시간과 맞먹을 만큼 잔손이 많이 가지만 그만한 보람을 되돌려 주는 꽃이다.


보기에 예쁜 떡이 먹기에도 좋다고, 조팝나무 추출물은 아스피린 최초의 원료이기도 하다. 아스피린이라는 이름 자체가 조팝나무의 속명 ‘스파이리어(Spiraea)’에서 유래되었다. 이렇게 보기에도 예쁘고, 전 세계에서 열일하는 이 나무의 꽃말은 아이러니하게도 ‘하찮다’, '‘헛수고’이다. 조팝꽃 한 송이만 놓고 보면, 장미나 작약처럼 커다랗고 화려하지 않아서 이런 꽃말을 가지고 있는 걸까? 내가 봐온 조팝나무는 전혀 그렇지 않은데 말이다.


조팝나무라는 말이 생긴 유래는 몇 가지 설이 있다. 쌀 알갱이를 알알이 튀겨 놓은 것 같다고 조밥 나무라고 부르던 것이 강하게 발음하다 보니 조팝나무로 불렸다는 설과, 멀리서 보면 들판에 좁쌀 같아 보여서 그렇게 불렀다는 설이 대표적이다. 배가 고파 굶주리던 시절 곡식인 줄 알고 다가갔는데 몽글몽글 피어난 꽃이라서 드는 허망함에 그런 이름이 붙은 건가 싶다.


아무리 예쁜 꽃도 어떤 마음으로 바라보는가에 따라 많이 다르다는 생각이 들었다. 반짝이는 봄날 예식에 참석한 하객들은 보릿고개가 있던 배고픈 조선시대 어딘가에서 이 꽃을 보았을 때 들었던 허망함 따위는 상상도 할 수 없을 테니 말이다. 웨딩홀의 조팝나무는 원래의 꽃말이 ‘하찮음’이든 ‘헛수고'이든 상관없이 그냥 ’아름답다‘ 내지는 ’멋지다‘일 테니까.


그날의 신부에게 조팝나무는 어떤 의미로 기억될까? ‘세상 최고의 행복함’은 아니었을까.


기다리면 봄은 온다 - 화살나무

나무 중에 화살나무라는 특이한 이름의 나무가 있다.


가로수로도 가끔씩 만날 수 있는데, 겨울철이 되면 거칠고 투박한 모습 때문에 사람들은 쉽게 이 나무에게 눈길을 주지 않는다. 바짝 마른 황토색 가지에, 생명력이라고는 전혀 찾아볼 수 없는 나무껍질이 덕지덕지 붙은 겉모습을 가지고 있다. 손을 가져다 대면 그 메마름에 피부가 상처 날 것만 같은, 사막 같은 건조함이 있다. 그 건조함과 날카로움이 정말 나무 화살 같아서 사람들에게 주목받지 못하고 덩그러니 서 있는 모습이 무척이나 외로워 보인다.


처음 이 나무를 접했을 때 내 머리에 가장 먼저 떠오른 생각은 이러했다.


‘뭐 이렇게 투박해. 이걸로 어떻게 예쁘게 만들겠어.’

아무런 기대도 애정도 없이 갈색 항아리에 뭉텅이로 꽂아 두었다. 어떤 화분에도 어울릴 것 같지 않았고, 꽃을 하는 사람이 꽃을 차별해서는 안 되지만, 열 손가락 깨물어 조금 덜 아픈 손가락이 있듯이 그렇게 마음이 도무지 가지 않는 나무였다.


며칠이나 지났을까.


건조해 보이는 꽃이나 나무들이 그렇듯, 물을 많이 필요로 할 것 같아 물이나 주러 화살나무를 꽂아 두었던 호텔 라운지로 올라갔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내가 꽂았던 그 바싹 말라 보이던 나무는 어디로 가고, 그 자리에 말랑말랑하고 연약한 아기 엉덩이 같은 연둣빛 잎들이 가득 피어 있는 것이 아닌가!


화살나무를 보면서 불현듯 떠오른 사람이 있었다.


