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행기를 만든 사람들

   
유지우
ǻ
지성사
   
18000
2019�� 07��



■ 책 소개


자동차 엔지니어가 들려주는 비행기를 만든 사람들의 이야기!  

이 책을 쓴 저자 유지우는 현재 자동차 엔지니어로 활동 중이다. 그가 이 책을 준비하던 중에 잘 아는 교수님이 “왜 자동차 엔지니어가 비행기에 관한 이야기를 쓰고 있느냐”고 물었다. 정말 궁금하다. 그는 왜 비행기에 관한 책을 썼을까? 

약 15년 전 그는 영국으로 유학을 떠나 사우샘프턴 대학교University of Southampton에 속해 있는 소음진동 전문대학원(ISVR)에서 박사 과정을 밟고 있었다. 어느 날 우연히 남쪽의 작은 마을에서 백 세를 눈앞에 둔 할머니 한 분을 만났다. 그분은 체펠린Zeppelin이 개발한 비행선의 런던 공습을 피해 그곳으로 피난을 왔다가 머물러 사신 분이었다. 낭만적인 여객기로 시작하여, 제1차 세계대전에서는 살상용 무기로 사용된 전설 속의 그 비행선을 실제로 목격한 분을 만나다니, 얼마나 대단한 일인가. 

처음에는 할머니 장수의 비밀이 궁금했으나, 생각을 거듭할수록 한 세대가 끝나기도 전에 변모한 항공 기술의 발전이 정말 기적이라는 생각이 들었고, 그 기적의 과정이 궁금했다. 저자는 그 궁금증을 풀기 위해 글라이더를 만들던 시절부터 제2차 세계대전 직후까지 개발된 항공기에 얽힌 여러 사람과 사건 관련 자료들을 찾기 시작했다. 

역사의 과정이 그렇듯, 혁신은 한 번에 이루어지지 않고 조금씩 이루어 가는 것이며, 또한 여러 사람이 이루어 가는 과정이다. 저자는 인물과 사건을 역사적인 순서대로 글과 자료를 정리했고, 마침내 한창 꿈을 키울 우리 청소년들에게 걸맞은 『비행기를 만든 사람들』이란 제목으로 ‘청소년을 위한 과학 읽기’의 한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다. 

■ 저자 유지우
한양대학교를 졸업하고, 영국 사우샘프턴 대학교 University of Southampton에 속해 있는 소음진동 전문대학원(ISVR)에서 2005년 박사학위를 받았다. 동료들과 함께 소음이 적은 차체 플로어를 개발하여 싼타페 차량에 적용하는 등, 1995년 현대자동차에 입사한 이후 현재까지 엔지니어로 근무하고 있다. 차량 진동소음 기술과 관련하여 약 30여 편의 논문을 국내외에 발표했다. 

■ 차례
들어가는 글/ 이 책을 좀 더 편하게 읽기 위한 안내/ 비행 역사 연대기 

01 릴리엔탈Otto Lilienthal: 무동력 비행의 선구자 
새인간/ 글라이더를 만들다/ 2천 회가 넘는 시험 

02 라이트 형제와 커티스Wright brothers & Glenn Curtiss: 미국 항공의 라이벌 
비행기 움직임에 대한 간단한 이해/ 비행기가 비행 중 방향을 바꾸는 경사 선회/ 라이트 형제의 첫 동력 비행이 성공한 1903년/ 성숙된 여건/ 형제의 가정환경/ 비행기 이전에 그들이 접한 것/ 날개 와핑의 비밀을 알아내다/ 비행 시험을 시작하다/ 첫 비행에 성공하다/ 새뮤얼 랭글리/ 첫 비행 성공 이후에 일어난 일들/ 미국 밖의 경쟁자들/ 글렌 커티스/ 미국 해군 비행기의 아버지, 커티스/ 항공대회: 죽음의 경쟁/ 특허 분쟁 

03 프랑스의 항공 개척자들 
아우베르투 산투스두몽/ 루이 블레리오/ 앙리 파르망/ 랭스 항공대회 

04 체펠린Ferdinand Von Zeppelin: 비행선의 아버지 
비행선 제작의 시작/ 비행선 제작 기술/ 상업 비행선 시대의 도래/ 전쟁 도구로서의 비행선/ 제1차 세계대전 이후의 비행선 

