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저자 박성철
제주 오현고등학교를 졸업하고서울대학교에서 지리학을 공부하며 우리가 살아가는 공간의 고유성과 보편성을 고민했다. 도시와 환경문제에 대한 관심이 법학으로 이어졌고, 부전공으로법학을 이수하면서 법과 현실의 괴리를 극복하려는 움직임에 마음을 두게 되었다. 사법시험에 합격하고 균형도 꿈도 잃지 않기 위해 현재 같은 대학법과대학원에 진학해 행정법을 연구하고 있다.
■ 차례
프롤로그 - 다수에 의한 헌법, 소수를위한 재판
인권과 기본권 - 인권에 말 걸기
양심 - 버리지 마세요
신체 - 굴욕을넘어 욕망을 담는다
처벌 - 사회를 보호할 수 있을까
영화 - 헌법, 어두운 극장 안으로 들어가다
표현 - 임금님 귀는당나귀 귀
언론 - 언론기관, 그 숙명
집회 - 거리에서
알 권리 - 아는 게 병이라면 나는 좀 아파야겠다
교육 -배우고 익히니 또한 즐겁다
노동 - 굴레를 넘어서
직업 - 밥벌이, 그 이상의 울림
행복 - 당신의 행복은 안녕하십니까
평등 - 평등과 불평등, 쌍곡선의 회비
가족 - 웃음과 눈물이 서려있는 울타리
정당 - 정권을 위해서라면
선거 -민주주의의 꽃 피고 지다
개헌 - 그 이면에 숨은 암투
에필로그 - "합헌의 이치, 위헌의 논리"를 넘어
부록1 헌법재판소로 가는길
부록2 사건번호
부록3 대한민국헌법
헌법줄게 새법다오
인권과 기본권_ 인권에 말 걸기
기본권, 인권과 어떻게 구별될까
신문과 방송에도 자주 오르내리는 인권이라는 말이 우리에게 낯선 것은 아니다. 그렇다면 헌법재판소 결정문에는 인권이란 단어가 얼마나 자주 등장할까. 사실 기대와 달리 실제 결정문에서는 인권이라는 단어를 찾아보기 힘들다. 같은 문맥에서 인권 대신 기본권이라는 용어를 쓰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기본권은 인권과 어떻게 구별될까. 인권은 ‘인간’의 자연적 권리라는 점에서 법학뿐만 아니라 철학, 사회학에서도 널리 쓰인다. 반면 기본권은 천부인권사상이 한 국가의 헌법체계 안으로 들어가 헌법적 가치를 가진 것을 의미한다. ‘국민’으로서의 자유와 권리를 포괄하는 용어이기 때문에 주로 법 영역에서 쓰인다.
기본권은 “자연권사상에 바탕을 둔 천부인권론에 기초해 헌법에서 보장하고 있는 일련의 자유와 권리에 관한 규범적 이해의 체계”라고 압축해 정의할 수 있다. 인간의 권리와 시민의 권리를 동시에 담은 것이다. 우리 학계와 헌법재판소 결정문에서도 이런 의미에서 기본권이라는 말을 사용하고 있다. 엄격한 의미에서 인권과 기본권은 완전히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인권은 자연법상의 권리이지만 기본권은 실정법상의 권리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의미에서 큰 차이는 없으므로 헌법재판소 결정문을 읽으면서 기본권이란 용어가 금방 와 닿지 않으면 인권의 의미로 받아들여도 된다.
