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오센트리즘

저   자
로버트 란자 외(역:박세연)
출판사
예문아카이브
가   격
15,000원(288쪽)
출판일
2018년 03월






바이오센트리즘: 왜 과학은 생명과 의식을 설명하지 못하는가?


암흑으로 가득한 우주

지금까지 과학적 사고는 르네상스를 시작으로 수세기에 걸쳐 이어져 내려온 우주의 형상에 관한 단일한 사고방식에 지배받고 있다. 하지만 이 모형이 서서히 한계를 드러내면서, 근본적인 진실을 담았지만 지금까지 철저히 외면당한 혁명적인 패러다임으로 대체해야 할 필요성이 대두되고 있다.


기존 모형에 따르면 우주는 최근까지도 그 기원이 신비로 둘러싸인 태초의 법칙에 따라 생명 없는 입자들이 서로 충돌하는 공간이다. 여기서 생명체는 알 수 없는 모종의 과정을 거쳐 탄생한 존재로서 물리 법칙에 따라 움직이는 다윈의 메커니즘에 따라 지속적으로 그 형태를 변모시켰다. 그러나 이러한 생명체는 우리가 아직까지 제대로 밝혀내지 못한 의식을 포함하고 있으며, 의식에 관한 모든 연구는 생물학자의 몫으로만 남아 있다. 그런데 여기에 한 가지 문제가 있다. 의식은 생물학의 핵심 연구 분야가 아니다. 의식은 물리학의 과제다. 그러나 현대 물리학의 어떤 분야도 두뇌를 이루는 분자들이 어떻게 의식을 창조하는지 설명하지 못한다. 과학의 어떤 영역도 물질이 어떻게 의식으로 전환되는지 밝혀내지 못했다.


기존 모형이 결함을 드러내면서 점점 더 많은 과학자들이 궁지에서 벗어나기 위해 새로운 대안을 모색하고 있다. 지금가지 과학자들은 우주를 이루는 한 가지 중요한 요소를 어떻게든 외면하고자 했다. 어떻게 접근해야 할지 몰랐기 때문이다. 그것은 다름 아닌 ‘의식’이다.



태초에 무엇이 있었던가?

과학은 지금까지 물질적 현실의 중요한 구성 요소인 생명의 특성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거대한 우주를 이해하기 위해서 생물 중심주의가 반드시 필요하다는 생각은 우리가 의식이라고 말하는 주관적 경험이 물리적 세상과 관계를 맺는 방식을 기반으로 한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생물학자들이 새로운 우주 이론을 만들어 낼 것이라 기대하지 않는다. 그러나 태아 줄기세포 형태로 ‘만능세포’를 개발할 무렵, 생물학자들은 ‘살아 있는 세상’에 대한 이론을 바탕으로 ‘물리적인 세상’에 대한 기존 이론을 통합할 것이다. 생물학 이외에 어떤 다른 분야가 이러한 과제를 성취할 수 있겠는가? 우주를 이해하기 위해 인간이 만든 자연과학이 앞으로는 인간의 본질을 밝혀 낼 것이다.


논의를 위해, 우리가 분명하게 존재한다고 생각하는 모든 사물이 인식 활동으로부터 비롯된 것이라는 결론을 받아들여 보자. ‘부엌은 언제나 그 자리에 있다’는 부정하기 힘든 믿음에 대해 살펴보자. 우리는 자신이 어디에 있든 간에 부엌이 기존의 형태와 색상으로 존재하다고 믿는다. 하지만 사실은 의식의 상호 작용이 없을 때 우리가 떠올리는 부엌의 모습과 조금이라도 닮은 무언가는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이는 생물 중심주의에서 가장 쉽고 명백한 개념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세상이 독자적으로 그리고 우리가 보는 것과 비슷한 형태로 존재한다고 믿는다. 반면 생물 중심주의는 “그렇지 않다”고 말한다. “그게 정말로 거기에 있을까?” 생물 중심주의보다 더 먼저 등장한 이 오래된 질문은 생물 중심주의를 통해서만 타당한 대답을 내놓을 수 있다. “생물학적 존재 외부에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세상이란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때, 기존의 많은 이론은 그 설득력을 잃어버리고 만다.



