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시간이 아주 많은 어른이 되고 싶었다

Heute Kommt Johnson Nicht

   
페터 빅셀(역자: 전은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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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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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 10��



■ 책 소개
스위스 현대문학을 대표하는작가로 손꼽히며 스위스의 모든 교과서에 그의 글이 실려 있을 정도로 스위스 국민의 존경과 사랑을 받고 있는 페터 빅셀의 산문집. 스위스의 유력주간지에 기고한 칼럼들을 담은 이 책에서 저자는 효율성 제고가 최대의 명제로 군림하고 있는 지금의 삶이 과연 우리가 진정으로 원했던 모습인지물으며, 안온했던 과거의 일상과 세상의 기준과는 멀지만 오히려 더 넉넉한 일상을 일구며 살아가는 아웃사이더들의 이야기들을 들려준다. 본연적인삶의 모습을 담고 있는 이 이야기들은 ‘눈앞의 것’, 그리고 ‘지금 이 순간’에만 몰두하는 우리의 삶을 가만히 뒤돌아보게한다.

또한 저자는 아무런 목적 없이 ‘기다리기’,‘바라보기’, ‘이야기하기’ 같은 원형적인 행동들이 가능했던 과거를 회상하며 효율성의 잣대로 측정되지 않는 소소하고 본질적인 삶의 기쁨과소중함을 일깨운다. ‘밀가리 물’로 연을 만들어 날리는 소년이나, 기차 시간표를 모두 외워버린 지적장애인 등 이 책의 등장인물들은 하나같이‘규격 생산된 세계’에 살기를 거부하고 자신만의 세계를 만들어나간다. 이들은 그 안에서 온전하게 자기 세계의 주인이 되는 것을 보여주며 사회가요구하는 가치에 자신의 삶을 내준 현대인들이 다시 자신의 일상을 추스를 수 있도록 돕는다.

color=#008000>* 김정운 명지대 교수의추천도서!
(KBS 1TV <명작 스캔들&& 진행, 저서:『나는 아내와의 결혼을 후회한다』『노는 만큼성공한다』외)

“‘나는 시간이 아주 많은 어른이 되고 싶었다’, 휴가철에 읽을 책을 추천해 달라는 원고청탁을 받을 때마다 내가 꼭추천하는 책의 제목이다. … 지혜롭게 나이가 든다는 것은 내면의 시간이 아주 많아지는 것을 뜻한다. 이렇게 정신없이 살다가는 정말 한방에 훅간다. 태풍에 뿌리째 뽑혀 자빠져 있는 나무는 한결같이 아름드리 나무다. 그 엄청난 두께의 나무들이 아주 간단히 쓰러진다. 폼 나 보이지만의외로 쉽게 무너진다는 이야기다. 요즘 들어 승승장구하던 이들이 정말 맥없이 자기 목숨을 끊는 경우를 자주 본다. 우리는 큰 충격을 받는다.‘성공한 어른’이었을지는 몰라도 자신의 내면을 위한 ‘시간이 아주 많은 어른’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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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자 페터 빅셀(Peter Bichsel)
1935년 스위스 루체른에서 태어나졸로투른에 살고 있다. 13년간 초등학교 교사로 재직했고, 이후 전업 작가의 길로 들어섰다. 1964년 『사실 블룸 부인은 우유 배달부를 알고싶어한다』를 발표하며 세계적으로 주목받기 시작했다. 47그룹상(1965), 스위스 문학상(1973), 요한 페터 헤벨 문학상(1986),고트프리트 켈러 문학상(1999) 등을 수상했다. 뒤렌마트, 프리쉬와 더불어 스위스 현대문학을 대표하는 작가로 꼽히며, 스위스의 모든 교과서에그의 글이 실려 있을 정도로 스위스 국민의 존경과 사랑을 받고 있다. 우리나라에도 널리 알려진 『책상은 책상이다』는 20여 개국에 소개되어 전세계 독자들의 사랑을 받고 있으며, 그 외에도 『여자들은 기다림과 씨름한다』『못 말리는 우리 동네 우편배달부』『사계』『케루빈 함머와 케루빈함머』 등의 작품집을 발표했다.

