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년시대 1

Boy's Life

   
로버트 매캐먼(역자: 김지현)
ǻ
검은숲
   
12000
2011�� 05��



■ 책 소개
숱한 신비와 아픔, 짜릿한 모험과 꿈이 가득했던 소년 시대! 
그 모든 마법들이 지극히 자연스러웠던그때, 그 시절로 되돌아가다!

열두 살짜리 소년 코리 매켄슨이 세상에 눈을 떠가는 과정을 그린 섬세한 성장소설 『소년시대』 제1권<봄ㆍ여름&&. 1960년대 미국의 작은 도시 제퍼에서 일어난 살인 사건을 시작으로 코리의 눈에 비친 사람들의 다양한 삶과 모습이아름다운 소년 시절의 추억 속에서 펼쳐진다. 코리에게 제퍼 마을은 깊은 강물 속 괴물, 영원한 친구와 따뜻한 이웃들, 달빛 속 유령들이 있는마법의 왕국이다. 그러던 어느 날, 코리는 목 졸려 죽은 남자가 차에 갇힌 채 호수 속으로 가라앉는 장면을 목격하게 된다. 이 사건은 순수하기만했던 소년의 세계에 그림자를 드리우는데…. 

마법이이루어지고 불가능이 현실이 되던 소년 시대. 매혹적인 상상력으로 빚어낸 유년 시절의 경이로움이 녹아든 작품이다. 짜릿한 미스터리에, 환상적인판타지, 모험과 활극에 더하여 시적 아름다움까지. 이 모든 것이 결국에는 아련한 ‘성장담’으로 귀결되며, 출간 당시 환상문학계의 최고상이라 할수 있는 브램 스토커상과 월드 판타지상을 동시에 수상했고 ‘리터러리 길드 북클럽’ 추천 도서로 선정되는 영광을 얻었다.

■ 저자 로버트 매캐먼(Robert R.McCammon)
스티븐 킹, F. 폴 윌슨 등과 함께 20세기 말 아메리카 호러 르네상스를 이룩했던 미국 소설가.지금까지 발표한 16권의 작품 중 10권이 「뉴욕타임스」의 베스트셀러에 올랐다. 

로버트 매캐먼은 앨라배마 주 버밍햄에서 태어나 앨라배마 주립대학에서 저널리즘을 공부했다. 1978년『Baal』로 데뷔한 이후 꾸준히 호러, 판타지 계열의 소설을 발표했다. 1980년대 가장 인기 있는 호러 작가 중 한 명이었으나 이후미스터리, SF, 역사 소설, 성장 소설 등으로 자신의 영역을 넓혀갔다. 

작가로서의 본격적인 명성은 1987년 발표한 『스완송』부터 시작되었다. 원고지 5,000매에 달하는 이 대작은 환상문학계의최고상이라 할 수 있는 브램 스토커상을 수상했고, 그의 작품 중 처음으로 「뉴욕타임스」 베스트셀러에 올랐다. 세기말을 다룬 종말문학의 최고작으로평가받는 『스완송』은 같은 분야의 걸작인 스티븐 킹의 『스탠드』를 능가한다는 평을 받으며 놀라운 판매를 기록했다. 
『Stinger』『MINE』 등, 이후 발표하는 모든 작품이 「뉴욕타임스」베스트셀러에 올랐고, 브램 스토커상에 무려 8차례나 이름을 올리는 등 로버트 매캐먼은 대중 소설을 쓰는 작가로서 최고의 절정기를 맞았다. 자신의유년 시절을 회상하며 쓴, 1991년 작 『소년시대』는 브램 스토커상과 월드 판타지상을 동시에 수상하는 위업을 달성했고 세계 17개국 언어로출간되는 등 독자와 평단의 엄청난 찬사를 이끌어냈다. 

