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록

   
노무현재단 기획. 윤태영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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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담
   
15000
2014년 04월



■ 책 소개 


노무현 대통령의 마음까지 기록할 수 있었던 유일한 사람 


윤태영 비서관이 전하는 노무현 대통령 이야기 





노무현 대통령의 오랜 동반자이자 비서였던 윤태영은, 이 책을 통해 ‘대통령 노무현’은 물론 ‘인간 노무현’의 이면까지 아우른다. 윤태영 비서관은 노무현 대통령과 가장 가까운 거리에 있었다. 노무현 대통령은 윤태영 비서관을 곁에 두고 자신을 관찰하며 기록하도록 했다. 





이 책은 노무현재단 홈페이지 ‘사람 사는 세상’에 연재되어 수많은 사람들을 울고 웃게 만들었던 저자의 칼럼을 새롭게 다듬어 담았으며, 칼럼에 담지 못한 못다 쓴 이야기와 퇴임 이후 봉하에서의 기록을 함께 엮었다. 1부는 에피소드 중심으로 노무현 대통령의 리더십과 인간적 면모를 보여주고 있으며, 2부는 재임 시절의 성공과 좌절을, 3부는 퇴임 이후부터 서거까지를 시간 순서대로 기록하고 있다. 





■ 기획 노무현재단 


대한민국 제16대 대통령 노무현의 가치와 철학, 업적을 유지·계승·발전시켜 그 뜻이 나라와 민주주의 발전의 중요한 토대가 되도록 하기 위해 2009년 9월 23일 설립됐다. 노 대통령의 생애와 활동, 업적을 널리 알리기 위한 기념관 건립, 추모 시설 운영, 노무현 시민학교, 사료 편찬, 기념 및 문화 행사 개최, 묘역 조성 지원을 비롯해 교육·연구·출판, 국제 협력 등의 사업을 펼치고 있다. 





■ 저자 윤태영 


의원보좌관으로 일하기 시작한 1988년, 당시 제13대 국회의원으로 정계에 진출한 정치인 노무현을 처음으로 만났다. 이후 노무현의 생각과 철학을 공유하면서 정치적 행보를 같이 하기 시작했다. 제14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낙선한 노무현이 자서전 『여보, 나 좀 도와줘』를 펴낼 당시에는 집필 작업에 직접 참여했다. 이후 노무현 캠프의 외곽에서 방송원고와 홍보물의 제작 등 지원 활동을 했으며 2001년 초 대통령후보 경선을 앞두고 본격적으로 캠프에 몸을 담았다. 





참여정부 시절에는 두 차례 청와대 대변인을 지냈고, 부속실장과 연설기획비서관을 지내는 동안 대통령을 그림자처럼 수행했다. 노무현 대통령은 언제나 윤태영 비서관을 곁에 두고 자신을 관찰하면서 일거수일투족을 기록하도록 했다. 언론은 그를 "대통령의 복심" "대통령의 입" "노무현의 필사" 등 권력의 핵심으로 불렀다. 하지만 그는 대통령을 향한 항심을 끝까지 지켰다. 윤태영 비서관의 모습에는 순결한 결기를 가졌던 노무현 대통령의 면모가 투영되고 있다. 





■ 차례 


추천의 글_ "노무현의 진심"을 전합니다 


서문_ 인간 노무현의 숨결을 닮은 책이 될 수 있기를 





1부. 노무현이라는 사람_ 그가 내게로 왔다 


1. 이름과 역사 그런데… 이름이 뭐였더라? 


2. 노무현의 화법(1)-비유의 달인 사람은 원래 살과 뼈로 이루어진 것 아니었던가? 


3. 노무현의 화법(2)-반어법과 반전 정말 말실수인가? 언론이 만드는 것인가? 


4. 정치라는 흙탕물 바보들이 정치하는 건 아닙니다 


5. 답이 있는 정치인 이건 자네 글이지, 내 글이 아닐세 


6. 행복 유전자 코 후비다 카메라에 찍히는 일 없도록 조심하세요 


7. 통 큰 디테일 책임은 대통령인 내가 지겠다 


8. 오류를 줄이는 방법 걸어가는 도중에 중요한 판단을 요구해서는 안 되네 


9. 취미와 기호(1)-담배와 술 여기 담배 좀 갖다 주게 


10. 취미와 기호(2)-식성과 재충전의 방식 대화할 때 그는 가장 행복한 표정을 지었다 


11. 낮은 사람 대통령이 걸음을 옮겨 내 옆자리에 앉았다 


12. 인간에 대한 예의 그의 눈은 벌겋게 충혈되어 있었다 


13. 변화와 금기에 대한 도전 그는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았다 


14. 한일 관계와 과거사 문제 뉘우침과 사과 없는 일본에 던진 "돌직구" 


