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를 만나고 나는 더 근사해졌다

저   자
한혜진 외
출판사
첵소유
가   격
14.500원(276쪽)
출판일
2019년 10월






아이를 만나고 나는 더 근사해졌다


아주 만약에 더 버거웠더라도, 너를 사랑해

“아이와 관련된 결정은 언제나 두렵고 조심스럽지만, 그중 최고난도의 선택은 아이가 내 손을 떠나 시간을 보낼 어딘가를 결정하고 준비하는 것이었다.”

출산 후부터, 거짓말 조금 보태면 매시간, 매분, 매초, 자면서 꿈에서까지도 고민했던 일에 대해 드디어 결단을 내렸다. 아이를 어린이집에 보내기로 한 것이다. 나름의 이유는 이러했다.


어린이집에 대한 평판은 다양하다. 그걸 보며 어린이집은 개인의 경험과 취향, 성격, 가치관, 가정 문화 등에 따라 평가가 크게 갈리는 영역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 세상에 우리 가족과 정확하게 일치하는 집은 없을 텐데. 타인의 경험을 좇느라 정작 내 마음의 소리는 놓치는 것 같았다. 어느 순간 남의 집 엿보기를 멈추고 우리 집을 관찰했더니 아이도, 나도 새로운 환경을 접해볼 여건이 되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일단 어린이집에 보내기로 결심했음에도 나는 곧 두 번째 난관에 봉착했다. 어린이집이란 내가 원한다고 바로 보낼 수 있는 곳이 아니었다. 다니고 싶다고 해서 아무나, 아무 때나 막 다닐 수 있을 만큼 대한민국에 어린이집의 수가 충분하지 않았다. 평판과는 상관없이 근처에 남은 자리나 있으면 다행인 것이다. 엄마들 사이에서 좋다고 소문난 곳에 주로 많이 몰리기 때문에, 아닌 게 아니라 태어나자마자 대기 신청을 해놔도 결국 연락을 못 받을 가능성이 높다.


어쩔 수 없이 나는 인터넷 사이트를 통해 입소 대기 신청을 해두고 어디선가 연락을 주겠지, 마냥 기다리고만 있었다. 아득히 잊고 있던 어느 날, 기다리고 기다리던 입소 연락이 왔다. 무려 세 군데에서 동시다발적으로 말이다(매우 운 좋은, 정말 흔치 않은 경우라고 한다)!


1번 어린이집: 원장의 불친절한 말투에 땡!

2번 어린이집: 나는 보내고 싶은데, 바로 앞 번호의 아이가 다니겠다고 해서 아깝게 또 대기.

3번 어린이집: 바로 옆집인, 놓칠 수 없는 큰 메리트!


그래서 나는 고민할 것도 없이 3번 어린이집으로 입소 결정을 했다. 그런데 맙소사! 세 번째 관문이 있었다. 원장님께서 봉투를 주리며 서류를 준비하는 게 반나절은 걸릴 거라며 희미한 미소를 보내시기는 했지만, 진짜로 꼬박 하루를 이 어린이집 입소 준비를 하는 데에 보낼 줄이야! 주민등록등본과 재직증명서를 떼고, 입학원서, 생활기록부를 작성하고, 각종 동의서 및 건강검진 결과서, 예방접종 증명서 등을 제출해야 했다. 헉헉! 애를 보며, 일하며, 당장 쌓여 있는 이 서류 숙제들을 보며 생각했다. “그냥 어린이집이나 보내!”라고 맘 편히 말하는 아빠들이 착각하는 것처럼 이 일은 그렇게 쉽고 간단한 일이 아니라고.



“새로운 환경에서 아이를 안정되게 한 가장 효과적인 마법은 일관된 어조로 차분하게 일러준 엄마의 언어였다.”

학부모라면 누구나 긴장하게 되는 신학기. ‘적응’이라는 두 글자 앞에 아이도 부모도 살얼음판을 걷는 시기다. 아이가 어릴수록 가장 큰 두려움은 낯선 환경에서 부모와 떨어져야 한다는 것일 테다.


