뚜벅뚜벅 이탈리아 공공의료

   
문정주
ǻ
또하나의문화
   
22000
2020�� 10��



■ 책 소개


가정의학과 전문의이자 공공의료 연구자인 저자는 2015년에 석 달 동안 이탈리아에서 지내며 국영의료 현장을 견학하고 내용을 3년 동안 꼼꼼히 갈무리해 의료견문록 《뚜벅뚜벅 이탈리아 공공의료》를 썼다. 탈고 단계에 있던 지난 3월, 공교롭게도 이탈리아에서 코로나19 대참사 소식이 들려 왔고, 저자는 이탈리아를 비롯해 유럽의 코로나19 초기 대처에 대한 분석을 보태 책을 다시 마무리했다.

이후 출간을 준비할 즈음, 이번에는 의사들과 의대생들의 집단행동이 일어났다. 의사들은 정부가 의료정책을 일방적으로 추진하며 의사를 가리켜 ‘공공재’라 하는 것을 그대로 둘 수 없다고 주장했고, 국민들은 의사가 오만한 엘리트주의에 빠져 억지를 부린다고 비난하며 의사들에 대한 강력 대응을 청와대 게시판에 청원했다. 이 사태가 지속되던 한 달 동안 의료정책에 관한 사회적 관심이 뜨거웠다. 

이탈리아는 ‘관광 천국’으로 불릴 정도로 볼거리, 먹을거리가 많은 서유럽 국가 중 하나(였)다. 코로나19 대유행이 지속되어 이동이 전처럼 자유롭지 않은 만큼, 일상사이던 바다 건너 ‘여행’이 이즈음 쉽지 않은 일이 되어버렸다. 《뚜벅뚜벅 이탈리아 공공의료》를 펼치면 이탈리아 시민들이 건강권 획득과 공공의료 기반을 다지기 위해 ‘뚜벅뚜벅’ 걸어온 역사, 피에몬테주와 에밀리아로마냐주의 일차의료 현장을 살피는 ‘비대면’ 여행이 시작된다. 이 여행을 함께하다 보면 의료정책의 수혜자이자 당사자인 국민과 환자는 공공의료 정책 결정에 ‘뚜벅뚜벅’ 발걸음을 디딜 용기와 힘을, 정부의 정책 입안자는 신선한 아이디어를 얻게 될 것이며, 의료계에서는 집단행동을 자성하고 공공의료 강화를 위해 노력하는 소수자의 소리에 힘이 실릴 것이다. 

■ 저자 문정주
공공의료 연구자·가정의학과 전문의. 종합병원에서 임상 의사로 12년, 보건소 공무원으로 10년, 보건복지부 공공보건의료지원단에서 연구원으로 10년간 일했다. 공공보건의료 강화, 공공병원 평가와 지원에 관한 보고서를 다수 썼다. 공공성을 의료의 핵심이라 생각하며 우리나라 의료의 공공성 강화를 위해 일차의료제도 도입이 시급하다고 본다.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겸임교수를 거쳐 지금은 건강보험심사평가원에서 상임감사로 일한다.

■ 차례
여는 글 공공의료에 상상력이 필요하다 

1. 이야기가 많은 나라 

이탈리아가 내게 들어왔다 
이탈리아 어린이병원을 만나다 | 피렌체, 벼락치기 방문 | 메이에르 어린이병원 

알프스 산자락에서 
이탈리아 전문가 S | 가정의를 만나다 | ‘동네 의사’가 되고 싶었다 

이탈리아반도 여행 
찬란한 유적과 허술한 현실이 공존하는 남부 | 남부에 이어졌던 착취와 차별의 역사 | 명품 산업단지가 즐비하고 공화제 전통이 확고한 북부 | 그래도 사람들은 비슷해 | 먼 길을 돌아 도착한 볼로냐 

좌우 타협으로 탄생한 국영의료 
이탈리아 통일 | 통일 초기의 노동자 건강 보호 | 북부 공업 지역의 대규모 노동운동 | 파시즘 독재와 노동자 건강의 위기 | 이탈리아공화국의 탄생 | 차별적 보험제도와 의료 불평등 | 68혁명이 몰고 온 격변 | 국영의료의 탄생 | 대승적 협력의 위태로움 

