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인생이 흔들린다 느껴진다면

   
남희령
ǻ
책이있는풍경
   
14800
2019�� 07��



■ 책 소개

 

굴곡진 인생사에 관해 누구보다 할 말 많은 작가가
이 책에서 전하는 메시지는 바로 ‘결핍’과 ‘치유’.

 

인생이 흔들린다고 느껴질 때 나를 위로해주는 것은 나와 같은 고민과 방황 속에서도 웃으면서 살아가는 이웃들의 이야기다. 이겨낼 수 없을 것 같은 어려움을 딛고 꿋꿋하게 일어나 자신의 꽃을 피운 누군가의 용기가 나에게 다시 일어날 희망이 되어준다. 저자는 20년 넘는 방송작가 일 중에서 유난히 기억에 남는 이야기들을 이 책의 곳곳에 풀어놓았다.

 

사람은 누구나 저마다의 행복과 아픔이 있다. 인생은 때로 굴곡을 만나고 크고 작은 부침을 겪는다. 왜 이렇게 힘이 들까 생각이 들 때 우연히 만난 누군가가 당신에게 작은 위로를 주고, 때로는 스스로 깨닫지 못했던 것을 깨우쳐주기도 한다. 이 책에서 만나는 사람들의 이야기는 그런 위로의 토닥임이 되어줄 것이다.

 

■ 저자 남희령
세상에 직업이라곤 선생님만 있는 줄 알고 살다가 덥석 방송작가가 되었습니다. 어쩌면 방송작가란 직업이 글만 쓰는 직업이라면 아예 시작도 못 했을 겁니다. 사람들이 궁금해하는 내용에 귀 기울이고, 그 내용을 파보고, 그렇게 알게 된 내용들을 어떻게 효과적으로 전달할지 고민하는 일이 방송작가의 역할이라 생각했기에 ‘까짓거 해보자’ 하는 생각으로 달라붙었습니다. 하지만 쉼 없이 달리면서도 불안했습니다. 나의 내일은 어떻게 되는 건지─ 그런 잡생각이 들 때마다 오늘, 바로 지금만 생각했습니다.

 

〈SBS 모닝와이드〉를 시작으로 〈리얼코리아〉, 〈VJ특공대〉, 〈피플 세상 속으로〉,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행〉, 〈인간극장〉, 〈휴먼다큐 사람이 좋다〉, 〈아침마당〉까지 20년 넘는 시간 동안 정말 다양한 사람들을 만났습니다. 그리고 앞으로도 힘닿는 한, 상황이 허락하는 한, 더 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느껴볼 생각입니다.

 

■ 차례
추천의 글 : 방송인 이금희
Prologue : 몸도 마음도 서걱거리던 그런 날이 있었다

 

1. 휴먼 프로그램 작가로 살아간다는 것
꼬셔야 사는 여자
부끄러운 기억도 쓸모가 있다
선무당은 사람을 잡지만 서당개는 사람을 살릴 수 있다
우연을 운명으로 만드는 행복
죽음과 맞닥뜨린 순간, 떠오른 유일한 생각
아플 땐 아프다고 말하는 게 답이다
남 작가의 1종 대형 면허 도전기

 

2. 결핍 있는 인생이 아름답다
휴먼 프로그램 주인공들의 공통점
당신이 예뻐 보이는 진짜 이유
그녀는 왜 머리를 깎고 나타났을까
세상은 그렇게 굴러간다
꼴찌? 그게 뭣이 중헌디
그녀는 왜 행복을 자랑하지 않는 걸까
어떻게 진짜 친구를 얻는가
때론 무모함이 길을 만든다

 

3. 가족은 사랑일까 아픔일까
새벽녘 전화 한 통
그 남자의 부친상(父親喪)
아내의 눈이 된 남자
모세의 기적
외로움은 결코 늙지 않는다
고부갈등 해결을 위한 삼자(三者) 원칙
배우자를 선택하는 절대 기준
마마걸, 마마보이는 결혼을 하면 안 되는 이유
가족 때문에 힘들어하는 당신에게

 

