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침

   
정민
ǻ
김영사
   
14000
2012�� 03��



■ 책 소개


“일침, 그 한 바늘 끝에 달아난 마음이 돌아온다!” 
한국의 대표적 지성이 처음 선보이는 마음과 세상에 대한 사유 
 
고전에서 시대정신을 길어 올리는 지식인 정민 교수가 처음 선보이는 마음과 세상에 대한 사유. 우리 고전에 천착했던 한문학자, 문화사 전반으로 영역을 넓힌 인문학자가 내면의 웅숭깊은 성찰, 현실에 대한 통렬한 비판으로까지 사유의 폭을 넓혔다. 이 책은 사회적 갈등이 팽배한 어지러운 세상에서 잃어버린 나를 어떻게 찾아야 할지, 달아난 나와 어디서 만나야 할지 등 네 글자의 ‘일침’을 통해 살펴본다. 마음의 표정, 공부의 칼끝, 진창의 탄식, 통치의 묘방 4부로 나누어 마음을 다스리고, 사물과 세상을 바라보는 넓은 시야를 제공한 책이다. 

■ 저자 정민
저자 정민(鄭珉)은 충북 영동 출생. 한양대 국문과를 졸업하고 모교 국문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지식이 넘쳐나는 세상일수록 간명한 통찰이 필요하다. 네 글자밖에 안 되는 언어로 내면의 웅숭깊은 성찰, 현실에 대한 통렬한 비판을 전한다. 그동안 연암 박지원의 산문을 꼼꼼히 읽어 『비슷한 것은 가짜다』와 『고전 문장론과 연암 박지원』을 펴냈다. 18세기 지식인에 관한 연구로는 『18세기 조선 지식인의 발견』과 『다산선생 지식경영법』 『미쳐야 미친다』 『다산의 재발견』『삶을 바꾼 만남』 등이 있다. 청언소품淸言小品에 관심을 가져 『마음을 비우는 지혜』 『내가 사랑하는 삶』 『한서 이불과 논어 병풍』 『돌 위에 새긴 생각』, 『다산어록청상』 『성대중 처세어록』 『죽비소리』 등을 펴냈다.

이 밖에 옛 글 속 선인들의 내면을 그린 『책 읽는 소리』 『스승의 옥편』 등의 수필집과 한시 속 신선 세계의 환상을 분석한 『초월의 상상』, 문학과 회화 속에 표상된 새의 의미를 찾아 『한시 속의 새, 그림 속의 새』, 조선 후기 차 문화의 모든 것을 담아서 『새로 쓰는 조선의 차 문화』 등을 썼다. 한시의 아름다움을 탐구한 『한시 미학 산책』과 어린이를 위한 한시 입문서 『정민 선생님이 들려주는 한시 이야기』 외에, 사계절에 담긴 한시의 시정을 정리한 『꽃들의 웃음판』을 펴냈다.

■ 차례
제1부 마음의 표정 
 일기일회一期一會 
-일생에 단 한 번 딱 한 차례의 만남 
 심한신왕心閒神旺 
-마음이 한가하면 정신이 활발하다 
 점수청정點水蜻蜓
-인생의 봄날은 쉬 지나간다 
 선성만수蟬聲滿樹 
-매미 울음소리에 옛 사람을 그리네 
 관물찰리觀物察理 
-사물을 보아 이치를 살핀다 
 사간의심辭間意深 
-말은 간결해도 뜻은 깊어야 
 허정무위虛靜無爲 
-텅 비어 고요하고 담박하게 무위하라 
 욕로환장欲露還藏 
-보여줄 듯 감출 때 깊은 정이 드러난다 
 전미개오轉迷開悟 
-미혹을 돌이켜 깨달음을 활짝 열자 
 감이후지坎而後止 
-구덩이를 만나면 넘칠 때까지 기다린다 
 중정건령中正健靈 
-알맞고 바르면 건강하고 영활하다 
 지지지지知止止止 
-그칠 데를 알아서 그쳐야 할 때 그쳐라 
 간위적막艱危寂寞 
-시련과 적막의 시간이 필요하다 
 사상념려思想念慮 
-생각 관리가 경쟁력이다 
 남산현표南山玄豹 
-배고픔을 견뎌야 무늬가 박힌다 
 송영변어松影變魚 
-소나무 그림자를 무늬로 지닌 물고기 
 담박영정淡泊寧靜 
-담박으로 헹궈 내어 고요 속에 침잠하라 
 작비금시昨非今是 
-지난 잘못을 걷고 옳은 지금을 간다 
 호추불두戶樞不蠹 
-문지도리는 결코 좀먹지 않는다 
 이명비한耳鳴鼻鼾 
-귀 울음과 코 골기, 어느 것이 문제일까? 
 어묵찬금語嘿囋噤
-말해야 할 때와 침묵해야 할 때 
 함장축언含章蓄言 
-안으로 머금어 가만히 쌓아 두라 
 옥촉서풍玉薥西風 
-아만을 버리고 참나를 돌아보다 
 습정투한習靜偸閑 
-고요함을 익히고 한가로움을 훔쳐라 
 설니홍조雪泥鴻爪 
-눈 진흙 위에 난 기러기의 발자국 

