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아, 사랑한다 믿는다 응원한다

   
권수영, 권다함 (지은이)
ǻ
초록북스
   
17000
2025�� 04��



■ 책 소개


아버지와 아들 사이의 가장 치유적인 이야기

한국 사회에서 아버지와 아들 간에 속 깊은 대화가 가능할까? 아마 대부분의 부자가 고개를 내저을 듯하다. 가족이기 때문에 더 내밀한 이야기를 꺼내는 것이 민망하게 느껴지기도 하고, 편한 사이인 만큼 세대 간 생각의 차이로 인해 좋은 의도로 시작한 대화가 의도치 않게 다툼으로 번질 우려도 없지 않은 게 현실이다.

이 책은 한국 사회의 전형적인 부자 관계를 깨고 군 복무중이던 아들이 아버지에게 편지를 보내고, 아버지가 그에 답하는 형식으로 구성되어 있다. 상담학자인 아버지는 아들의 인생에 대한 고민과 질문을 자신의 인생 경험과 상담학적 지식을 기반으로 마음을 담아 솔직하게 답변한다. 아들은 군대에서 내면의 목소리에 집중하게 되고 이때 떠오르는 생각과 고민을 편지에 적는다. 아버지는 그런 아들의 고민을 반갑게 맞이하며 자신의 생각을 풀어놓는다. 

일과 직업, 인간관계, 진정한 어른, 꿈, 사랑 등에 대한 아들의 생각에 대해 아버지는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정립한 견해와 상담중 내담자들을 만나며 깨달은 것들, 그리고 더 포용적이고 성장하는 삶으로 다가가는 방법 등에 대해 답변한다. 인간적인 고민 외에도 세상을 대하는 태도에 관한 주제도 다룬다. 각 세대가 가진 강점, 세상과 더불어 살아가는 방법 등 대화의 주제에는 한계가 없다. 이 과정을 통해 아버지는 자신을 되돌아보는 시간을 갖고, 아들은 자기 내면을 더욱 풍성하게 만들 수 있는 시야를 넓히며 진정한 어른이 되는 길로 한 발짝 나아간다.

■ 저자 
권수영
국내 비(非)의료 심리지원 전문가들의 마음건강 서비스를 주도하는 대표적인 상담학자다. 국내 여러 상담 관련 학회에서 학회장으로 일했고, 현재 주요 상담 분야 연합기구인 한국상담진흥협회 이사장을 맡아 심리상담 법제화 추진에 힘쓰고 있다. 다수의 방송과 기업에서 강연을 통해 소통과 공감 문화 확산에 진심인 명강사이기도 하다. 현재는 인공지능과 가상현실 기술을 통해 미래 세대를 위한 마음건강 서비스를 만드는 연구에 매진중이다.

저서로 『한국인의 관계심리학』 『나도 나를 모르겠다』 『아이 마음이 이런 줄 알았더라면』 『치유하는 인간』 『관계에도 거리두기가 필요합니다』 『공감에도 연습이 필요합니다』 『나쁜 감정에 흔들릴 때 읽는 책』 외 다수가 있다. 현재 연세대학교 연합신학대학원 상담코칭학 교수로 재직중이다.

권다함
대한민국 국방의 의무를 마친 후 다시 세상의 광고판으로 복귀를 준비하는 대학생이다. 전공은 광고학이지만, 세상을 담는 건 카메라 셔터가 더 빠르다고 믿는다. 군복무중에는 ‘작전명’이 붙은 일들만 해왔지만, 이제는 ‘캠페인명’이 붙은 기획을 꿈꾼다. 아이디어와 이미지가 만나는 지점에서 언젠가는 자신만의 이야기를 만들고 싶은 20대 청년이다. 사진이든, 문장이든, 사람들에게 오래 기억될 무언가를 남기기 위해 오늘도 셔터와 키보드를 동시에 누르고 있다.

