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 스캔들

저   자
신명호
출판사
생각정거장
가   격
17,000원(380쪽)
출판일
2016년 10월






조선왕조 스캔들


잘못된 길에 발을 들인 군주들

기록 문화의 지평을 넓힌 정조, 역사 기록을 왜곡하다

조선 시대 기록 문화라는 측면에서 볼 때, 정조는 특이한 존재였다. 정조는 세손 시절부터 스스로 『존현각일기』라고 하는 개인 일기를 작성했고, 즉위 후에는 그것을 『일성록』으로 발전시켰다. 이는 기록의 객체였던 국왕을 기록의 주체로 만든 획기적인 사건이었다. 정조는 기록의 주체로서 기념비적인 기록 문화를 여럿 남겼다. 앞의 『존현각일기』와 『일성록』을 위시하여, 조선 왕실의 대표 의궤인 『원행을묘정리의궤』, 조선 국왕 문집의 대표작인 『홍재전서』 등이 그것이었다.


정조가 기록의 주체성을 강조하게 된 이유는 세손 시절 정치적 불안 상황에서 생존을 위해 쓰기 시작한 일기 습관이 결정적이었다. 이런 경험으로 정조는 조선 시대 그 어느 국왕보다도 기록의 주체성, 정치성, 실천성을 강조했다. 이 같은 정조의 태도는 일장일단을 가졌다. 정조는 정치적으로 불리한 기록은 말살하기도 하고 개작하기도 함으로써 『승정원일기』 같은 공식 기록의 권위와 신뢰성을 크게 약화시켰다는 면에서 기록 문화에 부정적인 영향을 끼쳤다.


반면 실천적 목적을 위해 개인 일기를 작성하고 그것을 발전시킴으로써 조선 시대 기록 문화의 지평을 넓혔다는 면에서는 대단히 긍정적이었다. 예컨대 혜경궁 홍씨의 회갑과 사도세자의 구갑을 기념하여 거행된 을묘년(1795년, 정조 19년)의 현륭원 행차는 정조에게 그 무엇보다 중요한 실천적 행사였다. 그러므로 이 행사의 전말을 기록한 『원행을묘정리의궤』에는 기록의 실천적 측면을 강조하는 정조의 기록 정신이 집대성됐다고 할 수 있으며, 그 같은 기록 정신에서 조선 시대를 대표하는 의궤가 탄생할 수 있었다. 좌측 의궤도는 정조의 부친 사도세자의 묘가 있는 수원으로 행차하는 장면을 그린 『화성원행의궤도』인데, 보존 상태가 좋아 의궤의 예시로 소개한다.


왕실 기록의 측면에서 정조의 개인적 입장 또는 정치적 측면이 강조되면 그 반대의 상황이 나타나곤 했다. 사도세자의 아들로 태어난 정조는 8살 때 왕세손에 책봉됐다. 이후 23살 때 대리청정을 함으로써 정치적 실권까지 장악하고 24살 때 즉위, 재위 24년 만인 1800년에 49세의 나이로 승하했다. 이 같은 정조의 49년 인생에서 크나큰 분수령은 역시 8살 때의 왕세손 책봉과 24살 때의 국왕 즉위였다. 특히 정조의 인생에서 결정적인 분수령이 되는 왕세손 책봉과 국왕 즉위 사이에 존재하는 17년 동안은 차기 왕으로서의 준비 기간임과 동시에 정조의 즉위를 방해하던 인사들과의 갈등 기간이기도 했다. 이 시기에 정조는 개인 일기를 쓰는 습관이 들었는데, 이 습관이 정조의 기록 정신에 큰 영향을 끼쳤다.