‘기본권’이라는 용어는 그 개념이 서구에서 수입된 탓에 더욱 낯선 면이 있다. 서구 시민혁명의 공으로 인간의 존엄성이 법제화된 것은 맞지만 우리에게 사람을 귀하게 여겨야 한다는 생각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어떤 권력자라도 인간존엄성을 함부로 해할 수 없다는 홍익인간 정신과 인내천 사상은 우리 역사 속에도 엄연히 존재했다. 우리 선조의 철학에서 인권을 재발견해나간다면 이 질감을 줄여갈 수 있지 않을까. 헌법재판소는 「신행정수도의 건설을 위한 특별조치법」이 헌법에 위반된다고 결정(2004.10.21)하면서 경국대전을 언급하며 관습헌법을 내세웠다. 그 결론이 타당한지는 논외로 하고 우리 역사에서 헌법사항을 끌어내려는 노력 자체는 의미가 있었다. 앞으로는 국가정책을 박제로 만들 때뿐만 아니라 미미한 한 인간의 인권을 보호하는 데도 우리 사조 속에서 실마리를 찾아야 할 것이다. 헌법 제37조 제1항의 “국민의 자유와 권리는 헌법에 열거되지 아니한 이유로 경시되지 아니한다”는 정신에도 부합하는 길이다.
기본권, ‘제한’과 ‘침해’ 사이
헌법재판소 결정문 다수는 기본권의 제한과 침해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 국가권력이 기본권을 제한할 수는 있지만 한계를 넘을 수는 없기 때문이다. 선을 넘으면 침해가 되어 위헌이다. 입법, 행정, 사법 등 국가가 제한의 한계를 넘어 기본권을 침해했는지를 판단하는 일은 헌법소송의 전부에 가깝다. 기본권을 어떤 경우 제한할 수 있는지, 제한할 때 어떤 한계를 지켜야 하는지를 이해하는 데 핵심적인 조항은 헌법 제37조 제2항이다. “국민의 모든 자유와 권리는 국가안전보장?질서유지 또는 공공복리를 위하여 필요한 경우에 한하여 법률로써 제한할 수 있으며, 제한하는 경우에도 자유와 권리의 본질적 내용을 침해할 수 없다”는 규정을 말한다. 헌법재판소도 이 조항이 기본권을 제한하는 데 근거가 되는 규정이라고 한다. 동시에 이 조항은 기본권 제한의 한계를 설정하는 규정이기도 하다. 한계를 하나라도 넘으면 위헌이 되는 것이다. 우선 국가안전보장?질서유지?공공복리라는 목적상 한계를 제시하는데 모두 개인보다는 집단의 이익을 위한 경우다. 좀 더 자세히 살펴보면 ‘질서유지’와 ‘공공복리’는 국가를 전제로 한 개념이 아니지만 ‘국가안전보장’은 앞서 언급한 두 가지 목적에 비해 다소 이질적인 느낌이 든다. 사실 국가안전보장이라는 문구는 1972년 유신헌법에서 추가되었다. 건국 헌법부터 제3공화국 헌법까지는 질서유지와 공공복리 항목만 있었는데 유신헌법 제정 당시 추가되어 지금까지 이어진 것이다. 개헌 논의가 있을 때 이를 남겨두어야 할지 고민해볼 필요가 있다.
다음으로 ‘법률로써’ 라는 문구를 살펴보자. 정당한 목적에 따라 기본권을 제한할 때도 반드시 법률에 근거해야 한다는 뜻이다. 사실 더욱 중요한 핵심은 “필요한 경우에 한하여”라는 지나치기 쉬운 문구에 있다.
“필요한 경우에 한하여”라는 구문은 과잉금지원칙 또는 비례의 원칙으로 설명할 수 있다. 대부분의 헌법재판소 결정은 결국 법률에 근거한 기본권 제한 방법이 과잉금지원칙을 위반했는지 판단하는 것이다.
과잉금지원칙이란, 국민의 기본권을 제한하는 법률은 목적이 정당해야 하고, 수단이 적합해야 하며, 기본권을 제한 당하는 자의 피해를 최소화해야 하며, 기본권을 제한함으로써 얻을 수 있는 공익이 제한되는 사익보다 크거나 균형을 유지해야 한다는 원칙이다. 목적의 정당성, 수단의 적합성, 피해의 최소성, 법익의 균형성이라는 네 가지 기준으로 구성되며, 과잉금지원칙은 모든 국가작용을 포괄하는 지도 원리이자 기본권을 제한하기 전에 신중하게 고려하도록 하는 기준이다. 또한 이 원리는 실제 사건에서 구체화될 때 비로소 그 힘을 발휘한다.