요즘 들어 ‘언니, 언니’ 하며 나를 좋아해 주는 동생이었는데, 처음 만났을 때 생기라고는 도무지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기운이 없어 보였다. 일을 하고 싶어 찾아왔으니 최대한 밝은 모습을 유지하려 했던 것 같은데 쉽게 마음을 열지 못하고 경계하는 기색이 있었고, 퉁퉁 부어 있는 얼굴과 피곤해 보이는 눈빛에서 왠지 모를 쓸쓸함이 느껴졌다. 마치 내가 거리에서 마주친 바싹 마른 화살나무처럼 말이다. 몇 번의 만남 후에 어느 정도의 친분이 쌓이자 그녀는 그동안 겪었던 일들을 나에게 털어놓았다.


그 친구의 속내를 알게 되면서 자꾸 마음이 쓰였다. 나도 그런 시간들을 지나 봤기 때문에 더 마음이 쓰였는지도 모르겠다. 그냥 이야기라도 들어 줘야겠다 싶어 내가 먼저 손을 내밀었다. 내가 할 수 있는 거라곤 좋은 곳에 데려가거나, 그녀가 하고 싶어 하는 이야기를 들어 주거나, 좋은 사람들과 만나게 하는 것밖에 없었지만, 작게나마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마음이었다. 힘들 때 정말 필요한 것은 ‘그냥 옆에 있어 주는 것’일지도 모르니까.


그런 시간이 6개월쯤 지났을까. 처음엔 모든 걸 어색하게, 마음을 닫아 둔 채로 있었던 그녀는 점차 달라져 갔다. 건강해졌고, 예뻐졌고, 자신감이 넘쳤고, 당당해졌다. 스스로 얼마나 노력을 했을지 안 봐도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처음엔 별 볼일 없었던 화살나무가 봄을 맞이해 생기가 가득해진 것처럼, 그녀는 지금 활기가 넘친다. 기가 다 빠져나간 것 같은 얼굴이었는데, 몸과 마음이 회복되면서 생기가 돌아오기 시작했다.


생기 없는 나무에서 연약하지만 잎사귀가 올라오듯, 사람도 가끔씩 인생에서 힘든 시간을 맞닥뜨리곤 한다. 비록 그 상황이 내가 원하지 않던 방향으로 흘러가거나 절망적이어서 견디기 아플지라도, 어느 정도의 시간이 지나면 결국 그렇게 싹을 틔운다. 대부분의 나무들이 겨울의 동면기를 제대로 거쳐야 꽃을 피울 수 있는 것과 같은 원리가 아닐까.



언제까지나 우리의

불완전하나 영원하기를 - 보라색 장미

나는 보라색을 참 좋아하지만, 예식에 쓸 때는 주의하는 편이다. 보라색 장미는 ‘영원한 사랑’과 ‘불완전한 사랑’이라는 의미가 상충하기 때문이다.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지만 꽃말에 유독 신경을 쓰시는 신랑신부도 있기 때문에, 그런 분들께는 잘 설명드리고 의견을 조율해 무리가 없게 진행한다.


이번 행사는 결혼식만큼 세세하게 신경 쓸 게 많은 큰 규모의 행사는 아니어서 편한 마음으로 내 앞에 산처럼 쌓여 있는 보라색 장미를 다듬고 집에 돌아와 버릇처럼 TV를 켰다.


“넌 그렇게 고결하냐, 한 번도 안 헤퍼 봤어? 그게 잘못된 거니? 누가 사랑을 고따위로 자기 것 다 움켜쥐고 한대, 싸가지 없게! 해퍼야 사랑이야, 바보 천치야!”


자극적인 대사에 옷을 갈아입다 말고 자연스레 내 눈은 TV로 향했다. KBS 단막극 <조금 야한 우리 연애>의 대사, 어쩜 그렇게 정곡을 찌르던지.


우린 때때로 사랑을 한다고 하지만, 그 사람보다는 사랑 자체에 매달린다. 얼마나 주고 얼마를 받았는지, 얼마만큼 하면 얼마가 돌아올 건지, 지금 그 사람이 내가 그만큼 줄 가치가 있는지 아니면 다른 사람이 나은지, 헤어질 때 상처를 조금이라도 덜 받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이렇게 갖가지 생각으로 고결하고 도도한 ‘척’ 사랑이란 걸 한다.