하지만 1993년 로버트 매캐먼은 최고의 자리에서 돌연 작품 발표를 멈춘다. 글쓰기에 대한 고민을 덜고 가족과 함께 더많은 시간을 보내고 싶다는 소박한 이유 때문이었다. 출판사와 에이전시의 끈질긴 설득에도 움직이지 않았던 그는 2002년 『Speaks theNightbird』라는 작품을 다시 선보인다. 이 작품 역시 10여 년이라는 공백이 무색할 만큼 독자와 평단의 지지를 얻었다.

로버트 매캐먼은 자신이 태어난 앨라배마 버밍햄에서부인과 딸과 함께 살고 있으며 『The Five』의 출간을 앞두고 있다. 

■ 역자 김지현
고려대학교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하고 전문 번역가로 활동하고 있다.사업가인 아버지를 따라 해외에서 생활하면서 영미문학에 관심을 가졌고, 단편 〈반드시 만화가만을 원해라〉로 대산청소년문학상을 수상했다. 옮긴책으로 『하루하루가 세상의 종말』『쾅! 지구에서 7만 광년』『예언』『글쓰기의 항해술』 등이 있다. 환상문학웹진 ‘거울’에서 창작 및 번역필진으로 참여하고 있다.

■차례
2008년판 작가 서문 
여정을 시작하기 전에 

1. 봄의 그늘 
동트기 전에 
저 아래 어둑한 데 
침략자
부활절의 말벌 소동 
자전거의 죽음 
올드 모세의 방문 
귀부인의 부름 
2. 악마와 천사의 여름 
여름 방학
이발소에서의 이야기 
소년과 공 
나는 돌아다니네 
어서 와, 루시퍼 
제이버드 할아버지와 보낸 한 주 
캠핑여행 
칠리 윌로 
여름의 끝자락




소년시대 1


작가 서문

『소년시대』의 신판을 손에 들고서 이 횡설수설을 읽고 있는 당신은, 아마 이 작품을 이미 읽었거나 혹은 처음 읽으려고 생각 중인 독자이리라.


『소년시대』를 처음 보는 독자라면, 부디 즐겁게 읽었으면 좋겠다. 존재하는지도 몰랐던 장소, 혹은 존재하는 줄 잊고 있었던 장소로 여행을 떠날 수 있기를.


두세 번째 읽는 독자라면, 제퍼로 돌아온 것을 환영한다. 코리의 삶과 그 아이의 세상으로. 영원한 여름날로, 위대한 비밀로, 감춰진 장소로 그리고 우리 모두의 마음속에 있는 마법에게로. 그 마법은 지금도 몸을 웅크리고 곯아떨어진 채 가장 친한 친구가 집에 오기를 기다리고 있는지도 모른다.


여정을 시작하기 전에

나는 마법의 시대에, 마법의 동네에서, 마법사들 사이에서 나고 자랐다. 아, 다른 사람 대부분은 우리가 가능성과 현실이라는 은빛 실로 엮인 마법의 거미줄 속에서 살아가는 줄 꿈에도 모르고 있었지만 나는 알고 있었다. 열두 살이 되었을 때 세상은 내 마법의 등불이었고 그 반짝이는 초록색 정령은 과거, 현재, 미래를 내다보았다. 당신도 아마 그랬을 것이다. 기억이 안 날 뿐이다. 내가 생각하기엔, 우리 모두가 처음에는 마법을 알고 있다. 회오리바람, 산불, 혜성을 지니고 태어난다. 새들에게 노래를 부를 수 있고, 구름을 읽을 수 있고, 모래 낱알로 우리의 운명을 볼 수도 있었다. 그러나 교육을 받으면서부터 마법은 영혼에서 바로 빠져나간다. 교회에 나가 털어내고, 매를 맞아 떨어져 나가고, 씻다가 지워지고, 빗다가 흩어진다. 바른 생활을 하라는 말, 책임감을 가지라는 말을 듣는다. 나잇값 좀 해라. 제발 철 좀 들어라. 그런데 그 사람들이 우리에게 왜 그런 말을 했는지 아는가? 우리의 야생성과 젊음이 두렵기 때문이었다. 우리가 품은 마법을 보면 자기들이 그 마법을 말라 죽게 해버린 것이 부끄럽고 슬퍼지기 때문이었다.