05 항공 기술의 혁신을 일으킨 제1차 세계대전 
타우베, 최초의 정찰기/ 프로펠러는 기체 앞, 기관총은 프로펠러 뒤에/ 어떤 엔진을 사용할 것인가?/ 단엽기, 복엽기, 삼엽기/ 폭격기가 등장하다/ 제1차 세계대전의 영향 

06 황금시대가 열리다 
장거리 비행 경쟁/ 속도 경쟁/ 발전하는 기술 

07 융커스Hugo Junkers: 완전금속 비행기의 선구자 
아직 항공 엔지니어가 아니었다/ 50세가 넘어 비행기 제작에 뛰어들다/ 주름진 패널을 사용하다/ 전익 항공기/ 최초의 완전 금속비행기/ 제1차 세계대전 이후의 독일/ 최초의 완전금속제 여객기 F 13/ 대형 여객기 G 38/ 융커스의 마지막 손길 JU 52/ 나치에 협력하지 않다 

08 시코르스키Igor Ivan Sikorsky: 헬리콥터의 아버지 
소년 시절의 꿈에 도전하다/ 대형 비행기의 선구자가 되다/ 미국에서 다시 시작하다/ 마침내 소년의 꿈을 이루다 

09 미첼Reginald Mitchell 불멸의 전투기를 개발한 불꽃같은 인생 
슈나이더 대회 참가로 수상기 개발/ 비행정 개발/ 스피트파이어의 탄생/ 암을 이겨내지 못하다/ 영국을 구한 스피트파이어 

10 제2차 세계대전사에 기억할 만한 항공기들 
메서슈미트의 Bf 109/ 노스 아메리칸의 P-51D 머스탱/ 포케-불프의 Fw 190/ 플라잉 포트리스 B-17/ 아브로 랭커스터/ 메서슈미트 Me 262 슈발베/ 미쓰비시 A6M5 레이센 

11 미국 항공 기술의 발전을 주도한 인물들 
잭 노스럽/ 클래런스 ‘켈리’ 존슨 

12 초음속의 시대 그리고 협동의 시대 

미국 항공회사 이력/ 사진 출처/ 참고한 도서 

 




비행기를 만든 사람들


릴리엔탈(Otto Lilienthal): 무동력 비행의 선구자

새인간

라이트 형제가 ‘공기보다 무거운’ 장치를 이용한 동력 비행을 시작하기 전, ‘공기보다 무거운’ 무동력 비행 장치를 연구한 많은 선구자들이 있었다. 그중에서 대표적인 사람을 꼽는다면, ‘새인간(birdman)’으로 불린 독일인 오토 릴리엔탈(Otto Lilienthal, 1848~1896)이다.


1900년이 다가오는 그 시기에는 이미 증기기관차가 대표적인 교통수단이었고, 증기기관이 가장 일반적으로 사용되는 동력장치였다. 당연히 증기기관을 이용하여 비행이 가능하다고 믿는 사람들이 많았고, 실제로 꽤 많은 사람들이 그러한 시도를 했다.


이런 분위기에서 동력 없이 날개만 달고, 뛰어 달려가 날아 보려던 오토 릴리엔탈은 미친 사람 또는 괴짜로 취급받았다. 그러나 비행 원리 연구에서 보면, 사실 그는 당시의 그 어느 누구보다 더 체계적이고 과학적이었다.


그는 정식으로 공학 교육을 받은 뒤 다양한 방면에서 엔지니어로 활동하면서도 새의 해부학적 연구와 새의 비행에 관한 관찰을 계속했다. 마침내 41세인 1889년, 그 결과를 정리하여 유명한 책 『비행술의 기초가 되는 새의 비행』을 출간했다(이 책은 지금도 아마존에서 구입할 수 있다). 그의 연구는 후대에 중요한 결과를 전하게 된다. 바로 ‘날개 단면의 곡선은 공중에 떠 있게 하는 힘인 양력을 일으키는 데 절대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것이었다.


