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 따위를 삶의 보람으로 삼지 마라

   
이즈미야 간지(역:김윤경)
ǻ
북라이프
   
13000
2017�� 12��



■ 책 소개

 

시대의 지성들에게 배우는 직업과 삶에 대한 통찰!

 

일본의 정신과 의사인 이즈미야 간지가 쓴 『일 따위를 삶의 보람으로 삼지 마라』에서는 불안함을 안고 사는 세대에게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나쓰메 소세키, 버트런드 러셀, 한나 아렌트, 빅터 프랭클 등 지성들의 입을 빌려 해답을 찾아 간다. 그는 정신과 의사로서 예전에는 애정 결핍, 열등감, 인간 불신 등 뜨거운 감정에 따른 고민을 자주 접했으나 최근에는 하고 싶은 일이 없다거나 존재 가치를 묻는 ‘온도가 낮은 고민’이 주가 되었다고 한다. 일에서 의미를 찾지 못하는 현대인들에게 나타난 공허함과 무의미가 정신적인 문제로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 저자 이즈미야 간지
저자 이즈미야 간지(泉谷閑示)는 정신과 의사이자 음악가, 음악 평론가이다. 1962년 아키타 현에서 태어나 도호쿠 대학 의학부를 졸업했다. 도쿄의치과대학 의학부 부속 병원 신경 정신 의학 교실 연수, 재단 법인 정신 연구소 부속 세이와 병원, 신주쿠 서던스퀘어클리닉 원장 등을 거쳐 현재 정신 요법을 전문으로 하는 이즈미야클리닉 원장으로 일하고 있다.

 

대학을 졸업하고 정신과 수련의로 근무하던 1999년 프랑스로 건너가 파리 에콜노르말 음악원(Ecole Normale de Musique de Paris)에서 유학했으며 파리 일본인 학교 교육 상담원으로 근무했다. 이후 일본으로 돌아와 약물 치료에만 의존하지 않고 환자의 개성을 존중하며 잠재력을 최대한 이끌어 내는 독자적인 상담으로 수많은 사람에게 도움을 주고 있다. 진료 이외에도 학생과 대중을 대상으로 세미나와 강연 활동도 활발하게 펼치고 있으며 NHK, 후지 TV, ABC 아사히 방송 라디오를 비롯해 다양한 프로그램에도 출연하고 있다.

 

저서로는 『뿔을 가지고 살 권리』 『반교육론』 『약에 의지하지 않아도 우울증은 낫는다』 『나답게 살아가기 위한 말』 등이 있다.

 

■ 역자 김윤경
역자 김윤경은 한국외국어대학교를 졸업하고 일본계 기업에서 통번역을 담당하다가 일본어 전문 번역가로 방향을 돌려 새로운 지도를 그려 나가고 있다. 바른번역 아카데미 일본어 번역 과정을 수료하고 현재 바른번역 소속 번역가로 활동 중이다. 옮긴 책으로는 『일류의 육아법』 『나는 단순하게 살기로 했다』 『만두와 사우나만 있으면 살 만합니다』 『나는 착한 딸을 그만두기로 했다』 『끝까지 해내는 힘』 『모델-미래의 기회를 현재의 풍요로 바꾸는 혁신의 사고법』 등 다수가 있다.

 

■ 차례
들어가는 말

 

제1장 살아갈 의미를 잃어버린 현대인
꿈 없이 편하게 살고 싶다
우울증의 뿌리는 자아 상실
무조건 쉽고 가볍게
공허함을 탕진으로 채우는 사람들
진짜인가 가짜인가
몰지각한 비전문가의 시대
고차원의 실존적 욕구 불만
중년과 청년의 온도 차
어떻게 살 것인가

 

제2장 노동의 배신, 무엇을 위해 일해야 할까?
나쓰메 소세키가 말하는 ‘일’
일은 경멸의 대상인가 기쁨의 원천인가
일의 몰락
왜 노동이 찬양받게 되었나
천직이라는 개념의 속임수
게으를 권리
‘노동이 너희를 자유롭게 한다’는 거짓말