부모가 눈에 보이지 않아도 사라진 게 아니라 집에서 혹은 직장에서 자기를 생각하고 기다리고 있다는 걸 믿게끔 하는 방법 중 내가 가장 효과를 보았던 것은 아이의 마음과 부모의 마음이 연결되어 있다는 걸 말로 표현하는 것이었다.


“엄마는 연우가 어린이집에 다녀오는 동안 집안일하면서 기다릴 거야. 그리고 12시가 되면 데리러 갈 거야. 연우와 엄마가 몸이 떨어져 있다고 해서 헤어지는 게 아니야. 또 다시 만나. 엄마는 항상 연우 마음속에 있어.”


그냥 말로만 한 것이 아니라 내 입술에 립스틱을 바르고 종이에 콕 찍어 ‘뽀뽀 종이’를 목에 걸어줬다. 등원을 하면서 뽀뽀 종이에 입을 맞추는 딸의 모습을 보면 엄마인 나도 마음이 놓인다. 매일 하루 전에는 마치 일기예보를 하듯이 “내일은 이렇게 할 거야”라며 꾸준히 정해진 하루 일과를 미리 얘기해줬고, 낯선 환경과 낯선 사람에 대한 긍정적인 표현의 말로 “선생님은 좋은 분이야”라고 말해줬다. 아이가 힘들어할 땐 “엄마도 그랬어”라고 경청과 공감의 말을 해줬고, 응원과 위로만으로 부족할 때는 “도움이 필요할 땐 선생님께 말해”라며 우리 아이에게 필요한 실전 행동 지침의 말을 해줬다.


가는 말이 고와야 오는 말이 곱다, 말 한마디에 천 냥 빚도 갚는다, 말이 씨가 된다... 이제껏 살며 말에 대한 중요성을 누누이 들어왔다. 그러나 엄마가 되어 얻은 산 경험만큼 말의 중요성을 온몸으로 체득한 적이 없다. 아이는 내 말 한마디에 자신의 인생을 걸고 세상으로 나아간다. 그래서 마음에서부터 신중히 말을 준비해 적절한 순간을 살펴 진심을 다해 말하게 되었다. 꺼낸 말에는 책임을 지려고 최선을 다하고, 만약 말과 행동이 달랐을 때는 꼭 용기를 내 아이에게 실수를 인정하고 사과하려고 노력하게 되었다.


언어에는 분명히 온도가 있다. 세상마다, 사람마다, 상황마다 그 온도는 다르다. 아이가 경험하는 세상이 조금씩 넓어질수록 적절한 온도를 지닌 언어를 마련해 삶의 비책으로 꺼내놓을 수 있었으면, 그런 엄마가 될 수 있었으면 좋겠다.



“아이가 자랄수록 가방 속 준비물은 가벼워지고 마음속 준비물은 무거워진다.”

언제나처럼 커다란 천 가방을 꺼낸다. 분유와 물, 기저귀, 손수건, 여벌 옷, 물티슈를 넣고는 지퍼가 잠기지 않아 내 소지품을 뺀다. 그것만이 아니다. 아기도 안아야 한다. 철컥! 아기띠를 장전하고 나면 어깨, 허리, 무릎, 발에 치렁치렁 피로함이 매달린다.


업혀 있던 아이가 내려 걷기 시작하자 짐이 조금 준다. 밥을 먹게 되면 이유식도 뺀다. 배변훈련까지 끝나면 가방은 완전히 홀가분해진다. 하지만 동시에 점점 무거워지는 것이 있다. 이제는, 마음이다 내려놓기와 기다림, 살핌과 인정, 아이의 마음을 돌봐주기 위한 준비물을 엄마의 마음속 가방에 차곡차곡 채워야 할 때가 왔다.


원아 수첩의 페이지가 한 장 한 장 넘어갈수록 엄마는 마음 가방에 하나하나 체크해 넣는다. 아가야, 엄마가 네 마음을 무시하지 않았니? 네 말을 흘려듣지 않았니? 너의 모습 그대로를 바라보지 않고 엄마가 바라는 모습만 강요하지 않았니? 그래서 혹시 내색하지 못하는 스트레스가 작은 네 가슴 어딘가에 숨어 있진 않니?


