걷기 속 인문학

   
황용필
ǻ
샘솟는기쁨
   
13800
2017�� 10��



■ 책 소개
걷기에 관한 인문학적 성찰, 발로하는 사색 『걷기 속 인문학』. 저자는 매일 1만 보 걷기 마니아. 매달 한 번 밤길을 걷고, 두 달에 하루는 20Km를 걷는다. 교육학, 정치학, 목회학 학자로서 걷기에 관한 통섭, 인문학적 사유를 전하고 있다. 걷기는 세상의 이치를 읽어내는 일이며 원시적인 몸짓인 동시에 몸으로 하는 사색, 걷는 것이야말로 삶과 죽음이 만나고, 또 창조적 시선을 부여한다는 것이다.

 

■ 저자 황용필
저자 황용필은 걷기마니아, 칼럼니스트.
길이 좋아서 걷다가 매일 1만 보를 순례하고 있는 걷기 마니아다. 매달 한 번 아름다운 사람들과 별 헤는 밤길을 걷고, 두 달에 하루는 20Km를 걷는다. 현재 국민체육진흥공단 본부장이며 스포츠칼럼니스트, 한국대학생선교회(CCC) 및 스포츠계 안팎의 일터후원사역을 맡고 있다.

교육학(ED. M, 서울대)과 정치학(PH. D, 명지대)을 전공했으며, 웨스트민스터신학대학원에서 목회학(M. DIV)을 공부하고, 한국독립교회연합회(K AICAM)에서 2012년 목사안수를 받았다. 미국 듀크대학교 Visiting Scholar 시절, 노스캐롤라이나 한인장로교 회 교구장으로 섬겼으며, 데일카네기 리더과정(Dale Carnegie CEO Course), 한국체육대학교 최고위과정 (WPTM), 서울대학교 행정대학원에서 국가정책과정을 이수하였다.

 

25년 동안 몸담은 스포츠계의 경륜을 바탕으로 고려대 와 남서울대에서 ‘직장 윤리’와 ‘리더십’ 그리고 성균관 대학교에서 겸임교수로 ‘스포츠정치학’을 강의했다. 또한 청소년의 인문학과 미래비전을 위해 문화체육관광 부에서 주관하는 <인생 나눔 멘토>에서 도서 및 산간 벽지의 청소년들의 멘토링사역을 맡았고, 군 장병들의 병영문화를 위해 국방일보에 2년 간 재능기부 활동으로 [아빠의 병영일기]를 연재했으며, 여러 매체에 스포츠와 정치, 인문학을 함께 통섭하는 글을 쓰고 있다.

주요 저서는 『마이 라이프, 마이 스포츠』, 『세상이 청년에게 말하다』, 『최고를 넘어 완벽으로』 등이 있다.

 

■ 차례
프롤로그 ______ 이 책은 걷기 안내서가 아니다 | 009

 

제1부 _________ 호모비아토르 | 023
스핑크스의 수수께끼 | 025
태초에 걷기가 있었다 | 029
미친 듯한 단순함에 대하여 | 033
호모에렉투스 | 037
호모비아토르 | 042
므두셀라의 시간 | 047
시속 3마일의 도시 | 051
전설의 DNA | 055
워크 스코어 | 060
걷기의 사회적 자본 | 064

 

제2부 _________ 길 위의 묵상 | 071
리바운드 릴레이션십 | 073
길 위의 묵상 | 0277
생각을 모으는 느림 | 081
나홀로 걷기 | 085
아름다운 길, 빛나는 길 | 089
뜻밖의 발견 | 095
아직 더 갈 수 있다 | 100
길에서 길을 묻다 | 105
숙제 대신 축제 | 113
내버려두길 간청하는 좀머 씨 | 117
여백은 또 다른 길을 가리킨다 | 121
그리울 때 다시 찾기 | 124

 

제3부 _______때때로 걸으니 즐겁지 아니한가! | 129
걷기는 예식이다 | 131
신성한 삼위일체라고 불렀다 | 134
스포츠로서 걷기 | 138
너무 바빠서 걷습니다 | 142
매일 만 보 걷는 법 | 147
생체시계에 맞춘 걷기의 일상 | 151
눈물나게 살아야 한다는 것은 | 170
걷기의 발견 | 174
지금 그 길이 힐링로드 | 179
걷기 위해 몸을 아껴라 | 184
아내의 걸음걸이는 풍경 | 188
걷기의 미학, 집으로 가는 길 | 191
걸으라, 그리고 만나라 | 197

에필로그 ________ 걷기에 관한 질문 3가지 | 207




걷기 속 인문학


제1부 _________ 호모비아토르

호모비아토르

어느 곳이나 인간이 지닌 근원적인 열망과 향수를 잠재워 줄 영원한 고국은 없다. 이런 의미에서 인간은 여행자(homo viator)이다.