나무가 쓰러지는 소리

무지개에 대해 생각해 보자. 산봉우리 사이에 펼쳐진 화려한 무지개는 보는 이의 숨을 멎게 만들 정도로 아름답다. 그러나 무지개가 모습을 드러내기 위해서는 관찰자의 존재가 반드시 필요하다. 인식 주체가 없으면 무지개도 없다. 무지개가 존재하기 위해서는 세 가지 요소가 필요하다. 태양과 물방울 그리고 적절한 위치에 있는 관찰자의 눈이 그것이다. 태양을 등지고 서 있을 때, 물방울 속으로 들어간 빛은 40~42도의 각도로 반사돼 우리 눈에 들어온다. 그렇기 때문에 무지개를 보려면 굴절된 빛이 도달하는 범위 안에 자리를 잡아야 한다. 또한 서로 다른 곳에 위치한 사람은 서로 다른 무지개를 본다. 그런데 관찰자가 없다면? 당연히 무지개도 없다. 무지개의 기하학적 요건을 충족시키기 위해서는 눈과 두뇌로 이뤄진 시각 시스템이 반드시 필요하다. 무지개는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태양과 물방울만큼 우리의 존재를 필요로 한다.


이제 우리는 생물 중심주의의 첫 번째 원칙에 도달했다. 생물 중심주의 제1원칙 ‘우리가 생각하는 현실은 의식을 수반하는 과정이다.’



우주는 어디에 있을까?

우리는 어릴 적부터 세상이 두 부분으로 구분돼 있다고 배웠다. 하나는 나 자신 그리고 다른 하나는 외부 세상이다.


그렇다면 세상은 두 개로 쪼개져 있는가? 이와 같은 ‘두 가지 세상’ 모형은 미신에 불과하다. 우리가 보는 것은 오로지 인식된 세상뿐이다. 그리고 그러한 인식 외부에는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다. 오로지 하나의 시각적 현실만이 존재한다. 바로 우리 두뇌 속에 말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외부 세상”은 두뇌 또는 마음속에 있다. 다시 말해 외부 세상과 내부 자아를 구분하는 경계란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가 마주하는 것이 오로지 자신의 의식이라면, 우리의 의식은 우리가 인식하는 모든 공간을 따라 확장하게 된다. 우리가 경험하는 유일한 세상이 자신의 의식이라면, 우리는 과학의 초점을 차갑고 기계적이고 외적인 우주로부터 하나의 의식이 다른 의식과 맺는 관계로 전환해야 할 것이다.


생물 중심주의 제2원칙 ‘내적 지각과 외부 세상은 서로 얽혀 있다. 둘은 동전의 앞뒷면과 같아서 따로 구분할 수 없다.’



골디락스의 우주

우주가 관찰자의 등장에 따라 구체적인 존재를 드러낼 때까지 미확정 상태로 남아 있다면, 그리고 그러한 상태에서 여러 가지 근본적인 상수를 포함하고 있다면, 결국에는 관찰자를 허용하게 될 것이며, 이러한 점에서 모든 상수의 값은 생명 탄생을 허용하는 방식으로 설정돼 있는 것이다.


우주의 존재가 생명 탄생으로 시작됐다면, 생명을 허용하지 않은 어떠한 우주도 존재할 수 없다. 우주가 정말로 관찰자 등장 이전에 불확실한 확률(생명의 존재를 허락하지 않았던)의 상태로 머물러 있었다면, 관찰이 시작돼 우주가 현실로 붕괴됐을 때 우주는 필연적으로 스스로를 붕괴시킨 관찰을 허용하는 상태로 머물러 있었던 것이다. 우주에 관한 골디락스의 신비는 이와 같은 생명 중심주의의 설명으로 사라진다. 그리고 우주와 우주를 존재하게 만든 생명의 역할이 비로소 뚜렷하게 드러난다. 이제 우리는 우주가 모두 다른 형태를 추할 수 있었음에도 생명을 허용하기 위해 적절한 형태를 택했다는 부정할 수 없는 사실에 대해 기적과도 같은 우연을 가정하거나 아니면 생물 중심적인 존재로서 필연적으로 드러나는 형태의 우주를 가정해야 한다.


생물중심주의의 제5원칙 ‘생물 중심주의를 통해서만 우주의 본질을 설명할 수 있다. 우주는 생명 탄생을 위해 정교하게 설계됐다. 이러한 접근 방식은 생명으로 인해 우주가 존재하게 되었다는 생각과 조화를 이룬다. 우주는 그 자체로 완벽한 시공간적 논리다.’



