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본가의 탄생

   
그레그 스타인메츠(역:노승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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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키
   
18000
2018�� 12��



■ 책 소개


유럽의 역사를 바꾸고, 자본주의의 토대를 놓은 역사상 가장 부유한 기업가의 대담한 여정


콜럼버스가 바다를 넘고 다빈치가 모나리자를 그리던 바로 그 시대. 모든 방면에서 유럽은 바뀌고 있었다. 군소 가문에 불과했던 합스부르크 가문은 전통의 강자인 프랑스를 밀어내고 스페인에서 헝가리에 이르는 제국을 건설했다. 가톨릭교회는 대금업 금지를 철폐했으며, 면죄부 판매에 반대하여 종교개혁이 촉발되었다. 복식 부기가 확산되고 무역로가 바뀌면서 한자동맹이 붕괴하고 경제 중심지가 이탈리아에서 서유럽으로 옮겨가기 시작했다. 부르주아와 영주의 착취에 시달리던 농민과 노동자들이 투쟁을 전개했다. 그 모든 일의 중심에는 야코프 푸거가 있었다.


이 책은 바로 그 야코프 푸거의 파란만장한 삶을 담고 있다. 격동의 시대에 세계 최대의 부를 쌓았던 한 자본가의 삶과 시대를 잘 담은 평전이자, 근대 국가와 자본주의가 형성되던 근대 초의 한 단면을 보여주는 흥미진진한 역사서다.


■ 저자 그레그 스타인메츠
저자 그레그 스타인메츠는 미국 클리브랜드 오하이오에서 태어나 콜게이트대학을 졸업했으며 노스웨스턴대학 메딜 저널리즘 스쿨에서 석사 학위를 받았다. 졸업 후 15년 동안 『사라소타 해럴드 트리뷴』 『휴스턴 크로니클』 『뉴욕 뉴스데이』 『월스트리트 저널』 등에서 저널리스트로 활동했으며, 『월스트리트 저널』 독일 지사와 런던 지사의 책임자를 맡기도 했다. 현재는 뉴욕에 있는 자산관리사에서 증권 분석가로 활동하고 있다. 『자본가의 탄생』은 그의 첫 저서로 중요성에 비해 잘 소개되어 있지 않은 야코프 푸거의 의의를 영어권에 잘 소개했다고 평가받는다.


■ 역자 노승영
역자 노승영은 서울대학교 영어영문학과를 졸업하고, 서울대학교 대학원 인지과학 협동과정을 수료했다. 컴퓨터 회사에서 번역 프로그램을 만들었으며 환경 단체에서 일했다. “내가 깨끗해질수록 세상이 더러워진다”고 생각한다. 번역한 책으로는 『우리 몸 오류 보고서』 『이빨』 『세상에서 가장 재미있는 미국사』 『바나나 제국의 몰락』 등 다수가 있으며, 『번역가 모모 씨의 일일』을 썼다. 번역자가 만든 홈페이지(http://socoop.net/)에서 독자와 소통하고자 한다.
 
■ 차례

머리말


1장 여정의 시작
2장 황제에게 꼭 필요한 존재
3장 사업의 확장
4장 금융의 마술사
5장 상인의 전투
6장 대금업의 합법화
7장 종교개혁의 불씨
8장 황제 선거
9장 승리 그리고 패배
10장 자유의 바람
11장 농민 전쟁
12장 북소리가 그치다


맺음말
후기

참고문헌
찾아보기


 




자본가의 탄생


여정의 시작

푸거는 형들을 우러러보면서 그들의 모험을 부러워했다. 얼마 뒤 그에게도 기회가 찾아왔다. 바바라는 푸거를 성직자로 만들겠다는 계획을 포기하고 그를 베네치아의 도제로 보냈다. 베네치아는 세계 최고의 상업 도시였다. 비단길과 라인강을 연결하는 중간 기항지로, 이곳에서 프랑스산 포도주가 배에 실려 알렉산드리아와 콘스탄티노플로 보내졌으며, 무역상들은 동양의 후추‧생강‧면을 서양의 뿔‧모피‧금속과 교환했다. 베네치아의 토대는 상업이었으며 사업가들이 통치했다.