엄마의 마음 가방이 무거워질수록 아이 마음은 더 건강해질 것이라 믿는다. 그래서 엄마는 오늘도 가방에 더 많은 마음들을 챙겨넣는다.



“아이들을 똑같이 사랑해야 한다는 건 마음의 무게를 두고 하는 말이다. 똑같은 방식으로 키우라는 말이 아니라.”

“사랑은 움직이는 거야!” 드라마 속에서 최지우를 향해 권상우가 외친 그 대사를 나도 외쳤다. 아이를 사랑하는 마음은 한결같지만, 한 해가 가고 또 새로운 달력을 벽에 걸 때마다 엄마는 새로운 다짐을 해야 했다.


다들 둘째는 수월하다고 했다. 첫째는 키워봤으니까, 알 만큼 알고 겪을 만큼 겪어봤기 때문에 여유가 생긴다는 것이다. 나도 두 아이를 다르게 대하지 않았다. 목소리를 높여야 엄마 말을 듣는 첫째에게 하던 그대로 둘째에게도 소리를 높였다. 둘째는 큰소리에 쉽게 상처를 받는 아이인 줄도 모르고. ‘같은 기준으로 공평하게’라는 엄마의 기준은 서로 다른 성향을 가진 남매에게 공평하게 통하지 않았다. 엄마는 똑같이 했을 뿐인데 하나는 웃고, 하나는 울었다.


다른 아이인데... 성별도, 성격도, 심지어 손발톱 모양까지 다른 아이인데 같은 사랑을 주다니. 두 아이를 똑같은 방식으로 사랑을 하는 것과는 완전히 다른 얘기다. 아이마다 다르므로 그 아이에게 꼭 맞는 사랑의 방법을 찾기 위해 끊임없이 움직여야 했던 것이다 수정하고 또 수정하며 아이에게 딱 맞는 양육 태도를 가질 때까지 움직여야 했다.



“‘싫어’와 ‘안 돼’ 사이에는 말이 느는 아이와 말문이 막히는 엄마가 있다.”

“엄마, 나 이거 할래.”, “안 돼.”, “싫어, 나 할래.” “안 돼, 다음에.”, “싫어, 지금 할 거야.”, “앙ㄴ 돼.” “싫어!”, “안 돼!”


바구니에 담긴 블록을 다 쏟아놓고 놀고 싶단다. 지난번에도 그렇게 해놓고 조금 깨작대다 말더니만. 안 된다고 딱 잘라 말하니 언제까지고 무한 반복이 가능한 재생 버튼이 되었다. 말이 늘면서 아이는 엄마의 말에 토를 달 수 있는 능력이 생겼고, 생각이 늘면서는 엄마의 말에 논리적으로 반박까지 한다. 그럴 때면 말문이 턱턱 막혀 헛웃음이 나온다.


그러다가 문득 돌아서 깨닫는 것이 있다. 아이는 안 된다는 내 말에 비례하여 “싫어.”를 외친다. 그렇다면 아이가 싫다고 떼를 부리는 만큼 나는 많은 것을 안 된다고 했을 것이다. 언젠가 부모 교육에서 듣고 새겨뒀던 말이 떠올랐다.


“아이에게 위험하거나, 남에게 피해를 주거나, 사회 상규를 해치는 게 아니라면 못하게 할 이유는 없어요.” 그동안 내가 안 된다고 했던 것 중에 많은 부분이 내가 귀찮거나, 해줄 기분이 아니거나, 전에 해봤더니 아이한테 도움이 안 될 것 같다거나..., 암튼 그런 ‘내’ 상황에 의한 이유였다. 아이를 위한 것이 아닌, 나를 위한 제재가 더 많았던 것이다.


‘아이는 왜 저걸 하고 싶을까?’ 내 안에서 이유를 찾기 전에 이걸 하고 싶은 아이 마음을 들여다봐줘야 했다. 사람은 해보지 않고는 알 수 없는 ‘경험의 동물’이라는 걸 나도 겪어보고 알게 된 거니까.


자, 그럼 오늘부터 “돼.”와 “좋아!” 사이에서 사이좋게 시작!



엄마가 아니었다면 그때 나는, 내 마음은, 어땠을까?

“엄마의 삶은 공공의 채점을 바라지 않는다. 당신의 삶이 타인의 평가를 원치 않는 것처럼.”