■ 차례
프롤로그_아들
프롤로그_아빠

첫 번째 편지 “어른이 되면 변화를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을까요?”
두 번째 편지 “자신의 이익만 챙겨야 경쟁사회에서 살아남을 수 있을까요?”
세 번째 편지 “나를 살고 싶게 만드는 힘, 삶의 원동력을 찾고 싶어요.”
네 번째 편지 “인간관계에는 정답이 없다지만 나름의 답을 찾고 싶어요.”
다섯 번째 편지 “내 자신이 평생 몰두할 수 있는 나만의 업을 찾고 싶어요.”
여섯 번째 편지 “나잇값 하는 완벽한 어른이 되는 게 왠지 무섭고 두려워요!”
일곱 번째 편지 “많은 것을 포기하는 인생은 정말 불안하고 위험할까요?”
여덟 번째 편지 “내가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용기를 어떻게 가질 수 있나요?”
아홉 번째 편지 “매 순간 사랑만 하는 삶을 살 수는 없을까요?”

 




아들아, 사랑한다 믿는다 응원한다


“어른이 되면 변화를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을까요?”

아들

아빠, 편지가 많이 늦었죠? 결코 끝나지 않을 것 같던 긴 겨울이 어느새 가고 계절이 바뀌어 강원도에도 봄이 왔어요. 아빠, 그거 아세요? 벌써 제가 입대한 지 반년이 넘었어요. 비율로 따지면 복무일의 삼분의 일 넘게 철원에서 보냈네요.


보통 대한민국 남성들이 입 모아서 "시간이 제일 안 간다는 곳이 바로 군대"라고 하잖아요? 그런데 저는 왜 이렇게 시간이 빠르게만 느껴지고, 앞으로도 그렇게 느껴질 것 같을까요? 그리고 요즘에는 시간이 빨리 흘러가는 게 왜 이리도 두려워지는 걸까요? 시간이 잠시 멈추면 좋겠다 싶을 정도로요.


갑자기 이런 두려움의 시작점을 알고 싶어졌어요. 위병소 근무를 서면서 바라보았던 문 밖의 새하얗고 무채색이었던 설산의 풍경이 어느새 무성하게 자라난 식물들과 푸르름만 보이는 풍경으로 너무도 갑작스레 바뀌었기 때문일까요? 그래서 눈앞에 광활하게 펼쳐진 계절의 변화에 시간의 속도가 피부로 체감되었기 때문일까요? 저도 모르게 정말 문득문득 많은 생각들에 잠겼습니다.


제가 개인적으로 생각하는 진정한 어른이 되는 일차적인 요소는 '변화를 두려워하지 않는 것'이라 생각해요. 저를 포함해서 모든 사람은 당연히 날 때부터 죽을 때까지 불가피하게도 수없이 크고 작은 변화에 노출되겠지만, 청년이 된 지금 제 마음속에 은밀하게 자리 잡고 있는 변화에 대한 두려움을 얘기하고 싶었어요. 그것에 대한 아빠의 경험과 생각도 듣고 싶고요.


고등학교 1학년 때부터 혼자 타지에서 유학생활을 시작했던 저는 남들이 봤을 때 환경적으로 비교적 많은 변화와 다양한 경험에 노출되었던 것 같아요. 사실 지금 생각해보면 6년 전의 어린 제가 그 변화를 잘 견뎠다는 것이 참 뿌듯하기도 해요.


하지만 저는 알아요. 전 아직 6년 전에 그대로 머물러 있는 것 같아요. 매일 새로운 듯 보이지만 항 상 반복적인 일상, 손을 뻗으면 닿을 듯 매일 보는 얼굴들에 둘러싸여 살았던 것 같아요. 내 자신이 굳이 대단하게 주체적이지 않아도 모두가 나와 같은 길을 향해 같은 속도로 나아갔을 때, 또는 그렇다고 생각했던 때, 이 모든 것이 내일도 그냥 변화 없이 지속될 거라는 막연한 확신이 그저 당연했 던 때였던 것 같아요.


하지만 이제는 전역하고 나면 맞닥뜨리게 될 미래의 변화가 결코 만만하지 않다는 걸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과정중에 있는 것 같아요. 하지만 제 마음 깊은 곳에서 마냥 변화를 외면하고 싶어 내일도 별일 없을 거라고 호소하는 마음속 어리광을 무시하기가 힘드네요.


아빠! 과거에 머물지 않고 나아갈 줄 아는 사람, 영원한 건 없다는 걸 받아들이는 사람, 일희일비하지 않고 미래의 변화에 대응하는, 아니 변화가 가져올 위기를 담담히 맞이할 줄 아는 사람, 그게 바 로 진정한 어른이잖아요. 그런 사람이 되면 제가 원하는 어른이 되는 여정에 첫걸음이 될 것 같아요. 전 아직 먼 것 같지만요. 아빠에게 자문을 구하기보단 아빠의 경험은 어떤지, 생각은 어떤지 궁금해 여쭈어봐요.