15. 말과 글에 대한 열정 생각이 바뀌면 세상이 바뀐다 





2부. 성공과 좌절_ 봄은 땅에서 솟아오른다 


16. 2003년 봄 이상과 현실 


17. 2003년 가을 대통령의 원칙과 소신 


18. 2004년 봄 탄핵 전후 


19. 2004년 가을 순방 외교의 현장 


20. 2004년 12월 자이툰 부대 방문 


21. 2004년 겨울 대통령의 위기 


22. 2005년 설 연휴 눈꺼풀 수술과 단축된 휴가 


23. 2007년 1월 개헌 제안 


24. 2007년 1월 2월 퇴임 





3부. 봉하, 454일간의 기록 


25. 2008년 2월 귀향 


26. 2008년 봄 친구 


27. 2008년 봄 여름 시비 


28. 2008년 여름 휴가 


29. 2008년 가을 겨울 칩거 


30. 2009년 겨울 봄 고난 


31. 2009년 봄 유폐 


32. 2009년 5월 작별 





부록. 대통령의 메모 나의 구상 




기록


노무현이라는 사람_ 그가 내게로 왔다

답이 있는 정치인 "이건 자네 글이지, 내 글이 아닐세."

"이건 자네 글이지, 내 글이 아닐세."

민주당 상임 고문 노무현은 A4 용지 두 장으로 출력된 원고를 덮었다. 첫 대목 서너 줄만 읽었을 뿐이었다. 그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잠시 탁자 위를 응시하던 노무현 고문이 나를 책망했다.

"이런 원고를 쓰려면 사전에 나에게 물어봤어야지. 다시 쓰게."


지시를 마친 그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음 일정이 촉박한 탓이었다. 난감해진 것은 나였다. 대통령 경선 후보 캠프에 들어오고 나서 쓴 첫 작품이었다. 외부에서 노무현 고문에게 오는 기고 요청이 많았는데, 마감이 임박한 두 건을 우선 처리하려고 초고를 쓴 것이었다. 10여 년 이상 정치권에서 익숙하게 해 온 일이었다. 정치인에게 기고 요청이 들어오면 으레 공보 비서가 아이디어를 구상해서 초안을 잡은 다음 보고하는 것이 상례였다. 어떻게 쓰라고 지침을 주는 정치인은 드물었다. 오히려 물어보는 것이 도리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그렇게 작성된 원고는 대부분 무리 없이 통과되고 결재되었다. 그만큼 자신도 있었다. 그런데 노무현 캠프의 첫 작업에서부터 의외의 복병을 만난 것이다.


"마감이 임박했습니다. 쓸 내용을 말씀해 주셔야…."

계단 아래로 내려간 노무현 고문이 나를 올려다보면서 소리쳤다.

"내가 몇 달간 강연한 내용들 다 읽어 보게. 거기에 다 있네."

그 말을 남기고 그는 건물을 나섰다. 나는 앞으로 홍보팀장으로서 헤쳐 나가야 할 길이 만만치 않을 것이라는 불길한 예감에 사로 잡혔다.


불길한 예감은 어느 정도 적중했다. 노무현 고문은 글에 관해 엄격했다. 까다롭기도 했다. 자신의 이야기가 정확하게 전달되도록 하려는 노력이었다. 자신만의 생각과 철학이 있었기 때문이다. 자신만의 언어도 있었다. 섣부른 비유와 예화는 가차 없이 쳐 냈다. 자신의 언어가 아니면 아무리 멋들어진 표현이라도 거부했다. 분명한 자기 세계와 자신의 색깔이 있었다.


