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의 빨간 밥차

저   자
이선구
출판사
벗나래
가   격
13,500원(224쪽)
출판일
2019년 02월






사랑의 빨간 밥차


유년의 결핍이 가져다준 시선 ‘밥’

유치장에 구금된 어머니

벌써 3주가 지났다. 그때까지도 나는 울지 않았다. 그런데 유치장에서 나오시는 어머니를 보는 순간 나는 내가 아닌 것 같았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어머니와 나는 부둥켜안고 한참을 울었다.


기억하건대 어머니는 내 앞에서 단 한 번도 우신 적이 없었다. 그날 나는 난생처음으로 어머니의 눈물 냄새를 맡았다. 어머니는 아이를 다섯이나 둔, 젊디젊은 과부였다.


이제 막 초등학교에 들어간 나를 데리고 어머니는 서울살이를 시작하셨다. 어디 하나 기댈 곳도 의지할 사람도 없는 처지였던지라, 어머니는 매일 시장에 나가 바닥에 떨어진 배추 시래기를 닥치는 대로 모으셨다. 못 쓰게 된 겉 부분은 떼어버리고 웬만큼 쓸 만한 것만 건져서는 그것으로 국밥을 만들어 노점에서 장사를 하셨다. 말이 좋아 노점이지 누군가 버린 낡아빠진 드럼통 위에 송판을 깔고 서서 먹는 초라한 시래기 국밥집이었다.


이 드럼통은 낮에는 밥상이 되고, 밤이 되면 안방이 되었다. 사글셋방 하나 구할 수 없었던 우리 모자에게 드럼통은 아주 유용한 도구였다. 드럼통 안에 연탄을 피운 뒤 그 위에 송판을 깔면 딱 안방 아랫목이 되었고, 송판 위에 요를 깔면 그대로 잠자리였다. 한겨울이 아닌 것이 다행이었다.


겨울이 아니어도 밤이 되면 기온이 더 내려갔다. 어느 날 어머니는 추위를 면할 생각으로 연탄불 위에 불쏘시개를 더 넣으셨다. 지금 생각하면 정말 아찔한 일이었지만 당장 먹고 살 길이 막막한 우리 모자 같은 사람들에게는 안전에 대한 걱정도 사치였다. 익숙해지면 위험조차도 무심해질 정도로 우리는 춥고 가난했다.


어린애가 그 무슨 험한 일을 했다고 그리 곯아떨어졌는지, 나는 세상모르고 깊은 잠에 빠졌다. 자면서도 왠지 다른 날보다 바닥이 더 뜨겁다고 느껴지는 순간, 어머니가 나를 깨우셨다. 어젯밤에 더 넣어둔 불쏘시개가 드럼통을 덮고 있는 송판에 옮겨 붙으면서 이부자리를 홀랑 태웠던 것이다. 한순간에 큰불이 나고 말았다.


당시에는 불이 나서 소방차가 출동하면 화재를 낸 사람이 벌금을 물어야 했다. 그러나 우리는 벌금은커녕 다음 날 잠을 잘 곳조차 없는 처지였다. 연신 고개를 수그리며 사정하고 빌었지만 무섭고 높은 곳에 있는 법은 없는 사람들의 사정 따위는 봐주지 않았다. 그대로 어머니는 서대문경찰서 유치장에 갇히셨다.


한창 어머니의 손길이 필요했던 초등학생 아이를 돌봐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졸지에 나는 ‘어린이 노숙자’가 되었다. 어머니가 없는 동안 나는 처음으로 혼자 떠돌아다니며 끼니를 해결해야 했다. 누구 하나 의지할 사람이 없는 아이는 일찍 철이 든다고 했던가. 그때부터 나는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혼자 단단해져 갔다. 어쩌면 그때가 내 인생에서 쌀과 밥을 얻으러 다니는 앵벌이의 시작이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작은 사내아이에 불과했던 나는 하루도 굶지 않았다.