■ 역자전은경
한양대학교 사학과를 졸업하고 독일 튀빙엔 대학교에서 고대 역사 및 고전문헌학을 공부했다. 현재 독일어 전문 번역가로활동하고 있으며, 『16일간의 세계사 여행』 『철학의 시작』 『캐리커처로 본 여성 풍속사』 『커피우유와 소보로빵』『리스본행 야간열차』 등 많은책을 우리말로 옮겼다.

■차례
기다림을 기다리며
 
존슨은 오늘 오지 않는다 | 기다림을 기다리며 | 오늘은 일요일 | 사라져가는 것들에 대한향수 | 과거가 없는 자그마한 술집 | 선불 버스표와 선술집 | 과거의 눈송이 | 우리가 아직 기다릴 수 있던 시절에 | 위대한 황금빛 세계사| 잃어버린 것은 바로 ‘의례’ | 도주를 기다림 | 편안하고 질서 있는 무질서 | 말하지 않은 것에 관하여

작은 세상, 큰 세상 
그들이 죽지 않기를 |소음을 위한 변론 | 작은 세상, 큰 세상 | 바람에 쓴 글 | 그냥 그러니까 | 개미와 코끼리 | 그 여자 이름이 도대체 뭐였지? |‘이해하기’보다 ‘듣기’ | 스테이크용 포크를 바라보며 | 발견의 자유 | 저녁에 만난 노벨상 수상자 두 명 | 낱말들아, 일어서라 | 작은,아주 작은 소속감 | 공용어가 여러 개인 나라에서 | 딱 한 번, 처음 한 번만 

내 고향은 어디일까? 
사과나무에 올라앉은 재즈 연주자 | 후고를 그리며| 그저 한 인간에 불과했던 황소 | 발리의 사제는 그저 가끔씩만 오리를 가리킨다 | 단어가 없이도 나눌 수 있는 대화 | 나는 이런 민족에서탈퇴하련다 | 위험한 적의 이름은? | ‘해골 클럽’에 관한 판타지 | 나의 국가, 타인의 국가 | 내 고향은 어디일까?

옮긴이의말





나는 시간이 아주 많은 어른이 되고 싶었다


기다림을 기다리며

사라져가는 것들에 대한 향수(鄕愁)

에밀 덕분에 나는 역(驛)을 알게 됐다. 그는 목적지를 불문하고 모든 기차 시간표를 외우던 사람이다. 아마 스스로는 기차를 타본 적이 없는 듯한데, 며칠씩이나 역에 서서 다른 사람들 눈에 띄지 않게 조심하며 기차 번호와 기관차 종류를 혼자 나직하게 말했다. 금지된 게 많은 사람이라, 언젠가는 역에서도 쫓겨날까 봐 두려워했으므로.


나는 에밀을 존경했다. 그는 내 눈에 진정한 어른이었다. 알아야 할 것을 모두 아는 사람. 그리고 시간이 많은, 그것도 아주 많은 사람. 나는 에밀과 같은 어른이 되고 싶었다. 그가 떠오를 때마다, 이런 내 소원은 거의 이루어질 뻔했다는 생각이 든다.


내가 그에게서 뭘 배웠는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무척 많이 배웠다는 것, 그리고 그가 나에게 많은 영향을 준 사람 가운데 한 명이라는 것은 알고 있다. 예를 들어 역에 있을 이유 없이, 그러니까 특별히 하는 일 없이, 감탄하며 무언가 구경하거나 자세히 관찰하지 않고서도 그저 거기서 서성이는 법을 배웠다. 그냥 여기 있기, 그냥 존재하기, 그냥 살아 있기.


