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라말이 사라진 날

   
정재환
ǻ
생각정원
   
15000
2020�� 09��



■ 책 소개


“언어와 겨레의 운명은 하나다!” 

2020년 10월 9일은 574번째 맞이하는 한글날이다. 한글의 창제와 반포를 기념하고 그 우수성을 기리고자 제정된 국경일, ‘한글’은 세계에서 유일하게 그것을 만든 사람과 반포일, 글자를 만든 원리까지 알고 있는 문자이며,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도 등재된 위대한 문화유산이다. 그런데 이 소중한 ‘한글’이 사라졌던, 아니 빼앗겼던 시대가 있었다. 

1910년 8월 29일, 대한제국이 일본의 식민지가 있었다. 단말마의 비명조차 토해내지 못한 채 대한제국은 소멸했다. 일제는 강력한 동화정책을 시행했다. 조선인을 천황의 신민으로 만드는 것이 그들의 목표였다. 조선의 정체성은 소멸되어야 할 대상이었고, 조선어와 조선 글자는 반드시 사라져야 할 조선 역사와 문화의 정수였다. 

조선이란 존재 자체가 위협받던 일제강점기, ‘조선어학회’는 우리말글 연구와 조선어사전 만들기에 전념했다. 금지된 것, 없애려는 것을 살리고 지키려는 행위는 저항이자 투쟁이었고, 일본의 국시 위반 행위였다. 조선총독부의 사찰과 회유, 압박과 통제가 이어졌지만, 학회의 활동은 흔들림 없이 지속되었다. 학회는 1929년 조선어사전 편찬을 시작해 1940년까지 「한글 마춤법 통일안」, 『사정한 조선어 표준말 모음』, 「외래어 표기법 통일안」등 ‘민족어 3대 규범’을 제정하며 조선 어문의 근대화를 이룩했다. 

『나라말이 사라진 날』은 지금, 우리가 너무도 당연히 쓰고 있는 우리말글, 이것이 당연해지기까지…… 사명으로 다듬고, 피땀으로 지킨 사람들의 이야기다. ‘우리말글 지킴이’로 유명한 방송인 출신의 역사학자 정재환은 이 책을 통해 일제 치하에서 우리말글을 지키기 위해 고군분투했던 조선어학회의 활동을 중심으로, 독립운동으로서의 한글운동을 살펴본다. 

■ 저자 정재환
방송인 출신 역사학자. 30대 중반에 한글 사랑에 빠져 방송언어에 관한 책을 몇 권 냈고, 2000년에는 한글문화연대를 결성하여 우리말글 사랑 운동에 뛰어들었다. 같은 해 성균관대학교에 입학하여 역사를 공부하면서 한글운동사를 연구하였고, 2007년 석사 학위, 2013년 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방송사회자, 성균관대 학부대학 초빙교수, 한글문화연대 공동대표, 한글학회 연구위원, 우리민족서로돕기운동ㆍ아시아평화와역사교육연대ㆍ노작홍사용문학관의 홍보대사, 역사문제연구소ㆍ민족문제연구소ㆍ평화박물관ㆍ맑고향기롭게ㆍ경기르네상스포럼의 회원으로서 열심히 활동하고 있다. 

■ 차례
들어가며. 그런 시대가 있었다 

1장. 나라말이 사라졌다 
 ‘혼용’이냐 ‘전용’이냐, 문자 전쟁의 시작 
 450년 만에 이루어진 세종의 꿈 
 그런데, 그 나라말이 사라졌다 
 스승의 죽음과 한글의 탄생 

2장. 언어와 겨레의 운명은 하나! 나라말을 지켜라 
조선어사전을 펴내라! 말모이 대작전 
조선어의 근대화, 민족어 3대 규범을 만들다 
몸은 빈궁해도, 마음은 가난하지 않았던 사람들 

3장. 일제의 조선어학회 죽이기 
‘노력하라. 인생은 힘쓰는 자의 것이다’ 
조선어학회의 운명을 가른 한 줄 
민족주의자를 일망타진하겠다는 일제의 야심, ‘조선어학회사건’ 
고문기술자들과 사라진 인권 
한글, 법정에 서다 