당연히 베네치아는 젊은이들이 무역을 배우기 위해 찾는 장소가 되었다. 부유한 가문들이 자녀를 베네치아로 보내 상업 비법을 찾고 인맥을 쌓게 했다. 푸거는 가족에게 작별을 고하고 알프스산맥을 넘었다. 아마도 브렌네르 고개를 통과했을 것이다.


더욱 중요한 사실은 이 시기에 푸거가 금융에 대해 배웠다는 것이다. 훗날 푸거는 다양한 일-기업가, 무역상, 때로는 투기꾼-에 종사하게 되지만 그중에서도 단연 은행가로 활약했다. 그는 금융에 대해 알아야 할 모든 것을 베네치아에서 배웠다. ‘신용’ ‘채무’ 심지어 ‘은행’의 어원이 이탈리아어인 것에서 알 수 있듯이 금융은 이탈리아인의 발명품이다. 푸거가 회계라는 유익한 기법을 접한 곳도 베네치아에서였다.


푸거가 이탈리아에서 교육을 마쳤을 때 비보가 전해졌다. 형 마르쿠스가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이었다. 당시 서른 살이던 마르쿠스는 푸거가 가지 않은 길을 걷고 있었다. 그는 사제 서원을 하고 대학 교육을 받았으며, 로마에서 교황의 독일 업무를 감독했다. 1478년 로마에 역병이 만연했는데, 이제 막 영향력을 행사하던 마르쿠스도 역병에 걸리고 말았다. 가족들은 당시 열아홉 살이던 푸거를 로마에 보내 형의 사후 문제를 수습하도록 했다. 이 방문은 아마도 그에게 큰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푸거가 로마에서 업무를 마치자 가족들은 그를 오스트리아로 보냈다. 약삭빠른 외할아버지 프란츠의 뒤를 이어 열풍이 불고 있는 광산업에 뛰어들기 위해서였다. 푸거에게는 큰 도약이었으나, 뉘른베르크같이 안정되고 중요한 전초 기지로 그를 보내지 않은 이유가 의문스러울 수밖에 없다. 푸거는 이제 스물여섯 살이 되었으며, 형들이 현재 사업에 중요하지 않은 곳으로 푸거를 보내 새로운 사업을 개척하도록 한 것은 그의 능력에 회의적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어쨌든 푸거는 도제나 말단 직원이 아니라 결정권을 가진 어엿한 사업가로서 오스트리아로 향했다. 그는 그곳에서 자신의 권한을 충분히 행사했다. 푸거는 오스트리아에서 처음으로 천재적 사업 수완을 발휘하게 된다. 그가 오스트리아에서 맺은 거래에서 고객을 다루는 재능, 엄청난 위험을 감수하는 결단력, 남다른 협상력을 볼 수 있다.