 

제3장 진정한 나는 어디에 있을까?
진정한 자신이란 정말 존재할까?
미숙한 개인에서 초인으로
의미와 의의는 어떻게 다를까?
삶이 있는 곳에 의지가 있다
일은 자아 찾기 과정이 아니다

 

제4장 우리는 어디로 향해야 할까?
자유라는 이름의 감옥
사랑과 욕망의 경계선에서
인간만이 할 수 있는 일
인간답게 산다는 것
아름다움 너머에 진리가 있다
참을 수 없는 삶의 가벼움

 

제5장 나다운 일상을 되찾기 위해
일상에서 발견한 놀이
밥을 먹는 것도 예술이 된다
놀이를 창조해 내는 지성
우리를 놀이에서 멀어지게 하는 것
오늘 더 재미있게 사는 법
개미보다는 베짱이의 삶을

 

나가는 말




일 따위를 삶의 보람으로 삼지 마라


제1장 살아갈 의미를 잃어버린 현대인

꿈 없이 편하게 살고 싶다

최근 다양한 미디어를 통해 젊은 세대가 ‘뭘 하고 싶은지 모르겠다’ 또는 ‘특별히 하고 싶은 일도 없다’고 하는 말을 자주 듣는다. 그들은 공통적으로 자신이 무엇을 좋아하고 무엇을 싫어하는지 별로 생각해 본 적이 없다고 한다. 어릴 때부터 부모가 일방적으로 정해 준 예체능 교실이나 과목별 학원에 다니며 입시를 향해 달려가느라 자신이 좋아하고 싫어하는 것을 깊이 생각하거나 말해 보지도 못한 채 수동적으로 자란 것이다.


자신이 좋아하는 것과 싫어하는 것을 분명하게 밝히는 일은 자아 표현의 첫걸음이다. 자아를 자연스럽게 표현하는 일은 가장 먼저 타인에게서 독립성을 확보해야만 시작할 수 있다.


자아의 싹이 잘린 채 자라난 그들의 간절하고도 소박한 희망이 더 이상 누구에게도 강요받고 싶지 않다는 바람, 즉 성가신 일은 최대한 줄이고 조금이라고 편한 인생을 살아가고 싶다는 형태로 발현되는 것은 필연적인 결과일지도 모른다.


몰지각한 비전문가의 시대

머리로 판단해 버리는 성향의 사람들이 빠지기 쉬운 함정 중 하나는 작품이나 연주 자체가 아니라 그에 부수적으로 딸려오는 이차적인 정보에 현혹되어 판단이 흐려진다는 점이다. 경력이나 인기, 지명도에 의한 판단은 작품 자체에 대해 그릇된 판단을 내리게 하는 요인 중 하나다.


하지만 진짜 양질은 비전문가라도 알아볼 수 있어야 한다. 아니, 오히려 비전문가에게는 왜곡된 선입견이 없는 만큼 그들은 확실한 판단을 할 수 있다. 여기서 비전문가는 마음의 순수한 감성이 자유롭게 작용하는 사람을 가리키는데, 아무리 비전문가라도 그 사람이 ‘이해한다, 이해하지 못한다’, ‘안다, 모른다’라고 머리 수준에서 판정을 내리거나 이차적 정보에 좌우되는 경우라면 그 판단은 전혀 신뢰할 수 없다.


