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견은 빵으로 날려 버려

저   자
김자옥
출판사
필름
가   격
14.000원(268쪽)
출판일
2020년 07월





참견은 빵으로 날려 버려


구분하기 _ 내 삶의 중심을 잡기 위하여

거절할 용기와 거절당할 용기

많은 용기 중에서도 사람들이 여전히 내기 어려워하는 용기는 어떤 것일까? 바로 거절할 용기다. 상사의 무리한 지시에도 내 능력이 부족해 보일까 봐, 무례해 보일까 봐, 혹은 불이익이 있을까 봐 거절하기 힘들다. 동료의 부탁도 마찬가지다. 그 사람과 멀어질까 봐, 나의 평판이 나빠질까 봐 힘에 부침에도 부탁을 받아들일 때가 있다.


이유는 다 비슷하다. 나를 싫어하게 되지 않을까 하는 우려 때문이다. 능력이 되고, 시간적 여유가 있고 ,그럴 마음이 든다면 물론 아무런 문제가 없다. 하지만 그렇지 않음에도 거절을 못하는 경우, 우리는 필연적으로 곤란함을 겪게 된다. 남의 부탁만 들어주다가 정작 내 일은 제대로 해내지 못해 침울해지고 싶지 않다면 내 능력 밖의 일, 시간상 도저히 할 수 없는 일은 반드시 거절해야 한다.


내 일을 책임질 사람은 나뿐이다. 내가 다른 사람의 부탁을 들어준다 한들 누군가가 내 일을 대신 해주는 것은 아니다. “당신의 부탁을 들어주느라 내 일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고 하소연해도 소용없다. 즉 일의 결과는 달라지지 않는다.


반대로 거절을 받아들이는 데도 용기가 필요하다. ‘거절당할 수도 있다’는 생각을 가져야 한다. 거절을 당하면 마치 자신의 전부가 부정당한 것처럼 속상해하거나 심지어는 화를 내는 사람도 있다. 거절은 나(의 인격 혹은 존재)에 대한 것이 아니다. 나의 부탁이나 제안에 대한 것이다. ‘답정너(답은 정해져 있고 넌 대답만 하면 돼)’가 아닌 이상 부탁이나 제안을 할 때에는 분명히 ‘NO’라는 선택지가 있음을 알고 있어야 한다.


우리는 거절에 익숙해져야 한다. 거절을 하는 것뿐만 아니라 거절을 당하는 데에도 용기를 내야 한다. 내게 거절할 권리가 있는 것처럼 상대방에게도 거절할 권리가 있다는 걸 잊지 말아야 한다. 거절을 자존심과 연결시키는 것이 가장 어리석은 일이다. 거절은 나를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내 생각, 내 의견에 대해 혹은 수용할 수 없음을 의미할 뿐이다. 의견과 사람을 분리해야 한다. 그래야 삶의 질이 높아진다.


솔직하다는 사람들이 말하는 예민함이란

“난 하고 싶은 말은 못 참는 성격이라”, “난 좀 솔직한 편이라서”, “그래도 뒤끝은 없어”라며 자기감정 자기 생각을 순도 백 퍼센트, 있는 그대로 상대에게 털어 버리는 사람들이 있다. 이 말 뒤에는 ‘그러니 네가 이해해’라는 말이 생략되어 있다. 그들의 요구대로 내가 이해하지 못하면 나는 그저 속 좁은 사람, 쿨하지 못한 사람이 되어 버린다. 어쩜 이렇게 일방적일 수 있을까 싶다. 신기하다 못해 가끔은 그 단순함이 부럽기까지 하다. 그런데 재미있게도 이렇게 말하는 사람들 중 대부분은 남의 솔직함에는 전혀 쿨하지 못하다는 것이다. 참 아이러니하다.