정조에 의해 벌어진 『승정원일기』의 기록 말살

영조는 신료들이 자신의 본심을 모른 채 세손의 대리청정을 계속 반대하자 드디어 12월 7일 공식적으로 대리청정을 명령했다. 그로부터 4일 후인 12월 11일에 정조는 동부승지 박상건을 시켜 11월 20일자 『승정원일기』를 전부 읽게 했다. 그런데 영조의 대리청정 명령 부분이 완전히 빠져 있었다. 당시 『승정원일기』의 기록을 담당한 관리인 가주서의 이름은 박상집이었다. 의심이 든 세손은 "그때 사관으로 참석했던 자가 있는가?"하고 물었다. 그러자 11월 20일에 박상집과 함께 입시했던 기사관 성정진이 나서서 "대신이 삼불필지등의 설로 대답하는 것을 신이 들었습니다"라고 대답했다. 이를 근거로 정조는 박상집에게 삼불필지의 내용을 『승정원일기』에 써 넣으라고 강요했다.


하지만 박상집 자신은 그런 말을 들은 적이 없다고 주장하며 『승정원일기』 개작을 거부했다. 현재 상황에서 누구 말이 맞는지 전혀 알 수 없지만 당시 박상집은 체포되어 문초를 받았고 『승정원일기』에는 홍인한이 "동궁은 노론이나 소론을 알 필요가 없고, 이판이나 병판도 알 필요가 없으며, 더더욱 조정의 일은 알 필요가 없습니다"라는 삼불필지 발언을 한 것으로 기록됐다.


이렇게 정조의 강요로 개작된 『승정원일기』의 내용이 진실인지 아닌지는 전혀 알 수 없다. 왜냐하면 정조는 그날의 대화를 자신이 직접 들었다고 주장했지만, 정작 11월 20일자의 『존현각일기』에는 그날의 대화 내용을 생략하고 개작된 『승정원일기』에 기록만을 수록했기 때문이다. 그 이유를 정조는 "『승정원일기』에 기록하지 않은 것을 내가 들은 것만으로 기록한다면 신중히 처신하는 도리가 아니므로 『승정원일기』의 기록만을 따른다"라고 했다.


하지만 이를 액면 그대로 믿을 수 있을까? 정조는 박상집을 강합하여 『승정원일기』를 개작하게 하고는 그 개작의 근거가 되는 자신의 개인 전문과 개인 일기는 삭제했는데, 그 이유는 정조의 해명 때문일 수도 있지만 아닐 수도 있기 때문이다. 현재의 입장에서 무조건 정조는 정직하고 박상집은 정직하지 않다고 판단할 수는 없다. 분명한 사실은 당시에 정조가 박상집을 강합하여 『승정원일기』의 기록을 자신이 원하는 내용으로 개작하게 했다는 것이다.


이에서 나아가 정조는 즉위 후에 자신의 개인 일기를 공적인 기록인 『일성록』으로 확대시킴으로써 자신의 개인 일기의 권위와 신뢰는 높이고 『승정원일기』의 권위와 신뢰는 추락시켰다. 뿐만 아니라 정조는 자신에게 불리한 『승정원일기』의 기록을 무수하게 말살했다. 정조의 기록 말살은 주로 사도세자와 관련된 내용이었다. 예컨대 사도세자가 폐서인되던 당일의 『승정원일기』 기록이 그런 사례였다. 정조는 이런 명분으로 『승정원일기』의 기록 말살을 요구했다.


『승정원일기』로 말하면 그때의 사실이 모두 실려 있기에 모르는 사람이 없고 못 본 사람이 없으며, 본 자는 전하고 들은 자는 의논하여 세상에 퍼지고, 사람들의 이목을 더럽히니 신의 사사로운 마음이 애통하여 거의 곤궁한 사람이 돌아갈 데가 없는 것과 같습니다. (중략) 『승정원일기』가 없으면 임오년(영조 38년, 1762년)에 사도세자를 뒤주에 가둔 처분에 대해 진실을 밝힐 수 없을 것이라 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대체로 국가의 전례와 고사는 모두 서책에 실려 있으며 쇠 상자와 돌집에 넣어 명산에 감추어 천추만대가 지나도 옮길 수 없게 했습니다. 그러나 『승정원일기』를 어디에 쓰겠습니까? 아! 『승정원일기』를 그대로 두고 안 두고는 전하의 처분에 달려 있습니다. 다만 신이 스스로 할 수 있는 처신은 오직 세자의 지위를 사양하고 죽을 때까지 숨어 살면서 다만 하루에 세 번 삼가 문안드리는 직분을 닦는 일뿐일 것입니다.