에밀은 지적장애인이었다. 그 생각은 훨씬 나중에, 그가 죽은 지 한참 지난 뒤에야 들었다.


내가 아주 어렸을 때는 그가 다른 모든 사람들과 다르다고, 무척 다르다고만 생각했다. 에밀의 세상은 아마 다른 세상과는 다를 거라는 생각도 했다.


그래서 나에게 역은 그런 다른 세상의 중심이 됐다.


역은 내가 도주할 때면 찾아가는 목적지가 됐다. 기차 여행은 나를 역으로 데려다주었다. 슬픔이 나를 역으로 이끌었고, 분노와 기쁨도 그랬다.


이곳에는 다른 세상의 등장인물들도 있었다. 실패하는 중이거나 이미 실패한 사람들, 허풍쟁이와 사기꾼들, 의욕이 있거나 없는 사람들, 그리고 전쟁이 끝난 뒤부터는 이탈리아 사람들도 눈에 띄었다. 역에 있으면 고국이 약간 가깝게 느껴졌으니까.


고향은 유리와 강철로 이루어진 게 아니라 언제나 냄새를 특히 양배추와 파 또는 탄 음식과 같은 부엌 냄새를 품고 있다. 그러나 이제 이런 것들도 사라졌다. 우리는 이제 뢰스티(스위스식 감자전)가 갈색이 되면 안 되고, 가장자리가 검게 타면 더더욱 안 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타지 않고 노릇노릇하게만 구운 뢰스티도 아마 좋을 테고 어쩌면 더 훌륭할지도 모르지만, 이런 것은 더 이상 뢰스티에 대한 추억을 떠올리게 하지 않는다. 아무것도 기억나게 하지 않는다면 품질이 무슨 소용이 있을까?


역이 더 이상 역에 대한 추억을 생각나지 않게 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역은 얼마나 깨끗해졌는가. 정말 놀라울 정도다. 역에 다녀와도 이제 내 손은 지저분해지지 않는다. 역은 쇼핑센터처럼 살균됐고, 공항처럼 세계화되고 규격화됐다. 고향을 떠나 온 이탈리아 사람들이 향수에 젖어 쓸쓸한 마음에 그냥 서성인 적이라고는 한 번도 없는 공항. 기차는 비행기처럼, 역은 공항처럼 변했다.


우리는 환경보호를 강조하느라 세상을 보호해야 한다는 사실은 잊어버린다. 환경보호에 근본적으로 실패하기 때문에, 대재난이 분명히 오리라는 것을 알기 때문에, 이산화탄소 배출량 감소에 성공하지 못하리라는 것을 알기 때문에, 그러니까 환경을 어떻게 하지 못하리라는 것을 알기 때문에, 우리는 적어도 세상을 깨끗하게 만들려고 한다. 멸균 상태가 될 때까지 청소하기. 기차 모형 만세, 스위스연방 철도회사 만세! 연기도, 세균도, 먼지도 없지만 인생과도 멀어진 기차.


아니, 나는 지금 얼마 전에 제정된 기차에서의 흡연 금지에 대해 쓰고 있는 게 아니다. 나는 담배를 피우지 않고서도 기차를 탈 수 있고, 기차를 놓치는 것도 좋아한다.


하지만 이제 어느 역에서 기차를 놓쳐야 할까? 나는 공항을 좋아한 적이 한 번도 없다. 공항은 나와 이탈리아 사람들과 에밀에게는 지나치게 위생적이었다.


우리가 아직 기다릴 수 있던 시절에

예전에 어느 작은 동네의 바보에게 뭘 하는지 물으면, 그는 늘 "기다려!"라고 대답했다. 모든 사람이 그에게 묻고 또 물었고, 모두 그의 대답도 알고 있었다. 도대체 뭘 기다리는지 물으면 그는 "뭘 기다리는가 하면……"이라고 말하고는, 생각해내려고 한참 동안 애를 쓰다가 "뭐냐 하면…… 뭐냐 하면…… 그냥 기다려"라고 대답했다.


