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로 보는 한국의 미의식 2 해학

저   자
최광진
출판사
미술문화
가   격
19,000원(304쪽)
출판일
2019년 06월






미술로 보는 한국의 미의식. 2: 해학


해학이란 무엇인가

일반적으로 우리는 기쁘고 즐거울 때 웃는다. 그러나 냉소(찬웃음)나 고소(쓴웃음), 실소(어이없는 웃음), 조소(비웃음)처럼 즐겁지 못한 상태에서 나오는 웃음도 있다. 웃음에는 다양한 감정 상태가 존재하며, 해학적 웃음은 일반 웃음과는 다른 특별한 감정 상태에서 나오는 것이다.


인간은 대체 왜 웃는 것일까? 일반적으로 우리는 타인의 예상치 못한 어리석음을 발견했을 때 웃는다. 그래서 독일의 심리학자 테오도어 립스는 웃음을 “거창한 것을 기대했던 마음의 긴장이 뜻밖의 왜소한 결과로 드러나서 이완될 때 느껴지는 쾌감”이라고 정의했다. 거대하고 숭고한 대상 앞에서 우리는 위축되고 긴장하게 되지만, 자신보다 왜소하고 만만한 대상 앞에서는 긴장이 풀어지고 우월감이 느껴지면서 웃음이 나오는 것이다. 이처럼 상대의 어리석음에서 비롯된 웃음은 해학적 웃음이 아니라 희극적 웃음이다.


상대적 우월감에서 나오는 희극적 웃음

희극은 비극과 함께 서양에서 오랜 역사를 가진 예술 장르다. 비극이 엄숙하고 진지하게 인생의 고뇌를 다룬다면, 희극은 인간의 문제를 가볍고 명랑하게 다루면서 웃음을 유발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시학』에서 “희극은 보통 이하의 악인을 모방하고, 비극은 보통 이상의 선인을 모방한다”라고 했다. 그가 정의한 희극의 주인공으로서 악인은 경박함 때문에 자신의 지위나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는 사람이다. 이처럼 타인의 어리석은 행동에서 나오는 웃음은 자족적인 것이 아니라 상대적이며, 씁쓸한 감정에서 나오는 비웃음이다. 그래서 아리스토텔레스는 희극보다는 두려움과 연민의 감정을 불러 일으켜 관객에게 감동을 주는 비극을 더 중요한 예술로 간주했다.


희극적 놀림거리가 되는 인간은 자신의 본성과 빛깔을 잃고 남의 행동을 기계적으로 모방하며 사는 사람이다. 이런 사람을 보면서 나오는 웃음은 내적 기쁨의 표현이 아니라 상대를 조롱하는 일종의 비웃음이다. 이처럼 희극적 웃음은 그 동기가 타자에게 있고, 타자와의 거리 두기를 통해서 나오기 때문에 주체와 타자는 조화되지 못하고 분리된다.


풍류정신에서 비롯된 만물 평등사상

해학의 근원적 뿌리는 고대부터 이어진 한국인의 자연친화적인 풍류정신이라고 생각된다. 풍류는 나와 남을 분리하여 고립시키지 않고 바람처럼 물처럼 흐르며 타자와 적극적으로 소통하고 친근하게 어우러지는 것이다.


해학에서‘해諧’는 “화합하다”라는 뜻이고, ‘학謔’은 “희롱하다”라는 의미다. 해학이라는 단어에는 공동체 사회를 위한 화합과 부조리한 권력에 대한 희롱의 의미가 함께 담겨 있다. 부조리한 권력을 희롱하면서도 공동체적 화합을 추구하기 때문에 적대적인 감정이나 모욕감을 주지 않고 상대를 포용할 수 있다.


풍자는 주로 새로운 시대 변화에 적응하지 못하고 구태의연한 행동을 고집하거나 부당하게 권력을 유지하려는 사람을 대상으로 삼아 그들에 대한 직접적인 비난과 공격을 가한다. 이때 풍자를 당하는 사람은 자신의 모순과 잘못이 적나라하게 드러나기 때문에 심한 모욕감을 느끼게 된다. 풍자와 해학은 부조리한 권력에 순응하지 않고 비판적으로 대응한다는 점에서 공통점이 있지만, 대상에 대한 포용력에 있어서 해학이 풍자보다 품격이 높다.



