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드코어 히스토리

저   자
댄 칼린
출판사
북라이프
가   격
18,000원(368쪽)
출판일
2020년 10월






하드코어 히스토리


팬데믹의 서막?

과거를 살아가던 인류가 일상적으로 마주했던 질병과 전염병, 그리고 이따금 직면했던 전 세계적인 유행병은 규모 면에서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범위를 초월한다. 오늘날 전 세계적인 유행병이 번져 전 세계 인구의 10퍼센트가 사라진다면 그 파급 효과가 어떨지 상상해 보라. 과거 최악의 유행병이 돌았을 때의 수치에는 근접하지도 않는 수준임에도 오늘날 전 세계 인구수를 고려하면 약 7억 명이 갑자기 사망한다는 뜻이다. 열 명 중 한 명꼴이며 제2차 세계대전 사망자 수의 약 열 배에 해당한다. 그 여파가 상상이 되는가?


역사가 쓰이기 시작했을 때부터 전염병은 인류의 동반자였다

질병은 꾸준한 인류의 동반자였다. 역사가 쓰이기 시작했을 때부터 유행병과 전염병에 관한 기록 역시 함께 나타났다. 고대 기록을 보고 정확히 어떤 질병에 대한 설명인지 판단하기란 쉽지 않지만 일부는 그 정체가 규명되기도 했다.


윌리엄 로즌(William Rosen)은 저서 『유스티니아누스의 벼룩(Justinian’s Flea)』에서 우리 조상들이 직면했던 대표적인 끔찍한 질병을 몇 가지 소개한다. 기원전 5세기에 고대 그리스 의사들은 파상풍, 볼거리, 말라리아가 발생했다고 진단했다. 이 세 질병은 모두 오늘날에 비해 과거에 더 치명적이었음이 틀림없다. 백신과 현대 의학이 등장하기 전까지 대부분의 유년기 질환이 치명적이었던 것과 동일한 맥락에서 이해 가능하다.


기원전 430년, 고대 역사가 투키디데스는 아테네가 펠로폰네소스 전쟁 중에 스파르타 군대에 포위당했을 때 아테네 역병(Plague of Athens)을 목격했다. 이후 3년 동안 10만 명에 달하는 아테네 주민이 사망했다. 로버트 J. 리트먼(Robert J. Littman)에 따르면 이는 아테네 인구 4분의 1에 해당했다. 희생자 가운데는 아테네 역사상 가장 위대한 시민 가운데 하나이자 장군이었고 정치가였던 페리클레스도 있었다. 역병의 정체에 대해서는 아직까지 의견이 분분하지만 2006년에 발견된 공동묘지를 조사한 바에 따르면 장티푸스가 가장 유력한 범인이라고 한다.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죽어서 모두가 세계의 종말이 왔다고 믿었다.”

역사가들이 ‘유스티니아누스 역병’이라고 이름 붙인 이 유행병은 한때 1억 명을 죽음에 이르게 했을 것으로 추정되기도 했다. 현대에는 이 숫자가 지나치게 높은 추정치라고 여겨지기는 하지만 이것만으로도 우리는 당시의 유행병이 얼마나 규모가 큰 사건이었는지 짐작할 수 있다. 유스티니아누스 역병은 중세 시대 흑사병의 예고편과 같았으며 실제로 동일한 병원균에 의해 촉발됐다. 바로 쥐를 숙주로 하는 벼룩에 의해 전파되는 예르시니아 페스티스(Yersinia pestis: 페스트균)였다. 페스트로 인한 죽음은 아주 끔찍했다.


로즌은 극심한 페스트가 창궐한 콘스탄티노플에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이렇게 묘사한다. “매일 도시 주민 가운데 1000명에서 2000명, 때로는 기존 인구의 1퍼센트에 달하는 5000명 정도가 페스트에 감염되었다. 하루는 평범한 열병으로 시작했다가 다음 일주일 동안은 섬망(병으로 인한 정신 착란 증세 - 옮긴이)이 지속되었다. 팔 밑에, 사타구니에, 귀 뒤에 가래톳이 나타나 멜론 크기까지 자랐다. 피가 뭉친 부종이 부어오른 림프샘 신경 말단으로 침투해 극심한 고통을 일으켰다. 이따금 가래톳이 터져 악취를 풍기는 백혈구 덩어리, 그러니까 고름이 쏟아져 나오기도 했다. 가래롯 페스트가 오늘날 전염병학자들이 ‘패혈증’이라고 부르는 질환으로 발전하는 경우도 있었는데 패혈성 페스트의 희생자는 피를 토하며 죽었다.”