까를로 마짜의 저서 순례영성의 한 문장이다. 여기에 등장하는 호모비아토르(homo viator)는 길 가는 사람 혹은 명령 전달자, 사자(使者)를 뜻하는 viator에서 유래했으며, 걷는 인간을 뜻하는 또 하나의 인류 속성을 말하고 있다.


인간의 걷기는 두 가지 형태로 나뉜다. 걸어야 하는 자와 걷지 않아도 되는 자다. 고대 신분사회에서 걸어야 하는 자는 마차를 끄는 자였고, 걷지 않아도 되는 자는 마차를 타는 자였다. 여기에서 걸을 수밖에 없는 사람의 걷기는 원시적인 표상이다. 그러나 마차나 자동차를 탈 수 있는 이른바 유한계급의 걷기는 산책하는 낭만가객, 자동차 무게만큼 무거운 삶의 짐에서 잠시 벗어나고자 걷는다.


또 다른 부류가 있다. 먼 곳으로 순례를 떠나 이상스럽고 특별한 에피소드, 에로틱한 모험, 위험한 사건들을 안고 집으로 돌아오기도 한다. 그러나 걷기가 사색의 공유 방식에서 나아가 순례의 여정으로 확장하는 데에는 철학적 몽상가들과 구도자들의 공헌이 컸다.


루소는 두 번째 논문 인간 불평등 기원론을 집필할 당시, 매일 아침 생제르맹이나 불로뉴 숲을 찾곤 했다. 그는 벌레나 새들의 바스락거림, 나뭇잎 사이를 가르는 부드러운 바람 소리, 후드득 떨어지는 열매들의 작은 소음도 혼자 걷는 자에게 주어진 충만함으로 누렸을 것이다.


더 이상 사교계와 비평가들의 시선에 흔들림 없이 온종일 걸으면서 문화와 교육, 예술, 그리고 비평에 왜곡되지 않은 자연인 호모비아토르가 되기를 바랐다. 루소가 염원한 것은 단순히 길을 걷는 사람 혹은 방황하는 사람이 아니라 길 위에서 비로소 한 사람으로서 충실하고자 했을 것이다.


성장 인물, 바울(Paul)은 회심 이후 나머지 삶을 복음전도자로서 살았다. 소아시아 지방 갈리기아의 수도 다소에서 이스라엘 족속이며 베냐민지파, 히브리인 중에 히브리인으로 태어난 그는 바리새인 중에 바리새인이었다. 교회와 그리스도교도를 박해하는 데 누구보다 앞장섰던 열혈청년 사울은 어느 날 도시 다메섹의 길 한 가운데에서 신비한 빛을 체험하고 전도자 바울로 거듭난다. 바울의 선교 발자취를 더듬는 신학자들에 따르면, 20여 년간 10,000km를 걸어 다녔다고 하고, 혹자는 13,400마일에 이를 거라고 추정하기도 한다.


이에 비해 오늘날의 호모비아토르의 짐은 무겁지 않다. 손수 생계를 해결하면서 알지 못하는 곳에 복음을 전하는 것과는 달리 사색과 묵상을 위해 혼자 길을 걷는 순례자라고 해야 더 적절하다. 세상을 구하기 전에 나라를 구하고, 마을을 구하고, 가정을 살리기 전에 나를 바로 세워야 한다면, 사색으로서의 호모비아토르에게 걷기는 가장 기본적인 활동이다.


시속 3마일의 도시

자전거와 보행자들에게 최적의 도시, 덴마크의 수도 코펜하겐을 시속 3마일의 도시라고 부른다. 이에 기여한 덴마크 도시공학자 얀 겔(Jan Gehl)이 이룩한 위대한 실험(The Human Scale)의 산물이기도 하다.