마법은 멀리 떠나고 나면 다시는 되찾을 수 없다. 하지만 아주 잠깐 스칠 수는 있다. 어느 순간 깨닫거나 어느 순간 기억나기도 한다. 사람들이 영화를 보며 눈물을 글썽거리는 까닭은 그 어두컴컴한 극장 안에서 마법의 금빛 연못을 건드렸기 때문이다. 아주 잠깐. 그 눈물은 나왔다가도 이내 이성과 논리라는 뜨거운 햇볕에 말라버리고, 왜인지는 모른 채 가슴에 알싸한 아픔만 남는 것이다. 어떤 노래를 듣고 옛 추억이 떠오를 때, 빛줄기 속을 떠다니는 먼지들에 마음이 사로잡혀 세상일을 잊을 때, 밤중에 멀리서 철길을 지나가는 기차 소리를 들으며 저 기차가 어디로 갈까 생각할 때, 우리는 내가 누구고 여기가 어딘지 하는 문제에서 한 발짝 물러선다. 눈 깜짝할 사이, 우리는 마법의 나라에 발을 디디는 것이다.


나는 그렇게 믿는다.


한 해 한 해 지날수록 우리는 태어날 때 가지고 있던 본질에서 멀어진다. 누구나 다 그렇다. 어깨에 짐을 지게 된다. 좋은 짐도, 안 좋은 짐도. 여러 가지 일이 우리에게 닥쳐온다. 사랑하던 사람들이 죽는다. 절망에 빠지기도 하고 불구가 되기도 한다. 이런저런 이유로 길을 잃는다. 이 괴상한 미로 같은 세상에서는 길을 잃기 십상이다. 삶 자체부터가 우리에게서 마법의 추억을 빼앗아 가려고 갖은 애를 쓴다. 그렇게 빼앗기는 줄도 모르고 있다가 어느 날 문득 뭔가를 잃어버렸다는 느낌이 드는데 정확히 뭘 잃어버렸는지는 알 수 없는 때가 온다. 마치 예쁜 여자에게 미소를 짓고 있는데 그 여자가 당신을 "아저씨."라고 부르는 상황하고 비슷하다고 할까. 그냥 어쩌다 보면 그렇게 되는 것이다.


내가 누구였고 어디에 살았는지 담겨 있는 이 추억은 내게 중요하다. 여정이 끝나면 내가 어떤 사람이 될지 결정짓는 데 큰 역할을 하니까. 나는 마법의 기억이 필요하다. 마법을 다시 부리고 싶을 땐 언제라도 꺼낼 수 있도록. 알고 기억해야만 하며, 그렇게 해서 당신에게도 말해주고 싶다.


내 이름은 코리 제이 메켄슨이다. 고향은 앨라배마 주 남쪽의 제퍼라고 불리는 동네다. 너무 춥지도 너무 덥지도 않은 곳이다. 1964년 내가 열두 살이었을 때 제퍼의 인구는 약 1,500명이었다. 제퍼는 마법의 땅이었다. 나는 이 매혹적인 왕국에서 자란 한 소년의 기억을 간직하고 있다. 나는 기억한다. 이것들이 내가 당신에게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다.



봄의 그늘

동트기 전에

"코리, 일어나렴. 시간 다 됐다."


나는 어두운 동굴 같은 잠에서 끌려나와 눈을 떴다. 아빠는 벌써 옷을 갖춰 입은 채였다. 진갈색 유니폼 앞주머니에 달린 톰이라는 명찰이 보였다.


이날 동트기 전 아침, 힐탑 거리에 있는 우리 집에서 엄마 아빠 나 세 식구가 아침을 먹던 때는 1964년이었다. 지상에 수많은 변화의 바람이 일던 때였지만 나는 몰랐다. 내가 아는 것이라곤 그저 오렌지 주스를 한 잔 더 마시고 싶고, 마시고 나면 아빠의 우유 배달을 도와드릴 테고, 배달이 끝나고 나면 아빠가 학교에 데려다줄 거라는 사실뿐이었다. 그리고 우리 앞에는 제퍼가 펼쳐져 있었다. 고요히 꿈꾸는 동네, 하늘에 걸린 새하얀 낫 같은 초승달.