황제에게 꼭 필요한 존재

주식 거래에서는 정보가 생명이다. 중요한 정보를 가장 먼저 입수하는 사람이 이 정보를 이용해 거액을 벌어들일 수 있다. 정부에서는 공정 경쟁이라는 이름으로 모든 사람이 공시 정보를 동시에 알 수 있도록 의무화하고 있지만 이렇게 해도 속임수를 막을 수는 없다. 조금-몇 분, 몇 초, 아니 몇 마이크로 초-먼저 출발해도 엄청나게 차이가 벌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푸거 시대에도 마찬가지였다. 다만 정보가 전달되는 시간이 길고, 정보 흐름을 통제할 법규가 없었을 뿐이다. 푸거의 경쟁자들도 최초의 이점을 푸거만큼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푸거는 시장 정보를 너무나 갈망한 나머지 정보를 가장 먼저 접할 수 있는 시스템을 만들기까지 했다. 그가 무엇을 만들었느냐고? 바로 세계 최초의 뉴스 서비스다. 푸거는 통신원을 곳곳에 파견했다. 이들은 시장 정보, 정치 소식, 최신 풍문 등 푸거에게 이익이 되는 정보라면 무엇이든 가지고 아우크스부르크로 달려왔다. 아우크스부르크와 빈 사이에는 14세기부터 우편물이 오갔는데, 아우크스부르크와 인스브루크 및 그 밖의 제국 도시도 비슷한 우편망으로 연결되어 있었다. 하지만 시에서 뽑은 집배원으로 이루어진 우편망은 푸거에게는 너무 느리고 부실했다. 그는 자신만의 맞춤형 시스템을 원했다. 몇 해 전 푸거는 중요한 부고와 전쟁 결과를 막시밀리안, 선거후, 자신의 경쟁자보다 먼저 접하기도 했다. 역사가들은 이 뉴스 시스템을 ‘푸거 뉴스레터’라고 불렀다. 뉴스레터는 푸거의 상속자들에 의해 더욱 정교해졌다. 내용을 생산하는 사람들은 여전히 푸거 가문의 수하였지만 뉴스레터는 점점 신문을 닮아 갔다. 푸거의 뉴스레터는 최초의 신문인 빈의 《노티치에스크리테》보다 반세기 앞섰으며, 이로써 푸거는 언론의 역사에도 흔적을 남겼다. 통신원을 유지하려면 막대한 비용이 들었지만 푸거는 전혀 개의치 않았다.


푸거는 일요일에 교회에 나갔고, 가문의 가치를 인정했으며, 국왕과 국가를 사랑했다. 하지만 오해하지 마시길. 그는 급진파였다. 푸거는 귀족 가문에서 태어났다고 하여 남보다 낫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는 사람을 만드는 것은 지성, 재능, 노력이라고 믿었다. 지금이야 이런 그의 견해가 상식이 되었지만 당시에는 불온한 생각이었다. 유럽도 인도처럼 엄격한 신분제 사회였는데 왕족, 성직자, 평민의 세 집단으로 이루어졌다. 각 집단 안에도 나름의 서열이 있었다. 평민 중에서는 귀족이 상위층이었고 푸거 같은 부유한 상인이 그다음, 그 아래로 장인, 농민, 거지 순이었다. 서열에 따라 나름의 복장이 있었으며, 특권과 의무도 각기 달랐다. 신분 상승은 제한적이었다.


푸거는 이러한 현실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모든 사람에게 자신의 자리가 있다는 중세의 사고방식에 사회 전체가 얽매여 있던 시절, 푸거는 할아버지와 마찬가지로 운명은 스스로 개척하는 것이라고 믿었다.


이런 세계관 덕분에 푸거는 자신과 황제의 관계를 꿰뚫어 볼 수 있었다. 그것은 주인과 종의 관계가 아니요, 영주와 농노의 관계도 아니요, 채권자와 채무자의 관계였다. 이런 관계에서 힘을 가진 쪽은 채권자다. 푸거는 황제라는 칭호를 대수롭게 여기지 않았다. 물론 막시밀리안은 군주였고, 선거후들은 그에게 보주와 홀을 바쳤으며, 농민들은 그가 나타나면 벌벌 떨었다. 귀부인들은 그를 파티에 잡아두려고 그의 신발과 박차를 감추었다. 하지만 푸거는 자신에게 돈이 있는 한 막시밀리안이 자신을 필요로 하고 또 자신의 요구를 받아들여야 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다른 은행가들은 막시밀리안의 부름에 응했지만 푸거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의도적으로 무시했다. 푸거는 다른 은행가들이 막시밀리안과 협상을 하든 말든 상관하지 않고 집에 머무르며 황제를 열흘 동안 기다리게 했다. 그 많은 사람 중에서 막시밀리안의 재봉사가 찾아와 해명을 요구하자 푸거는 금융업을 그만두었다고 말했다. 그는 제국일반세를 도입하고 자신을 내쫓으려던 결정에 아직 분이 풀리지 않았기 때문에 황제의 일에 끼어들고 싶지 않았다. 푸거는 막시밀리안에게 자신의 결정을 설명하는 편지를 썼다. “[돈을 빌려줘 봐야] 말썽에 수고에 공치사 말고는 얻은 것이 없나이다.”