유스티니아누스 역병은 1340년대에 ‘흑사병’이라는 새로운 이름으로 다시 등장했다. 이 끔찍한 질병은 역사의 한 페이지에 불쑥 모습을 드러냈다 사라진 지 800년 만에 다시 서방 세계를 찾았다. 흑사병이 그보다 10년 정도 전에 아시아에서 시작되었을 가능성도 있는데, 당시 중국 도시들이 대부분 황폐해졌고 몇몇 지역에서는 사망률이 거의 90퍼센트에 이르렀다는 기록이 있다.


인류 역사상 이 정도 규모의 역병은 처음이었다. 유스티니아누스 역병마저 미미해 보일 정도였다. 흑사병이 그처럼 많은 사상자를 낸 이유 가운데 하나는 인구가 임계치에 도달했기 때문일 수 있다. 게다가 더욱 효과적인 운송 수단이 발달하여 사회 간 상호 작용이 이전 어느 때보다 활발해졌다. 이런 요인들은 흑사병의 전파력은 물론 지속성에도 영향을 미쳤다. 지속성은 전염병이 얼마나 많은 사상자를 낼 수 있는지 결정하는 핵심 요소다. 질병이 마을 하나를 완전히 덮쳐서 모든 주민을 죽음에 이르게 하면 보통 그 질병도 함께 박멸되기 마련이다. 하지만 지구의 인구수가 워낙 크게 늘어난 데다 많은 사람들이 이곳저곳을 자유롭게 돌아다니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흑사병은 계속 재발했고 그 피해도 더욱 커졌다.


최악의 감염병이 더 큰 규모로 더 빠르게 퍼질 수 있다

인류는 이미 흑사병 부류의 병원균을 무기화하려는 의도로 활용한 적이 있다. 흑사병에 관한 오래된 이론 충 몽골인이 유럽에 흑사병을 들여와 중심 도시를 공격하며 퍼뜨렸다는 주장이 있다. 이에 따르면 몽골인은 감염된 시체를 도시 외벽 너머로 던졌다고 한다. 이런 주장이 사실인지는 알 수 없지만 1930년대와 1940년대에 일본군이 의도적으로 벼룩에 페스트를 주입해 중국의 도시에 투하했던 것은 확실하다.


그때 이후로 세균전은 많은 진전을 보였다. 사실 공기로 전파되는 병원균을 무기로 사용한다는 생각은 전 세계 무기고에 있는 다른 어떤 무기를 활용하는 것보다 더욱 무시무시하고 더욱 파괴적일 수 있다. 물론 핵무기나 화학 무기 역시 끔찍하지만 둘 다 치명성에 한계가 있다. 하지만 살상력이 있는 병균이 사람에게서 사람으로 전파되며 퍼져 나가고 여러 세대에 걸쳐 어쩌면 영원히 지속될 수도 있다는 점에서 인간이 만들어 낸 전염병은 지금까지 자연이 인류에게 가한 그 어떤 위협보다 끔찍할지도 모른다.


에이즈처럼 천천히 진행되는 비극마저 처음 대중의 의식을 사로잡았을 때는 온갖 종류의 공황, 반발, 편견을 불러일으켰다. 사태가 심각했던 1980년대에 만약 에이즈가 콜레라나 천연두처럼 공기나 물을 통해 전파되고 며칠 내에 감염자를 죽음에 이르게 했다면 상황이 얼마나 극에 달했을지 상상해 보라. 사망률이 재난 수준으로 치솟는다면 인간 사회는 더 이상 이성적 혹은 인간적으로 기능하지 못할 것이다. 과거에는 팬데믹이 사회의 틀을 새롭게 다잡기도 하고 때로는 그 무게로 사회를 뭉개 버리기도 했다. 흑사병이 닥쳤을 때처럼 사망률이 50, 60, 70퍼센트까지 치솟는다면 우리 역시 똑같은 경험을 할 수 있다. 다시 말해 종교에 기대거나 사회 구조를 바꾸거나 비주류인 소수자나 소수 집단을 비난하거나 이전의 믿음 체계를 포기할 수 있다. 우리는 다른 지역에 사는 사람들이 재난 상황에 어떤 식으로 대처했는지를 보고 배울 수 있다. 또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질 수 있다. 우리가 가진 온갖 현대 과학 기술과 의학 지식을 고려했을 때 이런 상황에서 우리는 과연 어떻게 반응할까? 우리가 유행병에 관해 더 많이 알고 있다는 이유로 그런 위협에 응당 품어야 할 두려움과 공포는 얼마나 많이 무뎌질까?