나쓰메 소세키는 이런 사람을 ‘지각없는 비전문가’라고 불렀다. 이들은 세세한 일부분도, 전체적인 윤곽도 제대로 판단하지 못한다고 하였다. 그들은 뛰어난 가치에 눈을 뜨려고 하지 않는 폐쇄된 정신의 소유자거나 대중매체에 쉽게 휘둘리는 사람을 가리키며, 촌락 사회의 전형적인 인간상이다. 또한 익숙한 범주를 넘어선 대상에 대해서는 자신의 편협한 가치관을 기준으로 시시해하며 당장 그 자리에서 결론을 내린다. 또한 자산이 알지 못하거나 감당할 수 없는 일에 위협당하지 않도록 상대의 가치를 깎아내리는 비열한 고집과 기존의 권위와 정보 조작을 덮어놓고 따르는 양심 없는 유연성을 함께 갖추고 있다. 여기에 천박한 마케팅 원리까지 가세하여 ‘이해하기 쉽고 재미있으며 즐겁기만’한 공허한 풍조가 널리 퍼지는 결과를 초래하고 말았다. 그래서 지각없는 비전문가의 편협한 견해가 세상을 휩쓸다시피 하게 된 것이다.


어떻게 살 것인가

이처럼 현대 사회는 오랜 세월 지속되어 온 헝그리 모티베이션의 잔재와 공허함이 뒤섞여 혼란스럽다. 이러한 현 시대에 사람들이 느끼는 ‘굶주림’이란 과연 어떤 것일까.


교육 기관도 서적이나 대중매체도 앞서 언급한 여러 가지 사정 때문에 당장 도움이 되거나 재미있고 신기한 일, 쉽게 익숙해지는 일만 좇다 보니 많은 현대인이 실존적 문제를 정면으로 맞서 생각하는 의미 있는 일에 잠재적으로 강한 굶주림을 갖고 있다.


최근에는 히키코모리나 자살에 관해 강연할 기회가 자주 있었는데 그때마다 ‘사람은 왜 살아가는가’, ‘일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인생의 의미는 무엇일까’ 등의 주제를 다뤄 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수강자들은 각자가 안고 있는 실존적 물음의 실마리를 찾고자 모여들었다. 나는 그들이 내뿜는 열기에서 그들의 굶주림이 자신의 존재를 건 중대한 문제라는 것을 새삼 실감했다.



제2장 노동의 배신, 무엇을 위해 일해야 할까?

‘노동이 너희를 자유롭게 한다’는 거짓말

본래는 인간적인 보람을 얻어야 할 일이 어느 사이엔가 노동이라는 행위에 흡수 합병되어 완전히 변질되고 말았다. 그리고 노동이야말로 가치를 창출한다는 노동가치설이 사회 경제의 근본적 가치관으로 자리 잡았다. 더욱이 예로부터 가장 가치 있는 것으로 인정받던 차분한 관조 생활의 의미가 완전히 잊혀 사라지고 단지 나태하고 비생산적인 것으로만 인식되었다. 또한 전력으로 천직을 수행하는 일이, 세속 내 금욕이야말로 가치 있는 삶이라는 프로테스탄트 가치관의 출발점이 되고 노동해서 돈을 버는 일이야말로 선행이라고 여겨진다. 그리고 거기서 자본주의라는 사고가 생겨나 ‘일하지 않는 자는 먹지도 말라’는 자본주의 정신이라는 에토스가 힘을 갖게 된다. 이러한 여러 가지 배경으로 인해 일하는 것이 노예적이고 비인간적인 행위로 전락하고 말았다.


오늘날 사회에서는 노동하는 권리나 노동자의 권리를 위한 투쟁을 직접 보는 일은 있어도 관조 생활을 위한 투쟁은 볼 수가 없다. 오늘날은 노예제를 기반으로 성립한 고대 그리스 시민과 같은 생활이 가능할 리 없을뿐더러 윤리적으로도 용납되지 않는다. 그렇지만 지금껏 노예제를 대체할 수 있는 고도의 기계화와 정보화가 실현되었는데도 사람들은 여전히 노동하는 동물의 상태에서 해방되지 못하고 있으며, 오히려 거꾸로 IT 기기의 노예라도 괸 듯이 오랜 시간 노동에 종사한다. 완전히 본말이 전도된 상황이다.


아렌트도 강조했듯이 노동에서 완전히 벗어나는 것은 인간으로서의 활력과 생명을 빼앗긴다는 의미다. 이는 생명체로서 갖는 하나의 진실이다. 그렇다고 해서 노동이 삶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생활은 결코 인간적이라고 할 수 없다.