민속신앙에 담긴 해학의 정서

귀면 기와 - 괴기하고 익살스러운 한국 도깨비

귀면 기와는 액운과 화마를 물리치기 위해 목조 건축물의 마루와 사래 끝에 괴수의 얼굴 형상을 한 기와를 만들어 붙인 것이다. ‘도깨비기와’라고도 부르는 이러한 전통은 삼국시대부터 이어져 왔으며, 한국뿐만 아니라 고대 인도와 중국, 그리고 일본에까지 널리 유행했다. 중세 유럽에서도 지붕에 날개 달린 용이나 사자 모습의 괴수를 만들어 붙이는 가고일Gagoyle의 전통이 내려온다.


귀면이나 가고일은 악귀를 물리치는 벽사의 역할을 위해 만들어졌기 때문에 대부분은 섬뜩할 정도로 무시무시한 얼굴을 하고 있다. 그런데 한국의 귀면 기와는 유독 무서움과 친근함이 동시에 느껴지는 독특한 표정을 하고 있다. 다소 장난기가 느껴지는 이러한 표정에는 선악을 이분법적으로 분별하지 않고, 악을 징벌하면서도 포용하려는 한국인 특유의 해학이 담겨 있다.


이러한 표정에서 해학이 느껴지는 것은 징벌과 포용이라는 양가감정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우리는 화낼 때의 표정과 즐겁게 장난칠 때의 표정을 동시에 지을 수 없다. 만약 우리가 이러한 복합적인 감정을 동시에 표현하고자 한다면 웃음이 나올 것이다. 무서움과 장난기가 동시에 느껴지는 양가감정은 한국인 특유의 끈끈하고 따뜻한 정情의 문화와 무관하지 않다.



조선의 풍속에서 길어 올린 해학

윤두서 - 서민들의 일상에서 찾은 소소한 행복

한국에서 서민들의 일상을 미술의 주제로 다루기 시작한 것은 18세기 초 공재恭齋 윤두서尹斗緖(1668~1715)부터다. 그는 전통 산수화에 등장하는 인물들을 서민들의 모습으로 대체함으로써 풍속화의 길을 열었다.


조선시대 명문가였던 해단 윤씨 가문에서 태어난 그는 효종의 스승이자 남인의 거두였던 고산 윤선도의 증손이다. 「오우가」와「어부사시사」로 유명한 윤성도는 집권세력인 서인과 맞서 왕권강화를 주장하다가 오랜 유배와 은거생활을 한 불행한 정치인이자 문인이었다. 집안이 정치적으로 탄압을 당했기 때문에 윤두서는 진사에 합격하고서도 관료에 등용되지 못했다. 그는 재상이 되고도 남을 식견과 인격을 갖추고 있었지만, 시류에 휘말리지 않고자 그림에 몰두했다. 시대적 변화를 읽는 통찰력과 개발적 사고로 그림뿐만 아니라 다방면에 걸쳐 지식과 재능을 갖추고 있었다는 점에서 윤두서는 레오나르도 다빈치에 비견될 만하다.


그는 대대로 물려받은 재산으로 풍족한 생활을 했지만, 가난하고 곤경에 처한 사람을 돌볼 줄 아는 따뜻한 인품의 소유자였다. 한번은 어머니의 심부름으로 수금하고 갔다가 액수가 너무 커 가난한 농민들이 갚을 길이 없어 보이자 채권문서를 불태워 버렸다. 또 마을에 흉년이 들자 종갓집 소유의 망부산 나무를 베어 마을 사람들을 구휼해주기도 했다. 그는 노비에게도 이름을 불러주며 존중했고, 큰 잘못을 저질러도 인격적으로 대했다. 이처럼 훌륭한 인품과 평등정신이 있었기에 당시 천하게 여긴 서민들의 생활상을 과감하게 그림을 주제로 채택할 수 있었다.


윤두서의 <휴식>은 산수화의 전통을 계승하면서 고결한 선비가 있어야 할 자리에 한 농민의 모습을 그려 넣었다. 집신을 신은 농부는 넝쿨이 내리뻗은 나무 그늘에 앉아서 휴식을 취하고 있다. 그는 지체 높은 선비처럼 거추장스러운 도포가 아니라 시원스러운 일복을 입고 도롱이 위에 앉아 있다. 열심히 일한 자만이 참다운 휴식의 가치를 알 수 있듯이, 그림에서 농부는 무심한 표정으로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휴식을 취하고 있다. 당시 고답적인 산수화의 전통에서 천한 신분으로 여겨졌던 농민들을 그림의 주인공으로 등장시킨 것은 파격적인 일이었다.