학교에 갈 생각은 해본 적도 없었다. 눈만 뜨면 밥을 먹을 수 있는 곳을 찾아다녔다. 동네 형들을 쫓아다니기도 하고, 당시 논밭이었던 불광동 냇가에서 올챙이가 눈을 뜨면 검정 고무신에 떠다가 미동초등학교 앞에서 팔기도 했다. 호기심에 꼬맹이들이 제법 모여 들면 코 묻은 돈을 받고 팔아 빵 한두 개와 국수 한 그릇 정도가 되곤 했다. 혼자 끼니를 때울 때마다 어머니 생각이 났지만 어머니가 어디 계신지 알고 있으니 그래도 견딜 만했다. 그나마 몸을 누이던 드럼통마저 홀랑 타버렸으니 잘 곳도 없는 신세, 남의 집 처마 밑이나 창고에서 자는 일이 허다했다.


그렇게 한 끼를 먹고 나면 유치장으로 달려가 어머니에게 내 활약상을 자랑했다. 그 당시 어린 마음에도 나 사진을 단련시킨 한 가지 결심이 있었다.


‘엄마가 나오실 때까지 엄마의 근심이 되지 않아야 한다.’


불량소년이 금란교회로

열 살 무렵 나는 처음으로 교회라는 곳에 나가게 되었다. 가장인 어머니는 밥벌이를 위해 늘 밖에 나가 계셨다. 어머니가 아실 리 없으니 나는 자연히 학교에 안 가는 날이 많아졌다. 노고산 자락 철길이 있던 동네에는 나뿐만 아니라 소위 넝마주이촌의 불량 청소년이 많았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나는 동네 형들과 곧잘 어울려 지냈다.


그날도 어김없이 형들을 따라나섰다가 해 질 녘이 되어서야 집에 들어왔다. 그런데 다른 날과 달리 집안 공기가 사뭇 달랐다. 평소 같으면 집에 사람이 없을 시간인데 뜻밖에도 어머니가 눈앞에 서 계셨다. 나도 모르게 어색한 인사가 흘러나왔다.


“학교 다녀왔습니다….”


어머니는 한마디의 대답도 없었다. 평소에도 그리 살가운 어머니는 아니었지만 그날은 유독 느낌이 싸늘했다. 어머니는 나를 꽉 잡더니 지난번 장마 때 무너지지 말라고 세워둔 처마 기둥에 나를 묶으셨다. 그러고는 어디선가 몽둥이 하나를 주워 오더니 기둥에 묶여 꼼짝 못 하는 나를 사정없이 때리셨다. 거의 반 죽겠다 싶을 정도로 흠씬 두들겨 맞았다. 어머니도 힘에 부쳤는지 몽둥이를 저만큼 던지고는 절망에 찬 모습으로 울음을 터트리셨다.


졸지에 당한 일이라 가슴이 벌렁거리고, 맞아서 아픈 것보다 난생처음 본 어머니의 노기 띤 모습에 놀라 머릿속은 복잡하기만 했다.


그날 밤 어머니나 나나 쉽게 잠이 들지 못한 채 아침이 왔다. 어머니는 교회에 다닌다는 동네 누나들에게 물어 인근의 금란교회로 나를 데려가셨다. 당시 어머니는 불교 신자셨는데 말이다. 그날이 마침 부활주일이었다. 처음 간 교회에서 나는 소위 문화 충격을 받았다. 모든 아이에게 달걀을 나눠 주었는데, 흰 달걀만 보고 자란 나는 알록달록한 색깔의 예쁜 달걀을 보는 순간 어찌나 신기하던지 단번에 마음을 빼앗기고 말았다. 그리고 더욱 나를 사로잡은 것은 유년 주일학교의 여자 선생님이었다. 상냥하게 노래를 가르쳐주시는 모습이 얼마나 예쁘고 따뜻하던지 대번에 나는 교회에 적응해버렸다.


“선생님! 저는 이제 집도 싫고 학교도 싫고, 교회에서 살래요.”

그 후부터 정말 나는 툭하면 교회에 가서 살았다. 언제나 어두침침하고 냉기가 흘렀던 집과는 달리 교회는 언제나 환하고 깨끗했다. 항상 우중충한 곳에서 살던 나는 이런 천국이 어디에 있다가 이제야 내 앞에 나타났나 생각했다. 더 빨리 교회를 알지 못한 것이 아쉬웠으며, 예배가 끝나갈 때면 남은 시간이 아까워 미칠 지경이었다. 그 교회에 3년 정도 다녔다. 살던 동네가 모두 철거되어 다른 곳으로 이사를 해야 했기 때문이다.