생각이 앞서 있다면 그건 이미 사랑이 아니다. 사랑은 내 것 다 움켜쥐고는 할 수가 없다. 나중에 무엇이 돌아오더라도, 상처가 크게 남더라도, 내 것을 놓아 줘야만 할 수 있는 것이다. 생각이 앞서 있는 사랑을 마음으로 포장해 봐야 포장지만 한 겹 뜯으면 그냥 생각일 뿐이다. 어쩜 우리는 사람의 마음이 아닌, 사랑이란 감정 자체를 사랑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사랑에 대해 이렇게 적어 본 적이 있다. 두 가지의 완전히 다른 듯 보이는 꽃말을 가진 보라색 장미처럼, 우리의 사랑은 대부분의 시간 동안 늘 불완전하다. 사랑이 완벽하거나 영원하기란 좀처럼 힘든 일이다. 누가 보라색 장미에 의미를 부여한지 알 수 없지만, 늘 불완전하지만 영원했으면 하는 사랑을 기대하는 마음에 그렇게 지은 건 아닐까. 헤퍼야 사랑이라는 말이 그래서 마음에 들어왔다.


꽃이 피어 있는 자리 - 수국

6월이 되면 사람들이 꽃을 보고 사진을 찍으러 제주도를 찾는다. 여름을 대표하는 꽃, 바로 수국을 보기 위해서다.


수국은 아주 작은 꽃잎들이 하나하나 모여 크고 풍성한 하나의 꽃다발을 만든다. 큰 것은 아이 얼굴보다도 클 정도로 매우 크다. 이런 수국이 군락을 이루고 있는 지역들이 있는데 수국이 만개한 광경은 그야말로 장관이다.


제주에는 여름비를 맞아 반짝이는 수국을 찍을 수 있는 좋은 장소들이 있다. 성산과 세화를 잇는 종달리 해안도로에는 수국이 일렬로 쭉 심겨 있는데 만개했을 때 무척이나 아름답다. 카멜리아 힐이라고 불리는 그곳은, 겨울이면 동백이 활짝 피고 여름엔 수국이 만개한다.


나는 6월이 되면 어느 지역이든 수국을 보러 여행을 떠난다. 한가득 피어 있는 수국을 보면 마음까지 환해지는 느낌이 들기 때문이다. 색색의 수국을 바라보면서 살짝 손을 대어 본다. 작은 꽃잎 끝까지 물이 가득 차 있는 단단한 느낌이 손으로 전달되는데, 그 느낌이 좋아서 몇 번이고 더 그렇게 해본다. 그리고 늘 신기해한다. 자연 그대로의 수국은 스스로 이렇게 물을 잘 빨아들이는구나, 역시 자연적인 걸 따라갈 수는 없나봐, 라고.


호텔 플로리스트라면 아마 가장 많이 다루게 되고 보게 되는 꽃이 수국일 것 같다. 결혼식 꽃장식에 단골손님으로 등장할 만큼 많이 사용되는 꽃이라 한번 예식을 치르게 되면 몇 백 송이씩 들어간다. 많은 양의 수국을 결혼식 당일까지 잘 관리하고 보관해야 하는데, 이때 가장 주의를 기울이는 것이 ‘물올림’이다(물올림이라는 것은 오랫동안 물이 없는 상태로 배송되어 온 꽃이 수분을 머금을 수 있게끔 작업하는 것을 말한다).


수국은 다른 꽃보다도 물관리가 쉽지 않다.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이 물을 많이 필요로 하는데 아이러니하게도 절화 상태의 수국은 물을 빨아들이는 힘이 다른 꽃보다 약하다. 그래서 줄기의 표면적을 넓히기 위해 사선으로 길게 잘라 주고 물도 많은 양을 받아서 꽂아 둔다. 그것도 모자라 꽃 부분에 직접 스프레이를 시간이 날 때마다 뿌려 주거나 얇은 종이나 비닐 등을 올려 수분이 날아가는 것을 방지해 주기도 한다. 이렇게 다루기 까다롭고 예민한 꽃인데, 자연 상태의 수국은 해가 쨍쨍 아주 더운 날에도 동글동글한 모양 그대로 너무도 쌩쌩해서 볼 때마다 신기하다.