글라이더를 만들다

릴리엔탈은 날개에 관한 연구를 시작하여 직접 비행하는 시험을 시도하기로 한다. 처음에는 새처럼 날개를 상하로 움직이는 기계를 검토했으나, 곧 날개가 고정된 글라이더 형태를 띤 기계의 잠재력을 알아차렸다. 즉, 고정된 날개만으로도 양력을 만들어 비행이 가능하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그가 제작한 글라이더는 부서지기는 쉽지만 가벼운 버드나무와 대나무 뼈대 위에 면직물을 덮은 구조였다. 새의 뼈대를 참고했고, 양력을 높이기 위한 형상도 새의 날개에서 힌트를 얻은 것이었다. 1894년 그의 비행 기계에 관한 미국 특허에서 이를 확인할 수 있다.


2천 회가 넘는 시험

그는 베를린 근처에 손수 만든 인공 언덕에서 시험을 거듭했는데, 무려 2천 회가 넘는 시험을 했다고 알려졌다. 상승기류를 이용해 역풍 상태에서 글라이더를 제공했는데 이때 찍은 사진이 지금도 남아 있다. 가장 긴 거리는 350미터 정도로, 이 기록은 그가 생존할 때까지 깨지지 않았다.


글라이더는 무게중심을 이동하면서 조종했는데, 현대의 글라이더에도 이 개념이 이어지고 있다. 이 가운데 가장 성공을 거둔 11호 글라이더는 대량으로 제작되어 많은 사람들에게 판매되었다.



프랑스의 항공 개척자들

아우베르투 산투스두몽

초기의 열기구 등을 제외하고 가장 먼저 다룰 인물은 아마도 아우베르투 산투스두몽(Alberto Santos-Dumont, 1873~1932)일 것이다. 그는 브라질 사람으로 프랑스에 거주하고 있었다. 처음에는 비행선에 관심이 많아 자기 비행선으로 에펠탑을 선회하여 상금을 타기도 했지만, 곧 비행기 제작과 시험에 착수했다. 1906년 10월 23일(라이트 형제보다 2년여 뒤), 파리에서 유럽 최초로 공개 시범 비행을 펼쳤다.


산투스두몽이 양복 차림으로 조종하여 약 60미터를 날아오른 이 시험비행은 엄청난 파장을 일으켰다. 이 비행은 사실 잠시 하늘에 떠 있었던 것에 지나지 않았지만 프랑스 항공클럽에서 인정한 유럽 최초로 ‘공기보다 무거운’ 기계의 비행이었으며, 지금도 ‘공기보다 무거운’ 최초의 비행이 프랑스에서 이루어졌다고 (프랑스인들이) 주장하는 배경이 되고 있다.


그는 앞으로 점점 중요하게 될 엔진의 ‘중량 대 출력 비(power-to-weight ratio)’를 연구하여 성능 발전을 이루고자 한 최초의 엔지니어였다. 그의 마지막 비행기는 드무아젤(Demoiselle)로 단엽기였다. 초기의 14 비스 호보다 엔진 출력은 줄었지만 최고속도는 높아졌다.


그는 항공기가 새로운 시대를 여는 도구이기를 바랐고, 자신의 연구 성과를 다른 사람들이 사용할 수 있게 공개하기도 했다. 하지만 항공기가 브라질 호헌혁명 등과 같은 전쟁에서 인명살상 도구로 사용되는 것을 보자 크게 실망했다. 그는 1932년 자살한 것으로 알려졌다. 브라질에서 그는 ‘브라질 항공기의 아버지’로 존경받고 있으며, 오늘날 브라질의 항공산업이 발달하게 된 기원을 마련한 인물이다.


루이 블레리오

루이 블레리오(Louis Bleriot, 1872~1936)는 초기 비행시대에 프랑스뿐만 아니라 세계적으로 매우 중요한 인물로 손꼽히고 있다. 프랑스 최초의 사립 공학교육기관인 중앙공예학교(Ecole Centrale. 구스타브 에펠, 아르망 푸조, 앙드레 미슐랭 같은 당대의 주요 기술자를 배출)를 졸업한 그는 자동차 헤드라이트 제조업으로 부자가 되었고, 그 부를 바탕으로 항공기 개발에 뛰어든다.


초기의 시험은 새처럼 날개를 아래위로 움직여 날아오르는 비행기를 제작하면서 실패를 거듭하다가 1907년, 마침내 최초의 단엽기인 블레리오 5호를 거쳐 블레리오 7호로 성공의 기회가 마련된다. 이 비행기는 500미터를 비행했고 영국 해협을 횡단하게 될 블레리오 11호의 기본 형태를 갖추게 된다.