제2부 공부의 칼끝 
 자지자기自止自棄 
-제풀에 멈추면 성취가 없다 
 십년유성十年有成 
-십 년은 몰두해야 성취를 이룰 수 있다 
 피지상심披枝傷心 
-곁가지를 쳐 내면 속줄기가 상한다 
 소년등과少年登科 
-젊은 날의 출세는 큰 불행의 시작 
 상동구이尙同求異 
-같음을 숭상하되 다름을 추구한다 
 鼯鼠오능鼯鼠五能 
-균형 잡힌 안목으로 핵심 역량을 길러라 
 찬승달초讚勝撻楚 
-칭찬이 매질보다 훨씬 더 낫다 
 심입천출深入淺出 
-세게 공부해서 쉽게 풀어낸다 
 독서망양讀書亡羊 
-책에 빠져 양을 잃다 
 파초신심芭蕉新心 
-새 잎을 펼치자 새 심지가 돋는다 
 평생출처平生出處 
-시련과 역경 속에 본바탕이 드러난다 
 의금상경衣錦尙絅 
-비단옷을 입고는 덧옷으로 가린다 
 문심혜두文心慧竇 
-글의 마음을 얻고 슬기 구멍이 활짝 열려야 
 발초첨풍撥草瞻風 
-풀을 뽑아 길을 낸 후 풍모를 우러른다 
 교부초래敎婦初來 
-처음부터 가르쳐라 
 북원적월北轅適越 
-북으로 가려던 수레가 남쪽으로 가다 
 묘계질서妙契疾書 
-순간의 깨달음을 놓치지 말고 메모하라 
 해현갱장解弦更張 
-거문고 줄을 풀어 팽팽하게 다시 맨다 
 견골상상見骨想象 
-이미지를 유추해서 본질에 도달하라 
 우작경탄牛嚼鯨呑 
-소가 되새김질 하고, 고래가 한입에 삼키듯이 
 이택상주麗澤相注 
-두 개의 연못이 맞닿아 서로 물을 댄다 
 평지과협平地過峽 
-끊어질 듯 이어지다 다시 불쑥 되솟다 
 일자지사一字之師 
-한 글자로 하늘과 땅의 차이가 생긴다 
 광이불요光而不耀 
-빛나되 번쩍거리지 않기를 
 다문궐의多聞闕疑 
-많이 듣되 의심나는 것은 솎아낸다 

제3부 진창의 탄식 
 체구망욕體垢忘浴 
-몸에 때가 있는데 씻지 않는다 
 즐풍목우櫛風沐雨 
-바람으로 머리 빗고 빗물로 목욕하다 
 대기만성大器晩成 
-큰 그릇은 늦게서야 이뤄진다는 말의 슬픔 
 교자이의敎子以義 
-눈에 뵈는 게 없는 세상 
 취문성뢰聚蚊成雷 
-풍문에 현혹되어 판단을 그르치다 
 필패지가必敗之家 
-틀림없이 망하게 되어 있는 집안 
 거전보과鋸箭補鍋 
-책임질 일은 말고 문제는 더 키워라 
 방유일순謗由一 
-비방은 한 사람의 입을 통해 나온다 
 금인삼함金人三緘 
-쇠 사람이 세 번 입을 봉하다 
 예실구야禮失求野 
-사라진 예법을 시골에서 찾는다 
 지상담병紙上談兵 
-이론만 능하고 실전에 약한 병통 
 명철보신明哲保身 
-시비를 분별하여 붙들어서 지킨다 
 화생어구禍生於口 
-모든 재앙은 입에서 비롯된다 
 임사주상臨事周詳 
-일처리는 언제나 꼼꼼하고 면밀하게 
 방무여지旁無餘地 
-여지가 없으면 행실이 각박하다 
 피음사둔詖淫邪遁 
-번드르한 말 속에서 본질을 간파한다 
 상두보소桑土補巢 
-뽕나무 뿌리로 허술한 둥지를 고치다 
 맹인할마盲人瞎馬 
-소경이 애꾸 말을 타고 한밤중에 못가를 간다 
 인양념마因羊念馬 
-양을 팔아 말을 사서 부자가 되는 생각 
 매독환주買櫝環珠 
-본질을 버려두고 말단만을 쫓는 풍조 
 곡돌사신曲突徙薪 
-굴뚝을 굽히고 땔감을 옮겨라 
 발총유자發塚儒者 
-무덤을 파면서도 명분을 내세운다 
 수락석출水落石出 
-물이 줄자 바위가 수면 위로 드러난다 
 기리단금其利斷金 
-두 마음이 하나 되면 무쇠조차 끊는다 
 양묘회신良苗懷新 
-가라지를 솎아내고 좋은 싹을 북돋우자 