시간은 허상이다

양자 이론은 우리가 알고 있는 시간의 존재에 대해 끊임없이 의문을 던진다. 그런데 생물 중심주의의 관점에서 보자면, 일방통행으로 흘러가는 시간에 대한 우리의 인식은 부드럽고 지속적으로 이어지는 것처럼 보이는 무한한 행위와 결과로 이뤄진 세상에 대한 기계적인 관여로부터 비롯된 것이다.


매순간 우리는 ‘화살’ 패러독스의 맨 끝에 서 있다. 철학자 제논은 하나의 사물이 동시에 두 장소에 존재할 수 없다는 전제를 바탕으로, 화살은 반드시 특정한 시점에 특정한 위치에 존재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를 위해 화살은 순간적으로 정지해야 한다. 다시 말해, 특정한 순간에 궤도상 특정한 지점에 멈춰 있어야 한다. 이러한 식으로 생각하면 화살의 궤적은 흐름이 아니라 개별적인 지점의 집합이라 볼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생각은 아마도 시간의 일방통행이 외부 세상의 고유한 특성이 아니라, ‘관찰 대상을 하나로 엮을 때’ 우리 안에 존재하게 되는 관념의 특성임을 말해준 최초의 지적이다. 이러한 사고방식에 따르면 시간은 객관적 현실이 아니라 우리 마음의 기능이다.


시간에 대한 우리의 인식은 분명하게도 생각이라는 일상적 행위로부터 비롯됐다. 우리는 한 번에 하나씩 생각하고, 이를 통해 과거를 떠올리고 미래를 예측한다. 그러나 갑자기 모든 생각이 사라지는 순간, 또는 급박한 상황이나 생소한 환경으로 정신을 집중해야 하는 순간, 시간은 사라진다. 그리고 그 자리에 황홀한 자유의 느낌이나 위기에서 벗어나려는 강력한 의지가 등장한다. 생각이 사라진 순간에 우리는 시간을 일반적인 방식으로 경험하지 않는다. 사람들은 말한다. “마치 슬로 모션처럼 장면이 펼쳐졌어요.”


결론적으로 생물 중심주의 관점에서 생명체를 떠나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시간이란 없다. 또한 시간은 생명의 본질적인 측면도 아니다. 아이들이 크고, 나이가 들고, 사랑하는 사람이 세상을 떠날 때, 시간의 흐름은 우리에게 결코 거부할 수 없는 실체로 다가온다. 아이는 자라 어른이 되고 부모와 함께 나이 들어간다. 그것이 바로 우리가 경험하는 시간이다. 시간은 언제나 우리와 함께한다.


생물 중심주의 제6원칙 ‘시간은 생명체를 떠나 독립적으로 존재하지 않으며, 우리가 주변의 변화를 인식하기 위한 도구이다.’



공간도 허상이다

우리는 시간과 공간이 일반적인 ‘사물’이 아니라는 사실은 알고 있다. 보고, 느끼고, 먹고, 만지고, 냄새 맡을 수 있는 대상과는 다르다. 시간과 공간에는 쉽게 이해하기 힘든 고유한 특성이 있다. 바닷가에서 주워 온 조개껍데기나 자갈처럼 시간과 공간을 탁자 위에 놓아두지는 못한다. 시간과 공간에는 다른 무언가가 있다. 그리고 그 이유는 시간이 물리적으로 근본적인 실체가 아니기 때문이다. 시간과 공간은 개념이다. 즉, 고유한 주관적인 특성을 갖고 있다. ‘시간과 공간은 해석과 이해의 방식이다.’ 그리고 생명체가 지각 정보를 가지고 다차원적인 대상을 재현하기 위한 정신적 도구다.


시간과 마찬가지로 공간 역시 인간의 창조물이다. 공간은 인식 가능한 모든 대상이 진열돼 있는 벽이 없는 거대한 용기와 같다. 그러나 아쉽게도 우리는 ‘의식의 변화’가 일어나는 특별한 순간에만 공간이 사라지는 특별한 경험을 한다. 그때 사람들은 모든 사물이 개체성을 잃어버린다고 말한다.


시간과 공간이라는 끝없는 바다?