속도는 인체의 감각이다. 어떤 규모든지 세부사항을 살펴보면 대부분 시속 3마일, 즉 5km의 속도로 움직이면서 주변을 바라볼 때 가장 아름답게 보인다. 다시 말하면, 스치는 풍경을 달리면서 보는 것이 아니라 걸으면서 바라보는 속도를 말한다. 시속 3마일은 평균 사람들이 걷는 속도다.


눈 깜짝할 사이에 저만큼 달리는 것과 천천히 걷는다는 것을 속도(시속)로 비교할 수 있겠으나, 한편 비교할 수 없는 것이 시간이다. 군대에 면회 온 애인과 보내는 시간과 한여름 유격 훈련으로 보내는 시간은 결코 비교되지 않는다. 시간은 쏜살같이 달린다고 했다. 동양의 고전장자의 지북유(知北遊)에는 백구과극(白駒過隙)이란 말이 나온다. 사람이 하늘과 땅 사이에 사는 것은 흰 말이 달려가는 것을 문틈으로 보는 것처럼 순식간이다라는 뜻이다. 준마를 살짝 열린 문틈으로 보는 것은 문자 그대로 찰나(刹那), 즉 눈 깜짝할 정도의 시간이다. 이처럼 빠른 순간 다음에 무엇을 하느냐에 따라 전말이 달라진다.


자전거를 금방 따라잡을 듯한 기세로 건강하게 파워워킹하는 사람이나 북유럽의 노르딕 워킹(nordic walking)을 하는 중년의 여성도 삶의 활력을 주기도 한다. 하지만 나는 해질녘 산책길을 시속 3마일의 속도로 걷기를 즐긴다. 그 길에서 만나는 싱그러운 잎새, 뉘엿뉘엿 산마루에 걸쳐 있는 석양, 마을 굴뚝에 밥 짓는 연기는 빠른 속도와는 다른 풍경이지만 풍성한 시간이 주어지지 않겠는가.


시속 3마일의 속도, 걷기는 일상의 모습으로 어떤 신발이든지 어떤 옷차림이라도 상관없이 주어진다는 점에서 자랑할 만하다.



제2부 _________ 길 위의 묵상

길 위의 묵상

묵상은 또 다른 차원의 생각이다. 대개의 생각을 두뇌활동이라고 한다면 묵상은 마치 음식을 되새김하듯 머리뿐만 아니라 오장육부와 신체에 이르기까지 온몸으로 하는 생각활동이다. 이 말의 히브리 원어는 수아로 산책하다, 기도하다, 소리 내어 울다, 신음하다 등으로 번역되고 있다. 묵상과 산책, 그리고 기도는 같은 맥락이라는 의미다.


묵상 혹은 생각한다는 또 다른 히브리어로 샤아르(Shaar)는 성으로 들어오는 사람을 성문 위에서 지켜본다는 의미이며, 성문 안으로 들어가는 나의 모습을 제3자의 눈으로 바라본다는 의미다.


참다운 나를 발견하는 것이 종교의 원초적 책무라면, 묵상은 자기 자신에게 온전히 집중해 다른 사람의 처지에서 나를 보는 것이며, 나로부터 빠져나와 다른 내가 나를 관조하는 영적 활동이다. 그것이 산책, 걷기와 뿌리가 같다는 것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걷기는 시간과 장소에 따라 우리에게 자유와 창의성 그리고 카리스마를 선물하는 또 하나의 은혜의 활동이다. 그러므로 걷는다는 것은 길 위의 묵상이다. 대략 두 갈래에서 안팎으로 작용하는 영성 활동이기도 하다. 내면으로 파고들라치면 성찰이고 밖으로 표현하면 공감이며, 성찰은 자기 마음 안을(intro) 반성하고 살피는 것(spection)이다.


구체적인 잘못이나 실수를 저지른 후의 반성을 넘어 성찰은 언행이나 마음으로 지은 죄를 반성하는 것은 물론 언행에 부족함이 없는지 찬찬히 돌이켜 보는 것을 말한다. 수도자나 구도자들은 내면적 성찰과 자각에 더 정진할 수밖에 없다. 이에 반해 공감은 밖으로 표현되는 것으로 감정을 타인과 공유하는 것이다. 또한 고통(passion)을 같이(com)하는 컴패션(compassion), 즉 이타적 돌봄이기도 하다.