4. 나를 살게 하는 빛과 어둠의 나날
삶은, 결코 이분법이 아니다
진짜 성인이 된다는 것
‘때문’과 ‘덕분’은 한 끗 차이
별난 응급처방전
인생의 위기를 이기게 해줄 당신만의 모티베이터
길 위의 행복
어느 변호사의 비애
우리가 진정 부끄러워해야 할 것들
불행에 관한 불편한 진실
지친 하루를 살아가게 했던 힘

 

Epilogue : 그대들의 인생에 건배를
Special Thanks




내 인생이 흔들린다 느껴진다면


휴먼 프로그램 작가로 살아간다는 것

아플 땐 아프다고 말하는 게 답이다

난 아픔을 말하는 데 익숙하지 않은 사람이다. 언니 오빠들 신경 쓰기도 바쁜 부모님에게 늦둥이 막내로 태어난 나는 늘 관심 밖이었다. 우리 속담에 우는 애 젖 준다는데 나는 울지 않았다. 어린 나이였지만 그건 치사한 짓 같았다. 공부도 생활도 내가 알아서 결정하고 행동했다. 원칙은 하나였다. 다 늙은 부모님, 최소한 걱정하게 하지는 말자였으니 일종의 효녀 코스프레도 한몫했던 것 같다.


결혼도 그렇게 했다. 5년간의 연애를 했고, 내 나이 서른이 되던 해, 부모님께 결혼할 남자가 있음을 말씀드렸다. 늘 그래왔듯 부모님은 우리 막둥이가 알아서 잘 결정했겠지 하셨다.


딸아이가 태어났을 때만 해도 별 문제는 없었다. 남편은 안정적인 월급쟁이 피디로 일을 했고, 나 역시 작가로 일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경제적으로 어려운 부분이 전혀 없었다. 양가 부모님한테 받은 거 없이 시작한 신혼이었지만 둘이 같이 버니 돈도 조금씩 모이기 시작했다. 이 상태로만 가면 전세 자금을 받아서 시작한 친구들 따라잡는 건, 식은 죽 먹기라는 오만도 부렸었다.


불행은 딸아이 돌 반 때 시작됐다. 나의 반대를 무릅쓰고 남편은 외주 제작사를 차렸다. 처음 1년은 괜찮았다. 나에게 가져다주는 돈은 없었지만 이익을 남겨서 사무실도 넓히고 장비도 사는 걸 보면서 이제 곧 월급도 갖다주겠지 했다. 그런데 세상 사는 건 늘 내 계산과는 따로 노는 법인지 그 후로도 난 지금까지 제대로 된 남편의 월급을 받아보질 못하고 있다.


그렇다고 남편이 노는 건 아니다. 죽어라 일을 하는데 남기질 못했다. 받은 돈보다 더 써서 제작을 해주거나 중간에 협찬이 어그러지면서 자신이 제작비를 메워야 하는 일이 비일비재 발생했다. 더러 일이 잘될 때가 있어도 안될 때를 대비해야 했기 때문에 집에 돈을 가져올 순 없었다.


그런 시간이 계속 이어졌지만 난 징징대지 못했다. 아니, 안 했다. 마누라 덕에 놀고먹겠다고 작정한 사람도 아니고 가장 노릇 제대로 하고 싶어서 열심히 뛰어다니는 남편이 성과를 못 낸다고 징징댄다는 건, 어렸을 때 내 생각처럼 좀 치사한 일 같았다.


딸이 커가면서 교육비도 점점 더 들어가고 매년 미친 듯이 올라가는 전셋값도 채워야 하니 내가 일을 늘리는 수밖에 없었다. 어쨌거나 프리랜서인 작가란 직업은 일을 관두면 바로 백수지만 일을 많이 하면 할수록 수입은 늘어나는 법이니까.


낮밤을 가리지 않고 일을 했다. 내 솔직한 마음 같아선 월급을 못 갖다줄 바엔 사업을 접고 집안일이나 육아를 전담해줬으면 싶었지만 그 말도 목구멍에서만 아우성쳤지 입밖으론 하지 못했다. 상황이 악화될수록 남편은 오히려 더 밖에 머무는 시간이 많아졌다. 어떻게든 일을 만들어서 제대로 된 월급을 안겨주고 싶은 마음이었으리라.