금융의 마술사

푸거는 투자의 귀재였다. 그는 기회를 저울질하는 법과 최소의 위험으로 최대의 수익을 얻을 수 있는 투자처를 납보다 잘 파악했다. 또한 푸거는 사업을 경영하고 성장시키는 법과 아랫사람들에게서 최고의 성과를 이끌어내는 법을 알고 있었다. 상대방의 약점을 이용하고 유리한 조건으로 협상하는 법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의 가장 뛰어난 재능은 투자에 필요한 돈을 마련하는 능력이었을 것이다. 푸거는 추기경, 주교, 공작, 백작 등을 설득해 거액을 빌리는 부러운 매력이 있었다. 그는 그들의 도움이 없었다면 술집에 앉아있는 다른 사람들보다 더 큰 부자가 되지는 못했을 것이다. 자금 융통-또한 상환하지 못할 경우 채무자 감옥에 갇힐 것을 감수하는 용기-은 푸거가 '부자 야코프'라는 이름으로 역사에 기록된 이유다. 푸거는 차입을 통해 최고의 자리에 올랐다.


그가 돈을 빌린 방식은 평범하기 그지없는 바로 예금 계좌였다. 요즘은 거리마다 은행이 있고 누구에게나 손쉽게 계좌를 개설해 준다. 하지만 푸거 시대에는 예금 계좌가 생소했다. 예금 계좌가 등장하기 전에는 은행이 자신의 돈으로 대출과 투자를 했으며, 돈이 더 필요하면 동업자를 끌어들였다. 소유권이 약화되는 문제가 있었지만 달리 방법이 없었다. 돈을 마련하는 가장 손쉬운 방법인 차입은 대출금에 이자를 물리지 못하도록 한 교회의 금지 조치 때문에 불가능했다. 교회는 이자가 붙으면-심지어 소액의 예금 계좌에 붙는 이자조차도-무조건 고리대금으로 치부했다.


푸거의 동시대인으로 아우크스부르크의 은행가이던 암브로제호흐슈테터는 소매 방식으로 예금을 유치했다. 그는 농장 인부이든 하녀이든 가리지 않고 여유 자금만 있으면 모두 받아 주었다. 이들을 일일이 상대하는 것은 힘든 일이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호흐슈테터는 100만 플로린을 유치했다. 이에 반해 푸거는 큰손을 상대하는, 더 빠르지만 위험 요소가 큰 쪽을 택했다. 호흐슈테터 은행에서 농부 1명이 예금을 인출하더라도 호흐슈테터는 신경 쓰지 않을 터였다. 하지만 푸거 은행에서 공작이 예금을 인출할 경우 인출하는 금액에 해당하는 현금이 없다면 푸거는 파산할 수도 있었다.



대금업의 합법화

푸거는 생애 전반부는 돈을 벌면서 보냈으며, 후반부는 돈을 지키려고 투쟁하면서 보냈다.


그는 생애 전반부에 상업적으로 대성공을 거두었다. 티롤의 은광 계약을 따내고, 헝가리에 거대 광산업 시설을 지었으며, 이를 유럽 대륙 전역의 다양한 고객에게 판매할 수 있는 유통망을 구축했다. 푸거는 티롤과 헝가리에서 얻은 수익을 새로운 기회에 투자했다. 그럼으로써 어마어마한 부를 창출하는 기계를 만들었으며, 해가 갈수록 순자산을 높였다. 그의 바람은 이것뿐이었다. 푸거는 영지를 넓히거나 슈바벤 공이 될 생각이 전혀 없었으며, 아우크스부르크 시장이 되고 싶지도 않았다. 푸거에게는 메디치 가문처럼 부를 정치권력으로 전환하려는 욕망이 없었다. 푸거는 속도를 늦추고 싶지도 않았다.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그는 계약을 성사시키거나 장부를 들여다 볼 때 가장 행복했다. 그에게 더 큰 부자가 되는 데 필요한 것보다 즐 운 일은 없었다.