수국을 보면 자연 그대로의 상태가 가장 좋구나 하는 생각 이 든다. 자연은 원래 자연 상태 그대로 두었을 때 가장 건강하고 아름답다. 어떻게 보면 사람도 마찬가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일이라는 것도 어떨 때는 딱딱 맞아떨어져 쉬이 진행되는 일도 있고, 어떨 때는 노력을 많이 기울이는데도 삐그덕거리는 일도 있다. 사람과의 관계도 그런 것 같다. 그냥 아무것도 안했는데 편안한 사람이 있는가 하면 나와는 어느 한구석이 달라 불편한 사람도 있다.


물론 사람마다 살아가는 방식이나 가치관은 다 다르다. 어떤 일을 책임감 있게 끝까지 해내는 것도 매우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럼에도 일이나 사람과의 관계가 자꾸만 억지로 끼워 맞추어지는 느낌이 든다면 잠시 멈추고 생각해 볼 일이다. 그 자리에 서 있는 것이 맞는 일인지, 지금의 모습이 너무 부자연스럽지는 않은지 말이다. 절화로 볼 때보다 자연스럽게 뿌리를 바닥에 두고서 있는 수국이 손길을 덜 보내더라도 훨씬 더 건강한 것처럼, 어쩌면 우리도 그렇지 않을까? 충분히 시간을 들여 노력했다면 잠시 흐름에 몸을 맡겨 자연스럽게 두어 보는 것도 좋지 않을까?


본연의 아름다움 - 카라

조르지오 아르마니(Giorgio Armani).


패션 브랜드인 줄로만 알았던 이곳에서 꽃을 취급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 건 대략 6년 전쯤이었다. 우연히 청담동을 지나다 보니 아르마니 까사 매장에 초콜릿 전문점 아르마니 돌치(Armani Dolci)와 플라워숍 아르마니 피오리(Armani Fiori)가 입점해 있었다. 들어가 보니 너무나 고급스러운 매장에 꽤 비싼 가격의 초콜릿들과 꽃이 있었다. 아르마니가 의상의 범주를 벗어나 라이프스타일까지 영역을 확장한 결과물이었다. 패션 브랜드가 꽃 매장을 가지고 있다니. 신선한 발상에 조금 놀랐던 기억이 난다.


몇 년 후, 마치 운명처럼 내가 있던 호텔은 아르마니 피오리와 콜라보를 진행했다. 국내 유명 호텔은 끊임없이 새로움을 추구하기 때문에 종종 세계적인 플로리스트나 그에 버금가는 브랜드와 콜라보를 진행하곤 하는데, 이번 선택은 아르마니 피오리였던 것이다.


아르마니 피오리의 스타일링은 아르마니의 본질적이고 엣지 있는 세련된 취향과 고급스러움으로 가득했다. 과하지 않은 깔끔한 컬러감과 선을 살린 디자인이 무척 매력적이었고 신선했다. 부자재로 자개나 대리석 등을 사용하는데, 화기도 아르마니가 직접 선택한 것이 아니면 사용하지 않고, 포장 종이와 리본 등 모든 면에서 최상급 브랜드의 가치를 그대로 보여 주고 있었다. 고전적이면서도 시대를 반영하는 트렌디함이 꽃을 디자인하는 데에도 그대로 드러나 있었고 영국이나 프랑스에서 다루는 방식과는 달라, 한마디로 ‘멋지다’라고 분명히 표현할 수 있을 만큼 감각적이었다.


아르마니 피오리의 밀라노 본사 수석 플로리스트가 우리 호텔을 직접 방문해 선물용 꽃다발 몇 가지를 시연하고 설명하는 이벤트가 열리던 날이었다. 그때 그가 사용했던 꽃이 카라다. 카라는 당당하고 우아한 아름다움을 표현하고자 할 때 많이 사용되는데, 곧게 뻗은 기다란 대에 자연스럽게 이어진 하얀 꽃잎이 무척이나 세련됐다.


수석 플로리스트가 카라를 스무 송이쯤 들어 똑같은 높이로 꽃의 끝머리 부분을 맞추고 줄기에 곡선을 주어 과감하고 와일드하게 디자인을 하던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미니멀하면서도 모던하고, 꽃이 가진 자연적인 미를 그대로 살리는 듯한 디자인이었다.