아빠가 운전석에 올라타 커다란 핸들을 쥐고 나는 옆의 조수석에 앉았다. 아빠가 시동을 걸고 하역장에서 차를 몰고 나갔다. 하늘에는 달이 가라앉고 별들이 밤의 끄트머리에 걸려 있었다.


"그래서 어떻다고? 우유 배달부 말이다. 되고 싶으냐?

"재미있을 것 같아요."

"그다지. 아, 물론 좋은 일이지. 하지만 매일매일 재밌는 직업이란 없어. 그러고 보니 네가 이담에 커서 뭘 하고 싶은지 얘기해본 적이 없는 것 같구나. 그렇지?"

"네."

"아빠가 우유 배달을 한다고 너도 그래야 할 건 없어. 뭐, 나도 처음부터 배달부가 되고 싶었던 건 아니었단다. 네 할아버지는 나도 당신처럼 농부가 되길 바라셨지. 할머니는 내가 의사가 되었으면 하셨고. 의사라니, 상상이 되냐?"

"그럼 처음엔 뭐가 되고 싶으셨어요?"


아빠는 잠시 아무 말도 없었다. 마음 깊은 데서 내 질문을 곰곰 생각하는 듯했다. 아무도 아빠에게 이런 걸 물어보지 않았던 걸까. 아빠는 커다란 손으로 핸들을 잡고서 전조등 불빛에 드러나는 길을 따라 차를 몰았다.


"금성에 처음 발을 디디는 우주인, 로데오 선수, 빈 공간을 쓱 보면 거기다 짓고 싶은 집을 마음에 속속들이 그려낼 수 있는 사람, 아니면 탐정?"

아빠는 목을 울려 조금 웃었다.

"하지만 인생이 어떻게 돌아갈지는 모르는 거야. 정말로. 과녁을 아무리 정확하게 겨누더라도 바람이 불어서 방향이 틀어져버리는 게지. 어릴 적 꿈 그대로 된 사람은 아직 한 번도 못 봤어."

"대학 가려면 성적을 잘 받아야 해. 공부 열심히 하렴."

"탐정도 대학 나와야 해요?"

"프로가 되려면 그래야 하지 않겠니? 내가 대학에 갔다면 집 짓는 사람이 될 수도 있었을 거야. 네 앞길에 뭐가 있을진 모르는 거다, 정……."


정말로. 아빠는 그 말을 하려고 했겠지만 오른편의 숲에서 우리 바로 앞으로 갈색 차 한 대가 뛰어드는 바람에 멈췄다. 아빠는 브레이크를 콱 밟으며 말벌에 쏘인 듯이 외마디 비명을 질렀다.


아빠가 핸들을 왼쪽으로 휙 꺾는데 갈색 차가 앞을 지나쳐 도로를 벗어나 오른쪽의 강둑으로 미끄러졌다. 라이트는 꺼져 있었지만 운전석에 누군가 있었다. 차는 관목 수풀을 우수수 가르다가 붉은 절벽으로 튕겨나가 어둠 속으로 떨어졌다. 풍덩 물소리가 났다. 저 차는 방금 색슨 호수에 빠져버린 것이다. 내가 소리쳤다. "물에 빠졌어요!" "나와요! 빨리!"