『영조 실록』 권127, 1776년(영조 52년) 2월 4일


정조, 게으름과 욕심에 빠져 역사의 죄인이 되다

정조는 만약 자신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으면 세손에서 사퇴하겠다는 배수진을 치면서까지 『승정원일기』의 임오년 처분 기사 삭제를 요구했다. 이런 요청을 받은 조는 결국 『승정원일기』 임오년 처분 기사를 삭제하도록 했다. 만약에 정조가 『승정원일기』 기록 자체에 대한 존중심이 있었다면 삭제 요구를 하지 않았을 것이다. 정조는 『승정원일기』가 단순한 역사 기록이 아니라 승정원의 업무와 관련된 기록이므로 정치적 측면이 중요하다고 생각했고, 그런 판단에서 『승정원일기』의 임오년 기사는 정치적으로나 실천적으로 유용하기 보다는 혼란만 부추기므로 삭제해야 한다고 요구했던 것이다. 그래서 『승정원일기』를 개작하고 말살한 정조는 짧게 보면 승자라고 할 수 있으나 길게 보면 역사의 죄인이자 패배자라 할 수 있다.


『대학연의』 중에 '요순우탕문무지학'이 들어있는데, 그중에 무왕의 이야기가 실려 있다. 은나라를 멸망시킨 무왕은 즉위한 지 이틀째에 스승 강태공을 불러 황제와 전욱의 도에 대해 물었다. 그러자 강태공은 그들의 도는 단서에 있다고 했다. 단서란 문왕의 침실 출입문에 붉은 새가 날아와 놓고 갔다고 하는 글이었다. 강태공은 그 단서를 보고 싶다면 3일간 목욕재계하라고 요구했다. 3일간 목욕재계를 끝낸 무왕이 받아본 단서에는 '공경하는 마음이 게으른 마음을 이기는 자는 길하고, 게으른 마음이 공경하는 마음을 이기는 자는 멸하며, 의로운 마음이 욕심을 이기는 자는 오래가고, 욕심이 의로운 마음을 이기는 자는 오래가지 못한다'라는 내용이 들어 있었다. 하늘에 대해, 세상에 대해 그리고 역사에 대해 진정 공경하는 마음과 의로운 마음이 없다면 결국 패망의 천벌을 받을 것이라고 경고했다. 그럼에도 게으른 마음과 욕심에 빠져 역사를 왜곡하고 말살하려는 일들이 고금에 적지 않으니 두려운 일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왕과 세자, 그 지독한 부자의 악연

영조의 금주령, 사도세자를 죽음으로 내몰다

정조가 지은 『『행록行錄 』에 의하면 영조는 길을 걷다 개미들이 있으면 밟지 않고 피해 갈 정도로 마음이 여렸다고 한다. 영조 역시 "내가 일찍이 차마 미물들을 밟지 못해 개미같이 하찮은 것 역시 밟지 않았고, 밤 등불에 나방이 달려들면 손으로 휘저었다"고 회상했다. 그런 영조는 감정이 복받치면 펑펑 울기도 했으며, 감정대로 행동하다 나중에 한없이 후회하기도 했다. 그런데 영조는 마음이 여린 반면 체면을 아주 중요시했다. 그런 영조인지라 주변 사람들의 시선과 평가에 민감하게 반응하곤 했다. 이 같은 여린 마음과 체면 중시를 빼놓고 영조의 치세 50여 년을 제대로 이해하기는 불가능하다.