자기 좋을 대로만 솔직한 이런 부류의 사람들에게 무슨 말을 그렇게 하냐며 정색이라도 하면 이런 건 또 어찌나 잘 피해 가는지. “말이 그렇다는 얘기야.”라고 한 발짝 물러선다. 그러고는 얄밉게 한마디 덧붙인다. “예민하기는, 뭘 그렇게 까칠하게 굴어.” 자신의 말실수나 무례함은 뒤로한 채 비난의 화살을 상대방 쪽으로 교묘히 돌린다. 나는 별 뜻도 없었는데 네가 오버한 거라는 식이다. 상처 되는 말을 던져 놓고 늘 별 뜻이 없었단다. 한 번만 생각해 보면 상대는 대단한 뜻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말임을 알 수 있을 텐데 왜 그 한 번을 고민하지 않는 걸까 싶다.


예전에는 이런 말에 잘 속아 넘어갔다. 내가 좀 예민한가? 요즘 좀 까칠해졌나? 왜 이러지? 하면서 내 탓을 하기도 했다. 이젠 잘 속지 않는다. 내가 예민한 게 아니라 그들이 무례한 것이라는 확신이 생겼기 때문이다. 지금은 혼자서 나를 탓하는 대신 “내가 좀 예민했나? 미안.”이라고 그들처럼 쿨하게 답한다. 이러면 보통 그들 중 대부분은 “아니 뭐 미안할 거까진 없지만...”이라고 말하며 말끝을 흐린다. 무슨 말을 하는지 더 기다려 본다. 듣고 있으면 궁색하기 짝이 없다. 한참을 듣다 보면 웃음이 피식하고 나온다. 애쓴다 애써.



인정하기 _ ‘어쩔 수 없음’과 함께 사는 법

화를 내면 어른스럽지 못한 건가요?

나는 아주 오랫동안 화를 잘 참았다. 분명히 화가 나는 상황에서도 절대 밖으로 새어 나오지 못하도록 화를 꾹꾹 눌렀다. 화는 내서도 안 되며 화를 주체하지 못하고 쉽게 밖으로 표출하면 미성숙한 인간이라 생각했다.


화내는 어른을 보면 바보같이 느껴졌고 ‘난 절대 저러지 말아야지’라고 생각했다. 내 화는 나 혼자서 감당하겠다고 다짐했다. 이제 와서 생각해 보니 ‘난 절대 저러지 말아야지’라는 생각이 ‘화를 내면 안 된다’로 잘못 인식된 듯싶다.


이런 나와는 달리 남편은 화를 잘 내는 편이다. 처음에는 그런 남편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남편의 다른 어떤 모습보다 화를 내는 모습에 더 화가 났다. ‘어른이 왜 자기 화 하나 제대로 다스리지 못할까?’ 하는 생각이 컸다. 남편은 당연히 이런 생각을 이해하지 못했다. 오히려 화를 어떻게 다스리냐며 화를 낼 만하니까 내는 것 아니겠냐고 맞받아쳤다. 나로서는 그 말이 더 이해가 되지 않았다.


‘화’가 궁금해서 이런저런 책을 찾아보다 김형경 작가의 『사람풍경』에서 놀랄 만한 부분을 발견했다.


“그렇게 억압된 분노는 어떤 식으로든 간접적으로 표출되면서 그 사람의 삶을 공격한다”


간접적으로 분노를 표출할 때 나타나는 행동 유형 대부분이 나에게 해당되었다. 소극적으로 행동하기, 사람들을 피해 혼자 있기, 침묵 속에 앉아 있기, 습관적으로 불평불만 늘어놓기, 짜증스럽고 신경질적인 말투로 이야기하기, 타인의 말에 꼬투리 잡기... 그동안 나는 참은 게 아니었다. 나도 모르게 다른 방식으로 화를 표현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도 아주 부정적으로. 김형경 작가는 분노는 사랑처럼 누구에게나 있는 지극히 정상적이고 당연한 감정이라며, 분노를 자신에게 속한 감정의 일부로 정직하게 인정하라 말하고 있었다.


김형경 작가의 『천 개의 공감』에 틱낫한 스님의 말을 인용한 부분이 있다.


“화는 보살핌을 간절히 바라는 자신의 아기다.”


