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한 게임과 무한 게임

   
제임스 P. 카스(역:노상미)
ǻ
마인드빌딩
   
17000
2021�� 09��



■ 책 소개


언제까지 유한한 게임만을 되풀이하며 살 것인가?
간결하고도 예리한 통찰력으로 빚어진, 무한한 가능성으로의 초대

《유한 게임과 무한 게임》은 담화 방식을 비롯해 사회, 문화, 정부, 전쟁, 가족, 돈 그리고 인간의 성에 이르기까지, 우리 삶과 밀접한 분야 모두를 유한 게임과 무한 게임 렌즈를 통해 바라본다. 우리가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모든 것에 완전히 다른 빛을 던져 주며, 새로운 눈으로 세상과 대면할 기회를 주는 것이다.  파격적인 이론을 바탕으로 삶 전체를 새로이 바라보도록 초대하는 《유한 게임과 무한 게임》은, 유한한 게임을 되풀이하는 우리에게 삶 전체를 새로이 바라볼 무한한 기회를 제공할 것이다. 

■ 저자 제임스 P. 카스
전 뉴욕대학교 종교사·종교문학 교수이자 뉴욕대학교 종교연구소 소장. 종교학자이지만 무신론자인 그는, 30년간 교수로 재직하며 ‘우수 교사상(Great Teacher Award)’을 비롯해 다수의 강의상을 받았다. 

《유한 게임과 무한 게임》은 종교를 넘어 인생이라는 게임에 대한 형이상학적인 고찰을 담은 책이다. 33년 전 출간된 책이지만, 다니엘 핑크가 《드라이브》에서 이 책을 필독서로 추천하는 등 현재도 꾸준히 진가를 인정받고 있다. 또한 《나는 왜 이 일을 하는가》, 《리더는 마지막에 먹는다》 저자이자 5,500만 회가 넘는 조회수로 ‘가장 많이 본 TED 강연’ 4위의 주인공이기도 한 사이먼 사이넥은, 《유한 게임과 무한 게임》에서 영감을 얻어 2019년 《무한 게임(The Infinite Game)》이라는 신작을 출간했다. 

제목부터 카스 교수의 원작을 오마주한 이 책에서 그는 비즈니스에 어떤 결승선이나 종료 휘슬이 존재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우리가 그 본질을 오해하고 착각하기 때문이라고 일갈하는 동시에, 비즈니스 리더와 플레이어 들이 승패와 규칙에 대한 집착을 넘어 ‘무한의 사고방식(Infinite Mindset)’을 채택해야 하는 이유를 역설했다. 이후 카스 교수를 ‘마스터’라 칭송하면서 자신이 운영하는 팟캐스트 ‘한 줌의 긍정(A Bit of Optimism)’에 초청하여, 《유한 게임과 무한 게임》에 담긴 사상과 철학이 본인의 인생과 커리어에 거대한 영향을 미쳤음을 고백하기도 했다. 카스 교수가 2020년 9월 세상을 떠나기 불과 몇 달 전의 일이었다.
 
세상에 수많은 종류의 게임이 존재하는 가운데 절대 끝나지 않는 게임, 즉 ‘인생(무한 게임)’의 특별함과 고유한 속성을 밝히며, 종교, 철학, 역사, 정신 분석, 스포츠 등 다양한 맥락과 관점에서 인생이라는 게임에 대해 고찰한 《유한 게임과 무한 게임》은, 유한한 게임을 되풀이하는 우리에게 삶 전체를 새로이 바라볼 무한한 기회를 제공할 것이다

■ 역자 노상미
고려대학교에서 역사학을, 같은 대학 대학원에서 서양철학을 공부했다. 그동안 옮긴 책으로 《가르친다는 것은》, 《어쩌다 사회학자가 되어》, 《행복학 개론》, 《편애하는 인간》, 《북로우의 도둑들》, 《어떻게 늙을까》, 《우아함의 기술》, 《에베레스트에서의 삶과 죽음》, 사라진 책들》, 《나이 공부》, 《나를 숙고하는 삶》 등이 있다.