그 무렵 난 긴 고민 끝에 둘째를 임신했다. 남편이 자리를 잡기 전까지 둘째는 없다고 내 나름 독하게 마음을 먹었지만 혼자는 안 된다며 둘째를 강력하게 원하는 남편의 마음을 차마 외면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이미 내 몸은 지칠 대로 지친 상태였고 결국 둘째는 자연 유산이 되고 말았다. 문제는 그 이후에라도 쉬었어야 했는데 그러질 못했다. 나는 우리 집의 가장이었으니까... 결국 내 몸은 최악으로 치달았고 죽음 직전에 살아나는 경험까지를 해야만 했다.


아픔은 말하는 것 자체로 치유의 시작이다. 이건 내 얘기가 아니라 심리 전문가들의 얘기다. 몇 년 전, <아침마당>에서 가족문제상담 프로그램을 한 적이 있다. 어찌 보면 자신의 치부일 수도 있고 숨기고 싶은 가정사일수도 있어서 사연이 많이 들어올까 싶었는데, 예상 밖으로 신청이 쇄도했다. 나를 만났던 그 많은 신청자들의 공통점이 있다. 담당 작가인 나를 만나 얘기를 시작할 때 모습과 얘기를 끝내고 돌아갈 때 모습이 현격한 차이를 보인다는 것이다. 내가 한 일이라곤 그분들의 아픔을 공감하며 들어드린 일밖에 없는데도 그분들은 나에게 아픔을 털어놓는 것만으로 상당 부분 발걸음이 가벼워져 돌아갔다.


불현듯 중환자실에서 눈을 떴던 미련했던 나의 모습이 떠올랐다. 아픔은 묵혀둔다고 땅처럼 돈이 되는 게 아니다. 숨겨봤자 병만 된다. 심지어 가족도 내 몸이 아플 땐 남이다. 아프면 아프다고 말하라. 그것도 아주 구체적이고 지속적으로.


죽을 고비를 넘긴 그 후로도 난 꽤 여러 해 벙어리 냉가슴 앓는 시간을 보내야 했다. 몸과 마음이 병들어 가는 걸 뻔히 느끼면서도 징징거리지 못했다. 그러다 2년 전인가. 인내의 한계에 다다른 난 폭발하기 시작했다. 그때부터 남편에게 간간히 소리도 지르고, 울기도 했다. 나 너무 힘들다고 도와달라고. 처음 내가 소리를 지르고 울고 했을 땐 ‘평소 아무 말도 없던 여자가 갑자기 왜 저래?’ 하던 얼굴이더니 요즘엔 재활용 쓰레기 처리에 청소기도 돌리고, 설거지도 해놓는다. 가끔이긴 하지만 밥도 알아서 해놓을 땐 감동이 두 배다.


아플 땐 아프다고 말하는 게 답이다. 그래야 아픔도 덜어진다.


결핍 있는 인생이 아름답다

세상은 그렇게 굴러간다

2014년 겨울, 연말 특집을 준비하면서 그 남자를 만났다. 신문 한 귀퉁이에 난 작은 기사를 보고 난 후였다. 지방에서 우유 대리점을 하고 있는 남자가 1억 기부의 약정서에 사인을 했다는 내용이었다. 도대체 우유 대리점이 얼마나 잘되면 소시민이 1억이나 기부를 약속할 수 있었을까. 알고 보니 그 남자가 더 대단했던 것은 자신의 재산에서 1억을 쾌척한 게 아니라는 사실이었다. 일을 하면서 앞으로 5년간 매달 일정 정도의 기부를 함으로써 1억 원을 채우겠다고 미리 약속을 한 것이었다. 한마디로 ‘기부 빚’을 진 셈이었다.