제4부 통치의 묘방 
 간군오의諫君五義 
-설득에도 전략이 필요하다 
 쟁신칠인諍臣七人 
-바른 말로 충언하는 신하 일곱만 있으면 
 척확무색尺蠖無色 
-자벌레는 정해진 빛깔이 없다 
 군인신직君仁臣直 
-임금이 어질어야 신하가 곧다 
 불필친교不必親校 
-굳이 직접 하시렵니까? 
육자비결六字秘訣 
-벼슬길에 임하는 여섯 글자의 비결 
 세류서행細柳徐行 
-군기는 장수의 위엄에서 나온다 
 거망관리遽忘觀理 
-분노를 잠깐 잊고 이치를 살펴보라 
 불여류적不如留賊 
-잡은 적을 놓아주어 쓸모를 남겨 둔다 
 노량작제魯梁作綈 
-노량에서 두터운 비단옷을 생산하다 
 봉인유구逢人有求 
-사람만 만나면 손을 내민다 
 덕위상제德威相濟 
-덕과 위엄은 균형을 잡아야만 
 구차미봉苟且彌縫 
-구차하게 모면하고 미봉으로 넘어간다 
 자화자찬自畵自讚 
-제 입으로 하는 칭찬 
 불통즉통不通則痛 
-통하면 안 아프고, 안 통하면 아프다 
 토붕와해土崩瓦解 
-구들이 내려앉고 기와가 부서지다 
 징비후환懲毖後患 
-지난 일을 경계 삼아 뒷근심을 막는다 
 수문심인修文深仁 
-인문을 널리 닦고 인의를 깊게 한다 
 지칭삼한只稱三閒 
-그저 세 가지가 한가로워졌을 뿐 
 용종가소龍鍾可笑 
-용모는 꾀죄죄해도 속마음은 맑았다 
 자웅난변雌雄難辨 
-까마귀의 암수는 분간하기 어렵다 
 애여불공隘與不恭 
-융통성 없는 것과 제멋대로 하는 것 
 발호치미跋胡疐尾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 
 삼일공사三日公事 
-나라 일이 고작 사흘도 못 간다 
 대발철시大鉢鐵匙 
-큰 주발에 밥을 담아 쇠수저로 퍼 먹는다 

 

 

 

 

 




일침


마음의 표정

일기일회一期一會 -일생에 단 한 번 딱 한 차례의 만남

일기(一期)는 일차(一次)이니, 단 한 차례다. 일회(一會)는 딱 한 번의 만남이다. 만세일기(萬歲一期)요 천재일우(千載一遇)는 진(晉)나라 원언백(袁彦伯)의 말이다. 1만 년에 단 한 번, 1천 년에 단 한 차례뿐인 귀한 만남이다. 이 한 번 이 한 순간을 위해 우리는 몇 겁의 생을 기다려 왔다. 단 한 번의 일별(一瞥)에 우리는 불붙는다. 스쳐가는 매 순간순간을 어찌 뜻 없이 보낼 수 있겠는가.


소동파(蘇東坡)의 『승천사의 밤 나들이(記承天寺夜遊)』란 글이다.


원풍 6년 10월 12일 밤이었다. 옷을 벗고 자려는데 달빛이 창문으로 들어왔다. 기뻐서 일어났다. 생각해 보니 함께 즐길 사람이 없었다. 마침내 승천사로 가서 장회민을 찾았다. 회민 또한 아직 잠자리에 들지 않고 있었다. 서로 함께 뜰 가운데를 거닐었다. 뜰 아래는 마치 빈 허공에 물이 잠겼는데, 물속에 물풀이 엇갈려 있는 것만 같았다. 대나무와 잣나무의 그림자였다. 어느 날 밤이고 달이 없었으랴. 어덴들 대나무와 잣나무가 없겠는가? 다만 우리 두 사람처럼 한가한 사람이 적었을 뿐이리라.