■ 차례
1장 적어도 두 종류의 게임이 있다
2장 누구도 혼자서 게임을 할 수는 없다
3장 나는 나 자신의 천재다
4장 유한 게임은 하나의 세계 안에서 생겨난다
5장 자연은 말할 수 없는 것들의 영역이다
6장 우리는 사회적 이유로 자연을 통제한다
7장 신화는 설명을 유발하지만, 그 어떤 설명도 받아들이지 않는다

 




유한 게임과 무한 게임


적어도 두 종류의 게임이 있다

적어도 두 종류의 게임이 있다. 하나는 유한 게임, 다른 하나는 무한 게임이라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유한 게임은 승리를 목적으로, 무한 게임은 게임 자체의 지속을 목적으로 한다. 유한 게임은 누군가 이기는 게임이라면 그 게임에는 확실한 끝이 있어야 한다. 유한 게임은 누군가 이겼을 때 끝이 난다.


모든 플레이어가 그들 가운데 누가 승자인지를 합의했을 때 우리는 누가 게임에서 이겼는지 알게 된다. 게임의 승자를 결정하는 데 플레이어들의 합의 외에 절대적으로 요구되는 조건은 없다. 그러나 플레이어들이 승자에 합의하지 않는다면 게임은 확실하게 끝난 게 아니라는 것, 그리고 플레이어들이 게임을 한 본래의 목적을 이루지 못했다는 것은 자명한 사실이다.


플레이어들은 모두 동의하는데 관중과 심판이 동의하지 않으면 어떨까? 플레이어들은 자신들의 합의가 잘못되었음을 납득하지 않는 한 플레이를 재개하지 않을 것이다. 플레이어들이 플레이를 하기로 자유로이 선택하지 않는 한 유한 게임은 없다. 플레이를 하도록 강요당하는 사람은 플레이를 할 수가 없다.


유한이든 무한이든 모든 플레이의 불변하는 원칙은, 플레이를 하는 사람은 누구든 스스로 원해서 자유로이 플레이를 한다는 것이다. 플레이를 강제로 해야만 하는 사람은 플레이를 할 수가 없다.


유한 게임에는 확실한 끝이 필수이듯 정확한 시작도 있어야만 한다. 즉 유한 게임에는 시간적 경계가 있다고 할 수 있다. 물론 그에 대해서도 모든 플레이어들이 동의해야 하며, 플레이어들은 마찬가지로 공간적 경계와 수적 경계 설정에도 동의해야 한다. 말하자면 유한 게임은 명확한 장소 안에서 특정 숫자의 플레이어들과 해야만 하는 것이다.


유한 게임에서는 한 사람 내지 한 팀만 이길 수 있으나, 다른 참가자들 또한 게임이 끝날 때면 순위가 매겨질 것이다. 모든 사람이 사장이 될 수는 없어도, 그 자리를 놓고 경쟁한 몇 사람은 부사장이나 지역 관리자가 될 수는 있을 것이다. 이기리라는 기대 없이 참가하는 게임도 많지만, 그럼에도 우리는 그 게임에서 가능한 한 가장 높은 순위를 차지하기 위해 경쟁한다.


무한 게임은 한 가지 점에서, 오직 한 가지 점에서만 유한 게임과 동일하다. 무한 게임 플레이어들도 그들의 자유로운 선택으로 플레이를 한다고 할 수 있다. 무한 게임 플레이어들 역시 플레이를 강제로 해야만 한다면 플레이를 할 수가 없다. 이 외에는 무한 게임과 유한 게임은 정반대다.


