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동파는 서법과 그림에서도 남다른 재주가 있어 시서화詩書畵의 원리를 꿰뚫었다. 이러한원리를 『[마음속의 대나무文與可畵 谷偃竹記』에서 다음과 같이 표현하였다.
대나무를 그릴 때에는 반드시 먼저 마음속에 대나무를 완성하고 나서 붓을 들고 자세히바라보아야 그리고자 하는 것이 보일 것이니 그 때에 급히 서둘러서 붓을 휘둘러 곧바로 그려내어 보인 것을 따라잡아야 한다. 마치 토끼가 나옴에새매가 쏜살같이 내려와 채가듯 해야 할 것이니 조금이라도 늦추면 토끼는 이미 달아나 버릴 것이다.
이 묘사법은 동파회화의 중심이론이자 주된 창작이론이 되었다. 중요한 것은 작자의 창작영감이번뜩일 때 사물을 잘 포착하여 꼭 맞는 정경을 담아내야 한다는 것이다.
본래 문체상의 "기記"란 단순히 일을 기록한 문장을 일컫는다. 그러나 한유韓愈 이래로 점차기문記文에 의론이 담겨 있고, 구양수歐陽修, 소동파 이후로는 점차 의론이 많아졌다. 이러한 변화의 양상이 "기문記文의 꽃"임을 부인하지는 못할것이다. 본 책에 수록된 몇 편의 기문에서도 글의 목적을 벗어나지 않으면서 사물의 명칭이나 주인의 성향을 간파하여 알맞은 철리哲理를 빚어내는특징을 쉽게 볼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아래의 두 글은 서로 다른 기문이기는 하지만 두 작품을 함께 보면 두 배의 즐거움을 얻을 수 있을것이다.
소동파의 다양한 문학의 마당에는 재미난 우화를 소재로 한 작품들도 많이 있다. 그 가운데서랍 속에 갇혀 있던 쥐가 버젓이 사람 눈을 속이고 교묘하게 탈출하는 과정을 상세하게 묘사하여, 사람으로서 쥐의 계책에 빠진 것은, 생각이전일하지 못해서라는 경계를 일깨운, 「교활한 쥐 鼠賦」나, 눈으로 "해"를 볼 수 없는 소경이, 남의 설명만 듣고 사물을 잘못 인식하는 사례를들어, 그릇된 학문경향을 경계한 「해에 대한 비유日喩」 등은 많은 이들의 사랑을 받아 온 소품들이다.
소동파의 의론산문은 특히 많은 독자를 가지고 있다. 당시 구양수는 글자 수를 맞춰가며부화浮華한 글자를 늘여 놓는 문장틀, 이른바 변려문의 풍조에 과감히 반기를 들고 형식에 구애받지 않고 자신의 생각을 담아낼 수 있는 글을 짓도록새로운 문풍을 조성하고 있는 터였다. 이러한 시대조류에 부응하여 소동파의 의론문들은 구양수의 눈에 띄었고 구양수의 격려와 동파 자신의 필력으로그의 의론산문은 지금까지도 많은 이들의 아낌을 받고 있다. 특히, 「조조晁錯가 화를 당한 이유 晁錯論」「범증은 항우를 언제 떠났어야 했을까論項羽范增」「노인이 장자방에게 심부름을 시킨 이유 留侯論」 등은 역사적 사실에 근거하여 새로운 시각의 변론을 폄으로써 교훈을 논리적으로 시사하는효과를 안고 있다.
동파는 이태백과 도연명을 사랑한 시인이었다. 특기할 사실은 44세(황주 유배시기)를전후하여 앞서는 이태백에, 뒤에는 도연명에 심취했다는 것이다. 이는 동파의 성정이 본래 명쾌 활달하여 웅장한 절개와 충천하는 기상이 거침없는이태백의 기질과 동류였음이고, 뒤에는 내면적 자기성찰을 통해 더욱 성숙하고 경건한 수렴의 변모가 더해졌음이다. 너무도 많은 이들의 사랑을 받고있는 「달밤 뱃놀이赤壁賦」의 초연함은 이 점을 잘 반영하고 있다.