배울 점이 많다고 생각해서 이웃 추가를 해두고 새 소식이 올라올 때마다 정독하던 블로그가 있었다. 어느 날, 일기장에 적어두고 혼자서나 봐야 할 것 같은 글이 공개적으로 게재되었다. 요는 이랬다.


본인은 한 시간 이상 누군가와 수다를 떨어본 적이 없다는 것, 그런데 평일 낮에 보이는 주부 수다 클럽은 한 번 앉으면 서너 시간은 기본이라는 것, 대화의 소재는 아이들 성적이니, 사교육이니 하는 무익한 내용이라는 것, 그 시간에 독서나 글쓰기를 하든지 그도 싫으면 명작 영화라도 보라는 것...


나도 공공장소에서, 특히 자유로운 소음이 금지된 밀폐된 곳에서 타인이 방해될 정도의 큰 목소리로 수다를 떠는 사람들은 지적받아 마땅하다는 데에 기꺼이 동의한다. 그러나 주부들의 수다를 미개한 종족을 바라보듯 기술해둔 저 글은 실로 문화 충격이었다. 팔로워가 몇 만 명이나 되는 유명 블로거여서 더욱 그랬다. 마치 고작 몇 분, 몇 시간의 대화를 듣고 그들의 삶 전체를 평가하는 듯 보였다.


비단 엄마의 삶에 대한 것뿐 아니라, 어떤 누구의 삶이라도 함부로 그 수준에 대해서 평가하는 것은 옳지 않다. 무엇보다 책 읽고 글 쓰는 것과 수다를 비교해서 전자만이 우월하고 교양 있는 것인 양 표현한 점이 매우 놀랍고 교만해 보이기까지 했다. 그들이 대화중에는 (너무나 중요해서 작게 말한) 들리지 않는 무수한 유익한 이야기가 있을 수도 있고, 그들이 ‘매일 저러는 한심한 여자들’이 아닌, 고대하고 고대하다 드디어 만난 사이일 수도 있다. 그들이 서로를 대하지 않는 무수한 혼자만의 시간에 어떠한 사색을 할지, 어떠한 공부를 할지, 어떠한 책을 읽을지 모르는 일이다. 게다가 글쓰기가 들었다는 수다 내용이 그가 적은 대로 아이의 사교육과 성적에 대한 것이었다면 그들의 수다를 무익하다고 폄훼하면 안 된다. 왜냐하면 대한민국 엄마들에게 아이의 교육은 최대의 고민거리니까. 혼자서는 해결할 수 없는, 하지만 해결해야만 하는 피할 수 없는 짐이다. 이것은 아이를 낳아보고 엄마가 되어보지 않고서는 알려야 알 수가 없다. 나도 비로소 엄마가 되고 나서야 대한민국의 교육 현실에 치를 떨고 있으니 말이다.


글쓰기든 독서든 삶에 녹아들어야 진정성을 갖출 수 있다. 나는 엄마인 친구들을 만나면 함께 글 쓰고 책을 읽자고 수다를 떤다. 이 사람은 수다를 글쓰기와 독서를 전파하는 데에 활용하는 나라는 엄마를 어떻게 바라볼까?



아이가 크는 동안, 나는 좀 더 근사한 사람이 되어간다

“나의 유년 시절을 비추어보면서 내 마음의 빈곤을 내 아이에게만큼은 물려주지 않고 싶어졌다.”

부모로부터 풍부한 정신적 유산을 물려받은 사람들이 부러울 때가 있다. 굳이 노력하지 않아도 성격 좋고 마음에 여유가 드러나는, 그런 태도가 애초에 몸에 밴 사람들.


솔직히 고백하자면, 나는 부모님으로부터 어떤 상황에서도 긍정적으로 해석하는 여유라든가, 이해되지 못할 타인의 행동에 대한 너그러움 등 내가 동경하는 사람들의 그런 풍부한 정신적 유산을 물려받지 못했다. 그보다는 자주 욱하고, 우울감을 느끼며, 마음이 딱딱해지곤 한다. 불안한 상황이 아닌데도 불안해하고, 고민할 상황이 아닌데도 고민하고, 우울할 상황이 아닌데도 우울해하는 나를 발견할 때, 또다시 노력하고 또 노력해야 할 때, 그런데 내가 그냥 혼자서 대충 살아도 되는 사람이 아니라 아이를 키우는 엄마라는 것을 자각할 때... 마음이 힘들다.