문장에 파란이 없으면 여인에게 곡선이 없는 것과 같고, 소리에 꺾임이 없으면 가슴을 때리는 구성짐은 덜하다고 하지 않던가. 걷기란 오로지 신체 수단에만 몸을 맡긴 채 세상과 교통하려는 원시적인 몸짓이나 공간의 이동, 기분전환을 넘어 생각의 흐름이자 또 다른 나와 타인의 발견이다.


묵상이란 영어 meditation의 라틴어 메디켈루스라는 말에서 유래한 단어이며 약(medicine)이란 말과 같은 뿌리다. 약이 몸 안으로 들어와 혈관을 통해 온몸에 퍼져 약효를 나타내듯이 묵상 역시 어떤 한 생각이나 주제가 속마음으로 들어가서 영향을 미치는 것을 말한다.


하지만 묵상이라는 영어는 devotion이 더 맘에 와 닿는다. 그 어원은 de(away or off) + ion(suffix)로서 접두사의 de의 의미가 보통 분리를 뜻하는 off나 away로 해석되지만 여기서는 Deos, 즉 하나님의 의미로 확산하여 신의 목소리대로 행하다라는 깊은 열심을 품고 있는 말이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devotion은 타인을 생각하며 정신적으로 배려하는 헌신인 동시에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와 헌신의 마음가짐이다.


내버려두길 간청하는 좀머 씨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누군가를 향한 인사인지 모를 굿모닝 인사는 애절하다. 이런 경우 가볍게 맞장구를 쳐주는 여유는 나이 덕분일 것이다. 지긋한 노인은 나보다 더 큰소리로 반갑다며 응대한다. 그 몸짓은 파킨슨 치료의 한 방법이겠거니 싶을 만큼 노인의 몸은 부자연스러워 보인다. 불편한 몸짓으로 어눌한 인사로 응대하는 노인의 모습은 무표정한 우리를 향한 경종이기도 하다.


마음의 문을 잠그고 마스크로 얼굴 대부분을 가린 채 당당하게 걷는 나, 피리를 불어도 춤을 추지 않고, 슬피 울어도 가슴을 치지 않는 우리, 이제 걷는 길에 서로 인사를 나누며 안부를 건네자. 길 위에서 힘겨운 사람과 마주치면 가볍게 목례하자.


파트리크 쥐스킨트의 소설 좀머 씨 이야기의 주인공은 종일 걷는 남자, 좀머 씨다. 세상으로부터 격리되고 싶은 아저씨, 그는 이른 아침부터 저녁 늦게까지 멀리 걷고 오래 걸어서 사방 60km 내 그를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다. 그의 이름 좀머(Sommer)는 여름이라는 뜻으로 나와 좀머 씨의 첫 만남이 어느 여름날 오후에 이루어졌다는 데에서 비롯된 것이리라. 어쩌면 동화적인 천진한 어린아이 나와 별난 어른 좀머 씨의 삶을 통해 산다는 것과 성장한다는 것에 대해 묻고 있는 것이다.


그러다 죽겠어요!


다른 말은 들은 척도 하지 않던 좀머 씨가 이 한마디에 우뚝 멈춰 선 이유는 무엇일까? 몸이 빳빳하게 굳어진 듯하고 공포에 질린 커다란 눈동자까지, 마침내 좀머 씨는 호두나무 지팡이로 땅바닥을 여러 번 치면서 소리친다.


그러니 나를 좀 제발 그냥 놔두시오!


좀머 씨가 쉬지 않고 걷는 이유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일지도 모른다. 또는 운명, 그 모든 것에서 도망치듯 걷고 또 걷는다. 작가의 의도가 어떠하든 내게 좀머 씨는 남다르다. 삶에서 도망치듯 걷는 좀머 씨, 살아내느라고 분주하게 걷는 우리들, 어떤 차이가 있는 걸까. 게다가 좀머 씨는 제발 내버려두길 간청하고 있다.