하지만 운전자는 묵묵히 앉아만 있었다. 아빠는 문을 붙들고 차창 안으로 손을 뻗어 운전자의 어깨를 잡았다. 남자였다. 상체에 아무것도 입고 있지 않았다. 창백하고 차가운 살이 만져지자 소름이 끼쳤다. 남자는 머리를 뒤로 젖힌 채 입을 벌리고 있었다. 머리는 짧게 깎은 금발에, 검게 멍이 든 눈은 꽉 닫혀 있고, 흠씬 두들겨 맞았는지 얼굴이 흉하게 부어오르고 일그러졌다. 목에는 구리 피아노 줄이 칭칭 감겨 있었다. 하도 세게 조여서 살점이 뜯어져 나갈 정도였다. 그러고 보니 실 한 오라기도 걸치지 않은 알몸이었다. 핸들에 무언가 번뜩여서 보니 오른손에 수갑이 채워진 채 핸들에 묶여 있었다.


이건 살인의 얼굴이었다.


차가 가라앉고 있었다. 보닛이 내려가면서 트렁크가 물고기의 꼬리지느러미처럼 솟아오르기 시작했다. 시신이 다시 떠오르면서 어깨에 있는 무언가 눈에 들어왔다. 새하얀 피부에 대조적인 파란색 얼룩. 멍은 아니었다. 문신이다. 관자놀이에서 뒤쪽으로 날개가 돋은 해골 그림.


그리고 길 건너편 숲 속에 서 있는 한 사람을 보았다. 그 사람은 그냥 거기 서 있었다. 거뭇한 긴 코트 자락이 바람에 나부꼈다. 가라앉는 차로 헤엄쳐 가는 아빠를 지켜보던 나를 계속 보고 있었을까? 그 시선이 은연중에 느껴져서 나는 뒤를 돌아본 걸까? 뼛속까지 오싹해서 몸이 으스스 떨렸다. 눈을 몇 번 깜빡이고 다시 보았을 땐 아무도 없었다. 바람에 흔들리는 나무뿐.


저 아래 어둑한 데

나는 그날 학교에 가서 데이비 레이 캘런, 조니 윌슨, 벤 시어스를 만나자마자 새벽에 있었던 일을 이야기했다. 수업이 끝나고 집에 왔을 즈음에 그 소식은 제퍼 전체에 들불처럼 번져 탁탁 소리를 내며 타올랐다. 살인이라는 말에 온 화제가 집중되었다. 부모님은 끝없이 울려대는 전화통을 붙잡고 씨름했다. 모두가 그 사건의 소름끼치는 정황을 낱낱이 알고 싶어 했다. 나는 녹슬고 오래된 내 자전거를 타고 레벨을 데리고 나가 숲을 산책하다가, 전화한 사람들 중 누군가는 그 정황을 이미 다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저 자기가 들켰는지, 아모리 보안관님이 뭘 어디까지 아는지 알알아내고 싶어서 전화했을 뿐.


그로부터 며칠이 지나 봄이 다가오면서 날이 훈훈하게 풀어졌다. 아빠가 색슨 호수에 뛰어든 지 일주일 째, 상황은 이렇게 돌아갔다. 아모리 보안관님이 아무리 조사해도, 제퍼는 물론이고 주위의 그 어떤 동네에서도 실종된 사람은 나오지 않았다. 애덤스밸리 주간 신문도 여전히 이 사건을 제1면 기사로 다루긴 했지만 새로운 정보는 없었다.


색슨 호수는 1920년대에는 색슨 채석장이었다. 증기삽이 지하의 강물을 잘못 터뜨려서 물이 엄청나게 솟아나왔고, 어떻게 막을 수도 물길을 돌릴 수도 없어서 이렇게 호수가 되었다고 한다. 깊이가 100미터 내지는 150미터에 이른다. 그 밑바닥에 가라앉은 차를 건질 수 없는 그물은 세상에 없다.


"레베카, 가장 끔직한 게 뭔지 알아? 범인은 이 동네 사람이라는 거야. 그럴 수밖에 없잖아. 그 호수가 얼마나 깊은지 아는 사람. 그 차가 거기 빠지면 시체는 영영 못 건진다는 걸 알고 한 짓이라고. 이 생각 때문에 미칠 것 같아, 레베카……. 이 살인범은 내가 우유를 배달하는 고객일 수도 있어. 교회에서 우리 옆자리에 앉는 사람일 수도 있어. 우리한테 식료품이나 옷을 파는 사람일지도 몰라. 우리가 평생 이 동네 살면서 알고 지낸 사람……. 아니, 알고 지낸다고 착각했던 사람. 이 생각만 하면 너무 무서워. 이렇게 무서웠던 적이 없어. 왠지 알아?"