카라는 웨딩에도 많이 사용되는데, 이 꽃이 가지고 있는 분위기를 대신할 꽃은 거의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 실제로 호텔에서 웨딩을 하다 보면 카라가 많이 나오는 시즌에는 좋은 카라들을 선점하기 위해 전쟁 아닌 전쟁이 벌어지기도 한다. 그만큼 대체할 만한 꽃이 없다는 말이다. 가늘지 않고 적당한 두께를 가진 옅은 초록색의 줄기를 따라 올라가면 그 끝에 두껍고 단단해 보이는 한 장의 꽃잎이 동그랗게 말려 꽃 모양을 이룬다. 가운데는 노란 암술이 있는데 이 암술을 꽃잎이 둘러싸고 있는 형태다. 우아함의 상징, 고급스러움의 대명사같이 자신의 색깔이 분명한 꽃, 카라가 가지고 있는 독보적인 선, 그 본연의 아름다움은 아르마니 피오리가 추구하는 심플하고도 모던한 디자인과 맞아떨어진다는 느낌이 들었다. 실제로 아르마니 피오리 매장에 들러 보면 카라를 자주 볼 수 있다.


카라 다섯 송이를 묶으면 꽃말이 ‘아무리 봐도 당신만 한 여자는 없어요’라고 한다. 정말이지 카라가 지닌 이미지에 이만큼 딱인 꽃말이 있을까 싶다. 카라는 고급스럽고 크기도 커서 몇 송이만으로도 훌륭한 선물이 된다. 부케로도 많이 사용 되는데 간결하지만 고귀한 느낌마저 들어 매력적이다. 아르마니 피오리의 수석 디자이너가 만들었던 것처럼, 카라 몇 송이로 상대에게 프러포즈를 할 때 이용해 보면 어떨까? 다섯 송이의 선물이 어떤 말을 전하는지도 살짝 귀띔해 주면 더 멋지지 않을까?


나를 사랑하는 방법 - 수선화

모든 꽃이 다 아름답겠지만, 4월이 되면 충남 서산에 꼭 한 번 가보기를 권한다. 제주도 하면 유채꽃 밭이라면, 서산엔 수선화 밭이 있다. 정확히는 서산 유기방 가옥의 수선화 축제다. 사실 아파트 화단 같은 곳에서도 수선화를 종종 만날 수 있다(사람들은 수선화라는 이름은 아는데 생김새를 잘 몰라 그냥 지나치는 경우가 많지만). 하지만 서산에 가면 말 그대로 노란 꽃 물결을 볼 수 있다.


처음 서산에 수선화 축제가 있다는 걸 알았을 때 이미 4월 초순을 지나고 있어 마음이 급했다. 그도 그럴 것이 플라워숍에서 보는 절화인 수선화는 정말 잘 관리해야 일주일 남짓 꽃 피웠다가 금방 시들어 버린다. 수선화 특유의 나팔 같은 모양새와 샛노란 색깔, 은은한 향이 좋아 한 다발 사서 꽂아 두어도 오래가지 못하니 늘 서운했다.


나는 땅에 심겨 있는 수선화도 일주일이면 금방 시들어 버릴 줄 알았다. 그래서 이미 축제가 시작되었던 4월이었기에 내가 내려갈 때 즈음이면 꽃이 다 지고 난 후일까 봐 마음이 급했던 것이다(다행히 축제는 4월 말경까지 계속된다).


몇 시간을 달려 유기방 가옥에 도착했다. 가옥에 들어가는 초입부터 수선화가 그득하게 일렬로 심겨 있었다. 유기방 가옥 옆쪽으로 조금 돌아서 가면 외국 엽서에서나 보던 광경이 펼쳐진다. 처음 그 광경을 마주했을 때 과연 여기가 한국이 맞나 싶을 정도로 깜짝 놀랐다. 그렇게 많은 수선화를 태어나서 처음 보았기에 감탄사가 절로 나왔다. 태안에서 봄에 열리는 수선화 축제도 볼만하지만, 이곳의 수선화는 고택과 함께여서인지 왠지 모르게 좀 더 비밀스럽고 특별해 보였다.