4장. 해방 이후, 한글의 시대를 열다 
새 나라와 새 사회, 새로운 출발 
한글의 시대를 열다, 그리고 
28년 만에 이룩한 감격적인 쾌거, 『큰사전』 

나가며. 만약 우리에게 조선어학회가 없었다면 

 




나라말이 사라진 날


나라말이 사라졌다

‘혼용’이냐 ‘전용’이냐, 문자 전쟁의 시작

1866년 병인양요, 1871년 신미양요, 두 차례의 양요에서 조선은 큰 피해를 입었지만, 결과적으로 서양 군대를 물리쳤다는 자신감으로 쇄국정책을 강화했다. 그러나 1876년, 조선은 굳게 닫았던 문을 일본의 강요에 의해 열게 된다. 일본은 1853년 자국을 개국시킨 미국 페리흑선의 함포외교를 그대로 흉내 내어 조선의 문을 열어젖혔다. 조선은 오랫동안 하국으로 인식해오던 섬나라 오랑캐의 협박에 굴복했고, 만국공법이 무엇인지조차 모르는 상황에서 근대적 국제 질서와 자본주의 체제로 편입되었다.


‘글’은, ‘말’을 적으면 그만이다

주시경이 태어난 것은 1876년 11월 7일(음력). 서세동점과 일본의 조선도발이 본격화한 격변의 시대였다. 아버지 주학원과 어머니 연안 이씨의 둘째 아들로 태어난 주시경은 황해도 봉산군 무릉골의 가난한 농가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그는 1888년 열세 살에 큰아버지 주학만의 양자가 되어 서울로 이주했다. 만일 이 일이 없었다면 주시경은 평범한 농사꾼이나 시골 선비로 평생을 살았을지도 모른다.


큰아버지는 남대문시장에서 해륙물산 객주업을 하면서 비교적 부유한 생활을 하고 있었고, 덕분에 주시경은 상인과 중인들이 공부하는 서당에 다니게 되었다. 그러나 그는 좀 더 훌륭한 선생님 밑에서 배우고 싶었다. 마침 인근에 이희종이란 진사가 양반 자제들을 가르치는 글방이 있었다. 주시경은 그 글방에서 흘러나오는 글 읽는 소리에 귀를 쫑긋 세운 채 주변을 기웃거리기를 수십 일 동안 반복했다. 주시경의 행동을 이상하게 여긴 이희종이 연유를 묻자, 그는 머뭇거리지 않고 대답했다.


“저는 중바닥 서당에 다니는 주시경이라 하는데요, 선생님같이 훌륭한 분에게 배우고 싶습니다.” 맹랑한 답변에 호기심이 생긴 이희종은 나이와 집안 등 이것저것을 물어보았다. 그리고 아이의 범상치 않은 총명함을 간파하고서는, 주시경이 자신의 글방에 기거하면서 공부하도록 허락했다.


그러던 어느 날 주시경에게 운명의 순간이 찾아왔다. 서당 공부는 유교경전, 즉 한문을 읽고 해석하는 것이었다. 먼저 한문 한 줄을 읽고 나서 우리말을 풀이했는데, 우리말 설명을 들어야 비로소 글자와 문장의 뜻을 파악할 수 있었다. 다른 학동은 아무도 이런 학습에 의문을 품지 않았으나, 주시경에게는 머릿속을 스치는 섬광 같은 생각이 있었다. ‘글은, 말을 적으면 그만이다. 말을 적는 글자가 한자처럼 어렵고 거북해서야 어느 겨를에 학문을 터득할 수 있겠는가? 만일 언문으로 우리말을 적는다면, 들이는 노력은 적고 얻는 것은 클 것이다.’


한문 학습이 무의미하다고 판단한 주시경은 열아홉 살에 배재학당에 들어갔고, 세계지리, 세계의 정치제도, 산수, 물리, 영어 등의 신학문을 배우면서 국문 연구에 뛰어들었다. 전통 학문과 신학문을 두루 섭렵한 범상치 않은 청년 주시경의 도전은 훗날 조선어학회의 바탕이자 근간이 된다.