아빠는 잠깐 침묵했다. 아빠의 관자놀이에서 맥박이 고동치는 모습이 보이는 듯했다.

"여기가 안전하지 않다면 안전한 곳은 세상 그 어디에도 없으니까."


아빠는 그 사건으로 마음 깊이 상처를 받았다. 색슨 호수의 밑바닥보다도 더욱 깊이. 너무 갑작스럽고 잔인하고 무자비한 일이라서였을 것이다. 가장 인정 많은 동네조차도 닫힌 문 뒤에는 끔찍한 비밀이 도사리고 있다는 사실 때문인지도 모른다.


아빠는 모든 사람이 선하다고 믿으며 살았던 것 같다. 남에게 내보이지 않는 속마음까지도 선하다고. 그러나 이 사건으로 아빠의 믿음은 뿌리채 흔들렸다. 살인자는 그 차의 남자에게 그랬듯 아빠에게도 수갑을 채워서 그 끔찍한 순간 속에 가둬놓은 걸까. 나는 눈을 감고서 아빠가 그 어둠에서 빠져나올 수 있기를 기도했다.


3월은 새끼 양처럼 순하게 지나갔지만 살인범의 소행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자전거의 죽음

"여기 발 조심하게." 다른 문으로 들어가면서 할아버지가 말했다. 그리고 톱니바퀴며 레버들이 달린 커다란 사각형 기계 옆에서 멈춰 섰다.


"이 분쇄기가 15분 전에 네 자전거를 먹어버렸단다. 가장 먼저 넣은 게 그거였거든." 할아버지가 비틀리고 우그러진 쇳조각으로 꽉 찬 통을 들쑤셨다. 옆에는 다른 빈 통들이 채워지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것 봐. 나는 이것들을 고철로 파는 거야. 자전거 한 대만 더 들어오면 전부 다 부숴서 팔아야지 벼르고 있었단다. 그리고 네 자전거가 그 한 대였던 게야."


할아버지가 나를 바라보았다. 눈빛이 상냥했다. 빗물에 젖은 머리가 전구 빛에 비쳐 빛났다.


"미안하구나, 코리. 누가 찾으러 올 줄 알았으면 가만 놔둘걸 그랬지. 하지만 그건 이미 죽어 있었어."

아빠가 되물었다.

"죽어 있었다고요?"

"그럼, 그럼. 모든 게 죽지. 다 닳아버려서 사랑으로든 돈으로든 고칠 수가 없게 된다고. 그 자전거가 딱 그랬네. 여기로 들어오는 물건은 다들 그렇지. 내가 분쇄기에 넣기 훨씬 전에도 그 자전거는 이미 죽어 있었어. 넌 알고 있었지, 코리?"

"네, 알고 있었어요."

"고통은 전혀 없었단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스컬리 할아버지는 존재의 본질을 이해하는 분인 듯했다. 몸은 늙었는데도 눈과 가슴만은 계속 젊게 남아 있는 사람. 만물의 거대한 질서를 꿰뚫어보고, 생명은 뼈와 살에만 있는 게 아니라 물건들에도 있음을 알고 있는 것이다. 편하고 충직한 구두, 우직한 차, 언제나 말을 잘 듣는 펜, 주인을 데리고 멀고 많은 길을 달렸던 자전거. 우리가 신뢰를 주고 안전과 즐거운 추억을 돌려받았던 물건들에는 다 생명이 있다.