비가 오면 나는 설교를 한다

중학교에서 나는 종교부장을 맡았다. 이사를 가서 새로운 교회에 딱 한 번 출석했을 무렵이었다. 미션스쿨이었던 학교에는 종교부장이라는 직책이 있었다. 내가 교회에 다니는 것을 알고 있던 짝꿍이 말도 없이 내 이름을 추천하는 바람에 얼떨결에 나는 종교부장이 되고 말았다. 딱히 하는 일은 없었지만 그래도 왠지 함부로 살면 안 될 것 같은 혼자만의 거룩한 울타리를 세우는 계기가 되었다.


교회가 천막이다 보니 비가 올 때가 문제였다. 비가 오면 관악산 아래는 늘 하천물이 범람했다. 천막촌과 교회 사이에는 개울이 몇 개 있었는데, 군데군데 바위가 있어서 휘몰아치는 물살의 세기가 대단했다. 얕은 개울이었지만 비가 많이 오는 날에는 쉽게 건널 수 없을 만큼 물이 불어났다. 연로한 노인이나 여학생들은 장정들이 업어서 건너편으로 데려가야 했다. 웬만큼 중심을 잡을 수 있는 체력이 아니면 건너다가 같이 넘어져 아래로 떠내려가는 일도 왕왕 있었다.


장대비가 그치지 않는 날이면 전도사님은 불어난 개울을 건너지 못해 교회에 오지 못하셨다. 발만 동동 구르던 전도사님은 개울 건너에 서 있는 내게 소리치셨다.


“선구야! 오늘은 네가 설교해!”


그런 날은 핑계를 댈 수도 없었다. 나이는 어려도 교회의 출석 교인 중에서는 꽤 고참 축에 끼었으니 전도사님의 뜻을 거스르기도 쉽지 않았다. 순종하는 마음으로 할 수 없이 전도사님 대신 앞으로 나가 강대상을 겸하고 있던 보면대 앞에 섰다. 설교하고 해봐야 쪽복음서를 들고 말씀을 읽은 후 내 느낌을 말하는 정도였다.


그런 일이 몇 번 있다 보니 어르신들은 나를 위로한다며 강대상에서 내려오던 나를 향해 ‘작은 이 목사’라고 불러주셨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목사라는 그 호칭이 아주 싫지는 않았다. 지금 생각하면 그때부터 이미 하나님께서는 내게 복음을 전하는 일을 맡기시기 위한 출애굽 광야의 계획을 시작하신 것이 아닌가 싶다.


사업의 불길이 타오르다

제대와 동시에 결혼했을 때 내 나이는 스물일곱 살이었다. 나는 신촌에 터를 잡고 은성가구라는 인테리어 가구점을 운영하게 되었다. 집 장사를 하는 곳에 거실장이나 칸막이 장식장 등을 만들어 납품하는 일이었다. 다행이 수입이 좋았다. 많은 물량을 한꺼번에 주문받아 납품하는 일이었는데, 주문과 소개가 끊이지 않으면서 사업의 불길이 활활 타올랐다.


한창 일이 잘 풀리면서 돈 버는 재미에 푹 빠진 나는 미친 듯이 사업에 몰두하게 되었다. 어느새 사업 이익과 부동산 등 개인 재산이 주체하지 못할 정도로 불어났다. 일주일에 세 번은 골프를 치러 필드에 나갔고, 틈만 나면 해외여행을 다녔다. 의식할 새도 없이 내 삶은 방만한 쾌락으로 물들어 갔다. 얼마나 사업이 휘몰아치게 일어났던지 승승장구를 거듭하더니 머지않아 내 명함에는 13개 단체명이 적힌 건설 회사의 회장이라는 직함이 새겨져 있었다.


아내는 고지식하고 순박한 사람이었다. 인천의 부개동 연립주택에서 살던 신혼 시절이었는데, 어느 날 아내가 나를 보더니 간절한 눈빛으로 부탁을 했다. 결혼한 지 3년이 다 되도록 아이가 없다가 이제 막 첫아들 동연이를 출산했을 무렵이었다.


“동연 아빠, 나 교회에 나가고 싶어요.”