2. 일차의료 

누구에게나 가정의가 있다 
친밀한 의사, 돕는 의사 | 전문의가 가정의에게 보고서를 | 의사의 눈과 귀는 환자 한 사람에게로 | 수많은 요구에 대응하려면 | 찾아오는 이주민 | 의원 풍경 

환자의 집을 다 알고 있다 
비엘라 아슬의 코사토 분소 | 얼마나 여러 번 왕진한 것일까 | 의사 등 7개 분야 인력이 집으로 온다 | 약국의 24시간 자판기 

코사토의 밤 토론회 
수요일 밤 9시 | 한국 의료제도 | 그룹 진료를 요구받는 이탈리아 가정의 | “환자와 일대일 관계가 무엇보다 소중하다” | 환자가 마지막을 집에서 가족과 지내게 | 소통과 조정이 필수일 텐데 | 환자가 가장 환영하는 서비스입니다 

이탈리아 가정의 
건강 보호에 책임을 진다 | 국영의료의 중심이다 | 등록 환자의 진료에 규칙이 있다 | 정부가 보수를 지급한다 | OECD 최고의 일차의료를 제공한다 

3. 동네의료 

동네에서 건강을 지키다 
드디어, 접속 | 에밀리아로마냐주 | 볼로냐시 | 국영의료의 몸통인 아슬 | 동네에서 쉽게 이용하는 동네의료 | 동네의료의 중심, 일차의료 | 우리에겐 영국의 대처 총리가 없어서요 

건강의집 
‘카사 델라 살루테’를 찾아서 | 구역 어린이 의사를 만나러 온 엄마 아빠 | 과목별 전문의 진료 | 일차의료를 확장하는 공간들 | 민주적 정신의학을 꽃피우다 | 시민의 눈으로 만든 사진집 

4. 병원의료 

어떤 병원이든 여기서 예약하세요 
열린 예약과 닫힌 예약 | 쿠프에 꼭 가봐야 해요 | 국영의료를 뒷받침하는 IT | 공공 통합 예약망, 쿠프 | 온라인 의료 네트워크, 솔레 | 온라인 건강문서집 | 주체가 여럿인 분권 체제 

오랜 건물에 첨단 의료를 품다 
보호와 자비의 공간 | 현대 의료기관으로 | 권역을 아우르는 병원망 | 병원에 입원하기 | 병원은 안전을 위한 사회적 공동 기반 

한국인이 본 이탈리아 병원 
한국인 환자가 본 이탈리아 병원 | 한국인 의사가 본 이탈리아의 병원 | 환자에게 의사가 어떤 존재로 여겨지는가 

롬바르디아의 코로나19 대참사와 공공의료  
코로나19 대유행 | 롬바르디아주 | ‘치명적인 예외주의’ | 우리에게 과제는 

맺는 글 누구나 언제 어디서나 건강하게  

 




뚜벅뚜벅 이탈리아 공공의료


이야기가 많은 나라

이탈리아가 내게 들어왔다

이탈리아 어린이병원을 만나다

작고 여린 어린이에게도 중증질환이 있다. 신생아의 저체중 출생, 심중격에 구멍이 나거나 판막 등에 이상이 있는 선천성 기형, 입천장이 벌어진 채 태어난 구순구개열, 혈액암인 백혈병, 선천성 뇌병변에 의해 운동 기능이 제한되는 뇌성마비 등이다.


이런 중증질환을 앓는 어린이 환자를 병원은 반기지 않는다. 적절한 진료를 하기 위해서는 고도의 전문 인력이 있어야 하고 신생아와 어린이에게 맞춘 시설과 장비가 일일이 있어야 하니 비용이 많이 들기 때문이다. 아픈 어린이의 병세가 깊으면 깊을수록, 의료진이 진료에 몰두하면 할수록 병원 경영에 적자를 안길 위험이 크다.


그래서 중증 어린이 환자를 진료하는 병원이 드물다. 2000년대 초까지도 서울에만 한두 곳 있을 뿐 지방에는 없는 실정으로, 먼 길을 오가야 하는 지방 환자와 가족의 고통은 컸다. 적어도 강원, 충청, 전라, 경상으로 구분되는 권역별로 어린이 병원이 있어야 했다. 공공의료 정책 과제였다.