생물 중심주의는 공간이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투영이며 이를 통해 경험이 시작된다고 말한다. 공간은 생명체의 개념적 도구로서 감각 정보를 통합해 인식된 대상의 특성에 대한 판단을 내릴 수 있도록 해 주는 외적 감각의 요소를 갖추고 있다. 공간은 그 자체로 물리적 실체가 아니며, 그렇기 때문에 화학 물질이나 움직이는 입자와 동일한 방식으로 다뤄서는 안 된다. 생명체는 외적 감각의 요소로부터 얻은 감각 정보를 바탕으로 경험을 조직화한다. 생물학 관점에서 볼 때, 감각 정보에 대한 두뇌 해석은 우리 몸이 받아들이는 신경 경로에 따라 달라진다.


관찰자가 없다면 공간은 무슨 의미가 있는가? 공간은 단지 벽 없는 그릇이 아니다. 우리는 이런 질문을 던질 수 있다. 모든 사물과 생명체가 사라질 때, 무엇이 남는가? 그러면 공간은 어디에 있는가? 무엇이 경계를 정의하는가? 모든 실체와 경계가 사라진 물리적 세상에 무언가가 존재하는 것은 상상조차 힘들다.


공간을 떠나 무한 속으로

그렇다면 공간의 본질은 무엇일까? 텅 비어 있음? 에너지로 가득한 물질적 존재? 객관적 실체? 아니면 가상의 개념? 실질적인 활동의 장? 아니면 마음속의 장? 만약 외부 세상이 우리의 마음속에 존재하는 개념이라면, 그리고 지금 이 순간 “저기에 있다”고 인식한 사물이 사실은 우리 머릿속에 있는 것이라면, ‘당연하게도’ 모든 것은 다른 모든 것들과 연결돼 있다.


우리가 극단적으로 빠른 속도로 이동할 때, 우주는 몇 걸음만으로 가로지를 수 있을 정도로 줄어든다. 이러한 사실은 공간에 근본적이고 객관적인 특성이 없다는 점을 말해 준다. 오히려 공간은 상황에 따라 달라지는 경험적 산물이라 하겠다.


생물 중심주의와 관련해 이 모든 논의가 의미하는 바는 주관적이고 상대적이고 관찰자 의존적인 현상이 아닌 객관적 실체로서 시간과 공간의 개념을 버릴 때, 우리는 비로소 외부 세상이 자신의 머릿속에 존재한다는 주장을 받아들일 수 있다는 것이다.


생물 중심주의 제7원칙 ‘시간과 마찬가지로 공간은 실체가 아니다. 공간은 생명체가 세상을 이해하기 위한 또 한 가지 도구이며 독립적 실체를 갖지 않는다. 거북이 등껍질처럼 우리는 언제가 공간과 시간의 개념을 이고 다닌다. 이러한 점에서 물리적 사건이 생명체와 무관하게 일어나기 위한 절대적이고 독립적인 공간이란 없다.



의식의 미스터리

생물 주심주의를 이루는 핵심 요소인 의식은 과학에 중대한 문제를 안겨다 준다. 의식은 우리에게 친숙한 존재이지만 설명하기는 대단히 어렵다.


많은 과학자들이 의식은 두뇌 기능과 관련된 것이며, 그렇기 때문에 두뇌의 어떤 부위가 어떤 기능을 담당하는지 밝혀내기만 한다면 의식의 문제를 모두 해결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다시 말해, 그들에게 의식의 문제란 메커니즘을 규명하는 간단한 사안이다. 그러나 경험과 관련해 대단히 심오하고 복잡한 의식의 측면은 “단지 두뇌 기능에 관한 것이 아니며, 그렇기 때문에 힘든 문제다. 두뇌 기능을 모두 밝혀냈다고 해서 의식의 문제를 해결했다고 말할 수 없는 것”이다. 다시 말해, 신경 정보를 어떻게 분류하고 통합하고 보고하는지 이해한다고 해서 ‘경험’이 어떻게 이뤄지는지 이해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지금까지 물리학이 의식의 정체를 밝혀내기 위해 도전했지만 한계에 부딪히고 말았다. 물리학은 의식에 대해 어떤 해답도 내놓지 못했다. 두뇌의 어떤 부위가 후각을 담당하는지 알아냈다고 해서 모닥불이 타는 냄새를 맡으면 왜 아련한 느낌이 드는지 설명할 수 없었다. 이와 같은 주관적 경험과 관련해 현대 과학은 궁지에 몰려 있다.


결론적으로 세상은 상호 관계성 속에 존재한다. 의식이 곧 물리적 구조나 기능은 아니다. 의식은 땅을 뚫고 솟아나는 대나무처럼 시공간의 현실로부터 모습을 드러낸다.