영화_ 헌법, 어두운 극장 안으로 들어가다
스크린 쿼터제, 삼중주 울릴까 - 한국영화 의무상영제 사건 1995.07.21
영화는 예술이면서 산업이다. 스크린쿼터제를 둘러싼 딜레마는 여기서 싹트는데, 문화의 논리와 자본의 논리가 팽팽하게 맞서게 된다. 여기에 분위기를 깨며 나타나는 것이 법 논리다. 한국영화 의무상영제가 법률로 규정되어 있고, 이 조항의 위헌 여부가 다투어지는 상황이라, 엉뚱한 등장은 아니다. 다만 불협화음이 더 커질 수 있다. 어울릴 것 같지 않은 문화, 경제, 법 논리가 삼중주의 하모니를 들려줄 수 있는지가 이번 사건의 감상 포인트다. 사건의 시작은 다소 작위적이다. 한 극장 경영자가 국산영화를 연간 상영일수의 5분의 2 이상 상영해야 한다는 법 규정은 국산영화 상영을 강요하는 것이며 직업의 자유를 침해하는 것과 같다는 이유로 헌법소원을 청구했다. 스크린쿼터제가 함축하는 다면적 문제 상황에 비해 헌법재판소의 결정문은 허망할 만큼 단조로웠다. 결론은 기각이었다.
스크린쿼터제는 합헌이라는 뜻이다. 1995년 7월21일이 선고일자인데, 스크린쿼터제 존폐 여부 논란이 극심했던 시기에 스크린쿼터제가 존재할 수 있는 헌법적 근거를 마련했다는 점에서 의미있는 결정이었다. 스크린쿼터제도는 도입된 이후 끊임없이 폐지 혹은 축소 논란에 시달려왔는데, 이때마다 당시의 헌법재판소 결정은 이 제도의 유지를 주장하는 이들의 강력한 논거가 되었다. 하지만 논리 전개에는 다소 아쉬운 측면이 있다. 문화 논리, 경제 논리, 법 논리가 결정문에 녹아 있기는 하지만, 세 논리의 축이 어떻게 융합될 수 있는지 그 조화를 이룰 방법에 대해서 침묵했다는 점은 불만스럽다.
우리 헌법이 지향하는 문화국가원리와 관련된 담론을 명료하게 밝히지 않은 점이 특히 그렇다. 물론 헌법재판소는 청구인의 주장을 중심으로 판단할 뿐 학자처럼 세세히 논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영화 관련 사건을 다루면서 예술과 문화에 연관된 우리 헌법상 원리를 제시했다면, 영화가 헌법상 어떻게 위치하는지 정립할 수 있는 이정표를 보여줄 수 있었을 것이다. 영화는 기본적으로 예술작품이기 때문에 개성이 존중돼야 한다. 다문화를 보존하는 것은 시장과 자본의 논리로 설명될 수 없는 독자성이 있다. 그런데도 헌법재판소는 문화적 관점을 별개로 논하지 않았다. 그저 직업의 자유를 침해하는 것이 아닌지, 헌법상 경제질서에 위배되지 않는지만을 말하고 있다.
☞ 영화의 제작은 많은 자본과 시간과 노력이 소요되는 것이지만 그 흥행 여부는 사전에 예측할 수 없고, 예측이 가능하다 하더라도 그 예측이 반드시 실제와 부합하는 것은 아니므로 개봉관의 확보 여부는 영화 제작의 사활 문제라 할 수 있다. 따라서 이 사건 국산영화 의무상영제는 질과 양에 있어서 압도적 우위에 있는 외국영화의 홍수 속에서 국산영화로 하여금 상영의 기회를 가질 수 있게 하여 주는 것으로서 국산영화의 제작과 상영의 기회를 보장하는 가장 효과적이고 적정한 방법이라고 아니할 수 없다.