언문, 근대화의 수단으로 주목받다

19세기 말 언문은 근대화 실현의 필요 수단으로 주목받기 시작했다. 1884년 12월 4일(양력) 개화당의 김옥균, 박영효 등은 우정국 낙성식 축하연장에서 정변을 일으켰다. 비록 청군의 불법적인 궁궐 침입과 신정부에 대한 공격으로 인해 삼일천하로 막을 내렸지만, 정강14조에는 신분 폐지ㆍ인민 평등ㆍ지조법 개혁ㆍ탐관오리 처벌ㆍ의정소 설치 등 근대를 지향하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정강14조에는 포함되지 않았지만, 임오군란(1882)을 수습하는 과정에서 청국 푸저우에 머물고 있던 김옥균은「치도약칙(治道略則)」을 써, ‘순검이 관할하는 경계마다 게시판을 설치하여 규칙을 한문과 언문으로 작성하여 백성들이 볼 수 있게 한다면 과오를 범하지 않을 것이며, 조례를 첨삭하고 이것을 언문으로 번역하여 반포해서 백성이 이익과 손해를 알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부국강병을 이루기 위해 봉건제를 청산하고 근대적 개혁을 꿈꾸었던 개화파 영수의 청사진 속에 ‘백성의 권익을 보호하기 위해 언문을 사용해야 한다’는 내용이 포함된 사실은, 조선 사회가 근대로 진입하는 19세기 말이 한문 시대에서 국한문 시대 혹은 국문 시대로 넘어가는 ‘시대의 전환점’이었음을 의미한다.


그런데, 그 나라말이 사라졌다

1910년 8월 29일, 대한제국은 일본의 식민지가 되었다. 한일병합조약이 명시된 ‘한국 황제 폐하는 한국 전체에 관한 일제 통치권을 완전히 또 영구히 일본 황제 폐하에게 양여’ 한다는 문구는, 힘으로 남의 나라의 주권을 탈취한 강도 일제가 자신의 부끄러운 손을 감추려는 궤변이었다. 하지만 단말마의 비명조차 토해내지 못한 채 대한제국은 소멸했고, 조선어는 대한제국 국어의 지위를 상실했다.


단군 이래 5천 년을 이어온 나라말이 사라졌고, 15세기 이래 민중의 글로 성장해온 훈민정음도 국문의 지위를 박탈당했다. 이제 조선어는 식민지로 전락한 조선에서 사용하는 방언이 되었으며, 일본어가 조선인의 국어, 일본의 가나문자가 나라글자가 되었다.


조선인들이 일본어 학습의 필요를 느낀 것은 19세기 말이었다. 1881년 신사유람단의 일원이었던 유길준, 유정수, 윤치호는 일본의 근대화된 모습을 목격하고 큰 충격을 받았다. 그들은 일본과 서양의 학문을 배우기 위해 바로 귀국하지 않고 후쿠자와 유키치의 게이오의숙과 나카무라 마사나오의 도진샤에서 공부했다. 이후 개화파는 게이오의숙과 위탁계약을 맺고 100여 명의 유학생을 파견했으며, 1895년에는 113명의 조선인들이 게이오의숙에 유학했다. 유길준이나 윤치호같은 이들은 영어 학습에도 열중했지만, 유학생들이 필수적으로 습득해야 할 언어는 일본어였다. 결국 일본어와 조선어는 한 통에 담긴 물과 기름처럼 융화되지 않는 껄끄러운 동거에 들어갔다.


스승의 죽음과 한글의 탄생

주시경은 <독립신문> 창간에 참여했고, 국어 연구와 교육에 전념하면서 언어철학을 수립했다. 그는 ‘남의 나라를 빼앗고자 하는 자는 그 나라의 말을 없애려고 하고, 나라를 지키려는 자는 나라의 말을 지키려고 애쓴다’라고 했다. 주시경은 국문을 바로 세움으로써 스러져가는 나라를 일으켜 세우려 했다.