무한 게임 플레이어들은 그들이 게임이 언제 시작되었는지 말할 수 없으며 그에 관심도 없다. 무한 게임 플레이어들은 그들의 게임에 시간적 경계가 없는 이유에 관심을 두지 않는다. 무한 게임에는 공간적 경계나 수적 경계도 없다. 어떤 세계도 무한 게임의 경계들로 특정되지 않으며, 원하면 누구든 무한 게임을 할 수 있으므로 자격 문제 또한 없다.


유한 게임들은 무한 게임 안에서 진행될 수 있지만, 무한 게임은 유한 게임 안에서 진행될 수 없다. 무한 게임 플레이어들은 어떤 유한 게임에 참가하든 그 승리와 패배를 계속되는 플레이의 순간들에 불과한 것으로 간주한다. 


힘은 유한 게임에만 속하는 개념이다. 그러나 힘은 게임이 끝나기 전에는, 다시 말해 정해진 시간이 전부 소요되기 전에는 정확히 측정될 수 없다. 플레이가 진행되는 동안에는 플레이어들의 힘을 결정할 수 없다. 진정한 플레이라면 그 결과를 미리 알 수 없기 때문이다.


한 사람의 힘에 대해 유의미하게 말한다는 것은, 여러 닫힌 영역에서 그 사람이 이미 경쟁했던 이야기를 하는 것이다. 따라서 힘을 안다는 것은 시간을 되돌려 바라본다는 뜻이다. 힘은 게임의 결과로 측정되므로, 강력해서 이기는 것이 아니라 이겨서 강력해지는 것이다. 만일 게임 시작 전에 이길 힘이 충분하다고 한다면, 뒤이어 벌어지는 것은 전혀 게임이라 볼 수 없다.


힘은 유한 게임만의 특징이며, 극적이지 않고 연극적이다. 그렇다면 무한 게임 플레이어들은 어떻게 힘과 경쟁하는가? 무한 게임은 항상 극적이다. 그 결말이 무한히 열려 있고, 이전 플레이의 힘 내지 약함을 확실히 평가하기 위해 돌이켜 볼 방법이 없다.


유한 게임 플레이어가 강력해지기 위해 플레이를 한다면, 무한 게임 플레이어는 강인함으로 플레이를 한다고 하자. 강력한 사람은 미해결된 문제를 모두 해결하면서 과거를 끝맺는다. 강인한 사람은 문제들 가운데 그 어떤 문제도 해결할 수 없음을 보여 주면서 과거를 미래로 가져간다. 힘은 이미 일어난 일과 관련되고, 강인함은 앞으로 일어날 일과 관련된다.


원한다면 누구나 무한 게임 플레이어가 될 수 있고 또 누구나 강인해질 수 있다고 해서, 힘이 무한 게임에 돌이키지 못할 해를 끼칠 수 있음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무한 게임은 악을 막거나 제거하지 못한다. 무한 게임 플레이어들이 강인하긴 할지라도 강력하진 않으며, 또 강력해지려고 하지도 않는다.


무한 게임 플레이어들은 불가피한 악의 가능성을 이해한다. 그러므로 다른 사람들 안에 있는 악을 제거하려고 하지 않는다. 그렇게 하는 것 자체가 바로 악의 충동이고, 모순이기 때문이다. 무한 게임 플레이어들은 그저 역설적으로 자신 안에 있는 악을, 다른 곳에서 악을 제거하려는 시도의 형태를 띤 악을 인정하고자 할 뿐이다. 악은 하나의 무한 게임 안에 유한 게임들을 포함하는 것이 아니라, 여러 유한 게임에 대해 플레이 자체를 제한하는 것이다.



누구도 혼자서 게임을 할 수는 없다

누구도 혼자서 게임을 할 수 없다. 인간은 다른 사람 없이 혼자 인간일 수 없고, 공동체가 없는 곳엔 개인 또한 없다. 우리는 우리 자신으로서 다른 사람들과 관계를 맺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우리 자신이다. 동시에 우리와 관계를 맺는 다른 사람들 역시 관계 속에서 그들 자신이다.