아무것도 아니라는 바로 그것을 기다린다고 말할 수도 있었을 테지만, 그는 그렇게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철학자가 아니었고, 그의 기다림에도 별 의미는 없었다. 그는 그냥 기다렸고, 그냥 거기 있었다.


나는 왜 기차가 취리히에 도착하기 오 분 전부터 승객들이 기차 복도에 길게 줄을 서서 기다리는지 스스로에게 묻곤 한다. 바쁘다는 것과는 관계가 없을 것이다. 모두 똑같은 시간에 도착하게 될 터니. 하지만 이들은 취리히를 기다렸다. 한 시간 또는 두 시간이나 기다렸다. 동네 바보와는 달리 그냥 기다린 게 아니라 특정한 어떤 것, 그러니까 취리히를 기다렸다. 그리고 이 취리히에 이제 오 분 뒤면 도착한다. 기다림은 드디어 끝난다. 고통으로 인식된 기다림. 하지만 동네 바보는 기다림을 고통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에게 기다림은 존재 자체에 가까웠다. 평생 기다리기, 오로지 기다리기.


목적지가 정해져 있으면 기차에서 글을 쓰기가 불가능해진다. 이때의 기차는 나에게도 조바심치는 장소가 되고, 기다림 자체가 힘겨워진다. 내가 무엇을 기다리는지-예를 들면 베를린-알고 있기 때문이다. 목적지에 언제 도착하는지-17시 24분, 베를린 도착-상당히 정확하게 예고되는데도, 아니 사실은 그래서 더 끔찍하다. 예고는 기다림을 고통스럽게 만든다. 예고는 기다림을 방해하니까. 우리는 더 이상 기다릴 수 없다.


잃어버린 것은 바로 의례
원래는 좋아했지만 살아가다가 잃어버리는 것이 많다. 시간이 아주 많이 흐른 뒤에야 비로소 그게 없어진 지 이미 오래라는 것을 깨닫는다.


사십삼 년 전, 나는 영화에 푹 빠져 있던 젊은이들 가운데 하나였다. 당시에는 필름 클럽들, 그리고 이른바 스튜디오 필름이라고 불리던 영화들이 있었다. 이 영화들은 관람객이 별로 없었다. 우리는 영화를 몽땅, 그것도 반복해서 계속 봤다. 재상영을 했으므로 혹시 영화 한 편을 놓쳤더라도 한두 해 지나면 다시 볼 수 있었다. 진짜 열정에는 반복이 필수적인데 지금은 최신 시사성만 중요할 뿐이다. 그리고 잘 알다시피, 최신 시사성은 기존의 시사성을 영원히 대체한다.


육십 년대 베를린에는 올림피아라는 작고 어두운 영화관이 있었다. 베를린 시내에서 가장 관람료가 싼 곳이었으므로 겨울에는 뒷좌석에 노숙자들이 앉거나 누워 따뜻하게 잠을 잤다.


영화는 화요일마다 바뀌었지만, 몇 주 뒤에는 그 영화가 다시 상영됐다. 늘 똑같은 영화였다. 본 영화에 앞서 보여주는 상영물도 늘 똑같았다. 오래된 주간 뉴스 두 편, 그리고 육식 식물에 관한 길고 지루한─내레이션은 무척 비장하게 들렸다─영화 한 편. 내가 본 영화 중에 최악이었고, 또한 제일 많이 본 영화였다. 그러나 올림피아는 내가 가본 영화관 중에 가장 아름다웠다. 내레이션 한 문장은 여전히 내 머릿속에 남아 있다. "남부 멕시코에 사는 끈끈이주걱의 먼 친척 가운데 하나는, 이와는 아주 다른 방식으로 일합니다."