예컨대 사도세자를 뒤주에 가두어 죽인 사건을 생각해보자. 조선 500년 동안 왕실에서는 갖가지 사건들이 일어났다. 그중에서도 뒤주 사건은 조선 왕실 최대의 비극이며 스캔들이라 할만하다. 어떻게 아버지가 아들을 뒤주에 가두어 죽일 수 있었는지, 그것도 무더운 여름날 8일이나 굶겨서 죽일 수 있었는지 도무지 놀라울 뿐이다. 이런 놀라운 스캔들 이면에는 영조의 여린 마음과 체면 중시가 있었다. 이는 영조의 치세 50년을 관통했던 3대 국정 지표 중 하나인 '계숭음'(음주를 경계한다)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조선 시대 국왕은 공식적으로 선왕의 3년 국상이 끝난 후부터 명실상부하게 자신의 정치 노선이나 정책을 드러낼 수 있었다. 부모가 돌아가시면 최소한 삼년상 동안은 부모의 가르침을 따라야 한다는 유교의 가르침 때문이었다. 조선의 21대 국왕이었던 영조 역시 다르지 않았다.


금주령, 사도세자와 영조의 갈등을 증폭시키다

엄격한 금주령이 발효되던 1756년(영조 32년)은 대리청정 중이던 사도세자와 영조 사이에 갈등이 본격화되던 시점이기도 했다. 그 시점에서 금주령은 영조와 사도세자 사이의 갈등을 더욱 악화시키는 역할을 했으며, 그럴수록 영조는 금주령 위반자에 대해 점점 더 엄한 처벌 규정을 내놓았다. 바로 이런 모습에서 체면을 중시하는 영조의 모습을 읽어낼 수 있다. 그 결과 영조와 사도세자의 관계가 또다시 악화되는 악순환이 반복됐다.


영조가 1755(영조 31년) 9월 8일에 엄격한 금주령을 공포하던 당시 사도세자는 21세였다. 『한중록』에 의하면 사도세자는 주량이 적었다고 한다. 또한 사도세자 스스로도 술의 폐단에 대해 잘 알았다. 예컨대 사도세자가 쓴 『계주만필』에는 '관혼상제는 선왕의 법이니, 공경히 현주를 쓰면 신령이 통한다네. 내가 들으니 우임금은 성인인데, 한번 순주를 마시고 의적을 멀리했다네. 의적이 떠난 지 3천 년, 그 사이에 화란이 없을 때가 없었네(하략)'라는 내용이 있다. 이런 내용은 기본적으로 영조의 금주 정책과 일치한다.


이런 점에서 볼 때, 영조의 엄격한 금주령이 사도세자에게 문제가 되지 않았을 듯도 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았다. 영조의 엄격한 금주령이 발효된 지 만 4개월째인 1752년(영조 32년) 5월 2일 오후 4시쯤, 왕은 숭문당에서 조정 중신들을 접견했다. 숭문당은 영조가 거처하는 환경전과 사도세자가 공부하는 낙선당의 중간쯤에 위치한 건물이었다. 영조는 이곳에서 신료들을 접견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런데 영조는 숭문당에서의 접견이 끝나자 낙선당으로 행차했다. 사도세자의 근황이 궁금해서 간 것인데 『승정원일기』에는 둘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기록되어 있지 않다. 다만 낙선당에 갔던 영조가 환관 신치하와 궁녀 해정을 유배하라 명령한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신치하는 "보고할 때 두서가 없었다"는 것과 해정은 "금주하는 때에 대궐 안에서 술을 빚었는데 물을 때 거짓말하며 사실대로 답하지 않았다"는 것이 이유였다. 낙선당에 간 영조가 사도세자와 관련해서 무엇인가를 물었는데 신치하와 해정이 명쾌하게 답하지 못했던 것이다.