그렇다면 이렇게 모순되고 어려운 과제에 대해 어떠한 해답을 찾아낼 수 있을까.


아렌트가 말한 ‘일’의 복권이나 활동에 대한 자각, 그리고 오래도록 망각된 관조의 의미를 조금이나마 매일매일 생활 속에서 부활시키는 것이 중요하지 않을까. 양의 차원으로 변질된 ‘노동’을 질 높은 ‘일’의 수준으로 끌어올릴 수 있도록 앞으로 진지하게 고민해야 한다. 인간다운 세상을 되찾기 위해서는 벌이가 된다거나 도움이 된다는 의미에서의 가치만을 끊임없이 추구하는 자본주의 정신이라는 에토스에서 각자가 눈을 뜨고, 생명체로서 그리고 인간으로서 의미를 느낄 수 있는 삶을 모색해야 한다. 이 좁은 길이야말로 앞으로 우리가 추구해야 할 과제이며 희망이다.



제3장 진정한 ‘나’는 어디에 있을까?

삶이 있는 곳에 의지가 있다

살아가는 의미가 있는가? 그 물음에 ‘있다’ 또는 ‘없다’고 대답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 이는 대답이 없다는 뜻이 아니라 이 물음이 전제로 하는 사고 자체가 가진 오류를 먼저 다뤄야 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 오류는 무엇일까.


바로 인생 자체에 미리 의미가 있거나 없다고 상정하고 있다는 점이다. 의미라는 것은 고정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의미는 사람이 ‘의미를 추구한다’는 ‘지향성’을 가질 때 비로소 생겨나는 특성이 있다. 달리 표현하자면 의미는 어딘가에 점처럼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의미를 추구한다는 의식의 방향이 생기면서 출현하는, 어디까지나 동적인 개념이다. 즉, 의미는 결코 어딘가에서 찾아주기를 줄곧 기다리는 고정된 성격이 아니라 의미를 추구하는 자신의 내면이 작용하면서 비로소 생겨난다.


빅터 프랭클은 이것을 ‘의미에의 의지’라는 말로 표현했다. 그의 저서 『무의미한 삶의 고통』에서 살아가는 의미를 추구한다는 ‘의미에의 의지’야말로 본질적인 방향이므로 의미의 부산물인 쾌락이나 의미를 얻기 위한 방편에 불과한 권력을 목표로 여기는 것은 정당한 방식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물론 인간에게는 쾌락이나 권력을 좇는 천박한 면이 있다는 것도 하나의 진실이다. 그렇다고 해서 인간이 결코 쾌락과 권력에만 머무는 존재는 아니다. 인간은 살아가는 의미를 추구하지 않고서는 살 수 없는 철학적 성질을 가지고 있어 다른 동물과 구별되는 실존적인 내면의 깊이를 갖추었다.


결국 살아가는 일 자체를 우리 의식이 대상화하여 ‘인생’이라 이름 붙이고 거기에 의미를 묻는 방향성을 부여하는 것, 그리고 스스로 자기 인생의 주인이 되고자 하는 것, 이렇게 인간만이 할 수 있는 일련의 행위야말로 프랭클이 말한 ‘의미에의 의지’가 추구하는 본질이다.


일은 자아 찾기 과정이 아니다

진정한 자신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자신 본연의 모습으로 돌아오는, 혹은 빠져나오는 일이다. 진정한 자신은 어딘가 밖에서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내면에 있는 ‘마음=몸’을 중심으로 한 생명체로서 자연스러운 본연의 모습으로 돌아옴으로써 달성된다.