■ 저자 소식
이름은 식(軾), 자는자첨(子瞻)이며, 동파(東坡)는 그의 호다. 북송 인종 때에 중국 쓰촨 성(四川省) 메이 산(眉山)에서 태어났다. 21세 이후로 진사시,예부시에 합격하면서 조정의 관리가 되었으나, 왕안석의 신법에 대항하여 많은 세월을 주로 남방의 폄적지에서 보낸다. 타고난 문재와 호방한 정신으로유불선 사상을 수용하여 시서화에 뛰어났다. 특히, 아속(雅俗)을 아우르는 다양한 문학작품으로 문학의 최고봉에 올라있다. 당송팔대가의 한사람이며,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지은 책으로 『논어설』『동파지림』『동파전집』『동파사』 등이 있다.
■ 역자 김병애
경기 여주 출생으로홍익대학교를 졸업하고, 민족문화추진회에서 한문을 공부했다. 서울시립대학교에서 박사과정 수료. 논문으로 「소식 산문의 문예미 연구」「허균의 고문관연구」 등이 있으며 현재 서울시립대에 출강하고 있다.
■ 차례
글쓰기
나의문장
부자들의 농사짓기
교활한 쥐
호랑이가 두려워하는 상대
구양공 영전에
구양수의 공
해에 대한비유
돌종을 찾아서
마음속의 대나무
나의 벗, 문여가
왕문보와 헤어지며
황주의 안국사
달밤뱃놀이
...
기쁨의 비
어디를 간들 즐겁지 않으리
사물을 좋아하는 방법
아기를 살려주세요
아내를 위한묘지명
당나라 "서법육대가"의 글씨
조조가 화를 당한 이유
범증은 향우를 언제 떠났어야했을까
...
원문
마음속의 대나무
장수의 비결
書海南風土
영남嶺南의 기후는 습기가 많고 땅에서는 축축한 기운이 올라온다. 그 중에서도 해남海南이 제일 심하여, 여름과 가을 사이에는 썩지 않는 물건이 없다. 사람이 돌이나 쇠붙이가 아닌 이상 어떻게 이런 날씨에서 견딜 수 있을까?
그런데도 이곳에는 노인들이 많다. 80, 90세의 노인은 말할 것도 없고 100살이 넘은 노인도 왕왕 있다. 이를 보니 장수의 비결은 잘 적응하여 편안한 마음으로 사는 데 있다는 것을 알겠다.
누에 알은 얼음 속에서 살아 남고 불 도마뱀은 불 속에서 살 수 있다. 담담히 욕심을 없애고 육신의 존재 밖에서 노닐 수 있다면, 아교를 끊어 버리는 추위도 내 몸에 미치지 못할 것이며, 쇠붙이를 녹여 내리는 더위도 나를 어떻게 할 수 없을 것이다. 이렇게 된다면 백 살 넘게 사는 것이 어찌 어려운 일이랴.
이곳의 순박한 노인들은 누에 알이나 불 도마뱀이 그런 것처럼 그들이 추위와 더위 속에서도 장수할 수 있는 비결이 무엇인지 애당초 모른다. 올연히 주어진 기후에 순응할 뿐이다. 계속해서 끊임없이 더운 공기를 내쉬고 찬공기를 들이마시는 것으로 장수도 가능했던 것이다.
장자莊子는 “하늘이 이목구비를 뚫어 놓아 밤낮으로 기를 통하게 하였는데, 사람들은 이 구멍을 막으려 하는구나”라고 탄식하였는데 그 말이 맞는 것 같다.
9월 27일, 가을비는 그치지 않고 내리는데 휘장을 걷어 살펴보니 수많은 흰개미가 이미 썩어 문드러져 있다. 탄식을 금할 수 없어 이런 글을 쓰노라. 때는 무인년(1098, 동파 63세)이다.