아기가 울면 달래 주고 왜 우는지 알아내려 애쓴다. 모른 척하거나, 방치해 두지 않는다. 화도 아기를 달래는 마음으로 대했어야 했다. 우선 내 안에 ‘화’라는 감정이 생겨났음을 인지하고 받아들여야 했다. 그러고는 이 ‘화’가 어디에서 왔는지 살펴봐야 했다. 상대방의 말에 상처를 받은 건지, 상처받을 만한 말이었는지, 왜 예민해졌는지, 예전에 했던 비슷한 경험이 나를 괴롭히는 건 아닌지, 혹시 상대방이 화를 내는 모습에 나도 덩달아 화가 난 건 아닌지 같은 것들을 말이다. 그러고 나서 그에 맞게 대처해야 했다. 상대에게 내가 화가 났음을 알려야 하는 상황이면 솔직하게 알리고, 내 마음을 보듬어 주어야 하는 상황이면 스스로를 달랬어야 했다.


나는 이제 화가 날 때뿐만 아니라 갑자기 짜증이 날 때, 마음이 급해질 때, 불안해질 때에도 내 감정을 먼저 찬찬히 들여다본다. 축소하지도, 과장하지도 않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다. 그리고 충분히 그럴 수 있다고 스스로 안심시킨다. 그래도 된다고, 당연한 마음이라고, 괜찮다고. 그러면 마음이 한결 가벼워진다.


더불어 이제 주변 사람들의 화도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모두 보살핌이 필요했던 것이다. 나 좀 봐 달라고, 나 좀 감싸 달라고 하는 호소였다. 지금까지 나는 안아주고 달래 주는 대신 ‘어른답지 못하게’라면서 냉정한 시선을 보냈다. 아직 누군가를 감쌀 정도로 성숙해졌다고 말하긴 어렵지만, 이제는 화를 내는 사람을 봐도 ‘저 사람은 무엇 때문에 저렇게 괴로워하는 걸까?’ 하고 측은한 마음으로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


내가 나를 인정하는 일

사람들은 ‘서운하다’는 말을 자주 한다. 잘 지내냐고 물어봐 주지 않았다고, 열심히 한 걸 알아주지 않았다고, 아픈 데는 없냐고 걱정해 주지 않았다고, 밥은 먹었냐고 물어봐 주지 않았다고, 잘할 수 있다고 응원해주지 않았다고. 이유는 너무나도 많다. 듣는 사람 입장에서는 뭘 이런 걸 가지고 서운해하나 싶고, 말하는 입장에서는 말은 하면서도 어딘가 비참한 기분이 든다. 그렇다고 아무 말 안 하자니 이 사람은 영원히 내 마음을 모를 것 같다.


서운한 감정은 왜 생기는 걸까? 사람들은 누구나 인정받고 싶어 하고 사랑받고 싶어 한다. 그리고 그걸 확인하고 싶어 한다. 칭찬, 격려, 위로 등의 말이 그 증거라도 되는 양 목을 빼고 기다린다. “열심히 하네”라는 상사의 말 한마디에 그동안의 노고가 다 사라지는 듯하고, “잘 하고 있어”라는 배우자의 한마디에 뭉쳤던 마음이 녹기도 한다. 서운한 감정은 이런 인정과 사랑 그리고 관심을 받지 못했다고 느끼는 순간 찾아온다. 특히 알아주길 원했던 사람이 몰라줄 때는 유독 더 서운하다.


사람들에게 서운한 감정이 생길 때마다 생각했다. 기대하지 말자. 내가 나를 인정하면 된다.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어딘가 부족함을 느꼈다. 뭔가가 채워지지 않는 기분이었다. 이유가 뭘까 생각해 봤다. 문득 내가 나 스스로를 너무 별것 아닌 존재로 여겼던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스스로 자기 가치를 낮게 보기 때문에 내가 하는 인정이 하찮게 여겨졌던 건 아닐까? 그래서 자꾸 ‘나만 알면 뭐해?’라는 생각이 들고 다른 사람의 인정을 더 찾아 헤맸던 것은 아닐까. 마치 동생이나 후배가 하는 칭찬에는 큰 감흥이 없는 것처럼 말이다.