영국 해협을 항공기로 건너는 이 행사는 사실 영국의 일간지 <데일리 메일(Daily Mail)> 사에서 신문을 팔기 위해 준비했다. 블레리오는 연료관 파열로 화상을 입은 상태였지만, 1909년 7월 25일 안개 낀 프랑스 칼레(Calais)를 출발하여 나침반이나 항로 유도도 없이 36분을 비행하여 영국 땅에 도착했다. 불시착이긴 했지만, 어쨌든 해협을 건너는 데 성공했다.


이 비행기를 130대 만들면서 블레리오는 사업가로 성공하게 된다. 프랑스는 항공기에서 선도적인 위치를 상징적으로 또는 실질적으로 차지하게 된다. 정치적으로는 이제 영국은 더 이상 바다만을 믿고 있을 수 없게 되었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그는 벨기에 사람인 아르망 듀펠듀상(Armand Deperdussin)의 듀펠듀상 항공기생산조합(Societe pour les Appareils Deperdussin, 줄여서 SPAD) 사를 인수하여, 제1차 세계대전 동안 가장 유명한 프랑스 전투기인 SPAD WIII를 제작했다.



항공 기술의 혁신을 일으킨 제1차 세계대전

제1차 세계대전은 ‘참호전(trench warfare)’이라고 불릴 만큼 각 진영에서 참호를 파고 공방을 벌이던 전쟁이었다. 상대방의 참호를 돌파하기가 어려워 이 전쟁은 지루하게 이어졌고, 그저 몇 킬로미터를 오르내리는 공방전으로 수많은 군인들이 소중한 생명을 잃었다.


전투기의 형태도 아직 완전히 현대적인 형태는 아니었다. 전쟁 직전의 속도 경쟁에서 우의를 차지한 것은 앞에서 다룬 듀펠듀상 등이 제작한 단엽기였다. 하지만 날개가 얇아야 비행기 성능이 좋다는 선입관에 단엽기가 당시 날개가 얇아 하중을 견디기 어렵다는 선입관이 덧붙어 전쟁의 주류는 복엽기가 되었다.


타우베, 최초의 정찰기

가장 먼저 알려진 정찰기는 독일의 타우베(Taube, 비둘기)라는 단엽기였다. 독일은 동부전선 대 러시아 전투에 타우베를 정찰기로 활용하여 열세인 병력을 적재적소에 배치함으로써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다.


비록 파리에 폭탄을 떨어뜨리기도 했지만, 타우베는 최고속력이 시속 97킬로미터에 지나지 않았고, 보조날개 대신 날개 와핑 기술을 사용하는 구식 비행기라 곧 일선에서 물러나야 했다. 비행기에 관한 한 우위에 있던 프랑스가 성능이 더 좋은 비행기를 하늘에 띄우자 비행기는 점차 전투 무기로서의 면모를 갖추게 되었다.


어떤 엔진을 사용할 것인가?

전투에 사용된 비행기의 엔진 출력은 전쟁 초 80마력에서 1918년 최대 400마력까지 급격하게 높아졌다. 엔진은 형태에 따라 크게 두 가지로 분류할 수 있는데, 공랭식 로터리(rotary) 엔진과 액랭식 인라인(inline) 엔진이었다. 로터리 엔진은 가볍고 간단하지만, 차츰 더 큰 출력이 필요해지면서 한계에 부딪혔다. 또한 고정된 크랭크샤프트(crankshaft) 주위를 실린더가 회전하는 공랭식 엔진으로 공기에 대한 저항이 크게 발생했고, 실린더 전체가 회전함으로써 엄청나게 큰 회전 관성이 발생했다.  


하늘에서의 공중전은 적군 비행기의 꼬리를 물고 뒤에서 공격하는 것이 기본적인 공격 방식이므로 이를 개싸움에 비유해 도그파이트(dogfight)라고 불렀다. 로터리 엔진을 장착한 비행기는 큰 회전 관성 때문에 조정이 매우 어려웠는데, 그럼에도 파일럿들은 기동성이 필요한 공중전을 아주 잘해냈다.