푸거는 이후의 삶도 변함없이 흘러가기를 바랐을 것이다. 일반적으로 보면 실제로 그렇게 흘러갔다. 그는 해마다 재산이 늘어났으며, ‘그냥 부자’에서 ‘세상에서 가장 부유한 사람’이 되었다. 하지만 이 시기에 푸거는 분노한 대중과 이들의 대변자를 자처하는 이들의 공격을 막아 내는 데 많은 시간을 할애했다. 그는 재계의 경쟁자들을 상대할 때처럼 적극적으로 이들과 맞섰다. 피를 흘려야 할 때조차 한 번도 머뭇거리지 않았다. 푸거는 자신의 행동이 정당하다고 확신했다. 이것이 그의 천성이었다. 그는 하느님께서 나를 이 땅에 돈을 벌라고 보내셨다는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었다. 누구도 신의 의지를 방해할 수는 없었다.


지기스문트 공작에게 전 재산을 빌려주고, 장기 광산업 계약으로 유동성을 위험에 빠뜨리고, 헝가리 광산의 운영을 감독하고, 자신의 역투자가 성공했는지 확인하기 위해 직접 말을 타고 돌아다니던 30대의 저돌적 사업가는 이제 옛말이 되었다. 50대가 된 푸거는 수익률이 낮은 부동산으로 투자를 다각화해 (적어도 부분적으로는) 고정적인 수익을 추구했다. 하지만 이것은 투자 스타일이 변한 것에 불과했다. 그는 나이가 들고 25년간 결혼 생활을 유지하며, 형들을 여의고도 돈벌이의 길에서 한 번도 벗어난 적이 없었다. 좋든 싫든 가장 큰 변화는 정치가로서의 비중이 사업가 못지않게 커진 것이었다. 사업 규모와 활동 범위 탓에 그의 의사와는 무관하게 당대의 주요 사건들에 얽히고, 정치 문제에 관여할 수밖에 없었다. 푸거가 최고위층의 정치 게임을 즐겼는지는 모르지만-또한 자신은 밤에 숙면을 취한다고 주장했지만-유럽 최대의 상업 활동을 관리하다 보면 압박감이 여간 심하지 않았을 것이다. 채권자, 고객, 공급자가 그를 귀찮게 했으며, 유럽 전역의 국왕과 주교가 그에게 돈을 빌리고자 했다. 이해관계가 그보다 더 복잡한 사람은 황제뿐이었다. 아우크스부르크의 미술가 대 외르크 브로이가 이 당시의 푸거를 그렸는데, 그림에서 푸거는 쇠약한 모습으로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다. 그림의 의도가 인간의 유한성에 대한 그의 자각을 보여 주려는 것임을 쉽게 알 수 있다. 이기는 일의 달인인 그도 자신이 모든 것에서 이길 수 없음을 깨달은 것이다.


푸거가 가장 큰 역할을 한 것은 합스부르크 가문과 관련해서였다. 이후 다시 보겠지만 첫 번째 사건은 1514년에 일어났다. 푸거는 막시밀리안을 떠밀어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을 건국하게 했다(이 정치 체제는 400년 동안 유지되었으며, 제1차 세계대전 때 최후를 맞기까지 유럽 역사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두 번째 사건은 1519년에 일어났다. 푸거는 10대의 국왕 카를 5세를 후원해 합스부르크 가문이 독일어권 유럽을 계속 지배하도록 함으로써 이 거대 제국을 단단한 토대 위에 올려놓았다.


아쉬운 점은 그의 상업적‧정치적 성취가 너무 오래전의 일이어서 현대와 거의 무관한 것처럼 보인다는 것이다. 오늘날 푸거가 구리 카르텔을 무너뜨리고 한자동맹에 타격을 입힌 사실이 중요한 것은 우리에게 교훈을 주기 때문이다. 경쟁자의 약점과 고객의 동기를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고, 없어서는 안 될 존재가 되는 것이 유리하며, 공격을 당해도 침착해야 한다는 등의 교훈은 어느 시대에나 일맥상통한다.