주기적으로 돌아오는 야만의 시대

끝도 없이 영원히 등장하는 제국의 위협자, 야만족들

로마에 인접한 국가가 로마와 평화롭게 지냈다면 그 이유는 대개 셋 중 하나였다.


1. 이미 정복당했다. 로마와 평화를 유지하는 대부분의 국가는 이미 로마에 의존하고 있거나 통합된 국가였다. 그 지역의 상당수 주민 역시 대부분 로마 시민이 됐다.

2. 아직 정복당하지 않았다. 로마는 대개 공격적인 외교를 펼쳤지만 이따금 국력이 약해진 시기에(한 국가가 오래 존속하다 보면 고점과 저점을 번갈아 경험하기 마련이다.) 주변 국가들과 장기적이고 평화로운 외교 관계를 유지할 수밖에 없었다. 로마의 국력이 다시 강해지면 이런 관계는 대부분 끝이 났다.

3. 아직 로마에 알려지지 않았다.


세 번째 이유는 인류 역사 초창기에 나타나는 특징이다. 완전히 고립된 외딴 지역에 위치한 탓에 지금까지 알려진 적 없는 새로운 소규모 공동체를 발견하는 일이 오늘날에는 매우 드물다. 하지만 고대나 중세에는 특정 지점 너머의 세계는 완전히 무지의 영역이었다. 알려지지 않은 국가, 문화, 민족을 마주치는 일은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고 제국을 확장하기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겪어야 하는 일이기도 했다.


지금 우리는 기술적으로나 경제적으로나 사회의 복잡성 면에서나 한참 뒤처져 있는 새로운 사회를 발견해도 딱히 두려워할 것 같지 않다. 실제로 역사상 가장 무시무시한 민족들, 모두 우리가 ‘야만인’이라고 불렀던 민족들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로마’라는 단어와 ‘야만’이라는 단어는 서로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는데 야만족이 로마 제국 서쪽 국경을 약탈하곤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른바 ‘야만족’은 로마 제국이 존재하기 오래전부터 존재했다. 수염을 기른 채 뿔 달린 투구를 쓰고 전투용 도끼를 휘두르며 거친 전사로서 영웅의 신에게 기도하고 엄청나게 술을 마셔 전장에서 이성의 경계를 넘나들 것만 같은, 일반 대중이 갖고 있는 ‘야만족’에 대한 인식은 고대 그리스인의 그것보다 훨씬 더 특정 시대와 문화에 제한된다. 정작 ‘야만인(barbarian)’이라는 표현은 고대 그리스에서 시작되었으며 당시에는 사실상 그리스인이 아닌 모두를 가리키는 말이었다.


새로운 차원의 야만인, 게르만족의 등장

‘첫 접촉’의 순간, 즉 게르만족이 집단적으로 지중해 세계(글을 읽고 쓸 수 있어서 이런 사건을 기록으로 남길 수 있는 문화)와 맞닥뜨린 순간은 규모가 거대했으리라 추측되는 킴브리족과 튜턴족 무리가 ‘킴브리 전쟁’의 여파로 남하하기 시작했을 때였다. 기원전 113년에 이 부족들은 로마 편인 켈트족 영토를 침범했다. (게르만족에 적대적이었을) 고대 역사가들의 기록에 따르면 킴브리족과 튜턴족은 둘 다 다루기 까다로운 ‘야만인’ 거대 부족으로 식구, 소유물, 마차와 함께 새로 정착할 곳을 찾고 있었다고 한다. 또 고대 역사가들은 그들이 진격하는 과정에서 주변 부족과 개인을 흡수하면서 그 규모를 점점 불려 나갔다고 주장한다.