2008년에 나는 보건복지부 산하기관인 공공보건의료지원단에 있었다. 어린이병원 설립을 위해 그 병원이 어떤 기능을 하고 어떤 시설을 갖추어야 할지 연구하며 이에 관한 사례를 수집하던 중 이탈리아 피렌체에 있는 메이에르 어린이병원을 알게 되었다.


메이에르 어린이병원

1891년에 지역 유지인 조반니 메이에르가 가난한 어린이를 위해 병원을 설립하고 시에 헌납했다고 한다. 결핵치료와 소아신경학으로 유명했고 지금도 이탈리아의 여러 지역과 다른 나라에서 중증환자가 찾아오는 병원이다. 숲 사이로 낮게 펼쳐진 병원 건물, 푸르른 정원처럼 가꾼 넓은 주차장이 방문객에게 여유를 느끼게 한다.


* 신생아중환자실을 감싸는 아름다운 언덕 풍광

신생아중환자실. 심폐 기능이 부족한 미숙아나 선천성질환으로 위독한 갓난아기를 돌보는 곳이다. 우리나라 대학병원의 신생아중환자실을 익히 돌아본 내게 중환자용 인큐베이터나 최신 전자 의료 장비 등은 새로운 것이 없다. 그런데도 어쩐지 눈앞의 광경이 낯설고 생전 처음 보는 것만 같다. 뭐지, 이 낯선 것의 정체는? 아, 녹지다. 내 눈을 붙잡는 것은 바로 인큐베이터 너머로 긴 벽을 채운 유리창과 창밖에 보이는 푸르른 언덕. 우리나라 병원에서 신생아중환자실은 거의 예외 없이 햇빛을 보기 어려운 장소에 배치된다.


창밖 녹지를 배경으로 인큐베이터의 신생아를 돌보는 의료진이 보인다. 그의 흰 가운 위로 우리나라 의료진의 모습이 겹쳐 아른거린다. 기계장치만 빼곡한 딱딱한 환경에서 잠시 쉴 틈도 없이 일하는 우리나라 의사와 간호사들. 아, 가슴이 묵직해 온다. 환자의 인권이 존중되려면 의료진이 좋은 여건에서 일할 수 있어야 하고, 의료진의 업무 여건이 좋아지려면 국가의 의료제도가 달라져야 한다. 풍광 좋은 이곳에서 좀 더 머물고 싶지만 시모넬리 교수와 시설관리팀장이 복도 저쪽에서 기다리니 애써 발걸음을 옮긴다.


* 어디에 가서 뭘 본 걸까

병원 앞 버스 정류장에는 열 살쯤으로 보이는 소녀가 엄마와 함께 유아차 곁에 있다. 한쪽 팔을 손가락부터 어깨까지 석고붕대로 ‘깁스’를 했다. 소녀는 아프지 않은 쪽 팔을 유아차의 젖먹이 동생을 어르는 데 열중해 정작 석고붕대에는 관심이 없는 듯하다. 버스가 오기까지 한동안 지켜본 이 엄마와 딸에게서, 경제적으로 과히 넉넉해 보이지 않는데도, 환자 가족에게 있을 법한 정신적 스트레스를 느낄 수 없다. 병원이 환자에게 돈을 받지 않는다는 이 나라에서 환자도 가족도 별 걱정이 없는 듯하다.


문득 몇 달 전 일이 떠오른다. 이번 출장을 준비하고 있는데 어떤 이가 내게 “유럽 병원이 형편없다.”고 말했다. 그는 오랫동안 공직 생활을 한 사람으로, 유럽을 여러 차례 방문했는데 병원들이 하나같이 낡고 볼 것이 없어 우리보다 영 못하더라고 했다. 메이에르 어린이병원을 보고 난 지금, 그 일을 떠올리니 허탈하다. ‘형편없다’니, 그는 대체 무엇을 본 걸까. 무엇을 기대했던 걸까. 유럽 병원을 보며 우리나라와 비교했다는 그가 평가 기준으로 삼은 것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좌우 타협으로 탄생한 국영의료

이탈리아 통일

국영의료는 19세기에 일어난 이탈리아 통일운동과 함께 그 싹을 틔우기 시작했다. 이탈리아 땅을 조각내 지배하던 여러 외세를 몰아내고 통일국가를 이루고자 각지의 세력이 연합해 벌인 문화적, 정치적, 사회적 운동을 이탈리아 통일운동이라 한다.