나의 가치를 스스로 높게 평가하는 사람에게는 누구보다 나의 인정이 중요하고 그렇지 않은 경우는 끊임없이 남의 인정을 갈망한다. 그렇지만 불행하게도 사람들은 나를 인정해 주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들도 각자 누군가의 관심과 인정을 찾아 헤매고 있기 때문이다. 나를 봐줄 여유가 없다. 당연한 일이다. 서운해할 일이 아니다.


내가 나를 인정해 주자. 스스로를 낮게 보지도 말자. 내 인정만으로도 충분하다.



덜어내기 _ 잠시 불행하고 오래 행복하려면

알아주길 바라지 않게 해 주세요

법륜 스님에게 한 여성이 질문했다. “남편이 돈은 못 벌더라도 제 마음만 좀 알아줬으면 좋겠는데 어떡하면 좋을까요?”


스님은 대답했다. “아이고, 그게 돈 벌어 오는것보다 더 어려운데... 상대가 자기 마음을 알아준다는 건 불가능합니다. 자기도 상대 마음 몰라요. 내 불편한 것만 생각하지. 그런 기대는 너무 큰 기대 아니겠습니까. 욕심 중에서도 상욕심이에요. 마음을 알아준다... 어떻게 저렇게 큰 꿈을 꾸셨을까.”


듣고 있던 여성분은 머쓱해하며 다시 말했다. “기대를 하면 안 되는 건 아는데, 보면 또 자꾸 기대를 하게 되니까 힘들더라고요.”


스님은 거기에 이렇게 답했다. “아무 기대도 하지 마요. 내 기대가 나를 괴롭히는 거예요. 상대가 나를 괴롭히는 게 아니고.”


여전히 해답을 얻지 못한 듯한 표정을 짓는 여성에게 스님은 마지막으로 이렇게 말했다. “나를 알아주는 사람은 이 세상에 아무도 없어요. 부처님이 나를 알아주길 원한다면 나는 영원히 부처님의 노예가 되고, 하느님이 나를 알아주길 원하면 나는 영원히 하느님의 노예가 되고, 남편이 나를 알아주길 원하면 나는 영원히 남편의 노예가 되고, 부모가 나를 알아주길 바라면 나는 영원히 부모의 노예가 돼요. 노예가 될 뿐만 아니라 미워하게 돼요. 왜냐하면 현실에서 그들은 안 알아주니까. 내가 그들을 미워하고 원망하면서 살 필요가 뭐가 있어요. 그건 그냥 어리석은 거예요. 인생의 주인이 내가 돼야지. 누가 어떻게 해 주길 원하는 건 자기를 고통에 빠뜨리는 어리석은 행위일 뿐이에요.”


누군가 나를 알아주지 않으면 섭섭하고 서운하다. 불안하고, 화도 난다. 화를 내자니 쪼잔해 보일까 화도 못 낸다. 참고 있자니 우울해진다. 그러면 속수무책으로 그 사람이 싫어진다. 또 내가 이렇게 고통받고 있다는 걸 그 사람은 전혀 모르기에 다시 화가 나고 억울해진다. 무한 반복이다.


스님에게 질문을 던진 여성처럼 나도 남편이 내 마음을 알아주길 바랐다. 내가 회사에서도 힘들고, 집에 돌아와서도 힘들다는 것을.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름 애쓰고 있다는 것을. 둘 다 잘하고 싶은 마음이 있다는 것을 알아주길 바랐다. 기대와 달리 남편은 전혀 알아주지 않았다. 많이 섭섭했고 화가 났다. 내가 뭐 하러 이렇게 열심히 사나 싶어 우울했다. 다 의미 없게 느껴졌다. 남편이 싫어졌다. 더 이상 남편에게 뭔가를 기대하는 건 아무 의미가 없는 듯했다.


기대를 놓기 시작했다. 알아주는 게 무슨 의미가 있냐며 스스로를 달랬다. 남편이 알아주지 않아도 내가 나를 알아주면 되지 않나 싶었다. 알아주지 않는 남편이 문제가 아니라 애초에 불가능한 것을 바란 내게 문제가 있었다고 생각하기로 했다. 마음이 좀 편해졌다. 생각해 보니 나도 남편의 마음을 잘 몰랐다. 사실 알고 싶지도 않았다. 내가 가진 힘듦이 훨씬 더 커 보였기 때문이다. 남편도 마찬가지이지 않았을까? 자기가 처한 상황이 그 무엇보다 힘들었을 사람이다. 그런 사람에게 나의 힘듦을 알아 달라고 했던 건 나의 이기심이었음을 깨달았다.