로터리 엔진의 단점이 드러나자 제1차 세계대전 후에는 실린더를 고정하고 크랭크샤프트만 회전하는 레이디얼 엔진으로 교체했다. 로터리 엔진보다 더 복잡하고 부피도 더 컸지만, 지금의 자동차 엔진과 유사한 인라인 엔진은 액랭식으로 신뢰성을 높임으로써 더 빠른 비행기를 제작할 수 있게 되었다. 여러 개의 실린더를 직선으로 세워 인라인 엔진이라고 하는데, 앞에서 볼 때 V자 형태를 띤 V엔진도 이 부류에 포함된다. 결국 엔진 개발 경쟁에서 연합군이 승리했으며, 이는 다양한 엔진 제공선을 가졌기 때문이다.


폭격기가 등장하다

단발 엔진의 비행기 유용성은 이미 증명이 되었지만, 비행기 크기가 커져야 할 많은 이유가 있었다. 이 때문에 엔진 여러 개를 장착한 비행기를 생각했지만, 러시아의 시코르스키(Igor Sikorsky)가 그 가능성을 증명하기 전까지 누구도 이러한 비행기에 대해 확신을 갖지 못했다.


1913~14년 무렵, 시코르스키의 시험 비행이 성공하자 전쟁 무기로서의 다발 엔진 비행기의 등장은 시간문제가 되었다. 그는 초기의 2발 엔진 비행기 르 그랑(Le Grand)를 시작으로 1914년 일리야 무로메츠(Ilya Muromets. 러시아 신화에 등장하는 영웅의 이름)을 제작하여 무려 2600킬로미터를 비행했다. 이때 엔진 1~2개가 문제가 생겨도 비행에는 문제가 없다는 것이 증명되었다.


한편, 1915년 이탈리아가 연합국 편에 참전하여 제1차 세계대전에 끼어드는데, 이탈리아군에는 앞으로 비행기를 전략적으로 이용해야 한다고 강력하게 주장한 줄리오 두에(Giulio Douhet)가 있었다. 그의 친구 잔니 카프로니(Gianni Caproni)는 그의 영향을 받아 대형폭격기 설계에 주력했는데, 엔진 3발을 장착한 카프로니(Caproni Ca. 4)가 바로 대표적인 폭격기였다.


줄리오 두에가 주장한 전략폭격(strategic bombing)은 이렇듯 두 발 이상의 엔진을 장착한 폭격기가 나타나면서 현실화되었다. 두에는 제1차 세계대전 당시 연합국이었던 이탈리아가 이러한 폭격 개념으로 독일을 이길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이미 제1차 세계대전에 영국과 독일 양측에서 전략폭격을 실시했다. 전략폭격 작전은 장거리 비행기 기술을 발전시키는 긍정적인 면이 있었지만, 제2차 세계대전에는 폭격기의 성능이 크게 향상되면서 양쪽 모두가 큰 피해를 입었다. 특히 이 개념은 후방 민간인에 대해서도 군사 공격을 정당화했으므로 독일의 공업지대인 드레스덴(Dresden) 등 많은 지역에서 엄청난 인명 피해를 입었다.


제1차 세계대전의 영향

제1차 세계대전이 항공 기술사에서의 의미는 겨우 날기 시작했던 비행기가 지금 현대전의 의미에서도 큰 차이가 없는 전술ㆍ전략적인 무기로 변모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기술의 발전은 비약적이었다. 정찰기에서 폭격기에 이르기까지 모든 형태의 비행기가 만들어지고 사용되었다.


제1차 세계대전 동안 대체로 독일의 전투기와 항공 기술이 우위인 것으로 평가받지만 그 차이는 큰 것 같지 않다. 반면, 독일의 비행기 생산량은 영국과 프랑스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했고, 연료와 파일럿도 부족했다.


마침내 연합군의 미군 투입과 미국의 경제적인 원조로 독일에 결정적인 패배를 안겨주었다. 제1차 세계대전의 결과인 베르사유 조약(Treaty of Versailles. 1919년 6월 28일 조인됨)에 따라 독일군은 항공기를 일절 제작할 수 없었다(물론 연합국의 감시를 피해 독일은 항공 기술을 계속 발전시켰다). 항공기 기술 개발은 전쟁 후에도 계속되었고, 끊임없는 항공 기술의 발전으로 이제 대량 인명 피해는 다음 전쟁에서는 피할 수 없게 되었다. 