아내의 말에 뒤통수를 한 대 맞은 것 같았다. 목사님을 주례로 모시고 결혼식을 했던 우리 부부였다. 아내의 한마디에 문득 생각하니, 내가 교회를 나간 것이 언제였는지 기억조차 나지 않을 정도였다. 사업한답시고 허랑방탕한 행실로 얼룩진 생활을 하다 보니 아내에게 미안한 일이 너무 많았다. 힘없이 말하는 아내의 부탁을 거절할 수 없었다.


아내를 인근 교회에 데려다주면서 나도 다시 교회에 출석하기 시작했다. 부부 동반으로 교회에 나가니 늘 일꾼이 모자란 교회에서는 나를 단박에 성가대장으로 임명했다. 어느 정도 굵직한 건설 업체도 운영한다고 하니 제법 좋은 일꾼이 되겠다고 여긴 모양이었다.


그런데 교회에 매주 나가고 성가대장이라는 직책을 수행하면서도 내 안에는 믿음이 없었다. 오죽하면 담배를 끊지 못해서 교회에 갈 때 양말 속에 담배를 숨기고 다니기도 하고, 사람들이 많은 곳에서 무의식중에 다리를 꼬다가 숨겨둔 담뱃갑이 볼록하게 튀어나와 망신을 당하기도 했다.


힘든 일이 한둘이 아니었지만 그중에서도 금연은 정말 어려웠다. 지독하게 애연가이던 내가 담배를 끊은 것은 1986년 8월, 아들 때문이었다.


“아빠한테서 담배 냄새 나서 아빠 옆에 가기 싫어.”


아들 바보였던 나는 동연의 그 한마디에 단번에 금연에 성공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나는 다시 교회와 멀어졌고 그때부터 수년 동안 교회와 담을 쌓은 생활이 계속되었다. 어쩌면 사업은 핑계였다. 세상 쾌락이 그렇게 좋을 수가 없었다. 여행을 가고 골프를 치러 다니며 비로소 살아 있음을 느끼는 쾌락적인 삶에 더욱 깊이 빠져들었다.



밥은 하늘이다

하나님이 차리신 밥상

화재 이튿날인 월요일이었다. 아침 일찍부터 인천 서구의 추장군이라는 추어탕 집에서 전화가 걸려왔다.


“추어탕도 기부할 수 있나요?”

“물론입니다. 감사합니다. 그런데 현재 우리에겐 추어탕을 담아올 그릇이 없습니다.”


“괜찮습니다. 저도 장사하면서 힘든 일을 자주 겪다 보니 어려운 처지에 놓인 사람들을 보면 남의 일 같지가 않아요. 비록 적지만 제가 할 수 있는 방식으로 도움을 드리고 싶습니다.”


그러고는 부평역으로 추어탕 500인분과 반찬들을 여러 개의 통에 담아서 일회용 그릇과 수저까지 보내왔다. 그리고 덧붙이기를 자신의 가게 이름을 절대로 알리지 말아 달라고 신신당부까지 했다. 추어탕 기부 이후에도 기부 릴레이는 계속되었다. 하나님이 일하고 계셨다.


모든 것이 날아가버렸다고 생각했는데 밥차의 이웃 사랑은 더 넓게 불길처럼 번져갔다. 하나님께서는 많은 노숙인들 과 쪽방촌 논인들, 그리고 여러 역 광장에서 밥차를 통해 식사를 하는 사람들의 지치고 힘든 삶을 위로하셨다.


어디를 가든 힘주어 간증하는 사례가 있는데, 바로 이런 고난 속에서도 우리는 단 하루도 밥차를 쉬지 않았다는 것이다. 국가적 재난인 사스가 오고 메르스가 왔을 때도 밥차에서 밥을 만들어 제공했다. 다른 봉사 단체는 문을 닫아도 우리는 밥차의 문을 닫지 않았다. 노숙인은 한 끼 밥이 하루 유일한 식사일 수도 있는데, 전염병 때문에 문을 닫는다면 그것은 우리들만의 생명을 생각하는 것이지 노숙인들을 생각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특히 노숙인들은 규칙적으로 식사를 하지 않으면 면역력이 더 떨어져서 질병에 노출되기 쉽다. 그래서 우리는 사명감과 의무감을 갖고 더럽혀진 노숙인들의 손을 세정제로 다 씻겨서라도 식사를 하도록 했다.