아빠

사랑하는 아들에게, 자주 연락을 못 받아서 약간 걱정은 했다만, 네 편지를 받고나서 얼마나 날아갈 듯 기쁘고 감격했는지 모른다. 그리고 한편으로 너의 마음속 깊은 생각과 고민을 듬뿍 담은 장문의 편지여서 아빠는 아주 긴 호흡을 가지고 읽었단다.


사실 몇 번을 읽으면서 네 마음속 느낌을 있는 그대로 이해해보려고 나름 노력했어. 다들 군대시계 는 더디 간다는데, 우리 아들은 시간이 빨리 가는 듯 느끼면서도 마냥 즐겁지만은 않다고 하니까, 그 묘한 기분을 충분히 느껴보려고 했지.


네 말처럼 어른이 되어가는 과정은 내일에 대한 아무런 걱정 없이 그저 매일을 즐겁게 살기만 하면 되었던 어린 시절에서 서서히 벗어나는 일인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변화무쌍한 미래를 긴 안목으로 조망할 수 있을 때 진짜 어른이 되어가는 거겠지. 그런데 요즘처럼 변화의 속도가 빠른 시대에 너 같은 젊은이가 변화를 편안하게 수용하는 성숙한 어른이 된다는 것은 정말 어마어마한 도전처럼 여겨질 것이란 생각이 물밀듯 몰려왔다.


아빠가 대학생활을 할 때만 해도 세상이 지독하게 빨리 변해간다고 느끼진 않았던 것 같아. 그래서 너희들처럼 내일에 대한 과도한 불안을 느끼고 살았던 것 같지는 않다. 그저 매일을 무탈하게 보내 도 시간이 가면 졸업을 하고, 졸업하고 나면 적당한 곳에서 일도 하게 될 거라고 믿었으니 말이야.


그런 아빠 세대에 비해 너희 세대는 훨씬 급변하는 세상을 살고 있고, 그로 인해 현기증을 느끼는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일 거란 생각이 든다. 보통 나이에 따라 시간을 느끼는 감각의 속도가 달라진다고 하거든. 그런데 요즘에 너희들은 20대부터 흐르는 시간이 60km 이상으로 여겨질 만큼 4차 산업혁명시대의 과격한 변화를 빠르게 느낄 수밖에 없을 것만 같다.


참 자유와 치유를 경험하는 순간은

다함이가 어느 날 갑자기 겨울 산에 봄꽃이 핀 것을 보면서 시간의 흐름을 인식한다고 했지? 맞아. 네가 지난겨울 그 추운 산속에서 야영을 했던 기억이 분명히 남아 있기 때문에 과거를 회상할 수 있는 거야. 나중에 먼 미래에 지금 경험하는 철원을 너는 어떻게 떠올리게 될까? 강원도 근처에 오면 풋풋하게 떠오르는 추억이 될 수도 있을 것이고, 아니면 아예 생각하고 싶지도 않을 악몽처럼 떠오르게 될 수도 있겠지.


그런데 과거에 대한 '기억'이 과거일까? 그리고 미래에 대한 '예견'은 미래일까? 아니야. 실은 '기억으로서의 과거'나 '예견으로서의 미래' 모두 지금 다함이가 경험하고 있는 현재 경험이거든. 그렇게 따지면 모든 시간은 다 '현재'에 존재하고 있음을 잘 알 수 있단다. 그래서 아빠는 우리에게 유일하게 존재하는 시간은 모두 현재라고 굳게 믿어. 이게 아빠가 30년이 넘도록 상담을 하면서 비로소 깨달은 바란다. 그래서인지 「신곡」이라는 명저로 유명한 이탈리아의 작가 단테도 이런 말을 남겼지. "모든 시간이 곧 지금 이 순간이다!"


다함아, 그래서 아빠는 현재의 이 순간을 과거와 미래 사이에 낀 샌드위치처럼 여기지 않으려고 늘 노력한단다. 왜냐하면 그런 생각에 빠지면 나에게 주어진 시간이 자꾸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가 마치 삼등분으로 나뉘어져 있는 한 덩어리처럼 여겨지고, 중간에 끼어 있는 현재를 제대로 느끼지 못하게 되거든.