과거와 현재의 진지한 사상가들의 말이 옳았다. 의식은 최대의 미스터리다. 아무리 중요한 주제라도 의식과 비교할 때 보잘것없다.



죽음은 존재하지 않는다

삶에 대한 애착과 그에 상응하는 죽음의 두려움은 인간의 보편적 관심사다. 그러나 물리학 기반의 기존 세계관에서 벗어나 생물 중심주의 관점에서 바라볼 때, 생생하고 또렷했던 세상이 갑자기 흐려지기 시작한다.


시간과 공간이 사라진 의식의 우주를 바라보는 생물 중심주의는 어떠한 측면에서도 완전한 죽음을 인정하지 않는다. 육신이 소멸할 때, 우리는 무작위의 원칙이 지배하는 당구대가 아니라 모든 것이 필연적으로 살아 있는 세상에 존재한다.


기존의 과학적 세계관은 죽음을 두려워하는 이들에게 어떤 탈출구도 보여 주지 않았다. 그러나 우리가 무한한 시간의 최전선에서 우연히 존재하는 것처럼 보이는 이유는 무엇일까? 대답은 간단하다. 문은 ‘절대로’ 닫히지 않기 때문이다. 의식이 소멸할 수학적 확률은 제로다.


우리는 특정한 사물로 나타났다 사라지고 만물이 탄생의 순간을 갖는 일상을 살아간다. 연필이든 새끼 고양이든 세상 만물은 탄생하고 해체되고 소멸한다. 논리는 시작과 끝이 얽힌 연결 고리를 설명한다. 반면 사랑, 아름다운, 의식, 전체로서의 우주처럼 본질적으로 시간을 초월한 존재는 논리의 외부에 산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의식과 동의어라고 생각하는 모든 것들은 경험의 범주에 잘 들어맞지 않는다. 우리는 과학적 접근 방식으로 의식을 설명하려 하지만, 안타깝게도 아직까지 만족할만한 이론을 내놓지 못했다.


‘영원’은 흥미로운 개념이다. 영원은 무한한 시간 속에서 지속적으로 존재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또한 시간적인 차원에서 무한한 연속성을 뜻하는 것도 아니다. 영원은 시간을 초월한 개념이다. 이러한 개념에 대해 생각할 때, 우리가 직면하는 문제는 단지 언어가 기본적으로 이분법적인 도구이며, 그렇기 때문에 이러한 주제를 논의하기에 적합하지 않다는 것뿐만이 아니라, 이해의 차원에 따라 다양한 ‘진실’의 층이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점에서 과학과 철학, 종교, 형이상학 모두 이해 및 교육 수준, 성향, 편견을 기준으로 광범위한 스펙트럼을 이루는 대중에게 적합한 설명을 내놓아야 한다는 과제를 짊어지고 있다.


가장 중요하고 오래된 질문이 남았다.


“나는 누구인가?”


내가 곧 육체라면 나는 틀림없이 죽을 것이다. 그러나 내가 의식이라면, 즉 경험과 감정의 주체라면 다양한 형태로 변화할지언정 죽지는 않을 것이다. 의식은 무한한 존재다. 과학적 시선으로 바라보자면, ‘살아 있다’는 내면의 느낌 또는 ‘나’라고 하는 인식은 전구에 불이 들어오듯 100와트의 에너지로 작동하는 신경적/전기적 메커니즘의 결과물이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에너지의 형태는 끊임없이 변화하지만 절대적인 양은 변화하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존재를 이루는 핵심 에너지 또한 늘어나거나 줄어들지 않는다. 이처럼 우리는 닫힌 에너지 시스템 속에서 살아간다.



생물 중심주의의 미래

생물 중심주의는 기존의 다양한 연구 분야를 통합할 가능성을 제시하는 혁신적인 과학적 세계관이다. 생물 중심주의는 그 자체로 진실을 드러내면서, 동시에 최근 모순을 빚는 생물학과 물리학의 여러 측면을 화해시킬 수 있는 단기적․장기적 기회를 제시한다.


최근 여러 분야의 전문가들이 생물학, 물리학, 우주론을 비롯한 다양한 분야에 접근하고 있다. 생물 중심주의를 뒷받침하는 가시적 성과를 얻기 위해서는 다차원적인 접근 방식이 필요하다. 이들은 머지않은 시간에 그러한 성과가 모습을 드러낼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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