시코르스키(Igor Ivan Sikorsky): 헬리콥터의 아버지

이고르 시코르스키(Igor Ivan Sikorsky, 1889~1972)는 헬리콥터라는 특이한 항공기를 인류에게 선물해 준 인물이다. 1941년 그가 올라탄 8.5미터 길이의 VS-300 헬리콥터가 수직 이착륙기로 가장 오랫동안 하늘에 머문 신기록을 세운 이래로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듯이 그는 헬리콥터, 곧 회전익기를 실용화했다. 하지만 그는 고정익기, 즉 비행기의 발전에도 커다란 영향을 준 개척자였다.


소년 시절의 꿈에 도전하다

그는 현재의 우크라이나 키예프(Kiev)에서 제정 러시아를 옹호하는 민족주의 성향의 가정에서 태어났다. 어머니는 의대를 나온 학자로서 시코르스키에게 레오나르도 다 빈치에 관한 이야기와 여러 이론을 가르쳐 주는 등 큰 영향을 주었다. 또 키예프 대학 교수였던 아버지를 따라 독일을 여행하면서 자연과학을 좋아하게 되었으며, 12세 때 집에서 고무줄로 헬리콥터와 같은 원리의 장난감을 만들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집안에 화학 실험실이 있을 정도로 집이 컸다고도 한다.


상트페테르부르크(Sankt-Peterburg) 왕립 해군학교에서 공부했지만 엔지니어야말로 자신이 갈 길이라고 믿고 학교를 그만둔다. 1908년 여름, 그는 독일로 떠났고 때마침 라이트 형제가 르망(Le mans)에서 선회 비행 등을 선보이며 최초의 비행기로 유럽의 언론에 대서특필된 사실을 알게 된다. 이 사실을 접하는 순간 항공 기술을 공부하기로 결심했고, 결정적으로 그의 삶을 바꾸게 된 계기가 되었다. 이때 이미 그는 수직 이착륙을 하는 항공기를 만들 수 있다고 생각했다.


당시 항공 기술을 선도하고 있던 나라는 프랑스였다. 1909년, 그는 프랑스의 가장 유명한 항공-자동차 기술학교(Ecole des Techniques Aeronautiqueset de Construction Automobile)에서 항공 기술을 공부하기 위해 파리로 갔다. 아버지는 지원을 해주었지만, 친척들은 헛된 꿈을 꾼다고 생각했다. 그래도 그는 좌절하지 않고 직접 헬리콥터를 만들 작정으로 좋은 엔진을 찾아 나섰다. 마침내 고장이 적고 단순한 3기통 25마력의 안차니(Anzani) 엔진을 구입하여 러시아로 돌아간다.


1910년, 엔진 25마력의 비행기S-2가 몇 미터를 날아올랐다. 시험을 거듭하여 나중에는 좌석을 세 개 배치한 비행기를 만들었지만 엔진 고장으로 추락하고 말았다. 엔진 흡입구에 모기가 들어가 벌어진 사고였는데, 비행기 특성상 작은 문제가 큰 사고로 이어진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이를 계기로 그는 엔진이 고장나더라도 날 수 있는 비행기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그의 다발 엔진(multi engines- 여러 대의 엔진 중에 한두 대가 고장이 나더라도 계속 운항을 할 수 있는 - 개념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대형 비행기의 선구자가 되다

1912년, 그가 만든 S-6이 모스크바 항공대회에서 1등을 거두자 곧 러시아 발트 철도제작회사(Russian Baltic Railroad Car Works, R-BVZ)의 항공부문 수석 엔지니어가 되었다. 당시 러시아에서 가장 큰 공업회사였다.


그의 첫 임무는 군에서 사용할 비행기 제작이었고, 이미 그는 다발 엔진 비행기를 생각했던 터라 곧 실행에 옮겼다. 비행기의 크기가 엄청나게 커서 직원들이 ‘그랑(Le Grand)’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처음에 쌍발이었던 그랑은 곧 4발 엔진을 장착하고 ‘볼쇼이 발티스키(Bolshoi Baltiysky, Great baltic. 위대한 발트)’ 또는 ‘러스키 비트야즈(Russky Vityaz, Russian knight. 러시아 기사)’라는 이름의 복엽기로 발전했다.