주시경은 국어의 정립을 통해 문화의 기초를 세우고 나라를 일으킬 수 있다는 일념으로 국문 연구에 전념했다. 우리말은 물론 일본어와 중국어, 영어 등을 고찰하면서 근대적 학문의 자세로 우리말을 연구하여 국문법의 토대를 닦았다. 또한 중요한 것은 교육이었다. 주시경은 자신의 학설을 후학에게 전하기 위해 상동청년학원, 조선어강습원 등에서 강의했다.


그때까진 조선어를 풀이한 사전으로는 외국인 선교사들이 만든 『한불자전』『한영자전』등이 있었는데, 그나마도 조선어를 프랑스어 또는 영어로 설명한 대역사전에 불과했다. ‘국어를 바로 세우려면 사전이 필요하다!’ 그러나 사전 편찬은 하루아침에 이룰 수 있는 작업이 아닌데다가 편찬을 위한 여건 마련도 쉽지 않았다. 기회를 모색하던 1910년 10월, 주시경은 최남선이 창설한 조선광문회와 인연을 맺으면서 제자 김두봉, 권덕규, 이규영 등과 함께 ‘말모이(우리나라에서 최초로 편찬이 시도된 국어사전)’ 편찬을 시작할 수 있었다.


주시경이 남긴 것

말모이 편찬은 1911년부터 4년간 지속되었다. 그런데 1914년 7월 27일 주시경이 서른아홉 나이로 돌연 세상을 떠났다. 일제의 무단통치가 시작되고, 105인사건 이후 많은 민족지사들이 망명하던 때였다. 청천병력 같은 소식에 제자들은 충격과 슬픔에 빠졌다.


스승의 부탁으로 동래군 동명학교 하기 강습회에서 수업하던 중 부음을 들은 최현배는 강습생들과 함께 대성통곡했다. 걷잡을 수 없이 흘러내리는 눈물을 훔치며 최현배는 비장한 각오를 다졌다.


나는 주 스승에게서 한글을 배웠을 뿐 아니라 우리말 우리글에 대한 사랑과 그 연구의 취미를 길렀으며 겨레 정신에 깊은 자각을 얻었으니, 나의 그 뒤 일생의 근본 방향은 여기서 결정된 것이었다... 나는 스승의 부탁에 따라 우리말 우리글을 오늘까지 갈고닦고 또 가르치고 있는 것이니, 이 사명을 다한 뒤에는 스승에게로 돌아가 복명할 작정이다.


‘한글’이라는 새 이름

1908년 8월 31일 봉원사(서울 서대문구 봉원동 소재)에서 주시경은 국어 연구에 뜻을 함께하는 사람들과 ‘국어연구학회’를 창립했다. 그런데 한일병합조약으로 대한제국이 역사 속으로 사라지자, 이듬해인 1911년 9월 3일 학회는 이름을 ‘배달말글몯음(조선언문회)’으로 바꿨다.


1913년 3월 23일 배달말글몯음 임시총회 기록에 ‘한글’이 등장한다. ‘배달말글’을 갈음한 ‘한글’을 우리 문자를 이르는 명칭으로 사용하겠다는 선언은 없었지만 ‘한글’은 훈민정음, 정음, 언문, 특히 조선글이라는 시대의 변화에 걸맞지 않은 어중간한 이름을 대체할 가능성을 품고 있었다. 훗날 최현배는 주시경이 한글이란 이름을 지었으며, 한글은 ‘하나, 크다, 바르다’라는 뜻이라고 했다.



언어와 겨레의 운명은 하나! 나라말을 지켜라

조선어사전을 펴내라! 말모이 대작전

주시경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말모이 작업은 중단되었다. 1915년 최남선은 조선광문회에 계명구락부를 결성하여 조선어사전 편찬 사업을 재개했지만, 안타깝게도 결실을 보지 못했다. 1919년 3ㆍ1운동에 참여했다가 일경에 쫓긴 김두봉은 상하이로 망명했고, 1920년 이규영마저 세상을 떠났다. 주시경이 시작한 말모이 편찬은 성난 바람과 파도에 이리저리 휩쓸리는 돛단배처럼 막막한 바다 위를 표류하고 있었다.