元豐六年十月十二日夜 解衣欲睡, 月色入戶, 欣然起行. 念無與樂者, 遂至承天寺尋張懷民. 懷民亦未寢, 相與步於中庭. 庭下如積水空明, 水中藻荇交橫, 蓋竹柏影也. 何夜無月, 何處無竹柏, 但少閑人如吾兩人耳.


달은 어느 밤이나 뜬다. 나무 그림자는 어디에도 있다. 하지만 그날 밤 내 창문으로 넘어온 달빛, 그 달빛에 이끌려 벗을 찾은 발걸음, 마당에 어린 대나무 그림자, 말없이 바라보던 두 사람이 있어 그 달빛 그 그림자가 일생에 하나뿐이요 단 한 번뿐인 것이 되었다. 만남은 맛남이다. 모든 만남은 첫 만남이다. 매 순간은 최초의 순간이다 우리는 경이 속에 서 있다.


관물찰리(觀物察理) -사물을 보아 이치를 살핀다

공주에서 나는 밀초는 뛰어난 품질로 유명했다. 정결하고 투명해서 사람들이 보배로운 구슬처럼 아꼈다. 홍길주(洪吉周,1786~1841)가 그 공주 밀초를 선물로 받았다. 그런데 불빛이 영 어두워 평소 알던 품질이 아니었다. 살펴보니 다른 것은 다 훌륭했는데, 심지가 거칠어서 불빛이 어둡고 흐렸던 거였다. 그는 『수여연필(睡餘演筆)』에서 이 일을 적고 나서 이렇게 덧붙였다.


마음이 거친 사람은 비록 좋은 재료와 도구를 지녔다 해도 사물을 제대로 관찰할 수가 없다.


밀초의 질 좋은 재료가 그 사람의 집안이나 배경이라면, 심지는 마음에 견준다. 아무리 똑똑하고 배경 좋고 능력이 있어도, 심지가 제대로 박혀 있지 않으면 밝은 빛을 못 낸다. 겉만 번드르한 헛똑똑이들이다. 뿔 있는 짐승은 윗니가 없다. 날개가 있으면 다리는 두 개뿐이다. 꽃이 좋으면 열매가 시원찮다. 이런 관찰을 나열한 후 이인로(李仁老, 1152~1220)가 내린 결론은 이렇다. “사람도 다를 게 없다. 재주가 뛰어나면 공명은 떠나가서 함께하지 않는다.” 『파한집(破閑集)』에서 한 말이다. 이 말을 받아 고상안(高尙顔, 1553~1623)은 이렇게 노래했다.


소는 윗니 없고 범은 뿔이 없거니 천도는 공평하여 부여함이 마땅토다.

牛無上齒虎無角 天道均齊付與宜


뛰어난 재주로 명성과 공명을 함께 누리려 드는 것은 뿔 달린 범과 같다. 기다리는 것은 재앙뿐이니 어찌 삼가지 않겠는가. 어떤 사람이 야생 거위를 잡아 길렀다. 불에 익힌 음식을 먹이자 거위가 뚱뚱해져서 날지 못했다. 어느 날인가부터 거위가 음식을 먹지 않았다. 한 열흘쯤 굶더니 몸이 가벼워져서 허공으로 날아가 버렸다. 이 이야기를 전해들인 이익(李瀷, 1681~1763) 이 말했다. “지혜롭구나. 스스로를 잘 지켰도다.” 먹어서 안 될 음식을 양껏 먹고, 그 맛에 길들여져서 살을 찌우다, 마침내 날지 못하게 되어 잡아먹히고 마는 인간 거위는 우리 주변에 얼마든지 많다. 성호 이익 선생은 77항목에 걸친 관물 일기를 남겼다. 『관물편(觀物篇)』이 그것이다.


사물 속에 무궁한 이치가 담겨 있다. 듣고도 못 듣고, 보고도 못 보는 뜻을 잘 살필 줄 알아야 한다. 그것을 옛 사람들은 관물(觀物)이라고 했다. 사물에 깃든 이치를 찬찬히 들여다보는 것은 찰리(擦理)다. 눈으로 보지 않고 마음으로 보고, 마음을 넘어 이치로 읽을 것을 주문했다.