이 시기 로마는 이미 여러 세기에 걸쳐 야만족을 상대한 경험이 있었다. 하지만 이 새롭게 등장한 집단은 어느 야만족보다도 훨씬 더 야만적이었다. 그들 때문에 ‘다른’ 야만족조차 겁에 질릴 지경이었다. 고대 역사가들의 묘사에 따르면 그들은 하얀 머리에 회색 눈동자를 가지고 있었으며 커다란 동물 가죽을 뒤집어쓴 원시적인 차림이었다고 한다. 또 과연 인간인가 의심스러울 만큼 힘이 셌고 거의 피에 미쳐 있었다. 그들은 로마 군대를 꽤 수월하게 차례로 격파하며 이탈리아까지 나아갔으며 영원의 도시 로마 자체를 위협하기 시작했다. 로마 군대의 사상자 수는 참혹한 수준이었으며 절망감이 제국 전체를 사로잡았다.


로마는 어찌하여 게르마니아 정복에 실패했나

킴브리족과 튜턴족이 대규모 침공/이주를 벌였을 때부터 서로마 제국이 멸망하기까지 게르만족과 로마 군대는 수시로 전쟁을 치렀다. 게르만 전사들이 뛰어난 신체적 특징과 전투 능력, ‘튜턴족의 분노’로 유명하기는 했지만 사실 로마 군대가 승리한 사례가 훨씬 더 많았다. 또 로마 군대는 설령 패배해도 대개 정상 참작이 가능했다.


이를 보여 주는 완벽한 사례가 기원후 9년에 발생했다. 오늘날 우리에게는 마치 로마판 ‘커스터의 마지막 항전’(Custer’s Last Stand)처럼 보이는 사건이다. 하지만 미군 중령 조지 암스트롱 커스터가 수적 열세에도 아메리카 원주민 부대와 처참한 전투를 벌여 300명 미만의 병사만 잃었던 것과는 달리 로마 사령관은 게르만 전사들을 상대한 이 전투에서 대략 2만 명의 병사를 잃어야 했다. 로마 장군 푸블리우스 퀸틸리우스 바루스는 세 개 군단과 수천 명의 보조 병력을 데리고 게르마니아 중북부 깊숙이 들어갔으나 결국 되돌아오지 못했다. 바루스는 로마식으로 훈련받은 게르만 부족민의 함정에 빠졌다. 로마에 우호적인 것처럼 가장했으나 사실 게르만족 연합군과 몰래 모의했던 것이다. 바루스와 그 군대는 깜깜한 숲속에서 매복 기습을 당해 사실상 전멸했다. 문명화한 로마인에게 이 이야기는 악몽 그 자체였다.


토이토부르크 숲에서의 전투 때문에 로마가 그 지역에 개입하기를 멈추지는 않았지만 많은 역사가들은 이 전투가 일종의 전환점 역할을 했다고 판단한다. 로마가 갈리아를 속주로 만든 것처럼 게르마니아 역시 속주로 만들 수 있을 거라는 희망이 게르만족에 의해 짓밟힌 것이다. 로마인이 그 바람을 이루기에는 그 지역의 지형과 기후가 너무 까다로웠고 너무 광활했다. 당시 로마의 납세자나 군대 입장에서 게르마니아를 ‘로마화’하는 것은 큰 부담이었을 것이며, 솔직히 말해 게르마니아는 정복하고 관리하는 노력을 들일 만큼 풍족한 지역도 아니었다. 트라야누스 황제(재위 98~117년)와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재위 161~180년)가 각각 게르만족을 상대로 치열한 전투를 치르기는 했지만 결국 로마 제국은 오늘날 독일 국경에서 멀지 않은 라인강 선에서 정복을 멈추기로 결정했다. 또 도나우강 남쪽을 따라 거대한 요새를 구축함으로써 게르만족의 급습을 방어하고자 했다.