내가 잘못되기를 바라는 그런 모든 것들에게 의리를 지킬 필요가 무엇이란 말인가? 이런 세상이 나와 무슨 상관이 있단 말인가? 그토록 비열한 세상에서 노력하며 살 필요가 없지 않겠는가? 나 말고 다른 사람들이나 그런 못된 악에 질식해 버리도록 두는 편이 더 낫지 않겠는가? 그런 사람들이나 잘 먹고 잘 해보라지! 나를 포함시키지는 말고 말이다! 나는 앞으로는 결코 그 사람들이랑 같이 어울리지 않으리라! 이 세상에 작별을 고하리라!


그의 외침은 사람들 속에서 외롭고 고단하게 살다간 사람들의 목소리일지도 모른다. 다정한 사람들의 초대를 기다리다가 지친 목소리, 그러나 그런 게 아니다. 아침햇살의 빛나는 초대, 청량하게 부는 소슬바람이 묻는 안부에 충실히 감사하다고 답례하자. 식탁 위에 모닝커피가 행운을 가져다 줄 것이다.



제3부 _______때때로 걸으니 즐겁지 아니한가!

스포츠로서 걷기

사람의 근육은 크게 2가지 근섬유로 구성되어 있다. 순간적으로 큰 힘을 낼 수 있는 속근섬유와 작은 힘이나 오랜 시간 활동하는 지근섬유가 그것이다. 단거리 경주와는 달리 몇 시간을 쉬지 않고 산에 오르거나 걸을 수 있는 것은 무의식중에 몸에서 지근섬유가 움직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건강을 염두에 두지 않고 걷기에 나선다면 그것은 필시 두 가지 이유일 것이다. 하나는 무언가를 더 깊이 생각하기 위해서인데, 사무실이나 가정에서는 혼자만의 깊은 사색을 하기 쉽지 않다. 그래서 무언가를 깊이 생각하기 위해 길을 걷는 것이다. 또 하나는 역설적이게 무언가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다. 갇힌 공간에 앉아 골똘히 고심하다보면, 마치 어린아이의 크리스마스 날의 꿈처럼 불필요하게 부풀어 오르기도 한다. 그래서 기분을 전환하기 위해서 걷기를 선택하기도 한다.


기분 전환을 위한 걷기는 일정한 거리를 정해 놓는 것이 좋다. 그냥 걷는 것도 한 방법이겠지만 목표를 설정하여 반드시 도달해야 하겠다고 생각한다면 마음가짐을 바꿔야 한다. 차라리 걷는 동작에 집중하는 것도 좋은데, 그럴 경우 내면의 긴장이 점차 사라지고 생각이 이완되기도 한다. 일종의 카타르시스, 정신적인 정화작용이다.


이 점에서 걷기는 스포츠의 요소를 지닌다. 역사적으로 스포츠는 활동지향적이었다. 미덕(virtue)이라는 단어를 살펴보면, 오늘날에는 이 단어를 윤리나 도덕적인 의미로 해석하지만, 로마제국시대에는 씩씩하다 혹은 훌륭한 스포츠 정신, 가치에 대한 존중 의식, 모든 방면에 걸친 고결한 행동을 의미했다.


운동할 때를 생각해보라. 생리적으로 혈액순환을 촉진시켜 다량의 엔돌핀이 생성되고 행복감을 느끼게 하는 신경전달물질 도파민이 분비되어 기분이 한결 달라지는 것이다. 걷기 같은 규칙적인 몸동작은 우리를 카타르시스하게 한다. 걷는 사람은 생각을 분산시키기에 많은 것을 거절할 수 있다. 불안과 신경질적인 사람이 가만히 앉아있다고 생각해보라. 아마 얼마 있지 않아 불안과 신경질이 그 사람을 잡아먹을 것이다.


걷는 동안 사람들은 근심에서 벗어날 수 있다. 운전할 때는 운전하지 않을 때보다 40여 가지 동작을 더 쓴다고 한다. 걷기에는 운전보다 더 많이 신경 쓸 필요는 없지만 운전에 비해 상대적으로 육체의 노동을 요구한다. 노동의 할애와 생각의 분산은 걷는 동안 근심으로부터 쉽게 벗어날 수 있다. 그래서 기분전환을 위해서라면 밖으로 나가는 것이다. 그곳에서 물론 담배도 피울 수 있고, 하늘을 멍하니 바라볼 수도 있으리라.