중정건령(中正健靈) -알맞고 바르면 건강하고 영활하다

다도(茶道)는 차와 물과 불이 최적의 조합으로 만나 이뤄 내는 지선(至善)의 경지를 추구한다. 초의 (草衣) 스님은 차 안의 신령한 기운을 다신(茶神)이라 하고, 다신을 불러내려면 차와 물과 불이 ‘중정 (中正)’의 상태로 만나야 함을 강조했다.


먼저 좋은 찻잎을 제때 따서 법대로 덖는다. 찻잎을 딸 때는 계절을 따지고 시간과 날씨도 가린다. 덖을 때는 문화(文化)와 武火, 즉 불기운의 조절이 중요하다. 물은 그 다음이다. 좋은 물이라야 차가 제 맛을 낸다. 다만 알맞게 끓여야 한다. 물을 덜 끓으면 떫고, 너무 끓으면 쇠다. 이제 차와 물이 만난다. 차를 넣어 우린다. 적당량의 차를 적절한 시점에 넣고, 제때에 따라서 우려낸다. 이러한 여러 과정 중에 하나만 잘못되어도 다신(茶神)은 결코 제 모습을 보여 주지 않는다. 찻잎을 따서 덖고, 찻물을 길어 끓이며, 찻잎을 넣어 우리는 모든 과정에 ‘중정’의 원리가 적용된다. 더도 덜도 아닌 꼭 알맞은 상태가 ‘중정’이다. 다도는 결국 이 각각의 단계를 효율적으로 관리하는 체계를 얻는 데 달렸다.


인간의 삶에 비춰 봐도 중정의 원리는 중요하다. 차가 정신이면 물은 육체에 견줄 수 있다. 정신과 육체가 조화를 유지하고, 문무를 겸비하며, 때의 선후를 잘 판단하는 것이 성공의 비결이다. 세상이 나를 알아줘도 내가 그에 걸맞은 자질을 못 갖추었다면 물은 좋은데 차가 나쁜 것이다. 내 준비가 덜 됐는데 세상이 나를 부르거나, 내가 준비되었을 때 세상이 나를 돌아보지 않음은 문무)文武_가 조화를 읽은 것에 해당한다. 비록 차와 물과 불이 조화를 얻는다 해도, 너무 서두르거나 미적거려 중정을 잃으면 차 맛을 버리고 만다. 과욕을 부려 일을 그르치거나, 상황을 너무 낙관하다가 다 된 밥에 코를 빠뜨리는 경우다.


초의는 『동다송)東茶頌_』에서 노래한다.


체(體)와 신(神)이 온전해도 중정(中正) 잃음 염려되니 중정이란 건(健)과 영(靈)이 나란함에 불과하네.

體神雖全 猶恐過中正 中正不過健靈倂


차 좋고 물 좋아도 중정을 잃으면 차가 제 맛을 잃고 만다. 중정은 차건수령(茶健水靈), 즉 물이 활기를 잃지 않아 건강하고 차가 신령스런 작용을 나타내는 최적의 상태를 뜻한다. 다신은 그제야 정체를 드러낸다. 사람 사는 일도 다를 게 하나 없다. 삶이 중정의 최적 상태를 유지하려면 어찌 잠시인들 경거망동할 수 있겠는가?



공부의 칼끝

소년등과(少年登科) -젊은 날의 출세는 큰 불행의 시작

옛 사람은 사람의 세 가지 불행을 이렇게 꼽았다. 첫째가 소년등과(少年登科)다. 너무 일찍 최고의 자리에 오르는 것이다. 이제 내려올 일만 남았는데 남은 날이 너무 길다. 소년등과가 나쁘다기보다, 너무 이른 성취로 학업을 폐하여 더 이상의 진취가 없게 됨을 경계한 말이다. 둘째는 부형의 형세에 기대 좋은 벼슬에 오름이다. 애쓰지 않고 못 가진 것을 누리다 보니, 그 위치가 얼마나 귀하고 어려운 자리인지 몰라 함부로 굴다가 제풀에 무너진다. 셋째는 재주가 높고 문장마저 능한 것이다. 거칠 것이 없고 꿀릴 데가 없다. 실패를 모르고 득의양양하다가 한순간에 나락에 굴러 떨어진다. 어찌 살피고 삼가지 않겠는가? 이 세 가지는 누구나 선망하는 것인데 선인들은 오히려 이를 경계했다. 차도 넘치지 않고, 높아도 위태롭지 않으려면 자신을 낮추고 숙이는 겸손이 필요하다.