그러나 사전을 만들어야 한다는 절박함은 사그라지지 않았다. 이번에는 주시경의 제자들이 주축이 되어 활동하던 조선어연구회가 어렵사리 다시 작업에 착수했다.


‘백절불굴의 사나이’ 이극로의 꿈

1912년 마산 창신학교를 졸업한 이극로는 서간도에 있는 신흥학교(훗날 신흥무관학교)를 향해 먼 길을 떠났다. 어느 날 평북 창성에서 아침밥을 먹고 있을 때였다. 일행 중 한 명이 고추장을 달라고 했는데 주인이 고추장이란 말을 못 알아들었다. 알고 보니 주인은 고추장을 모르는 게 아니었다. 창성 지방에서는 고추장을 ‘댕가지장’이라 불렀기에 알아듣지 못했던 것이다. 이극로는 생각했다. ‘사투리 때문에 고추장도 서로 통하지 않으니 참으로 답답하다. 같은 조선 사람들끼리 쓰는 말부터 한 가지로 통일해야 한다!’


신흥학교를 찾아가던 중 이극로는 동창학교에서 교원으로 일하게 되었다. 동창학교는 대종교의 윤세용, 윤세복 형제가 인재를 양성하기 위해 1911년 만주 환런현에 설립한 학교로, 100명 내외의 이주 동포 자제들이 공부하고 있었다. 이극로는 이곳에서 윤세복, 교사 박은식 등과 인연을 맺었으며, 주시경을 사사한 동료 교사 김진을 만나면서 한글 연구의 기초를 닦을 수 있었다. 그의 한글 연구가 더욱 본격화된 것은 1919년 상하이에서 주시경의 수제자 김두봉을 만나면서다.


이극로는 독일에서 유학할 때 대학 안에 조선어과를 설치하여 3년 동안 독일인, 러시아인, 네덜란드인 등에게 조선어를 가르쳤다. 조선어학과에서 조선어를 가르치던 이극로에게 학생들이 물었다. “왜 조선 글자는 철자법이 중구난방입니까? 사전이 없다니 정말입니까?” 조선어를 공부하면서 겪는 혼란 속에서 나온 당연한 의문이자 질문이었지만, 이극로는 어찌 대답해야 할지 몰라 당황했다. 변변한 철자법이 없어 일정하게 적기 어려운 표기 문제도 그렇고, 사전조차 없다는 부끄러움에 얼굴이 벌게졌다.


1927년 6월 영국 런던으로 건너간 이극로는 그해 11월에 런던대학 정치경제학부에 입학해 한 학기 동안 연구생으로 공부했다. 얼마 뒤 귀국길에 도른 이극로는 미국에 들러 한인 지도자들을 만났다. 뉴욕에서 장덕수, 한상억, 허정 등을, 필라델피아에서는 서재필, 하와이에서는 이승만을 만났다. 장덕수가 ‘귀국하면 무엇을 할 계획이냐’고 물었을 때, 이극로는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조선어사전’을 만들 거라고 대답했다. 이극로는 사전 편찬을 시급한 민족적 과제로 생각했고, 어문운동을 통해 조선인들에게 민족의식을 불어넣고 민족 혁명의 기초를 세워야겠다고 결심하고 있었다.


백절불굴의 사나이 이극로가 사전 편찬의 꿈을 품고 조선어연구회에 들어갔으니, 연구회의 활동은 비단 연구나 저술에만 머무를 수 없었다. 훈민정음 반포 483주년에 해당하는 1929년 10월 31일 오후 7시, 조선교육협회에서 열린 한글날 기념식에서 연구회가 중심이 되어 사회 각계 인사 108인이 참여한 ‘조선어사전편찬회’가 조직되었다.


몸은 빈궁해도, 마음은 가난하지 않았던 사람들

1919년 가을, 조선어연구회는 창경궁의 서쪽 지역인 경성 원동(지금의 종로구 원서동) 휘문고등보통학교 안에 사무실을 마련했다. 1928년 조선어연구회는 경성부 수표동 42번지 조선교육협회 회관에 방 한 칸을 얻어 이전했다. 이른바 셋방살이였다.