우리는 우리와 관계를 맺지 않는 그 누구와도 관계를 맺을 수 없다. 따라서 우리의 사회적 존재는 어쩔 수 없이 유동적 성격을 띤다. 이는 우리가 유동적인 맥락 속에서 살아간다는 말이 아니라, 우리의 삶 자체가 유동적이라는 이야기다. 이것이 무한 게임 플레이어들의 삶의 원칙이다.


무한 게임 플레이어들의 관심은 정치와는 공통점이 거의 없다. 무한 게임 플레이어들은 주어진 현실 내에서 얼마만큼 자유로울 수 있는가를 알아내는 데는 관심이 없다. 이는 놀이와 같은 사소한 의미의 자유이기에, 우리가 우리의 유한 게임에 이러한 특정 경계들을 얼마만큼 자유로이 두기로 결정했는지를 보여 주는 데 관심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무한 게임 플레이어들에게 정치는 일종의 연극이다. 마지막 장면을 알고 있는 연기자들이 대본에 따라 관객 앞에서 역할을 연기하는 것이다. 정치적 문제에서 무한 게임 플레이어들이 어느 한쪽 편을 들지 않는 것도, 정치의 본질적인 연극성 때문이다.


정치에 참여할 때 무한 게임 플레이어들은 사회와 문화를 구별한다. 그들이 이해하는 사회란 어느 형태의 공적인 구속 하에 있는 관계들의 총합이고, 문화는 무엇이 됐든 지시받지 않는 선택에 의해 우리가 함께 행하는 모든 것이다.


무한 게임 플레이어가 이해하는 사회를, 자연적 본능이나 다른 형태의 어느 비자발적 활동과 혼동해서는 안 된다. 유한 게임에서는 아무리 힘들고 값비싼 대가를 치르게 할지라도 플레이어가 경기장을 떠나는 것을 막지 못하는데, 정확히 이러한 방식으로 사회 또한 전적으로 우리의 자유로운 선택 안에 있다. 무한 게임이 유한 게임 안에 포함될 수 없듯, 문화를 사회의 한계 내에 가둔다면 그것은 진정한 문화일 수 없다.


한편, 문화는 무한 게임이다. 문화는 경계가 없고, 누구든 어느 때나 어디서나 문화의 참여자가 될 수 있다. 엄밀한 의미에서 문화는 시간적 제한이 없기 때문에 과거를 운명이 아닌 역사로 이해한다. 이미 시작된, 그러나 늘 끝없이 열려 있는 방향을 가리키는 하나의 이야기로 말이다. 문화는 결국은 죽게 돼 있는 인간의 사업, 놀라움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려 드는 것은 무가치하다고 여기는 인간의 사업이다. 그들은 강력한 비전속에 살면서 힘을 멀리하고, 경계의 플레이를 즐긴다.


경계가 있고, 형이상학적 베일을 쓰며, 따라야 할 운명이 있는 사회에게 적은 필수이고, 갈등은 불가피하며, 전쟁은 가능한 일이다. 전쟁은 무자비함이 제어되지 못한 행위가 아닌, 경계가 있는 사회들 내지는 국가들 사이의 공공연한 싸움이다. 국가에 적이 없으면 경계도 없다. 국가는 정체성을 분명히 하기 위해 그 자체에 대한 위험을 자극해야 한다.


전쟁은 자기 보호에 필요한 것이라 내세우지만, 실제로는 자기 확인에 필요한 것이다. 전쟁 중인 타국에 반대하는 것이 유한 게임 플레이어의 충동이라면, 국가 안에서 전쟁을 반대하는 것은 무한 게임 플레이어의 계획이다.


유한 게임 플레이어들의 전략은 국가를 만든 국민을 죽임으로써 국가를 죽이는 것이다. 하지만 무한 게임 플레이어들은 전쟁을 국가들 사이의 갈등으로 이해하면서 국가는 오직 국가만을 적으로 삼을 수 있다고 결론짓는다. 사람을 적으로 삼을 수는 없다는 것이다.