김일손(金馹孫,1464~1498)은 잘 나가던 이조좌랑을 사직하고 사가독서(賜暇讀書)를 청하는 상소문을 올렸다. 그는 옛 사람이 경계한 ‘소년등과일불행(少年登科一不幸)’이 바로 자신을 두고 한 말이라며, 너무 젊은 나이에 요직을 두루 거쳐 큰 은총을 입었으니, 이쯤에서 그치고 독서로 자신을 충전하겠다고 사직은 간청했다.


화복은 문이 따로 없고 다만 그 사람이 불러들이는 것입니다. 사람의 재앙이 없다 해도 반드시 하늘의 형벌이 있을 것인, 매양 이 생각만 하면 오싹하여 떨릴 뿐입니다. 다만 성상께서 보전해 주소서.


1878년 민영환(閔泳煥,1861~1905)이 규장각 대교에 임명되자 역량이 안 되니 취소해 달라는 상소를 올렸다.


직임이 화려할수록 졸렬함이 더 드러나고, 돌아보심이 두터울수록 송구함만 늘어갑니다. 주제넘게 차지하고서도 당연히 온 것으로 여기고, 잠시 받든 것을 본래 있던 것처럼 할 수는 없어 진심으로 우러러 성상께 아룁니다. 바라옵건대 굽어 살펴 속히 신에게 제수하신 직책을 거두어 주소서.


가득참을 경계하는 선인들의 마음이 이러했다. 젊은 날의 빠른 성취는 부러워할 일이 못 된다. 살얼음을 밟듯 전전긍긍해야 할 일이다. 한 때의 환호가 차디찬 조소로 돌아오는 시간은 뜻밖에 짧다. 돌아보고 낮추고 숙여서 내실을 기르는 것이 옳다. 입은 하나고 귀가 둘인 까닭은 듣기를 말하기보다 두 배로 하라는 뜻이다.


해현갱장(解弦更張) -거문고 줄을 풀어 팽팽하게 다시 맨다

해현갱장(解弦更張)! 느슨해진 거문고 줄을 다시 팽팽하게 바꾸어 맨다는 뜻. 어려울 때일수록 긴장을 늦추지 않고 기본으로 돌아가 원칙에 충실하자는 다짐을 해 본다. 편안함은 예술가들이 빠져들기 쉬운 치명적 독이자 유혹이다.


관성과 타성의 매너리즘에 빠지지 않고, 초심의 긴장을 유지하겠다는 다짐이다. 이만 하면 됐다 싶을 때가 위기다. 이젠 괜찮겠지 싶으면 바꾸라는 신호다. 기성에 안주하면 예술은 없다. 자족은 결코 용납되지 않는다.


그 반대는 교주고슬(膠柱鼓瑟)이다. 줄이 잘 맞았을 때 기러기발을 아예 아교로 붙여 놓고 그 상태를 계속 유지해 보겠다는 심산이다. 초짜들은 줄 맞추기가 영 어렵다. 맞은 상태가 내처 유지되면 좋겠는데, 거문고 줄은 날씨나 습도의 영향에 민감하다. 제멋대로 늘어났다 수축되었다 한다. 하지만 기러기발을 아교로 딱 붙여 놓으면 당장에는 편할지 몰라도 그때그때 제대로 된 음을 맞출 수가 없다. 변화에 대처할 수가 없다.


줄이 낡아 오래되면 아예 줄을 죄 풀어서 새 줄로 다시 매야 옳다. 늘어지던 소리가 차지게 되고, 흐트러진 음이 제 자리를 찾는다. 이것이 해현갱장(解弦更張)이다.


『한서(漢書)』「동중서전(董仲舒傳)」에 나온다. 한나라는 진나라를 이었다. 하지만 진나라의 제도와 마인드로는 나라에 새로운 기운을 불어넣을 방법이 없었다. 그는 옛 제도로 새 나라의 질서를 바로잡으려는 것은 끓는 물로 뜨거운 물을 식히고, 섶을 안고 불을 끄겠다는 격이라고 했다. 거문고 줄이 영 안 맞으면 줄을 풀어 다시 매는 것이 옳다. 정치가 난맥상을 보이면 방법을 바꿔 다시 펼쳐야만 질서가 바로 잡힌다. 줄을 바꿔야 할 때 안 바꾸면 훌륭한 악공도 연주를 못한다. 고쳐야 하는데 안 고치면 아무리 어진 임금도 다스릴 수가 없다.