로마와 게르만의 관계에 대한 역사적 관심은 전쟁 측면에 집중되어 있기는 하다. 하지만 결국 실질적인 힘의 균형이 변화한 것은 두 민족 간의 평화적인 상호 작용 때문이었다. 지속적인 접촉은 사회를 변화할 수 있다. 단지 국경만 맞대고 있더라도 물품, 돈, 생각, 사람이 국경 너머로 오고 갈 수 있기 때문이다. 양쪽에 문화적 혹은 기술적 불균형이 존재하는 경우 특히 더 그렇다. 16세기 아메리카 원주민은 더욱 중앙 집권적이고 기술적으로 발전한 유럽인과 지속적으로 접촉한 결과 500년 뒤에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됐다. 중유럽의 게르만 부족민 역시 로마 세계와 500년 동안 지속적으로 접촉한 결과 변했다. 연합군이나 보조 병력 혹은 용병으로서 로마군과 함께 싸운 게르만인은 로마의 사상과 문화를 자기 부족에 전달하는 도관 역할을 했다. 게르마니아 안쪽에 위치해 로마와 직접 접촉할 수 없는 부족들 입장에서는 특히 더 그랬다. 공화국이 제국으로 변모하기 이전부터 로마는 게르만 전사의 활용 가치를 인식했다. 제국에 복무하게 된 게르만 전사들은 역사상 가장 위대한 도시 중 하나인 로마를 종종 직접 방문해 체험했으며 제국의 국경 지역으로 싸우러 나가서는 세계 곳곳에서 불려온 다양한 민족과 어깨를 맞대고 적들을 상대했다. 그런 다음 진보한 사회에서 복무하며 얻은 방대한 경험을 가지고 게르마니아에 있는 자신의 부족으로 돌아갔다. 이런 일이 여러 세대에 걸쳐 수십만 전사에 의해 반복되었다고 생각해 보라. 틀림없이 게르만 사회에 엄청난 변혁을 가져왔을 것이다.


새로운 혼돈의 시대 승리자는 누구인가

로마가 직면한 문제의 가짓수를 줄이는 한 가지 방법은 한층 더 열심히 야만족들과 계약/조약을 맺는 것이었다. 실제로 로마인은 아드리아노플 전투에서 맞서 싸운 부족들을 상대로 협력하는 길을 택했다. 하지만 그런 계약에는 이전보다 많은 것들이 요구되었다. 야만족 부족민들이 로마에 정착하는 것을 허용했을 뿐만 아니라 그들이 로마 국경을 방어해 주는 대신 독자적인 정체성을 유지하는 것도 받아들여야 했다.


5세기 동안 서로마 제국의 중앙 정부는 무너져 갔다. 410년에는 로마가 스스로 제국에 들인, 아드리아노플 전투에서 로마를 꺾은 서고트족이 로마 자체를 약탈했다. 외부 세력에게 영원의 도시가 약탈당한 것은 800년 전 켈트족으로 추정되는 부족민이 로마를 약탈한 이후로 처음이었다.


하지만 아시리아의 니네베가 한 번 쓰러진 뒤 다시는 일어나지 못했던 것과 달리 로마는 링에서 일어나 몇 라운드를 더 버텼다. 410년의 약탈을 견딘 로마는 455년에 또다시 약탈당했다. 그다음으로는 게르만계 반달족에게 훨씬 더 참혹하게 약탈을 당했다. 그리고 476년, 포이데라티의 게르만계 군 지도자가 마침내 서로마 제국의 마지막 황제를 끌어내렸다.


전통적인 역사서에서는 바로 이 시점부터 로마 문명이 물러난 지역에 ‘암흑시대’가 시작되었다고 지적한다. 특정 지역에서는 이런 표현이 더 잘 어울렸다. 예를 들어 이탈리아는 서로마 제국의 몰락에 크게 영향을 받지 않았으며 주변 지역에 비해 더 빠르게 회복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과거 서로마 제국 영토의 대부분에 해당하는 이탈리아 북부 지역은 일종의 임펄스 파워(Impulse Power)로 작동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수도원 같은 가톨릭교회 집단, 지방 조직, 군 지도자, 소국의 왕 등이 추락하는 현대성을 최대한 연착륙시키기 위해 애썼지만, 한때 로마 황제의 모습이 새겨진 주화를 사용하던 지역들이 물물 교환 경제 체제로 돌아서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런데 기반 시설이 쇠퇴하고 화폐 제도가 물물 교환 제도로 대체된다고 문명이 퇴보했다고 말할 수 있을까? 아니면 이는 그저 우리 현대인의 선입견일 뿐일까?