나눔 방주의 큰손들

어느 자원봉사자가 다소 기계음처럼 무전을 반복하는 직원을 보고 감동했다는 말을 한 적이 있다.


“저는 여기 오면서 밥차를 움직이는 주체를 오해했어요. 밥차 하면 언뜻 미소 띤 얼굴로 식판을 들고 다니는 봉사자들이 먼저 떠올랐거든요. 그런데 막상 여기 와 보니 봉사는 감상이 아니었어요. 우리 집이라면 한두 끼 안 차리고 사 먹는다고 누가 뭐라 하겠어요. 그런데 밥차의 음식을 준비하시는 봉사자들은 말이 봉사지, 완전히 여기에 매인 분들이잖아요. 게다가 무전기를 든 저분을 보는 순간 봉사에 대한 제 생각이 얼마나 짧았는지 깨달았어요. 처음엔 좀 딱딱한 분이라고 생각했는데, 만약 저분이 저렇게 절도 있게 급식 현장을 지휘하지 않았더라면 비좁은 이곳이 얼마나 무질서했을까하고 느끼게 되었어요.”


나눔은 확장되는 속성을 가졌다. 봉사는 처음 시작하기가 어려워서 그렇지, 막상 한번 시작하면 멈추기가 어려운 아름다운 중독성이 있다. 우리 일만 해도 7, 8년~10년을 쉬지 않고 밥차가 있는 모든 장소에서 꾸준히 봉사하는 분들이 있다. 먹는 사람과 봉사하는 사람도 점점 늘어나서 밥차는 연일 만원 상태다.


고마운 봉사자들이 없었다면 밥차는 지금까지 달려오지 못했을 것이다. 밥차 봉사자들은 정말 헌신적이다. 사정하거나 부르지 않아도 눈이 오나 비가 오나 빠지지 않고 스스로 나온다. 심지어 직접 농사지은 것들까지 바리바리 싸 들고 오는 분, 낚시를 해서 잡은 생선이나 조개, 낙지를 잡아서 가져오시는 분들도 있다. 개인과 개인이, 단체와 단체가 힘겨운 이웃을 생각하며 팔을 걷어붙이는 모습을 보면서 나는 날마다 하나님의 은총과 자원봉사자들의 위대한 힘을 느끼곤 한다.


여기저기서 봉사를 하겠다고 오는 사람이 많다. 그런데 나는 아무리 봉사자가 귀해도 항상 분명한 기준을 세우고 있다. 특히 학생들이 봉사 점수를 채우기 위해 올 때 절대 거짓으로 봉사 시간을 늘려서 적어주지 않는다. 우리에게는 자원봉사자가 절대적으로 필요하지만 명목상 봉사를 했다는 증거를 위해 대충 때우러 오는 경우는 전혀 달갑지 않다. 봉사는 머리와 가슴, 눈을 하나로 모아야 한다. 따뜻한 가슴 없이, 마주 보는 눈길 없이, 머리로만 하는 봉사는 제공받는 사람들이 더 먼저 안다.


몸은 봉사의 자리에 와 있는데, 성의 없이 눈치만 보다가 가면서 봉사시간을 넉넉하게 써줄 수 없는지 묻는 학생과 학부모들이 꽤 있다. 냉정하다 싶지만 나는 철저히 봉사한 시간대로 기재해준다. 봉사는 적선도 아니고 자랑도 아니다. 우리의 가치 있는 삶이 되어야 한다.


그래도 나는 더 많은 사람들이 밥차 봉사를 하길 바란다. 억지로든 자원해서든 한 번이라도 여기서 봉사를 해보면 동시대를 살아가는 우리 이웃들의 모습이 얼마나 다양한지 깨닫게 되고, 우리가 관심을 기울여야 할 곳이 많다는 것을 이론이 아닌 체험으로 배울 수 있기 때문이다.


보배로운 만남

내 삶에는 선한 영향을 주신 분이 참 많다. 그중에서도 다음 세 분은 가까이에서 함께하며 내 삶의 전면에 지대한 영향을 주셨다.