윤두서의 <돌 깨는 석공>은 고상한 선비들이 있어야 할 저리에 돌을 깨는 농민의 모습을 그려 넣었다. 건장해 보이는 젊은 석공은 자유롭게 웃통을 벗어 던지고 해머로 바위를 내리치고 있다. 나이 든 노인은 행여 다칠세라 몸을 약간 뒤로 젖히고 미간을 찡그리며 정을 붙잡아 주고 있다. 이처럼 완전한 몰입상태에서 일하다 보면 신바람이 나고 무아지경의 행복감을 맛보게 된다.


흥미롭게도 이 작품은 서양 리얼리즘의 선구자 쿠르베의 <돌 깨는 사람>과 유사하다. 인상주의 작가들이 부르주아들의 삶을 다루었다면, 쿠르베는 주로 소외된 프롤레타리아 계층의 삶을 다루었다. 윤두서와 쿠르베는 같은 주제를 다루고 있지만, 미의식에서 차이가 있다. 쿠르베는 노동자 계급의 불행한 모습을 여과 없이 드러냄으로써 불평등한 사회구조를 비판적으로 다루고 있다. 이에 비해 윤두서는 일 자체에 몰입한 서민들의 모습을 통해 노동의 행복한 가치를 환기하고, 사회의 신분제도를 재고하게 한다는 점에서 해학적이다.


윤두서의 해학은 이처럼 시민들의 노동을 긍정적이고 행복한 가치로 주목함으로써 서민들은 천박하고 세속적인 존재이고, 선비는 고상하고 탈속적인 존재라는 편견을 반전시켰다. 여기에는 사회적 약자인 서민들의 긍정적인 면을 주목함으로써 인간 본연의 휴머니즘과 평등성을 드러내고자 하는 의지가 담겨 있다. 이처럼 사회적 약자의 긍정적인 측면을 부각하는 방식은 강자를 비판적으로 공격하는 풍자와 다른 해학의 전형적인 특징이다.


김홍도 - 천진한 본성으로 자유를 누리는 서민들

윤두서의 의해서 조심스럽게 시도된 풍속화가 독립적인 장르로서 확실하게 자리 잡은 것은 18세기 말 단원檀園 김홍도金弘道(1745~ ?)에 의해서다. 그는 중인 출신으로 화원이 되어 정조의 총애를 받을 만큼 실력이 출중했다. 조선 후기 예술의 르네상스는 사실 정조의 후원에 힘입은 바 크다. 정조는 규장각에 도화서와 별도로 자비대령화원을 두어 직접 화가들을 관리할 정도로 미술에 관심이 많았다.


정조의 신뢰를 한 몸에 받은 김홍도는 호탕하고 낙천적인 성격의 소유자로 흥이 오르면 거문고와 피리를 연주하고 즉석에서 시를 짓기도 하는 풍류인이었다. 그는 산수화, 화조화, 문인화 등 모든 분야에서 뛰어났지만, 특히 서민들의 일상을 그린 풍속화에서 두각을 드러냈다. 자유로이 궁 밖을 출입할 수 없었던 정조는 여행 풍속을 그린 김홍도의 <행려풍속도>를 보고 감동하여 그에게 백성들의 생활상을 그려오게 했다.


가을에 곡식을 타작하는 장면을 그린 <벼 타작>에서 농민들은 각기 맡은 일에 심취해 있다. 그들은 자유로운 복장과 다양한 자세로 중복됨이 없이 서로 협력하여 일에 열중하고 있다. 이처럼 서로 협력하여 일에 몰입하다 보면, 저절로 신바람이 나게 되어 있다. 그래서 그런지 농민들의 표정이 한결같이 밝고, 콧노래가 들리는 듯하다. 뒤에서 멍석 위에 팔베개를 하고 누워 있는 사람은 이들을 관리하는 마름이다. 그는 지루함을 달래기 위해 담배를 피우고 틈틈이 술도 마셔보지만, 무료하고 권태로워 보인다. 게다가 자유로운 복장의 농민들과 달리 체면 때문에 더워도 옷을 벗지 못하고 커다란 갓까지 쓰고 있다.