웰스는 각 지방의 문화적인 전통에 비해 로마의 전통이 우월하다는 전제를 당연시하지 말라고 경고한다. 그러면서 지금의 런던에 해당하는 고대 로마 도시를 한 가지 사례로 인용한다. 1세기 말에 이 도시는 “기념비적인 건축물을 보유한, 로마 제국 북쪽 끝의 근사한 중심 도시였고 번창하는 상업 중심지였으며 위대한 로마 도시다운 군사적 거점”이었다. 그러나 서로마 제국이 멸망하자 “이전에 도시였던 상당 지역이 도시적인 특징을 잃어버렸다.”


하지만 웰스의 주장에 따르면 이런 변화를 퇴보라고 부르는 것은 변화에 보수적인 로마인 같은 태도다. 웰스는 이렇게 말한다. “런던 지역에 관한 자료가 쌓이면서 초창기 연구가들의 생각과 달리 이 지역이 버려지지 않았다는 사실이 점점 더 분명해졌다. 삶은 제자리에서 계속됐다. …… 단지 전과 달라졌을 뿐이다.”



산 자와 죽은 자

우리가 ‘영원히’ 전쟁을 포기할 수 있을까?

인류는 지금까지 70년 이상 핵폭탄 투하 실험을 계속해 왔다. 언젠가 이 실험들은 우리가 만든 무기를 우리 스스로 다룰 능력이 있는지 없는지를 알려 줄 것이다. 앞으로 무기가 약해질 리는 없으므로 언젠가 우리에게 그런 능력이 없다는 사실을 깨달을 때까지 실험은 끝나지 않을 것이다.


분명 인간은 적응의 동물이다. 변화하는 환경에 적응할 줄 아는 능력 덕분에 호모 사피엔스는 수없이 많은 난관을 극복했으며 오늘날과 같은 문화적 발전을 이룩했다. 21세기에 우리는 여전히 살아 있고 번영하고 있으며 역대 가장 많은 개체 수를 자랑하고 있다. 하지만 우리가 다시 한번 적응하지 않는다면 이러한 흐름이 역전될 수 있는 여러 중대한 문제가 수면 위로 떠오르고 있다.


오늘날 우리는 몇몇 사람들이 ‘장기간 평화(Long Peace)’라고 부르는 시대를 살고 있다. 메소포타미아 문명 이래로 꾸준히 보아 왔던 강대국 간 전쟁이 70년 이상 일어나지 않았다. 약 75년 전까지만 하더라도, 즉 인류의 무기고가 위력 면에서 비약적인 발전을 이룰 즈음까지만 하더라도 두 차례의 세계대전, 나폴레옹 전쟁, 30년 전쟁, 100년 쟁, 포에니 전쟁 등 강력한 국가들 간의 대규모 전쟁이 인류 역사의 일반적인 특징이었는데 말이다. 그렇다고 현재 유혈 충돌이 아예 없다는 뜻은 아니다. 안타깝지만 인간의 폭력 행위는 끊임없이 계속되고 있다. 하지만 초강대국 사이의 대규모 충돌은 피해 왔다. 과연 대규모 전쟁은 더이상 벌어지지 않을까?


인간 사회에서 성욕, 탐욕, 중독 물질, 폭력 같은 인간 본능과 관련한 수많은 문제를 완전히 제거한다고 상상하기는 어렵다. 그렇다면 전쟁은 어떨까? 우리가 전쟁을 포기할 수 있을까? 전쟁이라는 끔찍한 결과를 피하려면 거의 인간의 본능과도 같은 행동을 교정할 만한 적응 능력이 필요하다는 점에서 긍정적인 대답을 내놓기가 쉽지 않다. 우리가 전쟁을 자기 파괴적인 행위로 판단하고 단념하려 하더라도 오랜 습관으로 되돌아가지 않으리라 장담하기는 힘들다. 잠깐은 괜찮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핵전쟁이 일어나지 않도록 경계 태세를 유지하기에 ‘영원’이라는 시간은 너무나 길다.