당시에는 우리 모두 내레이션 전체를 외울 수 있었다. 우리뿐 아니라 거의 서른 명쯤 되던 단골손님들도 모두 그랬다. 우리는 이 사람들을 개인적으로 알지는 못했지만, 화요일마다 거기서 만났다. 육식 식물에 관한 끔찍한 영화가 시작되면 우리는 모두 자리에서 일어나, 큰 목소리와 영화배우 같은 요란한 몸짓으로 정확하게 내레이션을 따라했다. 명쾌하고 아름다운 합창이었다.


바로 이 합창 때문에 우리는 화요일마다 올림피아로 향했다. 이 합창은 처음에는 그저 바보 같은 장난으로 시작됐을 것이다. 그러나 나중에는 나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게도 진지하고 아름다운 의례가 되었다.


아니다, 나는 영화나 재즈를 향한 열정이 아니라 바로 이런 의례를 잃었다. 열정이 깊이 간직되어 있는 의례를…….



작은 세상, 큰 세상

그들이 죽지 않기를

동아시아에서 일어난 해저지진(2005년 동남아시아 지역을 강타한 쓰나미)을 생각하다가 왜 갑자기 브리기테가 떠올랐을까. 그녀뿐이 아니다. 도리스와 한스와 알베르트, 베른트, 요세프, 자비네, 그레텔……. 명단은 거의 끝없이 이어진다.


지금 갑자기 내가 이들 모두를 격정적으로 떠올리는 이유는 좁쌀보다 작은 사랑인가? 프랑스의 철학자 가브리엘 마르셀은 언젠가 이렇게 표현했다. "사랑이란 네가 죽는 것을 내가 원치 않는 것." 지금 나에게 크고 작은 사랑의 흔적을 남긴 모든 사람을 떠올리게 하는 것은 이러한 죽음의 격렬한 시위인가?


아니다. 나와 연락이 닿는 사람들 중에 이번 해저지진으로 목숨을 잃은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러나 내가 어디선가 만났고 왠지 모르게 좋아했던, 그리고 또 만났더라면 뭔가 다른 것을 기억나게 했을 사람들, 몇 초 또는 몇 분만이라도 내 인생을 더 살 만하게 만들어주었던 사람들 중에 죽은 이는 없을까.


뢰슬리도, 도리스도 더 이상 못 만났다. 이 사람도, 저 사람도, 그 사람도……. 아마 다시는 만나지 못할 것이다. 그럼에도 나는 이들이 모두 이 세상에 있기를 바란다. 그들이 죽지 않기를 바란다. 그들은 모두 내 인생에-적어도 아주 작은 부분은-속한다. 어쩌면 인생 전체에서 일 초에 불과하다고 해도, 그들이 죽으면 나의 아주 작은 부분도 아주 조금 함께 죽는 것이다.


전 세계에서 매일 십오만 명 이상이 굶어 죽는다고 한다. 이번 해저지진에서 죽은 사람들과 거의 맞먹는 숫자다.


그저 굶주리기만 한 사람은 그저 경제적 망명객에 불과하므로, 굶주리는 그 나라로 돌려보내야 한다고 우리가 생각했던 사람들은 우리 나라에도 수백 명씩 살지 않았던가? 그렇다면 나는 굶주리는 사람들과 상관이 있는 건가, 없는 건가?


이 세상의 대재난은 갑자기 우리를 어떤 점에 주목하게 했다. 이 세상의 대재난은 단순히 흑인이나 가난한 사람 또는 저개발국의 일이 아니라, 우리 모두에게 공통된 재난이라는 점이다. 이번에는 죄를 지은 사람이 아무도 없었지만, 다른 때는 거의 언제나 우리도 공범이었다.


우리에게 죄가 없다면 기부하기가 더 쉬울까? 공범이라면 우리가 하는 기부는 자백으로 이해될 수도 있을 테니까. 우리는 공동으로 무죄이기도 하지만, 공동으로 유죄일 때가 아마 훨씬 더 많을 것이다. 해저지진 이후 며칠 동안 굶어 죽은 사람들의 수도 아마 엄청나게 늘었겠지……. 매일 십오만 명 이상씩.