이어 밤 3경에 사도세자가 낙선당에서 조정 중신들과 춘방관들을 만났고 뒤이어 그곳에서 화재가 발생했다. 이때 사도세자와 조정 중신들 간에 오고간 대화가 『승정원일기』에는 삭제되어 있다. 『승정원일기』에는 '병신년(1776년, 영조 52년)의 하교로 말미암아 세초했다'고 기록되어 있을 뿐이다. 병신년의 하교란 당시 세손이던 정조가 '『승정원일기』의 내용 중에서 사도세자를 뒤주에 가두어 죽게 한 사건과 관련 있는 내용들을 삭제할 것'을 요청하자 영조가 허락한 하교였다. 따라서 이날 사도세자와 조정 중신들 사이에 오고 간 대화는 '사도세자를 뒤주에 가두어 죽게 한 사건'과 밀접한 관련을 갖고 있었다고 하겠다.


불신과 불통이 부른 부자간의 비극

돌아보면 영조의 엄격한 금주령은 근본적으로 여린 마음에서 시작됐다. 그런 금주령이 사도세자와의 관계를 악화시키고 뒤주 사건으로까지 치달은 이유는 불신과 불통 때문이었다. 아무리 좋은 취지의 정책이라도 신뢰와 소통이 없다면 비극을 벗어나기 어렵다는 역사적 교훈이라 할 것이다. 이와 관련된 가르침을 『대학연의』에서 찾아본다면 '찰민정이라 할 수 있겠다. 국가 정책이 실제 백성들에게 약이 되는지 아니면 독이 되는지를 통치자의 입장이 아닌 백성의 입장에서 살펴보는 것이 '찰민정'이고, 그래서 '찰민정'을 제대로 하기 위해서는 백성의 입장을 하늘에 입장으로 공경하는 소통정신이 필요하다. 그러나 역사상 위대한 통치자 중에도 '찰민정'을 내세우며 불통의 늪에 빠진 경우가 비일비재하니 슬픈 일이다.



궁중 여인들의 기막힌 일생

사랑과 관심에 목말랐던 폐비 윤씨, 성종에게 이혼당하다

경상북도 예천군 용문면 내지리에는 용문사라고 하는 절이 있다. 절의 산문에 도착하면 우측 봉우리에 폐비 윤씨의 태실이 자리 잡고 있다. 왕실에서 자손을 출산하면 그 태를 봉안하는 장소가 태실이다. 폐비 윤씨 태실의 주변 지형은 폐허처럼 훼손된 상태이고 가면 태실비석만 남아 있다. 그나마 비석의 상태는 양호한 편이어서 앞면의 '왕비태실'이라는 글씨와 뒷면의 '성화 14년 11월 12일'이라는 글씨를 알아볼 수 있다. 성화 14년은 1478년(성종 9년)이고 폐비 윤씨가 왕비에 책봉된 때로부터 2년 후이다.


폐비 윤씨의 태실에 봉안되었던 태항아리, 태지(아기의 이름과 생년월일을 기록한 돌) 등은 일제 때인 1930년에 서삼릉으로 옮겨졌다가 1999년 국립문화재연구소에서 진행한 서삼릉 태실 조사 때 발굴되어 현재는 국립고궁박물관에 이관되어 있다. 1999년 국립문화재연구소에서 폐비 윤씨의 태지를 조사한 결과, 왕비의 생년월일은 '경태 6년 윤6월 초1일'이었다. 정태 6년은 세조 1년에 해당하고, 서력으로는 1455년이다.


폐비 윤씨의 부친은 윤기견이고 모친은 신씨이다. 친오빠로는 윤구가 있고, 이복 오빠로 윤우, 윤해, 윤희가 있다. 윤기견의 막내딸로 태어난 폐비 윤씨가 조선의 왕실 역사에 등장하게 된 계기는 1473년(성종 4년)의 후궁 간택이었다. 당시 성종은 왕이 된지 4년이 지났지만 자녀가 없었다. 그때 성종의 나이는 17살, 왕비의 나이는 18살이었다. 비록 왕과 왕비가 젊다고 하지만 왕실 어른들, 특히 최고 어른인 정희대비의 근심이 컸다.