하지만 일단 현장을 떠나보라. 그러면 어디로 향할지를 생각할 것이고, 그리고 떠났다면 번민이나 고민이 따라 오지 못하게 부지런히 걷다보면 고민은 지쳐 떨궈지고 새로운 생각이 떠오를 것이다. 이쯤 되면 우리는 전환(shift)이라고 해도 무방하다.


지금 그 길이 힐링로드

누구나 마음에 둔 버킷리스트 힐링로드가 있을 것이다. 가령 산티아고 순례길(Camino de Santiago), 네팔의 안나푸르나 트래킹 코스, 뉴질랜드 밀포드 트랙 같은 곳 말이다. 그런데 의외로 사색의 길, 건강의 산책로는 늘 가던 그곳일 수 있다.


한번은 전남 화순의 세량지를 찾았을 때다. 아니 약속시간이 남아 시간을 때울 요량으로 한적한 곳을 찾다가 자동차 몇 대가 주차되었기에 우연히 들른 곳이다. 아담한 호수에 산과 하늘이 소담하게 어우러져 한 폭의 동양화를 연상케 했는데 며칠 지나서 한 일간지를 읽다가 깜짝 놀랐다. 그곳은 다름 아닌 미국 CNN의 CNN Go가 한국에서 꼭 가봐야 할 50곳으로 사진작가들에게는 명소라고 소개했다.


도시전문가로 유명한 캐나다의 찰스 몽고메리(Charles Montgomery)가 2015년 가을 우리나라를 찾았다. 그는 평소에 가장 가고 싶은 곳이 우리나라의 청계천이라고 했다. 청계천이라고? 때마침 사는 곳과 인접해 있어 청계천은 동네 하천이며 우리집 안마당과 같은 곳이다. 이런 곳이 먼 나라 이방인에게는 공간을 다시 사람에게 돌려주는 도시혁신의 모델이었던 것이다.


음식점이나 휴게실에서 볼 수 있는 흔한 모습 중 하나가 바로 곁에 있는 사람을 그대로 두고 먼 곳 사람과 사이버 대화를 하는 것이다. 각자 스마트폰을 꺼내 놓고 한 번도 만나지 않은 사이버 친구와 페이스북이나 카카오톡을 하는 것이다. 유명한 명소나 사람도 따지고 보면 주변에 너무 가까이 있음에도 먼 곳의 잘 알지도 못하는 곳을 동경하고 열망한다.


걷기 장소 역시 마찬가지다. 먼 나라, 한 번도 가보지 않은 미지의 땅보다 바로 옆에 보물이 있다. 매일 걷는 길도 항상 변한다. 날마다 달라지는 자연의 숨결이 그렇고, 만나는 사람들, 날아가는 철새들, 불어오는 바람, 하늘의 흰구름을 보라. 어제 모습은 간 곳 없고 지금의 풍경도 한 순간이다. 어떤 길이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길 위를 걷는 사람의 의식이 우선이다. 최고의 길은 먼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지금 걷고 있는 그 길이며 최고의 명소란 가보지 못한 곳이 아니라 늘 가던 그곳이다. 어떤 데냐 보다 그곳에 무엇을 담느냐가 곧 명소가 되는 것이다.


호모에렉투스, 아무리 인간이 직립보행의 존재라고 해도 걷는다는 것은 때론 불편한 놀이다. 불쑥 시위하는 자동차와 자전거, 불편한 도로, 넘어지지 않으려는 보행자의 몸놀림은 걷기의 도전이다. 그래서 걸을 때는 가벼운 휴대품 이외에 쾌활함, 용기 그리고 즐거운 마음을 가지고 떠나는 것이 좋다.


힐링과 사색의 발걸음이 되기 위해서는 발자국을 세지 말고 거리를 재지 말아야 한다. 흥겨워서 저절로 노래를 흥얼거리고 그 박자에 맞춰 걷다보면 전 세계를 돌아도 발은 피로하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진정으로 걷기를 즐기는 이는 거리를 재지 않는다. 그의 걸음은 농담과 재치, 기발한 상상력 분출이며 땅은 그의 유머와 익살을 자극하는 대상이 된다. 지금 걷는 그곳이 힐링로드이며 사생의 공간일 경우가 더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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