막상 도착한 그 남자의 우유 대리점은 생각보다 규모가 작았다. 그 작은 규모에서 어떻게 그 엄청난 일을 저지르게 된 건지, 인터뷰가 시작됐다. 그 남자의 전직은 평범한 노동자였다. 대기업 자동차 회사에서 20년 가까이 생산직 노동자로 일했던 그 남자는 2009년 느닷없는 대량 해고의 희생자가 되었다. 네 식구를 책임지던 가장에서 하루아침에 백수가 된 남자. 가족을 위해서 다시 일자리를 구해야 했지만 사십대 중반에 느닷없는 해고자가 된 그가 일할 곳을 새로 찾기란 쉽지 않았다. 어렵사리 친척의 도움을 받아 우유 대리점 일을 배우기 시작했고 그러길 3년 만에 작게나마 독립을 하게 된 것이다.


대리점을 열고 1년 동안은 자리를 잡기도 바빴으므로 누군가를 도울 엄두를 못 냈다고 한다. 하지만 1년이 지나 어느 정도 단골 고객이 확보된 다음부터 소소하게 기부를 시작했다. 그리고 아예 더 크게 일을 저질러버렸다. 있는 돈을 기부하는 게 아니라 벌어서 계속 기부를 하겠다는 약속을 해버린 것이다. 그렇다고 자녀들을 다 키워놓은 상태도 아니었다. 그 당시 남자의 큰아이는 고3, 둘째 아이는 고2. 그야말로 제대로 돈이 들어갈 상황이었다. 하지만 남자의 철칙은 단호했다.


첫째! 아이들은 대학교 입학금까지만 대준다는 것.

둘째! 자기가 번 돈은 100% 자기 것이 아니니 아예 매달 200만 원은 빼고 자기 돈이라 생각한다는 것.


있는 돈을 기부하는 것도 아니고 기부 빚을 진 건데 부담스럽지 않느냐는 질문에 전혀 그렇지 않단다. 오히려 그는 기부 약속 때문에 더 열심히 일을 할 수 있어서 좋다고 말했다. 마치 신나는 놀이를 하고 있는 아이처럼 그 남자의 눈빛은 설렘과 생기로 가득 차있었다.


그 여자를 만난 건 메르스 광풍이 우리나라를 휩쓸고 지나간 직후였다. 불과 며칠 전까지만 해도 듣도 보도 못한 병이 사람들의 목숨을 앗아갔으며 사람들은 속수무책인 정부와 의료진을 비판하다 못해 욕을 퍼붓기도 했다. 그녀는 간호사였다. 그것도 메르스로 인한 첫 사망 환자가 나온 병원의 중환자실 간호사. 어느 누구보다 두렵고 무서운 상황에서 그녀는 편지를 썼고 그 편지는 ‘간호사의 편지’라는 제목으로 포털의 대문을 장식하며 화제가 됐다.


그녀의 편지는 처절했다. 그녀가 얼마나 치열하게 메르스와 싸우고 있는지 그 짧은 글 속에서 느껴졌다. 의료진이라는 이유만으로, 사망 환자가 나왔다는 이유만으로 손가락질을 하고 등을 돌렸던 국민들은 달라졌다. 그녀의 편지가 공개된 이후로, 국민들은 의료진들을 격려하기 시작했다.


얼마 전, 그녀의 첫 책이 신간이란 이름으로 내 책상 위에 놓여졌다. 나는 단번에 그녀의 책을 읽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책 곳곳에서 열악한 현실 속에서 환자를 돌봐야 하는 간호사의 힘겨운 숙명이 느껴져 읽는 내내 가슴이 따끔거렸다. 그리고 안타깝게도 그녀가 최근에 간호사란 일을 관뒀음을 알게 되었다.


얼마나 힘들었기에 스무 해 넘게 해왔던 그 일을 관둬야 했을까. 잠깐의 망설임 끝에 그녀에게 문자를 남겼다. 소중한 글, 잘 읽었다는 말과 함께 응원의 메시지도 짤막하게 덧붙였다. 분명, 그녀는 생의 마지막에 있는 환자들을 안간힘을 다해 붙잡아 주었듯 새롭게 시작할 어떤 일에서도 최선을 다해 자기의 자리를 지킬 것임을 난 믿는다.


난 이런 사람들을 인터뷰할 때마다 가슴이 뛴다. 노블레스 오블리주가 실종된 지 오래고, 모 대기업 오너 일가와 슈퍼 갑질이 연일 뉴스를 장식하는 걸 보면서 우리가 진짜 배워야 할 삶의 가치는 소시민의 삶에 있다는 걸 다시 한 번 느낀다.