밀레의 <여름, 밀 타작하는 사람들> 역시 이와 유사한 주제를 다룬 작품이다. 그러나 밀레의 그럼에서 농민들은 무거운 표정으로 일에 전념하고 있다. 좋게 보면 명상적이고, 다르게 보면 체념적이다. 밀레의 그림이 전체적인 분위기 묘사에 치중하고 있다면, 김홍도의 그림은 농민들 각자의 개성을 섬세하게 드러내고 있다. 이를 위해 원근법을 무시하고 앞의 사람과 뒤의 사람을 거의 같은 크기로 묘사한다. 이처럼 획일화 되지 않은 개성표현과 미묘한 심리 표현은 김홍도 풍속화의 전형적인 특징이다.


밀레의 작품에서는 각자의 개성을 읽어내기가 쉽지 않지만, 김홍도의 그림은 간결한 선묘와 약간의 채색만으로 개개인의 개성과 심리상태까지 가늠하게 한다. 김홍도의 작품은 이처럼 집단으로 획일화되지 않은 각자의 개성과 본성을 드러낸다는 점에서 해학적이다. 이러한 특징은 작품 <서당>에서도 잘 드러난다. 그림에서 훈장은 찡그린 표정으로 숙제를 하지 않은 학생을 꾸짖고, 학생은 회초리로 맞았는지, 아니면 맞을 것이 걱정되는지 훌쩍거리며 울고 있다. 이 장면을 지켜보는 동급생들의 표정도 각양각색이다. 오른쪽 줄에 앉아 있는 학생들은 혼나는 학생이 한심하다는 듯이 웃고 있다. 반면에 왼쪽 줄에 앉은 학생들은 혼나는 학생을 도와주려고 노력한다. 아마도 혼나고 있는 학생은 왼쪽 줄에서 나왔으며, 이들은 지진아 그룹이지만 성적과 별개로 끈끈한 우정이 있음을 추정하게 한다.


이 그림에는 혼내는 선생과 혼나는 학생의 대립이 있고, 약자를 냉소적으로 비웃는 사람들과 약자를 도와주려는 사람들의 대립이 있다. 이러한 대립관계는 시대를 초월하여 우리 사회 어디에나 존재하는 것이다. 김홍도는 서당에서 일어나는 인간사회의 대립관계를 드러내고, 그 전체를 관조하게 함으로써 해학을 끌어내고 있다. 그의 해학은 극단적인 감정에 치우치지 않고 거시적으로 전체를 관조하게 한다.


어느 시대나 사회는 신분과 계급으로 나누고 이데올로기를 통해 개인의 개성을 억압하고 획일화해왔다. 김홍도의 작품은 서민들의 삶에서 획일화할 수 없는 개성과 이념에 물들지 않은 자유로운 본성을 드러냄으로써 우리에게 존재하지만 억눌려있는 미세하고 원초적인 감정들을 일깨운다. 그의 작품은 서민은 몰개성적이고 자유롭지 못하다는 편견을 반전시켜 개성적이고 자유로운 존재로 묘사했다는 점에서 해학적이다.



민화로 승화된 낭만적 해학

처용문배도 - 악에 대처하는 한국인의 지혜

한국에서 민화가 성행한 시기는 19세기지만, 갑자기 등장한 것이 아니라 오래전부터 내려오는 부적이나 새해에 집에 붙이는 문배도의 전통이 계승된 것이다. 이것들은 애초에 악귀를 물리쳐 재앙을 피하기를 염원하는 벽사辟邪의 기능과 행복과 소원 성취를 기원하는 길상吉祥의 목적으로 제작된 것이다. 새해에 집 안으로 들어오는 잡귀의 침입을 막기 위해 문에 붙이는 문배도門排圖는 사람뿐만 아니라 복이나 재앙도 문을 통해 들어오고 나간다는 관념에서 비롯된 문화다. 가장 오랫동안 한국인의 사랑을 받아온 문배는 처용處容문배인데, 이는 『삼국유사』에 나오는 처용설화에서 비롯된 것이다.