직업의 자유 침해를 판단하면서, 과잉금지원칙의 요건 중 ‘수단의 적합성’에 대해 말하고 있는 부분이다. 헌법재판소의 이런 판단은 때로 분쟁을 낳기도 한다. 위와 같은 논리에 의한다면 한국영화 시장점유율이 높아졌을 때 스크린쿼터제를 폐지해도 무관하지 않느냐는 반론이 제기될 수 있는 것이다.
이런 공세와 반박은 스크린쿼터제를 바라보는 시각의 차이에서 출발한다. 이 제도가 한국영화를 육성하기 위한 육성책이냐, 보호하기 위한 방어막이냐의 차이다. 언젠가 텔레비전 토론 프로그램에 나온 배우 박중훈은 영화배급 시스템을 설명하면서 “스크린쿼터제를 이제 없애자는 것은 신호등을 잘 지키니 없애자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말했다. 스크린쿼터제를 방어막으로 본 것이다. 반면 시장의 논리를 강조하는 입장은 태도가 다르다. 그들은 대개 이 제도를 시한부 육성책으로 본다. 한국영화 기반이 너무 취약해 제대로 된 경쟁을 하기 힘들기 때문에 경쟁의 출발선에 설 수 있도록 도와주는 제도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제는 힘을 길렀으니 그만 젖을 떼야 하지 않겠냐고 다그친다.
앞서 인용한 직업의 자유와 관련된 판시만 본다면, 한국영화가 중흥기를 구가하고 있는 시점에는 더 이상 스크린쿼터제는 존속할 이유가 없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헌법상 경제질서와 관련해 설명한 부분을 보면 꼭 그렇지만은 않다.
☞ 헌법 제119조 제2항의 규정은 대한민국의 경제질서가 개인과 기업의 창의를 존중함을 기본으로 하도록 하고 있으나, 그것이 자유방임적 시장경제질서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입법자가 외국영화에 의한 국내 영화시장의 독점이 초래되고, 국내 영화의 제작업은 황폐하여진 상태에서 외국영화의 수입업과 이를 상영하는 소비시장만이 과도히 비대하여질 우려가 있다는 판단 하에서, 이를 방지하고 균형있는 영화산업의 발전을 위하여 국산영화 의무상영제를 둔 것이므로, 이를 들어 헌법상 경제질서에 반한다고는 볼 수 없다.
헌법재판소는 경제적 관점에 치중하면서 ‘독점’을 방지한다는 취지를 명확히 했다. 이를 문화의 눈으로 치환한다면 다양성 보존이라고 말할 수 있다. 생물의 종 다양성이 생존의 문제인 것과 같이, 문화에 있어서도 다양성의 보장은 삶의 영속과 번영에 직결되는 과제다. 헌법재판소는 직업의 자유와 경제질서를 주요 의제로 다루면서, 문화와 시장이 접하는 단면을 잠시 언급했다. 행복추구권이 침해되었다는 주장을 살피면서는 경제적 관점만을 감안한 것이다. 행복을 추구한다고 해서 공동체의 이익과 무관하게 제한 없는 사적 경제이익을 추구할 수는 없다고 말한다.