해현갱장해야 할 때 교주고슬을 고집하면 거문고를 버린다. 고집을 부려 밀어붙이는 것만 능사가 아니다. 제 악기가 내는 불협화음을 못 듣고, 듣는 이의 귀만 탓한다. 사정이 이런데도 전에 괜찮았으니 앞으로도 문제 없을거야 하며 아교만 찾는다. 남들은 듣기 괴롭다고 난리인데 제 귀에만 안 들린다. 줄을 풀어 새 줄을 매야 할 대가 된 것이다.



진창의 탄식

피음사둔(詖淫邪遁)-번드르한 말 속에서 본질을 간파한다

제자 공손추(公孫吜)가 맹자에게 물었다. “선생님의 장점은 무엇입니다?” 맹자가 대답했다. “내 장점은 말을 알고 내 호연지기를 잘 기르는 것이다.” 공손추가 다시 묻는다. “말을 안다는 게 어떤 건가요?” “한쪽으로 치우친 말을 들으면 가려진 것을 알고, 방탕한 말에서 빠져 있음을 알며, 사특한 말을 듣고는 도리는 벗어났음을 알고, 회피하는 말에서 궁함을 알아보는 것이지. 이런 마음이 생겨나 정치를 해치고, 정치에 펴서 일을 망치는 법이다. 성인께서 다시 나오셔도 반드시 내 말에 동의하실 게다.”


지언(知言)은 말귀를 잘 알아듣는 것이다. 누구나 그럴 법하게 보이려고 꾸미고 보탠다. 얼핏 들으면 다 옳은 말이고, 전부 충정에서 나온 얘기다. 안 될 일이 없고 해결 못할 문제가 없다. 찬찬히 보면 다르다.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피사가 있고, 외곬에 빠져 판단을 잃은 음사가 있다. 바른 길을 벗어난 사사가 있고, 궁한 나머지 책임을 벗으려고 돌려막는 둔사가 있다. 이 피음사둔(詖淫邪遁)의 반지르한 말을 잘 간파해서 본질을 꿰뚫어 보는 안목을 맹자는 자신의 장점으로 꼽았다.


누구나 무슨 말을 하면 곧이 듣기지 않고, 속내가 궁금하다. 도처에 숨겨진 함정과 그물에 방심하면 자칫 당한다. 말이 갈수록 마구잡이라 피음사둔이 오히려 격조있게 들릴 때도 있다. 다시는 안 볼 것처럼 마구 해 대는 폭로와 비방, 남에게 책임을 다 떠밀고 저만 살고 보자는 독선, 같이 죽자고 물고 늘어지는 억지. 이게 요즘 정치 언어의 풍경들이다. 맹자의 지언까지 갈 것도 없는 저급한 속물의 언어가 판을 친다.


수락석출(水落石出) -물이 줄자 바위가 수면 위로 드러난다

1082년 7월 16일 11월 15일, 소동파는 적벽에 놀러가 전후 「적벽부(赤壁賦)」를 각각 남겼다. 당시 그는 왕안석의 신법(新法)을 반대했다가 황주(黃州) 땅에 유배된 죄인의 신분이었다. 7월의 흥취가 거나했던지, 동파는 11월 보름에 벗들과 다시 겨울 뱃놀이를 감행한다. 똑같은 장소임에도 이곳이 그때 여긴가 싶으리만치 느낌이 달랐다. 맑은 바람이 천천히 불어오고, 물결조차 일지 않던 그 강물은 물살이 빨라져 소리를 냈다. 서리 이슬이 하얗고 무성하던 잎은 모두 땅에 지고 없었다.


배가 적벽 아래로 들어서자 깎아지른 벼랑은 줄어든 물 때문에 갑자기 천 척이나 높아 보였다. 훌쩍 키가 커진 산으로 인해 하늘의 달도 유난히 조그맣게 느껴진다. 물속에 잠겼던 바위가 수면 위로 삐죽 솟았다. 그는 자꾸 딴 곳에 온 것만 같아서 두리번거리다가 “고작 날짜가 얼마나 지났다고, 강산을 알아볼 수조차 없구나!” 하는 탄식을 발했다.


남효온(南孝溫,1454~1492)은 「적벽승주(赤璧乘舟)」에서 이때 일을 이렇게 노래했다.


신법(新法)은 천하에 가득 넘치고

세상은 한밤이라 새지 않누나.

쓸쓸히 떠돌던 임술년 가을,

동정호는 저 하늘 끝에 있구나.

길게 요조장(窈窕章)을 노래하다가

호의현상(縞衣玄裳) 학(鶴)에게 마음 붙였지.