누구나 그렇게 믿기 쉬운 건 어쩌면 당연해. 문제는 그러다 보면 우리의 의식은 주로 과거나 미래에 가 있고, 자꾸 지금 유일한 나의 시간인 현재는 그 중간에 끼어서 숨도 잘 못 쉬고 신음을 하게 된다 는 거야. 그러니 죄책감이나 후회감으로 하루를 채우기도 하고, 불안과 두려움으로 매일을 보내게 되는 거지. 이게 바로 우리 마음이 만드는 문제의 시작이야.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가 서로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는 것이 진실이라면, 불행한 과거를 가진 모든 내담자들은 과거로부터 연루된 지금 현재를 간신히 견뎌낸다 하더라도 장차 다가올 변화무쌍한 미래에 여전히 암울한 결과만을 초래할 뿐이겠지. 그런데 어떨 때 내담자가 비로소 시간의 속박에서 벗어나 자유를 누리고 진정한 치유를 경험하는 줄 아니? 바로 자신에게 유일한 시간은 바로 지금 이 순간 현재임을 깨닫고, 이 현재가 과거와 미래 모든 시간을 채울 만큼 확장될 수 있을 때 비로소 참 자유와 치유를 경험하게 된단다.



“인간관계에는 정답이 없다지만 나름의 답을 찾고 싶어요.”
아들

전 사람이 정말 좋아요. 제 원동력 그 자체이자 살아 있음을 느끼게 해주는 가장 큰 힘이라고 말씀드렸었죠. 제가 소중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없이는 ‘나’라는 사람을 정의하는 게 불가능할 정도로 애착이 있어요.


그런데 아빠, 이곳 군대에서 시간이 흐르며 제 자신도 눈치 못 챌 정도로 조금씩 제 마음속에 새로운 감정이 자리 잡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어요. 타인에 의한, 타인을 위한 삶이 당연하고 자연스러웠던 제가, 요즘에는 혼자인 상황에 상당히 초연해지고 있기 때문이죠. 이젠 오히려 혼자인 상황을 선호할 때도 생기는 걸 느껴요.


근데 또 웃긴 건 뭔지 아세요? 분명 과거의 저는 제 스스로가 타인과의 관계에 과하게 의지한다고 생각해서 늘 독립적인 어른이 되고 싶었던 것 같거든요. 근데 막상 혼자인 상황에 초연해지니 이건 나답지 않다고 부정하고 싶어지는 것 있죠? 어릴 때 그토록 원하던 독립심이 생겼는데 왜 부정하고 싶어 하는 걸까, 다시 고민해봤어요.


‘독립심? 아니야, 이건 독립심이 아니라 외로움이었던 것 같아. 그저 외로움의 빈도수가 늘어서 혼자인 것에 익숙해졌을 뿐인 거야.’ 그리고 그런 제 모습을 보면서 어색하게 느껴져 부정하고 싶어지는 거예요. 이게 제가 현재 판단한 엉성한 제 자립심의 현 주소가 아닌가 싶어요.


아빠, 외로움이란 감정은 뭘까요? 인간은 외로움이란 감정을 왜 느낄까요? 왜 굳이 그런 걸 느껴야 할까요? 그런 점들이 궁금해졌어요. 때때로 연인, 가족, 친구와 함께 있을 때마저도 외로움을 느끼는 이유가 뭘까요?


저는 이 외로움의 감정은 자신이 완벽하게 이해받고 싶다는 욕구에서 비롯된다고 생각해요. 자꾸 기대를 거는 거지요. 타인한테. 하지만 이런 기대가 타당한 걸까요? 우린 타인이 직접 되어보지 않고서야 완벽하게 타인을 이해하는 게 가능하지 않잖아요? 누군가를 필요로 하는 우리들이 타인들에게 완벽하게 이해받는 것, 그리고 더 나아가 그들을 완벽하게 이해하는 것이 과연 가능한 존재들일까요?


저는 그래서 인간은 근본적으로 고독하다고 결론 내리게 된 것 같아요. 그렇기 때문에 언제부턴가 만성적인 고립감은 현대인들의 일상이 된 것이 아닐까요? 그리고 그게 앞으로도 제가 수없이 겪게 될 미래인 걸까요? 아빠는 철없다고 하시겠지만, 전 아직 어리광을 더 부리고 싶은데. 예외라는 걸 믿고 싶은데....