집회 - 거리에서
집회의 자유가 보장하는 것들
집회의 자유는 집회 시간, 장소, 방법과 목적을 스스로 결정할 권리를 보장한다. 집회의 준비 및 조직, 지휘, 참가, 집회장소?시간을 선택하는 것도 집회의 자유로 보호된다. 헌법이 명시적으로 밝히고 있지는 않으나 집회의 자유에 의해 보호되는 것은 물론 비폭력적 집회이다. 평화적 방법을 이용한 의견표명은 보장되지만 폭력을 통해 의견을 강요하는 행위는 보호될 수 없다. 폭력으로 상대를 굴복시킬 수는 있어도 결코 설득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집회의 자유는 개인이 집회에 참가하는 것을 방해하거나 또는 집회에 참가할 것을 강요하는 국가행위를 허용하지 않는 것도 포함된다. 예컨대 집회 장소로부터 귀가하는 것을 방해하거나, 집회 참가자를 검문하는 방식으로 시간을 지연시켜 집회 장소 접근을 막거나, 국가가 개인의 집회 참가 행위를 감시하고 그에 관한 정보를 수집해 집회에 참가하려는 사람이 미리 참가를 포기하도록 의지를 악화시키는 것과 같은 집회의 자유 행사에 영향을 미치는 모든 조치를 배격한다.
이 사건에서 중요한 쟁점은 집회 장소를 둘러싼 논의다. 집회의 장소를 정하는 것도 물론 집회의 자유로 보호된다. 집회 공간은 때로 그 자체로 핵심적인 메시지가 되기도 한다. 헌법재판소는 이 점에 대해서도 상세히 설명했다.
☞ 집회 장소는 특별한 상징적 의미를 가진다. 특정 장소가 시위의 목적과 특별한 연관성이 있기 때문에 시위 장소로서 선택되는 경우가 빈번하다. 일반적으로 시위를 통하여 반대하고자 하는 대상물이 위치하거나(예컨대 핵 발전소, 쓰레기 소각장 등 혐오시설) 또는 시위의 계기를 제공한 사건이 발생한 장소(예컨대 문제의 결정을 내린 국가기관 청사)에서 시위를 통한 의견표명이 이루어진다.
예컨대 여성차별적 법안에 대하여 항의하는 시민단체의 시위는 상가나 주택가에서 이루어지는 경우 큰 효과를 기대할 수 없는 반면, 국회의사당 앞에서 이루어지는 경우에는 시위 효과의 극대화를 노릴 수 있다. 즉 집회의 목적?내용과 집회의 장소는 일반적으로 밀접한 내적인 연관관계에 있기 때문에, 집회의 장소에 대한 선택이 집회의 성과를 결정짓는 경우가 적지 않은 것이다.
집회가 국가권력에 의하여 세인의 주목을 받지 못하는 장소나 집회에서 표명되는 의견에 대하여 아무도 귀기울이지 않는 장소로 추방된다면, 기본권의 보호가 사실상 그 효력을 잃게 된다는 점에서도 집회의 자유에 있어서 장소의 중요성은 뚜렷하게 드러난다.
집회 장소가 바로 집회의 목적과 효과에 대하여 중요한 의미를 가지기 때문에, 누구나 ‘어떤 장소에서’ 자신이 계획한 집회를 할 것인가를 원칙적으로 자유롭게 결정할 수 있어야만 집회의 자유가 비로소 효과적으로 보장되는 것이다. 따라서 집회의 자유는 다른 법익의 보호를 위하여 정당화되지 않는 한, 집회 장소를 항의의 대상으로부터 분리시키는 것을 금지한다.
그런데 이 사건의 법률조항은 대사관 경계지점으로부터 1백 미터 이내의 장소에서는 모든 옥외집회와 시위를 전면적으로 금지하고 있다. 집회금지 구역을 규정함으로써 집회의 자유를 제한하고 있는 것이다. 개별적?구체적인 위험상황과 관계없이 단지 특정한 장소에서 집회가 열린다는 이유만으로 그 장소에서의 집회를 일괄적으로 금지했다.