홍보팀장 일은 쉽지 않았다. 노무현 고문과 호흡을 같이하는 것이 우선이었다. 민주당 대통령 후보 시절, 공식 연설문을 작성하는 일은 캠프의 최대 난제였다. 이병완 국가전략연구소 부소장 등 당내 역량 있는 사람들이 많이 동원되었다. 그들 또한 적지 않은 어려움을 겪었다. 연설문을 보는 후보의 기준이 엄격했기 때문이다. 글을 쓰는 사람들에게 밴 습성이 문제였다. 그들은 후보의 연설이 아니라 자신의 연설을 쓰려는 경향이 있었다. 그로부터 괴리가 발생했다. 이 난제를 푸는 해법이 있었다. 노무현 후보가 대통령으로 당선되고 난 후에 체득한 것이었다. 해법은 의외로 간단했다. 주요 연설 계기가 임박하면 대통령에게 하실 말씀을 사전에 물어보는 것이었다. 대통령은 언제나 물음에 대답했다. 거기에 답이 있었다.


대통령 노무현은 말씀을 많이 했다. 마무리 발언 때문에 국무회의가 12시를 넘긴 적도 한두 번이 아니었다. 부속실장이 된 후 나는 비공식 또는 개인 일정에 배석해서 기록하는 일을 겸했다. 처음 1년은 수첩에 펜으로 적었다. 오른손 가운뎃손가락에 생긴 펜혹이 몇 달만에 사마귀처럼 커졌다. 통증도 심했다. 펜이 닿는 부위를 옮겨 보기도 했다. 집게손가락에 펜을 기대어 써 보기도 했다. 한계가 있었다. 생각에 생각이 꼬리를 물었고 말씀은 계속되었다. 어떻게 그 많은 이야기가 끊이지 않고 나올 수 있을까 신기했다. 사저에서는 회의가 끝나고 일어선 채로 다시 10여 분을 더 이야기하기도 했다. 비일비재한 일이었다. 결국 1년이 지났을 무렵, 나는 수첩 대신 노트북을 선택했다. 커진 펜혹을 감당할 수 없었다. 노트북을 활용한 기록 작업은 효율성도 높았다. 수기보다 훨씬 더 많은 내용을 받아 적을 수 있었다. 그렇게 다시 1년, 이번에는 두 어깨가 아파 오기 시작했다.


인간에 대한 예의 그의 눈은 벌겋게 충혈되어 있었다

2005년 5월 중순, 노무현 대통령은 러시아와 우즈베키스탄을 순방했다. 우즈베키스탄에는 스탈린 시절에 강제 이주된 고려인의 후손들이 많이 살고 있었다. 그는 그들이 살아 온 힘겨운 세월과 고통을 익히 알고 있었다. 그래서 우즈베키스탄은 꼭 한번 방문하고 싶어 한 곳이었다.


영빈관 응접실에서 그는 고려인들을 맞이했다. 통역이 필요했다. 대부분 2세와 3세들이기 때문이었다. 이주 고려인 1세에 해당하는 고령의 할머니가 있었다. 할머니는 그들 1세가 낯선 땅에서 겪어야 했던 기나긴 고초와 고난의 시간에 대해 설명했다. 이야기를 듣던 그가 갑자기 손에 든 말씀 자료로 눈길을 떨어뜨렸다. 해야 할 무슨 말을 찾으려는 듯이 보였지만 그것이 아니었다. 고개를 숙인 채 메모 카드를 바라보기만 할 뿐이었다. 시선 둘 곳을 찾지 못하는 대통령. 그는 한참 동안 고개를 숙인 채 할머니의 이야기를 듣기만 했다. 작은 물방울 하나가 떨어져 메모 카드를 적시었다. 눈치를 챈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는 손수건을 꺼내 얼굴을 닦았다. 한참 후에야 고개를 들어 할머니를 응시했다. 그의 눈은 안타까움과 연민으로 벌겋게 충혈되어 있었다. 인간 노무현의 눈물이었다.


다시 며칠이 지난 5월 20일 청와대의 아침 예정에 없던 수석·보좌관 회의가 열렸다. 대통령의 갑작스런 지시에 따른 것이었다. 비서실장을 비롯한 수석·보좌관들은 영문을 모른 채 비서동의 회의실로 걸음을 옮겼다. 대통령은 회의에 대비해 홍보수석실에 별도의 지시를 했다. 지난밤 TV에서 방영된 프로그램을 수석 ·보좌관 회의에서 함께 시청할 수 있도록 준비해 놓으라는 것이었다. 8시 40분에 회의가 시작되었고 대통령과 참모들은 준비된 동영상을 시청했다. "거리로 내몰리는 사람들"이라는 제목으로 방영된 KBS <추적 60분>이었다. 공공임대 아파트에서 부도가 발생해 많은 서민 피해자들이 거리로 쪼겨나고 있는 상황을 심층 취재한 것이었다. 그는 참모들에게 공공임대주택 정책의 부작용을 보완할 대책을 마련하라고 지시했다.