인간이란 뭐길래 당연하다는 듯이 제 인생의 우선순위에서 내려올 기미가 안 보일까요? 인간관계, 참 어려워요. 그렇죠? 사실 인간의 근본적인 고독함에 대해서 이야기하긴 했지만, 인간은 지연과 혈연으로 이어진 그 섭리를 거스르면 무너지기 쉬운 존재가 될 거라는 생각도 있어요. 이처럼 인간관계에는 정답이 없다는 걸 저도 알고 있어요. 모든 인간의 지속적인 숙제이자 딜레마일 듯한 이런 인간관계를 통달한 사람도 과연 있을까 싶기도 하고요.


오늘 편지는 거의 독백처럼 되어버렸네요. 인간관계에 대해 학문적으로 접근한 경험이 있는 아빠의 식견으로는 어떤 답변을 주실지 궁금해요. 아빠의 인생 경험을 바탕으로 제게 해주고 싶은 말들을 아낌없이 다 해주셨으면 좋겠어요.


아빠

외로움, 그것이 알고 싶다

다함이가 편지에서 언급한 것처럼 외로움은 인간의 가장 보편적인 감정일거야. 실은 그런 감정을 가지게 된 이유가 있단다. 인간은 태어나자마자 부모의 품을 떠나 걸어다니거나 독립할 수 있는 생물학적인 여건이 전혀 주어지지 않거든. 그러니 다른 포유류 동물보다 오랜 시간 주위 사람들(유아기 시절에는 특히 부모님)의 절대적인 돌봄과 보호가 필요한 거지.


본시 인간관계란 우리 인간이라는 존재에게 태생적으로 생존을 위한 기본적인 틀이라고도 볼 수 있을 거야. 그러니까 관계를 상실하거나 관계의 질이 떨어질 때 느끼는 인간의 외로움이란 어느 문화권이든지 가장 보편적인 감정들 중 하나라고 여겨도 틀림이 없을 것 같구나.


네가 말한 그대로 외로움이란 관계를 맺고 싶어 하는 인간의 기본적인 욕구와 관련이 있는 거지. 가족이나 연인, 그리고 친구들과 함께 있을 때 생기는 외로움은 관계 욕구가 충분히 충족되지 않을 때 자연스럽게 발생하는 거란다. 네 말처럼 관계가 깊어지길 원하는 대상일수록 자신을 완벽하게 이해받고 싶은 욕구가 있을 테니 말이야.


‘그래도 부모라면’ ‘그래도 연인이라면’ 남들보다 훨씬 나의 마음을 잘 이해하고 공감해주길 바라는 관계 욕구가 크기 마련이지. 관계가 깊지 않은 타인과는 작은 밥그릇 정도의 욕구만 충족되어도 만족한다면, 좀 더 가까운 가족이나 친구의 경우에는 커다란 물동이가 넘치도록 충족되어야 만족할 수 있다고 해야 할까. 그래서 관계 욕구는 질적인 충족감이 더욱 중요한 것 같아.


그런데 관계 욕구의 크기가 점점 커진다는 것은 관계가 긴밀해진다는 뜻인 동시에, 충분히 충족되기는 점점 어려워진다는 의미이기도 하단다. 이게 깊은 관계를 맺은 사이에서 오히려 더 큰 상처를 받게 되는 이유이기도 한 것 같다.


아빠가 오래전 한 라디오 방송에 패널로 출연했을 때 사회를 보던 아나운서가 갑자기 대본에 없는 돌발 질문을 했어. "교수님은 관련 연구를 많이 하셔서 인간관계의 달인이실 것 같은데, 교수님의 인간관계 중 가장 어려운 관계는 어떤 관계라고 생각하시는지 궁금해졌어요."


혹시 아빠가 뭐라고 답변했는지 다함이는 예상할 수 있겠니? 그때 아빠는 바로 대답했어. “뭐, 그렇게 당연한 걸 물으세요. 제게 제일 어려운 관계는 가족 관계입니다.” 아빠의 답변에 사회자는 놀라는 눈치였어. 누구에게나 가족 관계는 가장 친밀하고 손쉬운 관계라고 여겼기 때문이겠지. 30년 넘게 가족상담을 해온 전문가 입장에서 보면, 꼭 위기가정이 아니더라도 어느 가정이나 가족 관계의 질을 높이는 것은 엄청나게 어려운 과제란다. 그 이유는 간단해. 가족 구성원을 향한 관계의 욕구가 남들보다 훨씬 더 크기 때문이지.