이해하기보다 듣기

몇 년 전, 어느 방학 캠프에서 지적장애인들을 위해 낭독을 해달라는 의뢰를 받은 적이 있다. 거절하지 못했지만 그런 일이 가능하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나는 내가 쓴 글들을 세밀하게 읽으며 가장 간결한 이야기를 찾아 이를 다시 단순하게 다듬고는 낭독 계획까지-평소에는 거의 하지 않는 일이다-세웠다. 그러나 막상 그곳에서 낭독을 할 때는 그 계획을 포기하고, 아마 문학적 소양이 있는 청중 앞에서 읽었을 것과 똑같은 내용을 낭독했다. 나는 그들보다 더 집중해서 듣는 청중들을 만난 적이 없다. 그들은 정말 귀를 기울였다. 얼마나 집중하여 듣는지, 낭독하는 내가 그들의 듣기를 몸으로 느낄 정도였다. 나는 계획보다 오래 읽었고, 읽는 게 재미있었으며, 내 이야기들을 다시 좋아하게 되었다. 그들이 내 이야기를 이해했을까? 모르겠다. 하지만 그들은 정말 집중해서 들었다. 내가, 우리가 할 수 있는 정도보다 더 집중해서. 그리고 그들은 능동적으로 들었다.


낭독이 끝난 뒤 질문 시간이 되자, 어떤 남자가 나에게 내일 날씨를 물었다. 그는 나를 라디오 방송국 직원이라고, 그리고 라디오는 날씨에 대해 안다고 생각한 것이다. 하지만 내 글에 대해 묻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 전까지는 듣지 못한 질문들이었다.


"왜 그 이야기에 자동차는 나오지 않나요?"

"코끼리 이야기는 안 쓰나요?"


그러고는 자기들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내 이야기가 그들의 이야기를 불러일으켰다는 사실만 빼고는 내 이야기와 아무런 관련도 없는, 아주 다른 이야기들이었다. 내 이야기를 듣고 자기의 이야기를 떠올린 능동적인 관중. 그들의 머릿속에서 일어나는 일을 우리가 이해라고 표현하지 않을 수도 있지만, 나는 그곳에서 청중에게 이해를 받는다는 느낌이 들었다. 어쩌면 듣기란 이해하기보다 훨씬 단계가 높은 것인지도 모른다. 우리는 결국 대단찮은 청중일 것이다. 언제나 성급하게 이해하려고 하니까. 이해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인정해야만 우리는 진정으로 들을 수 있다.


열두 살 때 나는 올텐 시립 도서관에 처음 갔다. 괴테 전집 중 처음 두 권을 빌려와 시를 차례차례 몽땅 읽고, 사흘 뒤에는 3권과 4권을 빌려 왔다. 나는 점차 중독, 그러니까 철자에 중독되어갔다. 내용도 모른 채 철자를 집어 삼켰다. 괴테와 슈티프터, 에브너-에셴바흐를 그냥 들었다. 그들의 말을 즐겁게 듣는 습관을 들였고, 많이 이해하지 못하면서도 그들에게 귀를 기울였다.


읽기는 듣기의 형태 가운데 하나다. 그때 나는 그렇게 할 수 있었다. 약간 교육을 더 받고 조금 더 숙달된 지금은 읽으면서 성급하게 이해하기 시작한다. 이제 어쩔 도리가 없다. 순진무구했던 과거로 돌아갈 수는 없는 것이다. 하지만 장 파울을 읽으며 이해하기를 거부하려고 약간 노력한다. 그에게 귀를 기울이기 위해서다. 귀 기울여 듣기에는 관용이 필요하고 선입견이 없어야 하는데, 이른바 경험이라는 게 많아질수록 그게 점점 더 어려워진다.


나를 성급히 이해하지 않은 탁월한 청중, 지적장애인들이 그때 이 사실을 기억나게 해주었다.