이러면 심장이 돌처럼 딱딱한 사람들은 깔깔 웃으며 "말도 안 돼!"라고 하겠지. 하지만 그런 사람들에게 한 가지 묻고 싶다. 아주 잠깐이라도, 처음 탔던 자전거를 다시 갖고 싶다고 생각해본 적이 없는가? 어떻게 생겼는지 기억날 것이다. 당연히 기억날 테지. 이름도 붙이지 않았던가. 타이거? 버터밀크? 플리카? 라이트닝? 그 자전거를 누가 가져갔을까? 어디로 갔을까? 한 번이라도 궁금했던 적이 없는가?



악마와 천사의 여름

제이버드 할아버지와 보낸 한 주

친할아버지 친할머니와 함께 보낸 일주일의 끝 무렵, 마지막으로 특별한 일이 일어났다. 금요일 밤이었다. 나는 잠을 푹 자지 못하고 꿈을 꾸었다. 꿈속에서 교실에 들어가보니 다들 나가고 없고 네빌 선생님 혼자만 책상에 앉아 서류를 정리하고 있었다. 금빛 햇살이 교실 바닥에 비스듬히 비쳐들고, 가느다란 빛줄기가 되어 칠판을 자르듯이 가로질렀다. 선생님은 얼굴이 쪼글쪼글했다. 눈은 아기처럼 커다랗고 밝았다. 등을 꼿꼿이 세운 채, 교실 문턱을 딛고 서 있는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선생님은 말이지, 많은 아이들이 오고 가는 것을 보았어. 어떤 아이들은 자라나서 뿌리를 내렸고 어떤 아이들은 자라서 떠나기도 했지. 소년 시절이란 아주 빨리 지나가버린단다, 코리."

선생님이 희미하게 웃었다.

"아이들은 빨리 커서 어른이 되고 싶어 하지. 그러다가 정말로 어른이 되면 다시 아이가 되고 싶어 해. 하지만 코리, 선생님이 비밀을 하나 알려줄게. 듣고 싶니?"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도 어른이 되지 않는 거란다."

선생님이 속삭였다. 나는 얼굴을 찌푸렸다. 이게 비밀이라니 무슨 뜻이지? 우리 엄마 아빠는 어른이잖아. 달러 할아버지, 마셰트 대장님, 패리시 의사 선생님, 로보이 목사님, 귀부인, 그 외에도 열여덟 살이 넘은 사람은 다 어른인데?


"어른처럼 보이기는 하겠지. 하지만 그건 가면이야. 그냥 시간의 흙이 덧씌워진 것뿐이야. 그 사람들도 아직 마음 깊은 데서는 아직 어린아이란다. 뛰고 구르고 놀고 싶어 하지만, 덮어쓴 흙이 너무 무거워서 그러지 못하는 거야. 세상이 몸에 감아놓은 모든 사슬을 떨쳐버리고 싶어 하지. 시계며 목걸이며 구두를 벗어던지고, 단 하루라도 벌거벗은 채 강물에서 멱 감고 놀아봤으면 하지. 마음 편하게 있고 싶어 해. 집에 가면 이것저것 다 챙겨주시고 내가 무슨 짓을 하더라도 사랑해주는 엄마 아빠가 있었으면 좋겠다 생각해. 세상에서 가장 못된 사람이라고 해도 그 얼굴 뒤에는 겁에 질린 작은 아이가 있게 마련이란다. 다치지 않으려고 한없이 구석에 틀어박히고 싶어 하는 어린아이가."

선생님이 서류들을 한쪽으로 밀어놓고 책상 위에 손을 포갰다.


"코리, 나는 소년들이 커서 어른이 되는 모습을 많이 보았단다. 그리고 네게 이 한마디를 해주고 싶어. 기억하라고."

"기억하라고요? 뭘요?"