관계에도 거리두기가 필요해

아빠는 중학교 때 처음으로 부모님과 함께 뷔페식당에 간 적이 있어. 차려진 반찬이나 음식의 양에 감복하면서 두세 끼 분량을 배에 담겠다는 의지에 불타 전투적으로 먹었던 기억이 있단다. 그때만 해도 생전 처음 보는 음식들도 있어서 차려진 모든 음식을 한 번씩은 다 먹어보겠다는 의지가 더 강했던 것 같아. 물론 지금은 뷔페식당에 가도 예전의 그런 전투력을 발휘하진 않겠지. 달라진 점이라면, 이젠 꼭 먹고 싶은 음식, 좋아하는 음식만 집중해서 먹는 방식으로의 변화랄까?


예전에는 음식의 숫자나 양이 중요했다면, 이젠 음식의 질이 중요해진 시대에 살고 있다. 그래서 한 두 가지 음식만 잘 하는 맛집이 훨씬 인기가 좋지 않니? '양(量)보다 질(質)'이라는 구호가 꼭 음식에 만 해당하는 것은 아닌 것 같아. 인간관계에 대한 오랜 연구나 아빠의 실전경험에 따르면 바로 인간관계에도 '양보다 질'이 훨씬 중요하지 않나 싶다.


그렇다면 관계의 양보다 질을 우선시하는 방법은 뭘까? 먼저, 관계에서 가장 위험한 생각은 상대와 내가 꼭 같은 생각과 감정을 가지고 있어서 말 안 해도 잘 통할 수 있다고 믿는 신념이야. 가끔 아빠에게 가족상담을 받으러 온 부부들이 서로 다툴 때 보면, 후렴구처럼 던지는 말이 있단다. "아니, 몇 년을 같이 살았는데, 그걸 내가 굳이 이야기해야 돼! 네 마음을 그렇게도 몰라?!"


부부처럼 서로에게 관계의 욕구가 남달리 크고, 관계의 질이 높기를 바라는 사이일수록 자신과 배우자는 결코 같지 않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된단다. 이런 사실을 망각하고 갈등을 지속하다 보면, 한때는 가장 사랑하는 사이였던 부부가 이젠 관계를 하루도 이어가기 힘들다며 그 관계를 끝내고자 하는 일도 발생한단다.


우리가 맺는 모든 관계에도 자신과 상대방은 분명 전혀 다른 사람들이고 전혀 다른 생각과 감정을 가질 수 있다는 전제 하에 둘 사이의 안전한 공간이 유지되도록 하는 '거리두기'가 필수적이라고 아빠는 생각한다.


'거리두기'가 없는 관계에서는 자신만의 일방적인 바람이나 감정을 무조건 동의하거나 따라와주길 요구하게 된다. 관계가 친밀해지면 당연히 자신의 마음과 상대방의 마음이 모든 면에서 일치되어야 한다고 굳게 믿게 되는 거지.


그래서 상대방에게 자신의 바람이나 감정을 표현조차 못하는 사람은 그 상대방과의 관계가 점점 불편해지기 시작하겠지. 하지만 가족관계나 연인관계처럼 갑자기 끊어낼 수 없는 사람과의 관계라면 그 관계 안에서 안전한 공간을 마련하지 못하고 자신은 욕구도, 느낌도 없이 사는 유령처럼 존재하는 상태가 되고 마는 거야.



“내가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용기를 어떻게 가질 수 있나요?”
아들

아빠, 죄송해요. 엄마 아빠의 부재 전화와 문자를 확인했었지만 정신없이 며칠이 지나갔어요.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제가 속한 부대는 워낙 북한과 마주하고 있는 최전방이어서 그런지 비상계엄이 선포되던 밤에 장병들에게는 어떤 소집 명령도 없었어요. 강원도 다른 지역에서 복무중인 친구들 중에는 그날 밤에 완전무장하고 대기했던 경우도 있었다고 해요.


지난 며칠 동안 핸드폰을 통해서 계엄이 선포되고 많은 군인들이 국회나 다른 헌법기관에 동원되는 모습을 보면서 마치 서울의 봄 영화에서 본 장면이 그대로 재연되는 것 같은 충격에 현실감을 느끼기가 어려웠어요.