먼저 정근모 전 과학기술부 장관으로, 신장협회 회장으로 일할 때 이사장님으로 모셨던 분이다. 그 일을 하면서 내가 어떤 일을 겪었는지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던 그분은 내가 정말 힘들어할 때 평생 잊지 못할 조언을 해주셨다.


얼마나 큰 울림으로 다가왔는지 모른다. 지금도 나는 시시때때로 그 말을 떠올린다. 봉사하다가 어려움에 빠진 이들을 보면 내가 느꼈던 감동을 그대로 전해준다. 선한 일을 하다보면 마귀가 그 사람을 흠집 내고 훼방한다. 나처럼 사람으로 인해 상처를 받은 이들을 위로할 때면 그분의 그때 그 말씀이 정말 큰 귀감이 된다.


또 한분은 채의숭 장로님이다. 장로님이 쓴 책인 『주께 하듯 하라』에도 나와 있지만 모든 사람을 대할 때 주께 하듯 하는 삶을 사는 분이다. 내가 매일 만나는 사람은 독거노인이나 노숙인이다. 이들을 섬길 때 혹시라도 그들이 처한 형편으로 바라보지 말고 주님이 보내준 존귀한 사람으로 섬겨야한다는 사실을 깊이 다짐하게 한 분이다. 항상 그런 자세를 유지하려고 노력하고는 있지만 사람이다 보니 자신도 모르게 느슨해질 수 있는데 그럴 때마다 그 말씀으로 삶을 채찍질하게 되었다.


마지막으로 극동방송의 김장환 목사님이다. 내가 극동방송의 운영위원을 맡고 있을 때 직접 뵙게 되었는데, 가까이에서 볼수록 늘 그분처럼 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분의 가슴속에는 사랑만이 가득 차 있다. 온 세상을 더불어 사랑하는 분이다. 목회자의 표본처럼 보여 그분을 닮고 싶었다. 정말 본받고 싶을 정도로 존경하고 있다.


아울러 나는 한국신장협회 일을 할 때 도와주셨던 ‘종교계의 큰 별’ 세 분을 뜨겁게 기억하고 있다. 김수환 추기경님은 평소에도 “바보처럼 살아라”라고 말씀하시며 솔선수범의 삶을 사셨다. 한경직 목사님은 평생을 “욕심내기 말라”는 말씀을 하셨는데, 지금까지의 내 삶에도 꺼지지 않는 밝은 빛이 되어 주셨다. 법정스님은 “물처럼 살다 가라”는 평소의 말씀처럼 깨끗한 삶을 살다 가셨다.


한편 나 스스로 멘토로 삼아 내 삶에서 항상 기억하고 있는 세 사람이 있다. 교사라는 평탄한 길을 가던 중에 길에 버려진 죽어가는 한 노파를 보고 가난한 자들의 어머니가 된 마더 테레사 수녀다. 자녀를 위해 사랑과 배려, 격려와 헌신을 아끼지 않은 우리네 어머니가 생각나기 때문이다.


다른 한 사람은 흑인 노예로 태어나 과잉 수확된 땅콩을 이용해 미국 남부의 경제적 문제를 해결한 조지 워싱턴 카버다. ‘땅콩 박사’로 더 알려진 인물이다. 그의 실험실에는 성경책 외의 자료는 없었으며, 단지 문제에 직면할 때마다 하나님께 여쭈었을 뿐이라고 고백하는 겸손한 사람이다.


빈민가의 사생아로 태어나 죽음을 생각할 만큼 끔찍한 일들을 겪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극복하고 다시 일어나 세계에서 가장 존경받는 여성으로 떠오른 오프라 윈프리도 그중 한 사람이다.


좋은 일을 하는 곳에 있으면 좋은 사람을 만나고, 좋은 사람을 만나면 좋은 생각을 하게 된다. 그리고 그 좋은 생각이 우리의 삶을 선한 길로, 그리고 빛으로 이끌어준다.


* * *


본 도서 정보는 우수 도서 홍보를 위해 저작권자로부터 정식인가를 얻어 도서의 내용 일부를 발췌 요약한 것으로, 저작권법에 의하여 저작권자의 정식인가 없이 무단전재, 무단복제 및 전송을 할 수 없으며, 원본 도서의 모든 출판권과 전송권은 저작권자에게 있음을 알려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