통일 초기의 노동자 건강 보호

통일운동이 벌어지던 19세기, 혁명에 참여하는 지식인이 학회와 신문사를 창립하던 때, 평범한 시민은 상조회를 만들었다. 그 기본 정신은 이렇다.


네가 나를 도와주면 나도 너를 도울 것이다. 혼자서는 대처할 수 없는 문제에 함께 대처하자.


* 시민 상조회

주로 도시의 상공업 장신과 노동자들이 상조회를 통해 사회경제적 곤란을 헤쳐 나갔다. 회비를 걷어 기금을 조성해 조합원의 질병, 사고에 대처하고, 출산, 육아에 보조금을 지급하여 상을 당한 이에게 장례비를 지급하는 한편 실직자를 돕고 야간학교와 도서관을 운영했다. 국가적 복제 제도가 없던 시기, 시민 스스로 자신들을 보호한 것이다.


* 사회보험

19세기는 산업혁명으로 서구 세계가 변화하던 때다. 나라마다 증기기관의 힘으로 도로와 운하, 기관차와 철도를 만들었고 복잡한 기계가 수없이 발명되면서 공장이 건설되었다. 공장의 기계는 위험했고 동네는 비좁고 더러워 질병이 끊이지 않았다.


노동자의 건강 문제가 심각하던 이때, 1883년에 독일제국이 질병보험 등 사회보험제도를 만들었다. 국가, 고용주, 노동자와 함께 비용을 부담해 건강을 잃은 노동자의 생계를 보호하는 제도다. 통일이탈리아왕국도 대규모 공업 발전을 꾀하면서 노동자의 건강 문제를 외면할 수 없었다. 1898년 독일의 질병보험을 본뜬 산업재해보험법을 제정해 노동자가 보호받게 했다. 일하다 사고를 당한 사람에 한정해 보험금이 지급되고 그 금액도 얼마 되지 않았지만, 국가가 국민의 건강을 보호하는 최초의 제도라는 점에서 의미는 컸다.


국영의료의 탄생

*의료를 누구나 이용하게, 불평등을 해결하게, 시민이 참여하게

1973년 나폴리에서 발생한 콜레라가 시민의 불만에 불을 붙였다. 콜레라 감염에 계층 간 구분이 뚜렷해 잘사는 사람 중에는 환자가 전혀 없고 가난한 사람에게 발병이 집중되었다. 환자의 고통과 시민의 공포가 텔레비전으로 전국에 보도되자 학생, 환자 단체, 노동자 단체가 투쟁에 나섰다. 나폴리에서 시작한 시위는 폭발적으로 전국에 퍼졌다. 의료를 누구나 이용할 수 있게 보장할 것, 계층 간 불평등을 해결할 것, 의료제도 운영에 시민의 참여를 허용할 것 등을 요구했다.


마침내 1974년에 정부가 의료보장 체제를 개혁하기로 했다. 중앙정부가 빚을 떠안아 기금을 해산케 했고, 병원에는 긴급히 경영 자금을 지원하되 의료 인력의 숫자와 보수를 동결하고, 병원의 소유와 관리 권한을 주정부에 옮기게 했다.


* 의료체계를 근본적으로 바꾸다

국영의료제도가 이탈리아 의료체계를 근본적으로 바꾸었다. 시민의 관점에서 그 변화를 요약하면 이렇다. 첫째, 누구든 가정의를 선택해 일차의료를 무료로 이용한다. 둘째, 전문의 진료와 검사 등 다양한 외래진료와 가정간호를 동네에서 이용할 수 있다. 셋째, 입원ㆍ수술ㆍ분만ㆍ응급 등 병원 의료를 가정의의 의뢰 절차를 통해 무료로 이용한다. 넷째, 의사가 처방한 필수 약품을 무료로 구매한다.


가장 큰 변화가 일차의료에 관련된다. 이전에 자기 건강을 위해 ‘가정의’를 고용하는 사람은 가장 부유한 계층뿐으로, 그들은 전속 의사를 집에 두고 마음껏 의료를 이용할 수 있었다. 다수의 보통 사람은 의료기금이 제공하는 보험에 가입해, 기금이 지정한 의사의 진료를 받았다. 이와 같은 계층 간 불평등을 국영의료가 완전히 없앴다. 누구나 자기가 원하는 가정의를 선택하고, 그가 제공하는 진료와 상담과 왕진을 무료로 받고, 그의 도움으로 국영의료의 전 범위를 이용하게 되었다.