바위 밑동 가을 물에 잠기어 있고

산은 높아 흰 달이 조그마하다.


新法滿天下 人間夜未曉

飄零壬戌秋 洞庭天一表

長歌窈窕章 托契玄裳鳥.

石脚蘸秋水 山高白月小


세상은 캄캄한 어둠 속인데, 불의한 세력이 그 틈을 타고 횡행한다. 마음 맑은 사람은 변방으로 쫓겨나 하늘 끝 절벽 아래서 조그맣고 창백한 달빛을 보며 새벽을 기다린다.


수락석출(水落石出)! 초가을에는 안 보이던 바위가 제 생긴 대로의 몰골을 수면 위로 드러냈다. 소동파야 적벽강의 달라진 경물을 묘사하자는 뜻이었지만, 후대에는 흑막이 걷혀 진상이 명명백백하게 드러났다는 의미로 쓴다. 추운 시절이 왔다. 물길이 넉넉할 때는 다 품어 안아 가려졌던 실상이 하나둘 드러난다. 저기 저런 게 숨어 있었구나. 하마터면 배 밑창에 구멍을 낼 뻔했다. 섬짓하다. 잠깐 만에 저렇듯 드러내는 것은 보기에 민망하다. 기실 산도 물도 바위도 원래 변한 것이 없다. 내 눈이 이리저리 현혹된 것일 뿐.



통치의 묘방

징비후환(懲毖後患) -지난 일을 경계 삼아 뒷근심을 막는다

활을 들면 좀먹은 부스러기가 술술 쏟아지고, 화살을 들자 깃촉이 우수수 떨어진다. 칼을 뽑으니 칼날은 칼집에 그대로 있고 칼자루만 쑥 뽑혀 나온다. 총은 녹이 슬어 총구가 꽉 막혔다. 다산 정약용이 「군기론(軍器論)」에서 당시 각 군현에 속한 무기고의 상황을 묘사한 대목이다. 갑작스런 환난이 닥쳤을 때 온 나라가 맨손뿐인 형국이니, 이는 외적 앞에 군대를 맨몸으로 내보내는 것과 같다고 했다. 지금 당장 위급한 상황이나 눈앞의 근심이 없다 하여 군대에 제대로 된 시스템이 작동하지 않는다면 어찌 위난에서 나라를 지켜 낼 수 있겠느냐고 질책했다.


또 근세에 남의 나라를 치려는 자는 기이한 기계와 교묘한 물건을 만들어, 한 사람이 만 명의 목숨을 앗아가고, 가만히 앉아서 남의 성을 무너뜨린다. 중국과 일본은 엄청난 화력을 지닌 홍이포(紅夷胞)를 이미 오래 전부터 사용하고 있다. 전쟁이 일어나면 이들은 이러한 군기(軍器)를 앞세워 다시 쳐들어올 것이다. 그런데도 조선의 군사 훈련이란 것은 활고자가 벗겨지고 살촉도 없는 화살로 백 보 밖에 과녁을 세워 놓고 이를 맞추게 하는 것이 고작이다. 맞추면 절세의 묘기라고 찬탄하니 이 얼마나 순진하고 소박하며 사리를 분간하지 못하는 짓인가 하고 통탄했다.


유성룡은 임진왜란이 끝난 후 『징비록(懲毖錄)』을 남겼다. 징비는 『시경』의 「소비 小毖」편에 나오는 “내가 징계함은 후환을 삼감일세”는 구절에서 따온 말이다. 책 속에는 일본에 대한 규탄보다 우리 내부 문제에 대한 냉철한 분석과 자기반성이 담겨 있다. 그는 이후 전란의 처절한 체험과 문제점을 살펴, 훈련도감을 설치하고 군사 교본을 새로 마련해 훈련을 조직화하며, 무너진 산성을 수리하는 등 국방의 기틀을 세웠다.


『조선왕조실록』숙종 38년 4월 22일자 기사에 보면 통신사가 일본에 갔다가 이 책이 그곳까지 흘러들어 가 읽히는 것을 보고 놀라 왜관을 폐쇄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내용이 나온다. 선인의 간절한 진단과 처방은 늘 저들이 먼저 연구 분석하고, 우리는 소 다 잃고 나서 외양간 고치느라 항상 바쁘다. 나라가 망한 뒤에 충신을 기린다 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의로운 찬양하기보다, 평소의 징비를 바탕으로 위기 상황에서도 흔들림 없이 가동되는 시스템을 갖추는 것이 먼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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