푸거의 또 다른 위업은 세상에 중대한 변화를 일으켰다. 푸거는 고리대금(빌린 돈에 이자를 물리는 것)에 대한 교회의 금지 조치를 뒤집는 데 큰 역할을 담당했다. 우리가 집을 사거나 차를 빌리거나 예금 이자를 받을 수 있는 것에 감사해야 할 사람이 딱 한 명 있다면 그것은 바로 푸거다.



황제 선거

이즈음 푸거는 마테우스 슈바르츠라는 열아홉 살의 아우크스부르크 청년을 회계사로 고용했다. 슈바르츠는 평생 푸거와 그 후계자들을 모셨다. 그는 조직의 요인이 된 뒤에도 개인의 영달을 추구하기보다는 푸거의 자취를 빛내는 데 힘썼다.


슈바르츠의 예술성은 패션과 경영이라는 두 분야에 걸쳐 있었다. 그는 초상화집을 제작했을 뿐 아니라 회계 교재도 저술했는데, 이 책을 보면 푸거가 정확한 기록을 강조했음을 알 수 있다. 슈바르츠는 푸거와 마찬가지로 베네치아에서 도제 생활을 하기도 했다. 그 곳에서 부기를 배웠지만, (그의 책에 따르면) 푸거의 회사에 들어오기 전에는 회계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는 푸거 밑에서 경험을 쌓으며 푸거의 경쟁자들이 얼마나 어리석은지 깨달았다. 그들은 꼼꼼한 숫자 없이 사업을 할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이 하찮은 자들은 허접한 공책이나 종이 쪼가리에 거래 내역을 써서 벽에 붙여 두고 계산 결과를 창틀에 적는다.” 이에 반해 푸거는 사무소마다 직원을 두어 거래를 하나도 빠뜨리지 않고 일일이 감독했다. 지점들은 매주 수치를 수정하고 연말이면 어김없이 장부를 정리했다. 결산이 끝나면 아우크스부르크에 사본을 보냈는데 이 곳에서 푸거의 직원들이 수치를 라인 플로린으로 환산했으며, 모든 지점의 전표를 하나의 전표로 통합했다(이 또한 푸 거가 최초였다). 이탈리아 은행들은 지점마다 전표를 작성했지만 굳이 통합하려고 하지는 않았다. 이 덕분에 푸거는 어느 누구도 보지 못한 큰 그림을 볼 수 있었다. 매 순간 자신의 위치를 정확히 파악했기 때문에 대출해야 할 금액이나 대출액 삭감 여부 등을 언제나 알 수 있었다. 재고가 남아도는지 현금이 부족한지, 보석이나 공장에서 얼마만큼의 이윤을 낼 수 있는지도 알 수 있었다. 그는 자기 자산의 가치를 크로이처 단위로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었다.


슈바르츠는 푸거가 선구적으로 도입한 회계 감사를 설명하면서-이탈리아인이 이후에 모방했다-부정을 방지하기 위해서는 재무제표 작성 단계에 세 사람이 관여해야 한다는 푸거의 주장을 소개했다. “부정을 저지를 때 의견이 일치하는 경우는 드물다. 따라서 이렇게 하면 주인은 속지 않고 종업원은 어쩔 수 없이 정직하게 된다.” 수석 감사관은 푸거였다.


슈바르츠는 사업에 관심 있는 젊은 독일인 대상으로 교재를 만들었다. 그는 독자들에게 투자 조언을 해 주었는데, 아마도 그 자신이 푸거에게서 배운 내용들이었을 것이다. 슈바르츠는 사업가는 자산의 3분의 1은 현금으로, 3분의 1은 투자로, 3분의 1은 현물로 보유해야 하며, 언제든 큰 손실을 입을 각오가 되어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개인적으로 부동산을 보유해야 하는 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었다. 투자는 실패하고 현금은 (인플레이션이 일어나면) 감소하지만 땅은 변함없기 때문이다.