정희대비에게는 아들 둘이 있었는데 둘 다 오래 살지 못하고 죽었다. 큰 아들 의경세자와 둘째 아들 예종 모두 20살에 죽었다. 뿐만 아니라 의경세자와 예종은 자녀를 많이 두지도 못했다. 의경세자는 아들 두 명과 딸 한 명을 두었고, 예종은 아들 한 명을 두었다. 이런 상황에서 의경세자의 둘째 아들인 성종이 왕위에 올랐다. 정희대비는 왕실을 위해 그 무엇보다도 성종이 자손을 많이 두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혼인한 지 몇 년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성종과 왕비 한씨 사이에는 아들은커녕 딸도 없었다. 그래서 정희대비가 생각한 것이 바로 간택 후궁을 들이는 것이었다.


승승장구하던 왕비 앞에 나타난 두 명의 후궁

폐비 윤씨가 왕비에 책봉되었을 때, 성종에게는 형식상 왕비와 후궁이 모두 갖추어져 있었다. 폐비 윤씨는 왕비로 확정되었고 폐비 윤씨와 같은 간택 후궁이었던 정현왕후는 후궁으로 확정되었기 때문이다. 아마도 폐비 윤씨는 이런 상황이 앞으로도 지속될 것으로 기대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 당시 폐비 윤씨는 남편 성종의 사랑을 독차지하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임신까지 함으로써 왕실 어른들의 기대에도 충분히 부응했다고 자부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성종과 왕실 어른들이 이런 자신을 인정한다면 새로 후궁을 들이거나 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선대왕인 세조 역시 왕이 된 후 더 이상 후궁을 들이지 않았다. 그런 세조의 왕비였던 정희대비 역시 자신의 경험을 들어 더 이상 후궁을 들이지 않을 가능성이 높았다. 특히나 자신이 임신 중인데 그 사이에 굳이 후궁을 들일 이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은 폐비 윤씨 혼자만의 생각이자 기대였다. 왕실 어른들, 특히 시어머니인 인수대비는 바로 지금이 후궁을 들일 때라고 생각했다. 나라가 튼튼하려면 왕실이 번성해야 하고, 왕실이 번성하려면 후궁이 많아야 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이런 인수대비가 봤을 때 성종에게 후궁 한 명은 너무나 적어 보였다. 게다가 성종 7년에 그 후궁은 겨우 15살밖에 되지 않았기 때문에 인수대비는 더욱 후궁 충원을 생각했을 것이다.


그래서 인수대비는 폐비 윤씨의 임신 중에 후궁을 그것도 2명이나 들이게 하였다. 엄 숙의와 정 소용이 그 주인공이었다. 이들이 정확히 언제 입궁했는지는 확인되지 않는다. 앞뒤 상황으로 미루어 보면 성종 7년 8월이나 9월쯤에는 입궁했을 것으로 보인다. 폐비 윤씨가 왕비에 책봉된 지 겨우 한두 달 만이었다. 조선 시대 성 의학에서는 부인이 임신한 후에는 부부 관계를 금기시했다. 혹시라도 태아에게 나쁜 영향을 미칠까 우려해서였다. 당연히 성종은 폐비 윤씨의 임신이 확실해진 후로는 부부 관계를 멀리했다. 대신 새로 들어온 후궁 정씨와 엄씨를 가까이 했다.


엄 숙의와 정 소용이라는 명칭으로 볼 때 엄씨가 먼저 입궁하고 뒤이어 정씨가 입궁했을 것이다. 나이가 십대 후반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이들은 왕의 후계자를 낳기 위한 간택 후궁이 아니라 단지 왕실을 번성시키기 위한 일반 후궁이었다. 따라서 엄 숙의와 정 소용은 입궁과 동시에 성종과 합방했을 것으로 보이는데, 둘 중에서 정 소용이 더 총애를 받았다. 이 결과 10월을 전후하여 정 소용이 임신하게 되었다.