1920년대 일본인들은 가파르게 증가하는 이주 일본인의 주거지를 확보하기 위해 경성 주변부에 신도시를 건설하는 계획과 함께, 조선인들이 밀집해 살고 있던 북촌 지역으로 진출하는 방안을 꾀하고 있었다. 대규모 관사지를 확보한 일본인들은 드러내놓고 주인 행세를 하기 시작했고, 땅을 빼앗긴 조선인들은 하나둘 외곽으로 밀려나는 처량한 신세가 되었다.


낱말 하나라도 더 살려내기 위해, 사투리 수집

경제적으로 빈궁해도 마음은 결코 가난하지 않았던 조선어학회 회원들. 그 어떤 작업도 허투루 하지 않았으며 우리말과 글에 대한 그들의 뜨거운 사랑은 바다처럼 넓고 깊었다. 이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 중 하나가 심혈을 기울인 ‘사투리 수집’이었다.


조선총독부가 조선인들을 억누르듯이 표준어가 방언 위에 군림하면서 정감 있는 고향 말들을 푸대접했다고 생각하기 십상이지만, 학회 회원들은 시골말에 대해 강한 애정을 보였다. 사전에 실을 표제어를 정하기 위해서는 방언 중 상당수를 포기해야 했으나 근본적으로 이들은 시골말도 조선말이자 우리 민족의 언어라고 생각했다. 이에 낱말 하나라도 더 모으고 살려내기 위해「한국 맞춤법 통일안」을 발표하기 전부터 시골말을 수집하고 있었다. 1935년 10월에 간행된『한글』27호에 ‘方言調査(방언조사)’란이 신설되어 1956년 118호에 이르기까지 수집한 각 지역의 방언을 꾸준히 소개했다.



일제의 조선어학회 죽이기

민족주의자를 일망타진하겠다는 일제의 야심, ‘조선어학회사건’

1938년 3월 조선교육령을 개정한 조선총독부는 조선어 교육 폐지에 착수했다. 1939년 영생고등여학교에서도 조선어 과목이 폐지되었고, 민족 교육에 대한 탄압이 점점 강화되는 상황에서 교사로 일하는 것에 한계를 느낀 정태진은 1940년 5월 학교를 떠나게 되었다. 실의에 잠겨 있던 그에게 연희전문학교 동기 정인승이 함께 조선어사전을 만들자고 제안했고, 1941년 4월 23일 조선어학회의 사전 편찬원이 되었다.


찌는 듯한 더위가 채 가시지 않은 1942년 8월의 어느 날, 정태진 앞으로 출두 명령서가 날아들었다. 겉봉에 적힌 발신자는 홍원경찰서였고, 치안유지법 피의사건의 증인으로 9월 5일 출두하라는 내용이었다.


검거가 시작되다

9월 5일 정태진은 한창 바쁜 때 자리를 비우게 되어 미안하다며, 동료들에게 연거푸 머리를 조아린 뒤 ‘잠깐 다녀오겠다’는 말을 남기고 길을 나섰다. 미국 유학 전후로 11년간 근무했던 영생여학교에서 가까운 홍원이기에 아주 낯설진 않았지만, 그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따뜻한 환영의 미소로 손을 흔들며 반겨줄 옛 동료나 사랑스러운 제자들이 아니었다. 아니나 다를까, 홍원경찰서에 도착하자마자 그의 신분은 증인에서 피의자로 바뀌었다. 이후 20여 일 동안 계속된 고문으로 정태진은 초주검이 되었다. 그의 삶은 단 한 번도 예상치 못했던 나락으로 떨어지고 있었다.