1093년 동파 나이 58세에 수렴청정하던 태황태후 고씨高氏가 서거하고 철종哲宗이 친정하게 되자, 다시 신법당新法黨이 득세하게 되었다. 그들은 정치적 이상은 도외시한 채 집권욕으로 보수세력과 마찰을 빚기 시작하였고, 이 소용돌이에 휩싸여 동파는 혜주를 거쳐 해남에까지 좌천되니, 남쪽 끝 해남에서 만 3년을 보내게 된 것이다.
해남은, “중국이면서도 중국이라고 여기는 이는 북경 관리들 뿐”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비중국적인 곳으로 꼽히는 곳이다. 해남도는 대만臺灣 다음으로 중국본토와 떨어진 큰 섬이다. 역사에서 해남도가 등장하는 것은 귀양지로서다. 남방 끝에 위치하였으니 죄인을 격리시키기에 적절하였던 것이다. 당唐의 이덕유李德裕(787~849)나 송의 소동파 등이 유배오기 이전에는 누가 살았었는지도 알려져 있지 않은 궁벽한 곳이다.
예나 지금이나 사람은 오래 살고 싶어하며 이에 대한 관심도 지대하다. 장수의 비결로는 술과 담배를 하지 않으며, 야채를 먹고, 적당한 운동을 한다는 등의 섭생을 꼽아왔다. 그러나 최근에 105세의 할머니가 담배를 손가락에 꼽은 채, “나는 하루에 한 갑 반의 담배를 피워요”라며 인터뷰에 응한 기사가 있었다. 즉 장수 요인이 꼭 섭생에만 있는 것이 아님을 알리는 보도였다. 대대로 장수하는 이가 많은 집안이 따로 존재한다는 데에 착안하여, 현대의학에서 밝힌 장수비결은, ‘장수 유전자’다. 장수 유전자를 채취하여 투약하면 얼마든지 인간의 수명을 확장할 수 있다고 한다. 그렇다면 대대로 장수하는 비결은 또 뭘까? 이 글을 통해 보면 장수의 비결은 “잘 적응하여 편안한 마음으로 사는데” 있다. 일리一理있는 말이다.
어디를 간들 즐겁지 않으리
超然臺記
만물은 모두 볼 만한 것이 있다. 진실로 볼 만한 것이 있다면 모두 즐거울 만한 것이 있는 것이니 굳이 괴이하거나 빼어날 필요는 없다. 지게미를 먹거나 멀건 술을 먹거나 간에 모두 취할 수 있고, 과일이나 채소나 초목도 먹으면 다 배부를 수 있으니 이런 것을 미루어 보건대 우리들이 어디를 간들 즐겁지 않으리오.
복을 빌고 화를 멀리하는 이유는 복은 기쁜 일이고, 화는 슬픈 일이기 때문이다. 사람이 바라는 것은 한이 없는데 내 욕심을 충족시켜 줄 사물은 한계가 있다. 좋고 나쁜 분별이 안에서 다투고, 버리고 취하는 선택이 눈 앞에서 벌어지면, 즐거울 만한 것은 언제나 적고, 슬플 만한 것은 언제나 많은 법이다. 이것은 도리어 화를 빌고 복을 멀리한다고 할 수 있다.
화를 구하고 복을 멀리하는 것이 어찌 사람의 진정이겠는가? 물욕에 가리워서다. 사물의 안에서 노닐고 사물의 밖에 나와 보지 못해서다. 사물은 크고 적음에 차이가 없으나, 사물 안에서 밖을 내다보면 높고 크지 않은 것이 없다. 저 높고 큰 물체가 나에게 다가섬에 나는 항상 어지럽게 반복하여 틈 속의 싸움을 관찰하듯이 하니 승부가 있는 곳을 어찌 알겠는가? 이러므로 좋고 싫음이 생겨나고 근심과 즐거움이 나오는 것이니 매우 슬픈 일이 아니겠는가?