국영의료체계는 다음과 같다. 첫째, 중앙정부가 국영의료의 일반적 목표와 기본 원칙을 세우고 보장해야 할 필수 범위를 정한다. 둘째, 10개 주정부가 국영의료를 실제 운영한다. 셋째, 주 안에 지방별로 보건의료본부가 설립돼 국영의료서비스를 공급한다.


이탈리아가 국영의료를 도입한 지 20년이 되던 1998년, <제2차 국영의료계획>에 운영 원칙이 제시되었다. 국영의료가 추구하는 방향을 간결하게 보여 준다.


ㆍ인간의 존엄

ㆍ건강의 요구

ㆍ형평

ㆍ보호

ㆍ가장 취약한 사람들과 연대

ㆍ건강 개입의 효과와 적절성

ㆍ비용 대비 효과



일차의료

환자의 집을 다 알고 있다

의사 등 7개 분야 인력이 집으로 온다

어느 날 해가 뉘엿뉘엿할 때 방문한 곳은 산자락의 막다른 길에 있는 3층 건물. 공동주택인 그 건물의 2층 서쪽 집에 유방암으로 3개월 전에 수술받은 할머니가 사신다. 인사를 나눈 뒤 부엌 식탁에 자리를 잡고 안나마리아는 할머니와 대화하며 독감백신을 접종한다.


식탁에는 할머니가 준비해둔 노란 비닐 가방이 있다. 안나마리아가 거기서 노란색 서류를 꺼내 펼치더니 줄이 쳐진 종이에 뭔가 글을 쓴다. 겉장에 서류 번호, 할머니 이름인 죠OOO, 의사 이름인 안나마리아, 방문을 시작한 날짜, 재평가하는 날짜, 1년 뒤에 방문을 끝내는 날짜가 적혀 있고 안쪽 ‘통합 일지’에는 안나마리아가 오늘까지 9회에 걸쳐 매주 할머니를 방문해 남긴 기록이 날짜별로 짤막하게 있다. 통합가정돌봄(ADI) 기록부다.


*중증 만성질환자를 위한 ‘통합가정돌봄’

바로 이것! 내가 꼭 보고 싶던 통합가정돌봄이다. 이탈리아의 의료제도에 관한 거의 모든 보고서에 이 돌봄이 빠짐없이 소개된다. 노란 기록부는 통합 활동의 기록부다웠다. 돌봄에 참여하는 다양한 분야의 인력이 공동으로 사용하는데 의사든 누구든 모든 직종이 다 함께 같은 종이에 기록을 남기게 했다. 각자 관찰한 내용과 시행한 활동을 앞사람이 남긴 글 다음 줄에 적어 넣는 방식이다.


죠OOO 할머니의 기록부에는 지금까지 가정의인 안나마리아의 기록만 있다. 암 환자이기는 해도 수술이 잘 되었고 그 뒤로 특별한 문제가 없음을 보여 준다. 돌봄에 다른 인력의 참여가 필요한지 판단하고 아슬이나 시청에 요청하는 것 또한 할머니의 가정의인 안나마리아의 역할이다.


코사토의 밤 토론회

“환자와 일대일 관계가 무엇보다 소중하다”

열두 명의 가정의에게 물어본다. “이탈리아처럼 국영의료를 운영하는 나라가 영국입니다. 과거에 영국에서 가정의는 이탈리아 가정의와 마찬가지로 혼자서 개원했습니다. 그런데 이제 여러 명이 그룹으로 개원하는 방식을 보편화했다고 합니다. 최근에 이탈리아 정부도 환자가 일차의료를 이용하기 쉽도록 가정의에게 그룹 진료를 권장한다고 들었습니다. 이를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 오랜 유대관계를 통해 신뢰를 얻는다

의사-환자의 관계가 일차의료의 중심이에요. 오랜 관계를 통해서 가정의는 등록한 환자의 건강뿐 아니라 가족, 직업, 주거 환경 등 생활 여건 전반을 이해하게 돼요. 건강 보호에 책임을 지는 일차의료는 이와 같은 관계의 토대위에서만 가능해요. 환자의 편에서도 마찬가지예요. 오랜 유대 관계가 있을 때 의사는 신뢰할 수 있습니다. 가정의는 전통적으로 ‘혼자 개원’해 자기에게 등록한 환자와 일대일 관계를 맺어 왔어요.