내가 아무리 후천적인 연습과 훈련으로 노력한다고 해도 온화한 가정에서 마음 편안하게 자란 사람들 특유의 여유로움을 따라갈 수 없다는 걸 너무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내 아이들에게만큼은 이 엄마의 속내를 들키지 않고서, 나도 원래 그런 사람인 것처럼 편한 마음과 좋은 성격으로 살고 싶다. 나로부터 대를 끊어버리고 싶다. 그래서 우리 아이들은 건강한 마음으로 편안하게 세상을 살아갈 수 있었으면 한다.


내 인생은 부모의 권력에 제압당했지만, 내 아이들은 그러지 않게 하리라. 내 인생은 사랑 가뭄에 헛헛했지만, 내 아이들은 그러지 않게 하리라. 내 인생은 자격지심으로 얼룩졌지만, 내 아이들은 그러지 않게 하리라. 내 인생은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별로 없었지만, 내 아이들은 그러지 않게 하리라.


내 인생은 비루했지만 네 인생은 빛나게 해주고 싶다. 남들 눈에만 화려한 빛이 아닌, 네 스스로 만족하는 빛으로.



“하루 종일 부지런 떠는 이 아이처럼, 나 역시 머뭇거리는 시간까지도 꽉 채우며 살고 싶다.”

어쩜 저렇게 한시도 쉬지 않을 수 있을까? 흥얼흥얼 노랫말 같은 괴상한 소리를 내며 아침을 시작한 아이는, 엄마와 아빠를 번갈아가며 부비적거리더니, 동해 번쩍 하면서 소파에서 펄쩍 뛰며 깔깔대고, 서해 번쩍 하면서 장난감 상자를 헤집으며 놀이 삼매경에 빠져 있다. 키즈카페며 놀이터며 하루 종일 뛰놀았는데도 놀고 싶은 만큼 다 못 놀았다며 잠자기 직전까지 시간을 탈탈 털어 단 한 자락도 남김없이 말끔하게 사용하고야 마는 아이.


아이에게는 게으름이란 찾아볼 수가 없다. 해가 중천인데도 일어나기 싫어서 침실에서 뭉그적거리는 일도 없고, 아무것도 하기 싫다며 다 녹아버린 사탕처럼 소파에 들러붙어 허공을 바라보지도 않는다. 심지어 잠을 잘 때마저도 온 방을 돌아다니고 있으니, 24시간 내내 무엇인가를 ‘하며’ 지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아이는 하고 싶은 것이 있으면 즉각적으로 한다. 더 놀고 싶어서 밥 먹기를 거부하거나 더 놀고 싶어서 잠자기를 미루는 일은 있어도, 그것이 게으름에서 비롯된 것은 아니다. 지금 하고 있는 것이 더 좋아서 미루는 것이다.


“이제 그만 좀 쉬어.”, “좀만 더 쉬었다가 하자.”


아무리 말해도 씨알도 안 먹히는 아이. 아이는 시간만 나면 무언가를 하는데, 나는 왜 시간만 나면 아무것도 안 하고 싶을까? 세상에서 가장 부지런한 사람, 아이에게 어떻게 하면 너처럼 부지런하게 살 수 있느냐고 물어봐야겠다.



“‘앞으로 뭐가 될까?’보다 ‘앞으로 뭐든 될 거야!’라고 말해주는 엄마이고 싶다.”

영유아 시절에는 꿈이 많다. 아이가 아닌 엄마가. 한창 꿈 많은 34세의 엄마는 돌이 갓 지난 아이에게 여러 가지 장래희망을 들이댄ㄴ다. 자동차 장난감으로 ‘붕붕!’만 하는 데 아니라 구석구석 들여다보고 조물조물거리면 엄마는 장차 포드나 크라이슬러 못지않은 위인이 될 것이라며 부산을 떤다. 또 다른 아이보다 조금 빨리 크레파스를 쥘라치면 장차 고흐 같은 아티스트가 되지 않을까, 엄마가 못다 이룬 자유로운 인생의 꿈을 펼쳐주지 않을까 기대한다.