오늘날 사람들은 자기실현이라는 명목으로 ‘본연의 나’에 어울리는 직업을 찾는 데 힘을 쏟고 있다. 스벤젠은 이러한 현대인의 상황을 비꼬아 ‘낭만주의의 변형’이라고 지적한다. 그의 이 의견에는 ‘본연의 나’ 찾기, 즉 진정한 자신을 찾는 일에 회의적인 뉘앙스가 들어 있다. 하지만 현대의 진정한 자신 찾기가 자신에게 어울리는 일 찾기로 바뀌었다는 그의 지적은 중요한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


다시 말해 진정한 자아가 자신의 내면에 있는 것이 아니라 본인에 의해 창출되는 ‘새로운 자신’으로 완전히 개념이 바뀌었다는 점은 참으로 이상한 현상이다. 게대가 많은 사람이 일 찾기를 통해 자아를 찾을 수 있다고 믿고 있으니 말이다. 이렇게 진정한 자아가 자신의 내면이 아니라 바깥쪽에 갖춰져 있고, 그래서 이미 사회에 마련된 ‘직업’과 연결함으로써 자아가 실현된다는 사고방식은 확실히 사람들을 끝없는 ‘자아 찾기’, 즉 ‘일 찾기’의 미로로 몰아넣고 있다. 그는 이것이 문제라고 지적하는 것이다.


그의 말을 정리해 보면 문제점은 크게 두 가지로 요약된다. 진정한 자신을 밖에서 찾고 있다는 점과 그것을 직업이라는 좁은 범주에 맞춰서 찾고 있다는 점이다.


한 개인으로서 인간은 하나의 직업에만 갇힐 정도로 하찮지 않다. 우리에게 주어진 과제는 무조건 노동을 찬양하는 노동교에서 벗어나 다시금 진정한 인간으로 부활하는 것이다.



제4장 우리는 어디로 향해야 할까?

인간만이 할 수 있는 일

진정한 예술가의 모습은 어린아이가 지닌 순수함과 창조성을 간직하면서 거기에 강인하고 성숙한 열정을 함께 갖춘, 예사롭지 않은 ‘아이’라고 부를 수 있는 존재다.


하지만 이는 예술가에게만 해당되는 얘기가 아니다. 사람은 결코 헝그리 모티베이션에 따라서만 살아가는 존재가 아니며, 인간이기에 가능한 삶을 살아간다는 거은 순순히 ‘낙타’로 살아가는 데 머무는 존재 또한 아니라는 의미다. 오히려 가장 인간다운 모습은 자유를 속박하는 다양한 장애물과 맞처 싸우는 ‘사자’를 거쳐 창조적 유희를 즐기는 ‘아이’에까지 이르는 데 있다. 그리고 그 상태에서 사람은 필연적으로 예술적인 존재가 되는 것이다.


와일드는 이것을 유미주의자(唯美主義者)다운 말로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사람은 자신이 예술 작품이 되거나 혹은 예술 작품을 몸에 걸치든가 해야 한다.


인간답게 산다는 것

사람이 정말로 성숙해 간다는 것은 곧 예술적인 존재를 향해 성숙해 가는 일이며 이것이야말로 다른 동물에게는 없는, 인간만이 지니는 풍요로움이다. 따라서 예술은 많은 사람이 오해하듯이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상품이 아니다. 인간의 영혼에 없어서는 안 되는 존재다. 이른바 타인에게 과시하기 위한 교양도 아니며, 공허한 생활을 메우기 위해 꾸미는 장식품도 아니다. 즉, 예술은 인간답게 살기 위하여 ‘반드시 있어야 하는 것’이며 결코 ‘남아돌아’ 몸이 걸치는 사치품도 아니다.


지금까지 인간이 인간답게 살아간다는 것은 인생이나 세상을 향해 ‘의미’를 추구하는 방향을 드러내는 일이라고 강조해 왔다. 이 방향성은 ‘마음’이 일으키는 ‘사랑’의 작용이라고 말할 수 있다. 다시 말해, 사랑은 단순히 다른 사람에게 향하는 감정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세상의 다양한 사물과 인생 그자체로도 향하며 대상에 잠재한 본질을 상세히 알고 깊이 맛보는 일이다. 사랑이 작용할 때, 우리는 대상을 깊이 살펴보고 귀를 기울여 그 속에 숨은 본질을 느끼고자 한다. 그럼으로써 사물에 숨겨진 진실이 살펴보는 자와 귀를 기울이는 자에게 살포시 드러난다. 그때 우리는 마치 대상과 일체가 된 듯한 행복을 느끼게 된다. 사랑의 기쁨은 그러한 경험이다.