안나마리아에게 환자는 ‘잘 아는 사람’이다. 그의 이름과 나이, 건강 치료의 경과뿐 아니라 살아가는 형편까지 기억한다. 자료를 찾거나 데이터를 확인하지 않고도 ‘한 인간인 환자’를 알고 있다. 안나마리아가 진료실을 여는 시간은 하루에 두서너 시간으로 비록 짧지만, 그곳에는 오랜 세월에 걸쳐 다져진 관계가 있고 환자에 대한 가정의의 묵직한 책임감이 있다.


* ‘나를 잘 아는 의사’가 우리에게도 필요하건만

한국에서 의사-환자의 관계는 그 말조차 낯설다. 사고파는 시장과 같은 한국의 의료 환경에서 사람 간에 관계를 맺기란 애초에 헛된 꿈인지도 모른다. 관계의 공백을 상술이 파고든다. 매스컴이 쏟아내는 의료 홍보가 사람 사이의 관계를 대신하고, 떠도는 말과 영상 속에서 환자는 길을 잃는다. 의료기관이 많고 진료실 문은 오래 열려 있지만, 환자는 갈 곳을 알지 못한다. 의사가 많아도 ‘나를 잘 아는 의사’가 없어 사람들은 건강 문제로 불안하다.



동네의료

동네에서 건강을 지키다

동네에서 쉽게 이용하는 동네의료

국영의료는 그 법에서 “신체적 정신적 건강을 증진하고 유지하며 회복하게 하는 모든 기능ㆍ시설ㆍ서비스ㆍ활동”으로 정의된다. 즉 보건의료 전 범위를 끌어안는다. 이에 따라 아슬의 사업도 보건의료의 전 범위에서 시행된다.


가브리엘레는 아슬의 사업 범주가 셋으로 나뉜다고 말한다. 첫째 범주는 공중보건. 이는 인구 집단의 건강을 보호하고 향상케 하는 활동으로 건강증진, 보건교육, 전염병 예방, 환경보건, 식품위생, 산업보건 등을 넓게 아우른다. 둘째는 ‘테리토리 의료’. 일차의료, 전문의 외래진료, 요양 등을 시민이 일상에서 손쉽게 이용하도록 제공하는 것으로 아슬의 가장 큰 사업 범주다. 셋째는 병원의료. 병원에서 시행하는 입원, 수술, 분만, 응급의료 등이 이에 해당한다.


* 건강을 동네에서 쉽게 누리게

아슬의 사업 중 테리토리 의료는 내게 생소한 말이었다. 테리토리가 영토나 영역을 뜻한다고 알고 있을 뿐, 의료에 관련해 사용되는 것을 들어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테리토리 의료가 국영의료를 탄생시킨 헌법 정신을 가장 잘 구현하는 의료라고, 가브리엘레가 설명한다. 의료가 사람들의 생활에 어떻게 접목해야 할지에 관해 일러 주는 개념, 바로 세계보건기구가 정의하는 ‘지역사회에 기반을 둔 보건의료’다. 즉 “각자 살아가는 장소에서 건강을 증진하고 유지하며 회복하게 하는, 개인의 자율을 북돋우고 가족 관계를 뒷받침하는 방식으로 공급되는, 보건의료에 복지를 아우르는 서비스”다.


이 개념은 국제적으로 통용된다. 우리나라에서도 일부 농촌에서 의과대학이 시행한 지역보건사업이나 정부가 보건소 조직을 통해 시행하는 지역 정책에 녹아들어 있다. 테리토리 의료는 바로 ‘지역사회에 기반을 둔 보건의료’의 이탈리아식 표현이고 동시에 이를 실현하는 사업 체계라 할 수 있다. 우리말로는 ‘동네 의료’가 적당할 듯싶다.