무한 게임 플레이어의 전략은 지평적이다. 그들은 힘과 폭력이 아니니 포이에시스와 비전으로써 추정상의 적들을 만나러 간다. 무한 게임 플레이어들은 그들을 통과하는 민중이 되도록 초대한다. 무한 게임 플레이어들은 무기를 무기로 상대하기 위해 일어서지 않는다. 그 대신 웃음, 비전, 놀라움을 이용해 국가에 참여하며, 그 경계들을 다시 플레이 안으로 포함한다. 제한된 것은 우리의 시야이지 우리가 보고 있는 대상이 아니라는 인식은, 모든 경계를 지워 버릴 것이다.



유한 게임은 하나의 세계 안에서 생겨난다

유한 게임은 하나의 세계 안에서 생겨난다. 시간적으로, 수적으로, 그리고 공간적으로 제한되어야만 한다는 것은, 그 한계에 부딪히는 무언가가 존재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모든 유한 게임에는 외부가 있다. 그 한계는 제한되는 무언가가 없는 한, 다시 말해 더 큰 공간, 더 긴 시간, 더 많은 수의 가능한 경쟁자들이 없는 한 무의미하다.


무한히 많은 세계들이 존재한다. 게임과 세계의 상호 의존성은 관련된 사람들에게 더 깊은, 또 다른 영향을 미친다. 유한 게임의 진지함은 자신에 대한 다른 사람의 추정상의 평가를 정정하려는 플레이어들의 필요성에서 나오기 때문에 관객이 물리적으로 앞에 있을 필요가 없다. 플레이어들이 이미 그들 자신의 관객이기 때문이다. 나는 나 자신에 맞서 분열되지 않고서는 유한 게임 플레이어가 될 수 없다. 우리는 우리 자신에 대해 분열되지 않고서는 하나의 세계가 될 수 없다.


하나의 세계 앞에서 연극적으로 일어나기에, 유한 게임은 시간 내에 일어난다. 유한 게임은 경계를 지니므로, 하나의 세계가 설정한 그 절대적 시간의 한계 내에서 시작과 끝을 지니므로 유한 게임 플레이어를 위한 시간은 만료된다, 시간이 줄어들고, 바닥나는 것이다.


우리 안의 무한 게임 플레이어들은 시간을 소모하는 것이 아닌 시간을 생성한다. 무한 게임은 극적이고 대본에 따른 결말이 없기에, 그 시간은 살아진 시간이지 구경된 시간이 아니다. 무한 게임 플레이어로서 우리는 젊은 것도, 늙은 것도 아니다. 다른 사람의 시간 속에 살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무한 게임 플레이어의 시간성에는 외적인 척도가 없다. 무한 게임 플레이어에게 시간은 지나가지 않는다. 시간의 매 순간이 시작이다.


무한 게임 플레이어는 한 시기를 일로 채울 목적으로 일을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일을 시간으로 채울 목적으로 일을 시작한다. 일은 무한 게임 플레이어가 시간을 보내는 방식이 아닌 가능성을 생성하는 방식이다. 일은 바랐던 현재에 도달하고 예측할 수 없는 미래에 대비해 안정된 현재를 확보하는 방법이 아닌, 미래가 있는 미래를 향해 나아가는 방법이다.


무한 게임 플레이어들은 얼마든지 유한 게임을 할 수 있듯, 그 어떤 게임의 관객에도 가담할 수 있다. 그러나 그들은 관객임을 충분히 의식하면서, 관람 중인 플레이를 위해 그렇게 한다. 그들은 바라보지만, 그들이 바라보고 있음을 본다.