그때 저는 그것이 현실감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 먼 나라 얘기처럼만 들렸거든요. 그런데 이번 계엄사태를 군인 신분으로 경험하면서 과거에나 있을 법한 비현실적인 일들이 언제든지 일어날 수 있다는 무서운 생각이 들었어요. 그리고 문득 그런 의문이 들었어요. '아빠는 나와 같은 대학생 때 어떻게 그런 공포의 캠퍼스에서 용기를 가지고 사실 수 있었을까? 그리고 어떻게 20대 대학생이 자신의 행동이나 저항으로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확신을 가지게 되셨을까?'


아빠, 혹시 이런 생각을 하신 적은 없었나요? '나 한 사람이 광장에 나간다고 세상을 바꿀 수 있을까?' 가끔 어른들은 용기 있는 한 사람이 세상을 바꾼다는 이야기를 하지요. 그런 영웅들이 위인전에는 분명 여럿 있을 거예요. 그런데 저희 세대의 친구들은 우리도 세상을 바꾸는 영웅이 될 수 있다고

확신하면서 사는 게 쉽지 않은 것 같아요. 분명 저희가 살아갈 세상은 저희가 변화시킬 수 있을 만큼 만만하게 보이진 않거든요. 오히려 내가 스스로 세상을 바꾸겠다는 마음을 먹으면, 우리를 무겁게 짓누르는 세상의 무게가 더 과중하게 느껴지지요. 아빠는 저 같은 한 사람이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믿으시는지 궁금해요.


아빠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는 용기

네 편지를 읽고 나서, 아빠가 대학생 때 정말 불의한 세상을 향해 거침없이 외치는 용기가 있었던 건지 스스로에게 물어보았어. 만약 그런 용기가 조금이라도 있었다면 지금은 어떤지, 지금도 여전히 그런 용기를 가지고 있긴 한 건지 찬찬히 점검해보았지. 솔직히 말하면, 그런 젊은 날의 패기는 벌써 사라진 지 오래된 것 같더구나. 게다가 아빠는 상담학을 공부하면서 정작 가장 큰 용기가 필요한 일은 '자기 자신을 받아들이는 일'이라고 생각하게 되었지.


예외 없이 우리 안에는 자신도 모르는 불안과 두려움, 자기 존재에 대한 자괴감과 부적절감이 숨겨져 있단다. 하지만 이를 오롯이 받아들이는 일이란 결코 쉽지 않다. 자기 자신의 속마음을 알고 싶어 아빠 같은 심리상담사를 찾아온 이들 역시 정작 자신의 내면의 골짜기를 내려갈 참이면 이내 브레이크를 잡는 경우가 많단다. 소위 마음의 저항'이 시작되는 거지. 내담자들은 자신의 마음속에 무력한 아이가 숨겨져 있거나 난폭한 괴한 같은 공격성이 숨겨져 있다는 사실을 좀처럼 수용하기 어렵기 때문이야. 하지만 그런 부끄러운 자신을 온전히 받아들이는 용기를 발휘할 수 있는 이들은 비로소 자신을 스스로 초월할 수 있는 힘에 대한 믿음을 가지게 되고 마침내 치유의 문을 열 수 있게 된단다.


우리가 사는 시대에 거룩한 삶을 사는 인물들이 많이 보이지 않는다면, 왜일까? 그건 부끄러운 자기를 솔직하게 수용하는 태도가 참 중요하지만, 그런 자기수용이 가능하려면 실로 어마어마한 용기가 필요하기 때문이라고 아빠는 생각해.


요즘 많은 사람들은 탐욕으로 가득 찬 이 세상이 끊이지 않는 전쟁과 기근으로, 그리고 심각한 기후위기로 점차 멸망의 길로 접어들고 있다고 말한다. 진정 용기 있는 사람은 이럴 때일수록 자신의 유한성과 한계를 숨김없이 스스로 받아들인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 자리에 주저앉아서는 안 된다.


본시 인간은 앞뒤좌우가 꽉 막히면 하늘을 우러러 올려다보는 법이지.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는 용기가 있어야만 더 큰 사랑의 힘, 그리고 자신의 유한성을 초월하는 거룩한 신성(神性)을 간절히 소망할 수 있는 거야. 아빠는 아들이 그런 용기와 거룩함의 주인공이 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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