건강의집

‘카사 델라 살루테’를 찾아서

* 모든 사람의 환영하는 집

루카는 의사이자 볼로냐 아슬의 공직자이며 보르고-레노 건강의집을 대표하는 관리자다. “보르고-레노 건강의집은 2000년에 개관했어요. 볼로냐의 첫 번째로 만든 일차의료 그룹 건물이지요. 전에 있던 동네 외래진료센터를 헐고 새로 지었어요. 외래진료센터 시절에 이곳은 전문의 진료실이 몇 개 있고 영상의학검사나 혈액검사로 질병을 진단하고 치료하는 의료기관일 뿐이었어요. 하지만 건강의집은 그것 이상이랍니다.”


일차의료를 확장하는 공간들

* 간호사 진료실

계단이 끝나고 로비처럼 트인 곳에 안내대가 놓여 있다. ‘간호사 진료실’이다. 나이가 지긋한 간호사 한 사람이 분주히 오가며 뭔가 하는 중이다. 간단히 인사를 나눈 뒤 이곳에서 하는 일을 소개해 달라고 하자 그는 어리둥절해한다.


“과거에 간호사는 주로 병원에서 입원환자를 돌보는 일만 했어요. 1994년에 간호사의 전문성을 넓게 정의하는 법령을 제정했답니다. 그때부터 간호사가 병원입원환자의 간호뿐 아니라 동네에서 하는 만성질환 관리, 가정돌봄 등으로 활동 범위를 넓히게 되었어요. 독립 직업인으로 단독 개업도 할 수 있고요. 건강의집에서도 간호사의 활동 범위가 넓어요. 진료실, 가정돌봄, 사례관리, 다분야 팀 활동 등 여러 역할을 맡으니까요.”


* 간호사의 당뇨병 자가관리 교육

간호사 진료실에서 담당하는 중요한 서비스가 하나 더 있다. 당뇨병 환자를 위한 교육이다. 혈당 관리에 서툰 환자가 간호사의 개인 지도로 기술과 요령을 익히는 관경을 떠올려 본다. 처음 관리를 시작하는 환자뿐 아니라 정기적으로 소모품을 보충하는 환자도 간호사를 만나 자가관리 상황을 점검할 수 있어 도움이 될 것이다.


유료인지 궁금하다. “간호사의 서비스는 어떤 것이든 환자에게 무료입니다. 의사가 쓴 의뢰서나 처방전만 제시하면 돼요. 다만 당뇨병 교육에 예약은 필수고요.” 아무 부담이 없으니 환자에게는 더욱 좋겠다.


하나 더 묻는다. 당뇨병 환자를 위한 교육을 가정방문으로도 해주는지? “물론이지요. 여기에 직접 오기 어려운 환자에게는 가정돌봄 간호사가 집에 가서 자가관리 방법을 가르쳐 줘요. 주사, 채혈, 상처 치료도 마찬가지예요. 가정의가 내준 가정돌봄 처방전을 환자나 가족이 접수창구에 제시하면 돼요. 건강의집에 창구가 있고 전화로도 신청할 수 있어요.” 이 또한 무료다. 거동이 불편한 환자가 자기 집 침대에서 아무런 비용부담이 없이 간호사의 방문 돌봄을 받을 수 있다. 혈당 관리 상태를 점검해주고 물품을 가져다주기까지 한다.


가브리엘레의 말을 떠올린다. 동네의료에 적지 않은 예산이 들어가지만, 질병 예방과 조기 치료의 효과가 크고 병원의료에 의존도를 낮추므로 오히려 경제적이라 했다. 그처럼 분명한 확신이 있어, 이렇게 적극적으로 동네의료 활동을 벌이는 것이겠다.



병원의료

어떤 병원이든 여기서 예약하세요

국영의료를 뒷받침하는 IT

어김없이 그날도 비가 오고 바람이 불었다. 구글 지도가 안내한 곳은 내가 사는 집에서 걸어서 20분 걸리고 볼로냐 대학에서는 10분만 걸으면 닿는 시내 중심가에 있었다. 역시나 그 큰 건물 어디에도 간판이라곤 없었다. 현관이라 짐작되는 유리문 앞에 섰을 때야 조그맣게 써 붙인 ‘e-care CUP 2000’이라는 글씨가 보였다.


* 순수 공공 합작 IT 기업

시모나 선생을 만나러 왔다고 안내 직원에게 말하고 잠시 기다리는데, 로비 한쪽 벽에 멋지게 디자인한 글귀가 눈에 들어온다.