자유의 바람

황제 선거 전까지만 해도 푸거의 적들은 재계의 경쟁자, 온갖 입법권자 그리고 거대 기업의 탐욕에 분노한 일부 인문주의자였다. 하지만 선거 이후에는 일반 대중이 비난에 동참했다. 유럽을 휩쓸고 있는 변화에 진저리가 난 노동자들은 푸거를 표적으로 삼았다. 사람들은 스탠퍼드대학의 조던처럼 후텐에게서 영감을 얻었다. 후텐은 푸거를 겨냥한 소책자를 잇따라 발표했다. 푸거에게 후텐은 존 D. 록펠러를 비판한 아이다 타벨과 같은 존재였다. 후텐의 펜 끝에서 푸거는 공공의 적이 되었다.


후텐은 선거후의 참모로서 수입이 넉넉했으나 안락한 삶에 대한 욕망보다 사명감이 앞섰다. 그는 루터와 합세헤 교황권을 공격하고 푸거의 결탁을 폭로했다. “푸거 가문은 매춘부의 군주라 불릴 만한 권리를 사들였다. 자리를 깔고 교황에게 싸게 산 것을 비싸게 되판다. 사제가 되는 가장 수월한 방법은 푸거 가문과 친해지는 것이다. 그들은 로마에서 모든 것을 이룰 수 있는 유일한 자들이다.”


루터에 대한 황제의 근심이 깊어지는 가운데 푸거를 비롯한 은행가들을 조사하겠다는 황제의 선거 공약을 이행하기 위한 제국의회 특별위원회가 구성되었다. 위원회는 몇 해 전 한자동맹 문제가 제기되었을 때와 마찬가지로 재벌의 손발을 묶는 입법을 계획했다. 푸거는 황제가 자신을 보호해 줄 것이라는 확신을 할 수 없었다. 막시밀리안은 그의 손바닥 안에 있었으나 카를은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푸거는 카를을 만난 적도 없었다. 카를이 어떻게 나올지 예측할 수 없었으므로 푸거는 나름의 방식으로, 즉 변호사를 내세워 위원회와 맞섰다.


변호사들은 뉘른베르크 제국의회의 반독점위원회에 소속되었다. 그들은 독점에 대한 로마의 입장을 알고 있었다. 위원회는 현학을 과시해 ‘독점’의 그리스어 어원(‘모노스’는 ‘하나’를, ‘폴레오’는 ‘무역’을 뜻한다)을 거론하며 은행가 청문회를 개회했다. 법률 논쟁은 한풀이의 자리가 되었다. 위원회는 금융업자들이 ‘노상강도와 도둑을 모두 합친’ 것보다 경제에 더 해롭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아우크스부르크의 은행가 바르톨로메우스 렘을 예로 들었다. 그는 몇 달 전 푸거의 경쟁자 호흐슈테터의 마차를 탈취한 인물로, 당국에 체포되었으나 간수를 매수해 달아났다. 위원회는 이 사건이 금융업자들의 전형적인 사업 방식을 보여 주는 것이라고 단언했다. 첫째, 그들은 법을 어겼다. 둘째, 그들은 돈으로 문제를 해결했다. 독일에서 제일가는 은행가인 호흐슈테터가 그 사건의 피해자라거나 렘 같은 사기꾼을 처리할 방법이 이미 법률에 명시되어 있다는 등의 반론은 통하지 않았다. 그들은 무슨 일이 있어도 은행가들을 제압하고 싶어 했다.


푸거는 최고의 변호사 콘라트 포이팅거를 고용했다. 포이팅거는 볼로냐에서 법학 학위를 받은 뒤 아우크스부르크시 서기관을 지냈다. 일찍이 고셈브로트를 비롯한 비운의 구리 카르텔에 법률 지원을 했고 막시밀리안을 위해 허드렛일을 하기도 했다.


포이팅거는 제국의회에서 높은 후추 가격이 유감스럽기는 하지만 이를 은행가 탓으로 돌리는 것은 부당하다고 말했다. 원인은 포르투갈 왕이 공급을 제한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포이팅거는 상인들이 비용을 보전받지 못하면 후추를 아예 구할 수 없음을 상기시켰다. 높은 금속 가격에 대해서는 그 덕에 광산주들이 높은 임금을 줄 수 있으므로 사회에 유익하다고 주장했다. 포이팅거는 시장이 복잡하고 규제하기 어려우므로 은행가들을 내버려 두라고 충고했다. 입법으로 인해 예상치 못한 결과가 생길 수도 있지 않은가? 하지만 위원회는 요지부동이었다. 그들은 ‘모노스’와 ‘폴레오’ 두 단어를 내세워 은행가들이 법령을 어겼다고 선언했다.