원자 폭탄 전쟁으로 문명이 리셋된다면

핵무기의 출현으로 인류 역사상 최초로 단 한 사람이 수천만 명의 목숨을, 어쩌면 수억 명의 목숨을 앗아 갈 수 있게 되었고 운반 기술이 함께 발달하면서 고작 몇 분 안에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게 되었다. 칭기즈 칸, 알렉산더 대왕, 아돌프 히틀러 같은 무시무시한 옛날 사람들 가운데 누구도 그런 능력을 갖지는 못했다. 13세기 몽골의 거물 칭기즈 칸이 어떤 제국이나 나라를 짓밟기로 했다면 그 결심을 완수하기까지 어느 정도 시간이 걸렸을 것이다. 만약 짓밟기로 한 나라가 중국처럼 큰 나라라면 수십 년은 걸렸을 것이다. 하지만 1969년에 미국 리처드 닉슨(Richard Nixon) 대통령이 바로 그곳에 핵 공격을 감행하기로 결심했다면 ‘바로 그날 오후’에 중국인 1억 명을 몰살할 수 있었을 것이다.


인류가 이 새로운 초강력 무기를 지금까지 개발된 다른 효과적인 무기와 똑같이 취급한다면 다음 세계대전은 거의 신과 같은 파괴력을 겨루는 경연장이 될 것이다. 원자 폭탄 시대의 출현을 목격한 수백 명 가운데 대다수는 허허벌판에서 트리니티 실험이 성공을 거두는 순간 이 사실을 깨달았다. “이제 나는 죽음이요, 세상의 파괴자가 되었노라” 오펜하이머가 말한 대로다.


과학자들과 마찬가지로 미국 일반 대중의 반응 역시 혼재되어 있었다. 만약 당신이 세계대전에 휘말렸는데 당신 편이 핵무기를 보유하고 있다면 당연히 긍정적인 시각으로 볼 수밖에 없을 것이다. 역사가 마이클 S. 셰리(Michael S. Sherry)의 『전쟁의 그늘 속에서(In the Shadow of War)』에서 트루먼 대통령이 TV를 통해 일본에 폭탄을 투하했다는 사실을 미국 국민과 세계에 알렸을 때 그리고 이 새로운 무기가 무엇이고 왜 사용되었는지를 설명했을 때 미국인이 보인 다양한 반응을 확인할 수 있다. “어떤 사람들은 미국이 이룬 업적에 대한 자부심과 일본인에게 복수했다는 사실에 만족감을 표했다.” 일본에 폭탄을 몇 개 더 떨어뜨릴 수 있도록 전쟁이 끝나지 않기를 바라는 사람도 있었다. “또 어떤 사람들은, 특히 일본을 직접 침공하지 않는 이상 폭탄을 사용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는 군인들은 원자 폭탄이 평화를 앞당겼을 뿐 아니라 지속적인 평화를 강제할 수 있다는 점에서 그 등장 자체를 반겼다.”


미래를 내다보는 사고방식만이 전쟁을 막을 수 있다

초강력 폭탄을 만드는 데 일조한 사람들 가운데 일부는 자신들이 인류 역사상 가장 강력한 무기를 꽤 폭력적인 인간이라는 종(種)의 손에 쥐어 줬다는 사실을 깨닫고 최대한 긍정적인 측면에 집중하려고 애썼다. 어쩌면 인류는 유사 이래 우리와 늘 함께해 온 전쟁이라는 행위를 단념할 만큼 겁을 먹고 자극받았을지도 모른다. 오펜하이머도 이렇게 말했다. “사람들이 평화를 원하게 만드는 데 원자 폭탄이 필요했던 것은 아니다. 하지만 원자 폭탄은 결정적인 압박 요인이 되었다. 원자 폭탄 때문에 사람들은 미래에 전쟁이 일어날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을 견디지 못하게 되었다.” 현실론(혹은 다른 무언가)의 탈을 쓴 이상론이다.


물리학자 아서 홀리 콤프턴은 이렇게 말했다. “인류가 그처럼 파괴적인 무기를 보유하고도 살아남을 수 있으려면 탁월한 인간성을 서둘러 길러야 한다. 인간에 대한 새로운 차원의 이해가 필요하다. 복지를 위해 원자력을 사용한다면 인류는 분명 엄청난 혜택을 누릴 것이다. 하지만 잘못 사용한다면 그 벌로 인류가 죽음을 맞이하고 1000년 동안 이어진 문명이 파멸할 것이다.”



본 도서 정보는 우수 도서 홍보를 위해 저작권자로부터 정식인가를 얻어 도서의 내용 일부를 발췌 요약한 것으로, 저작권법에 의하여 저작권자의 정식인가 없이 무단전재, 무단복제 및 전송을 할 수 없으며, 원본 도서의 모든 출판권과 전송권은 저작권자에게 있음을 알려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