당시의 비행기와는 형태가 많이 다르고, 4.5톤 무게에 크기도 당시 상식으로는 너무 컸던 탓에 사람들은 하늘을 날 수 없으리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 비행기는 48회 비행에 성공했고, 러시아 황제 니콜라스 2세가 그를 초청해 시범 비행을 관람했다. 이에 크게 감명받은 황제는 다이아몬드가 박힌 금시계를 선물로 보냈다. 그때 그의 나이 겨우 24세였다.


그의 시험이 성공하기 전까지, 엔진이 여러 대인 비행기가 운항 중에 하나 또는 그 이상의 엔진에 문제가 생길 때 어떤 일이 벌어질지 아무도 몰랐다. 그저 비행기가 돌 것이라거나 전혀 조종할 수 없을 것이라는 등의 예상이 지배적이었다. 마침내 그의 시험으로 이제 다발 엔진이 더 안전하다는 것이 입증되었다.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그는 황제의 명을 받아 4발 엔진 복엽기를 폭격기로 개조하는 일에도 참여했다. 제1차 세계대전 후 러시아 혁명이 터지자 제정 러시아에 우호적이었던 그는 전 재산을 포기하고, 1918년 프랑스로 이주했다가 1919년 다시 미국으로 이민을 가게 된다.


전쟁이 끝나고 비행기에 대한 관심이 사라진 상황에서, 에디슨(Thomas Edison)과 포드(Henry Ford)에게 감명을 받았던 그는 미국에서 더 많은 기회를 얻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미국에서 헬리콥터를 처음 만든 계기는 그렇게 마련되었다.


마침내 소년의 꿈을 이루다

1935년, 그는 이미 로터 하나와 이 로터의 회전으로 기체에 작용하는 반작용 토크를 상쇄하기 위한 꼬리 로터에 관한 특허(미국 특허 1994488)를 받아 놓은 상태였다.


물론 그의 헬리콥터 비행 개념이 100퍼센트 그의 독창적인 아이디어만으로 이루어진 것은 아니었다. 1912년, 러시아 과학자 보리스 유리예프(Boris Yuryev, 1889~1957)는 꼬리에 작은 수직 프로펠러를 장착하면 기체가 반대로 도는 문제를 극복할 수 있다고 했고, 아르헨티나 엔지니어 라울페스카라(Raul Pateras de Pescara, 1890~1966)는 로터 날개 각각의 피치를 바꿔 헬리콥터가 다른 방향으로 기울어지는 혁신적인 기술을 선보였다. 또한 프랑스인 폴 코르뉴(Paul Cornu, 1881~1944)와 미국인 헨리 벌리너(Henry Berliner, 1895~1970) 같은 발명가들이 헬리콥터 제작을 시도하고 있었다.


최초의 현대적인 헬리콥터로 알려진 VS-300은 제작된 이후에도 수많은 시험을 거듭했다. 1939년 9월 14일, 시코르스키는 처음으로 VS-300에 올랐는데 갑작스러운 수직 상승에 대비해서 무거운 추를 매달아둔 상태였다. 수평 보조 로터의 제거는 VS-300의 군사용 버전인 XR-4에서 가능해졌다. VS-300보다 두 배가량 컸지만, 어느 방향으로든 부드럽게 움직일 수 있었다.


1942년 5월, 약 1200킬로미터를 비행하여 군에 인도된 XR-4는 처음 본 사람들에게는 낯선 항공기였다. 풍차 날개가 날고 있다는 목격담이 알려지기도 했다. 이 XR-4가 R-4란 이름으로 1942년 대량 생산된 최초의 헬리콥터였다. 그가 소년 시절에 꾸었던 꿈이 40년 만에 실현된 것이었다. 그가 꿈 꾼 항공기- 자동차처럼 집 앞에 세워두는 탈것 -는 실현되지 않았지만, 헬리콥터의 유용성은 확실했다. 특히 한국전쟁에 투입되어 시각을 다투는 절박한 순간에 많은 부상병들을 헬리콥터로 이송하여 생존율을 높였다. 화물 운송의 편리성이 입증된 후 이와 같은 급박한 모든 상황에서 헬리콥터는 분명히 필요한 항공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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