우리가 사는 세상을 살 맛 나게 하는 건, 이런 사람들이다. 힘들었던 자신의 과거를 잊지 않고 누군가의 미래를 위해 자기 몫의 일부분을 기꺼이 나눌 수 있는 사람들이며, 누가 뭐래도 자기 자리에서 묵묵히 최선을 다하는 사람들이다. 그런 사람들이 세상을 굴러가게 한다. 당신도 그중의 한 사람이다.



가족은 사랑일까 아픔일까

새벽녘 전화 한 통

이건 분명 꿈이었다. 그렇지 않고는 이런 일이 나에게 벌어질 게 아니었다. 그날 난 요란한 팀 회식 후, 알코올에 찌든 속을 부여잡고 잠에 빠져있었다. 아침 6시쯤 됐을까. 다급히 날 깨우는 남편의 목소리.


“빨리 일어나! 여보, 정신 차려! 아버님이 사고를 당해서 응급실에 계시대, 빨리 가자.”


이게 뭔 소리지. 비몽사몽 주섬주섬 옷을 챙겨 입고 병원으로 향했다. 이미 아버지는 의식이 없었다. 이른 아침, 횡단보도를 건너다 출근 중인 승용차와 그대로 부딪쳤다고 했다. 갈비뼈 24개 중, 몇 개를 빼고 모두 부러졌다고 했다. 정신이 번쩍 났다. 아무런 반응도 없는 아빠를 보자마자 난 미친 듯이 소리를 질렀다.


“아빠, 막내 왔어. 막내!”


언거푸 지르는 소리를 들은 건지 미동도 없던 아빠가 들릴 듯 말 듯 입을 움직였다.


“많이 아파. 아파... 할매.”


엄마를 찾고 있었다.


“응, 아빠, 엄마 옆에 있어. 죽으면 안 돼. 알았지, 아빠!”


그날로부터 아빠는 정확히 보름을 버텼다. 출혈이 너무 심해 수술조차 곧바로 할 수 없었다. 급히 개복을 한 후, 출혈이 심한 부위를 일단 거즈로 막아놓았다. 절반 이상 찢어진 간을 꿰매는 수술은 며칠 후에나 할 수 있었다. 응급실에서 들었던 그 한마디 이후 아빠가 마지막 숨을 거두는 그날까지 우리 가족은 아빠의 목소리를 더 이상 들을 수 없었다. 그대로 아빠는 중환자실로 옮겨졌고, 중환자실에 있는 보름 동안 곧 떠나실 것 같으니 가족들 다 모이라는 의사의 말을 적어도 네 번은 들은 것 같다.


그러면서도 하루하루를 버티는 아빠를 의사는 신기해했다. 이미 그때 아빠 나이 여든. 보통 노인네들은 그 상황에서 이렇게 버티지 못한다고 했다. 그랬다. 아빠는 삶에 대한 욕심이 많았다. 늘 백 살까지는 살고 싶다고 했다. 그리고 진짜 백 살을 채우려는 듯 매일매일 운동을 했다. 교통사고를 당하기 전까진 병원 한 번 제대로 간 적 없었고 자식들한테 부담 주기 싫다며 그 연세까지도 소일거리긴 하나 용돈을 직접 버는 억척 아빠였다. 우리 가족들 모두는 분명 아버지가 백 세를 채울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런 아버지가 교통사고로 사경을 헤매고 있었다.


결국 보름 뒤, 의사가 또다시 가족을 불러 모았다. 아버지는 약물에 의지해 기계적 숨만 쉬고 있었다. 더 이상 의미가 없으니 투약 중인 약을 중단하겠다고 했다. 주삿바늘을 통해 들어가던 약을 멈추자 오르락내리락 힘겨운 발걸음을 이어가던 아빠의 삶도 비로소 평지를 걷기 시작했다. 가족 모두 눈물을 훔치느라 정신이 없었다. 난 그 와중에 의식이 없는 아빠 귀에 바짝 입을 붙이고 얘기하기 시작했다.