학생들에게 불온한 사상을 주입한 적도 없고 조선어학회는 독립운동 단체가 아니라고 진술했지만, 어느새 제자들에게 민족정신을 주입한 사상이 불순한 교사가 되어 있었고 조선어학회는 불순한 독립운동 단체가 돼 있었다. 정태진에 대한 취조와 신문이 합법적으로 이루어졌다면 이 같은 일은 이러나지 않았겠지만, 당시 법은 조선인들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 고문은 그의 육체와 정신을 파괴했고, 정태진은 거짓 진술서에 도장을 찍었다.


1942년 10월 1일

9월의 마지막 밤, 그날도 정인승은 이극로, 권승욱과 함께 사전 원고를 정리하다가 이튿날 새벽에야 퇴근했다. 피곤한 몸을 잠시나마 누일 생각으로 집에 들어섰을 때, 종로경찰서와 홍원경찰서에서 온 두 명의 형사가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길로 연행된 정인승은 종로경찰서에 수감되었다. 왜 끌려왔는지 영문도 모른 채 하루가 지났다.


10월 1일 새벽, 월파 김상용 등 이화여전 동료들과 등산을 가기 위해 채비하던 이희승은 갑자기 들이닥친 형사들에 의해 서대문경찰서로 연행되었다가 경기도 경찰부 유치장에 갇혔다. 몇 시간이 지나자 장지용, 최현배, 김윤경 등이 차례로 들어왔다.


한글, 법정에 서다

과연 사전을 편찬하는 것이 독립운동이 될 수 있을까? 조선어학회가 사전편찬을 시작한 것은 1020년이고, 조선총독부 학무국으로부터 사전 첫째 권의 출판 허가를 받은 것은 1940년 3월 12일이었다. 식민 지배 아래 무려 11년 동안 합법적으로 진행해온 사전 편찬 사업이 하루아침에 국체변혁의 독립운동이 될 수 있는 것인가?


주시경의 어문민족주의 사상을 계승한 최현배가 ‘정복당한 겨레가 다시 살아날 기회를 얻기 위해서는 겨레 의식을 기르며, 겨레 정신을 북돋우기 위해서는 겨레의 말글을 보존하는 것’이 급선무라고 한 말에서도 확인할 수 있듯이 조선어학회가 ‘조선 독립을 위해 10여 년의 긴 세월에 걸쳐 조선 어문운동을 전개해왔다는 것’, 그렇기 때문에 학회는 문화 운동의 가면을 쓴 독립운동 단체로 간주되었던 것이다.


일본 언어민족주의의 승리와 조선 언어민족주의의 패배

1910년 이래 일본은 동화정책을 추진했다. 일본어를 말하는 조선인, 일본 정신을 함양하여 천황을 절대적으로 추종하는 황국신민을 만들고자 했다. 규범 제정을 통해 조선어와 근대화를 도모하고 조선어사전을 만듦으로써 조선의 정체성을 지키고자 한 학회의 활동은 국시 위반행위였다.


조선총독부는 학교뿐만 아니라 가정과 직장 등 전 사회에서 국어상용을 실현하기 위해 조선어의 숨통을 바짝 조였다. 1943년 6월 내무서우이원과 총독부에서 ‘조선어 말살’을 논의했고, 8월에는 조선어를 말살할 정도의 열의로 국어교육의 철저화를 도모하는 것이 진정한 내선일체의 실현이라는 결론에 도달했다. 조선어 수호의 중심에 있던 조선어학회가 유죄판결을 피할 길은 없었다.


집행유예를 선고받은 7인은 곧 석방되었지만, 이극로, 최현배, 이희승, 정인승, 정태진 등 5인은 형무소에 수감되었다. 실형은 선고받은 5인 중 정태진은 미결수 상태로 구속된 2년 6개월 가운데 상당한 일수의 구류 통산을 받아 4~5개월 후면 만기 출옥할 수 있는 상황이라 공소를 포기했고, 1월 18일 네 사람은 고등법원에 상고했다. 그러나 일본의 사법 행정은 단 한 번도 이들의 희망대로 움직여주지 않았다. 상고를 하고도 반년이 지나도록 이들은 아무런 소식도 듣지 못한 채 형무소에 줄곧 갇혀 있었다.