마음이 머리의 분별을 떠나 사랑을 지니고 사물을 마주할 때, 우리는 반드시 대상에서 ‘미(美)’를 발견하고 또한 그곳에 ‘진리’가 있다는 사실을 직관한다. 살아가는 일에 의미를 느끼는 순간은 이처럼 사랑의 경험에 의해서도 빚어진다.



제5장 나다운 일상을 되찾기 위해

일상에서 발견한 놀이

우리는 평범한 일상 자체에 주목해야 한다. 즉, 별 것 없이 보이는 일상이야말로 살아가는 의미를 느끼는 데 중요한 열쇠를 쥐고 있다.


일상을 죽은 시간으로 채운다면 그 지루하고 고통스러운 시간을 참고 견디기 위해서 감성을 경직시키게 되고, 간혹 멋진 비일상적 체험을 하게 되더라도 충분히 기븜을 느낄 수조차 없게 된다.


하지만 애초에 이런 식으로 일상과 비일상을 구분하는 자체가 문제인지도 모른다. 무의식적으로 일상이라는 말에 ‘똑같이 반복되는 하찮은 시간’이라는 느낌을 담아 버리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선 이 빛바랜 느낌을 뒤집어쓴 일상을 어떻게 비일상화해서 구별 없이 깊고 묘미 있는 시간으로 탈바꿈시킬 수 있을까. 결국 인생이라는 시간 내내 ‘놀 수’ 있을까 하는 질문이 다가온다.


사물을 깊이 음미하기 위해서는 그 일이나 대상을 마주해 아이처럼 창조적으로 노는 것이 중요하다. 미국의 화가이자 미술 교자인 로버트 헨리는 ‘인생도 열중해서 놀아야 한다’, 게다가 ’성숙한 놀이‘여야 한다, 진정한 예술가는 이를 구현한다고 강조했다. 여기에서 말하는 정신은 예술을 생업으로 하는 사람뿐만 아니라 모든 인간에게 꼭 필요한 가르침이다.


놀이를 창조해 내는 지성

머리는 ‘마음=몸’이 감지한 감각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그것을 기반으로 다양한 호기심을 발동시킨다. 또한 추상화하고 개념화하여 거기서부터 보편적인 진리를 추출하기도 한다.


머리는 자칫하면 ‘마음=몸’을 억눌러 지배적으로 행동하기 쉬운 반면에 이렇게 효과적으로 사용하면 비로소 행복의 기쁨이 찾아온다. 이렇게 ‘마음=몸’이 머리와 대립하지 않고 상호 보완하여 기뻐하는 상태, 이것을 ‘놀이’라고 부른다.


오늘 더 재미있게 사는 법

우리가 놀이에서 멀어진 것은 머리의 작용 대문이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이 속박을 잘 피해 갈 수 있을지 생각해 보자.


우선 머리의 계획성과 합리성을 회피하려면 ‘즉흥’이라는 정반대의 개념을 적극적으로 이용하는 방법이 매우 유효하다. 이 키워드를 적극적으로 이용하는 방법이 매우 유효하다. 이 키워드를 머리에 두고 일상을 지내 보면 별 것 아닌 일이 정말 전율적으로 변해 간다.


일부러 계획도 없고 목적도 없이 자신의 행동을 즉흥에 맡기면 판에 박힌 듯이 반복되던 일상이 소소하지만 설레는 발견과 창의적인 연구로 가득 찬 하루하루로 바뀐다. 이것을 나는 ‘우연히 깨닫는 기쁨’이라고 표현한다.