"나는 모든 기사와 보도들이 아프다."

재임 시절, 대통령 노무현은 이렇게 말하곤 했다. 자신과 참여 정부에 대한 언론의 날선 비판도 물론 아팠지만, 정책의 문제점이나 사각지대를 지적하는 보도를 접할 때도 마음이 아프다는 뜻이었다. 그는 시간이 허락하는 한, 뉴스와 시사 프로그램을 꼼꼼히 시청했다. 미처 챙기지 못했거나 잘못 책정된 정책은 없는지 늘 노심초사했다. 그날의 회의는 그런 모니터링의 결과물이었다. 그는 거리로 내몰린 피해자가 어려움을 호소하는 장면을 접하고 대책을 마련해야겠다는 생각으로 즉시 회의 소집을 지시한 것이었다. 국민의 고통을 덜어 내야 할 대통령으로서는 당연한 책임감이기도 했다.


그런데 청와대의 아침에 비상을 걸기까지 하는 데는 그 이상의 것도 있었다. 이웃의 힘겨움을 함께 아파하는 따뜻한 마음이었다. 인간에 대한 예의였다.


정치인 노무현은 수행비서를 앞의 조수석이 아닌 옆자리에 태우고 다닌 것으로 유명했다. 얼굴을 마주보며 대화를 나눌 수도 있었고, 자료를 함께 검토할 수도 있었다. 각계 전문가를 별도로 만나 의견을 청취해야 하는 자리가 생기면, 상대방에게 양해를 구한 다음 수행한 비서도 함께 이야기를 듣도록 했다. 청와대 생활도 마찬가지였다. 본관과 관저를 오가던 도중 우연히 관람객들을 접하면 그는 예외 없이 차를 세웠다. 번번이 귀찮을 법도 했지만 한 번도 거르지 않았다. 내려서 사진도 찍고 최소한 한두 마디 인사를 주고받았다.


그는 자신의 비서를 부를 때도 직함이나 존칭을 생략하지 않았다. 윤 비서관 아니면 최소한 태영 씨였다. 여직원이든 행정관이든, 그 누구를 향해서든 똑같았다. 예외적으로 이름을 부르는 때가 아주 가끔 있기는 했다. 각별한 관심과 애정을 표현하려는 경우였다 기용했던 장관이나 청와대 고위 참모를 교체해야 할 상황이 되면, 그는 가급적 사전에 식사나 차담에 초대하여 그 배경을 설명했다. 어렵고 힘든 이야기였지만 자신이 직접 당사자에게 양해를 구했다. 그들이 어느 날 갑자기 보도를 통해 자신들의 교체 사실을 알게 되는 황당한 상황이 없게 하려는 노력이었다.


그는 따뜻한 마음의 소유자였다. 미안해할 줄 알았고 또 고마움을 아는 사람이었다. 그가 특별히 큰 미안과 고마움을 함께 간직한 대상은 역시 노사모였다. 자신이 가는 생사장마다 플래카드를 내걸고 풍선을 들고 나타나는 사람들을 볼 때마다 그는 차 안에서 미안함에 어쩔 줄 몰라 하곤 했다. 어쩌면 그 미안함이 그의 정치를 있게 한 바탕이었다. 포기하고 싶을 때마다 그를 다시 일으켜 세운 원동력이었다.



성공과 좌절_ 봄은 땅에서 솟아오른다

2004년 12월 자이툰 부대 방문

20여 일 전인 11월 13일, 남미 순방을 위해 출국한 대통령 일행은 중간에 미국 LA를 들렀다. 그곳에선 동포 간담회가 열렸다. 대통령은 특유의 입담으로 많은 이야기를 했다.


"대통령이 왜 힘이 없냐고 하는데, 대통령은 힘을 좀 빼야 한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러나 무법자들의 힘을 좀 빼고 정정당당히 경쟁하지 않고 반칙하는 일을 뿌리 뽑는 것은 강력히 하겠습니다. 앞으로도 모두가 법으로 보호받고 함께 만든 규범을 존중하면서 공정하게 경쟁하는 사회 문화를 만드는 데 집중할 것입니다. 감사합니다."


연설이 끝나자 행사에 참석한 교민 몇 사람이 대통령에게 여러 가지 질문을 했다. 그 가운데 하나, 이런 질문도 있었다.