나는 전당에서 교서의 태수가 되어 옮길 적에 편안한 뱃길을 버리고 말과 수레를 타는 괴로움을 겪으며 잘 꾸며진 집을 버려두고 허물어진 초가집에서 지내야만 했다. 호수와 산천의 경치를 뒤로하고 뽕나무와 삼이 자라는 들판을 지나왔다.
처음 도착했을 때 해마다 흉년이 들어 도적 떼가 들에 가득하고 송사는 끊이지 않았다. 부엌은 썰렁하여 날마다 구기자 열매와 국화잎으로 연명하는 형편이었으니, 사람들은 진실로 내가 이곳을 좋아하지 않는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곳에서 지낸 지 1년 만에 내 모습은 살찌고, 희었던 머리도 날마다 도로 검게 되었다. 나는 이미 이곳의 순박한 풍속을 좋아하고 관리와 백성들도 나의 못남을 편히 여긴다.
채마밭을 가꾸고 들과 집안을 깨끗이 치우고 안구安丘와 고밀高密의 나무를 베어다 파손된 곳을 수리하여 우선 손질을 했다. 동산의 북쪽에 오래된 누대가 있었는데 이엉을 해 엮으니 새로 지은 것 같다. 때로 서로 더불어 올라가 둘러보며 뜻을 호방하게 가졌다.
남쪽으로는 마이산馬耳山과 상산常山이 바라보이는데, 나왔다 들어갔다 숨었다 나타났다 하는 것이 가까운 것 같기도 하고 먼 것 같기도 하여 은둔하는 군자가 있는 듯했다. 동쪽으로는 진秦나라 사람 노오盧敖가 숨었던 노산盧山이다. 서쪽으로는 목릉穆陵이 바라보이는데 마치 위엄 있는 성곽 같다. 이곳은 사상보師尙父와 제齊 나라 환공桓公의 남은 공렬이 아직도 존재하는 곳이다. 북쪽으로는 유수?水가 굽어보인다. 개연히 크게 한숨쉬며 회음후淮陰侯의 공을 생각하고 불운했던 종말에 조문한다.
누대는 높고 편안하며 깊고 환하며, 여름에는 서늘하고 겨울에는 따사롭다. 눈이 내리는 아침, 바람불고 달빛 은은한 저녁, 나는 날마다 이곳에 있고 손님들도 따라 노닌다.
동산에서 나물을 뜯고 못에서 물고기를 잡아 수수술을 빚어 탈곡한 곡식을 쪄 먹으며, “노세 노세 즐겨 노세” 한다.
당시에 내 아우 자유子由가 마침 제남濟南에 있었는데, 소문을 듣고 시부를 짓고 누대를 이름하여 ‘초연超然’이라 해주었다. 이에 나는 기문記文을 지어 내가 어디를 가나 즐거움은 물체의 밖에서 노닐기 때문임을 보인다.
* * *
「초연대기」를 읽고 있노라면 노장사상이 저변에 놓인 철학의 심연을 엿보게 된다. 동파는 말했다. “사물의 안에서 노닐고 사물의 밖에 나와 보지 못하므로 물욕에 덮어 있다. 내가 어디를 가나 즐거움은 물체의 밖에서 노닐기 때문”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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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파는 말했다. “누구나 즐거운 일은 바라고 괴로운 일은 두려워한다. 그러나 이것은 모두 즐겁거나 괴로운 일이 아직 닥치지 않았을 때의 마음일 뿐이다. 괴롭거나 즐거운 일이 이미 닥쳐 와 몸으로 겪게 되면 바라고 두려워했던 것을 애초에 어떻게 해볼 수 없을 것인데, 더구나 이미 지나간 뒤엔 다시 무엇이 남겠는가?”고.
(본 정보는 도서의 일부 내용으로만 구성되어 있으며, 보다 많은 정보와 지식은 반드시 책을 참조하셔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