‘즉흥성’ 외에 도 하나의 중요한 방법으로 ‘번거러움’을 오히려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사고방식이 있다. 머리의 효율주의에서 비롯된 번거로움에 현혹되지 않기 위해 반대로 ‘노력과 시간이 드는 만큼 시간을 보내기에 좋다’ 또는 ‘당장 얻을 수 없다는 점이 매력적이다’라고 생각해 보는 것도 좋다.


우리는 어떤 일을 새롭게 시작할 때 당장 전문가처럼 숙달하려고 성급해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이 일을 굳이 하지 않는다 해서 아무런 죄가 되지 않으니 놀이로써는 즐기기만 하면 된다. 효율적이고 신속하게 뚜렷한 결과를 원한다면 물론 숙련된 사람에게 배우는 것이 빠르겠지만 이는 분명 ‘머리’의 발상이다. 스스로 시행착오를 겪고 하나하나 익히면서 느긋하게 앞으로 나아간다면 배워서 할 수 있게 될 때와 전혀 다른 흥미로운 경험이 될 것이다.


이제 무언가가 될 필요 없이 그저 무언가를 하면서 놀아도 좋지 않을까. 그것이야말로 놀이의 진수라고 할 수 있다. 마음 가는 대로 기분 내키는 대로 해 보자. 내키지 않으면 안 하면 된다. 계속 이어 가야 한다고 부담스럽게 생각하지 말고 그저 길고 긴 인생에서 여유로운 마음을 갖고 노는 시간을 즐기면 되는 것이다.


개미보다는 베짱이의 삶을

우리 사회는 근면과 인내를 미덕으로 삼으며 미래에 대비해 저축하는 자세를 바람직하게 여기는 경향이 무척 강해서 「개미와 베짱이」의 개미처럼 살아가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압도적으로 많다. 이러한 개미 신앙이 금욕적으로 노동하며 미래를 대비하는 삶을 과도하게 찬양하고, 그 반작용으로서 ‘현재를 위해 살아가는’ 또는 ‘삶을 즐기는’ 일을 옳지 못하다고 인식하는 왜곡된 가치관을 만들어 냈다. 괴로운 일을 참고 견디는 것이야말로 정당한 일이고 즐기거나 마음 편한 일은 타락으로 여겨 죄책감을 느낀다. 그러한 심리 상태로 답답한 인생을 살고 있는 사람이 오늘날에도 많이 있을 것이다.


삶을 칭송하고 아름다움을 좇으며 살아가는 일이 ‘노동’보다 가치 없는 일로 취급된다면 그것은 엄청난 인간성 타락이며 개미의 정신 상태가 인간의 아름다움을 비웃고 있는 실로 중대한 사태라 하겠다.


‘현재를 살아가는 일’을 희생하고 그만큼 무언가를 차곡차곡 모아서 장래를 멋지게 살아 보려는 이 비루한 ‘머리’의 발상은 우리의 장래가 미지수라는 데 대한 불안으로 잘도 파고들어 수많은 금융 상품과 보험 상품을 만들어 냈다. 그러한 대비책을 완전히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현재를 살아가는 일’을 소횰히 하면서까지 장래를 대비한다면 이는 본말전도일 뿐이다.


개미의 철학이 얼마나 인색하고, 아름다움을 추구하며 살아가는 베짱이를 우롱하는 비열한 심성에서 비롯되었는지를 생각하면 우리는 두 번 다시 그러한 독단에 속아 소중하고 ‘인간다운 삶’을 희생해서는 안 될 것이다.


우리는 하루하루의 생을 왜곡된 가치관에서 해방시켜 위축되지 말고 당당하게, 아름다움과 기쁨에 가득 차 살아가야 한다. 그것이 바로 ‘살아가는 의미’를 느낄 수 있는 인간다운 삶이다.

* * *


본 도서 정보는 우수 도서 홍보를 위해 저작권자로부터 정식인가를 얻어 도서의 내용 일부를 발췌 요약한 것으로, 저작권법에 의하여 저작권자의 정식인가 없이 무단전재, 무단복제 및 전송을 할 수 없으며, 원본 도서의 모든 출판권과 전송권은 저작권자에게 있음을 알려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