무한 게임은 유한 관찰자에게는 보이지 않는다. 유한 관찰자들은 종결을, 플레이어들이 문제를 결론짓고 미완인 것을 끝낼 수 있는 방법을 찾는다. 그들은 시간이 소진된 방법을, 혹은 곧 소진될 방법을 찾고 있다.


유한 게임의 목적이 시간을 초월하는 영원한 타이틀을 획득하는 것이라면, 그렇게 해서 자신의 영원한 삶을 획득하는 것이라면, 무한 게임 플레이어의 본질은 마이스터 에크하르트가 “영원한 탄생”이라 불렀던 시간성과의 역설적인 싸움이다.



자연은 말할 수 없는 것들의 영역이다

자연은 그 자체의 목소리도 없고, 하고자 하는 말도 없다. 우리는 자연의 말할 수 없음을 인간 문화에 대한 자연의 철저한 무관심으로써 경험한다.


우리 안의 마스터 플레이어는 이러한 무관심을 대개 용납하지 않는다. 우리는 그것을 사실상 도전으로, 맞서 싸우라는 초대로 받아들이고 대응한다. 만일 자연이 우리에게 집을 제공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내주지 않으면 우리 스스로 공간을 치우고 마련할 것이다. 우리는 문명을 위해 억압해야 할 적으로서 자연과 대결하며, 예측할 수 없는 자연의 변화를 정복할 기술의 발달을 현대 사회의 최고 업적 중 하나로 꼽는다.


자연에 대한 우리의 투쟁을 인도하는 가정은, 자연 그 깊은 곳에서 궁극적으로 인간 지성이 이해할 수 있는 질서가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내재적 구조가 만물의 변화 방식을 결정하는데, 그 자체는 변화에 종속되지 않으므로 우리는 자연에 대해 법칙적이라고, 즉 상당히 예측 가능한 패턴에 따라 반복된다고 말한다.


그 철저한 법칙성 때문에 자연은 그 자체의 천재가 없다. 반대로 인간 천재의 가장 위대한 발견은 자연 질소의 구조와 마음의 구조 사이의 완벽한 친화성이라고, 따라서 자연에 대한 완벽한 이해가 가능해지는 것이라고 생각되기도 한다. 이는 자연이 목소리를 가지고 있으며, 그 목소리는 우리 자신의 것과 다르지 않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 그렇다면 우리는 말할 수 없는 것들을 대변한다고 가정할 수 있다.


현재 우리가 말하고 있는 것은 일반적인 무지가 아니다 이는 알 수 있었으나 알지 못하는 것이 아니다. 이해 불가 그 자체, 다시 말해 그 어떤 정신도 결코 이해할 수 없다는 의미로서의 무지다. 베일이 벗겨져, 아무리 봐도 볼 수 없는, 극복할 수 없는 한계를 깨닫고 우리는 자연의 완벽한 침묵으로 돌아간다.


우리가 이 침묵에서 배우는 것은, 자연은 우리가 자연에 대해 생각하거나 말할 수 있는 것과 다르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침묵 자체에는 아이러니가 있다. 그것은 우리를 당혹시키기는커녕 정신 자체의 독창성에 없어서는 안 된 조건을 제공한다. 근본적인 다름에 우리를 대면시킴으로써 자연은 메타포의 원천이 되는 것이다.


메타포는 서로 다르거나 무관한 두 가지를 결합하는 것이다. 메타포는 환원 불가능성을, 서로에 대해 흔들리지 않는 무관심을 요구한다. 모든 언어는 근본적으로 메타포의 성격을 띤다.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건 그것이 언어인 것은 변함없으며, 그것이 가리키는 대상과는 절대적으로 다르기 때문이다.


자연의 말할 수 없음이 바로 언어의 가능성이다. 자연을 통제하려는, 자연과의 대립에서 마스터 플레이어가 되려는 우리의 시도는 언어로부터 벗어나려는 시도다. 그것은 자연을 ‘자연’으로 받아들이길 거부하는 것이다. 메타포에 귀를 막는 것이고, 자연을 친숙하게 만들어 본질적으로 우리의 의지와 말의 연장으로 삼는 것이다.