"모든 것을. 무엇이든 간에. 단 하루라도 그냥 넘어가지 말고 뭔가를 꼭 기억하도록 해. 그 기억을 보물처럼 마음 깊이 간직해두렴. 그건 정말로 보물이니까. 추억은 소중한 비밀의 문이란다, 코리. 추억은 선생님이고 친구고 엄격한 스승이야. 뭔가를 볼 때도 그냥 얼핏 보고 넘어가지 말고, 잘 봐두렴. 정말로 정말로 똑바로 봐야 해. 그래서 글로 쓰면 다른 사람이 읽어도 그걸 볼 수 있게끔. 코리, 귀머거리에 벙어리에 장님이 되어 삶을 살아가기란 아주 쉬워. 네가 아는 사람, 네가 만나게 될 사람 대부분이 그렇게 살아가. 놀라운 것들로 가득한 퍼레이드 사이를 지나가면서도 아무것도 못 듣고 못 보고 지나쳐버리지. 하지만 네가 마음만 먹으면 삶을 천 번이라도 살아볼 수 있단다. 결코 가보지 못할 나라에서, 결코 만나보지 못할 사람과도 이야기를 나눌 수가 있게 돼."

선생님이 내 얼굴을 살펴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여름의 끝자락

8월이 죽어가고 있었다. 여름도 마찬가지. 수업을 듣고 규율을 따라야 할 나날들이, 금빛으로 빛나는 가을의 가장자리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어느 날 아침에는 이블린 프래스모어 사서 선생님한테 전화가 왔다. 제퍼 예술 위원회 문학상의 단편 소설 부문에서 내가 동상을 받았다는 소식이었다. 내 이름이 새겨진 상패를 줄 거라고. 9월 둘째 주 토요일에 도서관에서 시상식이 있을 테니 낭독할 수 있겠느냐고.


나는 아연해졌다. 그렇게 하겠다고 더듬더듬 대답했다. 전화를 끊자마자 기쁨이 파도처럼 밀려와 바닥에서 나를 붕 띄워 올리는 기분이었다. 그러다가 갑자기 공포의 파도가 쏟아져 나를 바닥으로 쾅 내리쳤다. 낭독하라고? 큰 소리로? 알지도 못하는 사람들로 꽉 찬 방에서?


엄마가 나를 달래주었다. 달래는 건 엄마가 맡은 역할의 일부였고 또 전문 분야이기도 했다. 연습할 시간이 아주 많으니 괜찮다고, 나 때문에 엄마는 자랑스럽다고, 뽐내고 싶다고. 그리고 우유 배급소에 전화를 걸어 아빠한테 차가운 초콜릿 우유 두 병을 가져오라고 했다. 내가 조니, 데이비 레이, 벤한테 전화를 해 이 소식을 전하자 걔네들도 정말 대단하다며 축하해주었다. 하지만 사람들 앞에서 작품을 낭독해야 한다는 말에 다들 안타깝다, 큰일 났다는 식으로 반응해서 내 공포를 오히려 더 심하게 부추겼다. 데이비 레이가 물었다. 지퍼가 고장 나서 자꾸 내려가면 어떡하냐? 벤이 물었다. 너무 많이 떨려서 원고를 잡고 있을 수도 없으면 어쩔래? 조니가 물었다. 입을 열었는데 목소리가 전혀 안 나와서 한마디도 못 하면 어떡하지?


하여간 어떻게 하면 내 콧대를 꺾을 수 있는지는 귀신같이 잘 안다니까. 친구들이란 다 이렇지 않은가?


땅거미가 지기 시작했다. 마침내 우리는 각자 자전거를 타고 야구장과 여름 꿈들을 떠나갔다. 우리 얼굴은 이제 가을을 향해 있었다. 나는 꿈속에서 흑인 여자애 네 명이 모두 예쁘게 차려입고 잎 없는 나무 아래서 내 이름을 부르는 광경을 보았다는 얘기를 누군가에게 곧 말해야 한다. 색슨 호수 밑바닥에 가라앉은 남자에 대한 내 글을 도서관 홀에 꽉 들어찬 사람들 앞에서 읽어야 한다. 깊은 한밤중에 빅건 블레이록이 400달러를 받고 팔았던 나무 상자 속 물건이 무엇이었는지도 알아내야 한다.


그리고 아빠가 평화를 찾도록 도와야 한다.


우리는 페달을 밟았다. 네 소년들의 등에 바람이 불고 길은 모두 미래로 뻗어 나갔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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