"대통령께서 직접 이라크에 파병된 자이툰 부대를 위문할 생각은 없으십니까?"


대통령은 교민들의 질문에 비교적 소상하게 답변을 했다. 하지만 이 질문에 대해서만큼은 구체적인 대답을 하지 않았다. 질문 자체를 잊은 것인지, 의도적으로 답변하지 않은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질문에 대한 답변을 회피하는 일이 거의 없는 대통령이었다. 어쨌든 그런 가운데 대통령의 답변은 끝났고, 행사를 마무리되었다. 그런 질문이 있었다고 특별히 기억하는 사람도 없는 듯 보였다.


얼마 후 그 이야기를 다시 꺼낸 것은 남미 순방을 마치고 돌아온 대통령 자신이었다. 귀국한 지 며칠 지나지 않아 다시 유럽 순방을 떠나야 하는 상황이었다. 강행군이었다. 그는 부속실장인 나를 불러 NSC에 지시를 내릴 수 있도록 준비하라고 했다. 유럽을 방문하는 계기에 이라크에 주둔하고 있는 파병 부대를 위문하겠다는 것이었다. 일정은 유럽 순방이 끝나는 시점으로 결정되었다. 참모들은 긴장했다. 보안이 제대로 지켜질 수 있는지에 대한 우려가 가장 컸다. 그는 개의치 않았다.

"보안이 깨지면 깨지는 대로 가야지요."


12월 초, 폴란드를 거쳐 프랑스에 도착한 대통령은 이라크 아르빌 방문을 본격적으로 준비했다. 예정된 아르빌 방문 시간에 맞추기 위해 프랑스에서의 일정이 반나절 연장되었다. 일정 변경에도 불구하고 기자들이나 수행원들은 이상한 기미를 눈치 채지 못했다. 늘어난 체류 시간을 활용하여 대통령 내외는 퐁피두센터를 방문했다. 늦은 저녁, 마침내 대통령이 탑승한 전세기는 파리의 드골 공항을 이륙했다. 비행기가 안정 고도에 진입하자마자 그는 직접 기자들 앞에 나섰다.


"여러분, 라오스에서 파리까지 정말 수고가 많았습니다. 참 힘들었지요? 여러분 보기에는 어떤가요? 잘 된 것 같은가요? 표정으로 읽을게요. 그냥 최선을 다했다, 크게 차질은 없었던 것 같다, 생각했던 것만큼은 했다고 자평하고 싶습니다. 서울로 돌아가는 일만 남았는데… (잠깐 포즈를 취한 뒤) 여러분한테 좀 이렇게 미안한, 양해의 말씀을 하나 구하고 싶습니다. 뭐라고 하지? (약간 주저하면서) 양해를 구하고 싶습니다.


이 비행기가 서울로 바로 못 갑니다. 쿠웨이트에 들러서 여러분들이 쿠웨이트에서 좀 지체해 주시고, 저는 그동안에 여러분 중 몇 분과 아르빌을 다녀와야겠습니다. 그동안 공개하지 않고 여러 분한테 협력을 구해 비공개 리에 부대 배치가 완전히 끝났습니다. 그래서 장병들이 안착했기 때문에 연말을 기해 아무래도 제가 가서 한 번 위로하고 격려하는 것이 도리라고 생각했습니다. 또 기왕에 파병을 해서 우리 장병들이 수고를 하는데 그리하는 게 도움이 될 것 같아 다녀오기로 했습니다. 쿠웨이트에 도착해서 우리 군용기로 갈아 타고 새벽에 아르빌에 도착합니다. 장병들과 아침을 같이 먹을 수 있습니다. 간단하게 장병들을 격려하는 프로그램을 하고 다시 여러분과 합류해 [서울로] 갑니다. 8일 도착한다고 기사들을 썼을 텐데… (웃음) 그 오보는 국민이 다 양해하고 받아 주시지 않겠습니까?"


전세기는 12월 8일 새벽에 쿠웨이트의 무바라크 공항에 착륙했다. 사막 지대라 더운 날씨일 것으로 예상했지만 생각보다는 건조했다. 대통령과 수행원, 그리고 풀 기자들이 군용기로 옮겨 탔다. 새벽 5시에 이륙한 군용기는 830킬로미터를 2시간 20분 동안 날아 아르빌 공항에 도착했다. 지급된 방탄조끼를 입으면서 수행원들의 분위기도 긴장으로 바뀌었다. 공항에서 다시 차량 편으로 20분을 달렸다. 자이툰 부대에 도착한 시각은 아침 7시 15분. 대통령은 장병들과 함께 아침 식사를 했다. 파병 결정과 관련하여 큰 부담과 불편이 그동안 대통령의 마음을 짓눌러온 것이 사실이었다. 그 부담을 덜어내려는 듯 그는 장병들에게 힘차게 이야기했다.