그런데 정 소용은 임신 후에 엄 숙의와 마치 한 몸처럼 친밀하게 지냈다. 이는 분명 폐비 윤씨를 견제하기 위한 행동이었을 것이다. 따지고 보면 정 소용과 엄 숙의는 일반 후궁이었고, 그래서 같은 처지였다. 이들은 좋으나 싫으나 성종을 놓고 폐비 윤씨와 경쟁해야 했다. 그 경쟁에서 승리하기 위해서는 둘이 협력하는 방법밖에 없었다. 폐비 윤씨 역시 간택 후궁이었다가 왕비가 되었기에 정 소용과 엄 숙의는 자신들도 왕비가 될 수 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왕비 자리를 쟁취하려면 우선 폐비 윤씨를 밀어내야 했다.


정 소용은 자신이 임신한 후, 가능하면 성종을 엄 숙의에게 보내려고 했다. 성종이 폐비 윤씨에게 가는 것보다는 차라리 엄 숙의에게 가는 것이 자신에게 유리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아마도 둘은 성종과 왕실 어른들에게 폐비 윤씨를 은근히 헐뜯거나, 더 나아가 왕실 어른들에게 밀착함으로써 폐비 윤씨를 따돌리려 했다.


만약 폐비 윤씨에게 넉넉한 마음이 있었거나 정치력이 있었다면 이런 상황을 수월하게 극복했을 것이다. 하지만 폐비 윤씨는 그러지 못했다. 막내딸로 자란 폐비 윤씨는 친정에서 귀여움만 받아봤지 이런 일은 겪어본 적이 없었다. 입궁해서도 경쟁 상대 없이 성종과 왕실 어른들의 사랑과 관심을 독점했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임신하고 왕비가 된 마당에 이런 일들을 당하자 폐비 윤씨는 어쩔 줄 몰랐다. 성종의 발걸음은 점점 뜸해지고, 왕실 어른들의 관심도 점점 멀어지는 것을 느끼면서 폐비 윤씨는 불안하고 또 불안했다. 폐비 윤씨는 만에 하나라도 자신이 아들을 낳지 못하고 대신 정 소용이나 엄 숙의가 아들을 낳는다면 왕비 자리에서 쫓겨날 수도 있다고 지레짐작했을 것이다. 이런 불안감은 정 소용이 임신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더더욱 커졌다.


희대의 폭군을 만들어낸 한 여인의 질투심

이런 사건을 겪으면서 폐비 윤씨는 성종과 왕실 어른들에게 더욱 실망하고 분노했다. 특히 남편 성종에 대한 원망이 컸다. 자기 줏대도 없이 어른들이 시키는 대로만 하는 바보 같은 남편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성종 역시 그런 폐비 윤씨에게 정이 떨어지기는 마찬가지였다.


1479년(성종 10년) 6월 1일, 이날은 폐비 윤씨의 생일이었다. 정상적인 부부 사이다면 성종은 폐비 윤씨의 생일을 챙겨줬을 것이다. 하지만 성종은 그러지 않았다. 바로 그날 밤 성종은 폐비 윤씨 대신 다른 후궁을 찾았다. 머리끝까지 화가 치솟은 폐비 윤씨는 한밤중에 둘이 있는 곳으로 달려가서 남편 성종의 얼굴을 손톱으로 할퀴었다. 그리고 다음 날 윤씨는 폐위되었다. 돌아보면 성종과 폐비 윤씨는 처음엔 서로 사랑했고 둘 사이에 자식까지 있었다.


하지만 그 사랑이 미움이 되었고, 그 미움을 극복하지 못해 결국에는 이혼하게 되었다. 그들의 미움은 둘만의 문제로 끝나지 않고 연산군에게 이어져 나라 전체를 혼란으로 몰아넣었다. 이와 관련하여 『대학연의』의 '극명준덕克明峻德'이라는 구절을 인용해볼 수 있겠다. 사람이 사람답기 위해서는 근본적으로 자기 마음의 덕부터 먼저 밝혀야 한다는 것이다. 어느 순간이고 자기 마음의 덕을 먼저 밝히지 못하면 그것이 자신의 비극은 물론 가정의 비극 나아가 나라의 비극이 된다는 교훈이 바로 '극명준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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