“아빠, 많이 아팠지? 보름이나 버텨줘서 너무 고마워. 만약 아빠가 이 시간을 버텨주지 않고 차가운 아스팔트 위에서 떠났다면 우린 너무 힘들었을 거야. 늦둥이 딸 낳아서 키우느라 고생했어. 아빠 덕분에 막내딸 잘 살고 있으니까 걱정 마. 그리고 너무 미안해. 아빠, 너무 미안해...”


나는 이 말만을 반복했다. 난 아빠에게 미안한 게 많았다. 아빠를 미워했으니까. 늘 아들이 우선이었고 돈에 관한 한 지독을 떠는 것도 싫었고 자신의 근검절약 쉬지 않고 일하는 생활 패턴을 엄마와 자식들에게까지 강요하는 게 싫었다. 전기료를 아껴야 한다며 방방마다 불을 끄고 다니는 아빠의 지지리 궁상이 싫었다. 아끼고 싶으면 아빠만 아끼면 되고 일하고 싶으면 아빠만 일하면 되지 왜 하기 싫은 우리에게까지 초절전 삶을 강요하는지 이해가 안 됐다. 그런 아빠 때문에 어느 순간 가족들은 여행 계획에서 아빠를 빼기 시작했다. 어차피 가자고 해도 돈 아까워서 못 가는 아빤데 여행 얘기는 한들 뭐 하나 싶으니 아예 얘기를 안 하게 되었다.


그런 아빠를 내가 닮았다는 걸 장례식장에서 알았다. 조문객들이 하나같이 “막내딸이 아빠를 닮았었구나”라고 말했다.


‘내가 아빠를 닮았다고, 그럴 리가.’


난 한 번도 아빠를 닮았다고 생각해본 적이 없다. 성격도, 취미도, 체질도 모두 엄마를 닮았다고 생각하며 살았었다. 그런데 그런 내가 아빠를 닮았다고? 맙소사! 그날 이후, 그 말은 마치 내 삶의 화두처럼 나를 따라다녔다. 그러고 보니 아빠를 닮은 게 맞았다. 집에서고 밖에서고 쉬지 않고 일했다. 일을 내버려 두고는 잠이 오지 않았다. 쉬는 날이면 마치 일 총량의 법칙이라도 있는 것처럼 방송 일 대신 집안일로 모든 시간을 채웠다. 집에 먼지 하나 있으면 난리 날 것처럼 깔끔을 떨었다. 노예근성인지 책임감인지는 모르겠지만 이 모든 게 내가 그토록 싫어했던 아빠의 모습이었다. 그제야 40년을 함께했으면서도 내가 아빠에 대해서 아는 게 없음이 너무 죄송하게 느껴졌다.


곁에 있던 사람이 떠나고 나면 후회만 남는다. ‘어쨋든 그 사람은 참 마음이 따뜻했어’, ‘효자였어’, ‘모범생이었어’ 등등. 떠난 사람이 훌륭했든 훌륭하지 않았든 대부분 그렇다. 심지어 잘해준 건 생각이 안 나고 못해준 것만 생각이 난다. 어쩌면 그게 망자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인지도 모르겠다. 나 역시 좀 더 일찍 지독한 아버지를 이해했어야 했다며 후회했다. 하지만 이 역시 떠난 후엔 부질없는 짓이다.


그나마 아버지가 살아계셨을 때 내가 했던 한 가지 일 때문에 죄송함을 조금이나마 덜고 살고 있다. 혹시 아버지가 살아계신 분들은 꼭 해보길 권한다. 결혼 후, 친정어머니에게만 매달 용돈 20만 원을 드렸었다. 딸아이가 돌 반이 지나자마자 사업을 시작한 남편을 대신해서 가장이 된 상태에서 내가 시댁과 친정에 드릴 수 있는 최대치가 그 정도였다. 아버지는 워낙 구두쇠니까 당신 쓸 돈은 항상 저축하고 계셔서 드릴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오히려 아버지 때문에 돈 쓰는 행복을 모르고 사는 불쌍한 엄마만 드리는 게 내가 할 수 있는 효도라고 생각했다.