"처음에 파병할 때 고심을 많이 했다. 명분 또 국익, 그 다음에 안전…. 다 각기 기준이 달라서 논란은 많이 있었지만, 어떻든 안전이라는 측면이 누구도 이의를 제기할 수 없는 공통의 관심사여서 걱정 많이 했다. 여러분의 선배들이 내게 자신을 갖게 해준 말이 있다. 우리 군이 가서 위험에 처하는 경우는 주민들로부터 불신을 받을 때이고, 친근하게 결합했을 때는 성공할 수 있다. 그런데 우리 군은 그런 점에서 한 번도 실패한 적이 없다. 세계 어느 나라 군대보다도 잘 한다. 어디 가더라도 한국군은 스스로의 안전을 지키면서 임무를 120퍼센트 150퍼센트 수행할 것이다. 믿고 결단을 내려 달라고 조언하더라. 해외 파병 다녀온 지휘관들이 그랬다. 나도 그걸 믿었다. 실적이 있었으니까. 오늘 와서 보니 또 한 번 우리 군의 능력이 증명되는 것 같다. 현장을 보면서도 느낌이 있고 사단장 보고와 영상 보고를 보면서 받은 느낌이 있다. 이 자리에서 여러분과 짧은 대화를 나누다 보니 정말 실감이 나고 확신을 갖게 됐다. 여러분, 참 장하다. 여러분이 계속 보람을 갖고 꼭 성공해달라."


자이툰 방문을 마친 대통령 일행은 쿠웨이트 무바라크 공항으로 돌아온 후 기자들의 기사 송고를 위해 한 시간 더 그곳에 머물렀다. 이 행사를 끝으로 그는 라오스와 유럽 3개국 순방 일정을 마무리하고 귀국길에 올랐다. 서울공항에 도착한 것이 12월 9일 새벽 4시 40분. 귀국해 보니 여론이 바뀌어 있었다. 대통령에 대한 칭찬이 여기저기서 쏟아져 나왔다. 보수 언론까지도 칭찬 일색이었다. 더불어 대통령에 대한 지지도도 급상승했다. 그를 만나는 사람들은 모두 이구동성으로 감동을 이야기했다. 그는 멋쩍은 반응을 보였다.

"나는 그렇게까지 기대를 한 것이 아니었는데…."



봉하, 454일간의 기록

2008년 봄 친구

봉하에 내려온 방송사 취재진들이 퇴임한 대통령의 일상을 열심히 찍어 다큐멘터리로 내보냈다. 방송은 위력을 발휘했다. 그의 얼굴을 보기 위해 봉하 사저를 찾는 발길이 더욱 늘어났다. 마을은 북새통을 이루었다. 밀려드는 방문객들을 마을 사람들이 반겼다. 마을을 찾는 사람이 많다는 것은 어쨌든 좋은 일이었다. 방문객들을 상대로 한 장사도 시작되었다. 농사만 지으면서 조용히 살기를 원하는 사람의 입장에서 보면 난데없는 야단법석일 수도 있었다.


담장 바깥에서 들려오는 "나와 주세요!"라는 함성을 그는 외면하지 않았다. 원래부터 자그마한 일조차도 쉬이 무시하거나 외면하는 성격이 아니었다. 지도자로서는 보기 드문 품성이었다. 지도자답다고 할 수도 있었고, 지도자답지 않다고 할 수도 있었다. 가끔은 그냥 모르는 척 외면하고 넘어갔으면 하는 일도 그는 요모조모 따지곤 했다. 일 자체의 절대적 비중이나 중요도에 개의치 않았다. 그는 작은 일은 작은 일대로 큰 일은 큰 일대로 시간과 공력을 투자했다.