자연이 말할 수 없는 것들의 영역이라면 역사는 말할 수 있는 이들의 영역이다. 실제로 그 자체가 역사적이지 않은 것들은 말해질 수 없다. 역사를 배우는 학생들은 이따금 자연을 배우는 학생들처럼, 사건들을 바라보는 직접적이고 편향되지 않은 관점을 찾을 수 있을 것이라 믿는다. 그들은 다른 사람의 삶을 들여다보며 그 사람의 삶이 그가 살았던 시대의 제약을 받는 무수한 방식에 주목한다.


그러나 그 누구도 한 시대를, 설령 그것이 자신의 시대라 할지라도 한 시대의 창을 통하지 않고서는 들여다볼 수 없다. 자연 외부에서 자연을 바라볼 수 있는 유리한 위치가 없듯 그러한 관찰자들에게도 역사 밖의 안전지대는 없다. 



신화는 설명을 유발하지만, 그 어떤 설명도 받아들이지 않는다

설명이 말할 수 없는 것을 말할 수 있는 것 안으로 흡수하는 데 반해, 신화는 독창적인 담화를 가능케 만드는 침묵을 재도입한다. 설명은 질서와 예측 가능성의 섬들, 심지어는 대륙들을 건설한다. 그러나 이러한 지역들은 먼저 그 삶이 탐험과 위험의 내러티브인 모험가들에 의해 지도로 그려졌다.


신화는 그것이 유발하는 설명들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것을, 우리는 모든 영역의 사상가들이 더 높이 보기 위해 친숙한 것을 재검토하는 그 대담함에서 확인할 수 있다. 실제로 문화의 활기는 바로 이러한 사상가들이 얼마나 자주 새로운 지식의 대륙을 발견하느냐가 아니라, 얼마나 자주 그러한 대륙을 찾아 떠나느냐로 결정된다. 문화는 그 문화의 가장 강력한 신화보다 강력할 수 없다.


신화는 개인적 경험을 가능케 하기에 집단적인 경험 또한 가능케 한다. 모든 문명은 이야기에서 발흥하며, 이야기 말고는 다른 어떤 것도 문명을 발흥시키지 못한다. 우리는 신화 그 자체를 위해 이야기한다. 신화는 이야기이기를 고집하는, 그리고 이야기되기를 고집하는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것과의 접촉으로 살아난다.


신화는 문화라는 정원에 있는 마법의 나무와 같다. 신화는 말 없는 자연이라는 대지 위가 아닌 문화라는 정원에서 자란다. 우리가 열매를 따거나 우리가 좋아하는 디자인으로 다듬을수록 그 나무는 더욱더 우람해지고 풍성해진다. 신화는 그 자체를 위해 이야기되는 의미 있는 이야기가 아니라, 의미를 부여하는 이야기다.


신화가 우리 안에서 울려 퍼질 때, 우리는 신화에 공명한다. 신화는 그 목소리가 나의 목소리로서 들리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서 들릴 때 내 안에서 울려 퍼진다. 신화의 울림은, 한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들려주는 이야기와 그들이 이야기를 하고 듣는 것에 대한 이야기 사이의 명백한 구분을 무너뜨린다.


신화는 말해지고, 그렇게 말해지면서 끊임없이 울려 퍼지기 때문에 이미 풍부한 울림으로서 우리에게 온다. 이야기 자체와 그 이야기를 하는 것에 대한 이야기는 깊이 공명한다. 이야기로서 이야기가 가지는 힘은, 우리를 그 이야기의 드라마로 초대하는 능력에 있다. 그 드라마는 우리 문화의 천 가지 원천으로부터 나오는 목소리들, 울리고 되울리는 목소리들의 모든 역사를 담고 있는 드라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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