그러던 어느 날, 성우 송도순 선생님과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다가 부모님께 드리는 용돈 얘기가 나왔다. 친정어머니에게만 용돈을 드린다는 내 얘기를 들으신 송도순 선생님이 나에게 조언을 건네셨다.


“남 작가, 그 용돈 말이야. 아버지 10만 원, 어머니 10만 원 이렇게 나눠서 드려. 어차피 매달 20만 원 쓰는 건데 아버지가 그 돈을 쓰든 안 쓰든 아버지도 늦둥이 막내딸한테서 용돈받는 즐거움을 느껴보셔야지.”


허를 찔린 기분이었다. 사실 나는 그 말씀을 듣기 전까지 한 번도 그런 생각을 못 했었다. 그날 이후, 나는 아버지가 돌아가실 때까지 매달 거르지 않고 아빠에게 10만 원을 드렸다. 물론 돌아가실 때까지 고맙다는 소리 한마디 듣진 못했다. 그런데 그 소리도 아빠 장례식장에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들었다. 아빠가 막내딸의 쥐꼬리만 한 용돈에 대해서 주변 분들에게 침 튀기게 자랑하셨다는 걸. 어리석게도 우리는 소중한 이들을 떠나보내고 나서야 떠난 이의 가치를 깨닫는다. 어쩌면 그런 어리석음이 보이지 않는 그리움의 연료가 되어 소중했던 이들을 영원히 기억하게 하는 것일지도 모르지만 말이다.



나를 살게 하는 빛과 어둠의 나날

길 위의 행복

무슨 질문이든 명쾌하게 대답하길 좋아하는 나였지만 유난히 대답하기 곤란한 질문이 있었다.


“당신은 행복한가요?”


다른 질문은 몰라도 이 질문만큼은 나를 언제나 주저하게 만들었다. 지금까지 사십대 중반이 되도록 이 질문에 냉큼 대답을 할 정도로 나 자신이 행복하다는 생각을 별로 해보지 못하고 살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다 문득 한 남자 이야기가 떠올랐다. 그가 <인간극장>에 처음 소개된 건 2008년, 작은 캠핑카에 아내와 어린 아이들을 태우고 1년 365일 떠돌이 삶을 사는 그의 모습은 많은 시청자들로부터 뜨거운 호응을 받았다. 수염을 덥수룩하게 기른 기인 같은 그의 모습도 인상적이었지만 집도 절도 없이 오로지 어설픈 캠핑카 한 대에 의지해서 가족 전체가 떠돌아다니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시청자의 눈길을 사로잡기에 충분했다. 도시에 사는 현대인이라면 누구나 마음 한편, 자신을 옥죄는 모든 것들을 과감히 내려놓고 떠나고 싶은 로망이 있지 않던가. 그는 삶에 찌든 현대인의 로망을 채워주는 전무후무한 주인공이었다.


내가 그를 다시 만난 건, 2010년 봄, <인간극장> 10주년 기념으로 화제의 주인공들의 변화된 삶을 취재하기 위해서였다. 그는 여전히 떠돌이 삶을 살고 있었다. 달라진 거라곤, 좁은 캠핑카 대신 좀 더 큰 중고 버스를 개조해서 전국을 돌아다니며 살고 있다는 것과 2년 전, 초보 유랑자의 삶에서 어느새 베테랑 유랑자의 모습으로 바뀌었다는 것.


늘 정해진 목적지 없이 비포장 산길을 올라 계곡물을 받아 밥을 해 먹고 바다에 도착하면 조개를 잡아 미역국을 끓인다. 반찬은 고작해야 한두 가지. 산이든 바다든 계곡이든 그곳에서 자신에게 허락된 소박한 재료들만으로 삼시 세끼를 해결한다. 분명 풍족함과는 전혀 거리가 먼 생활임이 분명한데 가족의 얼굴을 햇살처럼 밝았다.