『삼국유사』의하면, 신라 헌강왕이 개운포에서 놀다가 돌아오는 길에 갑자기 바다에서 짙은 구름과 안개가 몰려와 깜깜해졌다. 왕은 그것이 동해 용의 장난임을 알고 용을 위한 절을 세우게 한다. 그러자 용이 이에 대한 보답으로 일곱 아들을 데려와 풍악을 울리며 춤을 추었고, 그중 한 아들을 서울로 보내 정사를 돕게 하였는데, 그가 바로 처용이다. 왕은 처용에게 높은 벼슬을 주고 아름다운 여자와 결혼을 시켰다. 그런데 어느 날 처용의 아내를 흠모하던 한 역신이 사람의 모습으로 변해 잠든 처용의 아내 옆에 슬며시 누웠다. 처용이 외출에서 돌아와보니 아내의 두 발 외에 큼직한 다른 두 발이 보였다. 이에 처용은 크게 분노했으나 그에게 복수하는 대신에 노래를 지어 부르고 춤을 추었다.


그러자 처용의 넓은 도량에 감복한 역신은 처용 앞에 무릎을 꿇고 “지금부터는 공의 얼굴을 그린 그림만 보아도 그 문 안에 절대로 들어가지 않겠습니다”라고 맹세했다. 결과적으로 처용은 복수 대신 풍류와 해학으로 역신을 물리쳤고, 이때부터 처용의 얼굴을 문에 붙이고 춤을 추며 악귀를 물리치는 풍속이 생겼다.


고대 바빌로니아의 함무라비법전에는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고 나온다. 이에 내가 당한 만큼 그에 상응하게 갚아 주는 법으로, 의사가 수술하다가 환자를 죽이면 의사의 손목을 자르고, 건물을 짓다가 건물이 무너져 아이가 죽으면 건물주의 아이를 죽였다. 그러나 힘에 의한 보복은 더 큰 보복을 부를 뿐이다. 그래서 평화주의자인 마하트마 간디는 “눈에는 눈은 모든 세상을 눈멀게 할 것이다”라고 비판했다. 이와 달리 한국의 처용설화에는 복수 대신에 적을 감동하게 만들어 포용하고 화해하려는 해학의 정신이 담겨 있다.


조선의 민화는 지전紙廛이라는 지물포를 중심으로 유통되었는데, 민화는 단순히 장식을 위한 것이 아니라 길상이나 벽사의 역할을 한다고 믿었기에 집 안 곳곳에 붙여 놓거나 병풍으로 활용했다. 당시 조선에 주재한 이탈리아 총영사 카를로 로세티는 이러한 독특한 문화에 대해 “집마다 전시장을 방불케 했다”라고 기록했다. 정월이 되면 집마다 대문에 용과 호랑이, 부엌문에는 해애(해치), 광문에는 개, 중문에는 닭 그림을 붙여 놓았으니 외국인의 눈에는 신기하게 비쳤을 만도 하다. 한국에서 조선 말기는 민화를 통해 미술의 대중화가 이루어진 문예 부흥기였다.



현대미술로 계승된 해학의 미학

이중섭 - 모두가 놀이로 하나 되는 낭만적 환상

일제 강점기와 한국전쟁 등 불행했던 한국 근대사를 몸소 체험한 이중섭李仲燮(1916~56)의 예술은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피어났다. 그는 평안남도 평원에서 전답과 과수원을 운영하는 부농의 아들로 태어났지만, 한국전쟁 때 가족과 함께 남하하여 제주도와 부산 등지를 오가며 비참한 피난생활을 해야 했다. 어린이처럼 천진하고 낭만적인 그에게 사랑하는 가족은 고통스러운 현실을 잊게 해주는 유일한 유토피아였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끼니를 해결할 수 없어 사랑하는 아내와 두 아들을 처가인 일본으로 보낼 수밖에 없었다.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예술가로서 그림을 그리는 것 밖에 없었지만, 생존을 위해 타협하지 않고 가난하고 고독한 전업 작가의 길을 걸었다.


특히 그는 소와 가족 시리즈를 즐겨 그렸다. 소 시리즈가 신명의 민족혼을 구현한 자아상이라면, 가족 시리즈는 불행한 현실에서 포기할 수 없는 꿈과 낭만을 해학으로 표현한 것이다. 가족을 주제로 한 그의 작품들에는 한결같이 아이들과 동식물이 함께 어울려 신나게 놀고 있다.