입법자는 외교기관 근처에서 이루어지는 집회를 외교기관의 기능 수행을 방해하는 것으로 간주해, 이 지역에서의 집회를 금지해야만 외교기관을 효과적으로 보호할 수 있다고 판단했다. 그러나 헌법재판소는 해당 조항이 최소침해의 원칙에 위배되어 과잉금지원칙에 반한다고 보았다. 물론 헌법재판소도 입법자가 ‘외교기관 인근에서의 집회의 경우에는 일반적으로 고도의 법익충돌 위험이 있다’는 예측판단을 전제로 집회를 금지할 수는 있다고 보았다. 다만 과도한 기본권 제한 가능성이 완화될 수 있도록 예외조항을 두어야 한다고 지적했다.
집시법은 위험상황이 구체적으로 존재하지 않는 경우에도 이를 예외없이 금지하고 있었다. 예외를 둘 수 있는데도 게을리 한 법은 집회의 자유를 과도하게 침해하는 위헌적인 규정이라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가족 -웃음과 눈물이 서려있는 울타리
아빠 성만 따르라고? - 민법 제781조 제1항 위헌제청 사건 2005.12.22
호주제는 서류상 문제되는 등록제도라서 법률적으로 문제되기 전에는 피부에 와 닿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매일 부르는 성과 관련된 이번 사건은 훨씬 민감한 문제다. 헌법재판소는 민법 제781조 제1항 본문 중 “자(子)는 부(父)의 성(姓)과 본(本)을 따르고” 부분이 헌법에 위반된다며 헌법불합치 결정을 내렸다. 불합치 의견은 다시 두 갈래로 나뉜다. 이번 사건에서는 같은 배를 탔지만 언젠가는 정면으로 충돌하게 될 의견이다.
5인의 재판관은 아버지 성을 따르는 것을 원칙으로 하는 점에는 하자가 없다고 보았다. 어차피 양계 혈통을 모두 성으로 반영하기는 곤란한 점, 성을 정하는 문제가 개인의 구체적인 권리의무에 영향을 미치지는 않는 점 등을 감안할 때 부성주의를 원칙으로 규정한 것은 입법 형성의 한계를 벗어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다만 예외적인 경우에서도 아버지의 성을 강제하는 점이 문제라고 보았다. 가령 태어나서 자식에게 성을 부여할 당시 아버지가 이미 사망했거나 부모가 이혼해 어머니가 단독으로 아이를 양육할 수밖에 없는 경우를 말한다. 이런 경우에도 일방적으로 아버지 성을 사용할 것을 강제하며 어머니 성을 사용할 수 없도록 하는 것은 개인의 존엄과 양성평등을 침해한다고 보았다. 또한 입양이나 재혼과 같이 가족관계가 변동되거나 새로운 가족관계가 형성될 때도 양부 또는 계부의 성으로 변경할 수 없게 하고, 친아버지 성을 사용하도록 강요하는 것이 개인의 인격권을 침해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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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외를 두지 않은 것이 잘못이라고 했을 뿐 원칙적으로 아버지 성을 쓰는 데는 흠이 없다는 것이다. 아버지 성을 쓰는 경우 한쪽 혈통만이 성으로 표현되는 문제점이 있지만 이는 어머니의 성을 따라 정하는 경우에도 마찬가지로 생기는 문제라고 했다. 양성을 모두 쓰게 되면 세대를 거치면서 성은 끝없이 길어져 개인을 특정하는 기호로는 적합하지 않게 된다고 말한다. 개인이 부모의 성을 결합해 사용하되 그 자녀에게 성을 물려줄 때는 부모의 성 가운데 어느 하나를 선택해 물려준다고 해도 어떤 기준에 의해 선택할 것인지의 문제가 남는다고 했다. 또한 그렇게 되면 자녀와 부모 등 종적 혈연집단, 횡적 혈연집단 구성원 간에 각자 다른 성을 사용하게 되는 경우가 많아 성의 상징 기능 자체가 약화될 것이라고 지적했다. 다수 의견은 극히 예외적인 경우를 상정하여 헌법불합치 의견을 냈을 뿐이다.
(본 정보는 도서의 일부 내용으로만 구성되어 있으며, 보다 많은 정보와 지식은 반드시 책을 참조하셔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