하지만 곧 다른 아이도 똑같이 우리 아이한테만 있는 줄 알았던 천재스러움을 갖고 있다거나, 혹은 우리 아이도 다른 애들과 똑같이 평범하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1%의 인재가 될 것이란 꿈은 슬슬 접히고 접혀 납작한 종이 뭉치가 되는 것이다. 그러다 학교에 가면 남들만큼만 해주길 바라는 마음에 이런저런 학원을 보내며 교과 과정 안에서 아이를 재단한다. “제발 평범하게만 자라다오!”를 외치며.


그런데 벌써 그 한계를 단정 짓기엔 아이는 변화무쌍하다. “우리 애는 이걸 잘해.” “우리 애는 이런 쪽에 재능이 있어.” 하고 판단하는 동안에도 아이는 사방으로 가지를 뻗으며 변하고 있을 텐데. 내가 그동안 본 것은 아이의 한 가지 재능이지만, 아이 안에는 아직 엄마에게 보여주지 않은 9,999개의 가능성이 자라고 있을 것이다. 앞으로 뭐가 될 수 있는 아이에게 더 이상 자를 들이대지 말아야지.


“아이가 친구를 사귀고 친구와 싸우는 과정 속에서 나는 또 마음 다스리는 공부를 해나간다.”

또 시작이다. 떨어져 있으면 같이 놀고 싶다면서, 같이 놀면 왜 저렇게 다투는 걸까? 아이를 키우면서 내가 제일 곤란해질 때를 꼽으라고 한다면, 단연코 아이가 나에게 와서 친구를 이를 때다.


“엄마! 태민이가 그네는 자기 거래. 나는 안 태워준대. 엄마가 혼 좀 내줘.”


누가 녹음해서 반복 재생이라도 하는 건지 어떻게 매번 같은 상황, 같은 레퍼토리일까? 민망한 표정으로 멀찌감치 앉아 있는 태민이 어머니와 눈인사를 나눈다. 역시나 다행히도 내 눈신호를 이해한 듯하다.


“네가 가서 ‘나도 그네 타고 싶어’라고 말해봐. 엄마가 태민이를 혼낼 수는 없잖아. 너희가 친구잖아. 이런 건 친구끼리 해결해야 하는 거야.”


태민이 어머니도 같은 뉘앙스의 이야기를 할 것이다. 늘 그렇듯이.


사실 지금의 노련함을 터득하기 전엔 나도 꽤나 예민했다. 아이가 어린이집에서 긁혀오면 아이에게 육하원칙에 의해서 하나하나 물으며 사건 현장을 취조하듯 했고, 이런 일이 다시는 벌어지지 않도록 선생님께도 부탁했다. 필요하다면 그 아이 어머니에게도 언질을 준 적도 있다. 내 아이뿐 아니라 다른 아이도 같은 피해를 입었을 때는 아동 엄마들끼리 동맹을 맺기도 했다. 큰 싸움에 이른 적은 없지만 가늘고 긴 갈등이 이어진 적도 있다.


그런데 어느 순간, 이렇게 부지런 떠는 게 부질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이들은 생각보다 금방 잊고 금방 다시 친해졌다. 때로는 내 아이의 이런 면이 순수하다 못해 너무 바보 같이 느껴져서 이래가지고 학교 생활이나 제대로 할 수 있을지 걱정되기도 했다. 하지만 그게 아이 아닌가? 나도 그렇게 자라지 않았나?


‘대학살의 신’이라는 영화를 보면 아이 싸움이 부모 싸움으로 번지는 것이 얼마나 유치찬란한지 알 수 있다. 아이들은 진즉 화해를 하고 잘 지내고 있는데, 부모들은 격식 있는 사과를 요구하며 끝내 막장에 이르는 싸움을 한다.


이제는 어른의 교양과 논리로는 설명할 수 없는 세계가 아이들에게 존재한다는 걸 인정하기로 했다. 그렇기 때문에 그토록 티 없이 해맑을 수 있다는 것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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