법륜 스님의 말씀이 맞는 듯하다. 남편이 내 마음을, 내 힘듦을 알아주기를 바랄 때, 나는 남편의 반응을 주의 깊게 살폈다. 말투, 눈빛, 미간의 찡그림 하나하나를. 그의 반응에 따라 나의 기분은 오락가락했다. 원하는 반응이 나오지 않을 때는 ‘네가 그렇지’ 하면서 혼자서 분노를 삭였다. 그랬다. 내가 노예를 자초하고 있었다. 스스로를 괴롭히고 있던 것이다. 너무나도 어리석었다.


마음의 변호가 생겨서인지 남편은 나에게 많이 달라졌다고 했다. ‘내가 달라졌으니 이젠 당신도 좀...’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다 부질없음을 알기에 마음을 곧 고쳐먹었다.


나를 알아주길 바라는 마음을 없애는 것은 쉽지 않다. 순간순간 실망하고 서운해진다. 그럴 때마다 ‘에휴, 그럼 그렇지’ 싶은 마음이 절로 생긴다. 그러나 마음이 괴로워지기 시작할 때 이젠 스스로에게 말을 건다. ‘몰라 주면 좀 어때?’ ‘알아준다고 뭐 뾰족한 수 있나?’ 그러면 마음을 다잡기가 쉬워진다. 사실 도를 닦는 심정이기는 하다(이렇게 해서 종교인이 되어 가는 건가?), 마음만 편해질 수 있다면 뭔들 못하겠는가. 오늘도 기도한다.


“알아주길 바라지 않게 해 주세요.”



상상하기 _ 해롭지 않은 인간관계를 만들기 위하여

차선 이탈 경보 시스템

요즘 자동차에는 차선을 이탈하면 경보음이 울리는 ‘차선 이탈 경보 시스템’이 설치되어 있다. 제자리로 복귀시키는 차선 이탈 복귀 시스템도 등장했다. 이런 시스템을 사람에게도 장착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가끔 자기 멋대로 선을 넘나드는 사람들이 있다. 이런 사람과 오래 마주하고 있으면 피로감이 몰려온다. 언제 선을 넘을지 몰라 늘 긴장하고 있어야 한다. 그러다 선을 넘어오면 그때부터는 바로 알려 줘야 하나 제자리를 찾을 때까지 기다려 봐야 하나 고심하게 된다. 머리가 지끈지끈하다. 바로 알려 주면 예민하다 할 것이고 참고 기다리자니 내 속이 터질 것 같다. 이런 사람들은 대부분 자기가 선을 넘은지도 모르기 때문에 제자리로 잘 돌아가지도 않는다. “우리 사이에 무슨...” “가족끼리 무슨...”이라며 애초에 선이라는 게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많다. 하지만 개개인마다 자신만의 영역이 있고, 지켜야 할 선은 분명히 있다. 더 세세하게 따지자면 그어진 선의 폭도 제각각이다. 우리끼리는 선 긋지 말자, 친해졌으니 선 따윈 없애자고 하는 순간부터 문제가 발생한다.


상대방이 선을 넘어왔을 때 나는 내 나름의 신호를 보낸다. “음, 그건 좀”이라던가 “글쎄, 그런가?”라던가. 둘 다 너의 말을 받아들이지 못하겠다는 뜻이 숨어 있다. 그래도 잘 알아차리지 못할 대는 최대한 의사 표시를 하려 노력한다. “난 이게 좋은데.” 혹은 “그건 좀 아닌 것 같은데?” 가끔은 내 상식의 선을 훌쩍 넘어선 상황에 한해 대꾸를 안 하는 편을 택하기도 한다. 내가 계속 보내는 이 신호를 감지하지 못하거나 보고도 무시하는 경우는 어쩔 수 없이 멀리할 수밖에 없다. 그런 사람과 계속 같이 있다 보면 내 영역을 지켜내는 데에 너무 많은 에너지를 쏟게 된다. 손해가 너무 크다. 그런 관계는 오래 유지하지 어렵다.