내 고향은 어디일까?

사과나무에 올라앉은 재즈 연주자

이상스럽게도, 나 혼자 살고부터는 집이 작아졌다. 원래는 커져야 하지 않는가. 그러면 아마 이 집보다 더 작은 집으로 이사를 할 텐데.


금붕어는 몸 크기를 환경에 맞춘다. 작은 어항에서는 작은 채로 있고 큰 어항에서는 커지며, 연못에 놓아주면 정말 큰 물고기가 된다. 그러나 인간은 환경을 고려하지 않고 성장한다. 그러니 환경은 어쩔 수 없이 인간에게 적응해야 한다. 아마 다른 도리가 없을 것이다. 우리 집은 언제나 작았지만, 내가 여기서 혼자 살면서부터 더 작아졌다. 집은 크기를 잃어버렸다.


아니, 이건 불평이 아니다. 나는 여기서 사는 것을 좋아하고, 또 기꺼이 혼자 산다. 우리 집이 내 감정에 이입하여 상황에 적응하는 것도 기쁘다.


한때 여기서 우리 넷이 살았다. 작은 집이었지만 넷이 살기에 충분했다. 나중에는 개도 한 마리 살았는데, 그래도 집은 충분히 넉넉했다.


이제 여기서 두 명 이상은 살 수 없을 것 같다. 개는 당연히 힘들 테고. 나는 개가 무섭다. 그때는 가족들이 강요해서 어쩔 수 없었다. 나는 할 수 없이 고집을 꺾었고, 복서를 한 마리 골랐다. 개는 하필이면 나를 잘 따랐다. 나는 그 개가 적어도 개에 대한 내 두려움은 없애주리라고 기대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그 개가 자신이 개라는 사실을 전혀 모르는 것 같다는 의심을 품게 됐다. 나는 개에게서 배울 게 없었고, 개가 나에게서 배웠다. 그래서 그 개는 개들을 무서워하는 개가 됐다. 둘이 산책을 하다가 자그마한 스위스 마운틴 도그가 있는 농가를 지날 때면 우리는 멈추어 서서 짖어대는 그 개를 바라보았는데, 우리 복서가 먼저 고개를 돌렸다. 주위 환경이 나에게 맞추어 적응했다. 주변은 나와 같아졌다. 내가 혼자면 집도 혼자다.


우리는 너무 성급하게 융화를 이야기한다. 융화라니? 무기력한 사람들이 권력자에게 맞추어야 한다는 뜻인가? 내가 개들을 어떻게 생각하든 간에, 개들은 나를 좋아한다고 믿는 것. 남들이 자기를 사랑한다는 가정에서 출발하는 권력자들과 마찬가지다. 그리고 체제는 일반적으로 이렇게 작동한다. 유감스럽게도.


나는 금붕어처럼 환경에 적응하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을 즐긴다. 또한 우리 집이 입주자의 수에 적응하여, 혼자 사는 나를 위해 작아진 것도 좋은 일이다. 옛날의 그 큰 집에 나 혼자 살게 되었더라면 아마 편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사람들은 이걸 망상이라고 부른다. 언급할 필요도 없긴 하지만 우리 집 크기는 실제로는 예전과 똑같고, 그저 내 느낌이 나를 속일 뿐이다. 주변 환경이 나에게 적응했다고……. 그러나 권력자들도 이런 망상 속에서 산다.


융화? 이 테마가 나오면 왜 언제나 나이 많은 미국의 어느 재즈 연주자가 생각나는 걸까? 그는 빌리자우(루체른 주에 있는 도시)에서 열린 콘서트가 끝난 뒤, 평생 사과나무에 한 번도 올라가보지 못했다고 불평했다. 그래서 다음 날 소방대원들이 안전을 위해 사다리를 들고 출동하여, 근처에서 가장 큰 사과나무에 그를 올려주었다. 나무에 올라앉은 그는 행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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