꽃은 다 매력적이지만 수선화는 특이하게 나팔 모양으로 생겨서 그런지 수선화 꽃을 가만히 들여다보고 있으면 꽃의 나팔 모양 안쪽으로 빨려 들어가는 느낌이 들곤 한다. 이런 수선화의 꽃말은 나르시시즘(자기애, 자아도취)으로, 그리스 신화에서 유래된 말이다.


보이오티아 강의 신 케피소스와 님프 리리오페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 나르키소스(Narcissus).


나르키소스는 용모가 아름다워 주변 처녀들과 님프들의 구애가 끊이지 않았고, 그중에는 숲과 샘의 신인 에코도 있었다. 에코는 헤라의 저주로 말을 할 수 없어, 나르키소스에게 자신의 마음을 제대로 전하지 못한 채 죽었고, 에코 외에도 여러 님프들은 나르키소스를 흠모하다 거절당해 고통을 겪었다.


그러던 와중에 나르키소스에게 거절당한 이들 중 하나가 나르키소스도 사랑의 고통을 겪게 해달라 빌었고, 복수의 여신 네메시스가 이를 들어주었다. 헬리콘 산에서 목이 말라 샘을 찾아간 나르키소스는 샘에 비친 자신의 모습에 반해 자기 자신을 흠모하다 샘에 빠져 죽게 된다. 그 후 그가 죽은 자리에 피어난 꽃이 나르키소스(수선화)이다.


나르키소스의 자기사랑은 좀 극단적이다. 그러면 나를 제대로 사랑하는 건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난 자신을 사랑하는 방법의 힌트를 내 지인에게서 얻었다. 이분의 신조가 ‘제일 중요한 건 나 자신이고, 나를 사랑할 줄 모르면 다른 사람도 사랑할 줄 모른다’이다. 처음에는 좀 과한 생각 아닌가 싶기도 했다. 그러면서도 스스로가 가치 있는 존재라고 생각하고 뚜렷한 가치관을 가진 그분이 나는 때때로 부러웠다. 어떻게 저렇게 자기 자신에 대해 확신이라고 할 만한 생각을 가지고 있고 스스로를 잘 챙길까. 나는 몇 해를 그분과 같이 지내고 나서야 이 사람의 ‘과한 듯한 신조’가 어떤 의미인지 제대로 이해할 수 있었다.


그분의 대답이 이랬다. 나를 잘 챙기고 싶다면 우선은 나 자신에 대해 잘 알아야 한다고, 자신의 외모를 꾸미고 보이는 모습을 잘 관리하는 것도 중요하겠지만,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내가 무엇을 좋아하고 무엇을 싫어하는지 잘 알아야 나를 사랑할 수 있다는 것이다. 내가 나를 알고 이해하고 있어야 한다는 뜻이었다.


처음엔 좋아하는 게 무엇이냐는 질문에 대답하는 것조차 쉽지 않았다. 대답을 못 하는 스스로에게 적잖은 충격을 받았다. 그게 그렇게 어려운 질문일 줄이야. 이런저런 시행착오를 겪으면서 좋아하는 것보다는 싫어하는 것을 생각하는 편이 훨씬 더 쉽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스스로 싫어하는 것을 적어 보고 되도록 하지 않으려 노력했다.


그러는 과정에 알게 된 것이 있다. 나를 사랑하려면 나 자신을 잘 알아야 하고, 나 자신을 잘 알려면 ‘자기 객관화’가 가능해야 한다는 것을. 그분이 말하는 자기사랑이 자기 자신을 나르키소스처럼 맹목적으로 흠모하는, 자신에 취해 있는 것과는 좀 다르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자신을 똑바로 마주하면서 스스로와 남을 아끼면서 산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그때 배운 것 같다.


자신을 사랑하는 것은 좋은 일이다. 하지만 나르키소스같이 자신을 사랑하다 보면 나 말고 주변을 둘러볼 수 없게 되고, 자신을 왜곡된 시선으로 바라보게 된다. 오늘부터라도 나를 제대로 사랑하기 위해 나와 친구가 되어 보자. 좋아하는 것과 싫어하는 것을 적어 보고, 나와 마주해 알아가 보는 것은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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