도를 넘어선 결례의 질문도 있었다. 정치적인 반대자가 악의를 품고 던지는 질문도 있었다. 그는 슬기롭게 비켜 갔다. 옆에서 지켜보는 참모들의 입장에서도 기분이 상했지만, 그는 잘 참아 내고 있었다. 대통령으로 지낸 지난 5년이 그를 많이 변화시킨 것으로 보였다. 사람이 자리를 만들고 자리는 다시 사람을 만드는 법이었다. 사람과 사람이 만나서 대화를 하면 서로 수렴되어 가듯이, 사람과 자리도 마찬가지였다. 재임 중의 대통령은, 대통령이라는 가장 무거운 자리를 상대적으로 가볍게 만들어 놓았다.


낮은 권력을 추구했다. 권위가 떨어졌다는 비난도 많았지만 대통령은 퇴임하는 날까지도 권위를 추구하지 않았다. 기존의 권위주의에 익숙한 언론들은 대통령의 말과 행동에 대통령으로서의 품격이 없다고 비난을 퍼부었지만 그는 개의치 않았다. 그렇게 아주 높은 곳에만 있었던 대통령이라는 자리와 이미지가, 이 봉하마을에서의 만남처럼 담장 너머 손을 내밀면 만날 수 있는 곳까지 낮아졌다.


그의 모든 이야기가 딱딱한 주제들로만 채워진 것은 물론 아니었다. 때로는 특정한 주제 없이 여러 방면에 걸쳐 주고받기식 대화가 이어지기도 했다. 방문객 중에서도 만만치 않은 입담을 자랑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아이들을 무등 태워 온 한 아버지는 아이에게 도움이 될 좋은 이야기를 들려달라고 청했다. 성공과 출세를 주제로 대답을 하면서도 그는 잔신이 과연 성공한 인생이었는지에 대해 항상 회의하는 모습이었다.


노래를 불러 달라는 요청은 빠지지 않고 이어졌다. "왜 여사님은 나오지 않으시나요?"라는 질문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적당히 회피하거나 질문한 사람이 서운해하지 않도록 얼버무렸다 난처한 질문이나 요청도 많았다. "대통령 한 번 더 하세요!" 하는 말은 농담에 가깝다는 생각에 굳이 답변하지 않았다. 이명박 정부에 대해 거친 비난을 쏟아 내면서 그의 생각을 이야기해 달라는 요구도 있었다. 난감한 표정을 지었지만 그는 끝내 답변하지 않았다. 전직 대통령이 아니라 야당의 정치인 신분으로 머물러 있었다면 아마 신랄한 비판을 쏟아내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사저를 찾아온 손님들을 데리고 나가 방문객들에게 소개하기도 했다. 대체로 참여정부에서 고위직을 지낸 사람들이었다. 봉하의 하루는 그렇게 시작되고 그렇게 저물었다.


2009년 겨울 봄 고난

"반드시 책으로 일가를 이루겠습니다."


그의 새해 포부였다. 퇴임 당시와 비교하면 당면한 포부가 바뀐 셈이었다. 그와 그를 둘러싼 현실이 타협할 수 있는 유일한 지점이었다. 형님의 구속으로 인해 그는 어쩌면 마지막까지 갖고 있었을 많은 꿈과 포부들을 접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그것은 전직 대통령이라는 퇴색한 이미지의 타이틀보다는 시민운동가나 농촌운동가같은 현재진형형의 타이틀을 갖는 꿈일 수도 있었고, 진보의 대표는 바라지 않더라도 그 진영에서 하나의 굳건한 축을 이루는 포부일 수도 있었다. 상대적으로 젊은 나이에 최고 권력자의 자리에서 물러난 대통령에게는 아직 창창한 시간들이 남아 있었다. 남아 있는 그 시간들만큼이나 그에게는 여전히 도모할 수 있는 많은 일들과 다시 뭔가를 이룰 무한한 가능성이 남아 있는 것이 사실이었다.


그러나 형님의 구속을 계기로 상황은 바뀌고 있었다. 그는 이제 자그마한 이 농촌에서 그에게 주어진 많은 시간들을 보낼 수 있는 일거리를 붙잡아야 했다. 집필이 어쩌면 유일한 대안이었다. 미국의 전직 대통령들처럼 세계적인 해비타트 운동이나 인권 운동을 할 수 있는 처지는 아니었다. 활동을 뒷받침해 줄 만한 탄탄한 재단도 없었다. 그런 재단을 만들 수 있는 정치적 상황도 아니었다.