놀이는 이중섭의 해학을 이해하는 중요한 코드다. 아이들이 장난치고 노는 것은 상대와의 벽을 허물고 친근한 관계를 형성하기 위해서다. 아이들은 놀이를 통해 상대와 이질성을 유지하면서 하나로 어우러지는 법을 체득하게 된다. 싸움이 조화될 수 없는 적을 굴복시키려는 강압적 행위라면, 놀이는 상대를 통해 즐기는 ‘접화’의 행위다. 만약 놀이가 싸움이 되어 상대를 굴복시켜버리면, 놀이는 계속될 수 없다. 놀이는 나의 목표를 제어할 수 있는 상대를 필요로 하고, 그때 상대는 적이 아니라 나의 파트너다.


<가족과 비둘기>에서 이중섭의 가족들은 비둘기와 어우러져 신나게 놀고 있다. 이처럼 신나게 놀이에 몰입하면 신체의 감각이 열리면서 집착과 잡념에서 벗어나 무아지경에 이를 수 있다. 그는 이들의 노는 모습을 생동감 있게 표현하기 위해 각자가 하나로 얽힌 원형 구도 속에 즉흥적이고 속도감 있는 붓질로 단숨에 그렸다. 이처럼 인간과 동물 남녀노소가 함께 노는 장면을 통해 그는 우열과 차별이 없이 모두가 하나로 어우러지는 세상을 꿈꾸었다.


놀이의 대상은 동물뿐만이 아니라 때로는 식물이 되기도 한다. 작품 <도원桃園>에서 네 명의 어린이들은 천도복숭아를 따며 놀고 있다. 밀림의 원숭이들처럼 벌거벗은 아이들은 각각 나무에 오르거나 과일을 따며 천진난만하게 놀고 있다. 이러한 풍경은 부농의 아들로 태어나 과수원에서 마음껏 뛰어놀던 어린 시절의 추억에서 비롯된 것이다. 온 가족이 자연에서 함께 편안하게 일하고 풍요로운 결실을 거두는 과수원 문화야말로 피난생활을 하며 극심한 가난에 시달린 그에게 가장 그리운 추억이었을 것이다.


그는 전쟁으로 가난을 피할 수 없었지만, 그것을 열등한 조건으로 생각하지 않고, 차이로서 받아들였다. 그의 작품세계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은지화는 가난했기 때문에 나올 수 있는 그림이었다. 돈이 없어서 재료를 구하기가 쉽지 않고, 떠돌이 생활로 큰 그림을 그리기가 어려워서 궁여지책으로 담뱃갑 속의 은박지를 이용하게 된 것이다. 은박지를 날카로운 못으로 눌러 고려청자의 강감기법처럼 그리면서 그는 오히려 독특한 자기만의 양식을 찾을 수 있었다.


<은지화銀紙畵>에서도 그의 장난기는 여전하다. 그는 가족들에 둘러싸여 그림을 그리고 있고, 아이들은 그림에 자신들의 모습이 그려지는 것을 흥미롭게 바라보고 있다. 그림 밖의 아이가 그림 안의 물고기를 낚시질하는 등 뒤죽박죽되어 있다. 작은 은박지가 그의 낭만과 환상을 펼쳐 보이기에 충분하리만치 커 보인다.


이중섭의 예술은 삶의 역경에 좌절하지 않고, 오히려 그것을 반전의 기회로 삼는 해학의 정신이 있었기에 가능했을 것이다. 그에게 놀이의 세계는 단순히 스트레스를 해소하기 위한 일시적인 수단이 아니라 우리가 인생에서 도달하고자 하는 낭만적인 이상세계다. 즐거운 놀이는 몰입을 가능하게 하여 무아지경의 상태로 인도하기 때문이다.


나와 타자의 구분이 사라지는 무아지경에서 우리는 집착과 편견에서 벗어나 참다운 본성을 느낄 수 있다. 그때 비로소 선악이나 미추 같은 이원적인 분별에서 벗어나 생명의 약동과 본성의 자유를 누릴 수 있는 것이다. 이중섭의 작품에서 인체의 과장된 몸짓과 변형은 바로 이러한 자유로운 유희본능이 발현된 결과다. 이것은 바보 같은 동작으로 비웃음을 유발하는 희극적 웃음과 달리 인간의 본성에서 나오는 생명의 활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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