하루가 1년처럼 더디 가던 어느 날, 7월 20일께가 되어서야 8월 12일에 재판을 연다는 통보가 도착했다. 8월 13일 상고기각으로 1심 판결이 그대로 확정되었다. 게다가 고등법원의 판결은 일제 패망직전의 혼란 탓이었는지 통신망의 두절로 판결문이 함흥에 도착하기도 전에 해방을 맞았다.


독립, 그리고 되살아나는 우리말글

조선은 35년간 노예 상태에서 풀려났다. 거리는 만세를 부르는 조선인들로 넘쳤고, 만세 소리는 환희와 감격과 감동으로 삼천리 방방곡곡에 메아리쳤다. 조선이 해방되었다는 소식이 함흥형무소에 전해진 것은 8월 15일 밤이었다.


8월 16일 아침이 되자, 함흥 고려병원 원장 겸 형무소 촉탁의인 고종성이 감방 문을 열어주었다. 네 사람은 복도에 나와 서로 부둥켜안으며 목이 터져라 ‘만세’를 불렀다. 그러나 꿈에도 그러던 해방을 맞았지만 당장 형무소를 벗어날 수 없었다. 책임자가 종적을 감춘 탓이었다. 뒤늦게 그들이 석방되지 않은 것을 알게 된 한글학자 모기윤을 비롯한 함양 유지들이 함흥지방 검사국을 방문해 조선인 엄상섭 검사에게 사정을 설명한 후에야 출옥 명령서를 받아낼 수 있었다.



해방 이후, 한글의 시대를 열다

28년 만에 이룩한 감격적인 쾌거, 『큰사전』

1945년 7월 1일 정태진은 2년 형기를 마치고 석방되었다. 해방 후 조선어학회 회원들은 교과서, 한글 강습회, 『큰사전』편찬, 대학 출강 등으로 몸이 열 개라도 모자랄 지경이었다. 정태진에게도 각처에서 요청이 들어왔다. 정태진은 미국에서 석사 학위를 받았기에 마음만 먹으면 교육계나 정계에서 한자리 차지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는 미군정에서 사람이 올 때마다 진땀을 흘려가며 거절했다.


정태진은 조선어학회에서 꿈쩍도 하지 않았다.『큰사전』편찬과 한글 강의 그리고 자신의 관심사인 방언 연구에 1년 365일 쏟아부었다. 그가 왜 온갖 유혹을 물리쳤는지는 모른다. 한 번도 그 이유를 스스로 설명한 적이 없기 때문이다. 정태진을 곁에서 지켜본 측근과 동료들은 그 연유를 조심스럽게 추측할 뿐이었다. 자신으로 인해 조선어학회사건이 발생했고, 동지들이 고통을 당했으며, 이윤재와 한징이 옥에서 유명을 달리했다는 사실에 대한 무거운 책임감을 느꼈을 것이라고.


조선운송 창고에서 찾아낸 보물

1945년 10월 2일, 운수 창고를 정리하던 서울역 역장이 이상한 종이 뭉치들을 발견했다. 겉장에 큼지막하게 한글로 ‘큰사전’이라고 적혀 있었다. 역장은 지체 없이 조선어학회로 연락을 했다. 1945년 1월 18일 이극로, 최현배, 이희승, 정인승 등이 원심 판결에 불복해 상고했을 때, 『큰사전』원고는 다른 증거 자료들과 함께 기차에 실려 서울로 돌아왔다.


정인승을 비롯한 사전 편찬원들은 한걸음에 서울역으로 달려갔다. 창고 속에 다른 짐들과 함께 파묻혀 있던 원고를 확인한 순간, 35년 만에 나라를 되찾았을 때처럼 다시 한 번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렸다. 말로는 형언할 수 없는 감격적인 순간이었다.

* * *


본 도서 정보는 우수 도서 홍보를 위해 저작권자로부터 정식인가를 얻어 도서의 내용 일부를 발췌 요약한 것으로, 저작권법에 의하여 저작권자의 정식인가 없이 무단전재, 무단복제 및 전송을 할 수 없으며, 원본 도서의 모든 출판권과 전송권은 저작권자에게 있음을 알려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