1월도 그렇게 갔다. 한달을 넘기는 일도 예전 같지는 않았다. 얼굴 어딘가에 잔주름이 하나 생기고, 가슴팍에 남모를 시름 하나가 늘어나야 비로소 한 달이 가는 듯했다. 다시 2월이 되고 며칠이 지나지 않았을 무렵, 대통령 내외는 불현 듯 충주에 있는 강금원 회장의 골프장을 찾았다. 봉하 사저 안에서 겨울잠과 같은 침묵의 시간을 보내고 있던 대통령이었다. 외부 출입을 거의 하지 않던 그가 멀리 충주까지 출타를 한 것이었다. 평소 같으면 1박이나 2박을 예정하고 편한 마음으로 찾았을 텐데, 그날따라 특별한 예정을 하지 않은 채 길을 떠난 것이었다.


"갑갑해서 왔습니다. 바람이나 쐴 요량으로요."

늦겨울 찬바람이 대통령의 얼굴에 스치고 있었다. 그 때문인지 표정은 차갑고 쌀쌀해 보였다. 우수가 깃든 표정 같기도 했다. 강금원 회장은 그의 그런 표정에 익숙하지 않았다. 자주 보던 얼굴 표정은 아니었다. 알 듯 말 듯한 그 표정에서 쓸쓸함이 짙게 묻어 나왔다.


"잘 오셨습니다. 아예 며칠 좀 쉬다가 가세요. 집은 며칠 비워도 아무 상관없습니다."

강 회장은 대통령에게 조심스럽게 청했다.

"저희 부부와 운동이나 한번 하시지요. 준비시키겠습니다."

그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렇게 하기 싫다는 의미가 아니라 그렇게 할 수 없다는 뜻으로 보였다.

"강 회장이 지난번 여름휴가 때 이야기했던 골프장 인근의 집터를 한번 구경했으면 해서요."


뜻밖의 이야기였다. 강 회장은 순간적으로 뜨거워지는 눈시울을 감출 수 없었다. 대통령의 그 말은 결국 봉하 사저의 힘겨운 생활에 대한 솔직한 표현에 다름 아니었기 때문이다. 스스로 생각해서 명분이 없다고 판단되는 일은 결코 거들떠보지 않는 것이 대통령의 성격이었다. 힘겨움 한가운데에 와 있는 그의 속내가 비로소 드러나고 있었다. 참모들이나 비서들 앞에서야 여전히 의연한 모습을 보이고 있을 터였지만, 그 속은 어쩌면 이미 숯덩이처럼 검게 타들어 가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강 회장은 대통령을 알고 지내 오는 동안 비슷한 상황을 몇 차례 겪어 보았다. 재임 중 대선 자금 수사로 인해 어려움에 처해 있을 때도 그랬고, 임기 후반에 접어들면서 인사 문제 때문에 당으로부터 집중적인 공격을 받아 상처가 날 때도 그랬다. 그래도 그때는 힘겨워도 퇴로가 있었다. 정말로 대통령 후보 자리에서 물러나거나, 아니면 싸움의 전선에서 물러나면 되는 힘겨움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달랐다. 지금 그에게는 퇴로가 없었다.


"네, 한번 가 보시지요. 잘 생각하셨습니다."

대통령 내외와 강 회장 내외는 골프장 인근의 집터를 둘러보았다. 대통령 내외는 여기저기를 찬찬히 뜯어보며 살폈다. 두 사람 모두 집터를 마음에 들어 하는 모습이었다. 그곳에 공간이 있으면 서울 나들이가 더 편해져서 손자나 손녀들을 더 자주 볼 수 있을 것이었다.


한편으로는 불행이 아닐 수 없었다. 거처를 옮기겠다고 마음을 먹은 것은 물론 아니지만, 퇴임 이후를 지내려고 정해 놓은 터전이 1년도 채 안 된 상황에서 마음에 부담을 주는 공간이 되어버린 현실이었다. 집터를 보러 왔다는 사실 자체가 그 아픈 현실을 말해 주고 있었다. 두 쌍의 내외가 저녁 식사를 마치자 여덟 시가 되었다. 강회장은 일찌감치 클럽하우스의 침실을 정돈해 둘 것을 직원들에게 지시해 놓고 있었다.


"이제 클럽하우스로 올라가서 쉬시지요."

"아닙니다. 오늘 내려가야지요."

"아니, 왜? 무슨 급한 일이라도…."

거듭되는 강 회장의 청에 그는 머뭇거리다가 입을 열었다.

"아닙니다. 그저 다른 곳에서 자기는 마음이 편치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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