선을 넘어왔을 때는 우선 경보음을 울려야 한다. 운전 중 차선을 넘어오는 차에 경적을 울려주듯 말이다. 그렇지 않으면 자칫 큰 사고로 이어질 수 있다. 내가 계속 신호를 보내고 있음을 알게 해야 한다. 내 신호에 어떻게 반응하느냐는 상대방의 몫이다. 상대방의 반응에 따라 나는 다음 행동을 결정하면 된다. 반대로 나 역시 상대방이 보내오는 신호를 잘 살펴야 한다. 신호는 도로 위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도 존재한다. 서로의 신호가 존중되고 잘 지켜질 때 원활한 관계가 유지된다. 신호에 신경 쓰자. 내가 보내는 신호가 상대방이 알아차릴 만한 신호인지, 상대가 내 신호를 알아차렸는지, 또 내가 미처 감지하지 못하는 신호는 없는지 꼼꼼히 살피자. 신호만 잘 신경 써도 큰 사고로 이어지는 일은 줄어든다.


당당하기 _ 내게 맞는 삶을 찾아 나선 나를 위하여

기분 나쁘라고 하는 말이지?

말을 툭툭 내뱉는 사람들이 있다. 이들은 말을 할 때 깊게 생각하지 않는다. 실은 깊게 생각해서 일부러 그렇게 말을 하는 건지 헷갈리기도 한다. 생각할수록 기분이 나빠져 애써 신경 쓰지 않으려 해 보지만 그럴수록 더 신경이 쓰인다. 나를 무시해서 저러나? 나한테 섭섭한 게 있나? 나를 싫어하나? 삐졌나? 화가 난건가? 혼자서 이런저런 생각을 하느라 내 일에 집중을 할 수가 없다. 하루 종일 혹은 며칠씩 마음이 무거울 때도 있다. 괜히 그 사람의 눈치를 보게 되고 만나더라도 뭔가 껄끄럽다.


마흔을 넘기고 나서부터는 이 모든 것이 귀찮아졌다. 혼자 고심하는 것도, 혼자 눈치 보는 것도 지겨워졌다. 그러느라 쓰는 시간과 에너지가 아까웠다. 복잡한 생각은 그만하고 싶어졌다. 그래서 이젠 그냥 물어본다.


“너 원래 그런 거 잘 못하잖아.”

“어! 지금 나 무시한 거야?”

“아니 그게 아니고......”

“아니면 됐고”


“뭐 하러 해? 어차피 하다 말 걸?”

“혹시 지금 일부러 내 의지 꺾으려는 거야?”

“아니 무슨 말을 또 그렇게 해”

“그렇지? 아니지? 오해해서 미안.”


“하던 거나 잘해. 뭘 자꾸 다른 거 할 생각을 해.”

“그거 나 기분 나쁘라고 하는 말이지?”

“에이 왜 그래.”

“아닌 거지? 순간 기분 나쁠 뻔했네.”


때로는 상대가 기분 상할 만한 얘기를 해놓고 이렇게 뒷수습하는 사람도 있다. “웃자고 하는 말이야. 뭘 정색까지 해.”


나는 또 묻는다. “어느 포인트에서 웃어야 되는 거야? 잘 모르겠는걸?”


생각 없이 툭툭 내뱉은 말이니 내 쪽에서도 깊게 생각할 필요는 없다. 궁금한 건 물어보자. 혼자 끙끙 앓아도 답은 안 나온다. 숨은 의도까지 파악하느라 소중한 내 시간을 허비하지 말자. 그리고 여기서 중요한 건 아니라고 하면 아닌 걸로 받아들이는 것. “에이, 아니긴 뭐가 아냐”하면서 더 추궁하지 않는 것. 그의 마음을 알아내는 것보다 나의 마음이 다치지 않는 게 더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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