저희는 여러분을 돌봅니다. 볼로냐의 새로운 광역 쿠프. 1990년 2월에 최초로 진료와 검사에 전자 예약 체계를 가동했습니다. 오늘날 볼로냐의 광역 쿠프는 의료 분야에서 유럽 최대의 전자 접속 체계입니다. <e-care CUP 2000>


짤막한 글이지만 ‘저희’의 주요 사업, 역사, 업계 내 위상까지 읽을 수 있다. 전자 접속이 어떤 걸까? 어쨌든 유럽 최대라니 매출과 수익이 굉장하겠다. 그런데 이곳은 기업체일까 공공기관일까.


곧 누군가 나를 데리러 오고 방으로 안내되어 시모나와 그의 동료 두 명과 인사를 나눈다. 둥그런 탁자에 둘러앉아 먼저 이 기관에 관해 물어본다. “이케어 쿠프2000은 공공기관인가요?” “우리 회사를 소개하지요. 처음에는 1990년에 볼로냐 아슬의 자회사로 출발했어요. 아슬의 예약 업무를 처음으로 전산화했죠. 그 뒤 2002년에 주정부의 합작기업으로 새롭게 설립되었어요. 주정부, 주 내 모든 아슬, 볼로냐 대학병원, 페라라시, 페라라 대학병원이 참여해 만든 합작회사예요.”


우리식으로는 공기업인 셈이다. 에밀리아로마냐주 정부가 주요 국영의료기관과 공동으로, 이른바 컨소시엄을 만들어 설립했다. “네 우리는 순수하게 정부 기업입니다. 하지만 단순히 정부 쪽 지시에 따라 일하는 건 아니에요. 우리 역할을 공공과 민간을 통합하는 데 있어요.”


“‘쿠프2000’은 첫째로, 의료에 디지털 기술을 적용하는 방안을 개발합니다. 목적은 의료서비스가 제공되는 경로를 혁신하고, 국영의료에 대한 시민의 접근성을 높이고, 의료와 사회복지의 업무 절차를 개선하는 데 있어요. 둘째로, 온라인 의료 네트워크를 개발합니다. 의료인-의료 행정-시민이 실시간으로 정보를 공유하는 네트워크예요.”


이 간단한 소개만으로도 이곳에서 하는 일이 영리적 원격의료와는 전혀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공기업에서 IT는 특정 기업이나 특정 의료기관의 수익이 아닌, 공공의 이익을 높이는 데 쓰인다.


병원이 사업체가 아니라 사회적 공동 기반이다


“난소 낭종으로 진단받고는 어서 수술하고 싶었어요. … 대학병원에서 수술하고 며칠 있다가 퇴원했죠. 이탈리아에서 살면서 처음 입원해 봤던 건데 병원도 의료진도 너무 좋았어요. 그리고 진짜로 돈을 한 푼도 안 받던데요.”

- 볼로냐 교민 H


“한국에 오는 기회에 진료를 받았어요. … 그런데 의사 선생님이 진료하면서 내 얼굴을 거의 안 봐요. 차트나 검사지 같은 기록만 들여다보고요. 환자의 말에 관심이 없는 것 같았어요. 이탈리아에서 의사들은 그렇지 않거든요. … 셋째 아이를 낳는다면 …이탈리아 병원에서 낳고 싶어요. 인간적이어서요.”

- 토스카나 교민 K


“‘하모닉 스칼펠’이라는 지혈기가 정말 좋은 기구예요. 그런데 거기에 쓰이는 일회용 소모품이 당시 우리나라에서 1개에 100만원이었어요. 비급여 재료라 돈을 전부 환자가 내야 했죠. 환자의 경제적 부담 때문에 쓰기가 어려웠어요. 그런데 이탈리아에서 보니 유방 수술마다 그걸 다 쓰는 거예요. 환자한테 돈을 한 푼도 받지 않으면서요. 깜짝 놀랐죠. … 다른 재료도 마찬가지였어요. 비싼지 싼지 따지지 않고 필요하면 다 사용해요. 비용에 관해 걱정하지 않고요. 국영의료에 그런 면이 있더라고요.


아무 차별이 없어요. 국영의료 환자인지, 사적 의료 환자인지, 수술실 의료진 중에 아무도 구분하지 않아요. 언제나 어떤 환자에게나 같은 재료를 썼으니까요.”

- 로마 대학병원에서 연수한 유방외과 전문의 J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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