푸거는 포이팅거를 고용해 정정당당한 승부를 시도했으나, 이 방법이 실패하자 확실한 옛날 수법으로 돌아가 유력 의원들을 매수해 법안을 철회하고자 했다. 그는 문제가 일거에 해결되기를 바랐다. 하지만 절반의 성공이었다. 제국의회는 조치를 취하기 전에 해산되었으나 애식하게도 수석 제국검찰관 카스파르 마르트가 바통을 넘겨받았다. 마르트는 로마법을 거론하면서 은행가들에게 법정에 출석해 재판을 받으라고 명령했다. 마르트는 뉘른베르크에서 살았기 때문에 고리대금 논쟁에 불을 지핀 뉘른베르크 지식인 집단의 영향을 받았다. 그는 푸거의 소환 통지서를 아우크스부르크 시청 출입문에 붙였다. 목적은 푸거에게 창피를 주려는 것으로 일종의 언론 플레이였다.



북소리가 그치다

1525년 12월의 어느 아침, 푸거궁 예배당에 소규모 군중이 모여 소식을 기다렸다. 그 중에는 푸거의 조카들, 공증인 2명, 증인으로 참석한 외부인 몇 명도 포함되어 있었다. 푸거는 죽을병에 걸려 옆방에서 쉬고 있었다. 모두 도착하자 문이 열리고 하인이 그를 부축해 들어왔다. 공증인 1명이 서류에 쓰인 문구를 내려다보았다. 그는 푸거가 수정한 유언을 읽으려던 참이었다. 자리에 모인 사람들에게 푸거가 세계 최대의 부를 어떻게 나누었는지 알려 주어야 했다. 성탄절은 사흘 남았지만 누군가는 미리 선물을 받을 터였다.


공증인이 낭독을 시작했다. 유언장은 뜻밖의 문구로 시작했다. 첫 번째 유언장과 달리 푸거가 가장 신뢰하는 직원들이 수혜자로 포함되었다. 두 번째 유언장은 푸거의 최측근 10명을 거명한 뒤 조카들에게 이들을 돌보고 연금을 지급하라고 명령했다. 그전까지 푸거의 입장은 직원들에게 공정한 임금을 지불했으므로 그것으로 충분하다는 것이었다. 그동안 마음이 누그러진 모양이었다. 사제들이 푸거의 이름으로 미사를 집전하고 영지에서 푸거의 구원을 위해 기도하는 농민들에게 돈을 지급하라는 유언은 여전히 남아 있었다. 또한 유언장은 푸거라이의 모든 주민에게 선물을 약속함으로써-자녀가 있는 가족에게는 1플로린, 없는 가족에게는 그 절반-푸거가 이 주택 사업에 애착을 가지고 있음을 강조했다.


12월 28일은 푸거가 업무를 본 마지막 날이었다. 그가 내린 최후의 사업 결정은 프로이센 공 알브레히트가 요청한 대출을 거절한 것이었다. 최근 알브레히트는 가톨릭 교단에 속한 튜턴 기사단의 단장 자리에서 물러나 루터파가 되었다. 알브레히트는 상환 능력이 충분했지만 푸거는 개종자에 대한 대출을 거부했다. 이튿날 푸거는 (젠더의 글에 따르면) “죽은 듯” 깊은 잠에 빠졌다. 오코 박사가 손님을 모두 내보냈다. 다른 사람들은 스스로 접근을 삼갔다. 그가 임종할 때 푸거의 조카들과 아내 지빌레는 다른 곳에 있었다. 푸거는 1525년 12월 30일 새벽 4시에 예순여섯 살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임종을 지킨 사람은 간호사와 사제뿐이었다. 정확한 사인은 알려지지 않았지만 전립선염으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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