원래 그의 직업은 교사였다. 안정적인 삶으로 따지자면 1,2위를 다투는 직업을 가진 남자였다. 그랬던 남자가 어느 날 교사를 관둬버렸다. 멀쩡한 집도 팔아버렸다. 혹시라도 미련이 남을까 봐서. 최소한의 옷가지와 그릇만 차에 싣고 떠나는 길. 아내는 기가 막힐 노릇이었다. 설마 몇 달 다니다 말겠지 하고 시작한 여정이었다.


처음엔 불편하고 부족한 것투성이었다. 먹는 거, 입는 거, 씻는 거. 어느 하나 불편하지 않은 게 없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늘 지끈지끈 자신을 괴롭히던 두통이 사라졌다. 정해진 일정이 없으니 시간에 쫓길 필요가 없었고 가고 싶을 때 가고 먹고 싶을 때 먹고 자고 싶을 때 자는 그런 삶이었다.


늘 푸른 자연 속에서 시간을 보내니 소꿉놀이가 따로 없었다. 신기하게도 자연은 배고프지 않을 만큼의 재료는 항상 허락했고 계곡물에 휘적휘적해서 널어놓은 옷가지들은 입을 때마다 뽀송한 햇살의 향기가 났다. 자연은 매일매일이 다른 모습, 다른 표정이었으므로 지루할 틈이 없었다.


물론 예상외의 일이 벌어져 곤란을 겪기도 했다. 산짐승을 만나 삼십육계 줄행랑을 친 적도 있고, 먹을 물을 찾지 못해 몇 십 리를 헤매기도 했다. 딱히 돈을 쓸 일은 없지만 기름 값은 필요했으니 그럴 땐 미리 배운 목수 일로 시골 마을에 들어가 의자도 만들어주고 탁자도 만들어주면서 최소한의 비용을 받았다.


직장에, 일에, 공부에 얽매여 있던 삶을 놓아버리고 나니 평화가 찾아왔다. 남편이야 자기가 원하던 삶이었으니 그렇다 치지만 달라진 건, 아내였다. 남편의 기괴한 여정에 마지못해 따라나선 아내의 표정은 2년을 살며 180도 달라져 있었다. 이젠 아내가 길 위의 삶을 더 즐기고 있었다.


하나라도 더 채우기 위해 사는 게 요즘 현대인의 삶이다. 더 높은 자리에 올라가야 하고 그래서 월급을 한 푼이라도 더 받아야 하고, 조금 더 넓은 집에서 살아야 하고 집이 넓어지는 만큼 가구나 가전도 더 큰 걸로 바꿔야 하고, 집이 커진 만큼 차도 커져야 하는 게 당연한 모습이 되었다. 그런데 그 가족의 삶은 전혀 다른 얘기를 하고 있었다. 오히려 버리면 버릴수록 더 맑아지고 더 편안해진다는 걸.


편리를 위해 우리가 취했던 모든 것들이 어느새 족쇄가 되어 그걸 지키기 위해 아등바등 살고 있는 우리네 모습이 아니었던가. 하지만 그는 달랐다. 가진 게 없으니 지킬 게 없고, 지킬 게 없으니 매여 있을 필요가 없었다. 이보다 더 자유로운 삶이 어디 있단 말인가.


모두 버리고 떠난 길에서 가족은 누리고 살 때는 맛보지 못했던 진짜 행복을 만났다. 한 곳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롭게 흘러서 살아 숨 쉬는 바람. 가족의 삶은 어디에도 얽매이지 않는 바람을 닮았다. 지금은 그 바람이 어디쯤에 머물고 있는지 궁금해지는 날이다.


“선생님, 저는 왜 행복하냐는 질문에 쉽게 대답을 할 수 없을까요?”


친분이 있는 유명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선생님에게 물어본 적이 있다.


“행복을 쾌락과 착각해서 그래요. 행복이란 감정은 즐겁고 흥분되고 떨리고 뭐 그런 감정이 아니에요.”

“그럼요?”

“그냥 고요한 상태예요.”


혹시나 딱히 화날 일도, 딱히 신나는 일도, 딱히 걱정되는 일도 없이 그저 그런 하루가 이어지고 있다고 왜 이리 내 삶은 밋밋하냐고 우울해하지 마시라. 어쩌면 당신이 가장 행복한 사람일지도 모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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